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질문 1,2,3은 동일 종류의 질문으로 볼 수 있으며 하나의 답변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2, 3: 17세기 스피노자는 실체, 곧 하느님에 대하여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근거로서 하느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실체(=하느님)가 목적을 가진다면 그것은 부족함이 있어 무언가를 원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완전하다는 정의에 불합리한 모순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세계의 진행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원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자유 원인과 자기 원인을 구별하고 있는데 자기 원인은 실체가 존재하는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늘 자연의 사물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유 원인이란 자기에 의해 자유롭게(목적 없이) 사물이 무한히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목적이라는 용어가 신의 존재와 사물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에 쓸 수 있다고 합니다. 그(스피노자)는 하느님이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으로 존재하며, 그의 속성 곧 실체가 변용된 것이 자연의 사물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흔히 피조물로 표현되는 사물이 하느님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조각일 뿐이며 모든 것이 상호의존하는 것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조각이며 속성과 능력의 일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4. 그분은 진정한 의미에서 목적을 갖지 않지만 4의 답변을 위해서 목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미 양해를 구했으므로 사용하겠습니다. 이 자연이, 실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현재의 자연 자체로도 완벽한 시스템이지만 점진적으로 더 완전한 상태로 드러냅니다(잠언 4:18 ^^). 따라서 인간의 상태로 진화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창조론으로 말하자면 창조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호모 사피엔스) 다음의 창조(또는 진화)는 호모 데우스입니다. 이러한 창조 또는 진화는 하느님이 인간처럼 자동차를 만드는 것과 같은 조립창조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자연의 기존 질서를 이용해서, 다시 말하면 기존하는 인간이 스스로 이성을 사용해서 호모 데우스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역시 하느님의 일부이므로 그의 속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 하는 것이 곧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성서 또는 기독교 신학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 인간이 예수와 같아지는 상태로 묘사하여 그것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으로 묘사하며, 하느님의 목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역사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종의 가설이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고, 믿음이란 자체가 사실로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확실성은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그러한 관점에서 '불가지론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확신할수록 단지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성취를 위하여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목적'을 믿는다면, 님은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워치타워 영업활동에 뛰어드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