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살인청부 (殺人請負)
(1)
서문화(西門華)가 일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올라 있었다.
일신에 걸친 허름한 단삼(短衫)은 어디서 주워 입었는지 여기 저기 헤지고 찢어져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은 얼마나 세면을 하지 않았는지 땟국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이상한 냄새가 풀풀 풍겨났지만 워낙 낙천적인 성격인 서문화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피둥피둥한 살집이 여간해서는 움직이기 쉽지 않아 보이는 모습 그대로 하루종일 꼼짝도 않고 늘어져라 잠을 자고 난 뒤여서 눈썹 끝에는 닭똥만 한 눈곱들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맹주(盟主)님, 일어나셨습니까?"
맹주님이라니?
개방의 똘마니 같은 이 자가 강호무림을 이끌고 있는 영도자란 말인가?
"총관(總管)이요? 들어오시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일신에 흰 유생복을 입었는데, 굳센 의지를 나타내는 꽉 다문 입술과 정기(正氣) 넘치는 두 눈이 쭉 곧은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사내였다.
무림맹 총관 지다성(知多誠) 하을현(河乙鉉), 그가 모르는 것은 하늘도 모른다고 알려진 천하제일지자(天下第一知者).
서문화는 총사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물었다.
"반응은 어떤지 좀 알아봤소?"
"짐작하시겠지만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것으로……."
하을현은 대답하기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서문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구파일방, 육문오가, 십팔봉회를 통틀어서 반색을 나타내는 문파가 하나도 없다는 건가?"
하을현은 빙긋 웃었다.
"그걸 기대하셨습니까?"
서문화는 봉두난발한 머리를 젖히고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팠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하을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포기하시겠습니까?"
"포기?"
서문화는 고개를 들어 하을현을 쳐다봤다.
하을현이 방안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 쳤다.
하을현의 눈빛은 맹주의 마음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 묻고 있었다.
서문화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손톱 끝에 붙은 귀지를 입으로 훅 불며 시답잖게 말했다.
"이렇게 엄청 큰 똥을 쏟아냈는데 밑도 닦지 말란 말이오?"
"아니면 됐습니다."
하을현은 시종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서문화에게서 확실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 듯 깊이 들이마셨던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맹주님 잊고 계신 것은 아니겠죠? 이백이십 년 전 창건된 무림맹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권위를 만천하에 떨쳐왔습니다. 백 년 전 현현교와의 싸움에서 대패하면서…… 당시 맹주였던 신도수사(神刀修士)께서 불과 삼 초만에 현현교 교주 좌엽선(左曄仙)에게 절명(絶命)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문화는 총관의 말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귀를 후비던 손가락을 이번에는 코로 가져갔다.
그가 딴 짓을 하든 말든 하을현은 창 앞으로 다가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사건 이후 무림맹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맹주의 권좌는 형식적으로 여러 문파의 수뇌들이 대충 한 번씩 거쳐 가는 자리로 변해버렸습니다. 급기야 근래에 들어서는 무림맹에 속한 각 문파들이 파견된 자파(自派) 무사들을 철수시키고 지원금조차 대폭 줄여서 맹의 존재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지난 팔 년 동안엔 서로 맹주직을 맡지 않으려고 하는 바람에 맹주가 무려 여섯 번이나 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발생했지요."
그때 등 뒤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을현은 고개를 돌렸다.
서문화가 손으로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느라 우스꽝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웃으십니까?"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소?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까지 맹주자리가 왔으니 말이야. 정말 지나가던 똥개가 보고 웃을 일이오. 개방에 몸이나 의탁해 볼까 하고 찾아갔는데 갑자기 무림맹주라니! 세상에 이보다 빠른 출세는 없을 거야."
하을현은 엄숙한 얼굴로 서문화를 응시했다.
"맹주께선 개방 방주이신 노각자(老角子)의 수제자로 개방에 들어가셨던 분! 더욱이 오대세가의 하나인 서문세가가 배출한 최고의 기재(奇才)이며 십팔봉회 중 세 곳의 전대회주께서 공동 전인으로 인정하신 분이십니다. 누구도 감히 맹주님을 비웃을 수는 없지요"
서문화는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푸하하핫!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허장성세(虛張聲勢)일 뿐…… 지금 총관이 언급한 개방과 남궁세가, 그리고 십팔봉회조차 내가 맹주가 된 걸 비웃고 있지 않소."
하을현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했다.
더 이상 맹주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대로 무림맹을 지켜온 하씨 집안의 장손(長孫)으로서의 열정이 있다.
"맹주님! 현 무림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의해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이 상황을 정립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맹주님뿐입니다."
서문화는 하을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나 태사의 쪽으로 다가갔다.
"뭐 어쨌거나 일을 이렇게 벌려놨으니 갈 때까지 가보는 수밖에……."
휙, 육중한 몸을 던져 태사의 등받이에 파묻히듯 앉았다.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이
배어나왔다.
하을현은 그 웃음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다.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손을 맞잡아 인사를 올리고는 몸을 돌렸다.
쿵!
문이 닫힌 후, 서문화는 태사의에 몸을 깊이 파묻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번에 살명부에 오른 자들은 어디서 개가 짓느냐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인데…… 이미 수십 명의 척살객들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면 뒤가 좀 캥기겠지…… 거기에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확실하고 무서운 두 살수가 이 일에 가담했다는 걸 알면 놀라 뒤로 자빠질 거야. 귀검수 왕소우는 벌써 남경을 떠났고, 화령귀객(花翎鬼客)도 대막(大漠)에서 중원으로 들어왔지."
서문화의 게슴츠레한 눈에서 갑자기 섬뜩하고 강렬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위대한 개혁이 시작되는 거야. 피와 죽음을 제물(祭物)로 삼아서……."
* * *
끝간 데 없이 펼쳐진 갈대밭.
휘스스스……!
어른의 머리 두어 개쯤은 더 커 보이는 키 큰 갈대들이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휘청이며 구슬픈 소리로 울고 있었다.
스스슥……!
움직이는 발 하나.
진흙 바닥에 줄곧 일정하게 찍히는 발자국. 그 깊이도 한결 같다.
그것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같은 거리의 보폭을 유지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 자세는 바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살수(殺手)의 걸음걸이.
약간 왜소한 체구의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바지에 검은 장삼, 그리고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
외부에 노출된 것은 검은 면사 위에 드러난 두 눈뿐. 그러나 바닷 속처럼 무심하고 고요한 그 눈만으로는 강호의 사정에 닳고 닳은 노마(老魔)들도 이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으리라.
남자, 아니면 여자?
노인일까? 아니면 청년?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흑의 인영에게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손에 들린 세 뼘 길이의 짧은 죽봉이었다.
대나무 봉이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의 봉 끝에 가는 줄에 매단 장미꽃 모양의 종은 특별한 것이다. 마치 들에서 갓 피어난 생화(生花)를 막 따서 매단 것처럼 그 세공술(細工術)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었다.
"서라!"
갈대밭 속에서 들려 온 소리는 풀기 하나 없이 메마른 음성이었다.
목소리로 추정한 나이는 대략 마흔 두 살쯤. 그렇다면 이 자는 흑천오마(黑天五魔)의 첫째 철극리(鐵極理)가 틀림없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학동처럼 흑의 인영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로 숫자를 헤아렸다.
"하나……."
딸랑!
바람에 흔들리는 듯 죽봉 끝의 장미종이 가볍게 울렸다. 맑고 청아한 종소리는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뚫어주는 느낌이었다.
흑의 인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서라고 명한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키 큰 갈대만 시야를 어지럽혔다.
"넌 누구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왼쪽이었다.
처음의 목소리 보다 낮았지만 강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아마도 흑천오마의 둘째 정운사(鄭雲史)일 것이다.
허나 이번만큼은 흑의 인영도 고분하지 않았다. 그들의 물음에 일언반구(一言半句), 대꾸도 하지 않은 것이다.
"둘……."
다만 작은 소리로 숫자를 헤아렸고 이번에도 장미종이 딸랑! 울렸다.
오른쪽 갈대밭 속에서 카랑카랑하고 끝이 갈라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오늘 아침부터 우리의 뒤를 따라붙었어. 우리가 흑천오마라는 걸 모르고 쫓지는 않았을 터! 목적이 뭐냐?"
이번에도 흑의 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셋, 하고 말했고 다시 장미종이 울렸을 뿐이다.
"크크ㅋ! 간덩이가 부은 새끼로군. 놈! 요즘 우리 형제들은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도륙을 내버리겠다."
왼쪽 어깨 뒤였다.
넷, 장미종은 어김없이 딸랑! 울렸다.
"무림맹주인 서문화가 우릴 척살대상으로 분류했다고 들었어. 그 얼간이가 보냈나?"
다섯 번째 목소리는 오른쪽 어깨 뒤에서 들렸다.
결론적으로 흑의 인영은 흑천오마에 의해 유인되었고, 앞이 보이지 않는 갈대밭에서 포위를 당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의 인영은 자기 할 일만 했다.
"다섯……."
딸랑!
지금까지와 똑같이 수를 헤아리고 장미종을 울렸을 뿐이다.
"미친놈!"
다시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공격신호인 듯 흑천오마가 숨은 장소의 갈대 잎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보다 약간 더 흔들렸다.
보통 사람이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아주 작은 움직임.
그러나 검은 면사 위로 드러난 흑의 인영의 눈은 그 어떤 사소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바람이 멎었고, 싸늘한 기운이 살갗에 느껴졌다.
쉬익……!
살기와 더불어 예리한 파공음이 들려왔고, 다섯 인영이 갈대밭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흑의 인영은 순간적으로 땅을 박차고 삼장(三丈) 높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날카로운 도풍(刀風)이 그의 발 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파아악!
흑의 인영이 뛰어올랐던 그 자리, 반경 일장(一丈) 이내는 태풍을 맞은 듯 쓸렸고, 잘린 갈대 잎들이 한꺼번에 눈보라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빠르다!"
흑천오마는 눈을 위로 들어올렸다.
흑의 인영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오른손을 아래로 쭉 뻗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죽봉이 잡혀져 있었고, 죽봉 끝은 흑천오마가 둥그렇게 모여 선 가운데를 향하고 있었다.
철극리의 살갗에 스쳐가는 불길한 느낌.
"피해랏!"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다른 네 형제의 귀에 닿기 전에 파팡! 죽봉 끝에서 붉은 광채가 폭사돼 나왔다.
쉐에엑……!
도대체 피할 엄두도 낼 수 없는 눈부신 속도.
흑천오마는 단지 아름다운 장미 꽃 한송이가 자신들에게로 날아왔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빛이 사라졌을 때, 흑천오마의 이마 한가운데에는 작은 구멍 하나씩이 뚫려져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구멍 위로 뽈록뽈록 붉은 피가 솟구쳤다.
"이, 이건 화무신관(花舞神管)…… 이제 알았어. 넌 화령귀객……."
흑의 인영은 그때서야 흑천오마의 가운데 표표히 내려서고 있었다.
"맞아. 내가 바로 대막의 살신(殺神)이라 불리던 사람이지.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생사를 묻으며 살아왔지만 이젠 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어. 내 손에 맡겨진 모든 인생들을 마감시켜 주기 위해서……."
흑천오마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화령귀객이 여인이라는 것을!
그들의 몸은 천천히 차가운 진흙바닥으로 기울어졌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갈댓잎들은 긴 머리를 휘청이며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2)
주루 주인 마국태(馬菊泰)는 주루를 연 이래 이런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인간의 뱃속에 저렇게 많은 술과 음식물이 들어갈 수 있다니……
이 손님은 특이했다.
생긴 것은 어느 명문가의 귀공자 같은데,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람 잡는 도부수처럼 우악스러웠다.
한 손에 닭다리를 잡아 뜯는데 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앙상한 뼈만 남겨졌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연거푸 들이켰다. 아니 그것은 퍼 넣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대체 며칠이나 굶었소?"
이렇게 물었지만, 그는 얘기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싱긋 웃었을 뿐이다. 물론 여전히 만두 다섯 개를 입안에 아구아구 쳐 넣으면서 말이다.
아무튼 주방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느 대갓집의 잔치상을 본다고 해도 이처럼 분주하지는 않았으리라.
주인 이외에 그를 쳐다보는 시선은 또 있었다.
탁자 한쪽에 앉아있는 다섯 사람, 모두 상인이었다.
그들은 탁자 아래에 비단보따리를 내려놓고는 요깃거리와 술 한 병을 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아까부터 이 사내의 대단한 먹성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사내를 쳐다보는 시선은 사람만이 아니다.
하얗게 빛나는 시선. 그것은 창문턱에 날개를 접고 앉은 까마귀의 것이다. 이상한 점은 이 까마귀가 다른 짐승들처럼 먹을 것이 찾는 게 아니라 사내의 얼굴만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는 점이다.
잠시 후 상위에는 깨끗하게 빈 접시들만 남겨졌다.
"끄으윽! 오랜만에 잘 먹었군."
사내는 배를 툭툭 두드리고는, 젓가락을 뚝 분질러 이쑤시개 삼아 이빨 사이를 후비며 일어섰다.
"주인장, 방이 있나?"
"그럼요. 다 준비돼 있습죠. 절 따라 오시면……."
마국태는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사내가 주인을 따라 이층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던 다섯 상인들은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틀림없지?"
"틀림없어."
"우리가 찾아냈어! 바로 천리무영이야!"
아! 그렇다.
사내는 바로 천리무영 석비룡이었던 것이다.
그는 청룡보에서 일전을 치른 후, 그때까지 청룡육존의 뒤를 쫓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것을 이곳에서 한꺼번에 풀어버린 것이다.
까마귀가 다시 푸드득! 박수치듯 날개를 치며 창문턱을 떠나 밤하늘로 날아올랐지만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 하찮은 미물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밥도 먹고 술도 먹었겠다, 이제는 늘어지게 자는 일만 남았군."
목욕을 마치고 난 후, 기분까지 상쾌해진 석비룡은 침상 위에 몸을 내던졌다.
그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팠다.
"응?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누가 내 칭찬을 하고 있나?"
그리고 침상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는 코를 벌름벌름 냄새 맡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냄새가 나는군."
석비룡은 천천히 침상에서 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방문 옆으로 소리 없이 다가가 벽에 등을 붙였다.
사박, 사박……
조용히 계단을 밟고 오르는 소리.
의도적으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발 앞꿈치로 바닥을 딛는 소리였다.
발자국 소리로 보아 한 놈이 아니었다.
두 명, 세 명……
소리가 나는 간격으로 보아 서너 장(丈)의 거리를 두고 올라오는 것이리라.
석비룡은 놈들의 숫자가 확인되는 대로 손가락을 꼽았다. 그가 내민 손의 다섯 손가락이 다 꼽아져서야 더 이상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모두 다섯 명.
바로 한 놈이 문 앞에 섰다.
석비룡은 직감으로 놈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문틈으로 가느다란 쇠막대 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달그닥, 달그닥!
쇠막대를 여러 번 비틀더니 능숙하게 빗장을 위로 올렸다.
스르르……
방문이 열렸다.
발 하나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조금 더 문을 열더니 몸이 들어왔고 이어 놈이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이었다.
"놈!"
야멸찬 기합성과 함께 석비룡이 발을 쭉 뻗어 놈의 턱을 힘껏 차올렸다.
쩍!
턱뼈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놈의 얼굴이 덜컥 뒤로 꺾였다.
"으흑!"
어둠 속에서도 놈의 이빨이 옥수수처럼 희게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료가 일격에 거꾸러지는 것을 본 두 놈이 방을 향해 몸을 던졌다.
콰직!
놈들의 어깨에 받쳐 나무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그러나 안으로 짓쳐들어오던 두 놈은 들어오던 속도 보다 더 빠르게 밖으로 튕겨 나갔다.
석비룡의 쌍장(雙掌)이 그들의 가슴을 쳐버린 것이다.
"우욱!"
한 놈은 벽으로 날아가 뒤통수를 박았다. 그의 머리통은 수박이 깨지듯 파박, 뇌수를 튀기며 박살났다.
다른 한 놈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놈은 뒤에 따라 들어오던 그들 동료가 수평으로 들고 있던 칼끝에 등을 꿰였다.
"흐윽!"
칼날이 그대로 등을 꿰뚫고 관통해 배 위로 삐죽 솟아올랐다.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동료의 피에 젖은 칼날, 공포를 느낄 사이도 없었다. 동료는 얼떨결에 칼을 뺀다는 것이 그만 놈의 배를 가르고 말았다. 마치 비단을 넓게 펴 한 가운데를 칼로 가르듯.
"흐으으으!"
그것은 공포보다도 더했다.
배가 갈라지며 울컥 피가 솟구쳤다. 밖으로 창자들이 꾸물꾸물 배 위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아랫배를 지나 끝내 그의 가랑이 사이로 칼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동료는 놀랄 사이도 없었다. 자신의 피에 흠뻑 젖은 칼을 보는 순간, 석비룡이 손날을 세워 그의 목을 쳐갔다.
딱!
단 일수(一手)에 목뼈가 부러지면서 놈의 고개가 앞으로 힘없이 푹 꺾이는 것과 동시에 석비룡은 놈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놈은 벽으로 날아갔다.
벽에 얼굴이 워낙 세게 부딪혀 마치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얼굴이 완전히 짓뭉개져 벽에 피칠을 한 다음에야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남은 것은 마지막 한 놈.
놈은 엉겁결에 혼자 방안에까지 들어왔다가 동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럴 수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방문턱도 채 넘지 못하고 동료둘이 결딴나 버린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이 채 바뀌기도 전에 석비룡의 주먹이 놈의 정수리를 힘껏 내리쳤다.
퍽!
놈의 정수리가 으깨지며 피가 이마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휘두른 주먹은 놈의 머리를 두 치도 넘게 파고들어 두개골(頭蓋骨)을 깼고 놈은 미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즉사했다.
살아남은 놈은 단 한 명이었다.
처음 방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던 놈은 턱뼈가 부서진 채 겁에 질려 석비룡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이 공자님이 자는 방엘 들어왔지?"
석비룡은 부드럽게 물었다.
"너……너는 으자……."
놈은 턱이 깨져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석비룡은 놀라운 추리력으로 놈의 말뜻을 해석해 낼 수 있었다.
"호오! 내가 천리무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뭐, 그거야 당연하지. 본좌의 위대한 이름을 모르고서야 어디 강호에 몸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야."
놈은 또 알 수 없는 소리로 으버버 거렸고,
"뭐? 명령에 따라 형을 집행하러 왔다구?"
놈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석비룡은 이제야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그렇군. 당신들은 무림맹에서 공포한 살명부의 영웅들을 처벌하기 위해 파견된 척살객(刺殺客)이란 말씀이렷다."
그는 혼자 묻고 또 혼자 대답했다.
"이것 보시오.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나도 소문들 들어 내가 죄인으로 분류되었음을 알고 있소.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으로 인한 중대한 업무착오인 것이오."
놈은 맞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깨진 턱이 근육의 신경(神經)을 건드렸는지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허나 놈은 아픔을 꾹 참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그 뜻이야 분명했다.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아하! 내 얘기를 믿으니까 용서해 달란 말이지?"
석비룡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댁을 살려주는 것도 괜찮겠지."
놈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가더니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하지만!"
석비룡은 놈의 머리를 쥐고 뒤로 젖히며 들고 있던 머리를 살짝 비틀었다.
"큭!"
놈의 얼굴이 뒤로 돌아갔고, 목뼈가 부러지며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비굴해서야 어디…… 나란 놈도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면 잔인해진 다오!"
잡았던 머리를 놓자 놈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알아? 당신들은 너무 스스로를 과신했어. 그 정도 실력으로 나를 잡겠다니 세살 먹은 아이가 다 웃을 노릇이 아니오."
석비룡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왜일까?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은 그의 귓속으로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이 백 번 천 번 옳아. 그 정도 실력으로 천리무영을 잡겠다니, 너무했지 뭐야!'
석비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바로 뒤에 접근할 때까지 몰랐다니!'
그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목소리가 매우 낯익은데…… 실례지만 뉘시오?"
또다시 들리는 전음.
'돌아보면 알게 돼.'
석비룡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막 돌아볼 참……."
손가락 하나가 그의 미간 사이를 쿡, 찔렀다.
"헉!"
석비룡은 눈앞에 있는 모든 정물(靜物)들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 얼굴을 바닥으로 향한 채 천천히 앞으로 쓰러져갔다.
쿵!
바닥에서 먼지가 풀썩 일어나고,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저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결국 내 손에 잡히고 말았어. 색광서생!"
(3)
한 소년과 한 소녀가 있었어.
그들은 가장 순수하고 맑은 영혼으로 이 세상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지. 소년은 죽는 그 날까지 소녀를 지켜 준다고 약속했지만……
어느 날, 소녀가 가장 슬픈 모습으로 다가와 이별을 말했어.
그 후 소년의 악몽은 시작됐어.
끝없이 이어지는 저주의 악몽(惡夢)이……
훌쩍 커 버린 지금도 그 꿈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꿈이 시작되고 있었다.
설혜의 모습이 보였다.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석비룡은 그녀의 밝은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뭘 하는 거야?"
석비룡은 자기 주위에서 맴도는 설혜를 쳐다봤다.
"가만 좀 있어 보라니까."
설혜는 석비룡 주위를 빙빙 돌며 킁킁 냄새를 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제 제법 냄새가 나는데!"
석비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무슨 냄새?"
설혜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의 코를 꾹 눌렀다.
"그렇게 시치미 떼면 누가 모를 줄 알아? 우리 아버지가 천년무고(千年武庫)에서 수백 년간 밀봉되어 있던 무영비록(無影秘錄)을 꺼내 운비에게 전했다는 걸!"
석비룡은 깜짝 놀라 황급히 설혜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조심해! 누가 들으면 어쩔려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석비룡의 모습을 보며 설혜는 까르르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짐짓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석비룡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빠가 그랬어. 장차 비룡은 천하무적의 고수가 될 거라고."
"물론이지."
석비룡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문제는 세상은 끝없이 넓고, 인재는 구름처럼 많다는 거지. 뭐 잘하면 한 백대고수 안에는 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설혜는 흥! 코웃음을 치며 살짝 눈을 흘겼다.
"미워! 또 엄살이야?"
그러면서 석비룡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비룡은 꼭 천하무적이 될 거야. 웬 줄 알아?"
석비룡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고, 설혜는 볼을 살짝 붉히며 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그건…… 바로 비룡이 설혜의 자랑이기 때문이야"
석비룡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지만, 향긋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내음에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단어가 뒤죽박죽 섞여 버리고 만 것이다.
석비룡은 눈까풀을 껌벅였다.
그의 사고도,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도, 세상의 그 모든 일들도 깜박거렸다.
"설혜……."
그의 정신은 가물가물 의식의 이편과 저편을 넘나들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믿고만 싶었다.
"설혜, 날 좀 쳐다봐."
"왜?"
설혜는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깨달았다.
"왜, 왜 그래? 비룡!"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눈만 동그랗게 떴을 뿐이다.
"난 반드시 천하무적이 될 거야. 설혜를 위해서……."
석비룡의 손이 설혜의 어깨를 안았을 때,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혜의 눈과 그의 눈이, 입술과 입술이 지척에 있었다.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난 믿어. 언제까지나…… 비룡이 날 지켜 줄 것을…….'
석비룡은 서서히 설혜의 보드라운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설혜는 기나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꽃잎처럼 붉은 입술을 반쯤 열었다.
"아……!"
입술과 입술을 맞닿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며 달디 단 숨결을 그의 입술 속으로 불어넣었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감미로운 입맞춤.
석비룡은 그저 이대로 영원히 설혜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검고 윤기 찬 머리와 넓고 흰 이마, 검은 눈썹, 별처럼 초롱한 눈빛, 오똑한 콧날, 약간 도톰한 입술, 긴 목덜미 그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이었다.
석비룡의 입술은 마치 자신의 것임을 확인이라도 하듯 설혜의 얼굴, 모든 부위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설혜의 긴 목덜미를 더듬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목과 어깨의 곡선을 따라 내려가 쇄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설혜의 섬세한 피부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가슴 쪽으로 스르르 다가드는 손가락은 하얀 피부색과도 같은 연한 핑크색의 꽃판과 작고 납작한 젖꼭지로 다가갔다.
설혜는 너무 긴장해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석비룡의 왼팔이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휘감았고, 오른손이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황홀한 감촉!
옷자락을 헤집고 드러나는 우윳빛처럼 뽀얀 어깨와 그 아래 유려한 곡선을 타고 흘러내리다 다시 봉긋이 솟아오른 젖가슴, 살결을 타고 수줍게 숨어 있어 간신히 숨을 쉬는 것 같은 앙증스러운 배꼽.
"설혜…… 넌 너무 향기로워……."
"아아…… 비룡……."
마음이 녹으면서 몸은 급하게 달아올랐다.
설혜의 티 하나 없는 수정같이 맑은 눈. 신비한 그 눈에 떠도는 뜨거움을 이제 감추지 않아도 되었다.
석비룡은 설혜의 상큼한 유실을 베어 물었다.
"아아……!"
설혜는 자신의 몸을 매만지는 석비룡의 입술과 손길에서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석비룡의 손길에 의해 그녀의 보드라운 비단옷이 헐거워지며, 대리석 같은 두 다리를 아쉬운 듯 휘감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매끄럽고 탄력 있는 나신, 한껏 무르익은 능금 같은 여인의 몸이었다.
햇살처럼 눈부시고 이슬처럼 투명한 피부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그때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그녀의 어깨에 맑게 부서지며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나신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아, 안돼!"
석비룡은 외쳤다.
햇볕이 그녀의 몸을 덮는 순간, 그녀의 몸이 햇볕 속에 묻혀 사라져가는 것이다.
석비룡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눈을 뜬 그 곳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이었다.
"꿈! 또 꿈이었단 말인가?"
의식을 차리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난 일……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음에도 그 꿈을 꾸고 나면 가슴 속에는 괴로움만 증폭됐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때 발아래에서 철커덩!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석비룡은 자신의 손목과 발목이 큰 족쇄로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곧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혈도를 찍혀 쓰러졌던 것을 생각하고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그 어처구니없는 일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단 말이야?"
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대체 누구였을까? 아무리 내가 방심한 상황이었다지만 그만한 솜씨라면 무림에서 손꼽을 정도일 텐데…….'
석비룡은 손과 발을 묶은 족쇄를 내려다보며 냉소(冷笑)를 날렸다.
"허나! 이 정도로 날 옭아맬 수 있다고 여겼다면 큰 오산이지!"
족쇄에 매달린 사슬을 양 손목에 칭칭 감았다.
"흐압!"
내공(內功)을 끌어올리며 손목을 양쪽으로 쫙 당기자 한 순간 쇠사슬은 착 늘어나면서 팽팽해졌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일순 석비룡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허억! 다……단전에 내공이 모이지 않아!'
갑자기 맥이 탁 풀려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몸은 지금 금제(禁制)가 된 상태야. 쓸데없는 짓을 하면 고통만 가중된다는 걸 명심해!"
석비룡은 고개를 들렸다. 등 뒤에서 암습을 가했던, 혈(穴)을 찍었던 자의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윤곽.
석비룡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너, 너는 바로……."
상대를 알아본 석비룡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그 앞에는 칠채월화 벽소운이 팔짱을 낀 거만한 모습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비룡의 두 눈 속에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러니까…… 날 암습한 작자가 바로?"
벽소운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대답했다.
"그래. 바로 나야!"
석비룡은 그 모습을 보자, 가슴 속에 들끓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킥!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귀하고 고결하신 칠채월화께서 그렇게 비겁한 수를 쓸 줄은 미처 몰랐군."
벽소운은 가소롭다는 듯 빙긋 웃었다.
"미꾸라지 같은 천리무영을 잡는 방법으로는 괜찮은 편이었지."
석비룡은 입맛을 쩝 다셨다.
"스스로 고명하다고 얼굴에 금칠을 하니 할 말이 없군. 좋아! 그건 그렇고 한 가지만 물어보자.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난 삼 개월 전에 한 가지 부탁을 받았지. 천리무영을 잡아달라는…… 청룡보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해치울 수도 있었지만 좀 더 완벽한 기회를 잡기 위해 줄곧 미행했었지."
석비룡은 흥! 코웃음을 쳤다.
"칠채월화가 무림맹의 척살객일 줄은 미처 몰랐군"
"무림맹의 척살객?"
벽소운이 이렇게 되묻고는 돌연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석비룡은 그녀의 갑작스런 웃음에 표정이 약간 멍해지며 물었다.
"왜 웃는 거지?"
"누가 그 멍청한 무림맹의 일을 하고 있다는 거야?"
석비룡은 더욱 알 수 없었다.
"그럼 누가 청탁했다는 거야?"
벽소운은 짧게 대답했다.
"신수궁!"
석비룡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군. 신수궁이면 정도 무림의 주축 가운데 하나로 무림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인데……."
벽소운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내저었다.
"이건 경우가 달라."
"다르다니, 뭐가?"
석비룡은 어쩐지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으나 그 참뜻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벌써 잊었어? 불과 석 달 전의 일을……."
벽소운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석 달 전?"
석비룡은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벽소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대단한 남자군! 당신의 파렴치한 행위 때문에 한 여인의 순수한 영혼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걸 벌써 잊었단 말야!"
석비룡은 펄쩍 뛰었다.
"대체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벽소운은 입술 끝을 위로 지그시 치켜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후후! 운가려라는 이름을 들어도 기억이 안 난다고 우길 텐가?"
"뭐, 운가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석비룡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운가려라면 바로 자신이 절대음맥을 고쳐 주었던 여인.
"운가려는 신수궁의 금지옥엽인 동시에 나의 의동생이야. 이제 좀 이해가 되나?"
석비룡은 눈 앞이 캄캄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아! 더 이상 숨 쉬고 살기 틀렸구나.'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폭폭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