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과 시흥행궁(始興幸宮)- 화성원행(華城園行) 길을 금천으로 변경하다|
정조대왕과 시흥행궁(始興幸宮) 화성원행(華城園行) 길을 금천으로 변경하다 정조대왕 어진 정조대왕(1752~1800, 재위 1776~1800)은 조선왕조 제22대 임금이며, 성품과 치적, 학문과 사상 면에서 전후 임금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성군이다. 정조는 비운(悲運)에 가신 사도세자(1735~1762)의 아들이다. 사도세자는 정쟁에 휘말려 희생되었다. 지나치게 영특한 사도는 열 살 때에 아버지 영조와 당시 집권층인 노론이 처리한 신임사화(辛任士禍)에 대한 판결을 비판하였다. 이 때부터 노론과 갈등의 씨가 자라기 시작했다. 신임사화는 1721년(경종1년)과 1722년(경종2년)에 소론이 노론을 역적으로 몰아 축출한 사건이다. 영조는 즉위즉시 신임사화를 노론의 입장에서 판결함으로서 소론의 입지를 약화 시켰다. 사도는 집권층인 노론은 물론 아버지 영조와도 갈등관계를 갖게 된다. 영조는 정당하지 못한 임금즉위, 즉 이복형인 경종을 살해하였다는 핸디캡과 어머니 신분문제(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임)로 늘 열등감에 젖어 있었으며,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노론을 정치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영조는 노론의 끈질긴 권유와 심지어 장인까지 합세하여 사도를 죽이라고 권유하자 그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정적이자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역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영조는 1762년 윤5월에 28세의 사도를 뒤주에 가두고 그 위에 풀을 깊게 덮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하고는 누구도 그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 정조의 나이 11세였다. 어린 정조는 아버지의 딱한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 영조의 용포자락을 붙잡고 사도는 숨 막히는 공간 속에서 갈증을 느끼면서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기 위하여 이마로 뒤주를 받고 손톱으로 긁기를 얼마나 했는지 이마에서는 선혈이 낭자하고, 손톱은 달아서 문드러졌다. 이때 뒤주를 지키던 병사가 죽었나 하고 뒤주를 흔들었다. 속에서 들릴 듯 말 듯 생명이 끊어져 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그가 만년에 지은 「한중록(閑中錄)」에서 사도세자를 정신병자였기에 영조가 죽인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도세자는 노론의 각본에 의하여,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홍봉한, 혜경궁 홍씨와 조연으로 등장하는 이해중, 김상로, 홍인환, 홍낙신, 홍낙임, 홍계희, 생모 영빈 이씨, 숙의 문씨 등과 영조의 감독 하에 이루어진 희대의 살인극이었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 일가가 주도하여 사도세자를 살해한 역사적 사실을 감추기 위한 트릭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정조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편을 들자니 국법이 울고, 국법을 준수하자니 어머니가 울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늘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1762년 윤 5월 13일에서 5월 21일까지 8일간 뒤주에 갇혔다 죽었다. 이번 정조의 원행일정도 8일이다. 혹 정조가 일정을 8일로 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두고 계획한 것은 아닐까? 정조는 등극하고 나서도 어려서 겪은 정치의 비정함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는 당쟁을 피하기 위하여 강도 높은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노론의 쇠사슬을 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추진한 사업이 아버지의 무덤을 화성(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여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삼아 노론의 세상이 아닌, 왕과 백성이 주인공이 되는 훌륭한 나라를 만들어 볼 원대한 꿈을 가지고 추진하였다. 1789년에 아버지 묘소인 양주 배봉산 수은묘 을 화산(花山, 현재의 수원華城)으로 천장하고 현륭원(顯隆園. 원은 왕의 후궁이나 왕자의 무덤을 말한다)이라 하였으며, 이듬해인 1790년부터 매년 1월, 아니면 2월에 신하들을 대동하고 현륭원을 참배하였다.(1797년부터는 1월과 8월 두 차례 참배). 정조13년~24년까지13회의 능행이 행해젓다 화성원행은 1790년부터 1794년까지는 창덕궁 - 보신각 앞 - 숭례문 - 한강로 - 한강 배다리 - 용양봉저정(노량진1동) - 숭실대 앞 - 사당사거리 - 남태령 고개 - 과천행궁 - 인덕원 사거리 - 군포 - 지지대 고개 - 화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1795년부터는 한강 배다리에서, 용양봉저정 - 상도동 장승박이4거리 - 신대방3거리 - 여의대방로 - 시흥대로 - 구로디지탈단지역 - 무지개 아파트 앞 - 홈플러스시흥점- 시흥행궁(현재 시흥동 은행나무가 있는 부근) - 석수역 - 안양교(만안교) - 안양역 - 군포를 거쳐 화성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오래전부터 왕이나 세자의 온천행이나 능행으로 이용하던 과천길은 문제가 있었다. 이 길은 사당동 고개를 오르내려야 하고 남태령을 넘어야 하는데, 고개가 좁고 험하여 어가가 행차하기에는 불편했다. 그렇다고 확장하자니 당시의 장비로는 석산을 부수기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조선말기까지만 해도 남태령은 산적이 출몰하는 험악한 지형을 가진 곳이었다. 어가의 행차길이 잘 다듬어지지 않는다 하여 죄 없이 관원이 문책을 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백성은 백성대로 노고가 컸다. 정조는 과천길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도록 영을 내린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1794년) 음력 4월 2일조에 의하면, 경기감사 서용보가 임금께 아뢰기를 “현륭원에 거둥(擧動, 임금의 행차는 거동이라 쓰고 거둥이라 읽음) 때의 연도에 있는 지방 가운데 과천지역은 고갯길이 험준하고, 다리도 많기 때문에 거둥할 때를 당하면 황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또 길을 닦을 적에 백성들의 노력이 곱절이나 들어가므로 상[임금]께서 이런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편리한 방도를 생각해 보라는 명이 있었기에 전후의 도신(道臣)들이 모두 금천(衿川)으로 하는 길이 편리하다는 내용을 이미 전달하였습니다. 신이 이번에 살펴 본 바로는 비단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는 현저한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대가 평탄하고 길이 또한 평평하고, 넓으니 이 길로 정하는 것은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년 거둥 때 거행할 여러 가지 문제는 이미 전교를 받았으므로 관아의 수리와 길을 닦는 등의 일은 지금 당장 착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침 관서의 남당성(南塘城, 1769년 청천강변에 축조한 성)을 쌓고 남은 돈이 아직 일만 삼천 냥(13천량)이 있다고 하니 우선 가져다가 쓰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보고하였다. 정조대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경기감사 서용보가 시흥현의 현청(縣廳) 옆에 행궁(行宮, 幸宮)을 지었다. 시흥행궁은 정조대왕을 이은 순조와 헌종, 철종11년(1860)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행궁은 1858년(철종 9년) 1월에 실화로 모두 타 없어졌다. 1868년(고종5년)에 현금 2천량과 안양주정소를 헐어 그 목재로 복원하였다. 1904년 제2차 시흥농민봉기 때 일부가 불에 타고 1910년 12월 7일에 시흥군청사를 이곳에서 영등포 문래동으로 이전한 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후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정조대왕과 시흥행궁 정조는 1795년 윤 2월 9일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누이 두 분을 대동하고 화성원행을 겸하여 어머니 회갑연을 올릴 계획으로 창덕궁을 출발한다. 출발에 앞서 수정전에 가서 할머니 정순왕후께 인사를 드렸다. 정순왕후는 할아버지 영조의 계비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여인이다. 정순왕후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 아래였으며, 정조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홀로 임종을 지켜봤다, 그래서 정조의 독살설에 연루되기도 하는 여인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동갑내기였다. 사도의 회갑은 1월 21일이고 혜경궁 홍씨 회갑은 6월 18일 이다. 그런데도 2월에 원행을 하고 회갑연을 하는 이유는 농번기를 피하여 부역으로 농민의 피해를 줄이고, 농작물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화성에서 2월에 어머니 회갑연을 하고서, 6월 18일에 연희당에서 다시 회갑연을 올렸다. 정조는 배를 엮어서 임시 가설한 한강 다리[배다리, 舟橋]를 건너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든 후 지금의 시흥IC 부근인 문성동 앞길에 도착하여 장막을 치고 손수 어머니에게 간식인 죽을 올린다. 다시 그곳을 출발하여 저녁 무렵에 시흥행궁에 도착한다. 시흥행궁에서 편안히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아침 일찍 화성으로 향한다. 화성에서 일정을 소화한 정조는 다시 역순으로 환궁 하는데 이 때에도 시흥행궁에서 경숙한다. 이 때의 행사내용을 담은 여덟 폭짜리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에 도착해서는 평소 가지고 있던 슬픈 감정을 폭발했다. 당시 영의정인 채제공(1720~1799, 충남 홍성출생, 남인의 영수)의 표현을 빌리면, 야사(野史)에서는 정조가 과천길을 피하여 금천길을 택한 이유가 「김약로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 라 적고 있다. 김약로는 노론의 영수로 사도세자를 죽게 하는 데 깊이 관여한 김상로의 형이다 물론 김약로는 사도의 죽음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또 정조는 정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죽음에 직접 관여한 풍한 홍씨 등 극히 소수에 한하여 처벌 하고 지나친 강경책을 쓰지 않았으며, 혹 대신들이 정조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하여 운을 떼면,
정조대왕의 1795년 화성원행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장엄하게 치러진 행차이었다. 참고로 이 원행에 소요된 경비는 모두 103,061량이며, 이 돈은 세금이 아니라 정부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이 원행에 참여한 인원은 1,779명이며 동원된 말은 779필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동원된 인원은 약 6천여 명이다. 시흥행궁의 모든 일을 주관할 당상은 호조판서 이시수, 장교 왕도원이며, 실무자인 낭청에는 외빈 홍대영, 장교 임복기 등이다. 시흥행궁 행차 일기
혜경궁 홍씨 가교 정조대왕의 시흥행궁 행차를 시흥현, 즉 당시 시흥현의 관할구역인 현재의 금천구, 동작구 일부, 관악구, 영등포구, 구로구, 광명시, 안양시 일부 지역에서 거둥한 경로와 행동을 일기형식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기로 한다. 능행 코스 ......鷺梁舟橋(自 敦化門 10里) - 용양봉저정(果川初境) - 長安峴(자 용양봉저정 1리) - 長生峴(자 장안현 1리) - 桃花站撥所前路(자 장생현 1리) - 蕃大方川橋(자 도화참발소전로 1리) - 蕃大方坪(자 번대방교 1리) - 馬場川橋(자 번대방평 3리) - 文星洞前路(자 마장천교 2리) - 壽川站撥所前路(자 문성동전로 2리) - 富壯川橋. 始興縣行宮(자 수천참발소전로 1리) - 大博山前坪(자 시흥현행궁 5리) - 念佛橋(자 대박산전평 3리) - 萬安橋(果川初境) - 安養站發所前路(자 염불교 1리) - 長山隅(자 안양참발소전로 1리) - 軍布川橋(자 장산우 3리) .......... 다소 물의가 있지만 이 코스를 현재의 길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할 것이다. ..... 한강대교 - 용양봉저정(노량진1동주민센터현장민원실) - 만안고개(매봉로) - 극락정사 - 상도1동주민센타 - 장승박이4거리 - 신대방3거리 - 신대방삼거리역 - 여의대방로 - 동작세무서 - 시흥대로 - 구로디지탈단지역 - 시흥IC - 말뫼고개 - 시흥고개 - 무지개아파트상가 앞길 - 홈플러스시흥점 - 은행나무로 - 시흥행궁[경숙] - 은행나무로 - 시흥대로 - 박뫼고개 - 시흥3동 - 석수역 앞 - 경수대로 - 삼성3교 - 안양교 - 안양역 .........
「일성록」에서는 윤2월 16일 정조의 환궁시에 있었다(文星洞前路 始興縣令洪景厚 領民人祗伏路左)’〃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지역은 개발하기 전에도 비교적 현재와 같이 넓고 평평한 지형이었다. 1911년도에 작성된 지적원도에는 밭과 대지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시흥대로는 1760년대 이전 지도에는 길이 관아까지 그려져 있고 한양에서 들어오는 길과 수원으로 나가는 길이 별도로 그려있다. 그러나 1872년 제작된 시흥지도에는 도로의 선형이 지금의 시흥대로와 대체로 유사하다. 이는 시흥대로의 선형이 1794년도에 대폭 정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시흥길은 1794년 1월에 착수하여 4월에 완성되었다. 우리나라는 병자호랑 이후 도로개설이나 수리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적의 전차나 수례가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이었다. 숙종의 치도병가지대기(治道兵家之大忌, 병가는 도로를 건설하거나 보수하는 일을 금한다)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연암 박지원(1737~1805)이나 다산 정약용(1762~1836) 같은 북학자들은 치도정책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개화기의 김옥균(1851~1894)은 근대적 도로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1906년의 일본의 주도로 “7개년 도로개수 계획”을 세워 시행한다. 이 때부터 신작로(新作路)라는 용어가 생겼다. 시흥대로는 조선초기부터 역원과 1597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는 참발소 등을 둔 사실로 보아 오래 전부터 국가 주요도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정조대왕이 원행을 위하여 폭 10m정도로 확대 정비한 이래 근대화를 거치면서 폭 20m의 1번 국도로 변모하였다(그 원형이 무지개아파트상가 앞에서 홈프러스시흥점까지 남아있다). 그 후 1970년도에 오늘의 모습과 같은 폭 50m로 정비되었다. 당시 배다리 남쪽과 용양봉저정은 과천현에 속했으며, 만안교는 1795년 9월에 완공되므로 이번 행차 때는 사용하지 않았다. 정조대왕 능행 일지
1795년 2월 24일 1795년 윤 2월 1일정조는 금천현감(衿川縣監, 종6품직)을 현령(縣令, 종5품직)으로 승격시키고, 현(縣)의 이름을 시흥(始興)으로 변경하였다. 드디어 시흥은 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백제를 거쳐 고구려가 이 땅을 지배할 때는 잉벌로(仍伐奴) 이었다. 시흥은 잉벌로의 한자어라고 보아야 한다. 신라에서는 곡양(穀壤)이라 불렀고, 고려 왕건은 금주(衿州, 黔州, 黔은 ‘姓 금’으로 읽어야 함)라고 고쳤으나 고려 성종은 금주 외에 시흥(始興)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주었다. 그리고 조선조에서 금천으로 고쳐 부르다가 1795년에 이 지역의 본디 이름인 시흥을 찾은 역사적인 날이다. 1795 윤 2월 8일 1795년 윤 2월 9일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오전 6시 45분에 현릉원을 향하여 창덕궁을 나섰다. 정조는 곤룡포(袞龍袍, 임금이 입는 정장)를 입고 말을 탔으며, 혜경궁 홍씨는 가교(駕轎, 말이 끄는 가마)를 탔는데, 두 군주(郡主, 누이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탄 쌍교(雙轎)가 그 뒤를 따랐다. 영춘문(迎春門)을 경유하여 돈화문(敦化門)으로 나와 숭례문(崇禮門)에 이르렀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가교와 어가(御駕)가 주교(舟橋, 배다리) 홍살문(紅箭門)에 이르니 주교 대장(舟橋大將) 이한풍(李漢豐)이 작문(作門)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정조대왕이 말에서 내려 어머니의 가교 앞에 나아가 문후(問候)를 드리고 다시 말을 타고 출발하려 하였는데, 두 세 사람을 태운 작은 배가 강물을 가로질러 지나고 있었다. 임금이 이익운(李益運)에게 말하였다. 오전 11시 45분에 심환지(沈煥之)가 출발군령(軍令)을 울렸다.
(그림속의 ⓹번 건물을 ‘시흥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조가 말하기를, 정조가 마음이 흡족하여 말하기를
어가는 아침 6시 45분경에 화성을 향해 시흥행궁을 출발하였다.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36mm의 비가 내렸다. 화성에서 계획된 각종 행사를 마치고 윤 2월15일 오전 8시 45분경 수원화성행궁을 출발하였다. 역시 정조는 말을 타고 어머님의 가교를 모시고 원동(院洞 원골)ㆍ청천평(淸川坪 맑은내들)ㆍ장산우(長山隅 장산모루)를 경유하여 안양교(安養橋) 앞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어머니의 가교 앞에 나아가 문후를 드리고 길에 청포장을 설치하였다. 어머님께 직접 미음다반을 올렸다. 정조는 먼저 말을 타고 저녁 무렵에 시흥 행궁에 도착하였다. 그는 어머니가 묵으실 정당(시흥당)과 주방을 두루 살핀 뒤 말을 타고 막차를 나왔다. 정조는 어머니의 가교가 도착하자 공경히 맞이한 뒤, 말을 타고 어머니의 가교를 따라 시흥행궁에 들어가 저녁상을 올렸다. <정조의 화성 일정> 정조는 문성동(文星洞) 앞길에 이르자, 시흥현령(始興縣令) 홍경후(洪景厚)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길 왼쪽에 공경히 부복하고 있었다. 정조가 말[馬]을 멈추고 말하기를 민인(民人)들이 대답하기를 정조는 이를 믿으려 하지 않고 다시 하교하기를 행우승지 이익운이 백성들의 뜻을 파악하고 돌아와 정조는 유사당상(有司堂上) 이시수에게 명하여 정조의 뜻을 백성에게 널리 알도록 하였다. 이시수가 정조의 뜻을 받아 백성 앞에서 선포하기를 참여했던 백성들이 모두 고무되어 물러갔다. 그런데 그 중에 식량을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조가 이익운에게 그의 나이를 물어보라고 명하자,
정조가 이시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정조가 다시 묻기를 혜경궁 홍씨가 내려준 비단 1필을 사공과 격군(格軍)들에게 차등 있게 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궁으로 돌아올 때가 되어 정조는 융복(戎服, 무관이 입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고. 혜경궁 홍씨는 가교(駕轎)를 탔다. 궁에 들어갈 때는 곤룡포를 입었다. 정조대왕의 행차는 주교[배다리]를 건너 궁으로 이동하였다. 이렇게 하여 7박 8일간의 원행을 마쳤다. 정조는 며칠 후 궁에서 뒤풀이를 하고 수고한 자들에게 상을 주었으며 6월 18일에 연희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다시 올렸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으나, 한양에서 기득권을 휘두르며 왕권에 도전하는 노론 벽파를 누르고 한 당파가 아닌 왕과 백성이 주인인 조선을 건설하고자 했을 것이다. 정조는 이번 원행으로 그 뜻을 이루었다 할 것이나 그 후 5년이 지나 붕어(崩御)한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던 그가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승하(昇遐)하자 조선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