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차례
第 九章 比武大會
十章 英雄悲話一章
英雄之行二章
冷面無敵三章
巨步鎭唐十四章
三靈神丹五章
洞庭血戰六章
反三聖勢七章
祝融世家
第 九章 比武大會
웅성웅성……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거대한 대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대개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로, 바로 오늘부터 시작되는 비룡승천대회(比龍昇天大會)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그 중에는 철군악과 송난령도 끼여 있었다.
철군악은 고개를 들어 대문 위에 걸려 있는 현판을 쳐다보았다. 금빛이 번쩍이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일월장(日月莊)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일월장(日月莊)!
이곳이 바로 남궁세가(南宮勢家), 천도팽가(天刀彭家), 그리고 사천당문(四川唐門)과 함께 무림사대세가의 하나인 일월장이었다.
십 년마다 열리는 비룡승천대회는 언제나 이곳 일월장에서 개최되었다.
그 이유는 비룡승천대회를 처음 만든 이가 바로 일월장의 전전대(前前代) 가주(家主)인 구양도(九陽刀) 공손경(公孫卿)이기 때문이다.
송난령은 수많은 무림인들을 보자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정말 많이도 왔군요! 이 정도 사람이면 관문을 통과하는 데도 며칠은 걸리겠어요.”
원래 비룡승천대회는 참가자가 너무 많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초청을 받은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정해진 시험을 통과해야 참가할 수 있었다. 일월장이라는 공간과 시간에 한계가 있는 탓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아마 몇 달이 걸려도 우승자를 뽑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원래 이 대회에 참가하려 했었나요?”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창에 온 것은 단지 동천립을 만나기 위해서였지, 비룡승천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송난령은 별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철군악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이 대회에 참가한다고 그런 거죠?”
“호기심 때문이오.”
“호기심?”
“그렇소. 혈우마검이라는 자가 익혔다는 삼절마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싶어져서요.”
송난령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에요?”
“물론이오.”
송난령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혈우마검에 대해 잘 모르나 본데, 그는 당금 무림의 십대고수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는 인물이에요. 더군다나 그가 소문대로 삼절마검을 익혔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당신은 그의 손에서 십 초를 견디기 어려울 거예요. 그래도 그와 겨루고 싶다는 말인가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이오.”
송난령은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탁탁 치며 철군악을 노려보았다.
제 딴은 그를 위한답시고 진지하게 충고를 하는데도 자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철군악의 태도가 너무 야속했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단지 보름 전에 처음 본 남자에게 한없이 이끌리는 자신이 까닭없이 얄미웠다.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소.”
송난령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당신 마음대로 해봐요!”
철군악은 뛰어가듯 일월장 안으로 사라지는 송난령의 뒷모습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라고 왜 송난령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목석이 아니고서야 그녀의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과 부드러운 웃음을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군악은 그녀의 정(情)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고 해야 옳았다.
자신은 이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적들과 생사(生死)를 건 싸움을 벌여야 한다. 싸움이 언제 끝날지,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철군악은 적들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송난령이나 그나 차라리 그냥 아는 사이로 끝나는 것이 서로에게 훨씬 이로울 것이다.
철군악은 마음을 굳게 다져 먹었다.
처참하게 죽어 간 사형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이런 일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철군악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은 이내 일월장 안으로 사라졌다.
바글바글……!
사람이 많기는 장원 안이나 바깥이나 매한가지였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몇 만 평은 족히 됨직한 곳이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꽉차 있었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사람이 이처럼 많다는 것은 이 대회가 무림인들에게 얼마나 중요시되는가를 알게 해주는 반증이기도 했다.
대회에 참가하려는 목적을 갖고 온 무림인도 많았지만,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다.
십 년에 한 번 있는 권위 있는 비무대회라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몰려들 것은 뻔한 이치인데, 누가 이런 장관을 놓치려 하겠는가?
평생 가도 한 번 볼까말까 한 고수들이 우승자를 탄생시키기 위해 열(熱)과 성(誠)을 다해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그는 사나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비룡승천대회는 무림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동경과 선망의 대상인 것이다.
철군악은 어느새 장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곳도 장원 안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일월장은 대문(大門)과 중문(中門),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대문과 중문 사이가 외장(外莊)이고 중문을 지나야 비로소 내장(內莊)이라 할 수 있었다.
철군악은 방명록에 서명을 한 후 곧바로 이곳으로 왔다.
그가 지금 서 있는 장소는 외장으로, 대회 참가자들을 엄선하기 위한 관문(關門)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관문은 두 개였다. 그 중 하나는 공력을 시험하기 위한 일차관문으로 철군악은 지금 그 앞에 있었다.
관문을 통과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땅바닥에 놓여 있는 종(鐘)을 쳐 소리를 낼 수 있다면 합격이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쉬워 보였지만 알고 보면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종을 울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언뜻 생각이 들겠지만, 그것은 땅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종을 보면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종은 높이가 무려 이 장(丈)에 달했고, 둘레만도 족히 삼 장은 되어 보였다. 또한,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몸통 전체가 오광(烏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종을 쳐다보고 있던 철군악의 귀에 마침 옆에서 구경꾼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무슨 놈의 종이 저렇게 커다랗단 말인가?”
얼굴이 기다랗게 생긴 장한이 놀란 표정으로 종을 바라보자 옆에 있던 눈이 가느다란 장한이 말을 받았다.
“자네도 저렇게 커다란 종은 본 적이 없지?”
“물론이네. 종은 치라고 있는 것인데, 저렇게 생겨 먹어서야 어디 소리가 나겠는가?”
“자네도 정말 답답하네.”
“뭐가 말인가?”
“아무도 칠 수 없는 것이라면 뭣 하러 여기에 힘들여 갖다 놓았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무식하게 생겨 먹은 종을 누가 칠 수 있단 말인가?”
눈이 가느다란 장한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아직도 무림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나 본데, 그들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손에서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다네. 사람은 물론이고 곰이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도 무림인이 내뿜는 손바람을 한번 맞는 날에는 그냥 끝장이 난단 말일세.”
얼굴이 기다란 장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들이 신선이라도 된단 말인가?”
“물론 신선은 아니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끝이 없어 보통 사람은 수백이 있어도 무림인 하나를 당할 수 없다네.”
얼굴이 기다란 장한은 그 말을 듣고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모든 무림인들이 저 종을 울릴 수 있단 말인가?”
눈이 가느다란 장한이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도 참 답답하군. 아무나 울릴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관문이 뭣 하러 필요하겠는가? 저 종은 백 년 전 구양도 공손 대협이 이 대회를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네.”
“그런데?”
얼굴이 길다란 장한이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쳐다보자 눈이 가느다란 장한은 자신이 마치 무림인이라도 된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명을 해주었다.
“저 종은 오철(烏鐵)에 만년한철을 섞어 만든 것으로 웬만한 힘으로는 아무리 쳐도 소리가 안 나게 되어 있네. 내가 들은 바로는 아마 내공이 일(一) 갑자(甲子) 정도는 있어야 저 종을 울릴 수 있다고 하네.”
얼굴이 길다란 중년인이 처음으로 아는 체를 했다.
“내공이 일 갑자라면 육십 년 동안 수련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자네도 잘 알고 있군.”
“그 정도 고수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눈이 가느다란 장한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 정도라면 무림에서도 최고 수준의 고수라고 보면 될 걸세.”
“음! 정말 대단하군.”
장한들은 말을 끝내고 다시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말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다시 말한다면 이 대회는 절정의 고수들만이 참가하는 대회로, 무공이 웬만큼 강해서는 관문을 통과할 수도 없었다.
관문 통과자가 백에 하나가 될까말까 한 것만 보아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철군악은 관문이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종에서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백의를 걸친 청수한 노인이 의자에 앉아 관문에 도전하는 자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일차관문의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심판관 같았다.
예상대로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의 대부분이 종을 제대로 쳐보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다 물러나곤 했다.
그것은 관문이 어렵기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 그만한 공력을 쌓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무료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철군악이 갑자기 빛나는 눈으로 장내를 쳐다보았다. 봉두난발을 한 백의인이 종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빛이 바래 거의 누렇게 보일 정도의 백색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송곳처럼 기괴하게 생긴 검을 검집도 없이 달랑 차고 있는 모습 외에는 그다지 특별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심판관도 그것을 느꼈는지 그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이내 따분한 얼굴로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
“도전자는 육장(肉掌) 외에 다른 것을 사용하면 실격이오. 물론 기회도 단 한 번뿐이오.”
백의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종으로부터 삼 장 가량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을 치지는 않고 한참 동안 노려보기만 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백의인이 움직일 생각을 않자,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청년이 보다 못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아니, 당신은 종이 제삿상으로 보이는 거요? 치려면 빨리 치고 말려면 말지 왜 이렇게 꾸물대는 거요?”
얼굴에 칼자국이 나고 매우 험상궂게 생긴 청년이었는데,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에 표정까지 찡그리자 그의 살벌한 기세에 주위가 다 조용해질 지경이었다.
백의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얼굴에 칼자국이 난 청년이 마침 잘 만났다는 표정으로 입을 놀렸다.
“왜? 내 말이 틀렸나?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집에 가서 밀린 빨래나 할 것이지 여기는 뭣 하러 나와 뒷사람까지 불편하게 꾸물거리고 있어?”
주위에서 와하하, 하고 폭소가 터져 나왔다.
칼자국이 난 청년은 구경꾼들의 웃음에 힘을 얻었는지 야비한 표정으로 더욱 이죽거렸다.
“아니꼽나……? 그렇게 아니꼬우면 얼마든지 도전을 하라고. 나는 자네처럼 느려 터진 굼벵이들만 전문적으로 혼내주는 분이시니까.”
“으하하하!”
“으헤헤! 아이고, 배꼽 잡네!”
주위에서 또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백의인은 청년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를 한번 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중인들은 다시 한 번 수군거렸다.
일반적으로 무림인들은 목숨보다도 명예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를 당하면 백이면 백 모두 시비가 붙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백의인은 타인이 자신을 무참히 모독하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인들은 백의인이 분명히 청년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그가 자신을 모독하는 데도 불구하고, 도전을 피한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무림인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조롱하는 듯한 중인들의 시선을 보니 그들은 이미 백의인을 겁쟁이로 낙인찍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뭐, 저런 자가 다 있어!”
“정말 겁쟁이군. 저럴 바에야 허리에 검은 왜 차고 다니나? 쯧쯧쯧!”
백의인은 중인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종을 마주보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차압!”
낭랑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백의인이 힘차게 손을 휘두르는 장면이 환상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꽝!
동시에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할 것같이 보이던 종이 거대한 울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데에엥!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조는 듯한 눈으로 의자에 앉아 있던 심판관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백의인이 설마 종을 울릴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구경꾼들은 허겁지겁 종을 쳐다보다가 다시 한 번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떠야 했다.
희뿌연 먼지 사이로 종의 표면에 하나의 장인(掌印)이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우웅……!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장내엔 오직 종소리의 여운만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마치 고요한 산사(山寺)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름하고 유약해 보이던 백의인이 실은 진면목을 감추고 있던 절정고수(絶頂高手)였던 것이다.
비룡승천대회가 시작된 지 이미 백 년이 흘렀지만, 누구도 종의 표면에 저토록 선명한 장인을 만들진 못했다.
놀란 얼굴로 종의 표면을 살피던 심판관은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인이 아주 매끄러울 뿐만 아니라 그 깊이가 무려 세 치나 되었기 때문이다.
쇠 중의 쇠라는 오철에 만년한철을 섞어 만들어, 보검으로 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종에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세 치나 되는 장인을 찍은 것이다.
“하, 합격이오!”
심판관의 떨리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구경꾼들이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아아……! 최고다!”
“천하제일고수다!”
백의인은 간단히 고개를 숙여 답례한 후 걸음을 옮겼다.
뜻하지 않은 백의인의 신위(神威)에 모든 사람이 놀랐겠지만, 그 중 가장 놀란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백의인에게 시비를 걸던 청년이었다.
그는 백의인이 무서운 고수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하나, 백의인은 청년의 걱정과는 달리 그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유유히 걸음을 옮겨 이차관문으로 향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청년은 오금이 저려 도저히 백의인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백의인이 그냥 지나치기만 바라던 청년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억눌린 신음을 뱉어 냈다.
“후유……!”
청년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멍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만약 백의인과 시비가 붙었다면 그는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의인은 그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하기가 싫었을 뿐이다.
이제 장내의 누구도 더 이상 백의인을 겁쟁이라고 비웃지 못했다.
그는…… 진정한 무인이었다.
이차관문도 일차관문과 마찬가지로 매우 간단해 보였지만, 일차관문을 통과한 고수들 중 이차관문에 합격한 고수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차관문은 바로 경공(輕功)을 시험하는 장소였다.
연못[淵].
직경이 정확히 이십 장 되는 아름다운 연못의 중앙에 연꽃이 하나 피어 있었고, 도전자는 바로 이 연못을 신법(身法)을 발휘해 통과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합격자에게는 만천하 무림인들의 꿈이라는 비룡승천대회에 출전할 자격이 주어진다.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연못 근처를 둘러보았다.
연못 앞에는 이미 일차관문을 통과한 예의 백의인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이곳의 심판관으로 보이는 초로(初老)의 인물이 단정한 금삼(金衫)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금삼인은 이미 백의인이 대단한 고수라는 보고를 받았는지 사뭇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의인은 이번에는 아까처럼 뜸을 들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곧 신형을 뽑아 올렸다.
슈우욱!
그의 몸이 일직선으로 빠르게 연못을 가로질러 갔다.
“아……!”
구경꾼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백의인이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연못을 건너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인들은 설마 백의인이 연못 중앙의 연꽃을 이용하지 않고 한 번에 건너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눈을 부릅뜬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백의인은 사람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연못을 거의 지나, 이제 건너편의 바닥과는 불과 삼사 장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런데 정녕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백의인의 몸이 돌연 기우뚱거리더니 급격하게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앗!”
“이런……!”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백의인이 연못에 떨어진다면 그는 막강한 실력을 갖고도 비룡승천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잃는 불운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이 막 연못 속으로 빠지려는 찰나, 돌연 백의인이 환상처럼 공중제비를 돌더니 한 발로 다른 발을 박차고 다시 몸을 날렸다.
슈우욱!
이내 그의 몸은 연못가의 땅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
“우와와……! 최고다!”
심판관도 박수를 치며 그의 합격을 커다랗게 알렸다.
“합격이오!”
백의인은 역시 조용히 고개를 숙여 답례한 후, 이내 그곳을 떠났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박수는 계속되었다.
중인들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백의인의 경공에 넋이 빠진 모습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백의인을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바로 철군악이었다.
“흐음……!”
그는 뜻 모를 탄성을 흘리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좋은 적수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의인은 신법 중에서도 가장 익히기 어렵다는 비룡회선(飛龍回旋)과 능공천상제(凌空天上梯)를 연이어 사용했다.
무슨 이유에서 공중에서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보여 준 한 수만으로도 능히 절정고수의 반열에 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만약 그가 검을 든다면 어느 정도의 실력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철군악은 오랫동안 멈추어 있던 심장이 급격히 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그가 비무대회에 참가한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혈우마검에 대한 호기심 때문도 아니요, 그렇다고 명예 때문도 아니었다.
단 하나, 바로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상대해야 할 적들은 너무도 강했다.
개중에는 천하 제일인으로 추앙받던 자도 있었고, 마도 역사상 최강의 마인으로 손꼽히는 자도 있었다.
철군악은 그런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가 비록 희대의 검법을 익혔다 하나 그것이 얼마만큼 대단한 것인지는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검법을 익히고 처음 강호에 나왔을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한데, 때마침 이곳 무창에서 비룡승천대회가 열린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짧고 안전한 시간에 자신의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비무대회가 가장 적격인 것이다.
한데, 철군악은 비무대회를 치르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강적을 보게 된 것이다.
전신의 신경이 곤두서고 알 수 없는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그의 투지를 불태웠다.
철군악은 비록 목적을 갖고 비무대회에 참가했지만, 뜻하지 않게 검의 달인(達人)을 보게 되자 목적을 잊을 정도로 흥분한 것이다.
철군악은 오랜만에 가벼운 설레임을 느끼며 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백의인과 겨루기 위해서는 그 또한 시험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 * *
아침.
옷깃에 스며드는 안개의 상쾌함이 철군악의 전신을 가볍게 이완시켜 주었다.
철군악은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축축한 소로(小路)를 걷기 시작했다.
이미 일, 이차관문을 모두 통과한 철군악은 장원 안에서 지난 삼 일을 보냈다.
물론 객점이나 다른 곳에서 지내도 상관없었지만, 특별히 아는 사람이 없는 철군악으로선 일월장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삼 일 동안의 길고도 지루한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오늘, 비무대회의 서막이 오른다.
이제 조금 후면 그는 절정의 고수들과 어울려 비무를 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무인이라면 부와 명예보다 필생의 호적수(好敵手)를 더욱 원한다. 어떤 경우에는 좋은 적 한 명이 오히려 열 명의 친구보다 나을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철군악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삼 일 전에도 백의인 같은 엄청난 고수를 보지 않았는가?
더욱이 아직은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혈우마검도 필히 대단한 고수일 것이 분명했고, 또 어떤 강적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좋은 적수를 만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지금 약간 흥분된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철군악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살며시 쫓아오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그를 뒤쫓아 왔는지, 아니면 우연히 방향이 같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분명히 누군가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온다는 점이었다.
철군악은 여전히 걸음을 옮기며 고개만 뒤로 돌렸다.
그의 망막으로 미행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아니 그녀는 바로 송난령이었다.
그녀는 철군악이 자신을 바라보자 낯빛을 싸늘하게 굳히며 그를 지나쳐 갔다.
“흥!”
아마도 철군악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철군악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는지라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돌연 그의 시야가 탁 트였다.
연무장(鍊武場)에 도착한 것이다.
연무장은 직경이 무려 칠십 장 정도 되는 크기였는데, 바로 이곳에서 대망의 비룡승천대회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연무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연무장 중앙에는 높이가 일 장, 직경이 이십 장 정도 되는 대(臺)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비무는 아마 여기서 치러지는 것 같았다.
철군악은 대 아래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막 누군가가 대 위에 올라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풍채가 매우 당당한 중년인이었는데, 특이하게도 한 쪽 손에 푸른 낫을 들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일월장의 모든 살림을 맡아 보는 청사겸(靑邪鎌) 괴모(瑁)였다.
그는 원래 유명한 마인이었으나, 전대 일월장주인 도제(刀帝) 공손표(公孫表)에게 감화되어 평생 그의 수족이 되기를 원해 일월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먼저 이렇게 불원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본 장의 비무대회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오. 본인은 본 장의 총관을 맡고 있는 괴모라는 사람이오.”
그가 말을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던 장내의 소란이 말끔하게 사라지더니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괴모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 대회는 본 장의 전전대 가주이신 공손경 대협께서 무림의 젊은이들이 더욱 무(武)에 정진하고 기상을 떨치라는 취지에서 만든 것으로서 벌써 열한 번째를 맞고 있습니다. 모쪼록 이번 대회에서도 예전과 같이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길 바라며, 본인은 장주이신 공손월(公孫越) 대협을 대신해 제 십일회 비룡승천대회의 개회를 엄숙히 선포하는 바입니다.”
“와아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피가 끓는 젊은이라면 이 광경을 보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수천수만이 보는 앞에서 상대를 멋지게 제압하고 모든 이들의 우상이 되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어찌 흥분이 되지 않으리요!
괴모는 장내의 흥분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 군웅들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본 대회는 단지 실력의 고하를 가리는 것이 우선인 만큼,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규칙을 정할 수밖에 없소. 먼저, 비무 도중에 부상자가 생기면 당연히 그를 패한 것으로 간주하겠소. 또한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자도 승자의 자격이 없소. 그리고 암기나 독(毒)을 사용해서도 안 되오…… 본 장은 이번 대회의 공정한 진행을 위해서 특별히 세 분의 참관인을 모셔 왔습니다. 지금부터 그분들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괴모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의 뒤에는 모두 세 개의 태사의가 있었는데, 의자에는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먼저 가장 좌측에 앉아 계신 분은 무림십대고수 중 한 분이신 검제(劒帝) 냉좌기(冷佐起) 대협이고, 중앙에 계신 분도 역시 십대고수 중 한 분이시며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이신 자전신검(紫電神劒) 남궁룡(南宮龍) 대협, 그리고 맨 우측에 계신 분은 무당(武當)의 장로인 정풍도장(庭楓道長)이십니다.”
괴모의 말에 중인들은 세 사람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아우성이었다.
“정말 냉 대협이다!”
“남궁 대협도 있군그래!”
고개를 힘껏 빼 드는 사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앞 사람을 밀쳐대는 사람, 그야말로 천태만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당금 무림에서 무적의 고수로 군림하고 있는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검제 냉좌기는 무림십대고수 중에서도 일, 이위를 다투는 거목으로서 이미 이십 년 전부터 천하제일검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삼십 년 전 팔 회째 비룡승천대회의 우승자이기도 했다.
성격이 차갑고 쉽게 사람을 사귀지 않지만, 반대로 맺고 끊음이 정확해 그를 잘 아는 무림의 인물들은 설봉(雪峰)의 고학(孤鶴) 같다고 칭송하며 받들었다.
그는 맑은 물빛 장삼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시린 듯 차가운 눈길과 꼿꼿한 자세가 역시 세간의 평이 조금도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인물은 중후한 인상에 탐스런 백염이 특히 눈에 띄었는데, 그가 바로 자전신검 남궁룡이었다.
그 또한 검제에 못지않은 인물이다.
역시 십대고수 중 일인으로, 몰락해 가던 남궁세가를 혼자 힘으로 일으켜 세워 지금의 사대세가 중 하나로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애병인 자하검(紫霞劒)이 울음을 토해 내면 천하의 모든 사마(邪魔)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악을 원수 보듯 미워하는 철한(鐵漢)이기도 했다.
그리고 맨 우측에 단정히 앉아 연신 도호를 외우는 사람은 무당의 장로(長老)인 정풍도장(庭楓道長)이었다.
그는 사형제지간인 무당오자(武當五子)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인물로 사문의 비전인 면장(綿掌)과 태청강기(太淸氣)를 거의 완벽하게 익힌 절정고수였다.
이처럼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들이 참관인으로 초빙되었으니, 어찌 군웅들이 흥분하지 않겠는가?
한참 동안 계속된 소요가 가라앉고 장내가 어느 정도 차분해지자 괴모는 계속 대회를 진행시켜 나갔다.
비룡승천대회는 총 삼십이 명의 고수들이 출전했다.
그들은 제비뽑기로 한 조에 여덟 명씩 천, 지, 일, 월, 사 개 조로 나눠진 후, 그 네 개 조의 최종 승자들이 겨루어 우승자를 가린다.
특이한 것은 초청을 받은 고수들과 관문을 거쳐 올라온 고수들을 각 조에 고루 분배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나중에 있을 말썽의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였다.
제비를 뽑은 결과 철군악은 일자조(日字組)에 속하게 되었다. 송난령은 월자조(月字組)에 속했고, 관문을 통과하며 이미 유명해진 백의인도 월자조(月字組)에 속하게 되었다.
대회는 점심 식사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결의에 찬 얼굴로, 코앞으로 다가온 대회에 임하려 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 후면 대장정의 막이 오를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누가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고, 또 누가 패배자가 될 것인가?
그것은 오직 신(神)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와아아……!”
넓은 비무장에 가득 찬 군웅들의 함성 소리로 장내가 떠나갈 듯했다.
해는 이미 중천(中天)에 걸려 있었다.
비무대 위에는 두 명의 청년고수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방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이 비룡승천대회의 초전(初戰)을 장식할 인물들이었다.
함성이 가라앉자 괴모가 웃음 띤 얼굴로 두 사람을 군웅들에게 소개했다.
“여러분, 드디어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모든 분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이번 비무대회는 단지 무공의 고하를 따지는 것이므로, 승자(勝者)에게는 환호를, 그리고 패자(敗者)에게는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내 주십사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사자들도 너무 승리에만 집착하지 말고 더욱더 무예에 정진해 줄 것을 당부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비무는 낙양(洛陽)의 낙락공자(樂樂公子)와 산동(山東)에서 오신 구지수(九指手) 맹 대협의 대결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했다.
“낙양의 천장대(天藏大)입니다.”
“맹초혁(孟楚赫)이라 하오.”
백의에 산뜻한 유생건을 머리에 두른 낙락공자는 낙양에서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단 무공이 고강할 뿐만 아니라 금기서화에 능하고 말주변이 좋아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
특히, 그의 옥선십팔법(玉扇十八法)은 변화가 무궁무진해 낙양 일대에서는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와 맞붙게 된 맹초혁은 얼굴에 철사같이 빳빳한 수염이 난 삼십대 후반의 인물로 정광(精光)이 번뜩이는 눈동자가 결코 예사롭지 않았는데, 왼손 중지가 없어 구지수라는 별호를 갖고 있었다. 그는 산동(山東)의 제일고수였다.
두 사람은 인사를 한 후,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차압!”
“타앗!”
이내 비무대 위는 온통 바람 소리와 희뿌연 그림자로 가득 찼다.
콰쾅!
동시에 장내를 떨어 울릴 듯한 거대한 소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기세를 잡은 것은 낙락공자였다.
그는 한 자루의 섭선(攝扇)을 사용했는데, 변화가 어찌나 기이막측하고 현란한지 사람은 보이지 않고 허공이 온통 섭선의 그림자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와 상대하고 있는 맹초혁은 아무런 무기도 없이 단지 한 쌍의 육장(肉掌)만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불과 십여 초가 지나기도 전에 눈에 띌 정도로 열세에 빠졌다.
낙락공자는 맹초혁이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잡지 못하자 더욱 거세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옥선경동(玉扇驚動)!”
한소리 폭갈과 함께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섭선이 기이한 변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것이 바로 그가 자랑하는 옥선십팔법(玉扇十八法)이었다.
그는 이 옥선십팔법만으로도 여태껏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과연 이번의 일초는 대단해 맹초혁은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피할 곳을 찾지 못하자 있는 힘을 다해 쌍수를 휘둘렀다.
슈앙!
그의 손에서 막강한 잠력이 튀어나와 낙락공자의 섭선을 막았다.
낙락공자는 상대의 일장(一掌)이 의외로 강력하자 섭선을 회수하며 한 걸음 물러나더니 옥선참애(玉扇斬哀)와 옥선삼락(玉扇三落)의 초식을 연거푸 펼쳐 냈다.
번쩍, 번쩍……!
일순 장내가 환해지는 착각이 들며 섭선이 환상처럼 맹초혁의 허점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앗……!”
맹초혁은 상대의 변초가 이렇게 빠를 줄 예상치 못했는지 다급한 표정으로 연신 뒷걸음질 쳤다.
‘끝났다!’
낙락공자는 상대가 결정적인 허점을 보이자 얼굴에 미소를 띠며 옥선십팔법 중에서도 절초인 옥선만변(玉扇萬變)을 펼쳐 냈다.
슈슈숭!
섭선이 마구 요동치며 사방을 에워쌌다.
파라라락!
그 기세가 어찌나 강했던지 섭선이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맹초혁의 옷자락이 마구 펄럭이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맹초혁은 이번의 일초를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여태껏 멍하니 섭선의 변화를 쳐다보고 있던 맹초혁이 돌연 왼손을 힘없이 들더니 약지를 슬쩍 튕겼다.
슈육!
그러자 그의 손가락에서 괴이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너무도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꽝!
천번지복할 굉음이 터지며 누군가의 입에서 가느다란 비명이 새어나왔다.
“으윽……!”
중인들이 허겁지겁 비무대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곳에는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태껏 수세에 몰려 있던 맹초혁이 당당한 얼굴로 서 있는 데 반해, 그 앞에는 우세한 싸움을 이끌어 가던 낙락공자가 낭패한 모습으로 맹초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가득 나타나 있었다.
머리에 질끈 동여맸던 유생건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양쪽 소매는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었다.
“이럴 수가……?”
낙락공자는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자신의 패배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맹초혁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고, 당연히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도 엉뚱했다.
그는 싸움을 일방적으로 이끌었지만, 최후의 승자는 그가 아니라 바로 맹초혁이었다.
“맹 대협의 승리요.”
괴모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낙락공자는 그제서야 힘없는 얼굴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은 처음의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달리 매우 처량해 보였다.
“와아아!”
“최고다!”
맹초혁은 환호하는 군중들을 상대로 가볍게 답례한 후, 당당한 모습으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비무를 하기 전에는 두 사람 모두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결과가 난 후에는 서로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승자는 모든 명예를 거머쥐며 흠모의 대상이 되지만, 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또한, 패자에게는 한평생 패배자라는 오명이 따라다녔다. 승자의 말은 무용담이고, 패자의 말은 단지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약육강식의 세계, 이것이 바로 무림이었다.
“정말 약은 자로군요.”
철군악은 옆에서 들려 온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바로 일전에 객점에서 만났던 남궁욱이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었다.
남궁욱은 철군악이 쳐다보자 간단히 인사를 한 후,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낙락공자가 별 어려움 없이 일회전을 통과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저 맹초혁이라는 자의 심계는 정말 치밀하군요.”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지닌 무공만으로 따진다면 맹초혁은 낙락공자에게 아무래도 한 수쯤 뒤질 수밖에 없었다.
맹초혁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공으로는 도저히 낙락공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 가지 꾀를 냈다.
즉, 그와 상대할 때 일부러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고 짐짓 힘에 겨운 듯 행동한 것이다.
예상대로 낙락공자는 처음에는 제법 신중하게 싸움에 임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이 들며 자신도 모르게 공격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싸움에 임해서 방심은 곧 패배와 직결되는 것.
맹초혁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비장의 한 수를 써 승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맹초혁이 비겁한 짓을 한 것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세심한 심기와 끈질긴 인내로 당당히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더군다나 맹초혁이 마지막에 쓴 지법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면서까지 익힌 것이라는 것을 낙락공자가 안다면 그리 억울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기보다 꽤 세심한 친구로군요!”
남궁욱은 명문의 후예답게 맹초혁이 실력으로 당당하게 겨루지 않고 심기를 사용해서 이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퉁명스런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은 어찌 보면 약간은 둔해 보이는 맹초혁의 외모를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철군악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다시 비무대로 돌렸다.
두 번째 비무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살성(殺星)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마도의 혈륜탈심(血輪奪心)과 젊은 도인(道人)의 일전이었다.
혈륜탈심은 이미 무림에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 쌍의 혈륜을 무기로 썼는데, 그것에 걸리면 상대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하여 혈륜탈심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언뜻 보기에도 음독해 보이는 매부리코와 살기 어린 표정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와 상대하는 인물은 이제 겨우 약관으로 보이는 홍안의 청년이었는데, 기상이 늠름하고 눈빛이 맑은 것이 무림의 미래를 짊어 갈 동량으로서 추호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는 대 위에 올라가자마자 참관인석에 앉아 있는 정풍도장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정인(庭人)이 사형을 뵙니다.”
사형이라니…… 그렇다면 이 청년도인이 무당의 장로인 정풍도장의 사제란 말인가?
그들의 나이 차로 보아 사형이 아니라 사백(師伯)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처럼 보였는데, 청년도인은 정풍도장을 서슴없이 사형이라 칭했다.
군웅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웅성댔다.
“아니, 무당오자에게 저런 사제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그러게 말일세. 저렇게 나이 어린 청년이 정풍도장의 사제라니, 정말 믿기지 않는군!”
군웅들은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사형제지간이라 보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 군웅들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정풍도장의 태도였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청년도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항상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하고 다녀 빙도(氷道)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인 정풍도장의 태도는 그가 얼마나 이 청년을 사랑하는지 잘 알 수 있게 했다.
청년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깊은 신뢰와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사제(少師弟)! 부디 최선을 다해 본 파의 명예를 빛내 주기 바라네.”
“명심하겠습니다, 사형!”
청년도인은 다시 한 번 그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힌 후, 정면을 응시했다.
혈륜탈심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보았다.
“흐흐…… 애송이! 그럼 시작해 볼까!”
혈륜탈심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스스로 정인이라 칭한 청년도인에게 혈륜을 날렸다.
위이이잉!
순간, 허공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며 혈륜이 가공할 기세로 정인도장(庭人道長)에게 쏘아져 나갔다.
과연 강호의 살성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신속하고 악랄한 솜씨였다.
그러나 정인도장은 혈륜탈심의 기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틀며 일검을 쳐냈다.
카캉!
순간, 검과 혈륜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혈륜탈심은 상대가 침착하게 자신의 공격을 받아 내자 날아오는 혈륜을 회수하며 양손을 힘껏 휘둘렀다.
위잉!
그러자 혈륜에서 날카로운 경기(勁氣)가 정인도장을 갈가리 찢어발길 듯 휘몰아쳐 나갔다.
정인도장은 무지막지한 경기가 전신으로 쇄도하는 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앞으로 나가며 검을 기이하게 흔들었다.
우우웅!
파파파팟!
순간, 검에서 맑은 검명이 터져 나오며 놀랍게도 혈륜탈심의 공세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무당이 천하에 자랑하는 칠성검법(七星劒法)이었다.
“이얍!”
혈륜탈심은 이번에도 역시 정인도장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하자 약이 바짝 올랐는지 얼굴을 사납게 찡그리며 혈륜을 종횡으로 마구 그어댔다.
쿠와와……
순간, 공기가 마구 요동치며 시뻘건 강기(氣)가 정인도장을 엄습했다.
그 시뻘건 빛의 물결은 여지없이 정인도장의 전신을 난도질할 것처럼 보였다.
혈륜탈심 비장의 절초인 혈륜찬망(血輪燦芒)이었다.
정인도장은 엄청난 강기가 전신으로 다가오자 이를 악물며 허공에 둥그런 원을 그렸다.
“칠성회두(七星廻斗)!”
일순, 그의 검에서 찬란한 빛무리가 튀어나오더니 혈륜탈심이 펼친 시뻘건 강기와 공중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꽈꽝……
비무대가 지진을 만난 듯 흔들리며 동시에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우욱……!”
그 속에서 누군가 신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서서히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아……!”
“이럴 수가……!”
중인들은 너무 놀라 눈을 토끼처럼 치뜨며 비무대를 올려다보았
무공이 고강하고 손속이 잔인해 누구나 두려워 마지않던 혈륜탈심이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은 채, 비척거리며 간신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바로 앞에서 정인도장이 단정한 자세로 도호를 외는 모습도 들어왔다.
“무량수불……!”
혈륜탈심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인도장을 노려보다가 참을 수 없었는지 한 사발의 피를 토해 냈다.
“우웩!”
그는 한동안 허리를 구부리고 피를 게워 내더니 힘겨운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방금 펼친 검법이 바로 칠성회두냐?”
“그렇습니다…… 무량수불!”
“칠성검법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그는 잠시 찡그린 얼굴로 탄식을 하더니 다시 정인도장을 노려보았다.
“언젠가는…… 이 수치를 꼭 갚고야 말겠다.”
그 말을 끝으로 혈륜탈심은 비틀거리며 비무대를 내려가더니 이내 군중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 깊은 눈길로 혈륜탈심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정인도장도 정풍도장과 군웅들에게 인사를 하고 비무대를 내려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군웅들의 손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
함성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강호의 살성으로 흉명을 날리던 혈륜탈심이 이제 갓 강호에 출도한 약관의 청년이 펼친 검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중상을 입고 말았다.
강호에 또다시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저 청년도장의 검은 정말 무섭군요!”
남궁욱은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걱정이군요…… 심성이 잔혹하기로 소문난 혈륜탈심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그에게 어떤 해나 입히지 않을는지……”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철군악의 대답에 남궁욱은 의혹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비록 저 젊은 도장이 혈륜탈심보다 조금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지만, 혈륜탈심은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강호에 흉명을 떨치던 일대의 살성(殺星)인데, 호락호락하게 물러날지……”
철군악이 단지 한 마디만 내뱉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남궁욱은 의구심이 뭉게구름처럼 치솟았지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록 이번 비무에서는 혈륜탈심이 패했지만, 그의 성격으로 보아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남궁욱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만하고 잔인한 성격의 그가 언젠가는 꼭 복수를 하겠다고 나설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가 방조자라도 데리고 정인도장을 찾는다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남궁욱이 보기에 정인도장이 비록 혈륜탈심보다 강하다지만, 그와 같은 고수가 한 명 더 있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게 뻔했다.
정인도장이 무당산에만 처박혀 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라고 항상 사문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
그런데도 철군악은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했을까?
‘거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남궁욱은 아무리 궁리해도 의구심만 더해 가자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채, 다시 비무대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남궁욱은 보지 못했지만, 철군악은 정인도장이 비무를 할 때 그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정광을 보았다.
그것은 검도(劒道)가 극에 이른 고수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검기(劒氣)가 순간적으로 안광으로 표출된 것이다.
철군악은 그 눈빛을 보자 혈륜탈심 같은 고수는 열이 있어도 백의인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아차리고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비무대 위에서는 다시 새로운 고수들이 피 튀기는 혈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금 무림의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대회, 비룡승천대회는 그렇게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