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__신부 하 안토니오 몬시뇰 님____
1950년대 말, 한국은 6.25 전쟁 후유증으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집이 없어
노숙하고, 먹을거리가 없어 세끼를 굶는 이가 수두룩했다. 누구나 힘들어 선뜻
도움을 청할 수 도, 받기도 쉽지 않던 시절,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꾼 이가 있다. 부산 지역 발전에 공헌한 공로로 명예 시민증을 받은
독일 신부, 하 안토니오 몬시뇰 (93세)님이다.
1959년 부산 우암동의 동항성당에 부임한 그는 종교에 상관 없이 헐벗은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가 외국에서 먹을거리를 지원받아 끼니를 굶는 주민에게 건네던
날이었다. 한 남자가 100인분의 음식 배급을 부탁했다.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
들이 종일 굶는다고 했다. 남자를 따라가 보니 100여명의 고아가 찬바람이 부는 길
바닥에서 지냈다. 그는 그중 소아마비를 앓는 여자아이다 눈이 마주쳤다. 그 아이를
차마 길에 둘 수 없어서 사제관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다음날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
반신불수인 아이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 왔다. 그렇게 일곱명의 아이가 그와 사제
관에서 8년 동안 지내며 공부를 마치고 부모 잃은 공허감도 달랬다.
"한번은 길을 가다 서럽게 우는 학생을 만났어요. 왜 우느냐고 묻자 학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낫다고 하더군요."
그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거리를 서성이는 학생들을 보고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해 모두 공부
시켰다. 그 덕분에 공부를 마친 학생만 90명이 넘었다. 그중 한명은 20여 년이 흐른
뒤 우연히 뉴욕의 종교 행사장에서 만났는데,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시작한 사업이
성공해 자리 잡았다며 거듭 고맙다고 했단다.
먹고 살기도 팍팍해 공부는 뒷전이던 때였지만 그는 기술을 배우면 굶지 않을거라고
생각햇다. 그래서 1965년 성당옆에 기술 학원을 짓고 재봉틀과 옷감을 지원받아
재봉 기술 등을 가르쳤다. 기술학원은 한독여자실업고등학교 (현 부산문화여자고등학교)
의 모태로, 여학생이 기술을 익혀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구심체가 되었다.
그는 자선 사업가로 불렸다. 그럴 것이 작은 고아원이나 다름없던 사제관 생활에
이어, 행려 환자와 걸인을 위한 사랑의 집, 돈이 없어 병원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산모를 위한 조산원도 마련했기 때문이다. 1977년부터 1992년까지 2만여명의
신생아가 성당 옆 조산원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처럼 어렵고 소외된 사람을
돕는 데 온 힘을 기울인 이유는 2차 대전 때 경험한 포로 생활 때문이었다 . 배고픔에
시달려 먹을거리를 부탁했지만 돌아온 것은 "돋일 사람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차가운 답변뿐이었다. 그때 그는 도움을 청하는 이를 절대 그냥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전쟁이 끝나고 동항성당에 부임한 그는 기술학원, 조산원 등의 운영 기금을 마련
하기 위해 독일 방방곡곡을 돌며 모금 운동을 벌였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집을 팔고 양로원으로 들어갔다. 하루는 그의 주선으로 독일
병원에 취직한 한국 간호사들이 그 양로원을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물을 길어 쓸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던 탓이다. 이를 딱히 여긴
간호사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그의 어머니를 보다 나은 양로원으로 모셨다.
그의 삶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보다 한국 사람이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신부가 되었을 때 지베르츠라는 신부가 한국에 신부가 없으니 와 달라고 했다.
그 한마디가 마음속에 떠나지 않아 한국에 간다고 했을때, 지인들은 이국 생활에
몸이 쇠약해질 거라며 만류했다. 하지만그는 아랑곳 않고 부산에 발을 디뎠다. 한 동안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새벽마다 사방에서 울리는 "소금사세요!" "두부사세요."
"재첩국 사세요." 하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또 길가에 재봉틀을 놓고 옷을 깁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좌판에 물건을 줄비하게 놓고 파는 이도 많았다. 질서 정연한
독일과 사뭇 다른 풍경이지만 그는 혼잡한 거리에 넘실대던 생명력과 활기를 느꼈다.
그는 1959년 태풍이 강타하면서 수많은 집이 부서지고 이재민이 생겼을 때도 인상
적이있다고 했다. 독일 사람은 야단이었을 텐데 부산 사람은 가만히 지켜보다 태풍이
지나간 뒤 복구 작업을 서둘렀다. 그는 시련을 묵묵히 견디는 모습에 감동했다.
부산에서 50여 년간 지내는 동안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항상!"
이라고 대답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국 사람은 누구냐고 묻자"배경준!"이라고
했다. 사제관에서 생활한 일곱 아이 중 한명이다. 그는 머슴살이 하던 배경준
님을 데려와 공부시키고,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 주었다.배경준 님은 그와 함께하면서
더불어 함께하는 기쁨을 깨우쳤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에서 직장 생활할 때 갈 곳
없는 이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사제관에서 동거동락하던 형제들, 사촌
동생 등 모두가 취직하고 결혼할 때까지 줄곧 함께지냈다. 배경준 님은 그때
타산과 한 공간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달으며그의 큰 사랑을 다시금
느꼈다고 했다. 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내다 정년퇴직하고 그의 곁에서 일을 돕는
배경준 님, 두 사람은 서로를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불렀다. 평생을 인생의 동반자로,
부자 처럼 지낸 그들이 주고 받는 눈빛엔 정이 그득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책꽃이에 가득 꽃인 앨범을 구경했다. 그의 젊은 시절
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입은 조개처럼 다물고, 눈빛은 강렬했다. 고개들어
지금의 그들 바라보니 서글서글 한 눈매에 웃는 인상이었다. 얼굴에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달동네의 성자로,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로 불린 그의 일생이
........, 가장 뿌듯한 일은 사람을 남긴 것이라는 말에 나눔이 행복을 가져
온다는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였다.
____글, 이하림 기자_____
( 강헌 선집 1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