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 간이역 등에 관한 시모음 5)
조치원역에서 /성배순
떠난다는 것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라고 외치며
아침 6시 13분, 어둠을 뚫고 기차가 들어온다.
뿌우웅 경적을 울리며 치익칙 역으로 돌아온다.
이번 역은 조치원, 조치원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왼쪽 출구에 줄을 서자 애인이 귓속말을 한다.
역 주변의 출산율이 왜 높은지 아느냐 농을 던진다.
6시 13분 경적소리에 잠에서 깬 사람들이
그 시간에 다시 잠 들 수 있을까?
우리도 역 주변에 방 하나 얻어 볼까?
아침 햇빛 속으로 주먹만 한 연분홍 복숭아들
주렁주렁 제 모습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던 애인이
만져지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며 내 손을 쥔다.
한때는 별을 보려고 어둠을 기다린 적이 있다.
지금은 북극성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새로운 별이 북극성에 올랐다는 것도 안다.
북극성은 생각보다 밝지 않다는 것까지 안다.
기차에서 내려 조치원 역 광장에 서 보니 알겠다.
낮에도 반짝이는 별이 있다는 것을.
태양은 언제나 저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는 것을.
환승역 /이중동
문상 가는 열차에서 설핏 잠이 들었는지
꿈결인 듯 안내방송 들린다
고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객이란 소리가 내 귀에는 고인으로 들린다
망자(亡者)를 가득 태운 열차가 저승을 향해 간다
옆자리의 젊은 여자는 어느 틈에 열차를 탔는지
세상의 끈 놓지 못하고 연신 문자를 보내고 있다
불같이 사랑했던 사람 변심을 눈치 채고
홧김에 열차에 몸을 실었을까
건너편 노부부는 금슬이 좋기로서니
마지막 저승길까지 손잡고 가는 모양이다
출가 못한 자식이라도 있는지 한쪽 눈 파르르 떨린다
창밖 세상은 전생의 재생 영상
꽃 피고 눈비 내리던 계절이 한순간에 지나가는데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소리 들려온다
세상 구경 온 지 몇 날이라고 또 다른 세상 구경 가는가
고인 여러분, 열차는 잠시 후 환승역에 도착합니다
천국으로 가실 고인은 다음 역에서 갈아 타 주시고
지옥으로 가실 고인은 그 자리에 앉아 계시기 바랍니다
몇은 주섬주섬 여장을 꾸리고
몇은 일그러진 얼굴로 앉아 있는데
철커덕 철커덕, 열차는 흔들리고
나는 엉거주춤, 엉거주춤,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고 있다
고향역 /권오범
계절이 가을역 지나 좀점 향해
차갑게 달리면
고향 버린 죗값 하느라
먼산바라기가 되는 부평초
그러다 망망대해 건너는 낮달이라도 만나면
내 넋은 철없이
그리움이 이끄는 대로
물퇘지처럼 흐므러진 몸 나 몰라라 가출한다
떠나올 때 슬픈 박자로 끝없이 덜컹대던 완행열차 속
목 메이게 각인된 삶은계란 추억 거슬러
기적과 함께 토한 석탄연기 북새통인
녹슨 양철지붕 밑 플랫폼 못잊어
시커먼 침목들이 어깨 맞대고 누운
발씨익은 건널목 맞은편짝
측백나무 울타리 사잇길로 마중 나온
나루터 통통배 발동기 소리에 눈시울 적실 때 까지
부산역 /최삼용
갈 길이 막혀 기적조차 토하지 못한 열차를
부산항 파도가 소리로 대신 울고
나도 따라 울고 싶어
바다에 너의 이름을 던진다
종착역이란 지칭만으로 헛헛할 이곳에
나는 남고 너는 떠난 후
기억에 절여진 황홀로 하여 내가 아픈 지금이다
떠나든 돌아오던 갈 길 다른 뭇 걸음들 사이에서
한 사람 잊기 위해 내 생각 전부를 털어버린대도
비겁자란 낙인은 찍지마라
눈물이 먼저 번진 이름 싣고 떠나는 기차기에
이젠 미련 따윈 가차 없이 놓을게
사랑놀이 서툰자라면 다시는 찾지 마라
바다에 중독된 이별 잦은 부산역을
간이역 /김환식
무심히 지나쳐 온
삶의 간이역을 더듬어 봅니다
생경한 이름의 이정표와
엇갈린 듯한 행로의 풍경들과
어렴풋한 역무원의 수신호가
한생의 그림자를 끌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낡고 구겨진 지도를 펼쳐봅니다
두고 온 내 이력의 신기루들이
자꾸만 무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내 할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묻어있는 길이고
내 아버지의 땀냄새가 배어 있는 길입니다
나를 이승에 묶어 두고 있는
천수관음의 손과 눈들은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포박했던 손과 눈들입니다
사유의 길섶에 돌탑을 쌓습니다
누구와 굳은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행인들은 하나씩 돌을 얹고 갑니다
사소한 바램들이 손을 맞잡고
커다란 돌탑 하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떠나기 위해서는
멈춰선 바퀴를 돌려야 합니다
선로에 주저앉은 기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 삶도 바퀴를 돌려야
남은 여정을 끌고 갈 수 있는데
종착역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지나쳐 온 간이역의 이름들을 음미해 봅니다
앞만 보고 부단히 달려왔지만
당돌한 근심들은 침목처럼 단단하게 뿌리를 내립니다
오늘도 부대끼며 살아갈 사람들을 향하여
평행선은 담담하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새벽 안개 속으로
늘 비어있는 간이역 하나가
삶의 이정표를 가슴에 담기도 전에
남몰래 슬그머니 지나쳐 갑니다
수색역(水色驛) /이수익
느긋하게 한숨 자고
가득한 포만으로 식사를 끝낸
젊은 노무자들은
합숙소를 떠나 일터로 향하는 길
천천히 발걸음 옮긴다.
충전된 힘으로 그들은
오늘도 일을 만나
무섭게 들소처럼 제 몸을 던지리라.
그리고 이 시간쯤엔
휴식을 위해 합숙소로 돌아오는 이들도
있다. 그들 가슴은
기력을 탕진한 이후의, 나른한 피로에 젖어
펄럭이고
더러는 남아 있는 기운이
거친 슬픔솨 뒤섞이며, 때로는
기분을 받아줄 대상도 없이 제 스스로에게
씨팔,
욕설이라도 내볕고 싶을 것이다.
널따랗게 열려 있는 수색역 차고지를
묵묵히 드나드는
빛나는 검은 육체, 젊은 사내들 같은
열차, 그리고 열차들.
부산역 /최삼용
갈 길이 막혀 기적조차 토하지 못한 열차를
부산항 파도가 소리로 대신 울고
나도 따라 울고 싶어
바다에 너의 이름을 던진다
종착역이란 지칭만으로 헛헛할 이곳에
나는 남고 너는 떠난 후
기억에 절여진 황홀로 하여 내가 아픈 지금이다
떠나든 돌아오던 갈 길 다른 뭇 걸음들 사이에서
한 사람 잊기 위해 내 생각 전부를 털어버린대도
비겁자란 낙인은 찍지마라
눈물이 먼저 번진 이름 싣고 떠나는 기차기에
이젠 미련 따윈 가차 없이 놓을게
사랑놀이 서툰자라면 다시는 찾지 마라
바다에 중독된 이별 잦은 부산역을
간이역 /정양숙
누군가는 처음부터 외로운 별 아래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
다른 애들은 뛰어 건너는 두줄 통나무 다리를
무서워 못 건너고 나 혼자만 다리 옆 얕은 개울바닥으로 건넜다.
논둑 길이 있는 동산아래 집에 살던 나는
밤이면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내고 마당에 펴놓은 넓고 뻣뻣한
볏짚 멍석에 앉아 가깝고도 먼 곳에 모여 노는 친구들을
맥없이 바라보거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떨기를 세어보곤 했다.
상심과 불안감과 생철 통에서 타고 있는
생쑥대 모깃불 냄새 같은 슬픔 따위가 많은 형제들 중에 나만
유독 초등학생 때부터 뒷머리에 새치가 하얗던 이유일 듯싶다.
외톨이라는 생각은 어린 나이가 감당하기 힘든 쓰라림이었다.
다행인 것은 울안의 눈부신 개살구나무 복숭아 산수유 골담초
해당화 그리고 예쁜 풀꽃들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 속에
왕복 이십리길 학교를 걸어 다녔다.
열무 배추 무 깻잎 호박 마늘 같은 텃밭에 넘치는 야채와
부족한 쌀 대신 보리 수수 조 팥 동부 콩 호밀 섞인 잡곡밥과
고구마 옥수수 감자 쑥개떡과 다양한 산나물 식단이며
모내기 전 갈아엎은 물 논에 수두룩한 우렁이 동동 뜬 개구리밥
냇가나 도랑에 가재 붕어 미꾸라지 새뱅이 천지였다.
긴 가뭄 동안 넓은 모래밭이던 개울은 장마철 폭우로
흙탕물이 시시각각 무섭게 불었다.
낮은 지대 사람들은 미루나무 개울 둑이 무너질까 봐 조바심치고
아침 등교길 아이들은 어른들과 손을 잡거나
등에 업혀서 홍수개울을 건넜다.
무더운 여름 밤 마을 사람들의 공동목욕탕이 되던 개울 가
무성한 풀섶에 벗어놓은 옷 사이에서는 개구리가 튀어나오고
가까운 간이역에 멈췄던 수여선 기차가 칙칙폭폭
흰 연기와 불빛을 뿜으며 여기저기 목욕하다 수줍게 웅크린
물속의 나신을 장난스럽게 비추며 지나가기도 했다.
추석 명절이면 가난한 가방이나 보따리에 자잘한 귀향선물을
정성껏 담아 들고 서울서 돌아온 피붙이들이
고향 달빛과 한적한 간이역의 빛 바랜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한동안 못 보았던 부모 형제 처자들을 마음껏 얼싸안았다.
황등역 /오유정
희미해진 불빛, 역 근처 석공의 망치소리에 호남선 열차가 탄력을 받는다. 기적과 망치의 버무려
진 소리들이 驛舍 처마끝에 매달리다 스르르 사라진다.
먼지를 뒤집어쓴 맨드라미가 돌 쪼는 소리에 먼지를 털던, 맞이방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손에 망
울망울 새 소식이 들려 있기도 하던, 꽃샘추위가 찾아오면 더욱 누렇게 마을을 바라보던, 돌 틈을
비집고 나오는 파릇한 싹을 찾기도 하던, 침목과 침묵 사이, 기적소리의 파편들이 선로와 화단 사
이로 잘게 구르던, 자갈들이 잠시 불빛을 당겨 몸을 달구어 보기도 하던, 열차가 한차례 지나가면
역무원이 작은 철문을 닫고 차근차근 驛舍 근처를 살피던, 조금은 둔한 손가락으로 일지를 적어 두
던, 살뜰한 마음이 구석구석에 쌓이던, 마른 가지가 빛바랜 소리를 내어 가느다랗게 떨면 사람들
몇 맞이방으로 만남을 위해 찾아들던, 핏기 잃은 손을 맞잡은 사람들이 누런 말 들을 주고받던,
낡은 기적소리 따라 옛 기억들이 천천히 자라는,
예산역 /오성일
서천 가는 밤
흐릿한 기차간에 보퉁이 몇 개
예산의 삽교의 홍성의 광천의 대천의 웅천의 서천의
늙은 어미들의
느릿느릿 작은 눈 깜빡이며
무언가를 걱정하다
간간
보퉁이를 고쳐 안는
무릎에 포개진
마른손 몇 개
용산驛 /강미영
용산은 파란 운동화였고 문어발이었다. 용산驛은 용감하고 넓었다. 봄 햇살이
왜 슬픈지. 꽉 끼는 경제도 봄 때문일까 풀리는 끈 같았다. 젊은 날 문어발을 씹
으며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고백 없는 키스를 했다. 운명과 함께 찾아온 낡은 가
죽구두는 무모했고 어깨가 넓었다. 우리는 용산驛에서 연애를 했다. 꽃이 피고
맨발의 문어발을 씹었다. 지린내가 났다. 나는 지금 용산驛이라는 행성에 서 있
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신발들이 뛰어간다. 행성은 용산驛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건너편 모서리를 돌면 뜨거운 홍등가가 있다. 쫓기는 어둠이 조형물로 걸
려 있다. 서늘한 페이지가 불량한 광고지처럼 날린다. 밑도 끝도 없는 청춘의 비
문이 자유롭다. 나는 용산과 용산驛 사이 낡은 문장을 더듬는다. 씹다 만 결핍의
비둘기도 날아오르지 않는다. 꿈의 문장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여수역 /조영심
황천에 계시는 아버지는 어쩌자고
여수에 와서
여수의 여수(旅愁) 여수(女囚) 여수*가 된 딸을 보러
저렇게 흔들리는 종착역 플랫폼을 걸어 나오시며
또 손을 흔드시는 건가
새벽을 흔들어 열 길 물속을 가늠하며
푸른 흔들림만을 거래하던 온몸이 상선인 이여
열셋, 흔들림에 오른 후 백발이 되어버린
흔들림의 시작이고 끝일 여수역의 파수꾼이여
저기 저, 우주의 기울기로 휘어진 옆구리
흔들리지 않는 흔들림으로
생의 벼랑길을 트고 뿌리를 내리느라
흔들림 속의 흔들림이 되어버린 이여
생파도의 너울 같은 칸을 건너
목구멍까지 죄어오는 깔딱 숨 넘길 적마다
깊고 깊은 여우울음을 삼켰을 이여
머무름 없는 머무름으로
떠남 없는 떠남으로
이제는 먼 바다와 합류할 바람이 되신 이여
나를 보러 오셨던 삼십 년 전 그날처럼
떠나신 날 맞추어 오늘,
여수역을 흔들며 여수의 여수 여수 여수에게로
왜 들어서시는가 당신과 나의
평행선 선로를 울리는가
*여수 - 여우의 방언
추전역 /김경성
꼬리지느러미 오른편에 앉았다
한 번씩 몸을 비틀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울여지는 아가미 속으로
산길 꾸러미가 흘러들어 갔다, 검은 길은
등지느러미를 따라 흘러가고 물박달나무는 제 몸의 비늘을 벗겨서
속 길을 그렸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연필심이 제 몸의 뼈대가 된
추전역, 이따금 밑줄 긋고 가는 물고기가 없다면
문장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4B연필로 그어놓은 산길 위에 산란하는 물고기 떼,
배지느러미에 말간 알을 가득 안고 바다 쪽으로 흘러갔다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서 내 생도 저물어간다
*물고기의 옆줄(측선)은 물의 온도, 흐름, 수압, 진동을 감지한다.
외원역 /이인원
완행열차는 길다
청량한 공기가 그려내는 입김은 더 길다
적막과 적막 사이의 棧道,
아찔한 벼랑길 따라 여태 걸어 왔는데
아직도 겨울이다
그 여름날 하루는
평생을 가도 다시는 도착 못할 완행이어서
기어이
모든 역마다 서서는
한쪽 어깨가 축 처진 성긴 麻袋로
서너 개씩 부려놓고 가는 쓸쓸함이란 저 화물
오늘은
아픈 내 새끼발가락의 종착역도
매번 초행길인
여기 외원역,
굽은 선로 같은 은결든 늑골 아래로 지금도
저 혼자 울고 있는 기적소리 따라
어쩌자고
하현달마저 덜컹, 멈춰서는 곳
어쩌라고
내 마음 덜컹덜컹, 붙잡아 두는 곳
텅 빈
대합실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 쪽으로
가문비나무 그림자가 목을 길게 빼는 곳
짐짓 타관살이에 이골이 난 척
무작정과 우연 사이 棧道를 힘겹게 넘나들던 이 순례도
헐렁한 麻袋처럼 이젠 제법 여유로운 밤
서울역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