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여행기 4일차 (二条城/니조성-1)
작년 10월 1일 교토여행기를 올리고 이제야 다시 올린다. 4개월이 넘었다. 내가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어야 글을 쓰다 보니 늦어지게 됐다. 니조성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쉽게 쓸 수 없는 부분이 있었고 계속 의문의 꼬리를 물었다. 확신도 없었다. 거기에다 일도 겹쳐 많이 미뤄졌다.
일단 일본 건축을 공부해야 쓸 수 있을 부분이 있어 연말에 일본건축사에 대한 책을 3권 구매해 읽었다. 도움이 많이 됐다. 역시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절감한다. 이것저것 찾다보니 의문에 의문을 더한다. 무엇보다 일본사에 대한 것을 모르니 더욱 그랬다. 거기다 일본말도 모르니 파파고의 도움을 빌리고.
건축물은 시대상황에 큰 영향을 받는다. 니조성을 공부하다 보니 시대상황 특히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일본사에 대한 최소한 백과사전 수준의 지식과 그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글 쓰는데 시간만 잡아먹고 양도 많아졌다. 아예 무시했다면 벌써 끝났을 글인데 이제야 니조성 일부를 끝냈다.
가. 교토 이해하기
니조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교토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교토는 794년 헤이안 시대가 시작한 이래 메이지 시대 초기인 1869년까지 1075년 동안 일본 수도였다. 그러므로 교토는 도시 근간을 갖추고 있었다. 처음 교토에 헤이안성平安城을 만들었을 때는 중국 당나라 성제를 받아들여 동서4.5㎞, 남북5㎞의 사각형이었고 라조몬羅城門이 있었던 ‘라조몬羅城門 유지遺址’라는 곳에서 시작해서 북에 있는 다이다이리大內裏까지 이어지는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시가를 형성했다. 그러나 서쪽이 저습지라 곧 쇠퇴해서 동쪽에 만 시가지가 형성됐다. 그래서 1637년 교토지도처럼 길쭉한 형태로 변한 것이다.
이런 교토는 1573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크게 개조됐고, 이를 기반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니조성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쿄오토 고쇼(きょうとごしょ:京都御所)라 불리는 건물은 원래 궁이 아니었다. 원래 궁인 다이다이리大內裏는 현재 위치에서 서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자주 화재가 나서 다른 곳에서 임시로 지내다 1331년 고오겐光嚴일왕이 토어문土御門동동원전東洞院殿을 궁으로 정하면서 현재 위치가 왕궁이 된 것이다.
1637년 지도를 보면 니조성 동북쪽에 ‘구게치公家地’라고 하는 곳에 경도어소京都御所가 있었을 것이다. 대지 구획을 보면 지금과는 달리 잘게 나눠져 있다. 일본 위키백과에 의하면 경도어소는 7차례 중건된 것이다. 에도시대 초기 2번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한 것이다. 현재 구역은 에도 말기에 확보된 것이라 한다. 어쨌든 에도시대에는 일본왕의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았음을 지도에서 알 수 있다.
* 구게公家 : 日王의 조정에 출사하는 사람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니조성을 짓기 전에 이미 니조성으로 불리는 성이 넷 있었다. 무로마치 가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성과 저택이다. 니조성은 필요했던 이유는 막부정권이 일본왕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쇼군들의 반란을 막고 일본왕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일본왕궁 근처에 성을 지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전제로 보면 니조성이란 이름은 관행적으로 왕성에 있는 막부정권의 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 니조성과 텐슈天守 성제城制
위키백과에 의하면 니조성二条城은 막부 측에서는 부르는 이름이고 조정 즉 일왕 측에서는 니조정二条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도쿠카와 이에야스(1543~1616)가 교토에 왔을 때 머무를 숙소로 세워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왕 입장에서 보면 늘 견제당하는 입장에서 성으로 부르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도쿠카와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일단 니조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니조성을 세우면서 자기와 반대편에 있었던 쇼군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계획을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상경시 머무를 숙소로 성을 짓기로 결정하고, 1601년 음력 12월에 반대세력인 서국西國 여러 다이묘에 운영비와 노무를 할당했다. 이렇게 다이묘에게 운영비와 인원동원을 지시하면 다이묘들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은 1604년 에도성을 대대적으로 증축할 때도 다이묘 규모별로 인력 및 물품을 제공하게 하여 다이묘를 약화시켰다. 이후 1616년에는 ‘일국일성一國一城’ 칙령을 내림으로써 다른 다이묘들의 군사력강화를 제어했다.
니조성은 1602년 5월 착공, 다음해 8월 3일에 성이 완성되고, 텐슈天守는 1606년에 지어졌다. 1603년 2월(음력)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 교지를 받고 3월에 니조성에서 ‘하이가의 예/拝賀の礼’를 거행한 후 명실상부한 쇼군이 됐다. 161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니조성 니노마루 어전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1593~1615)를 만난 뒤 히데요리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껴 1614년 오사카 전투를 일으켜 전쟁을 일으켰고 다음해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진 히데요리가 1615년 할복함으로써 에도시대를 열었다.
* 하이가의 예/拝賀の礼 : 무로마치 막부 이래의 정이대장군이 됐을 때 천황에게 하는 관례
니조성은 평지성이다. 평지에 세워진 교토에 들어갔기 때문에 평지성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니조성이 세워지기 전부터 평지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다이묘들의 지배권이 확장되면서 방어하기 좋은 산이나 구릉지에 만들어진 성을 버리고 평지로 내려와 지역을 다스리기 좋은 도시에 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일본 건축사에서 근대도시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 시대 축성술을 대표하는 것은 ‘텐슈天守’다. 텐슈로 대표되는 축성술이 발전한 것은 전쟁양상의 변화 때문이다. 1575년 나가시노성長篠城 전투를 계기로 화포에 대한 대비가 중요해지면서 축성술도 발전했다. 나가시노성 전투를 그린 평풍을 보면(그림 맨 우측) 건물 위에 망루를 올린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텐슈의 초기형태로 보고 있다.
이 시기 텐슈 발전이 두드러지는 것은 산성에서 평지성으로 바뀌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기에 텐슈가 많이 지어지는데 지배계급의 성으로 높이 치솟은 텐슈는 권위를 보여주는데 아주 적합했기 때문이다.(고토/183쪽) 텐슈초기형태는 ‘망루식’으로 불리는데 1576년 마루오카성丸岡城의 텐슈가 망루식으로 지은 예다. 이런 망루식 텐슈가 발전해서 주거와 지휘를 겸하는 텐슈가 되는데 그 시작이 1579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지은 아즈치조安土城 텐슈다. 이후 ‘일국일성一國一城’ 칙령이 발효되면서 텐슈는 추가로 지어지지 않았다.(현재 남아있는 텐슈天守는 12개소다/西 知夫/182쪽)
니조성은 1차와 2차로 나눠지어졌다. 앞은 니노마루어전二の丸御殿이고 안쪽은 혼마루어전本丸御殿이다. 그러나 처음 니조성이 축조될 때는 니노마루 부분만이 있었다. 최초에 지어진 니조성은 현 니노마루 부분에 지어진 혼마루로만 구성된 성이었다.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1623년 혼마루 부분으로 확장해서 증축한 것이다. 그리고 1626년 일본 왕을 이곳에 모셔 향연을 베풀기 위해 1624년부터 대대적인 증축이 있었다.(별첨 니노마루어전평면 중 점선부분은 향연이후 철거됐다)
니조성은 이중구조다. 앞은 니노마루고텐二の丸御殿이고 안쪽은 혼마루어전本丸御殿이다.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다시 혼마루 부분을 증축하면서 현재 모습이 된 것이다. 그런데 혼마루와 니노마루의 해자를 보면 혼마루 해자 폭이 더 넓다. 최후 방어선인 혼마루를 지키려는 의지가 해자에서도 보인다.
니조성이 처음 지어졌을 때 지어진 텐슈는 1624년 요도성으로 이축됐고, 혼마루에 텐슈는 혼마루 북서쪽 구석에 1623년에 세웠는데 폐성되었던 후시미성의 천수를 이축한 것이다. 따라서 약 1년 정도지만 2개 텐슈가 나란히 있던 시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위키백과) 그러나 혼마루 텐슈는 1750년 낙뢰로 천수가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니조성을 보고 일본 성에 대해 자료를 보면서 일본 중세는 정말 전쟁에 진심인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번을 중심으로 하는 쇼군들 간에 전쟁이 많았다. 특히 무로마치 막부부터 임진왜란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다시 통일 할 때까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평지에 성을 쌓았다면 방어력을 갖춘 성을 쌓아야 한다. 니조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다. 니조성의 변화
에도막부가 들어서고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이것이 니조성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첫 번째는 1620년 도쿠카와 2대 쇼군인 히데타다의 딸이 고미즈노 일왕의 왕후가 된 것과 두 번째는 도쿠가와 가문의 4대 쇼군부터 ‘하이가의 예’를 하지 않은 것이다. 2대 쇼군 딸이 일왕의 왕후가 됐다는 것은 도쿠카와 가문이 일 왕가와 일체가 됐다는 것으로 도쿠카와 막부를 공고하게 했을 것이다. 1623년부터 대대적으로 니조성을 개축하고 정원을 만든 후 일왕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 것도 이런 결혼 때문이다. 이 연회 후 많은 건물이 철거됐다.
그리고 1634년 음력 7월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30만7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교토에 온 이후 메이지 유신 즈음까지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니조성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리고 4대 쇼군부터 ‘하이가의 예’를 하지 않는 것은 이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1627년 일어난 시에 사건(링크참조), 1629년 가스가노 쓰보네의 일왕 배알 등으로 막부에게 치욕을 당한 고미즈노오 일왕은 일곱 살에 불과하던 딸에게 천황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 딸은 2대 쇼군인 이테타다의 외손녀였다.
그렇다보니 이 여왕이 재위하는 동안 1629년부터 1632년까지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섭정하였고, 1632년부터 1643년까지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섭정하였다. 1634년 30만 대군을 이끌고 교토를 방문한 것은 일왕실이 쇼군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고 이로써 자연스럽게 4대 쇼군부터는 ‘하이가의 예’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정도 일왕실과 도쿠가와 막부의 위상이 정해지자 더 이상 교토를 방문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고 자연스럽게 니조성의 효용성이 사라지면서 규모유지에 관심이 없어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1730년 텐슈가 소실되었음에도 재건하지 않은 것이다.
니조성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1863년이다. 1854년 3월 31일(양력) 미일 화친조약을, 1858년 7월 29일(양력)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도쿠카와 막부는 일왕의 허락없이 굴욕적인 조약을 처리했다는 이유로 강경파와 여러 번들에게 질타를 당했다. 이에 막부는 일왕과 에도막부가 제휴해 ‘공무합체公武合体’ 즉 에도막부의 의사결정권을 교토에서 열리는 다이묘 회의로 대폭이양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1862년에서 1863년까지 전국의 무사들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치며 교토에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1863년 음력 3월 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일왕의 요청으로 상경했다. 이에모치 상경을 위해 1862년부터 니노마루 어전과 혼마루에 가리어전을 지었다.
14대 쇼군인 이에모치는 2차 조슈정벌을 위해 오오사카로 이동했으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1866년 여름 사망한다. 이에 니조성에서 막부관료 회의에 의해 15대 쇼군으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가 쇼군으로 임명됐지만 취임거절로 미뤄지다가 음력 12월 니조성에서 쇼군 교지를 받는다. 이후 와사카 오마이번 저택에 있다가 1867년 음력 9월 니조성으로 옮기고 10월(양력 11월 9일) 쇼군 사직과 ‘대정봉환大政奉還’의 뜻이 전달됐다. 최종으로 막부폐지가 선언된 것은 음력 12월 9일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에서였다.
이후 니조성은 1871년(메이지 4년) 니조 성 니노마루 어전은 교토 부 청사로 되었다가 1873년 육군성 소관으로 넘어가고, 1884년 궁내성 산하 니조이궁二条離宮으로 개칭된다. 1885년 교토 부의 신청사가 완성되면서 니노마루 어전을 1887년까지 수리했다. 1893~4년에 걸쳐 교토 어원에 있던 황족 저택을 혼마루에 이축하고 혼마루 어전으로 삼았다. 1915년 다이쇼 일왕 즉위가 니조 성 니노마루에서 거행되면서 남문과 니노마루 어전의 부속 건물이 증축됐다. 행사가 끝나고 남문을 제외한 건물은 철거됐다. 태평양 전쟁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의향으로 니노마루 북쪽에 테니스 코트가 만들어졌고 이것을 다시 1965년 정원으로 만들었다.
1915년 다이쇼 일본왕 즉위가 이곳에서 이뤄진 것은 막부체제가 끝나고 명실상부한 일본 왕 직접통치시대가 됐음을 알리는 선포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이후 일왕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였을까? 이전과 이후 상황을 보면 막부시대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일왕의 직접통치가 맞다면 일왕은 전범으로 처벌됐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것 자체가 일왕은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도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 일본건축사/고토 오사무(後藤 治)/김왕직‧조현정 옮김/한국학술정보(주)/2011.11.
- 일본건축사/西 知夫‧穗積 知夫/이무희‧진경돈 옮김/세진사/2015.03.
- 일본조선비교건축사/스키야마 노부조/서동천 옮김/세진사/2017.07
<위키백과 니조성>
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C%A1%B0%EC%84%B1
<일본위키백과 니조성>
https://ja.wikipedia.org/wiki/%E4%BA%8C%E6%9D%A1%E5%9F%8E
<교토 왕궁>
https://namu.wiki/w/%EA%B5%90%ED%86%A0%EA%B3%A0%EC%87%BC
<京都御所>
https://ja.wikipedia.org/wiki/%E4%BA%AC%E9%83%BD%E5%BE%A1%E6%89%80
헤이안 시대
平安京へいあんきょう
https://ja.wikipedia.org/wiki/%E5%B9%B3%E5%AE%89%E4%BA%AC
<皇に徳川の権勢を見せつける二条城にこれだけ見つかる西洋の痕跡>
https://www.gqjapan.jp/lifestyle/article/20220311-shiro-8
二条城行幸図屏風
https://www.umam.jp/blog/?p=7315
<도쿠가와 히데타다> 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 3대 쇼군
https://namu.wiki/w/%EB%8F%84%EC%BF%A0%EA%B0%80%EC%99%80%20%EC%9D%B4%EC%97%90%EB%AF%B8%EC%B8%A0
<도쿠가와 이에미쓰>
<자의 사건>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9D%98_%EC%82%AC%EA%B1%B4
<자의 사건>
바쿠후가 천황과 조정이 승려들에게 마음대로 자의(紫衣, 승복)나 고승의 칭호를 하사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당시의 천황 고미즈노오 천황이 이를 묵살하고 종래대로 수십 명의 승려들에게 자의 착용을 허용한 사건.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오고쇼 히데타다는 이에 즉각 반응하여 천황의 명령을 법도 위반을 이유로 취소하였고, 이는 바쿠후와 쇼군의 명령이 천황의 명령보다 위에 있음을 온 나라에 천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분노한 고미즈노오 천황은 항의의 표시로 황위에서 물러났고, 고미즈노오 천황의 딸이자 히데타다의 외손녀가 859년만에 여성 천황으로 황위에 올랐다. 다카시로 고이치, 『일본의 이중 권력, 쇼군과 천황』
- 간에이 6년(1629년) 시에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정, 신사 및 사원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듬해인 간에이 7년(1630년) 9월 12일 외손녀 이치노미야(一宮)가 메이쇼 천황으로 황위에 오르면서 천황의 외조부가 되었다.
<가스가노쓰보네>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8A%A4%EA%B0%80%EB%85%B8%EC%93%B0%EB%B3%B4%EB%84%A4
<메이지유신>
https://namu.wiki/w/%EB%A9%94%EC%9D%B4%EC%A7%80%20%EC%9C%A0%EC%8B%A0
<王政復古 (日本)>
https://ja.wikipedia.org/wiki/%E7%8E%8B%E6%94%BF%E5%BE%A9%E5%8F%A4_(%E6%97%A5%E6%9C%AC)
첫댓글 공부거리를 주시네요.
어제 고대 헤이안성 지도에서 ‘니조성二条城’이란 이름의 시작을 알게 됐다. 교토의 초기 성 지도를 보면 남북도로와 동서도로의 작명 방법이 다르다. 남북으로 놓인 도로는 주작대로라는 중앙도로를 제외하고는 성문이나 중요한 건물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를 보면 대내리 즉 왕궁 뒤쪽 도로를 ‘이치오오지一条大路’로 부르고 남쪽 나성문에 면한도로를 ‘지우오오지九条大路’로 이름하여 숫자를 기본으로 동서로 난 도로를 구분하고 있다. ‘니조오오지二条大路’는 왕궁 앞에서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다.
니조성은 왕궁 앞에 있는 도로인 ‘니조오오지二条大路’에 지어진 성이다. 따라서 도로 이름을 그대로 붙여 부른 것이다.
어제 올린 니조성 글에서 “니조성은 필요했던 이유는 막부정권이 일본왕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쇼군들의 반란을 막고 일본왕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일본왕궁 근처에 성을 지어야 했던 것이다.”라고 했다.
왕궁을 보호하고 감시하려면 궁성근처에 성을 지어야 한다. 그런 목적에 적합한 장소가 바로 궁성 앞에 가로지르는 ‘니조오오지二条大路’인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성을 지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니조성二条城’이란 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