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운동이 예언사역에 끼친 폐해!
예언사역은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언사역도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이 신약시대에 다수에게 예언의 은사가 임할 것을 예언했고(욜2:28-29),
성경이 성령의 은사로 '예언'을 언급했고(고전12:10, 롬12:6),
성경이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고(살전5:20),
성경이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고(고전14:39),
성경이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고전14:1, 5).
하지만 예언사역의 방식은 성경이 아니라 영성운동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영성운동과 성경의 예언사역 방식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영성운동의 예언사역은 상술로 오염이 되었습니다. 예언의 댓가로 돈을 요구하거나 예언을 빌미로 은연중에 헌금을 강조합니다. 또 사람들이 예언받기 좋아하는 것을 알고 항상 예언하는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렇게 비성경적으로 예언하다 보니 예언의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영성운동에서는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은 다르다"는 것을 과도하게 강조합니다. 아무리 예언이 빗나가도 거짓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언이 빗나가는 것을 정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영성운동을 통해 활성화된 예언사역이 영성운동을 통해 사양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예언사역, 이대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영성운동에 의해 뒤틀린 예언사역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1) 영성운동이 아니라 성경이 옳았다!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었던 저는, 예언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성집회에 쫓아다니면서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영성운동 지도자들의 생각이 저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햇병아리였고 당연히 제가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에 보니 영성운동의 가르침이 아니라 제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옳았습니다.
제가 예언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참 선지자는 적고 거짓 선지자는 많다.
열왕기상 22장을 보면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아람 왕을 쳐서 길르앗 라못을 다시 찾자고 제안합니다. 여호사밧은 흔쾌히 동의하면서 먼저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자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22:6 "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이처럼 수백 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승리를 예언했습니다. 미가야만 반대로 예언했습니다(왕상22:19-23). 그런데 결과적으로 누구의 예언이 옳았습니까? 미가야입니다. 한 사람만이 참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오랜 후에 예수님은 친히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태복음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그러므로 구약시대뿐 아니라 신약시대도, 그리고 주의 재림이 임박한 때에도 참 선지자보다 거짓 선지자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통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영성집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88체육관에서 열린 집회의 강사로 온 세계적인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예언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거짓 선지자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해 실수를 한 것일 뿐, 거짓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예언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그중 거짓 선지자는 단지 몇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이 많다고 말씀하는데, 저분은 거의 모두가 바른 사역자라네.'
그분은 자신의 책에서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습니다. 물론 저는 어떤 의미로 그분이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압니다. 예언이 틀렸다고 다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숙한 경우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주장에도 어느 정도의 진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잘못된 기준 혹은 정의 때문입니다. 참 선지자냐? 거짓 선지자냐? 이것은 단순히 예언이 맞느냐 틀리느냐? 혹은 성숙했느냐 미성숙한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님이 선지자를 보실 때 주목하신 것은, 단순히 예언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속에는"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그들의 속마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발람은 예언이 정확했으나 탐심 때문에 거짓 선지자로 분류되었습니다.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게하시는 바울이 만났던 여종처럼 점치는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엘리사가 그를 제자로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탐심을 허용하여 거짓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 경우들이 보여주듯이 탐심은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로 만듭니다. 성경에는 선지자를 분별하는 시금석인 이 기준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합니다.
느헤미야 6:10-12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려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깨달은 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에스겔 13:17-19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여자들에게 경고하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에스겔 22:25 "그 가운데에서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미가 3:5-6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탐심이 예언자들을 거짓 선지자로 만든다는 것은, 성경뿐 아니라 초대 교회 문서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초대 교회 문서 「디다케」(12사도의 교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들이 떠날 때, 다음 날 밤의 숙소를 발견할 때까지의 빵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의 행동에 의해서 구별될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영으로 '나에게 돈을 주시오'하고 말하거나 혹은 그 밖의 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경계하십시오."
또, 초대 교회 문서 「헤르마스의 목자」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님, 그러면 어떻게 그들 중의 누가 참 예언자이고 거짓 예언자인지를 알 수 있을까요?' 하고 내가 물었다. '두 예언자들에 대하여 들으라' 하고 그가 말했다. '내가 너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에 근거하여, 너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시험할 수 있다. ...
첫째로, 위로부터 오는 신성한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온유하고 평온하고 겸손하고, 모든 악과 이 시대의 욕망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상담하는 어떤 사람들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자진하여 말하지 않고(성령의 사람이 말하기를 원할 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가 말하기를 원할 때 말한다. ...
'이제 지상적이고 가치 없는 영,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어리석은 영에 대하여 들으라' 하고 그가 말했다. '첫째로, 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자신을 높이고 영광의 자리를 가지기를 원하고, 즉각적으로 오만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며 수다스럽고 ... 그의 예언하는 것에 대하여 돈을 받으며, 돈을 받지 않으면 그는 예언하지 않는다. 신성한 영이 돈을 받고 여전히 예언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예언자가 이것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그렇게 하는 그런 예언자들의 영은 세속적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영성운동은 이 점을 간과했습니다. 일례로, 88체육관에서 집회를 했던 그 유명한 선지자도 집회 마지막 시간 때 항상 안수를 해주겠다며 100만 원 이상 헌금할 사람들을 앞으로 초청합니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이제는 1,000만 원으로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그 강사뿐만이 아닙니다. 탐심을 잣대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국내외 영성운동 지도자들을 점검해보십시오. 대번에 거짓 선지자가 소수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영성운동은 집회 등록비를 받는 것이 문화처럼 되어있습니다. 지나친 헌금 강조도 다반사로 합니다. 과거 수원 희돌산기도원에 한 유명한 영성운동 강사가 온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나와서 헌금 얘기만 1시간을 하더니 그 뒤 강사가 나와서 다시 헌금 강조를 30분 이상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날 설교의 전부였습니다. 또, 영성집회들을 참석해보면, 걸핏하면 예언이나 안수기도를 빌미로 거액의 작정 헌금을 유도하고, 심지어는 헌금을 뽑아내기 위해 봉투를 보고 예언하는 목사들까지 있습니다. 제가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 중의 한 가지는, 영성집회를 주최하는 지도자 중 적지 않은 수가 돈이 목적이고, 목사의 탈을 쓴 장사치들이라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영성운동은 이미 장사치의 소굴로 변해버린 지 오래입니다.
저는 심지어 한 영성집회에서 한국영성총연합회 회장이 헌금 강조를 하다가 "예수님도 돈에는 약하다"는 망발까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전에 여러 번 한국영성총연합회 회장을 지낸 다른 사람은 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이단 누명을 벗겨주겠다며 노골적으로 제게 돈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너무 당당하게 요구해서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현실이 이 지경인데 거짓 선지자가 거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거짓 선지자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다 믿지 말고 분별을 잘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언은 아무 때나 즉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는 영성운동에 몸담기 전 성경을 읽다가 '예언은 언제나 즉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에서 엘리사와 예레미야가 어떻게 예언했는지 여러 번 읽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특히 엘리사에 관한 다음 기록은 우리를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열왕기하 6:8-12 "그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 데 아무 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이런 엘리사도 아무 때나 즉각 예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요람이 전투를 앞두고 찾아 왔을 때 이렇게 했습니다.
열왕기하 3:15-16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이처럼 엘리사도 거문고 소리를 듣고 성령이 감동하실 때까지 예언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요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에게 물었을 때 바로 예언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42:7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 "
이처럼 무려 10일이나 기다리다가 말씀이 임하자 비로소 예언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헤르마스의 목자」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어떻게 그들 중의 누가 참 예언자이고 거짓 예언자인지를 알 수 있을까요?' 하고 내가 물었다. '두 예언자들에 대하여 들으라' 하고 그가 말했다. '내가 너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에 근거하여, 너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시험할 수 있다. ... 그는(참 예언자를 뜻함-저자 주) 자진하여 말하지 않고(성령은 사람이 말하기를 원할 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가 말하기를 원할 때 말한다."
그런데 영성운동에 몸담기 전에 저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성집회에 다니다가 그만 이것을 놓쳤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적인 선지자들이 모두 즉각 즉각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밥 존스 목사님은 어느 때나 무시로 예언할 수 있는 것 같다"며 감탄한 릭 조이너의 글이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밥 존스 목사님의 전성기 때 간증들과 다니엘처럼 다른 사람이 꾼 꿈의 내용을 맞추면서 해석하는 간증에 압도되었고, 적어도 예언사역에 있어서는 밥 존스 목사님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을 능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즉각 즉각 예언을 하니 그것이 옳은 방식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뒤늦게 영성운동을 시작했고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두루 퍼져 있는 이 방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 '예언은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글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성령의 은사들을 나타남(manifestations: 현현(顯現)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봅시다. 그리고 바울은 ' ...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은사들은 믿는 자들이 그가 원할 때는 언제나 그 은사를 소유하고 나타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은사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성령의 은사이며, 성령의 뜻대로 각 신자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한계를 벗어난 예언
사람들에게 손을 얹을 때마다 예언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소위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예언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선지자 직임은 그분이 뜻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영의 기름부으심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에 관해 여러분이 알았으면 하는 다른 무언가가 이 구절에 있습니다.
선지자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만 압니다. 예를 들어보면 게하시는 만일 엘리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나아만을 뒤쫓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엘리사가 영적 은사들을 통해 모든 것을 알았다면, 게하시는 나아만으로부터 은과 옷을 취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내가 선지자이므로 그들에 대해 무제한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내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언제든지 그들에게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구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온종일 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영적인 은사가 역사하도록 켜거나 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글을 읽으며 저는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우리 교회의 예언사역자들에게 여러 해 전 이런 지침을 내렸습니다.
"첫째, 모임이 있는 당일 성령 충만하지 않고 영적인 상태가 좋지 않은 예언사역자는 스스로 예언사역을 하지 않는다!
둘째, 설사 성령 충만하고 영적 상태가 좋더라도, 자연스럽게 예언이 임하지 않으면 억지로 예언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기도만 해준다."
그러면서 저는 대내외적으로 다음과 같이 천명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령님이 감동하시면 예언하고, 성령의 나타남이 없으면 축복하고 기도만 해드릴 것입니다. 예언사역자들은 성령의 나타남이 있을 때만 예언하고 의무적으로 예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임에 참석하는 성도님들도 같은 마음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오실 때마다 매번 예언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것이 예언사역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고 오히려 플러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언을 더 신뢰할 수 있게 되고, 한마디를 들어도 '이것이 진짜 나를 위한 주님의 말씀이구나!' 하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실제로 우리 교회는 예언사역을 할 때 성령의 감동이 임할 때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예언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람들의 질문에 항상 즉각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항상 예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전도단의 조이 도우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조건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께 말씀하실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드려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하지요! 제가 지난번 카프리섬에 갔다가 나오는 배 시간이 다 되어 뛰어가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이렇게 응원하며 외치더라고요.
"빨리! 빨리~ ~ 빨리! 빨리~~~ "
그들도 한국인들의 성격이 급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할 때 화면이 바로 뜨지 않고 한참 동안 뱅뱅 돌아보세요. 마치 우리도 돌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나요?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충분히 기도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무책임하게 감을 따라갑니다. 맘대로 추측합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이 성급하게 추측하거나 단정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에스겔 13:2-3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여 예언하되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저는 많은 참된 선지자들이 이렇게 예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수많은 세계적인 선지자들이 예언사역을 하는 것을 수년 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개인 예언을 한 후 성도님들이 방향 제시가 필요한 중요한 질문을 할 때, 너무 쉽게 즉답을 합니다. 그때마다 미덥지가 않았고, '과연 예언을 받는 사람이 이 말을 그대로 믿고 행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려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예언 방식이 오늘날 유행처럼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20-21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예언은 '하나님께 받아서 말'하는 것입니다(벧후1:21). '자기 마음을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겔13:2-3). 즉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추측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으려면 반드시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벧후1:21). 특히 성령의 감동 앞에 있는 '오직'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한 가지 뿐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만 예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은 성령의 감동이 임했을 때 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주의 신이 내게 임하셨다" 혹은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성령의 나타남이 있을 때에만 예언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시작되는 성령의 나타남이 없으면 절대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거짓 선지자인 발람조차도 이 원칙을 지켰습니다.
민수기 23:1-4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하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는지라."
그런데 영성운동에서는 이 원칙을 지키지 않고, 성령의 감동이 없는데도 항상 예언하며 예언을 남발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의 정확도와 더불어 예언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예언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리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만 예언하는 것을 예언사역의 절대적인 룰로 삼고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