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유로 기자를 그만 두고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나요?”
얼마 정 식사 자리에서 이런 질문이 날아들었다. 몇 마디 대답으로 한 사람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설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 또한 온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이 싫어서 기자를 그만둔 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좀 더 자유롭게 헤엄치고 싶었다고 할까요. 기자 시절에는 기록을 재기 위해 오로지 자유형 영법으로만 실내 수영장 레인을 왕복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작가는 수영장이 아니라 바다에서 팔과 다리를 자유롭게 휘저으며 헤엄치는 사람이죠. 게다가 다른 사람과 속도를 겨룰 필요도 없잖아요.”
작가는 자유로운 직업이다. 삶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어떤 원칙도 형식도 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건너갈 수 있다. 누군가 “이기주 작가는 다시 태어나도 작가가 되고 싶으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하겠지만 결국 “물론입니다”라고 답할 것 같다.
다만 작가는 게을러지려면 정말 엄청나게 게을러질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다. 평소 알고 지내는 작가(作家) 중에 다들 다 일하는 대낮에 술 약속을 잡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작가(酌家)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작가는 대표적인 프리랜서 직업이다. 우리나라에선 프리랜서! 영미권에선 프리랜스! 이는 얼핏 세련된 단어 같지만 서늘한 단어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 유럽의 영주는 어떤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free) 용병과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나면 용병은 긴 창(lancer)을 들고 나타나 영주 대신 싸웠다. 자금은 프리랜서가 자유 계약직 종사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과거엔 ‘대신 피를 흘리며 싸우는 용병’, ‘쓸만한 창을 소유한 병사’ 정도의 뜻으로 사용됐다.
중세의 용병과 프리랜서 작가의 숙명은 묘하게 닮았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창을 휘두르는 것이 용병의 임무인 것처럼, 프리랜서로 일하는 작가는 책상에 앉아 생각과 감정을 소모하며 자판을 두드린다. 지난날 예리한 창과 튼튼한 방패를 지닌 용병이 전장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듯이, 자기만의 리듬을 잃지 않고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가만이 꾸준히 책을 펴낼 수 있다.
용병도 작가도 긴 생명력을 지니려면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특히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선 녹록지 않은 현실의 벽을 넘어야 한다.
출판 시장은 전보다 진입 장벽은 낮아졌을지언정 레드 오션이 된 지 오래다. 독서 인구는 늘지 않고 작가는 범람한다. 독자의 선택과 부름을 받기 위한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런 현실을 뚫고 작가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단련 없이는 병장기 날이 서지 않는 법. 나는 매일 ‘나만의 도장’에서 나를 둘러싼 현실에 촉수를 드리우며 글감을 찾거나 문장을 담금질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도장(道場)’이란 단어는 본래 ‘도장수(道場樹)’의 줄임말이다. 도장수는 키가 30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활엽수인데, 과거에는 보리수로 불렸다. 이 나무 밑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도장은 개인의 심심을 단련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내가 수련하는 도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문장을 수집하는 곳, 그리고 문장을 정제하는 곳이다.
나는 사무실이 따로 없다. 낮에는 ‘맥북에어’, ‘LG그램’ 같은 가볍고 얇은 노트북을 창처럼 움켜쥔 채 서점과 서점 근처에 있는 카페를 어슬렁거리며 대화를 채집하고 글감을 수렵한다. 본디 작가는 글의 소재와 문장을 모으는 사람이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정작 손을 뻗어서 잡아본 적 없는 글감을, 실제로 종이에 써본 적 없는 글귀를 낚아채 자신만의 저장고에 차곡차곡 넣어둬야 한다. 집필 과정에서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말이다.
맨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을 모두 받은 소설가 네이딘 고디머는 “감옥에서도 글을 쓸 수 있으므로 작가에게 풍경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난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인지 발품을 팔아야만 글감을 찾는 편이다. 덧없이 흘러가는 구름이든 바람결에 춤을 추는 나뭇잎이든 내 눈동자에 뭔가를 담아야 직성이 풀린다.
글감을 찾는 일은 기차역 사물함에 보관한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걷다가 우연히 독특한 모양의 돌멩이를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한곳에 말뚝을 박고 경주하기보다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장소를 이동할 때 우연 속에서 의미 있는 글 쓰기의 재료를 획득할 수 있다.
로맨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대사 중 “좋은 구두는 당신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문장이 있다. 이는 필시 구두 회사가 간접 광고를 할 때 슬쩍 집어넣은 대사가 분명해 보이는데, 어쨌든 이를 작가의 입장에서는 조금 비틀어도 충분히 말이 될 거라고 본다. “좋은 공간은 작가를 좋은 문장으로 데려다 준다.”
물론 ‘좋은 공간’의 의미는 단순히 쾌적한 곳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안석처이자 창의력과 집중력이 향상되는 창작의 공간을 의미할 것이다. 머릿속에서 빠져나온 문장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지 않고 차분히 쌓이는 곳, 일상에서 얻은 깨달음과 아이디어가 솟아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가르며 사방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곳 말이다.
광화문 거리에 위치한 ‘포비(FOURB)’라는 카페는 내게 그런 장소다. 이렇다 할 생각이나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나는 이곳에서 베이글과 커피를 시켜놓고 커다란 통창으로 거리를 내다보거나 카페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장면을 관찰한다.
그렇게 한동안 눈과 귀로 주변의 풍경과 소리를 흡수하다 보면, 내 안으로 뭔가 의미 있는 것들이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는 내 글로 옮겨질 그 무엇이….
카페가 문장을 모으는 도장이라면, 서점은 마음을 다독이고 다스리는 도장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점심을 먹은 후 노트북을 챙겨 서점으로 향한다. 문학과 인문 코너를 배회하다가 내 책을 읽는 독자가 보이면 슬쩍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그때마다 “정말 이기주 작가 맞죠?”, “《말의 품격》을 잘 읽었는데 실천하기는 어렵더군요”, “《언어의 온도》를 보면 페이지마다 잉크 자국이 있는데 그건 어떤 의미죠?”, “신간은 언제 나와요?” 같은 의견과 질문에 휩싸이곤 한다.
그러면 원고를 쓰느라 까맣게 타버린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걷고 있는데 누군가 횃불을 들고 나타나 “이리 오세요” 하고 손짓을 하는 것 같다.
“배부르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는 말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질 때, 그러니까 내태와 게으름이 내 안에서 꿈틀거릴 때 나는 서점을 찾는다.
책이 빼곡히 꽂혀 있는 서가에는 책뿐만 아니라 세월이 꽂혀 있다. 책을 쓴 저자와 편집자와 출판 디자이너와 서점 직원의 시간과 눈물이 뒤엉켜 있는 ‘세월의 덩어리’ 앞에서 오만과 교만은 자취를 감춘다. 서가는 늘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
취재 기자들 사이에선 “아이스크림은 녹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말이 회자한다. 세 살짜리도 알 법한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글감의 속성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소재는 너무 오래 묵혀두면 쓸모를 잃고 기억 밖으로 사라진다. 그것이 증발하기 전에 집필(執筆), 즉 붓을 잡고 시간을 들여 구체적인 문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아이스크림처럼 스스로 녹아버리기 전에.
창작의 기운이 샘솟는 장소는 작가마다 다른 듯하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돌턴 브럼보는 술집과 욕실에서 술과 커피로 몸을 가득 채워가며 시나리오를 썼다. 은둔자의 삶을 산 에밀리 디킨슨은 말년에 거의 외출하지 않고 2층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며 시를 적었다.
《수상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공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영지에 있는 ‘치타델레’라는 원형 탑에 틀어박혔다. 그곳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만 돌보며 책을 읽고 집필에 몰두했다.
내가 노트북에 코를 박을 정도로 몰입하면서 문장을 가다듬는 곳은 우리 집 다락방이다. 제련소에서 용광로의 광석을 녹여 금속을 분리하듯,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락방에 올라가면 머릿속에 맴도는 글귀에서 불순물을 걸러내 중요한 고갱이만을 문장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책상에 앉자마자 은행 ATM처럼 문장을 토해내는 건 아니다.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나만의 예열 과정을 밟거나 의식을 행한다.
다락방에 들어서면 나는 검은색 수성 펜과 적당히 뾰족하게 깎은 ‘블랙윙’ 연필이 책상 위에 온전히 있는지 확인하고 창문 커튼을 딱 절반만 젖힌다. 그런 다음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실지 우유를 넣은 부드러운 라테를 마실지 결정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따뜻한 커피를 두 모금 정도 마신 다음 무조건 컴퓨터에 손을 얹는다. 이때 들이켜는 커피는 일종의 스위치다.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누르는 순간 나는 번잡한 동작을 모두 멈추고 오로지 글을 쓰는 일에 몰입한다.
거뭇한 키보드에서 “타닥, 타다닥, 타다다다닥~” 소리가 경쾌하게 흘러나오면 창작열이 갑자기 활활 타오르지는 않더라도, 손가락 끝에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뭔가 나아질 것 같은 예감이….
난 나만의 도장에서 이 묘하고 달콤한 예감을 도복처럼 껴입은 채 글쓰기의 근육을 단련하고 작가의 삶을 이어가는 것 같다.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 법이다. 계절과 감정과 인연만 그러할 리 없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 ‘글의 품격, 삶이 곧 하나의 문장이다(이기주, 황소북스,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01.27.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