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사지 폐사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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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축 2리(원방축) 마을 뒤에는 '방축리 성터' 를 끼고 여염리 '성두(성머리)' 마을이 있다. 또 마을 앞에는 봉미산이 있는데 이 곳 기슭에는 고려시대 창건되었다는 방축리 사지(현 서천사)가 있다.
절이 보유한 기록에 의하면 서천사는 1352년 나옹화상 창건하였으며, 조선이 건국한 뒤에는 태조가 죽은 군사들의 위령제를 지냈다고 한다.
나옹(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으로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 분은 여주 신륵사를 비롯하여 경기남부 지역의 많은 절을 창건 또는 중창하였기 때문에 나옹스님이 활동하던 1352년에 절이 창건되었다는 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서천사는 창건과정보다도 임진왜란 당시 사명당 유정이 승병을 이끌고 이곳에 주둔했었다는 사실과 이괄의 난 때 전소되어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더 관심을 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사명당은 18세의 이른 나이에 승과에 합격하였고, 32세에는 서산대사 휴정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49세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스승 휴정의 분부를 받들어 승병을 이끌고 많은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그랬던 유정이 방축리까지 승병을 이끌고 들어와 주둔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평택지방이 삼남대로와 충청대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여서 왜군이나 조ㆍ명 연합군이 수시로 오르내렸고, 정유재란 때는 소사벌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사실을 감안할 때 허무맹랑한 주장은 아니다.
또 서천사의 폐사에 이괄의 난이 관련 있다는 주장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괄은 인조반정의 최고 공신이면서도 논공행상에서 2등에 녹선되었고, 이를 두려워한 김류 등 반정공신들이 모함하여 죽이여 하는 것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는 한때 군대를 이끌고 남진을 거듭하여 수도 한양까지 점령하였지만 경기도 광주부근에서 관군에게 패한 뒤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서천사가 이괄의 난 때 불에 탔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우리가 이괄의 난을 잘못 알고 있거나, 아니면 잘못 알려진 내용이거나 둘 중에 하나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