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1일 주님 세례 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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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제가 수련을 시킨 마지막 그룹이 첫 서원을 하였습니다.
이 형제들의 첫 서원을 보면서
첫 서원을 했던 30여 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를 돌아보았고,
첫 서원을 한 이 형제들이
30여 년이 지나면 어찌 될까 생각해봤습니다.
아울러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저도 이 형제들을 위해서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편지를 써 이것저것 당부한 다음
다음과 같은 기도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저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신다고 저희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그러므로 저나 이 형제들 모두 나이를 먹어갈수록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로 내가 원하는 자 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저희 프란치스칸의 이상적인 수도생활이지요.
그런데 공자도 이런 내용의 말을 이미 한 바 있습니다.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이 말씀을 제 나름대로 풀이를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나이 30이 되면 자기의 뜻을 세워야 하고,
40이 되면 그 뜻이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50이 되면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하고,
60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뿐 아니라
하늘의 뜻을 순히 따르게 되며,
이제 70이 되면 내 욕심대로 해도
그 욕심이 하늘의 뜻과 같아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게 되는
경지에 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오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부부나 형제로 살아가면서
같은 바람을 가지고 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바라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일 때
나의 뜻을 꺾을 것도,
너의 뜻에 힘들게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굳이 순종하지 않고
사랑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간에도 이렇게 바라는 것이 같고 뜻이 맞으면 좋은데
하느님과 우리가 바라는 게 같고
뜻이 맞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공자는 나이 70에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의 편지의 말씀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할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청하라 하고,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실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이 내 뜻이 되어 청하라는 것인데
그런데 주님의 뜻에 따라 청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주님의 뜻이 잘 들어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기도에서 하느님은 나
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그럼으로써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와 내가 남남이 아니라 우리가 되고,
나의 뜻이 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며,
주님의 뜻이 아버지의 뜻과 하나 되는,
이런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고
우리는 그 일원이 되는 것,
이것이 주님의 뜻이고
우리의 뜻이 되기를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교리를 배워서 ‘첫 영성체’를 합니다. 보통은 일정기간 교리를 배운 후 세례를 받습니다. 저는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초등학교 4학년 때 교리를 배운 후 ‘첫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저는 세례가 무엇인지 모르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리를 배웠지만 세례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는 못했습니다. 오늘은 세례란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셨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례의 형상은 사제의 말에 있습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가브리엘에게 세례를 줍니다.’입니다. 세례의 질료는 축성된 물입니다. 물을 세례 받는 이에게 부우면서 사제가 세례를 준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화’입니다. 물의 특성 중에 하나는 정화입니다. 우리는 물로 몸을 씻습니다. 물로 세탁을 합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더러워지듯이 우리의 영혼도 ‘죄와 악’에 의해서 더러워집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죄와 악으로 더럽혀진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탄생’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세례명’을 갖게 됩니다. 이름을 갖는 다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합니다. 저는 2년 전에 교구 성소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이제 제가 성소국장으로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구의 성소개발을 위해서, 사제양성을 위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이제 신앙인으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 의미에서 세례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세상의 것들에 묶여서 살고 있다면 세례의 형식은 갖추었더라도 진정으로 완성된 세례는 아닙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공정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진실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베드로 사도도 오늘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몸을 정화시키는 물을 영혼을 정화시키는 구원의 도구로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상의 모든 물은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례의 품격을 높여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단순히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께 공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로써 세례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깨끗해진 우리는 살면서 세상의 때가 묻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해지고, 나태해지고, 미움이 생기고, 시기하고 질투를 하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은 기간이 신앙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 전에 세례를 받았어도 신앙이 퇴보하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끼리 다투기도 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뒤에서 흉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밭에 악의 세력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한 좋은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말은 겸손함을 보여 줍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2015.1.11. 주일(뉴튼수도원 62일째) 주님 세례 축일, 이사42,1-4.6-7 사도10,34-38 마르1,7-11
낙원은 어디에
-내적혁명-
오늘 역시 이런저런 단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수도원은 물론 어디에나 있는 외로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머물 집이, 잘 방이, 먹을 밥이 없어 가난이 아니라
하느님을 떠나, 말씀을 떠나, 사랑을 떠나 가난입니다.
"하늘아 들으라, 나는 말하리라.
땅아, 나의 말을 들으려므나.
나의 가르침은 빗발처럼 퍼지고 이슬처럼 방울져 흐르며,
햇풀위에 이슬비처럼 내리고 시들은 풀밭 위의 소나기처럼 내리리라."
(신명32,1-2).
일상의 사막도 하느님을 찾아 만나면 '낙원의 충만'이 되지만
하느님을 떠나면 '허무의 늪'이 되어 버립니다.
낙원을 갈망하는 마음에 한자'(樂園)'로도 써보고 영어'(paradise)'로도 써봅니다.
사람은, 수도원은 세상 바다에 떠있는 섬이 아니라,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니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여전히 사람이 문제입니다.
공동체 삶이 얼마나 복잡다난한지 깨닫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법 없이 살 사람은 법 없으면 못 삽니다.
심성이 좋고 착하고 맑은 사람은 법이 지켜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적을수록 좋은 세상인데 갈수록 법이 많아지는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입니다.
참 불가사의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대부분이 종교인들이라는 나라인데 도대체 미래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갈수록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니 말입니다.
빈부의 양극화로 인해 완충 작용의 역할을 해줄 건강한 중산층들이 사라지는 현실도 안타깝습니다.
집은 있지만 가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안식년이라 수도원을 떠나 있지만 결국은 수도원에서 먹고 자고 지냅니다.
가정에 초대되어 밥을 먹은 적도, 잠을 잔 적도 없습니다.
식사 대접도 대부분 음식점에서의 외식입니다.
제 몸 하나 부지하기 힘든 각박한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잘 살든 못 살든 마을이 있었고 머물 집도 있었지만
이젠 잘 살 든 못 살든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사람들 마음에 온기(溫氣)와 훈기(薰氣)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품격있고 격조있는 인격의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집, 밥, 일, 돈, 몸의 기본적 생존 조건이 위협받으니 하루하루의 삶이 위태해 보입니다.
악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이 창궐하는 듯 한데 딱 부러지게 잡아낼 수도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세상을 보면 온통 밀밭이 아니라 가라지밭 같습니다.
어제 읽은 기사 중 한 대목입니다.
-이 나라는 다시 '생존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옛날에는 훨씬 더 힘들었지만 모두가 함께했고 희망이 보였지만
지금은 혼자 싸워야 하고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지역갈등과 이념갈등의 불이 세대갈등, 계층갈등으로 옮겨붙는 중이다.
같은 시대를 산다고 해서 시대에 대한 기억이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시대를 몸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현실 진단입니다.
말 그대로 절박한 '생존의 시대'입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자살이요 견디면 암입니다.
곳곳에서 살려달라 부르짖는 보이지 않는 소리가 들립니다.
생존의 어려움들로 미국 수도원에 있어도 카톡을 통해 이런저런 기도 부탁을 받습니다.
정말 영육으로 건강한 사람, 아니 육에 앞서 영으로 건강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적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나라든 개인이든 안에서의 탐욕과 부패, 불의와 부정, 분열로 무너져 내렸지
밖의 침공으로 무너져 내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내적중심과 균형을 잃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면 누구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중심의 문제입니다.
내적 중심에 따른 질서와 평화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깨어 중심만 잃지 않으면 삽니다.
낙원은 어디에?
바로 길은 어디에?
질문과 같습니다.
낙원은, 길은 밖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가 낙원입니다.
지금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가 꽃자리 낙원입니다.
중심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고 희망할 때 깨닫는 진리입니다.
내 자신이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정말 긴요한 것이 내적여정이요 내적혁명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수십년전에 읽은 글귀와 더불어 또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The more spiritual-, the more real(영적일수록 실제적이다).“
진정 영성가가, 신비가가 되어야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믿는 이들은 모두 신비가로 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비가에게는 지금 여기가 낙원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에 신비가가 되어 낙원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달으십시오.
우리 모두 이미 세례성사로 거룩함의 여정은, 신비가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 된 획기적인 전환점이 회개의 세례입니다.
주님께 세례 받음으로 바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자연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존엄한 품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내 삶의 중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의미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뜻합니다.
오늘 날짜 1월11일과 마르꼬 복음 1장11절의 일치가 참으로 절묘하고 기막힙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마르1,11).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 역시 세례성사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고,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내적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깨어 낙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아담이 잃었던 낙원을 회복한 우리들입니다.
둘째,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사십시오.
세례성사의 결정적 회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단지 내적여정이, 내적혁명이 시작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내적여정은 내적혁명의 여정이요 바로 회개의 여정임을 뜻합니다.
한 번의 세례의 회개로 완성된 삶이 아닙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은총에 따른 부단한 깨어있는 수행의 노력이 있어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 성숙합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늘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 합니다.
어제의 평범하나 강렬한 순간적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아, 이렇게 하면 은총을 받을 수 없지요.“
벨라도 수사님이 친절히 유리컵에 쥬스를 따라 주려는 찰나
유리컵을 거꾸로 들고 있던 저를 발견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유리컵을 바로 세운 후 따르는 쥬스를 받으며 한 말입니다.
유리창이 투명하면 새들이 부딛혀 땅에 추락하는 경우가 있듯이
저도 유리잔이 투명하여 잠시 위 아래를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리 하느님이 은총을 주셔도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있지 않아 낭비되는, 허비되는 은총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하느님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 했습니다.
비상한 회개가 아니라
이렇게 제자리에서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바른 자세, 바른 마음으로 깨어 있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로 깨끗이 비워진 마음에 가득 차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런 회개가 진정 내적혁명이요 주위를 서서히 밝히면서 변화로 이끕니다.
셋째, 자비롭고 겸손한 삶을 사십시오.
자비와 겸손은 한 실재의 양면이요 함께 갑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열매입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지만
종국에는 우리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 하느님의 소원이요 기쁨입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모든 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이런 이가 영성가이자 신비가입니다.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의 신비가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종,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우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할 이사야 예언입니다.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의 하느님이요 이런 하느님을 닮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고,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려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회개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 역시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낙원입니다. 지금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1.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2.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3.하느님을 닮아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혁명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렇게 당신처럼 살라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의 사명을 환기시키십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준다.
내가 너를 빚어 사람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이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어라."(이사42,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