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통재라!
‘임진왜란’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카락이 치솟는다. 국방의 힘이 약했던 탓에 무참히 당한 전쟁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지혜와 구국의 신념으로 싸워, 통쾌하게 이긴 보기 드문 전쟁사이다.
현명한 지휘관에서부터 이름 없는 민초들의 흘린 피로 우리 조국을 평정(平定)하였으니 모두가 충신이요 애국자이다. 그러기에 이들 모두를 추모하고 명복을 빈다.
전투의 대소 양상에서 대규모의 전투 기록은 섬세하리만치 기록으로 남아있어도 한자 기록으로 인한 해석의 차가 있어 더러 의견이 다름도 본다.
정유재란 때에는 유난히도 전라도 지방으로 왜적의 침입이 심했다. 이를 막아내기 위해 지방의 유력 인사들과 의병의 활약이 컸다. 필자가 사는 보성지역의 전투를 보면, 소규모 의병을 거느린 의병장들이 협동으로 전투를 한 사실을 문헌에서 보았다.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이에 이바지한 장수와 병사, 무기 제조자, 병참 물자 헌납자 등 왜적을 격퇴하는데 헌신하신 분들을 선별하여 선무원종공신 9,060명(이배사 행수군관 정우인 조사 9,023 명)을 선정 책록한 녹권을 하사했는데, 공적은 많으나 과오 있어 탈락한 자가 있었다. 그중 최대성(崔大晟)이 있디.
※최대성을 모의장군(募義將軍)이라 칭했는데, 조선의 장군 명칭에는 없으며 자신의 기치(旗幟)이다. 충절사지(忠節祠誌)에 국사 편찬위원장 이성무(李成茂) 서(序 p5)에는 모의장(募義將)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장군 명칭
종4품 - 하계 선략장군(宣略將軍), 상계 정략장군(定略將軍)
정4품 – 하계 소위장군(昭威將軍), 상계 진위장군(振威將軍)
종3품 – 하계 보공장군(保功將軍), 상계 건공장군(建功將軍)
정3품 - 하계 어모장군(禦侮將軍), 상계 절충장군(折衝將軍)
최대성의 명예 회복을 위한 이 지역의 사림(士林)과 후손의 끈질긴 상서(上書) 있어, 영조 28년(1752년)에 내린 최대성의 정려문에서 보면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어모장군 행 훈련원정(贈通政大夫刑曹參議禦侮將軍行訓鍊院正)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로 보면 어모장군(정3품)으로 추증됨은 사후 154년이므로 생전에는 정3품 하위직위임이 분명해진다.
최대성이 선무원종공신에 탈락한 이유는 1597년 10월 이순신 통제사가 올린 군무 도피 행위로 군규(軍規)를 어긴 5명을 처벌해달라는 장계에 근거를 둔 것으로 전한다.
이에 지역의 사림들께서 무자년(1648년:공신선정 후 43년) 안방준(安邦俊) 외 다수의 상서 문을 시작으로 8회에 걸쳐 사림의 상서가 있었다.
이들의 상서 요지는 최대성의 혁혁한 공적이 있음에도 공신에 들지 못해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적을 헤아려 명예를 회복해 주기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장계(선조 31년 4월 20일 기사) 내용을 가벼이 넘길 사항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선조 31년(1598년) 4월 20일 실록을 보면, 사헌부가 아뢰는 내용 중 ‘그들(현응신,윤사충,진몽일,오대기,최대성)을 군문으로 계송(械送:죄인에게 형틀을 채워 압송함)하여 대중 앞에 효시(梟示: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아 뭇사람에게 보임)했어야 할 것입니다.’라 했으니 가히 그들의 죄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조 임금은 이들 중 진몽일은 이미 쌀을 바치고 공문을 받았으니 선처해주라는 명을 내렸으나 공신도감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선무원종공신 선정에서 현응신,윤사중,진몽일,최대성은 탈락하고 오대기는 2등에 선정되었다. 이로 보아 공신도감은 임금의 권유도 뿌리쳤고 구제가 인정되는 오대기는 구제압력이나 청탁이 없어도 구제했으니 나머지 4명의 군법 위반 사실이 중함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최대성의 명예 회복을 위한 사림들의 상소는 공적만을 내세웠지, 공신 탈락 사실의 언급은 전혀 없다. 삼자가 보았을 때는, 공신 탈락이 본인의 과오가 아닌 조정의 잘못으로 빚어진 일이라고 인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시 군대의 규칙은 잘 모르지만, 제장명 교수님께서 애써 찾아낸, 의병장들이 실천한 군약십조(軍約十條)를 보면 섬뜩할 만큼 엄격했음을 본다.
8조, 윗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하고자 하는 바를 멋대로 하면 이는 패민(悖民)한 것으로 쳐서 죽인다.
이러한 군약을 볼 때 당시 왜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단결과 협동 일사불란한 명령 체계만이 왜적을 물리치는 힘으로 여겼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섬뜩한 규약 아래 하나로 뭉친 마법 같은 정신이 승리의 원동력이었다고 보기에 사소한 잘못일지라도 엄히 다스림은 당연지사로 생각한다.
보성과 인근지역(순천,낙안,고흥)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서 협동 작전을 펼친 사실에 그들은 혈맹의 관계였음을 또 한 번 존경 한다. 그들은 보성 출신 전방삭(全方朔), 최대성(崔大晟), 정회(鄭繪), 황원복(黃元福). 고흥(흥양) 출신 송대립(宋大立), 김덕방(金德邦)이다. 이들은 한 조직이 아니고 각기 나름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문헌상 이 지역의 전투가 9차례나 있었는데 전원 참여는 아니지만, 다수가 참여하여 왜적을 격퇴한 자랑스러운 협동 정신이었다.
그러나 전투의 지휘를 누가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아마도 미루어 보아 예고 없는 침략이기에 소식을 듣고 협공했으리라 본다.
그런데 최대성은 자타가 인정하는 훌륭한 장수임이 분명 하기에 공신 탈락을 억울하게 여긴 지역의 사림이 상서 내용에 대부분 공적이 많음을 드러냈을 뿐 전투 상황 기록은 없다. 그런데 유독 문희순(文希舜)은 2회 상서 중 첫 번째 상서(辛卯 1651년 : 안치 전투 후 53년)에서 보성 안치(雁峙) 전투 상황이 기록되어있다. 雁峙之野公使鄭繪黃元福前後推屠使彦立率豆里同左右挾擊使全方朔及厚立拒其船路 이 내용 중 밑줄 부분을 해석하면, 전방삭을 시켜 후립과 함께 선로를 막게 했다. 는 뜻이 된다. 천부당만부당한 기록이다.
기록에 나오는 방수장(防守將) 정회는 최대성보다 15년이나 연상이고 충의위(忠義衛)다. 전방삭은 1545년생이요 최대성은 1553년생으로 8년 후배이고 무과 급제는 전방삭은 1575년, 최대성은 1585년이니 10년 후배이다. 임진란 전의 직위는 전방삭은 부정(副正종3품) 이고 최대성은 판관(判官 종5품:충절사지 서) 이며 임란 시에는 전방삭은 종3품으로 건공장군(建功將軍)이고 최대성은 이순신 휘하 한후장(捍後將:정4품) 이다. 전방삭은 선무원종공신에 책록(1605년) 되고 1계급 특진하여 어모장군(정3품)으로 추증되었다. 최대성은 사후 154년(1752년)만에 어모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이러한 계급의 차가 분명한데 안치 전투에서 최대성이 전방삭을 시켰다(명령) 함은 군의 엄격한 계급을 무시한 처사요 선후배마저 구분하지 못한 예의범절마저 말살한 기록으로 상대의 명예를 짓밟는 기록이기에 어처구니없다.
설령 문희순이 최대성의 명예 회복만을 추구코자 선배나 상관(上官)은 안중에 없이 최대성을 지휘관으로 추켜올려 상서하였다 하더라도, 협격 자들의 인과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최공 후손이 바로잡아 주어야 하거늘 얼씨구나 하고 인용하여 사지(祠誌)에 기록하여 배포함은 서운한 감정이다.
이를 본 후세들은 명성 높은 문희순의 기록이니 사실일 것으로 믿고, 추가로 인용 보도하고 있으며, 최대성을 추켜올리려는 속셈인지 ‘진영에 명령하여 전방삭과 후립으로 하여금 적의 귀로인 뱃길을 차단하게 하고’라고 서슴없이 기록한 분도 있어 더 분통이 터진다.
왜곡된 내용의 사지가 이미 배포된 터라 이를 시정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라 본다. 그러기에 이렇게나마 사리에 어긋남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엄격한 군대 계급규율을 무시하고 인간관계의 예의범절마저 짓밟는 심사에 존경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안치 전투는 상상 이상으로 격렬했으며 전라 병사 이광악(李光岳) 치계(馳啟)에 의하면 군수들의 늑장 대처로 3백여 명과 가축이 잡혀갔다는 사실로 보아 피해가 막심했다. 이는 군수가 왜적 침입상황과 피해 상황 모두를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은 무능을 보여주는 당시 관직자의 사례이기도 하다.
제언컨대, 전방삭과 최대성은 나이의 위아래나 계급의 상하를 엄격히 구분하려는 그것보다 먼저,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두 분은 혈맹의 동지였다’고 후세들은 찬양하고 있는데 당치 않는 내용을 자랑삼아 기록하는 일로 상대 감정의 골이 깊어지지 않도록, 문희순의 왜곡기록에 대한 시정(是正) 조치를 세워 충신의 가문에 흠집이 남지 않기를 정중히 당부한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서 위의 왜곡 사실이 수긍 되신다면 바로 잡는 일에 힘을 더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첫댓글 선생님
잘 지내시옵니까..
같은 지역에서 참 난감하시겠습니다..
저도 관련 글을 읽을 때 최대성장군님이 손위인줄 알았습니다..
올려주신 전방삭 장군님의 생년을 참고해서 글을 써야겠습니다~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방삭 장군의 후손이 한미 해진 원인도 의병 군량미 확보로 전 재산을 헌납한 탓에
굶주림에 허덕여 배우지 못한 한이 있는데 위와 같이 업신여김? 도 당하니 울분이 터집니다.
아무쪼록 바르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지난번의 그 문제를 드디어 글로 푸셨군요.
조상에 대한 존경심과 선양하시려는 전방식님의 노력을 보고 많이 배웁니다.
한 쪽의 조상을 높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일은 없어야죠.
사실 만을 기록하려고 해야 하는데도 후손의 욕심이 더해져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전방삭 장군의 후손을 얕잡아 보는 듯하여 울분이 터집니다.
공감하시는 모든 분들의 바른 사실 전파를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선생님의 글을 이제야 읽어 보았습니다. 우선 조상의 공적을 선양하는 선생님의 노고에 경의를 드립니다.
위의 내용을 보성 출신이면서도 저는 처음 알게 되어 매우 부끄럽습니다.
저는 임진왜란 때 군머리에서 많은 군사가 죽었다더라. 그때 최대성이라는 장수가 순절했다더라.... 그저 이런 식으로 피상적으로 짤막하게 알았을 뿐입니다. 더구나 군머리 삼거리에 충절사를 만들어 놓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앞으로 더 공부를 해야겠네요.
그리고 죽전벌은 요즘으로는 어디쯤인지 궁금합니다.
반갑고 감사합니다.
죽전벌은 군두에서 보성 쪽으로 가는 도로 위 삼정리에 위치합니다.
좋은 말씀 많이 주시고 위 내용 전파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