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살수(殺手)의 여로(旅路)
"이제까지 배운 모든 무공 초식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단 하나의 살검(殺
劍)을 터득해야 한다."
일사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방 안으로 접어들었다.
백무영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럼 이제까지의 무공 연마는 헛수고였단 말입니까?"
"……."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 소리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코를 골아 대는 소리일 뿐이었다.
일사부는 백무영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코를 천둥치듯 골아 대며
잠에 빠져든 것이다.
'무공을 모두 잊으라니……?'
백무영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새로 무공을 익히라는 명이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공들여 익힌 모든 절기를 잊으라니?
그의 기억이 있고부터 지금까지 그의 생활은 피나는 무공 연마로 점철되
어 오지 않았던가?
그는 잡다한 무공을 익히기 위해 꽃다운 청춘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배운 모든 걸 잊어야 하다니?
"어떻게 몸으로 터득한 걸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백무영은 낭패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일사부가 무공을 가르쳐 주는 방법은 지극히 독특했다.
그는 백무영에게 단 한 가지 일만 시켰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동작의
연속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도끼질을 해라!"
일사부는 뜨락 귀퉁이에 있는 거무튀튀한 철부(鐵斧)를 가리켰다.
철부의 길이는 두 자 다섯 치 정도.
도기 자루가 순강으로 이루어졌으며, 머리 부분이 보통 도기보다 세 배는
컸다.
"도끼로 무엇을 합니까?"
"쪼개!"
"예?"
"빌어먹을 놈! 번번이 말대답이군."
일사부는 냉정히 말하며 다짜고짜 일 권을 후려쳤다.
그의 손속은 소림파(少林派) 백보신권(百步神拳)!
백무영은 그의 손이 기해혈(氣海穴)을 향해 장력을 날린다는 걸 느끼며
빠르게 피하고자 했다.
다른 것은 모르나 운신술(運身術)에는 자신이 있는 처지이다.
어떠한 공격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피할 수 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백무영이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그가 채 운신술을 시전하기도 전에 일사부의 백보신권이 하단전(下丹田)
기해혈을 후려쳤다.
백무영은 가죽공이 퉁기어지듯이 삼 장을 퉁기어 올랐다.
그는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두 차례 돌며 겨우 몸의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무, 무섭게 빠르다!'
백무영의 얼굴빛은 새하얗게 질렸다.
일사부의 무공초식은 다른 사람의 초식에 비해 뛰어날 것이 없으되, 그의
출수(出手)는 보통 사람의 초식에 비할 수 없이 빨랐다.
똑같은 초식이라 하더라도, 발출되는 속도에 따라 위력이 판이해지기 마
련이다. 보통의 속도로 시전되면 능히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가공한 속도로 시전이 되면 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매일 삼천 번씩 통나무를 찍어라!"
일사부는 백무영의 입술 사이에서 핏물이 흘러 나오는 걸 빤히 보면서도
비정하게 말했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백무영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일사부는 그가 만난 모든 사부 가운
데 가장 무정했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백무영의 입가에서 미소
가 피어 오르는 게 아닌가.
그의 미소는 싸늘한 미소였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한으로 점철된 삶을 살
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하지 못할 그러한 미소인 것이다.
"하라면 하겠소이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도끼 쪽으로 다가갔다.
도끼는 평범해 보였으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엄청난 무게다!'
백무영은 도끼를 한 손으로 잡아 쳐들려 하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끼의 무게는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그 정도 크기라면 다섯 관(貫) 무게가 나가야 고작인데, 백무영의 손에
가해지는 무게는 거의 백 근(斤)에 달했다.
'백 근은 된다. 우우, 이런 도끼를 삼천 회씩 내리쳐야 한단 말인가?'
백무영은 그제야 일사부가 자신에게 내린 명이 호락호락한 명이 아니라
는 걸 알게 되었다. 백 근 무게의 도기를 삼천 회 내리친다는 건,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게 하는 일이다.
보통 사람은 감히 그 도끼를 쳐들지도 못할 것이다.
내가고수라 하더라도 도끼질을 백 번 정도 한다면, 팔이 뻐근한 나머지
도끼를 내려놓게 될 것이다.
백무영은 이를 악문 채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
그는 아름드리 통나무를 노려보며 도끼를 내리쳤다.
백근부(百斤斧)는 힘차게 떨어져 내렸으며, 통나무는 찰나적으로 산산이
바수어졌다.
"으음, 팔이 떨어지는 듯하다."
백무영의 이마에 일순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보통 목검(木劒)이나 철도(鐵刀)를 써서 무공을 연마해 왔다. 기껏
중병기래봤자 장창(長槍)이나 연자추(連子鎚) 정도를 다루어 봤을 뿐이다.
그런데 백 근 무게의 도끼를 쉬지 않고 휘둘러 대야 하다니……?
"하루 삼천 번씩 도끼질을 해 대다가는 팔이 떨어져 나가겠군."
백무영은 또다시 백근부를 쳐들었다.
"좋아. 이보다 더한 일도 잘 견디어 왔지. 마지막 고비에서 쓰러질 백무
영이 아니다."
백무영은 한서린 표정이 아니라, 오히려 히죽 웃는 표정을 지었다. 도끼
가 장작을 쪼개는 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온다. 백무영의 얼굴은 땀에 뒤
덮였다. 그의 옷자락도 땀에 흥건히 젖었다. 도끼질을 이십여 번 해 대자
팔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그는 쉬지 않고 도끼질을 해 댔다.
작은 방 안, 일사부는 곰방대에 연초를 채우고 있었다.
그는 백무영이 도끼를 휘둘러 대는 모습을 창을 통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섯 아우들이 한 마리 비룡(飛龍)을 길러 냈군. 아아, 그들이 그 사이
치룬 고통을 이해할 만하다."
일사부의 눈에 만감이 교차된다.
그는 볼을 오목하게 하였고, 연초에 불이 당기어진다.
그가 볼을 볼록하게 하자, 푸른 연기가 피어 올랐다.
"빠르면 백 일! 천하에서 가장 가공한 살수(殺手)가 완성된다. 그의 어깨
에 전 무림의 운명이 지워지게 된다."
일사부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그는 담배 연기에 몽롱히 취해 버린 것일
까?
'하늘이여, 피로 핏빚을 씻고자 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 달 후, 백무영의 가슴 근육은 강철처럼 단단하게 발달되었다. 그는 백
근부를 휘두르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기에, 처음에 비할 수 없이 쉽게
도끼질을 해 댈 수 있었다.
손이 쳐들릴 때마다 백근부가 높이 쳐들렸으며, 그의 눈빛이 번쩍이는 찰
나 백근부는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리며 거대한 통나무를 쩌억 쪼개어 버
렸다.
그는 도끼질을 하는 가운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자 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그 사이 무엇을 배웠는가… 그는 그 모든 것을 잊고자
했다.
그는 도끼에 자신의 모든 정신을 집중시켰으며, 되도록 마음마저 텅 비워
버리고자 했다. 신기한 것은 마음가짐을 그렇게 하자, 도끼질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두 달 정도 쉬지 않고 도끼질을 해 대게 되자, 도끼의 무
게가 한결 감소된 듯 느끼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운부(運斧)의 비결을 터득한 것이다. 훗훗, 이 엄청난
무게의 도끼를 지푸라기 하나 움직이듯 움직일 수 있다니!'
백무영은 도끼질을 하는 가운데, 나름대로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일사부의 모습은 열흘에 한 번 정도씩 보였다.
그는 보통 때 외부에서 생활하였으며, 열흘에 한 차례씩 은밀히 나타나
백무영이 도끼질하는 모습을 숨어 지켜보곤 하는 것이다.
단심궁에 온 지 육십 일째 되는 날.
일사부가 정말 오랜만에 백무영 앞으로 나타났다. 그는 술병을 든 채 상
체를 흔들흔들거리며 백무영 쪽으로 다가섰다.
"도끼질이 꽤 익숙해졌군."
"일사부 덕분이외다."
"내 덕분이라니?"
"일사부는 운부의 비결 가운데 운검(運劒)의 비결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
는 게 아니신지요?"
"녠녠… 네 멋대로 생각해도 좋다."
일사부는 언제나 비정해 보였다.
그의 눈빛은 다른 사부의 눈빛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의 눈빛은 상당히 흐리멍텅한데, 실제적으로 여섯 사부 가운데 가장 냉
철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일사부는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성격이 아니었
다. 그는 감정을 완전히 절제하는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강호인 가
운데 정신의 경지가 이토록 확고하게 굳어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
이다.
"이제 도끼를 바꿀 때다."
"예?"
"이제부터는 이걸 써라."
일사부는 이제까지 허리 뒤쪽에 감추어 두고 있었던 또 하나의 도끼를
꺼냈다.
그것은 백무영이 이제까지 휘둘러 댔던 도끼에 비해 약간 작았다. 하지만
그것을 쥐었을 때 느끼어지는 무게는 본래의 도끼보다 세 배 더했다.
"엄청난 무게군요. 가히 삼백 근은 되겠습니다."
"정확히 삼백오십사 근. 후후, 그것을 백지처럼 가볍게 흔들어 댈 수 있
어야 밀명(密命)을 이행해 나갈 수 있다. 명심해 들어라. 네게 하나의 검
결(劍訣)을 일러 주겠다. 그것은 색혈일검(索血一劍)! 일 초(一招) 일 식
(一式)이며 변초(變招)도 없고 허초(虛招)도 없이 지극히 단순한 동작으
로 구성되는 초식이다. 그것은 인체의 내공을 하나의 점(點)으로 모으는
비결이다. 도끼질을 하며 그 구결을 운용해라."
일사부가 전수하기 시작한 비결은 지극히 단조로운 일초검법(一招劍法)이
었다.
일컬어 색혈일검(索血一劍)!
그것은 고금무사(古今武史)에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초식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일사부의 창안초식일지도.
"네가 통나무를 쪼개어 소리를 내지 않을 때, 하명하겠다."
"소리를 내지 않을 때?"
"색혈일검의 비결은 쾌(快), 급(急), 무음(無音)에 있다. 말로는 쉬우나, 머
릿속으로는 절대 익힐 수 없는 외가절정검(外家絶頂劍). 몸으로 익혀야
한다."
일사부는 색혈일검의 구결을 세 번 되풀이해 말해 준 다음에 신형을 틀
었다.
그는 느릿느릿 걸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넌 도합 일곱 명의 절세고수(絶世高手)를 죽여야 한다. 그 중 여섯은 너
보다 세 배 강하며, 마지막 한 명은 너보다 십 배 이상 강하다."
"그, 그렇게 강합니까?"
"어쩌면 백 배 강할지도… 정면 대결로는 그를 제거하기 힘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다가는 천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네가 색혈일검을 배우는 이
유는, 그것이 네게 지름길을 일러 주기 때문이다. 쿨룩쿨룩……!"
일사부는 잔기침 소리를 내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백무영은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얼굴을 일그
러뜨렸다.
"일곱 명의 절세고수를 죽여야 한다고?"
어렴풋이나마 그가 무공을 배우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살수(殺手)로 키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가 이제까지 터득한 모든 절기는 암살(暗殺)에 필요한 절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지금 새로 배우기 시작한 색혈일검은 오 장 이내의 단거리에서 가
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살인검인 것이다.
장하(長夏)가 시작되며 개봉부의 거리는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
든 게 지쳐 버리는 계절이다. 초목도 더위에 허덕이고, 염천(炎天)은 삼라
만상을 불사를 듯 기세를 더해 갔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그는 거대한 도끼를 쳐든 채 관조의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과거 그는 물소를 앞에 둔 채 도기를 쳐든 바 있었다. 당시 그는
물소의 한 혈(穴)을 찾고자 정신을 모은 바 있다. 지금 그는 도끼의 무게
를 이기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 거석(巨石)이 놓여 있었다.
거석의 빛깔은 푸르스름했다. 그것은 쇠처럼 단단한 청석(靑石)이었다.
도끼로 그것을 내리친다면, 요란한 파열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숨도 쉬지 않는다. 눈빛도 깊이 침잠되어 있다.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맥박 뛰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백무영은 신체의 기(氣)를 완전히 하나의 점으로 모으고 있었다.
기(氣)란 무형(無形)의 것.
그것을 펼칠 경우에는 하해(河海)를 뒤덮을 정도로 넓어지며, 오므릴 경
우 작은 개자(芥子)의 씨앗에 갈무리될 정도로 축소된다.
백무영은 기를 확대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점으로 모으고자 정신을 하나
로 모으는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
백무영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선(單線)이 허공에 그어진다. 도끼의
날 또한 허공에 단선을 그렸다.
그리고 미묘한 침묵.
언제부터인지 백무영의 입가에는 오랫동안 잊었던 진실된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는 도끼를 내려다보는 바, 도끼는 언제인지 모르게 청석을 반
으로 갈라 버린 것이다.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가운데, 거대한 청석은
반으로 갈라져 버린 것이다.
백무영은 구십칠 일 만에 색혈일검의 비결을 완벽하게 터득해 낸 것이다.
그는 기쁘다던가 서운하다던가 하는 정서를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그의 마음은 화석(化石)처럼 단단해진 지 오래였다. 그는 희로애락의 감
정을 참아 내도록 단련되어 왔다.
그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일사부가 꽤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그는 백무영이 도끼로 청석을 소리 없이 쪼개 버린 것을 다 본 듯했다.
그리고 비정하던 일사부의 눈에 습막이 맺히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되는 것인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대업(大業)
이!'
일사부는 숨을 깊이 빨아들이며 마음의 냉정을 회복했다.
그는 애써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실로 야릇한 사제지간.
기뻐 흐느낄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냉정한 표정을 지을 뿐
이다.
"백 리 길 가운데 일 보(一步)를 내딛을 뿐이다. 기뻐할 것 없어. 강호엔
너보다 막강한 무사들이 즐비하니까."
"잘 압니다."
백무영은 노여워하지도,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무감각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백무영의 무
서운 점이었다.
"따라와라!"
일사부는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그는 느릿느릿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으며, 백무영은 처음으로 그의 거처
로 접어들었다. 그의 거처는 생각보다 넓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의 서실에는 서가(書架)가 하나 있는 바, 서가에는 도
가경전(道家經典)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서가 위에는 수석(水石)이 몇
점 놓여져 있었다.
일사부는 나름대로 도교적인 삶을 영위하는 인물인 듯했다.
지금 백무영에게 보여 주는 모습은 완전히 위장된 모습일 것이다.
"넌 삼 년 안에 일곱 명의 절세기인(絶世奇人)을 죽여야 한다. 그들의 이
름은 지금 말해 주지 않겠다. 만에 하나, 네가 잡혀 비밀을 토할까 우려
되기 때문이다."
실로 치밀한 생각이다. 일사부는 백무영이 실패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
는 것이다.
"우선 네게 세 명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겠다."
"그들은 일곱 명 안에 끼입니까?"
"끼이지 않는다."
"그럼 왜 그들을 죽여야 합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네 자신의 무공이 완성되었는가 시험해 보
기 위함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네가 밀명을 이행함에 있어 나름대로 유
명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유명해져야 한다면?"
"모든 강호인이 네 이름만 듣고도 공포에 질릴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
고 넌 누구든 한 번 보면 쉽게 알아볼 용모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
면 눈빛이 푸르다던지, 머리카락이 붉다든가, 아니면 외팔이라든가, 특이
한 병기를 쓴다든가……."
"……."
백무영은 쭉 듣기만 했다. 일사부는 한 장의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읽고 나서 태워 버려라. 그 안에 네가 첫번째 해야 할 일이 기록되어 있
다."
봉투는 백무영에게 쥐어졌다.
백무영은 밀지를 그 자리에서 개봉해 내용을 읽었다.
그는 밀지의 글을 읽는 사이, 몇 번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밀지 안에는 상당히 놀라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일사부는 백무영이 밀지를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만에 하나, 밀명을 이행하는 가운데 잡힐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든 넌
살해당할 것이다."
"잡히게 되면 절 죽이실 겁니까?"
"그렇다. 넌 우리를 모르고 우린 널 안다. 솔직히 네가 잡힌다 하더라도,
토설할 내용은 적다. 물론 몇 사람이 다치기는 하겠지. 하지만 우리 모두
가 제거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린 널 제거하고 나서 다시 시작할 것이
다."
일사부는 천천히 곰방대를 입에 대었다.
그는 푸른 연기를 술술 토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강호에 나가 네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첫째는 만박의 천수금
장(千手金莊) 세력이다. 네가 바라는 금자(金子)는 천하의 이백여 군데에
서 자유롭게 입수할 수 있다. 네게 은장의 비밀 암호를 일러 주겠다. 그
것을 쓴다면 천하 어디에서든 자금을 뽑아 낼 수 있다. 둘째로 너는 쾌화
림의 방대한 정보망을 이용할 수 있으며, 쾌화림의 분타 어디에서든 자유
롭게 머물 수 있다. 그 나머진 네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라. 누구도 네 일
을 직접적으로 돕지 않을 것이며, 네가 실패하는 순간 누군가 널 죽일 것
이다."
일사부는 그렇게 말한 다음에 눈빛을 강하게 했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눈빛이다. 그 눈빛은 백무영의 마음 속에 또렷이
기억되었다.
"이젠 떠나도 좋다."
"좋습니다. 떠나겠습니다."
"절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 않겠습니다."
백무영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어느 틈엔가 키가 헌칠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느릿느릿 신형을 틀었으며, 언제부터 쏟아지는지 모를 장마비 속으
로 조용히 사라져 갔다.
비는 쉬지 않고 퍼부어졌으며, 문득문득 하늘을 갈라 버리는 푸른 뇌전
(雷電)이 하늘에서 땅까지 길게 이어져 내렸다.
뜨락의 거목이 번개에 맞아 쪼개어지며 검은 연기와 붉은 불기둥을 토하
는 가운데, 백무영은 조용히 사라졌다.
일사부는 백무영이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하늘을 봤다.
콰쾅-!
뇌전이다. 우주를 허물어뜨려 버릴 듯 광란하는 전광(電光).
푸른 빛이 번뜩일 때마다 삼라만상은 다시 칠흑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언제고 네게 긴 이야기를 해 줄 날이 있겠지. 그러나 지금 네게 해 줄
말은 하나도 없다."
일사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얼굴이 쭈글쭈글해졌다. 그의 얼굴은 이전과 완전하게
다른 얼굴로 변화되었다. 그는 이제까지 역용화신술(易容化身術)을 써서
얼굴을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네가 내 가슴에 검을 들이대어도 나는 네게 할 말이 없으리라.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네가 한 명의 아수라(阿修羅)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경(佛經)에 이러한 글이 있다.
만마(萬魔)를 멸하는 데에 백 명의 부처보다 한 명의 아수라가 더 뛰어날
때가 있다고. 그렇다. 백무영은 아수라로 길러진 것이다. 그는 이제부터
무림의 모든 어둠을 베어 버릴 것이다.
어쩌면 그는 고독과 신화를 이룩해 나가는 가운데,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
다.
누구도 그를 위해 울어 주지 않을지도.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
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무사(武士)로서 가장 고독한 투쟁을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칠 일 후, 항주(杭州).
누가 항주의 밤을 무시하겠는가?
소항(蘇杭)은 가히 극락(極樂)이라고 한다. 천상(天上)에는 천당(天堂)이
있으며, 지상(地上)에는 소항이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비가 거리 위에 뿌려지고 있었다. 거리는 음산한 공기에 휘어 감기어 있
었다. 피부를 끈적거리게 하는 바람이 다가선다. 항주는 바닷가에 세워진
도시이다. 항주의 거리에는 늘 해풍(海風)이 닥쳐 드는 것이다.
바다 바람에는 해초(海草)의 비릿한 내음이 스미어 있다.
항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내음에 지극히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외지인이라면 항주에 접어들면서부터 그 내음에 야릇한 신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리를 따라 늘어진 청등가(靑燈街)의 장관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저 기루(妓樓)의 품격이란, 기루의 건물이 어떻게 지어졌는가와 기녀
(妓女)들의 수준이 어떠한가에서 결정이 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항주의 기루는 천하에서 최고 일류라고 아니할 수 없다.
기루의 건물은 고루거궁(高樓巨宮), 건축의 웅장함과 단청(丹靑)의 화려함
이 일단 사람을 압도한다.
화원(花園)이 갖추어지지 않은 기루가 없으며, 인공호수가 패인 기루도
무수하다. 기루에 접어드는 사람은 이 곳이 기루가 아니라 황궁(皇宮)이
라 착각을 하게 될 것이며, 점소이며 시녀들의 옷차림에 기가 질릴 것이
다.
그러나 항주의 홍등가를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늘씬한 체격의 야화
(夜花)들이라 할 수 있다.
완전한 팔등신 미녀들.
항주의 기녀들은 일단 체격에서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얼굴의 용모
또한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기녀가 될 수 있으냐 없느냐는 용모에 있지 않고, 금기서화(琴棋
書畵)를 비롯한 예(藝)에 능통하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비파(琵琶), 칠현금(七絃琴), 적(笛), 고(鼓)를 비롯한 악기를 다룰 줄 알
아야 하며 가무(歌舞)에 능해야 한다.
시흥에 젖어 시를 읊는 문객(文客)과 더불어 대구(對句)할 정도의 문장력
이 있어야 하며, 고금명가의 명문을 무수히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만 항주에서 일류기녀 소리를 듣고, 교방(敎房)
에서 알아주는 야화가 되는 것이다.
야화 가운데서 가장 알아주는 일타화(一陀花)!
나이 열다섯에 교방에 들어, 나이 스물세 살에 이르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항주제일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
문사와 술을 마시면 여류시인이 되며, 호걸과 함께 술을 마시면 여장부가
된다.
거상(巨商)의 술시중을 들 때에는 상권의 움직임에 대해 줄줄 말해 대며,
고뇌(苦惱)가 있는 사람과 마실 때에는 함께 울어 줄 줄을 안다.
일타화는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섭심술(攝心術)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수한 영웅호걸을 겪어 왔기 때문에 남자를 보는 눈이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방면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관상을 알
아보는 눈을 갖고 있는 셈이었다.
한데, 일각 전에 그녀를 찾아온 한 명의 낙척서생(落拓書生)에 대해서만
은 도저히 무엇인가를 알아차릴 수 없을 지경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는 조용히 술잔을 들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옷차림, 옷소매의 빛깔은
본시 검은빛이되 얼마나 오랫동안 안 빨아 입었는지 회색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옷소매에서 빠져 나온 손목은 희고 매끄러웠으며, 검은 문사건
(文士巾)을 두르고 있었다.
'눈빛이 없다!'
일타화는 일각 내내 흑의인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는 특징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단 한 가지 특징이라면 눈썹이 희다는 것이다.
그러한 특징이라도 없었다면, 그는 어디에 있어도 눈에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상부에서 나오신 분이라면 의당 강호계에서 이름난 분일 텐데!'
일타화는 보통 기녀가 아니다. 그녀는 묘수환궁의 일급제자 명단에 올라
있는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가 묘수환궁의 항주분타주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그녀 자
신에 불과한 것이다.
사내는 묘수환궁의 신표를 갖고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은 외부인의 눈을 속이기 위해 합환(合歡)의 장소에 들어와 이야
기를 나누는 것이다. 일타화는 묘수환랑의 막내 제자로, 항주지역의 정보
를 수집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흑의서생이 일타화에게 물어 보는 것은 항주지역에 은거하고 있다고 알
려지고 있는 인물에 대한 것이었다.
"그럼 흑야일점홍(黑夜一點紅)이 전당강 기슭에 살고 있단 말이오?"
나직한 목소리, 감정이 전혀 깃들여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십 년 전만 하더라도 강호제일자객 소리를 듣던 인
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일 때 이 검(二劍) 이상을 쓴 바 없습니다."
"……."
"흑야일점홍은 흑도의 전설로 군림하였으며, 지금은 자객업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은거하여 살고 있습니다. 겉보기의 생활은 은연자중한 강호일사
(江湖逸士)의 나날. 하지만 그는 늘 살검(殺劍)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제
가 알아 낸 소문에 의한다면, 그는 머지않아 연환마교의 장로(長老)로 초
빙되어 간다고 합니다."
"그의 신체 특징은?"
"키가 크고 깡말랐습니다. 그는 늘 흰 옷을 입고 있으며, 습관적으로 검
을 가슴에 안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인 후, 검자루에 흔적을 하나
새깁니다. 그의 애검(愛劍) 일점홍(一點紅)의 자루에는 이백사십팔 개의
흔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타화는 그렇게 말한 다음에 백미(白眉)의 흑의서생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흑야일점홍의 동정이 상부에 중요한 보고사항인가요?"
"그렇지 않소. 이 일은 내 개인적인 일이오."
무미건조한 목소리이다.
이각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상대가 주는 느낌에 대해 어느 정도 파
악할 수 있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타화는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느낌을 간파하지 못했다.
투명하다 할까? 아니면 혼탁하다 할까?
눈앞에 있는 인물은 두드러지지 않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귀 끝으로
치솟아 나간 흰 눈썹만 없다면, 그와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눈다 하더라
도 그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일이라시면?"
"……."
그는 미미하게 웃었다. 기뻐서 웃는 것인지, 씁쓸히 웃는 것인지 나타나
지 않는 미소이다.
그는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일타화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 곳을 나섰다.
흑야일점홍(黑夜一點紅)!
그는 검에 오십칠 년의 삶을 걸어온 인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비린
내만을 맡으며 살아왔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졌으며, 녹림의 인물
에 의해 길러졌다.
그는 인생의 밑바닥을 샅샅이 체험하며 살아온 사람으로, 이제까지 남을
믿어 본 바가 없다. 과거 그는 마도인의 부탁을 받고 글을 써 준 바 있
고, 그로 인해 거금 삼천 냥을 횡령한 죄를 뒤집어쓰고 무참히 고문당한
바 있다. 그 날 이후 그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으며, 심지어 제자신마
저도 믿지 않았다.
그는 깡마른 몸을 느릿느릿 움직이며 뜨락을 거닐고 있었다.
그의 거처는 얼핏 보면 서원(書院)으로 보인다.
그가 이 곳에 머문 지 십여 년째.
그는 살검의 마지막 비결을 터득한 이후, 강호에 복귀하여 웅지(雄志)를
펼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거닐었으며, 자신이 창안한 허무살검(虛無殺劍)의 마지막 비
결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늘 느긋한 마음가짐으로 지내며 검결을 터득했더라면, 성취가
보다 빨랐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는 한순간도 마음을 비워 두지 않고 누
군가 자신을 노리지 않는가 경계하고 있기에, 무공의 성취가 더딘 것이
다. 그러나 강호계에서 그를 얕잡아 볼 인물은 없다 할 정도로 강한 무사
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상대는 천천히 다가섰다. 어지간한 인물이라면, 흑야일점홍의 관심을 끌
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 장 안까지 다가서도록 흑야일점홍의 관심을
끌지 않았다.
평범한 발자국 소리, 차분한 호흡 소리. 만에 하나, 적이었다면, 그렇게
차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茶)를 갖고 오는군. 살영(殺影)이라는 녀석, 잘 기르면 뛰어난 자객이
되겠지!'
흑야일점홍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사람이 자신이 기르는 제자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으로 다가서는 인물, 그는 그의 제
자 살영이 아니었다.
나이 이십 세 초입으로 보이는 흑의인, 그는 흑야일점홍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너는?"
흑야일점홍은 반사적으로 검자루에 손을 대었다. 그는 살기를 느끼든 못
느끼든, 일단 사람을 대하면 검자루를 쥐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갑자기 싱긋 웃었다. 그의 웃음은 다분히 천진스러워 보였다.
그는 흑야일점홍에게서 이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섰다.
강호의 거마 흑야일점홍은 그제야 청년에게 무엇인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일정한 호흡이다. 내 곁으로 다가서는 사람은 나의 기세에 눌려 숨을 제
대로 쉬지 못하기 마련인데!'
흑야일점홍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고자 했다. 하지만 노련한 감각이 검을
뽑는 걸 방해했다.
'살기가 전혀 없다.'
흑야일점홍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만 않았더라도, 상대에게 어처구니없는 죽음
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흑야일점홍이 눈을 껌벅이는 찰나, 흑의청년은 불쑥 손을 쳐들었다.
그는 날이 거의 없는 철검을 쳐들었으며, 그 순간 흑야일점홍의 얼굴 근
육이 꿈틀거렸다.
'늦었다. 인생 최초의 실수다!'
대체 이럴 수가? 자신 앞에서 살기(殺氣)를 감출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니?
그는 자객의 교과서적인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는 상대가 살의(殺意)를 품고 다가서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보통의 자객은 앞을 노리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은 노련한 자객의 맹점
(盲點)이 바로 앞에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뜨락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흑도명가의 후예들.
그들은 흑야일점홍에게서 살인술을 배우기 위해 각고의 연마를 하고 있
는 수련생들이었다.
그들은 흑야일점홍의 가슴이 세로로 갈라지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흑야일점홍은 그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인데, 백주대낮에 그들이 빤히 보
는 앞에서 가슴이 갈라져 심장이 튀어나오게 되다니…….
흑야일점홍은 단 한 마디의 비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가 안고 있던 검은 절반 가량 검집에서 빠져 나온 상황이었다. 그는 상
대의 도(刀)가 일 장 가깝게 다가서는 찰나, 검을 검집에서 뽑은 것이다.
보통의 무사를 상대할 경우였다면, 그 지점에서 검을 뽑는다 하더라도 상
대보다 빠르게 벨 수 있다.
하나, 지금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그는 충분히 막을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다 뽑지도
못하고 가슴이 세로로 갈라져 버린 것이다.
하얀 갈비뼈가 드러나고, 붉은 심장이 터져 버린 듯 피가 콸콸 흘러넘쳤
다.
청년은 망막에 비치는 광경이 무의미한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검을 슬쩍 내리흔들었으며, 검신에 배어 있던 핏물이 촤르르 뿌려져
흑야일점홍의 옷자락에 점점혈흔(點點血痕)을 만들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으며, 화단을 가로질러 뚜벅뚜벅 걸어갔다.
너무나도 여유 있는 동작.
흑야일점홍의 제자들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목숨은 한 가닥 실과 같은 것이기에 너무나도 쉽게 끊어지는 것이지!'
청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의 모습은 탱자나무 울
타리 뒤로 사라졌다.
뜨락 가득히 비가 내린다.
흑야일점홍은 눈을 빤히 뜬 채 죽어 있었다.
그는 왜 죽는지 모르겠다는 듯, 회의에 가득 찬 눈빛을 영원히 간직한 채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열닷새 후, 맹문산(孟門山).
맹문산은 구산(九山) 가운데 끼는 산이다.
섬서성(陝西省)의 영산(靈山) 맹문산에는 금옥(金玉)이 많기로 유명하다.
맹문산에서 내려다보면, 황하(黃河)가 누런 몸통을 꿈틀거리는 황룡(黃龍)
으로 용솟음쳐 가는 장관이 한눈에 잡힌다.
잠깐만 내려다봐도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가파른 지형이다.
누가 맹문산 위로 올라 대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품지 않겠는가?
한 청년, 그는 일정한 속도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가 지닌 소지품은
녹슨 철검 한 자루가 전부인 것 같았다. 그가 지닌 검은 병장기로 쓰기에
는 부족한 것이다. 백련정강한 장검에 부딪친다면, 썩은 나뭇가지가 잘라
지듯이 잘라져 버릴 폐검(廢劍)에 지나지 않는다.
얼굴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 흰 눈썹이 이채롭다. 흰 눈썹은 대단히
개성적인지라, 얼굴의 다른 특징을 파묻히게 했다. 낯색이 누렇기는 하되,
지극히 영준한 용모라고 할 수 있다.
"색혼비루주(色魂飛樓主) 음양인마(陰陽人魔)! 그는 낮에는 남자이고, 밤
에는 여자가 된다. 다시 말해, 그는 음양인이다. 그는 자신의 성욕을 채우
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잡아들이고 있다."
그는 암울한 대기 속으로 접어들었다.
일 리 전부터 협도(狹道)가 시작되었으며, 절벽에 빠끔히 뚫린 동굴에서
안개가 스물스물 흘러 나왔다.
바람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흐느끼는 듯한 귀곡성으로 화한다.
바람 소리에는 혼백을 흐리게 하는 작용이 있으되, 그는 표정 하나 바꾸
지 않았다.
"음양인마는 천하공적으로 평가받는 자. 하지만 백도의 힘이 부족하기에
그를 처단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연쇄구관(連鎖九關)을 자신의 거처 근
처에 설치하여 대세력이 접근하는 걸 봉쇄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의
거처는 이십 년 간 철옹성이 되었다."
그는 자그마한 소리로 말하며 쉬지 않고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연쇄구관에 걸려 헤매는 사람을 잡아 노예로 쓰고 있는 바, 그 중
젊은 자는 그의 욕정의 대상이 되어 음기나 양기를 빨려 죽게 된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양쪽 벼랑에서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부르짖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는 가운데, 허공에서 검은 구름이 빠르게
내리닥쳤다. 검은 구름은 가시가 달린 철망(鐵網)이었으며, 청년이 몸을
움찔거리자 그의 몸을 더욱 강하게 조여들었다.
"으윽!"
청년은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으며, 직후 두 명의 인물이 그의
좌우로 떨어져 내렸다.
"미련한 놈일세. 색혼비루로 들어서다니."
"카카… 소지품을 뒤져 보자."
둘은 모두 얼굴에 시뻘건 물감을 바르고 있었다.
물감에는 인광(燐光)이 묻어 있어서 밤에 그들의 얼굴을 본다면, 푸른 광
채가 번뜩거리는 마면(魔面)으로 착각되리라.
"젠장, 은자 한 줌뿐이로군."
"세상에 이런 빈털터리가 있나? 지니고 있는 게 은자 한 줌에 녹슨 철검
뿐이라니."
"봐. 손가락에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군."
"별것 아니야. 쇠반지야. 수레 하나 실어도 돈이 되지 않는 싸구려 반지
야."
두 명은 연쇄구관을 지키는 색혼사자(色魂使者)들이었다.
"이 자를 어떻게 한다지?"
"일단 끌고 가자. 누주의 음양마공(陰陽魔功) 연마에 도움이 될 테니까."
"크크… 기왕이면 예쁜 계집이 걸려들 것이지. 젠장, 예쁜 계집을 잡으면
치마를 홀랑 벗기고 실컷 데리고 놀 수 있었을 텐데."
둘 중 하나가 청년을 들쳐업었다.
그들은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색혼비루 쪽으로 접어들었다.
청년은 철망에 묻힌 독에 중독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색혼비루는 맹문산의 마왕단(魔王壇) 위에 세워져 있었다.
색혼비루의 연무장에는 인골탑(人骨塔)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인공연못 안에서는 수백 구의 시체가 썩어 가고 있었으
며, 색혼사자들이 병 안에다가 시독(屍毒)을 채취하고 있었다.
색혼비루의 지하에는 철옥(鐵獄)이 마련되어 있었다.
철옥 안에는 색혼사자들에 의해 잡혀 온 동남동녀들이 머물러 있었다.
남녀 가운데 안색이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대부분 혈색이 좋고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솔직히 행동의 자유가 없을 뿐이지, 철옥 안에서의 생활은 괜찮은 편이었
다.
세 끼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청결한 잠자리에서 잠들 수 있다.
색혼비루에 납치된 사연이 어떻든, 잡히게 되면 일단은 초조해하기 마련
이어서 닷새 정도는 밥도 못 먹고 울고 소리치기에 바쁘다. 그러나 잡힌
지 엿새가 지나면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기 마련이며,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고 불면증에서도 벗어나 곤하게 자기 마련이다.
그렇게 십여 일을 보내고 나면, 건강이 좋아지고 이전의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
그쯤 되면 꼭 어디론가 잡혀 가게 되고, 한 번 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
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색혼비루의 불문율이었다.
그는 잡힌 지 이틀째 되는 날까지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밥을 주면 밥을 먹고, 간수들이 자라고 소리치면 곤히 잠든다.
어쩌면 그는 잡혀 온 사람 가운데 가장 태평하다 할 수 있었다.
그의 행동거지는 누군가에 의해 면밀히 관찰되고 있었는 바, 그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흔적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그는 간수에게 이끌려 긴 복도를 따라가게 되었다.
"넌 운이 좋아."
근육질의 간수는 그를 보며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간수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목욕탕이었다.
그는 목욕탕에서 옷을 모두 벗고 몸을 깨끗이 씻게 되었다.
간수는 그가 미끈한 몸뚱이를 청수로 씻는 걸 보며 키득키득거렸다.
"누주가 남자일 때 걸리면 재수가 없단 말야. 한데, 넌 운이 좋아. 지금
누주는 여자니까. 크크……!"
대체 뜻 모를 말이다.
남자일 때 걸리면 운이 나쁘고, 여자일 때 걸리면 운이 좋다니?
그는 깨끗한 자색 장포로 몸을 감싸게 되었다.
그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으로 간수를 바라보았으며, 간수는 턱끝을
가볍게 쳐들어 나가라는 신호를 했다.
그는 고삐 묶인 망아지 마냥 시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그는 간수에게 이끌려 백석 계단을 밟으며 위층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복도에는 많은 무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적포(赤袍)를 걸치고
있었다.
"녠녠… 옷 빛깔이 자색이면 누주가 여자일 때 좋아하는 빛깔이지."
"여자일 때에는 자색을, 남자일 때는 홍색을."
"저 놈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야. 카카카……!"
지키는 무사들은 청년이 지나칠 때마다 키득키득 비웃음을 흘렸다.
청년은 겁먹은 눈빛을 던지며 화려한 방문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방
안은 향훈에 휘어 감기어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백웅(白熊)의
가죽이 깔린 너른 침대였다.
침대 가에 앉는 의자가 있고, 그 위 묘령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동경(銅鏡)을 통해 옷단장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선 자를 힐끔 보는 바,
요사한 눈빛에 다분히 만족스럽다는 빛이 담기게 되었다.
"오늘은 물건이 좋군."
대체 모를 일이다.
나긋나긋한 몸매에 요염한 자태인데,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굵직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목소리도 아니다.
어찌 들으면 여자의 목소리이고, 어찌 들으면 남자의 목소리로 혼동이 된
다.
"옷을 벗어라!"
그녀는 명령조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녀의 가슴이 탄력 있게 드러나 있었다.
유실은 흥분에 못 이겨 사르르 떨리는 듯했다.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허벅지는 보기만 해도 숨이 콱 막힐 지경이다. 피부
는 뽀얗고 솜털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라면, 사타구니 사이에는 여인의 신비 뿐만 아니라
남성의 양물 비슷한 것이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놀랄 것 없어. 이건 지금 쓰이지 않으니까!"
키득거리는 자는 바로 색혼루주 음양인마(陰陽人魔)였다. 그는 강호의 대
표적인 음양인으로, 반나절은 남자 노릇을 하고 반나절은 여자 노릇을 하
는 자이다.
그는 지금 여자로 탈바꿈해 남자의 상징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건 낮에 쓰이지. 호호! 지금은 밤이야. 지금은 이게 쓰일 때란 말이
야."
그는 까르르 웃으며 손을 써서 회음부(會陰部) 부위를 적나라하게 노출시
켰다. 과연 그의 생식기는 여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와라. 즐겁게 해 줄 테니까. 아마도 이러한 맛은 평생 맛보지 못했을 거
다."
음양인마는 세 걸음 걸으며 망사옷을 몽땅 벗어 버렸다. 그는 청년을 껴
안을 듯 가깝게 다가섰으며, 청년의 입가에 처음으로 표정 변화가 생겼
다.
"찾는 데 시간이 걸린 대신, 좋은 구경을 시켜 주시는군."
"뭐라고?"
음양인마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문득 상대가 강호계 인물이라는 걸
느꼈다.
'머저리들! 살수를 안으로 불러들이다니!'
음양인마는 기절초풍 놀라며 재빨리 일 장을 후려쳤다.
펑-!
청년의 몸이 휘청거렸다.
음양인마의 장력은 투골음풍수(透骨陰風手)!
살짝 스치기만 하더라도 살이 썩어 버리는 독장이다. 한데 청년은 상반신
을 휘청거리기만 했을 뿐, 쓰러지거나 아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히
죽 웃을 뿐이었다.
"철골신체(鐵骨身體)! 그렇다면……?"
음양인마는 사색이 되어 비스듬히 퉁기어 올라갔다. 그는 거의 일순간 동
쪽의 벽에 달라붙듯 다가섰으며, 벽에 걸리어 있는 고검(古劍)을 움켜쥐
었다.
"호오오옷, 환락마녀검(歡樂魔女劍)!"
음양인마는 몸을 나선형으로 회전시키며 청년을 향해 다가갔다.
검파가 보석처럼 찬란하게 뻗어 나가며 청년의 가슴을 희게 물들였다.
청년은 환락마녀검의 위력을 모르는 듯 피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 집어 들었는지 모를 쇠붙이를 쳐드는 바, 그것은 놋쇠로 만든
촛대였다.
촛대는 위로 쳐들렸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으며, 그 순간 음양인마의 검
세는 여지없이 흐트러져 버렸다.
파팍-!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마검이 산산이 바수어졌다.
음양인마는 촛대가 계속해서 수직으로 다가서는 걸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애걸복걸하는 말소리가 나오려는 찰나, 묵직한 촛대는 너무나도 빠른 속
도로 그의 두개골을 향해 짓쳐 들었다.
퍽-!
소리와 함께 뿌연 뇌수가 튀어올랐다. 그리고 음양인마는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벌렁 넘어졌다.
음양인마는 개구리가 물가로 끌려나와 죽듯 네 활개를 쫘악 편 채 죽었
으며, 깨어진 머리에서는 피와 뇌수가 주루룩 흘러 나왔다.
청년은 시체 곁에 촛대를 던지며 천천히 돌아섰다.
"두 번이나 무의미한 살인을 했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눈빛 가득히 고뇌가 엿보인다.
"나를 살인자로 몰아세운 그들의 이유가 정당치 못한 것이라면, 언제고
그들은 내게 처단된다."
그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 밖에 있던 자들은 방 안의 소음에
상당히 놀란 듯 귀를 쫑긋 세운 채 방문을 보고 있다가 그가 나서자, 눈
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어찌 된 일이지?"
"네가 나오다니?"
색혼사자들이 입을 딱 벌리며 말하자.
"누주는 내가 자신을 기쁘게 해 주셨다며 나가라 하셨네. 날 몹시 칭찬해
주셨지. 한 시진 후, 들어가 보면 잘 알 거야."
청년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육중한 문은 열린 직후 닫혔기에, 방 안의 정경을 알아볼 길이 없었다.
색혼루주의 수하들은 음양인마를 겁내기에, 의혹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문을 열어 볼 마음을 품지 못했다.
한 시진 후 청년이 맹문산 아래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고 있
을 때에야, 수하들은 색혼비루가 현판을 내려야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양인마가 이름 모를 자에게 처참히 제거되었다는 소문은 오래지 않아
강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