증언(證言) - [19] 유광렬(柳光烈) - 임의 날에, 나의 날에 10. 교정만 9개월 걸려 시비
1 1966년 4월 20일경 OK 교정을 냈는데 즉 9개월간 걸렸다. 동아출판사 공무국장은 교정 기간이 너무 오래 걸려 그에 대한 법정(法定) 배상(賠償)을 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것을 유 협회장과 함께 가서 잘 이해를 구하여 무사히 해결한 일은 내가 관계한 출판 역사 47년을 통하여 처음 겪은 사실이다.
2 1966년 5월 1일 원리강론은 드디어 햇볕을 보았고, 이어서 일본어로, 뒤미쳐 최원복 선생의 완역으로 영어본이 나왔고, 계속해서 독일어,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등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3 나는 뜻과 더불어 사노라고 내 타고난 직업, 문학활동을 옆에다 비켜놓고 있다. 하기는 처음부터 나는 그랬었다. 나는 해방 전에도 말을 배우면서부터 13살이 될 때까지 꼭 왕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랄 만큼 철저한 개인주의자였고 자기도취 가운데서 낮과 밤을 보냈다.
4 소학교를 졸업하고 15살 때부터 집안 식구를 위하고 집안을 알차게 키우는데 그렇게 열중할 수가 없었고 이웃과 친척을 위하는 일이라면 내 돈 써가면서 또 뛰어다니며 보살펴주곤 하였다.
5 해방이 되면서는 조국과 민족에 미쳐 거리를 걸으면 쓰레기 돌 등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면서 다녔고, 파여나간 돌다리가 있으면 아침 출근하다 말고 한참씩이나 애써 돌다리를 복구한 뒤, 내 뒤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신발을 벗지 않고 내가 놓은 돌을 성큼성큼 디디고 건너는 광경을 보면서 스스로 보람을 만끽하곤 하였다.
6 아침마다 집 근처에 있는 자동차 길을 50m씩 쓸고야 내 조국의 일부가 깨끗해진 걸 실감하곤 하였으며, 중학교 1학년 때는 반장인데다 집도 가까워 학생들을 다 돌려보내고 밤 11시가 지나도록 책상을 앞뒤로 옮기면서 하는 소제를 꼬박 1년간 혼자 하기도 했었던 나였다.
7 입교 후에도 꾀 약은 후배가 휘파람을 불고 돌아가는 속에서 빠르면 빠른 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꾸역꾸역 청파동 예배당 마루를 매일 아침 걸레질하며 살았다.(더 많은 수고를 한 이는 이수경 씨 등 허다하지만)
8 그리고 원리 시험은 1회부터 치러 떨어지고 2회도 떨어지고 3회에 겨우 붙었고, 전도사 수련회엔 1회부터 참가하여 우수하지 못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남처럼 시험도 수련도 명예 합격자나 혹은 인정 합격자가 될 생각은 꿈에도 안 해 봤다.
9 27년간 문화부장으로 뛰었지만 어떤 상(賞)도 한 가지 타보지 못한 범용(凡庸)이었고, 남들은 2년이면 마치는 대학원을 만 20년 걸려 나오는 지진아(遲進兒)였다. 그러니 어느 사이에 남 모양으로 문학활동인들 제대로 하였겠느냐.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