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스님 ‘왕오천축국전’ 나온 ‘불화의 보물창고’
지난해 겨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918~1392)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하여 ‘대고려전’이 열렸다. 고려시대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문화를 이어 과거의 전통을 융합하고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를 이룬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고려 뿐 아니라 송, 요, 금 등 주변 국가들의 미술품도 다수 전시되어 ‘세계사 속의 고려’, ‘글로벌’한 고려문화의 성격을 잘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필자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몇 점의 중국 불화, 즉 지장보살도와 수월관음도, 비사문천도, 치성광여래왕림도, 관음보살도, <예수시왕생칠경> 변상도 등이었다. 안내문에는 이 불화들이 모두 돈황 천불동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돈황 천불동이라면 돈황 막고굴을 가리키는 것인데, 벽화로 가득한 돈황석굴에서 이런 그림들이 발견되었다니 매우 흥미롭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인 1900년 6월 2일, 막고굴의 북쪽 끝부분에 위치한 석굴에 살고 있던 도사 왕원록(王圓籙, 1850~1931)은 16굴의 통로 벽면 아래쪽에 균열이 난 것을 발견하였다. 벽을 두드리자 빈 굴에서 나는 울림소리가 들렸고, 이에 벽면을 조금씩 뜯자 길이와 너비가 각각 3미터 정도 되는 조그만 방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방 안에는 수많은 경전과 회화, 자수, 고문서류, 탁본 등이 천장까지 가득 쌓여 있었다. 16굴은 원래 돈황이 토번의 지배에서 벗어난 당 선종 때(848년), 당시 돈황의 유력가인 귀의군절도사 장의조(張義朝)가 그를 도와준 고승 홍변(洪辯)의 자문을 받아 만든 굴인데, 16굴의 입구 오른쪽에 있던 조그마한 홍변의 영굴(影窟, 기념굴)에서 왕원록이 5만 여권의 유물을 발견했다. 바로 17굴 장경동(藏經洞)의 발견이었다.
1907년 3월, 영국의 탐험가 오렐 스타인(1862~1943)은 같은 고향 출신인 롯치(Loczy)의 제안에 따라 돈황 막고굴을 탐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경동에서 대량의 필사본과 비단 그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1907년 3월 돈황에 이르렀다. 당시 왕도사는 피폐해진 석굴을 보수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었으며, 사본(寫本)과 탱화 일부를 이미 매각한 후였으나, 오렐 스타인은 왕원록을 설득하여 200냥의 은자를 구입, 29개의 상자에 담아 런던으로 가져갔다.
스타인이 다녀간 다음 해 1908년에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P. Pelliot, 1878~1945)가 왕도사를 매수해 500냥의 은자를 주고 5000여 점의 유물을 사들여 프랑스로 반출하였다. 이후 1911년에는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도 500여 권의 유물을 챙겨갔다.
이렇게 17굴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영국박물관과 인도 뉴델리박물관, 프랑스 기메(Guimet)동양미술관 등에 소장되었으며, 오타니탐험대가 가져온 유물 중 일부는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1919년 중화민국 정부는 비로소 돈황석굴에 남아있던 모든 자료들을 거두어 갔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돈황 유물은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뒤였다.
돈황 17굴 발견 불화는 스타인이 가져온 520여점의 탱화와 소규모의 지본(紙本)불화를 비롯하여 펠리오가 가져온 225점의 탱화와 소규모의 지본불화, 오타니수집품 등 무려 1000여 점에 달한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도상화한 관경변상도는 돈황석굴을 대표하는 불화 중 하나로 100여 점이나 남아있는데, 그중 13점이 17굴 안에서 발견되었다. 영국박물관소장 <관경변상도>는 8~9세기 작으로 안타깝게도 5조각으로 조각난 채 아직 복원되지 못한 상태이지만 각 장면에 명문이 남아있어 중요한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210×177㎝의 대형화면에는 중앙에 아미타극락회 장면과 구품연못(14-16관), 가장자리에 1관-13관 및 서분이 배치되었으며, 특히 하단부에 십악인(十惡人)과 십선인(十善人)의 장면이 추가된 점이 특징이다. 불상의 신체에는 중점적으로 선염(요철)법을 짙게 사용했으며 보살상은 가슴과 복부, 하체가 풍만하여 굴곡진 신체의 윤곽선이 뚜렷하다. 윤곽선 주위로 붉은 선염을 사용한 음영법은 실크로드에서 유행한 묘사법으로, 돈황과 실크로드와의 관련성을 엿보게 한다.
기메 동양미술관에도 <관경변상도>가 전해온다. 화면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하단의 가장자리에 서분과 16관을 배치하고 2/3 정도를 차지하는 아미타극락회 부분에 아미타삼존을 중심으로 4보살과 4비구를 그렸다. 불, 보살들의 신체에 표현된 음영 표현과 둥근 얼굴, 둥근 육계, 통견의 불의, 정연한 인물 형태가 영국박물관소장본과 유사하다.
17굴에서 발견된 불화 중에는 여러 점의 관음보살도가 포함되어 있다. 그중 <대고려전>에 소개된 수월관음도(영국 영국박물관)는 10세기 작품이다. 관음보살이 아미타화불이 그려진 보관을 쓰고 오른손에 버들가지, 왼손에 정병을 들고 바다 속에서 솟아오른 연꽃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채 물가의 바위에 앉아있는데, 커다란 둥근 광배와 보살의 뒤에 표현된 잎이 무성한 대나무는 이 그림이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28번째로 만난 관자재보살을 그린 수월관음도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도 관음보살 맞은편에 있어야 할 선재동자가 보이지 않는 반면 관음보살 아래로 향로가 놓은 불탁과 향로를 든 공양자가 그려져 있다. 선재동자가 반드시 묘사되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와는 달리 돈황 특유의 도상임을 볼 수 있다. 또 공양자 앞에 있는 텅빈 화기란은 이 그림이 발원용으로 조성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수월관음과 함께 17굴에서는 10여 점의 천수관음도가 발견되었다. 천수관음도는 천 개의 자비로운 눈[千眼]으로 중생을 응시하고 천 개의 자비로운 손[千手]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대자대비의 관음보살을 그린 것으로, 현재 영국 영국박물관과 프랑스 기메동양미술관, 인도 뉴델리 국립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영국박물관 소장 <천수천안관음도>에는 각각 하나 씩의 눈이 그려진 42개의 큰 손과 간단하게 묘사된 작은 손을 가진 천수관음이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는데, 천수관음의 권속으로 알려진 28부중 가운데 바수선(婆藪仙)과 공덕천(功德天) 만이 간단하게 묘사되었다.
반면 프랑스 기메동양미술관에 소장된 천복8년명 천수관음도(943년)는 1면3목에 41개의 큰손을 갖추 천수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사천왕과 바수선, 대변재천녀(大辯才天女), 벽독금강(碧毒金剛), 화두금강(火頭金剛), 밀적금강(密跡金剛), 대신금강(大神金剛), 일장보살(日藏菩薩), 월장금강(月藏菩薩), 비나세가(毗那世歌), 비나야가(毗那耶歌)등의 권속이 함께 표현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돈황 72굴 오른쪽 벽의 천수관음도(9세기말~10세기)와 유사하여, 벽화와 탱화가 서로 동일한 도상을 공유했음을 보여준다.
장경동 발견된 불화 중 또 하나 흥미로운 작품은 바로 치성광여래왕림도이다. 소가 끄는 마차를 탄 치성광여래와 그 좌우를 호위하는 5개의 행성인 오성(五星 또는 五曜: 목요, 화요, 토요, 금요, 수요)가 오색의 구름을 타고 강림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건녕4년(897년)이라는 연대와 치성광불병오성신(熾盛光佛竝五星神)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어 치성광여래와 오성을 함께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불화 중에도 이와 유사한 그림이 있어 눈길을 끈다.
미국 보스톤미술관에 소장된 <치성광여래강림도>는 찰스 고다드 웰드(charles Goddard Weld, 1857-1911)가 사망하면서 보스턴미술관에 유증한 2만 여점의 소장품 중 하나로, 마차를 탄 치성광여래가 오른쪽을 향해 강림하는 모습이 돈황17굴발견 치성광여래도와 꼭 닮았다. 돈황본에는 없는 북두칠성, 남두육성(南斗六星), 삼태육성(三台六星) 등 고려에서 신앙하였던 모든 성수가 함께 그려져 있어 더 흥미롭다.
이외에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 조연록(曹延祿, 재위 976~1002년)의 부인인 호탄 공주 이씨가 공양한 지장보살도(미국 프리어갤러리소장, 10세기후반)를 비롯한 다수의 지장보살도와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예수시왕생칠경> 변상도는 돈황지역의 지장시왕신앙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로 주목된다.
장경동에서 발견된 불화들은 언제, 어떤 이유로 17굴 속에 수장된 것일까. 누군가는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이 돈황의 여러 사원에서 수집해온 ‘신성한 폐기물’로서 장경동은 이들을 쌓아두었던 장소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1035년 서하(西夏, 1038~1227)가 돈황을 침입했을 때 외적을 피하기 위하여 황급히 폐쇄한 것으로 이라고도 한다. 17굴이 언제, 어떤 이유로 폐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돈황 17굴은 불화의 보물창고이자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으로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