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제 5장 색(色)의 관문(關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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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봉(太室峯).
소실봉(少室峯)과 함께 숭산이대봉(崇山二大峯)으로 알려진 수려
웅장한 봉우리였다.
초여름이다. 울창한 수목이 태실봉 전체를 푸르게 뒤덮고 있었다.
하남(河南)의 여름이 힘차게 다가온 것이다.
태실봉 정상에 한 영준한 청년중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는 바로
현수였다.
완전한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임풍옥수(臨風玉樹), 곧 바람 앞에
선 옥나무와 같이 비범하고 준미했다.
현수는 물같이 고요하고 신비한 눈으로 봉우리 아래의 선경과 수
해(水海)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이틀 후면 삼십육 관 중 가장 험난한 이 관을 향한 이백 일
수련에 들어간다. 이 관은 험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그동안
통과한 삼십사 관 모두를 합친 것보다 힘들다고 그랬지.'
현수의 표정은 굳은 의지로 엄숙해졌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다, 오직 이제 기다릴 뿐. 남은 이 관을 기필
코 통과하여 세 분 성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수는 흠칫했으나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한가닥 여인(女人)의
음성이 바로 가까이에서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여봐요. 스님, 말 좀 묻겠어요."
목소리.......
그것은 한번 들으면 영원히 잊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매혹적이었
다. 아니, 거의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답고 고혹적인 음성이
었다.
현수의 승포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울러 그는 이렇게 생각했
다.
'이런 목소리의 여인이라면 모습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의 눈은 곧 한 곳에서 못 박힌 듯 정지
되었다.
백의소녀(白衣少女).
그녀는 약 십팔구 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그야말로 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소녀였다. 특히 머리를 궁장으로 가볍게 틀어올려 학
같이 곱게 뻗은 목선이 유난히 아름답게 돋보이고 있었다.
현수는 그녀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내심 부르짖었다.
'아름답다.......'
백의소녀는 묘한 양면성(兩面性)을 지닌 미녀중의 미녀였다.
요염절륜함과 순진무구함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러
한 미녀란 사실 보기 드문 형이었다. 무릇 요염함이란 욕정(慾情)
을 불러일으키는 사요(邪妖)함을 말하는 것이요, 순진무구함은 세
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결성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를 테면 이 두
가지의 성질은 전혀 상반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미녀를 두고 양면성을 느낄 수 있다니 이는 매우 불가
사의한 일이었다.
"아......."
한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탄성을 발한 것은 현수가 아니라 백의소녀였다. 그녀의 꽃
잎같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더니 한동안 다물려지지 않았
다.
그녀 역시 현수의 얼굴을 본 순간 크게 놀란 듯 했다.
옥(玉)으로 깎아 만든 듯 섬세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비록 승
포를 입고 있다고는 하나 사실 하후성의 얼굴은 천하미남자(天下
美男子)의 풍모가 아닌가?
두 사람의 눈길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에 못 박힌 채 떠날 줄을 모
르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현수의 눈길은 금방 평정을 되찾고 무심(無心)해졌다. 황홀한 듯
백의소녀를 보던 그의 눈은 이내 나무나 돌을 보듯 담백해지고 만
것이었다.
백의소녀의 눈꼬리가 상큼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
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것이 반영되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고혹적
인 신비한 눈에서는 한 가닥 쓰린 곤혹이 스쳤다.
그러나 이 신비한 젊은 중에게 급격히 마음이 끌린 소녀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곧 순결무비하고 천진한 미소가 그녀의 아름다
운 얼굴에 떠올랐다.
그녀의 이러한 변화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그녀는 옥음으로 말했다.
"스님께서는 소림사의 제자이신가 보군요?"
현수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백의소녀는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쓸어본
뒤 다시 말했다.
"숭산(崇山)이 아름답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과
연 명불허전이군요."
현수가 다만 담담한 웃음을 짓자 백의소녀의 아름다운 눈에 이번
에는 요염한 기운이 떠올랐다. 현수는 땅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백의소녀는 교태롭게 말했다.
"스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아미타불... 말씀하시지요."
"저는 숭산이 초행이라 지리에 어두워요. 그러니 안내를 좀 해주
시겠어요."
현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현재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
히기 위해 천 일 수련을 하는 중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한가롭게
미녀의 길 안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거절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백의소녀의 눈을 본
순간 가슴이 크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백의소녀의 눈에서 신비로운 기운이 무형중에 흘러나와 그로 하여
금 거절을 할 수 없는 느낌을 준 것이었다.
마침내 현수는 응답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주."
"호호호... 고마와요, 스님."
백의소녀의 교태로운 웃음소리가 다시 그의 심금을 뒤흔들어 놓았
다.
"스님, 소녀의 이름은 백화미(白花美)예요. 스님의 법호는 어찌
되시나요?"
현수는 담담히 대답했다.
"소승은 현수(玄修)라고 합니다."
백의소녀, 즉 백화미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기이한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현정대사(玄正大師).
그는 현자(玄字) 항렬을 가지고 있는 소림의 고승으로 지객원주였
다. 그는 현 자 배분의 마지막 서열로써 대외적인 손님을 맞는 지
객원을 관장하고 있었다.
나이는 구순(九旬)으로 무공 또한 지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소림외가신공(少林外家神功)의 최고인 나한금불신공(羅漢金
佛神功)을 십이 성까지 터득하고 있어 그의 몸은 이미 창검(槍劍)
이 침입하지 못하는 금강지체였다.
현정대사는 지객원의 원방의 포단에 앉아 좌선하고 있었다.
"사숙님, 제자 정원(丁元)입니다."
들려오는 소리에 현정대사는 눈을 떴고 원방 밖에서 전언은 다시
이어졌다.
"한 분의 여시주께서 사숙님을 뵙자고 찾아 오셨습니다."
"여시주?"
현정대사의 하얗게 센 눈썹이 위로 솟는가 싶더니 깊은 눈에는 의
혹이 서렸다.
그는 곧 침중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노납을 만나자고 하더냐?"
"그것이... 꼭 사숙님을 뵈어야만 된다고......."
정원이 곤란한 듯 말을 흐리자 현정대사는 더 묻지 않고 몸을 일
으켰다.
"알았다. 물러가 있거라."
"네."
현정대사는 포단에서 일어서며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그가 들고 있던 염주
의 끈이 갑자기 툭 끊어지더니 백팔(百八)개의 염주알이 좌르르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것이!'
현정대사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웬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가슴
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선방(禪房).
그곳은 지객원에서 손님을 맞는 곳으로 넓은 탁자와 의자 등이 단
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 한 명의 중년부인이 탁자와 마주한
채 단정히 앉아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녀는 전신에 흑의(黑衣)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흑
의와는 대조적으로 희다못해 창백할 정도의 흰 얼굴에 용모는 찬
탄할 정도의 절색이었다.
실로 양귀비를 능가할 정도의 미부였던 것이다. 다만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얼음장같이 차가운 한기가 감돌고 있어 섬ㅉ한 느낌을
주었다.
흑의미부는 마치 그린 듯이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으나 손도 대지 않은 듯 찻잔 속에는 향차가 그
대로 담겨 있었다.
선방 안에 현정대사가 들어왔고 흑의미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
라보았다. 정통으로 그들의 눈길이 마주쳤으나 그녀의 눈은 얼음
같이 무심했다.
'고수(高手)다!'
현정대사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으며 가슴 한 구석이 진탕하는 느
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불문의 고승답게 조금도 그것을
내색치 않고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빈승을 찾아오셨습니까?"
흑의미부는 그를 쳐다보며 차갑고 오만하게 물었다.
"당신이 지객원주인 현정인가요?"
극히 오만무례한 말투였으나 현정대사는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답
했다.
"그렇습니다."
"호호호호... 나는 소림의 고승들이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크게 실망을 금치 못하겠군요!"
느닷없는 안하무인격의 말, 그것은 실상 소림 전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역시 현정대사의 정력(定力)은 대단했다. 그는 여전히 미
소지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빈승이 워낙 자질이 부족하여 여시주께서 실망하셨
나 보군요. 그러나 빈승 하나만으로 소림 전체를 평가함은 크나
큰 잘못이오."
그 말에 흑의미부의 두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내가 소림을 찾은 것은 한 사람을 만나보기 위해서요."
흑의미부는 싸늘하게 말했다.
"곡무현(曲武玄), 법호는 현오(玄悟)에요."
현정대사의 안색이 비로소 가볍게 변했다. 그는 낮게 불호를 외우
더니 물었다.
"여시주께 실례를 무릅쓰고 묻겠습니다. 현오사형과 무슨 관계이
신지?"
흑의미부는 또한 싸늘하게 반문했다.
"사사로운 일까지 대사께서 알아야 되나요?"
현정대사의 흰 눈썹이 일순 꿈틀했다.
"아미타불... 그것은 지객원주인 소승의 임무입니다."
흑의미부는 냉랭하게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대사, 이것을 좀 보시겠어요?"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 투명할 정도로 흰 섬섬옥수를 대더
니 살짝 눌렀다.
그러자 푸른 연기가 솟더니 찻잔은 탁자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깨끗하고 완벽하게 찻잔은 탁자와 평면을 이
루며 박혀 있었다.
현정대사의 흰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정녕 대단한 내공이다. 천산오목(天山烏木)으로 된 이 탁자는 굳
기가 쇠보다 더한 것인데 이토록 쉽게 찻잔을 박아 버리다니!'
현정대사는 합장했다.
"놀라운 솜씨입니다, 시주. 아미타불......."
흑의미부의 싸늘하나 요염한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대사께서도 이렇게 할 수 있나요?"
현정대사는 초탈한 미소를 지었다.
"빈승의 빈약한 재주로 어찌 그런 신기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흑의미부는 냉소 짓더니 일시지간 오른손 식지를 세워 현정대사의
가슴 현기혈을 찔러 왔다.
현정대사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살기(殺氣)가 너무 짙소이다."
현정대사는 곧장 우수(右手)를 뻗어 막았다.
팍!
흑의미부의 손가락과 현정대사의 손가락이 부딪쳤다. 그 순간 현
정대사는 손 전체가 얼어붙는 느낌에 안색이 급변했다.
'음.......'
싸늘한 기운이 온 몸을 응축시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최대 무공인 나한금불신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피부가 금빛으로 변했으며 한기는 곧 사라지고 팽팽한 형세가 이
루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다시 차츰 흑의미부의 손가락을 통해 싸늘
한 기류가 그의 장심(掌心)을 뚫고 밀려 들어왔다.
현정대사의 이마에 서서히 식은 땀이 맺혀가고 있었다. 그는 흡사
얼음구덩이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본신의 혈맥마저 차갑게 수축되기 시작하자 현정대사는 내
심 절망하여 부르짖었다.
'무, 무리다. 나의 힘으로는!'
흑의미부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마침내 손을 거두었고
현정대사는 멍해진 채 탄식하며 물었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 조금전 쓴 무공은 혹시 빙백마유공(氷魄
魔幽功)이 아니신지요?"
"호호호호... 안목만은 대단하군요!"
"아미타불......."
현정대사는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숙였으나 그의 안색은 어둡게
변해 있었다.
"정원(丁元)!"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밖을 향해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사숙님."
밖에서 응답이 들렸다.
"이분 여시주를 현오사형에게 안내해 드려라."
"네, 알겠습니다."
현정대사는 말을 마치자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흑의미부는 그를 힐끗 응시한 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고 밖에
서는 중년승려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에게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승을 따라 오십시오, 시주."
정원은 곧 흑의미부를 안내하여 지객원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선방에 있던 현정대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정초(丁草)!"
"네!"
오 순 가량의 중이 선방으로 들어왔고 현정대사는 그를 향해 침중
히 당부했다.
"천리신구(千里信鳩)를 날려 달마원의 현오사형께 조금 전의 일을
전해라."
정초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게 된 현정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었다.
"아미타불... 도대체 가슴이 이렇게 무거워짐은 무슨 이유인가?"
현정대사는 계속 불경을 외웠다.
현수(玄修).
그는 백의소녀 백화미와 녹음이 무성한 태실봉(太室峯)아래를 걷
고 있었다. 백화미의 몸에서 풍기는 야릇한 체향이 가까이 느껴지
자 현수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호호호... 스님!"
백화미는 교태롭게 부르며 아름다운 눈으로 현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일 스님이 중이 아니라면 중원에 큰 혼란이 올 거예요."
현수의 의아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머물렀다.
"호호호... 어떤 여인이든 당신을 보기만 하면 그 즉시 사랑에 빠
져 헤어 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그 말에 현수는 잠시 얼굴을 붉혔으나 곧 고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여시주, 얼굴이란 하나의 껍질에 불과한 것이오. 죽으면 썩어 한
줌의 흙이 되고 맙니다."
백화미는 허리를 움켜쥐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호... 그렇게 말하니 당신은 정말 득도한 고승같군요?"
현수는 고개를 숙이고 걸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이 태실봉은 상당히 험해 일반 여인은
결코 오를 수가 없는데.......'
그의 마음 속에는 점차 기이한 미녀 백화미에 대한 의구심이 차오
르고 있었다.
"아! 물소리....... 이곳에 폭포가 있군요."
쏴... 우르르릉!
아닌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지축을 울리듯 폭포수 떨어지는 음
향이 시원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폭포가 나옵니다. 상당히 아름다운
곳으로 그곳의 이름은 승불폭(昇佛瀑)이라 하며 소림의 불도들이
가끔 참선하기도 하는 곳입니다."
승불폭(昇佛瀑).
그곳은 바로 수년 전 현수가 입문하기 전에 잡념을 떨치기 위해
하루 밤낮을 참선한 곳이었다.
백화미는 활짝 웃었다.
"저에게 구경시켜 주시지 않겠어요?"
현수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우르르릉... 쏴-- 아!
승불폭.
부처가 득도하여 승천한다는 뜻을 지닌 거대한 폭포수.
자욱한 물안개가 주위 반 마장을 뒤덮고 있었고 거대한 물줄기가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내려 지축을 흔들었다.
그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백화미는 환성을 질렀다.
"아! 정말 멋지군요."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
라보았다. 백화미는 폭포 앞으로 나서며 명랑하게 말했다.
"스님,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줘요. 한참 걸었더니 몸에 땀이 났
어요. 이 시원한 물에서 목욕 좀 해야겠어요."
백화미는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 아니!"
현수가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백화미는 옷을 모두 벗
고 완전나체가 되고 말았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포말 속에 휘감긴 여인의 백옥(白玉)같은 전라
(全裸)....... 빙기옥골(氷肌玉骨)의 새하얀 피부가 금세 습기에
젖어 반들거렸다.
날개죽지같이 날렵하고 가냘픈 두 어깨, 가녀린 팔과 앞가슴에 마
치 복숭아처럼 깨끗하고 탐스럽게 열려 있는 젖가슴... 그리고 젖
가슴 정상에 달린 열매.......
잘록한 허리와 동그란 배, 배 한가운데 귀엽게 숨어있는 앙징스런
배꼽, 그 아래로 급격히 미끄러지며 펼쳐지는 신비한 여인의 비림
(秘林).......
대리석같은 두 다리는 살짝 벌려져 폭포의 비말에 젖고 있었고 칠
흑같은 흑발이 젖어 젖가슴과 등을 살풋이 가렸다.
진정 인간의 육신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일까?
요정(妖精).
백화미의 모습은 그대로 폭포수 속에 내려온 천상(天上)의 요정이
었다. 실로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아!"
현수는 충격을 받았다. 가슴을 거대한 쇠뭉치로 두들기는 듯한 소
리가 연신 들려왔다. 난생 처음 그는 여인의 나신을 본 것이었다.
그것도 천하절색 미인의 전라(全裸)를.......
현수의 눈은 힘껏 크게 떠져 백화미의 나신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
다.
그녀의 학같이 가는 목으로부터 흑발 사이에 숨은 젖가슴과 열매
를, 그리고 동그란 배와 한가운데 숨은 배꼽을, 또한 두 다리가
갈라지는 사이의 불타는 비림(秘林)을.......
이제껏 물처럼 잠잠하던 현수의 눈은 몹시 흔들렸고 그에 따라 그
의 승포자락도 눈에 띄게 떨렸다.
백화미(白花美).
그녀는 현수가 이제껏 쌓은 모든 정심(定心)을 송두리째 무너뜨리
고 있었다.
한편 소림사의 달마원(達摩院).
현오대사는 천리신구를 통해 전달된 쪽지를 읽으며 얼굴에 짙은
의혹을 담고 있었다.
'대체 누가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더구나 흑의미부라니.'
문득 현오대사의 안색이 변했다.
'혹시?'
그의 미간 사이의 홍점에 어두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선방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을 나서려
다 말고 현오대사는 흠칫 굳어지고 말았다.
문 앞에서 그의 사제이자 선좌원주(禪坐院主)인 현광대사가 기다
리고 서 있었던 것이었다.
현광대사는 현 자 항렬 중에서 가장 성격이 온유하고 침착한 인물
로 불심(佛心)이 매우 깊어 일찌기 선좌원을 맡고 있으며 현오와
는 가장 친분이 두터운 사이기도 했다.
더우기 나이가 올해로 백 세(百歲), 세사에 또한 이미 달관한 그
였다.
현오대사는 침중하게 물었다.
"현광사제, 웬일인가?"
"아미타불... 대사형, 정(情)이란 고해(苦海)요. 부디 그 여시주
를 만나지 마십시오."
현오는 그만 흠칫했다.
"그럼... 그녀가 맞는가?"
현광은 합장하며 말했다.
"육십 년이 흘렀지만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더군요."
현오대사의 고요하던 눈에 파랑이 크게 일었다.
"사제, 용서하게!"
그는 현광을 피해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현광은 더욱 바짝
다가서며 가로막았다.
"대사형, 이 사제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도저히 비켜드릴 수 없
습니다."
평소 그렇게도 온유하던 현광이었으나 이 순간만은 굳세고 완강하
기가 마치 강철신과도 같았다.
현오는 탄식했다.
"사제, 곡무현은 이미 육십 년 전에 죽었네.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은 단지 현오(玄悟)일 뿐이네."
현광은 그 말에 움찔하며 굳어졌고 현오대사는 묵묵히 불호를 외
우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대사형.......'
현광은 멍한 눈길로 사라져 가는 현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르르르릉... 쏴아아!
승불폭(昇佛瀑).
현수는 도저히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폭포수의 굉음
조차 지금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이 승불폭 아래의 넓은 연
못으로 향해져 있었다. 백화미, 그녀가 전라로 연못에서 인어처럼
유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수는 이제껏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었
다. 생전 처음 보는 여체(女體), 그것도 미녀의 전라가 유영하는
모습은 그에게 너무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전신의 혈맥이 팽창하면서 목
이 갈라지도록 갈증을 느끼게 하였다.
과거 그는 팔백 일의 수련 중 물 한모금 마시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렇게까지 목이 타지는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갈증과 함께 이상한 열기가 그의 전신을 휘
몰아치고 있었다.
백화미가 드디어 폭포수에서 밖으로 나왔다.
물에 젖은 흑발이 길게 앞으로 드리워져 백옥같은 나신을 부분적
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출되어 있는 나머지 부분의 유혹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옥같은 피부에는 물방울이 선연하게 돋아 있는가 하면 젖어 붙은
머리칼 사이로 육봉과 유두가 이상한 빛을 발하며 돌출되어 있었
던 것이다.
다만 어찌 된 셈인지 백화미의 나신에서는 조금도 음탕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너무도 깨끗하고 순진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때문이
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매력이야말로 무서운 흡입력으로 현수를 빨아들이
고 있었다. 차라리 단순한 음심(淫心)이라면 굳은 정심(定心)으로
가볍게 떨쳐 버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현수는 점점 더 심해지는 갈증으로 정신마저 혼미해질 지경이었
다.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화미는 어깨를 움츠리며 오
들오들 떨었다.
"아! 산중(山中)이라 그런지 매우 춥군요!"
벗어놓았던 그녀의 백의는 이미 폭포의 비말에 몽땅 젖어 있었다.
현수는 문득 그녀가 애처롭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다가
갔다.
"아미타불... 소승의 옷이라도 걸치십시오."
그가 승포를 벗어 주자 백화미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와요, 스님. 당신은 무척 친절하시군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승포를 받아 걸치더니 크고 아름다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 근처에 혹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옷을 말릴 만한 곳은 없나
요?"
현수는 마음이 떨렸다.
'이 여인의 뜻은 대체.......'
그는 곧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백화미의 눈동자는 티없이 순수하고 맑기만 할 뿐 도저히
욕념(欲念) 따위를 지닌 탕녀의 눈빛이 아니었다.
현수는 눈을 감으며 자책했다.
'부끄럽다, 사심(邪心)을 가졌던 것만도 수치스럽거늘!'
이어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이곳에서 얼마만 가면 조그만 동굴이 있습니다."
"그래요? 좀 안내해 주시겠어요?"
현수는 이번에도 또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소녀 백화미에게 빨려
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불존의 자비(慈悲)일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단지 알몸에 넓은 승포만 걸친 백화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에서는 강하고 야릇한 육향이
풍겼고 승포 아래로 미끈한 두 다리가 사뿐사뿐 움직이는 것이 보
였다. 그의 눈길은 어느덧 어쩔 수 없이 백화미의 늘씬한 두 다리
에서 멎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시금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현오대사(玄悟大師).
그의 고요한 두 눈은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흑
의중년 미부가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현오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의 깊이 가라앉았던 마음 속에
격정이 일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곡무현, 육십 년 만이군요."
흑의미부의 음성은 차디찼으나 가늘게 떨고 있었다. 현오는 다시
눈을 떴고 그의 눈에는 아련한 비애가 떠올랐다.
현오는 침중하게 합장하며 말했다.
"여시주, 곡무현은 이미 죽었소. 소승은 현오(玄悟)라 하오."
그 말에 흑의미부는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무현(武玄), 당신은 육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
군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이 단혜령(段慧令)이 들어갈 공간이 조
금도 없단 말인가요?"
현오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쳐갔다.
"여시주, 과거는 이미 지났소. 모두 사라진 일이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흑의미부 단혜령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빛에 사악한 빛이 스쳤다.
그녀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무현! 당신은 이것을 기억하시죠?"
그것은 끝이 절반 가량 부러져 나간 은색의 소도(小刀)로, 손잡이
부분에 주사빛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단심도(丹心刀)>
그것을 본 현오의 몸이 떨렸다.
"단... 심... 도......."
"그래요! 단심도예요. 저는 팔십 년 전 애정의 표시로 이 단심도
를 당신에게 주었고, 당신은 그 확인으로 단심도를 반으로 잘라
서로 한 쪽씩 보관하기로 했었지요."
현오의 수양 깊은 얼굴이 마구 경련을 일으켰다.
"그 후 이십 년이 흐르는 동안에 우리는 맺어지기는 커녕, 급기야
정사의 대립을 이유로 나의 아버님마저 당신 손에 죽어야 했지
요."
단혜령의 창백한 얼굴에는 점차 무서운 증오와 살기가 짙어졌다.
"아미타불......."
현오의 흰 눈썹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고 단혜령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그것을 문제 삼고자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까요."
"으음."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당신은 아직도 단심도의 한 조각을 갖고
계시나요?"
현오대사는 격동을 금치 못하였다. 그의 눈에는 온통 회한, 슬픔,
후회, 번민 등이 어지럽게 교차되었다.
그럼에도 현오대사는 합장을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미타불... 육십 년 전에 이미 버렸소."
"버렸... 다고 했나요? 지금?"
단혜령의 안색은 아예 백짓장처럼 질리고 있었다.
동굴(洞窟).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을 마주보며 두 남녀가 벽에 등을 나란히 기대고 앉아 있
었다. 현수와 백화미, 바로 그들이었다.
백화미는 현수의 승포를 걸친 채 불을 쬐고 있었다. 불빛에 어른
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요염절륜의 극치였으며 혼백을 빨
아들일 듯 뇌쇄적이었다.
그러나 살풋이 미소 짓고 있는 두 눈빛은 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따금씩 몸을 숙여 불을 지필 때마다 그녀가 입은 넓은 승포자락
사이로 완전히 드러나곤 하는 젖가슴이 도리어 무색할 지경이었
다.
현수는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이 여시주의 정체는 무엇인가.'
현수는 어찌된 영문인지 평소의 지혜로움도 모두 사라지고 멍한
상태였다. 도대체가 오늘의 일이 꿈만 같을 뿐 스스로조차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화미가 살며시 그의 어깨에 교구를 기대오자 싱그럽고 강렬한
처녀의 체향이 물씬 풍겼다.
"스님, 당신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백화미는 동그란 턱을 들어 현수의 코 밑에 바짝 들이대며 묻고
있었다.
"어째서 스님은 중이 되었어요?"
현수의 얼굴에 그늘이 덮였다.
"그것은... 소승도 모릅니다."
백화미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자신이 중이면서 중이 된 이
유를 모르다니."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백화미는 그윽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낮게 탄식
을 발했다.
"아아... 당신이 만약 중이 아니라면......."
현수는 백화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불현듯 환속(還俗)하고 싶
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
그녀의 두 눈은 신비로운 광채를 발산하며 현수의 모든 것을 빨아
들일 듯한 마력(魔力)을 사출했다.
현수는 어느 순간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나마 남
아 있는 사고력마저 일시에 상실하고 말았다. 그의 두 눈에 점차
뜨거운 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백화미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백화미는 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으로 무너지듯 안겨 들어왔다. 그
러자 부드러운 여체(女體)의 감각이 곧 그의 품에 밀착되었고 그
녀와 그의 얼굴은 맞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백화미의 두 눈이 사르르 감겼다.
그녀의 속눈썹은 무척이나 길었다.
까만 속눈썹이 옥(玉)같은 얼굴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더 매혹적이
었다.
"스님......."
백화미는 낮게 그를 부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붉고 탄력있는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빛났고 그녀의 입에서
는 뜨거운 입김이 토해져 현수의 마음을 불태웠다.
현수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으음......."
두 사람의 입술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입술과 입술을 통해 꿀물같은 타액이 오고 가는 사이 백화미의 백
옥같은 손은 그의 목을 휘어감고 있었다.
현수는 황홀감에 정신이 빙글빙글 도는 듯 했다. 어느새 그의 손
길은 자신도 모르게 백화미의 몸에서 승포를 벗겨 내리고 있었다.
스르르.......
백옥 덩어리같은 백화미의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녕 뇌쇄적
인 육체였다.
백화미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에 대었다.
"음!"
현수는 뜨겁고 뭉클한 여인의 촉감에 전신을 떨며 그 젖가슴을 꽉
움켜 쥐고야 말았다.
"아... 아......."
"으음!"
동굴 속은 이내 열풍(熱風)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흑의미부 단혜령(段慧令).
그녀는 안면이 경직된 채 전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반면 현오대사는 두 눈을 감은 채 내심 계속 불호를 외우고 있었
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이 깊은 정해(情
海)로부터 제자를 구원하소서.......'
단혜령의 두 눈이 갑자기 악독하게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앙칼지게 외쳤다.
"맞아요! 곡무현은 육십 년 전에... 이미 죽었어요."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수중의 부러진 단심도를 치켜세웠다.
단심도의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현오대사의 심장을 향해 단심도를
찔렀다.
쉭!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었다.
그러나 현오는 여전히 눈을 감고 불호만 외울 뿐 피할 생각도 하
지 않았다.
푹!
단심도는 정통으로 그의 심장에 깊숙히 박혔다.
피(血)!
피가 치솟았으나 현오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부
처라도 된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아!"
단혜령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찰나, 현오는 드디어 눈을 떴다. 그
러나 그의 눈에는 짙은 고뇌가 서려 있을 뿐 추호도 죽음의 공포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를 보던 단혜령의 눈이 기이할 정도로 사악해졌다. 그녀는 창백
한 안면에 계속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곡무현! 육십 년 지한(六十年之恨)을... 이 단심도를 통해 돌려
준 것이에요!"
현오는 다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털썩!
마침내 그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대사형....!"
외침과 함께 그 자리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선좌원주
인 현광이었다.
현광대사는 급히 땅에 쓰러진 현오를 부축했다.
"대사형! 대사형......."
그러나 이미 현오는 말이 없었고 어느새 그의 얼굴은 고요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아! 대사형......."
현광대사는 절망적인 탄식을 발하며 현오를 천천히 땅에 뉘었다.
그의 불심 깊은 얼굴에 무서운 분노심이 솟구쳐 오른 것은 그 순
간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여시주! 빈승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단혜령은 현오의 시체를 힐끗 바라보더니 곧 미친 듯이 웃었다.
"호호호호호....... 이미 육십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자다!"
현광은 더욱 분노했다.
"아미타불... 불존이시여! 살계(殺戒)를 범하는 제자를 용서하소
서!"
현광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양쪽 승포자락을 위맹하게 흔들며 단
혜령을 공격했다.
위이잉--!
승포자락이 빳빳하게 펼쳐지며 괴이한 금속성을 냈다.
단혜령은 냉소 지으며 급히 일 장의 옥수(玉手)를 날려 보냈다.
파팟!
손이 승포에 부딪친 순간, 그녀는 마치 강철을 친 듯 손이 찌르르
울림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단포철공(鍛袍鐵攻)!"
그녀가 경악하여 외치자 현광은 앞으로 두 걸음 미끄러지며 단호
하게 외쳤다.
"살계를 범해 자결하는 한이 있어도 여시주를 용서하지 않겠소!"
위-- 잉! 위- 잉!
무서운 공격이 퍼부어졌다.
현광대사의 소맷자락은 소림절예의 절공인 단포철공으로 마치 강
철판처럼 단단해졌다. 소맷자락이 어지럽게 춤추며 태산을 무너뜨
릴 듯한 경풍이 주위 사오 장을 휩쓸었다.
단혜령은 이리저리 신묘한 보법으로 공격을 피하느라 도저히 반격
할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과연 소림의 중들은 무섭구나!'
그러나 그녀의 눈에 일순 살기가 서렸고 양손은 이내 벽옥(碧玉)
빛을 발했다.
"호호호... 그 따위 시시한 소림의 무학 따위로는 나를 이기지 못
할 것이다!"
그녀는 조소를 날리며 양손을 떨쳤다.
벽옥빛의 투명한 강기( 氣)가 무섭게 둥근 원을 그리며 일어났
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웅혼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현광, 손을 거두어라!"
휙!
동시에 누군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콰르르릉!
엄청난 폭음이 울린 순간, 현광은 가슴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뒤
로 연달아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단혜령 역시 뒤로 두 걸음 물러났으며 그녀의 안색은 크게 변했
다.
'누가 이토록 무서운 내공을?'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 가운데 한 명의 고승이 홀연히 서
있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바로 소림최고 기승인 천심선사(天心禪
師)였다.
뒤이어 몇 명의 고승들이 다시 장내에 출현했다. 천뢰선사와 천기
선사, 그리고 현공대사 등 십여 명이었다.
현광대사는 황급히 천심선사에게 허리를 굽혔다.
"대사부님......."
단혜령은 그 광경에 안색이 변했다.
'저 노승이 바로 천심이란 말인가?'
천심선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현오의 시체를 보고도 안색이 조
금도 변치 않았다. 그저 담담히 물을 뿐이었다.
"여시주께서 조금 전에 쓴 무공은 혹시 이백 년 전 천마교주(天魔
敎主)였던 벽안마희(碧岸魔姬) 냉소군(冷素君)의 벽옥사라공(碧玉
邪羅功)이 아니오? 여시주께서는... 벽안마희와는 어떤 관계이시
오?"
그 말에 소림의 고승들은 모두 대경했다.
"벽옥사라공! 아미타불......."
단혜령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과연 선사의 안력은 대단하시군요!"
그녀는 안색이 곧 싸늘하게 변하며 오만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앞으로 오 년 이내에 천하는 마종지문(魔宗之門)이 다스리게 될
것이다! 소림사가 비록 강하다지만 마종지령(魔宗之令)을 따르지
않는다면 처참하게 멸문을 당하고 말 것이다!"
"뭣이? 아미타불......"
소림의 고승들은 일제히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멈추
지 않고 외쳤다.
"호호호... 그뿐만이 아니다. 너희 소림사가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있는 그 애송이 어린놈도 지금쯤 나의 제자에 의해 철저히 망가
지고 있을 것이다! 호호호......."
단혜령은 요란하게 웃으며 신형을 허공으로 날렸다.
현광은 대노하여 버럭 외쳤다.
"여마! 도망가지 마라!"
그는 곧 뒤따라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천심선사가 그
를 만류했다.
"그만 둬라. 현광!"
그 말에 현광은 멈칫했으나 수긍이 가지 않는 듯 불만스러운 시선
으로 천심선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사부님, 현오사형이 이렇게......."
죽은 현오와 그의 친분을 익히 아는 천심선사는 합장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현오는 스스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천심선사는 이어 현오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 그를 안아 들었다.
"또한 현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는 또 무슨 말인가? 천심대사의 나직한 읊조림에 현광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현오대사는 심장이 관통되어 이미 숨
이 멎었는데 어찌 죽지 않았다는 것인지.......
그러나 그는 천하에서 가장 존경하는 천심선사를 믿었다. 천심대
사의 읊조리는 음성도 실은 그만이 들었을 뿐이었다.
한편, 천심선사는 현오대사의 시신을 옮기려다 문득 그의 왼손을
보고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오대사는 전신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반면에 왼손을 꽉 움켜쥐
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부러진 단심도의 끝이 삐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육십 년 전 단혜령과 나누어 가졌던 정표로써 그의
심장에 박힌 단심도의 나머지 부분이 아닌가?
천심선사는 탄식했다.
'단심도....... 현오여! 너는 그동안 얼마나 괴로와 했는가?'
천심선사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로 인하여 네가 모든 것을 잊고 속세의 연을 끊을 수 있
게 된다면... 노납도 더이상 바랄 것이 없건만.......'
천심선사는 현오를 안아들고 걸었다.
천뢰선사가 그의 옆에 다가와 불안한 듯 물었다.
"사형, 현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아까 그 여마가 말한대
로......."
천뢰선사는 차마 뒷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러나 천심선사는 염려
말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를 찾지 말게. 그가 진정한 소림과 무림의 운명을 걸머질 기재
(奇才)라면 결코 색(色)에 무너지지는 않을 걸세."
"그렇다면!"
"아미타불... 어쩌면 오히려 그로 인해 자네가 설정한 반야밀다대
승신공의 삼십육 단계 수련 중 마지막 이 관(二關)의 하나인 심관
(心關)을 넘어설지도 모를 일이네."
"아!"
천뢰선사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해 갔다.
그 사이 천심선사의 얼굴에는 이와는 별도로 새삼 불안의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거의 남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그 여마가 소림에서 현수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그럼 이 소림에 첩자가? 설마 그럴 수는......."
천심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말은 오직 천뢰만이 들었다.
(사형!)
천뢰의 안색은 삽시에 무섭게 굳어졌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사제, 아무 말 말게. 내게 생각이
있으니.......)
그들은 전음으로 이같이 주고받았다.
천뢰선사는 이것도 저것도 불안을 금할 길이 없었다. 비록 그는
천심선사를 하늘같이 믿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걱정을 아예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로서는 사실 소림의 첩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격정적인 성격을
가진 천뢰선사는 무엇보다도 당장 현수의 안위가 궁금해 가슴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오직 유일하게 정(情)을 느끼던 현수가 아닌가? 그
는 팔백 일의 수련을 통해 현수와 너무도 깊은 정이 들어 있었다.
천뢰선사는 거세지는 호흡을 억지로 자제하며 되뇌였다.
'현수.......'
동굴 안은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요녀(妖女)와 선녀(仙女)의 양면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백화미
(白花美).
그녀의 나신은 온통 도화빛이 되어 있었다.
"아아......."
그녀는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었고 현수의 양 손이 그녀의 불같
이 달아오른 나신을 더듬고 있었다.
여인의 은밀한 부분을 스치는 현수의 손길에 그녀는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으음......."
두 사람의 격정적인 신음 소리가 동굴을 더욱 뜨거운 열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백화미는 자신의 몸을 동굴 바닥에 뉘였다. 그녀는 두 다리를 약
간 벌린 채 짙은 열망의 호소가 담긴 눈으로 현수를 불태울 듯이
응시했다.
현수는 거친 숨을 토했다. 그의 영준한 얼굴은 온통 붉게 달아 오
른 채 극심한 갈등들을 어지럽게 교차시키고 있었다.
욕정(欲情).
이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이 바로 욕정이리라.
현수의 가슴은 발산하고 싶은 욕정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참으면
참을 수록 욕망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더구나 백화미의 마력적인 눈은 그의 혼백을 빨아들이고 있지 않
은가? 두 다리를 비스듬히 벌리고 그의 전신을, 젊은 육체를 받아
들일 자세를 취한 채.......
마침내 현수는 무너지듯 백화미의 나신 위에 자신을 실었다.
그러자 백화미의 얼굴에 일말의 득의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
은 마치 정복자의 자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면 그 속에는 어떤 가벼운 실망의 표정도 실려 있었으
니.......
백화미, 그녀는 대체 어떠한 여자인가?
그녀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고 현수의 미칠 듯한 욕정의 행위가
그녀의 전신을 마구 탐하고 있었다.
"헉헉......."
그의 폭풍같은 호흡을 귓전에 느끼며 백화미는 사지를 늘어뜨렸
다. 이제 그의 폭발할 듯한 남성이 자신을 삼킬 때를 기다리만 하
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문득 짤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현수의 동작
이 갑자기 중지되자 백화미는 놀라서 눈을 떴다.
현수는 그녀의 나신 위에서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채 마구 안면근
육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돼!"
현수는 뒤이어 버럭 외치더니 마치 불에 데인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백화미는 대경하여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현수의 허리
를 와락 끌어 안고는 물었다.
"당신, 왜 그러시죠?"
현수는 마치 목석이라도 된 듯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 말이 없
었다. 백화미의 뇌쇄적인 얼굴에 짧게 당황의 빛이 스쳤다.
"당신......."
그녀는 달콤하게 말하며 현수의 손을 이끌어 다시 자신의 젖가슴
에 대었다.
현수의 손이 부르르 떨리더니 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멍청하던 얼굴에 곧이어 장엄한 표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의 혜지를 잃고 있던 두 눈에 강렬한 광채가 빛나며 전신은 마치
거대한 산을 연상케 하듯 은은한 위엄을 되찾았다.
현수는 곧 백화미에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여시주, 소승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현수의 음성은 이미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입정한 고승의 설법
처럼 엄숙했다.
백화미는 아연하여 알몸을 가리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알몸을 보는 현수의 눈빛은 더 이상의 흔들림이 없
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나무를 대하는 것처럼 지극히 담백했다.
그는 그저 그렇게 담담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백화미의 얼굴이 문득 애처롭게 변했다. 그녀는 커다란 두 눈에
담뿍 눈물을 고이게 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실로 그 어떤 철혈인(鐵血人)이라도 녹일만큼 가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수는 이제 전혀 미혹되지 않았다.
"여시주, 그대의 두 눈과 마음은 소승에게 진실(眞實)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대는 분명 어떤 목적을 품고 있습니다. 시주의
행동과 생각에는 수많은 모순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백화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이었
고 그녀는 곧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당신은 순결한 저의 몸을 마음대로 유린하고는... 이제
와서 고고한 척 발뺌을 할 셈인가요?"
현수는 묵묵히 합장한 채 고요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의 마
음은 굳기가 강철같아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릴 수가 없었다. 백
화미는 돌연 이를 갈더니 싸늘하게 외쳤다.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요!"
그녀는 만면에 독한 살기를 띄우더니 일 장을 뻗어 현수의 앞가슴
현기혈(玄機血)을 쳤다. 그녀의 장심은 은은한 벽옥빛을 띄고 있
었다.
현수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설사 피하고 싶어도 그는 무공 초식
을 조금도 모르는 몸이기에 피할 수가 없었다.
퍽!
백화미의 장심이 그의 가슴에 적중했다.
그러나 당혹에 빠진 것은 오히려 백화미 쪽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손으로 철벽을 때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녀는 뒤로 두 걸음 밀려났고 현수도 두 걸음 물러섰다.
그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으나 아무런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이럴... 수가!"
백화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뇌까렸다.
"아미타불......."
현수는 불호를 외며 잠시 서 있더니 서서히 몸을 돌며 동굴 밖으
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고 백화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사라지는 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악독했던 모습은 언제부터인지 희한하게도 슬프게 변해가
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눈 속에는 안타까움과 번민이 가득 어렸
다.
'현수.......'
백화미는 낮게 부르짖었다.
그녀는 나체인 채로 언제까지고 동굴 안에 서 있을 듯 했다.
'현수, 산(山)같은 사내....... 현수! 아아, 내 마음이 왜 이렇
게.......'
백화미는 갑자기 추운 듯이 나신을 움추렸다.
모닥불은 어느덧 꺼져 있었고 조금 전의 일은 오직 환상(幻想)인
것만 같았다.
백화미(白花美).
그녀는 그 순간부터 현수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될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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