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석의 아이들' 창신대학교 족구단(이후 마산로봇랜드, 세신버팔로 등으로 팀명 변경)의 등장은 족구계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대학 족구의 선두 주자를 자처했던 한세대학교 족구단의 대학 족구 라이벌로 부상했고, 이후 당시 절대 강자였던 현대파워텍의 아성마저 넘볼 위치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장한빈이라는 강력한 창과 컴퓨터 세터 김종세, 박성진 그리고 천유빈, 김광훈이 이루는 막강 수비라인을 앞세워 다크호스를 넘어 매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로 부상했다.
졸업 후 천유빈, 김종세는 현대파워텍으로 장한빈, 박성진은 하이트진로음료에 입사하며 계속해서 활약했지만 유독 김광훈만은 어느새 우리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광주의 삼성전자에 취업은 했지만 팀 내부 사정에 의해 더 이상 족구단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못 본 그를 '2021~22 서천군 MBC스포츠플러스 족구 챔피언스리그' 대회장에서 만났다. 천후족구단 소속으로 오랜만에 최강부에 복귀했기에 잠시나마 대화를 나누었고, 흔쾌히 칼럼 쓰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창원의 축구 소년, 족구에 발을 들이다.
1990년 창원에서 출생한 그는 축구 선수를 꿈꾸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시절, 운동을 하다가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운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공부와는 멀어져 있었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보았지만 성적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가 입학할 수 있는 학교는 창원공고 밖에 없었다.
창원공고 입학식 날, 우연히 초등학교 시절 함께 운동했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는데 그때 창원공고에 족구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해왔고, 공부보다는 운동이 적성에 더 맞는다고 생각해 친구와 함께 족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김광훈이 입학하기 1년 전, 창원시청에서는 창원시 족구연합회 측에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족구'를 가르칠 것을 권유했다. 연합회 측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특별활동 시간에 '족구'를 배정해 줄 학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원남고, 경일고에서는 모두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바로 창원공고였고, 창원공고의 체육부장은 이를 수용하여 학교 측의 허가를 받고 방과 후 특별활동 시간에 '족구'를 배정했다. 당시 연합회의 이상석 사무장이 강사를 맡아 학생들에게 '족구의 유래 및 규칙'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의외로 좋아 교내에 '족구 동아리'가 만들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창원공고 족구단 2기
창원공고 족구단 2기 멤버는 김광훈을 비롯하여 12명이었고 각자의 포지션을 배정하기 위해 이상석 감독은 선수들에게 의사를 물었다.
테스트를 진행 한 후 감독님께서 한 명씩 어느 포지션을 원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제 차례만 기다리며 '공격수라고 말해야지'하고 있는데 저에게는 묻지도 않으시고 '넌 수비해'라고 하시면서 지나가셨습니다.(웃음) 제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수비를 하게 되어 더 잘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감독님께 감사합니다.
보통의 축구 선수 출신들에게 족구를 처음 시켜보면 '족구는 시시한 운동' 혹은 '축구를 잘하면 족구는 자연스럽게 잘한다'는 인식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김광훈은 어땠을까?
족구를 쉽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발과 머리로 공을 컨트롤한다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족구를 시작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창원시 관내 일반부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정확한 스코어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참한 스코어로 깨지고 온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족구를 쉽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둔 이후였기 때문에 김광훈은 족구에 더욱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시간의 팀 훈련 이외에도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이 있으면 제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개인 훈련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왼발 컨트롤도 오른발과 비슷하게 하기 위해 왼발 훈련을 특히 많이 했고, 그 외에는 저만의 방식으로 민첩성과 지구력을 기르는 훈련들을 병행했습니다. 이후에는 동영상을 많이 시청하며 우리와 상대해야 하는 팀들을 열심히 분석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해서부터 삼성전자에 입사할 때까지 8년 동안 제가 해 온 노력에 저 자신도 만족하고 있고, 아마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것 같습니다.(웃음)
창신대학교 입학
당시 여느 고등학생 선수들이 그렇듯이 김광훈도 한세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 창원공고 팀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창원에 소재한 창신대학에서 족구 특기생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한세대 1기 선배님들을 보면서 저도 꿈을 키웠기 때문에 한세대에 입학을 목표로 운동을 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 팀의 인원도 점점 늘어나면서 그들과 같은 팀이 아닌 상대팀으로 경쟁 상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3학년이 되던 해에 감독님께서 창신대에 족구팀이 창단될 수 있도록 학교 측과 이야기가 되었다고 하셔서 망설임 없이 동기들과 함께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창원공고와 창신대 족구팀을 이끌었던 이상석 감독은 상당히 엄한 스타일의 지도자였다. 그의 지도 철학은 이랬다.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다. 남들 놀때 놀고, 쉴 때 쉰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그들을 이길 수 있겠느냐'면서 많은 연습량과 운동량을 항상 주문했다. 그러다 보니 매주 월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들은 모두 훈련을 했고 주말에는 한 주도 쉬지 않고 대회에 참석했다. 힘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직접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감독님은 정말 엄하신 분이셨습니다. 선수들 중 누구 하나 감독님께 말 한 번 붙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독님의 지도 철학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감독님의 진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독님께서는 저희를 지도하시는데 단 한 번도 금전적인 대가를 받지 않으셨고, 대회장에 갈 때마다 승합차를 렌트해서 이동했는데 항상 운전을 직접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회장에서는 다른 최강부 팀 감독님들께 '저희 선수들 잘 좀 눈여겨 봐주시고 필요하시면 데리고 가셔서 취직도 시켜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시며 저희의 앞날을 항상 걱정해 주셨습니다. 감독님과 저희 선수들은 어떻게 보면 그저 일면식도 없는 사이일 수도 있지만 이런 저희들을 위해 자신의 소중했던 시간과 세월을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선수들 모두 마음속의 아버지로 모시고 계신 분이시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감독과 선수들의 유대관계 속에서 창신대학교 족구팀은 나날이 성장해 갔고, 태백에서 벌어진 제4회 노동부장관기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강호의 면모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김광훈은 천유빈과 함께 난공불락의 수비라인을 구축하며 팀의 최후방을 든든히 지켜내었다.
김광훈에게는 많은 장점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그가 '발'을 가장 잘 쓰는 수비수였다는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낮은 자세에서 정교한 발 컨트롤로 어떤 공이든 안정적으로 받아내었고, 긴 비거리의 A킥 공격을 잘 받아내는 파트너 천유빈이 돌아가면 비어있는 공간을 확실히 커버하는 넓은 수비 범위 또한 일품이었다.
삼성전자에서 조이킥스포츠로
창신대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김광훈은 삼성전자에 입단했다. 사실 그의 삼성전자 입단은 여러 가지 면에서 족구 팬들에게 많은 기대를 갖게 했다.
한세대 역대 최고의 수비라인은 권혁진-김동휘를, 창신대는 천유빈-김광훈을 꼽는다. 그런데 이 수비라인이 졸업 후 서로 파트너만 바꿔서 팀을 이룬 것이다. 천유빈-김동휘는 현대파워텍에서 그리고 김광훈은 권혁진과 함께 삼성전자에서 각각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게다가 현대파워텍의 공격수 강만규와 삼성전자의 공격수 이광재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대파워텍과 삼성전자의 대결은 선수들의 이름값뿐만이 아닌 당대 최고의 라이벌 공격수의 대결과 과거 한 팀이었던 수비라인이 파트너만 바꿔 적으로 마주치는 스토리라인까지 갖춘 최고의 흥행카드(?)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광재의 퇴사와 삼성전자의 여러 가지 내부 사정으로 인해 아쉽게도 이들의 꿈의 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현대파워텍은 승승장구하며 최강의 자리에 계속 머물렀지만 삼성전자는 일반부에서만 간간히 모습을 비추었을 뿐, 언제부턴가 족구계에서 잠적(?)을 했다.
김광훈은 약 4년간의 공백을 깨고 조금은 낯선 조이킥스포츠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2019 시즌 시작 전, (임)상욱이 형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조이킥스포츠 팀에 수비수가 한 명이 필요한데 저보고 함께 하자는 것이었죠. 사실 오랫동안 족구를 하지 않아 최강부에서 뛰는 것은 민폐라고 생각했고, 아내가 둘째를 임신 중이어서 시합을 다니는 시간적인 여건도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상욱이 형의 간곡한 부탁을 마냥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아내와 얘기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광재 형, 상욱이 형 그리고 (신)진이와 같은 대단한 선수들과 다시 한 팀으로 운동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고, '이번 기회 마저도 놓치면 다시는 족구를 하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최강부 우승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많이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을 아내에게 잘 이야기 해서 둘째를 출산하기 전까지만 하기로 합의하였고, 2번이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조이킥스포츠 시절,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2019 시즌에 벌어졌던 향수옥천배였다. 이 대회는 이 멤버들의 마지막 대회였다. 임상욱은 부산 일등가로 김광훈은 둘째 아이의 출산으로 팀을 떠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는 인조잔디의 특성을 이용한 이광재를 비롯한 노련한 선수들은 어린 선수들이 주축이었던 이천시민족구단을 결승에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함께하는 마지막 대회라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았는지 마지막 점수를 내고 그 자리에서 드러누웠던 김광훈과 그리고 4명이서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 애틋함과 감동을 느낀 경기였다.
이후 김광훈은 또 한 번의 공백기를 가지다가 지금은 천후족구단에서 다시 한번 비상을 꿈꾸고 있다.
천후족구단의 오석봉 감독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운동을 쉬고 있던 중 함께 해보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시합을 자주 나가기도 힘들고 운동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설명을 드렸지만 저에게 많은 것을 맞춰주시고 배려해 주셨고, 친구인 (이)웅걸이도 마음 편히 같이 해보자고 해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최정상급 수비수였기에 졸업 후에도 상당히 기대가 되었지만 회사 사정으로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하지만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 범위, 마치 여러 개의 발이 달린 것처럼 후방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거미줄 같은 수비 능력 그리고 최고의 발 컨트롤을 보여준 그의 모습에 왠지 거미인간 '스파이더맨'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앞으로 남은 그의 족구 인생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으나 코트를 휘젓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김광훈과 1문 1답
Q. 본인 소개?
A. 현재 수원 삼성전자에서 근무 중인 17년 차 족구인 김광훈입니다. 1990년 생이고 가족으로는 아내와 토끼 같은 두 딸(6살, 4살)이 있습니다.
Q. 창신대 시절 재미있었던 일들? 선수들 간의 불화가 있었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A. 항상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기억나는 몇 가지는 다행히 좋았던 일들이네요.(웃음) 대회명은 기억나지 않는데 로봇랜드 유니폼을 입고 시합을 다닐 때였습니다. 당시 최강부 2팀(로봇랜드, 로봇랜드 그리프) 그리고 일반부 1팀(창신대)으로 시합을 다녔는데 전국대회에서 최강부 2팀이 결승에서 만나 우승, 준우승 그리고 일반부도 우승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불화는 아닌데 스트레스받았던 일은 매년 꾸준히 성적을 잘 내오다가 주축 선수였던 천유빈, 김종세 선수가 현대파워텍으로 입사하면서 동생들과 팀을 새롭게 꾸리게 되었습니다. 시즌 초반 경기력이 많이 흔들리다 보니 성적도 부진해 여러모로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이후 매 시합 후 동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며 부족한 부분과 상대팀의 약점을 분석하였고, 이를 토대로 운동장에서 강도 높은 훈련과 운동량으로 극복했던 것 같습니다.
Q. 창신대를 떠났을 때 기분은?
A. '시원 섭섭'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많은 노력을 했고 그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이루기도 했기에 정말 좋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감독님과 동료들과 함께했던 정들고 익숙한 곳을 떠나게 된다는 점이 섭섭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Q. 은사이신 이상석 감독님께 한 말씀드린다면?
A. 제가 무엇을 하든 모든 부분에 있어 감독님을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지금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독님을 존경하는 마음은 저뿐만이 아니라 두대회의 모든 선수들이 같은 마음이고 저희 두대회 선수들에게 감독님은 아버지이자 은인이십니다.
감독님! 무엇보다도 항상 건강하시고 평생 감사한 마음으로 보답드리며 살겠습니다. 코로나 잠잠해지면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감독님!
Q. 새로운 둥지 삼성전자에 입사했는데 마음이 어땠는지?
A. 족구를 시작하면서 대기업 입사라는 목표 하나만을 가지고 달려왔는데 그 목표를 이룬 순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창 시절 존경해왔던 선배님들과 새로운 팀에 소속되어 함께 운동한다는 생각에 기대가 컸지만 여긴 운동보다는 업무가 먼저인 회사였습니다.(웃음) 두대회에서 유일하게 입사하다 보니 때로는 외롭고 모든 게 낯설었지만 먼저 입사하셨던 한세대 선배님들께서 많이 채워주시고 챙겨주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많은 후배들과 있었는데 입사해보니 막내가 되었고 챙김을 받는 현실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Q.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한동안 최강부에서 활동을 못했는데 서운하거나 족구를 하고 싶은 열망은 없었는지?
A.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서운하기도 했고, 족구를 하고 싶은 열망에 엄청 목말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컨디션이나 몸 상태도 가장 좋았던 시기였는데 그때 계속 족구를 했다면 지금 보다는 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내려놓게 되더군요. 그래도 제 마음 한구석에는 그 열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조이킥에 들어간 가장 큰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A. 두 경기가 기억납니다. 첫 번째는 로봇랜드 시절 평택에서 열린 슈퍼오닝배 결승전이었습니다. 당시 두 번의 부전승으로 준결승전 딱 한 경기만 치르고 결승에서 부천중앙과 맞붙었는데 경기 시간만 한 시간 반이 넘는 장시간 경기였습니다. 나중에 동영상으로 보니 등에 백넘버가 안 보일 정도로 흙투성이가 된 혈투 끝에 이루어낸 우승이었기에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두 번째는 조이킥스포츠 소속으로 뛴 2019년 청양에서 열렸던 대한민국족구협회장기였습니다. 2년 넘게 운동을 쉰 데다가 5,6년 만에 최강부에서 다시 뛰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게다가 4명이 호흡을 맞춘 지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최강 투윈을 예선, 8강에서 두 번이나 만나 모두 승리했고, 4강에서는 이천시민을 그리고 결승에서는 한빈이가 있는 일등가에게 승리했습니다. 예선부터 결승까지 모두 쉽지 않은 경기였으나 좋은 경기력으로 우승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Q. 가장 마음 아팠던 경기가 있다면?
A. 승부욕이 강해 대회에서는 물론이고 연습경기든 교류전이든 지고 나면 항상 마음이 불편하고 아파서 한 경기만 꼽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웃음)
Q. 같은 포지션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선수는?
A. 당연히 신진이 선수라고 답해야 진이가 섭섭해하지 않겠죠?(웃음) 농담이고요, 진이와는 어쩔 수 없는, 당연함을 넘어 일부러 만들어 내려고 해도 만들기 힘든 숙명의 라이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동갑에 같은 포지션, 소속팀은 대학 라이벌, 게다가 체격까지 비슷했죠. 제가 부족한 부분은 진이를 보며 배웠고, 진이 또한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로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을 했기 때문에 좋은 자극제가 되었고 더 열심히 했기에 함께 성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그런 감정 전혀 없이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Q. 신진이 선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A. 진이가 라이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매번 저를 꼽았고, 주위에서도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항상 고맙고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진이는 항상 노력하고 성실하고 경기장 안에서 기복 없는 안정된 플레이를 하는 선수입니다. 대학 시절 진이와 가끔 언젠가 같은 팀에서 호흡을 맞춰보자고 농담처럼 주고받기는 했는데 조이킥스포츠에서 호흡을 맞춰보니 제가 생각한 것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승부욕이 있어 좌수비 기량만은 양보 못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무승부로 하고요(웃음) 조이킥스포츠에서 진이가 우수비를 맡았는데 우수비에서도 좌수비만큼의 기량을 보여주었고, 함께 뛰면서 부족함을 못 느꼈기 때문에 족구는 진이가 한 수 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Q. 롤모델로 꼽는 선수가 있다면?
A. 과거 LG디오스와 현대파워텍에서 뛰었던 조경현 선수와 이천시청에서 뛰었던 배창현 선수입니다. 두 분 모두 발이 빠르셔서 A 공격 시 우수비 자리를 커버하는 능력, 긴 연타 페인트를 받아내는 능력과 로빙볼 처리까지 정말 배울 점이 많아 항상 두 분의 동영상과 경기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배웠고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만나 뵈면 노하우나 수비하는 방법을 여쭤보고는 했는데 많이 알려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고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Q.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웠던 공격수는?
A. 현 LG디오스의 성락신 감독님입니다. 족구를 시작하면서 같은 창원에 있어서 많이 배웠고, 고향이 같아서 운동하실 때 뒤에서 몰래 분석하고는 했는데 상대편으로 만나면 정말 까다로웠습니다. 저는 상대 공격수의 습관, 패턴, 타이밍을 보고 수비하는데 항상 저 보다 더 많은 수를 읽고 경기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한빈이 입니다. 모두가 잘 아는 실력자라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와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기에 잘 알지만 한빈이도 저를 잘 알죠. 그래서인지 요즘은 상태가 안 좋은 제 쪽으로 득점 루트를 만들어 나가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습니다.(웃음)
Q. 족구 이외의 또 다른 취미가 있다면?
A.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고, 선수를 꿈꾸기도 해서인지 지금도 족구 이외의 취미는 축구입니다. 요즘은 족구보다 축구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네요.(웃음) 나중에는 딸들 다 키워놓고 축구 말고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취미도 가져보고 싶습니다.
Q. 족구를 하면서 감사한 분들이 계시다면?
A. 족구를 시작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입사를 하면서 별 탈 없이 지금까지 지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많은 분들의 도움과 격려 그리고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은사이신 이상석 감독님, 이제는 형제와도 같은 두대회 선수들 모두 그리고 입사한 이후 정말 친형처럼 챙겨주고 예뻐해 주셨던 (권)혁진이 형, (이)승호 형, (강)성준이 형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분들이 계셔서 모두 언급드릴 순 없지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 전하고, 마지막으로 부족한 가장을 위해 항상 힘을 북돋아 주는 우리 집의 세 공주에게도 고맙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Q. 김광훈에게 족구란?
A. 저에게 '족구'를 빼면 할 이야기가 반 이상은 줄어들 것 같습니다. '족구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기 어렵지만 제 인생의 반 이상을 이미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동반자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성장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준 좋은 동반자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함께 가고 싶습니다.
김광훈을 말하는 사람들
이광재(조이킥스포츠): 한세대 선수들끼리 모인 사석에서 가끔 한세대와 창신대 선수들을 재미로 포지션별로 비교해 보곤 했습니다. 광훈이는 우리와 출신은 다르지만 가장 한세대 스타일에 가까운 선수였고 우리보다 더 뛰어난 기본기를 바탕으로 수비 자세가 가장 안정적인 선수로 평가되곤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같은 팀에서 호흡을 맞추면서 느낀 점은 예의 바르고 선후배 관계가 확실한 선수였습니다. 또한 '준비가 안되면 시합을 나갈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자기 관리를 정말 잘한다고 느꼈습니다.
권혁진(조이킥스포츠): 이보다 더 독할 순 없다. 제가 봐온 선수들 중 연습 때나 경기 중에 광훈이처럼 모든 공 하나하나에 진심인 선수는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공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경기중에 정말 파이팅이 넘치고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경기를 위해 생각하고 파악하고 팀을 이끌어가는 핵심 선수입니다. 승부욕도 어마어마합니다.(웃음) 선수들은 나이가 들어가면 본인의 실력에 대해서 언급할 때,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광훈이는 오히려 하나씩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광훈이와 함께 호흡을 맞추면 저와 성향이 비슷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편했는데 광훈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실력이 좋은 좌수비 선수들의 공통점은 바로 '눈'입니다. 광훈이 역시 그 눈이 아주 좋은 선수입니다. 상대 공격수의 모션, 패턴, 습관 등을 빠르게 파악해서 적용합니다. 물론 기본기와 리시브, 로빙볼 처리능력도 탁월합니다. 개인적으로 광훈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광훈아! 삼성전자 입사 후 우여곡절도 많았고 힘든 일도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고 지금은 가정도 이루고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너무 고맙다"
강성준(조이킥스포츠): 한때 신진이 선수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실력이 좋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운동을 많이 안 하지만 썩혀두기 아까운 선수입니다.
박수훈(여주시민): 부드러운 외모지만 경기장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동생입니다. 광훈이가 마산로봇랜드에 있을 때 상대하면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천유빈-김광훈 라인은 공격수로서 정말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조합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경기장에서 자주 만났으면 좋겠고, 열심히 하고 있는 광훈이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김종세(서산JC): 광훈이는 운동에 대해 욕심이 많고 자기 관리에 완벽함을 보여준 친구입니다. 이런 점이 주장으로서 본보기가 되어 잘 이끌어주었는데 간혹 까탈스럽기도 했습니다.(웃음)
장한빈(일등가): 30 넘으면 친구 하기로.... 존경합니다(웃음) 양발을 가장 잘 쓰는 좌수비이자 상대방의 버릇 습관 패턴 전략 등을 빠르게 파악했고, 공격 조언도 많이 해주었습니다. 때때로 잘 삐지고 소심하지만 전국에서 가장 잘 생긴 좌수비입니다.
남성우(창원썬): 광훈이 형은 일단 수비 위치를 잘 잡으며 발 리시브의 안정감이 정말 좋은 선수입니다. 또한 경기 흐름을 잘 파악하여 포지션별로 맡아야 할 전략을 잘 짚어주며 경기 분위기를 잘 주도했습니다. 제가 A킥을 대비하기 위해 돌아갈 때 광훈이 형이 커버해 준다는 든든함이 있어 정말 마음 편히 돌아갔습니다. 평소에는 동생들도 잘 챙기고 농담도 하면서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지만 운동장에서는 엄한 스타일이었습니다. 좌수비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능력을 골고루 갖춘 멋진 선수인 것 같습니다.
박성호(용인신갈): 2011년 때 정말 자주 붙었던 선수였습니다. 리시브 좋고 수비할 때 포기가 없는 선수입니다. 항상 몸을 아끼지 않아 옷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고는 했었습니다. 광훈이 형의 라이벌 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취재에 응해주시고 칼럼 쓰는 것을 허락해 준 김광훈 선수와 많은 도움을 주신 선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