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다가 울컥’] 종태는 아주 눈치가 빨랐고, 귀신같은 녀석이었다. 종태 뒤만 따라다니면 먹을 게 생겼고 용돈도 챙길 수 있었다. 내가 처음 감자탕을 먹어본 것도 녀석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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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탕에는 흔히 등뼈만 넣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목뼈도 들어간다. 목뼈에 붙은 살점이 있는데 살살 녹아 ‘보들살’이라고 한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인생은 낯선 여행지의 식당 메뉴 같은 거라고 했다. 메뉴판에 적힌 것과 달리 뭐가 나올지 모른다고. 우리는 보통 ‘꼬였다’고 했다. 인생 꼬였네. 군대 생활 꼬였네. 회사 생활 꼬였네. 꼬인 줄을 풀다 보면 어느새 삶은 풀 수 없는 실타래 같은 거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감자탕을 한 그릇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그 꼬인 인생들을 생각하면서.
종태는 아주 눈치가 빨랐고, 귀신같은 녀석이었다. 종태 뒤만 따라다니면 먹을 게 생겼고 용돈도 챙길 수 있었다. 중학생 때였는데, 우리는 이미 성인영화를 섭렵하고 있었다. 종로 우미관 3층의 개구멍을 종태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YMCA 뒤편에 우미관이 있었는데, 종로 주먹이자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김두한이 출몰하던 그 골목 맞다. 우미관 건물 뒤편에 높직한 나선형 철 계단이 있었다. 아마도 비상대피용이었을 것이다. 열쇠로 잠겨 있던 철 계단에 매달려 몇 번 몸에 반동을 주어 거꾸로 계단봉 사이로 다리부터 집어넣으면 작은 중학생 몸이라 계단 안쪽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서너 명이 매달려 까만 교복을 입고 몸에 반동을 주어 철봉이라도 타는 것 같은 장면이라니. 그렇게 올라서면 3층께에는 ‘차기작’을 작업하는 간판실이 있었다. 으음, 다음 영화는 이소룡이군. 그때는 단관 개봉이었고 재개봉관이던 우미관은 대략 2~3주 주기로 영화가 바뀌었던 것 같다. 개봉관, 재개봉관, 삼봉관을 나누는 기준 중 하나는 간판의 그림 수준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주인공이 실제와 얼마나 닮았나 하는 것이었다. 우미관은 재개봉관이니 그림 실력이 좀 떨어져야 맞다. 한데 종태의 말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단성사 그리던 화백님이야. 그쪽과 사이가 안 좋아서 오셨어. 실력은 최고지.”
녀석은 아주 우미관 직원처럼 말했다. 개구멍 직원 주제에. 종태는 매점 여직원 누나도 알았다. 어디서 구한 여성지 같은 걸 주고 오징어를 얻어먹었다. 그때 우미관에서 영화를 많이 보았다. 당대 최고의 배우는 김추련이었다. 원미경이 가장 뜨는 여배우였던 걸로 기억한다. 김추련·원미경이 주연이었다. 당연히 제목은 기억이 안 나고 원미경의 사소한 노출신과 김추련의 찌푸린 이마(그게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만 생생하다. 그 시절 최고로 화끈했던 김호선 감독이 연출했다. 어느 섬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려는 찰나가 딱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니까 찰나다. 더 이상의 진행은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시대였고, 풍속 검열의 기준이었다. 주인공들이 입술을 포개면 암전, 그다음 장면은 남자 주인공이 러닝셔츠를 입고 주전자 물을 마시는 걸 찍는 게 고작이었다.
아, 코미디언 이주일의 ‘평양맨발’ 시리즈도 거의 우미관에서 보았던 것 같다. 이주일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영화가 한 편 걸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다른 극장에 또 영화가 개봉했다. 제목도 비슷했다. 줄거리야 기억이 안 난다. 이주일이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은 일단 웃었다. 오징어를 씹으면서. 이주일 선생님, 그 위에서는 겹치기 안 해도 되고 좀 편하게 지내십니까.
이주일을 실제로 본 적도 있다. 무교동에 ‘초원의 집’이라는 극장식 디너쇼 하는 홀을 운영했는데 우리 누나가 거기서 돈가스를 사준다고 해서 따라갔다. 입구에서 ‘뺀찌’를 당했다. 미성년자는 출입금지였다. 돈가스가 나오기는 했는데, 교복 입은 애가 들어가는 그런 곳이 아니라 성인쇼였다. 캉캉춤 걸도 나오고, 이주일 같은 양반들이 걸쭉한 와이담을 스탠딩으로 하는 그런. 종태는 이런 곳도 알았다. 웨이터 형과 알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바닥 고기가 진짜야”
내가 처음 감자탕을 먹어본 것도 녀석 덕이었다. 밤 열 시가 다 되어 용산역까지 갔다. 영어의 과거분사 활용과 추측·가정의 조동사를 배워야 할 때 우리는 거리에 있었다. 배가 고팠다. 종태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선수였다. 낙원동의 300원짜리 해장국집(유명한 노포로 소문난 집이 그때도 있었다)에도 갔다. 일하는 사람에게 우미관 초대권을 구해서 갖다주면 양이 많아졌다. 용산역의 밤은 휘황했다. 그 거리 앞에는 감자탕집이 두엇 있었다. 그때는 업소용 커다란 22공탄 연탄을 화력 좋게 때서 그 위에 큼직한 양은 함지를 척 올려놓았는데, 맛있는 양념의 돼지뼈와 감자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지나가며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종태는 그런 집도 용하게 알았다.
“이런 데는 끝날 때 와야 돼. 그래야 고기를 많이 줘.”
종태는 어디서 구했는지 신문 몇 부를 겨드랑이에 끼고 들어갔다. 가난한 고학생 신문팔이 소년 코스프레였다. 사람들의 동정을 얻는 데 그만한 게 없었다. 과연 감자탕(그때는 감자국이라고 불렀다) 뚝배기가 하나씩 놓이는데, 뼈는 별로 없고 고기가 수북했다. 밤 12시 통금이 있던 때라 얼른 다 팔고 가야 하는 게 주인 처지다.
감자탕은 오래 끓여서 판다. 시간이 흐를수록 뼈에 붙은 고기 조각이 함지 바닥으로 잠수한다. 팔 때 그걸 가늠해서 요령껏 국자질을 하는데, 그래도 부스러기는 다 올려 풀 수 없다. 종태는 그걸 노리는 것이었다. 타이밍의 귀신이었다. 신문을 옆구리에 낀 검은 가쿠란 교복 입은 소년 둘이 야밤에 감자국집에 왔다고 상상해보라. 아무리 야박한 주인이라도 국자질이 어찌 얕겠는가. 돼지기름에 고춧가루가 풀려서 시뻘건 고추기름 같은 게 뚝배기 위로 철철 넘쳤고, 돼지 장골이 하나씩 턱 하니 뚝배기에 꽂혔다. 골수까지 빨아서 먹었다. TV 드라마 〈말괄량이 삐삐〉에서 ‘식인종의 왕’ 삐삐 아버지가 하듯이(바이킹 장면이 가끔 나왔다. 스웨덴 드라마여서 그랬던 것 같다).
“찬일아. 바닥 고기가 진짜야. 아줌마가 기분이 좋으면 보들살도 준다.” 보들살이란 아는 사람만 먹는 것이라고 했다. 감자탕에는 등뼈만 넣는다고 알고 있지만 목뼈도 들어간다, 목뼈에 붙은 살점이 있는데 살살 녹는다, 그래서 보들살이라고 한다. 종태의 설명이었다.
그때 소주도 배웠다. 주황색 플라스틱 컵에 25° 진로를 딱 반 병 채울 수 있었다. 내가 지금도 영어의 추측·가정 조동사를 모르는 건 그 소주 때문이다. 아니, 감자탕의 보들살 때문이다.
종태를 다시 만난 건 창신동에서였다. 창신동 일대가 거대한 미싱 임가공 지대로 바뀐 후였다. 걷는데, 뒤에서 윙윙 거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들렸다. 좁은 길 비키라는 줄 알고 벽으로 붙어 섰더니 누가 등을 퍽 쳤다. 헬멧을 썼으니 누군지 몰랐다. 종태였다. 헬멧을 벗는데 한겨울이라 머리에서 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애쓰고 사는구나. 창신동 시장의 어느 홍어집에 앉았다. 창신동을 걷다 보면 ‘나나인치, 큐큐’ 뭐 그런 암호 같은 말이 써 있는 작은 가게가 많다. 우리가 사 입는 옷도 이런 곳에서 만든다고 했다.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어서 한 집은 한 가공만 한다고 했다. 단춧구멍만 미싱질 하는 집, 깃만 만드는 집, 주름만 넣는 집. 그걸 객공인가 뭔가 한다는데, 이렇게 분업하는 작업장 물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리어카로 그 후에는 빠르고 정확한 오토바이로. 어떻게든 다 먹고사는 이 세상. 그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활력 하면 종태였으니까. 이 동네 오토바이는 음식 배달은 별로 없다. 대신 커다란 비닐 짐을 싣고 다닌다. 종태도 그 사이에 있다.
“집사람이 미싱사야. 나는 이거 하고. 애는 하나야.” 취해서 종태와 무슨 이야기를 더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딱 하나만은 선명하다.
“그때 우미관에 갔던 건 영사기사를 해보고 싶어서였지. 늬들한테 얘기는 안 했지만. 늬들이 영화 볼 때 나는 촤르륵 돌아가는 영사기 구멍을 보고 있었어. 하기야 열 번도 더 본 영화였으니까 스크린은 볼 필요도 없었지. 흐흐.” 그가 살았던 시네마천국은 이제 없다. 인생의 많은 게 그렇듯이. 희미해지고 헐리고 사라진다. 창신동 시장에서 감자탕을 같이 못 먹은 게 아쉬웠다. 오래 우린 이야기들이 많이 남았는데.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