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은 충청남도 서북단 반도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예산군·당진군, 동남쪽은
홍성군, 서쪽과 북쪽은 황해에 접하고 있다.
서산군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다가, 1995년
다시 서산군과 하나로 통합되어 서산시가 되었다. 1개읍
9개면 14개동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읍내동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산업이 성황을 이루는
곳이다. 서산시의 수리적 위치는 남단은 북위 36°36′(부석면
간월도리), 북단은 북위37°00′(대산읍 화곡리),
동단은 동경 126°39′(운산면 와우리), 서단은 동경
126°22′(팔봉면 진장리)이다. 이러한 위치로
기후상으로 사계절이 뚜렷하고 기온이 온화한
중위도 온대 계절풍기후대에 속한다. 특히 겨울철
북서계절풍이 탁월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서산시는 충남의 북서부에 돌출한 태안반도에
속하므로, 일찍부터 중국과의 연락이 잦아
대륙문화 수입의 선진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안
백화산의 마애삼존불상, 운산면 용현리의 서산
마애삼존불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산지방은 백제
조상미술의 선진지역으로서, 이것이 웅진 또는
사비에 전해졌고, 다시 신라에 전해졌으며, 일본에
건너가서는 아스카 시대의 조상미술에 제1차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서산지방은
우리나라 서해안에 위치하므로 려말·선초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았던 지역이며, 고려·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의 세곡을 서울로 운송하는 조운선의
중요한 루트였다.
문화적으로는 가야산 주위의 이른바「내포지방」으로서,
남에서 차령산맥 동남부의 지역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근대교통에서 멀어서 그 동안은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는 지역으로 남아 있었으나 최근 대규모의
간척사업, 대산지구 임해공업지역 등 서해안
개발의 붐을 타고 급격한 발전을 경험하고 있으며,
건설중에 있는 서해안 고속도로 등이 개통되면
수도권 지역과의 연결이 매우 밀접하게 될
전망이다.
1천 2백년 전 마한의 56개 속국 중 하나
치리국국으로 탄생한 서산은 풍수 지리상 옥녀
탄금형 (선녀가 비파를 타는 형상), 금학 포란형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 의 길지에 속한다. 서산의
터전이 된 옥녀봉은 예로부터 유택길지의 명당을
지녔으며 이 자리에 묘를 쓰면 입신양명하여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전해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옥녀봉에 묘를 쓰면 개인은 잘 될지 모르지만 서산
주민 모두에게 화가 닥친다고 하여 서로 감시하곤
하였다. 그런 중에도 20세기 초 서산에는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주민들은
긴급 회의를 열어 옥녀봉을 확인하니 누군가
명당자리에 묘를 썼음을 발견했다. 주민들이
암장된 산소를 파내 옮기자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는 일화가 오늘날 서산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주민들은 옥녀봉에 묘를 쓰지 않는다. 이
같은 옥녀봉의 은덕이 내리 뻗은 곳이 서산이다.
서산시 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기곡군(基谷郡)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에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쳐, 지육현(地育縣:서산시 지곡면 일대)·소태현(蘇泰縣:태안)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부성군은 옛 지곡면 산성리
부성산성 아래 자리 잡았다고 하니 지명을
부성산성에서 얻었다고 유추 해석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부성군이 유지되다가 1144년(인종 22)에
현이 되었다. 명종12년(1181년) 고을 사람 호장이
현령을 잡아 가두고 협박하여 역모의 땅으로 낙인
찍히며 관호 마저 제거 당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부성군은 폐군이 되어 인근 운주에 붙여지게 되는
것이다. 1284년(충렬왕 10)에 이 고을 사람 정인경이
왜구 침입 때 공을 세웠다 하여 서주군(瑞州郡)으로
다시 복군되었고, 1308년에 다시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서령부(瑞寧府)로,
후에 서주(瑞州)로 강등되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서산군이 되었다.
1695∼1713년, 1733∼42년, 1776∼83년 동안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홍주부 서산군, 1896년에 충청남도 서산군이 되었다.
1914년의 군면 폐합에 의해 서산군은 태안군·해미군을
합속함으로써 면적을 대폭 확장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서산군의 16개면이 8개면으로,
태안군의 14개면이 7개면으로, 해미군의 10개면이 5개면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에 서산군의 군내면·대사동면·율곶면·오산면이
통합된 서령면이 1917년에 서산면으로, 1942년에는
서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에 서산읍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고, 이때 서산군의 서부에
태안군이 다시 설치되어 서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서산군과 도시기능을 담당하던 서산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서산시가
되었다.
서산시의 유물과 유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국보 1,
보물 6, 사적 2, 민속자료 2)와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7, 기념물 2, 민속자료 1), 문화재자료 19점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인지면의 서산 둔당리 지석묘(충청남도
기념물 제63호)와 고북면의 선돌이 있다. 또한
대산읍의 고분군은 선사시대 주거지로 돌도끼·돌화살촉·반달모양돌칼
등이 발견되었다. 성지로는 팔봉면의 고성과
해미면의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이 있으며, 그밖에
반양리산성·토미성 등의 산성도 많다.
불교문화재로는 서산 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보원사지
석조(普願寺址石槽:보물 제102호)·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보원사지 5층석탑(보물 제104호)·개심사
대웅전(開心寺大雄殿:보물 제143호)·문주사
극락보전(文珠寺極樂寶殿: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서산 여미리 석불입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일락사 대웅전·부석사 등이
있다. 동문동에는 동문리 5층석탑 및 당간지주(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가 있는데 이중 5층석탑은 현재 3층만
남아 있다. 그밖에 석남동 석불입상(石佛立像: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3호)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동문동에 1406년(태종 6)에 창건된 서산 향교대성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6호)이 있으며, 읍내동에는 1694년(숙종
20)에 창건된 성암서원(聖巖書院: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5호)이 있다. 또한 해미향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7호)·송곡서원(松谷書院: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7호)이 있으며, 읍내동에는 조선
후기 서산군의 관아건물로 사용된 서산 관아문 및
외동헌(瑞山官衙門·外東軒: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1호)이 있다. 명승지로는 무학대사가 창건한
부석면의 간월암과 경치가 수려한 음암면의
단구대가 있다. 그밖에 서산 객사(瑞山客舍: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7호)와 서산 읍성, 정충신 장군 유품(중요민속자료
제36호), 음암면의 서산 김기현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9호)과 정순왕후생가, 운산면의 명종대왕 태실
및 비 등이 있다.
서해안 개발시대를 맞아 태안반도 일대의
중핵도시로 부상하고 있지만, 이전부터 서해안
일대 태안해안국립공원과 인근의 수많은
관광자원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배후도시로서 큰 역할을 해왔다. 특히
태안군과 연계한 8대 관광 코스 모두가 서산시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서산시의 옛
서산 관아문 및 외동헌에서 해미읍성-마애삼존불-보원사지로
가는 관광 코스를 비롯해 해미향교-일락사-병인년
천주교 성지 코스, 운산면 보원사지-문주사-개심사에
이르는 코스, 지곡면 부성사-진충사-대산면 기은리
고분군-대산면 독곶리 염전마을 코스 등이 있다.
해미읍성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은 남북으로 좀 더 긴 타원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둘레가 1,800m, 넓이는 57,122평쯤
된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축성된 읍성 중
전국에서 원형 보존이 가장 잘된 성으로 꼽힌다.
본래 해미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 두 현을 조선
태종 7년(1406)에 병합하면서 두 현에서 한 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원래 충청도에는 공주와 덕산 두
곳에 병영이 있었는데 바닷가를 지키기 위해 태종
14년(1414), 덕산(德山)의 병영을 바다와 가까운
해미로 옮겨 왔다.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이곳으로
옮긴 뒤, 축성을 시작하여 성종 22년에 완공했다.
5만 9천평의 넓은 벌판에 이 고장에서 나는
화강암으로 성 외곽을 쌓고 안쪽을 흙으로 쌓아
올려 높이 5m, 둘레 1천 8백m의 성곽을 만들었는데
북동쪽은 나지막한 야산에 의지하여 쌓았으므로
문을 내지 않고 동문, 서문, 남문만 만들었다. 이 때
돌은 간단히 다듬은 산돌로 쌓았는데 아래는 큰
돌로 쌓기 시작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차츰 작은
돌로 쌓았다. 북서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밖에 깊이 판 해자의 흔적도 확인되는데 현재
북벽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해자는 성벽에서 약
8m떨어진 지점에서 상부 폭 10∼11m, 하부 폭 5m 깊이
1.4∼2.4m의 크기로 남아 있다.
그 후, 효종 때에 북벌책이 실행되면서 전국의
병영이 강화되었는데, 이 때문에 충청도에서도
호서병영이 다섯 곳으로 늘었다. 그 중 선임병영인
호서좌영을 해미읍성에 두게 되면서 해미읍성은
동원과 객사가 중심인 다른 읍성들과 달리 병영이
설치되고 현감이 영장(營將)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읍성의 정문인 진남문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동문과 서문은 최근에 복원하였다. 해미읍성을
축성할 당시 충청도의 모든 장정들이 동원되었으며,
그 기록이 현재도 정문인 진남문 아래의 성벽에
공주 청주 동문으로 가는 성벽에 충주와 임천
사람이 쌓았다는 표시가 남아있다. 성내에는
북쪽의 주산 숲속에 장군당도 있었는데 일제
시대에 일본 사람들이 민간의 신앙지를 없애려고
신시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리에 정자가
있어 해미 인근을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성내에는 민가 160여 채와 학교가 있었으나
사적으로 지정하면서 다 철거하여 지금은
관아자리의 관리인 살림집뿐이고 성내가 마치 전쟁
후 몇 백년은 지난 폐허 같아 보기에 안쓰럽다.
민가가 살아있어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전남
승주의 낙안읍성과는 매우 대조되는 분위기이다.
복원을 한다하여 박제화시킨 것이 얼마나 역효과를
내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한다.
해미읍성 근처에는 동서남북으로 네 곳을 둘러
미륵불이 모셔져 있어 흥미를 끈다. 이 곳은 이순신(李舜臣)이
1579년에 훈련원 교관으로 부임해 전라도로 전임될
때까지 10개월간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곳은 동학운동당시 일본군과 관군들이 주둔하고
있던 홍주읍성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특히 천주교 박해성지로
유명하다.
1. 해미읍성의 구조
1)진남문
해미읍성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단층 문루이다. 해미읍성에 있는 세 개의 문들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문루의
대석에는 [황명홍사년신해년]이라 쓰여져 있는데
이는 명나라 연호로 우리 나라 조선 성종 22년 (1491)에
해당한다.
2) 읍해루
해미읍성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루가
해미읍성의 외삼문이다. 1973년부터 해미읍성을
복원하면서 이웃의 서산군 관아의 외삼문이
서령군문을 기본형으로 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11.56평의 크기로 복원했다.
3)
옥사터와 회화나무
옥남문에서 60m쯤 가면 ‘호야나무’라고도 부르는
6백년 된 고목이 있는데 이 옆에 천 주교인들이
잡혀와서 질병·고문·굶주림으로 처형도 당하기
전에 죽어 갔다고 하는 옥사가 있다. 병인박해 때
이곳에 잡혀온 천주교도들이 너무 많아 옥사에 다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옥사 밖에 있던
회화나무 동쪽 가지에 철사줄로 그 목을 매달아
죽이기도 하고 이 나무에 매단 채 활로 쏴 죽이거나
돌을 던져 죽였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천주교도
들의 목을 매달았던 철사 자국이 남아 있다. 이
회화나무 옆에는 1982년에 세운 『해미읍성 천주교
순교 기념비』가 있다.
4)동헌과 책실
2층 문루를 들어서면 해미현의 현감이 정사를 보던
동헌이 나온다. 동헌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복원되었는데 이 동헌 뒤에
책실이 있다. 책실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5) 지성관(객사)
지성관은 '탱자나무로 목책을 두른 객관'이란
뜻으로 동헌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1981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객사 터를 발굴하면서 유구를
매장해 두었다가 1997년 그 구 조대로 측실을
복원하였다. 당시의 발굴 결과 객사 앞마당에 돌을
깔고 주위에 막담을 둘렀다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남쪽에 외삼문이 있었고, 그 앞에는 목책이
쳐있었다고 한다.
6) 지성루
지성루는 해미읍성의 서문으로 본래는 7평 4작
넓이의 기와집이었으며 다른 이름은 없었다고 한다.
1910년 3월에 불탄 것을 1974년 복원하면서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를 세웠으며 지성관
옆에 있다고 해서 '지성루'라는 편액을 걸었다.
서문 옆에는 수문(守門)이 있었고 수문으로
흘러나오는 개울물 위에는 길이 4.2m, 너비 1.5m, 두께
0.3m의 돌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병인 박해 때에
천주교인들 모두를 처형할 시간과 공간이 부족하자
일부를 자리개질로 죽였다고도 한다. 당시
관원들이 서문 위에서 처형을 감독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자리갯돌만 남아 박해현장을 증언하는 순교
성지로 남아있다.
7) 잠양루
잠양루는 해미읍성의 동문이다. 본래 영조때
세웠던 동문의 이름은 규양문(葵陽門)이었는데 1926년에
무너졌다. 본래 읍성 둘레에 탱자나무로 목책을
세웠는데 1927년 편찬된 서산 군지에 의하면
동쪽에만 탱자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1974년 읍성을
정비하면서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로 다시 세웠다.
2. 천주교 박해
해미도
포함되어 있는 내포땅은 충청도에서도 선진문물이
빨리 전파되는 곳으로 18세기 말에 이르면
천주교인이 늘어남과 함께 순교자도 늘었다.
해미는 1798∼1799년의 무기박해시 100여 명을
비롯하여 병인·무진박해까지 1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곳이다. 해미에서는 신유·기해·병오·병인박해
등 정부의 공식적인 천주교 탄압 때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해미는 조선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처소를 두었고,
조선 중기에는 진영에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반 영장이 현감을 겸해, 부근 12개 군의
병무행정과 포도장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해미의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부근 12개 군에는 중대한 범죄에
대해서 처단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국사범으로
몰린 천주교인들은 해미로 이송되었다.
해미읍성의 박해는 1868년 병인년, 즉 병인박해 때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병무 행정권(죄수 처벌권)을
겸한 이 곳으로 천주교도들이 압송되어 왔는데
순교한 천주교인은 김대건 신부의 조부인 김진후씨
등 1천여 명에 이른다. 당시 압송해온 천주교도들을
옥사에 다 수용할 수 없어 호야나무에 매달아
가혹하게 죽이거나 서문 밖에 있던 돌다리에
매치고 자리개질하다 숨통을 끊어 놓는 등
잔인하게 죽였다고 한다. 이 때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여 오랫동안 돌에서 피가 지워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많은 천주교도들을
사형시킬 시간과 인력 등이 부족하자 인근에
구덩이를 파 생매장하기도 하였고 , 심한 매질 끝에
목숨을 잃게 되는 몰매질, 겨울엔 옷을 벗기고 얼어
죽이는 동사형, 여러 명을 들보에 눕히고 위에서
무거운 돌이나 들보를 떨어뜨려 머리를 부셔
버리는 처형 등 잔인하고 가혹하게 천주교도들을
고문하고 처형하였다고 한다. 지금 해미읍성은
천주교도들에게 성지로써 순례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천주교 박해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국 황폐기'라
할 정도의 시기를 맞는다. 이때 17세기 초 천주교를
종교로서가 아닌 서학(西學)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이수광(1563-1628)의 마테오
리치의『천주실의』를 소개하면서 생겨났다.
실학자들 사이에서 비판, 옹호 되어오던 천주교
사상은 18세기 후반부터 남인학파에 의해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되어 갔다. 주자학의 덕치주의를
재검토하면서 당쟁을 배경을 배경으로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학파의 성격인 관념적 공리론을
비판하고 정치, 경제, 사회개혁의 뒷받침이 될만한
실학과 서학을 받아들이고 사실에 입각한 진리
탐구를 지향하는 고증학과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비판정신을 동반하는 실학사상을 갖는다.
이는 바로 천주교가 한국에 도입되게 되는
배경이다.
적극적인 신앙운동은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1784년 세례를 받고 온 것으로 비롯되는데 이때
서학에 조예가 깊던 이벽과 권일신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한국 천주교의 초석이 된다. 주자학의
보수적인 정통적인 사회 속에 완전히 이질적인
사상체계를 가진 천주교의 신앙집단이 형성되자
이는 사회문제로 확대되어 간다. 천주교 운동은
주자학적 전통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며 천주교의 새로운 사상이 정치적 파쟁과
관련됨으로서 집권층과의 정면충돌이 야기되었다.
당시 유교의 성격은 단순한 인륜도덕의 규범을
가르치는 윤리교가 아니고 宋代에 성리학이 체계화
되면서 道統說이 형성되었고 도교나 불교를
이단으로 비판할 뿐 만 아니라 같은 유교가
성립되어 간다. 이때 또 하나의 배타적 절대성을
주장한 정통 종교로서의 천주교와 당연히 충돌 할
수 밖에 없었다. 기성문화 체계와 새로운 사상이
충돌하고 있을 때 윤지충과 권상현이 북경주교의
명에 따라 제사를 폐지하고 조상을 상징하는
위폐를 불사르는 일이 있었다. 이는 유교체제에
대한 부정을 의미함으로써 신해교난(辛亥敎難1791)이
일어났다. 이 결과 서학잡서(西學雜書)의 구입이
금지되고 이미 들어온 홍문관의 서서(西書)도
불태워 버리는 등 서학에 대한 탄압조치는 한층
심해졌다. 두 번째 수난은 정권을 둘러싼 당쟁의
여파로 일어난 신유교난(辛酉敎難)이다. 정조 때는
당쟁을 방지하기 위해 탕평책을 쓰고 남인이었던
체제공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남인 출신이었던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는 없었다. 체제공과 정조가
퇴위하자 서인파는 사교라고 낙인 찍힌 서교
배척을 빙자하여 남인에 대한 학살을 계획한다.
남인의 증진이요, 천주교의 지도자 였던 이가환,
정약용, 한국에 처음 들어온 첫 신부인 주문모도
순교하고, 정약용, 정약전 등이 유배됨으로써
남인과 서인은 일시에 몰락하게 된다. 일대 박해가
일어나게 되자 난을 피한 황사영이 '백서사건'이
정부가 서교를 더욱 민족적 사교로 낙인 찍혀
박해를 초래하게 된다. 세 번째 교란은 기해년(己亥年)에
풍양 조씨 일파에 의한 헌종대의 대천주교 정책을
비난하고 우의정 이지연의 사학박멸 주장과 함께
기해교난이 일어났다. 이러한 세도간의 알력으로
인해 수 천명이 투옥되고 순교자만도 130여명에
이를 정도로 이때 전국적으로 천주교가 나라를
망친다는 사교라는 것을 천명한 글로서
『척사윤음』(천주교와 그 교도에 대하여 매국노,
불효, 마술사, 풍속사회 안녕질서의 문란자, 등
온갖 중상 모략을 되풀이하면서 도리어 그들의
잔인성을 변호하고 虐殺을 정당화 하려는 것이었다.)이
있다.
최초의 신부 김대건의 순교를 전후한 박해 이후
철종 때에는 천주교가 자유로이 발전하게 되는데
철종이 퇴위하고 나이 어린 고종이 등극하자
보수적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에 오른다. 그리하여
또 다시 최대의 수난이었던 병인교난(丙寅敎難1866)
의 비극이 일어났다.한국교회 사상 최대의 박해인
병인교난에 대한 원인은 극히 애매하다. 전통
문화에 대한 천주교의 도전, 대원군의 잔인한 성격,
국제정세의 변천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쯤해서 유교적 지배집단으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교리가 확대되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를 지배한 신유교의 성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유교는 인민 대중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억압된 종교적 욕구가 유교의
대중통제력이 약화되는 조선후기, 대중이 숭상하던
기존의 주술적인 대상의 효능을 의심케 하는
국내외적 혼란상황에서 체계적으로 발전된
천주교의 종교의식과 결합하여 폭발되고 있다고
본다. 또한 박해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면 신앙의
견지에서 보자면 교회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교회의 고유한 무기인 피와 눈물을 통한 승리이다.
교회는 박해를 받아야 자라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박해를 받으면 받을 수 있을 만큼 더 자란다는 극히
평범하고도 심오한 포교 원칙이다.
유교적 전통과 기독교의 새로운 문화체계와의 정면
충돌이라고 할 수 있는 천주교 초기 100년의
역사였다. 신해,신유,기해로 나누어 본 박해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사회적 질서와 사상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유교적 사회와 서학의
도입이라는 것에서 오는 조선후기 거대한 이념의
줄기와 그에 따른 사회변화를 짚어가면서 한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의 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3. 우리나라의 읍성
읍성은
지방의 주요 지역에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으로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우리나라에는
한(漢)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던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토성이 남아 있고, 이 시기의 현에도 작은
읍성들이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넓은
평야를 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위치하였다.
수도로서 나라의 중심이 도성(都城)이라면 군, 현의
주민들이 살면서 군사적이거나 행정적인 기능을
지닌 곳은 읍성이다. 그러나 모든 행정 중심지가
성곽을 두르는 것은 아니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만 성곽이 설치되었다. 또 대개 군사방어
시설인 산성들이 산 정상이나 계곡을 끼고
설치되는 것에 견주어 행정 중심지이고 주거지역인
읍성은 평지에 설치되었으니 해미읍성과 함께
낙안읍성, 고창읍성들이 그러하다.
우리나라에 성곽이 세워진 것은 삼국시대
초기부터이다. 초기에는 주로 도성이 세워졌고
삼국간이나 다른 민족간에 영토싸움이
벌어지면서는 산성이 많이 세워졌고 고려
시대까지도 그런 추세가 지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소 중앙의 행정력이 온 나라에 미치게
되고 외적에 대비한 방비도 겸하여 읍성이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지방의 주요한 도시를 둘러싼 읍성이
산성과 같이 산을 의지한 위치에 있었던 흔적이
차츰 밝혀지고 있다. 통일신라 때에는 9주 5소경이
있었고, 신문왕 때에는 읍성이 축조되었던 기록이
있다. 이 것이 어떠한 형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분지지형의 평야에 네모꼴로 축조한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누었던 읍성들이 후대까지 계속 수개축을
하여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지방도시에 읍성이 축조되었고,
고려 말기까지는 규모가 작은 토축(土築) 읍성들이
많이 세워졌는데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차츰
석축으로 고쳐지거나 호구(戶口)의 증가에 의해서
넓게 고쳐 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특히 세종
때부터는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옹성과 치성·해자를
만들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하였다. 평지성인
읍성은 대개 지형에 맞추어 굴곡을 지닌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사방에 문을 내는 것이 원칙이나
지형에 따라 2~3개소가 설치되는 수도 있었다.
성문에는 문루를 세워 위엄을 갖추고 성벽 곳곳에
여장(女墻)과 치(稚), 포대(砲臺) 등 부속시설을
하였고 성문이나 망루에 옹성을 치기도 했다. 또
성벽 바깥에 인공으로 해자를 파서 방어시설을
강화하기도 했으며 방어의 지속성을 위해 읍성
안에 연못과 우물도 준비하였다. 성안에는 중앙의
북쪽에 행정 중심 처소인 관아와 객사를 두었고 그
왼쪽에 향교를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 민가들이
있었다.
읍성은 부(府), 목(牧), 군(郡), 현의 행정구역단위의
등급에 따라 그 크기에 차이가 있었는데 이 차이는
주민의 수효와 관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현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으나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수원읍성,
비인읍성, 해미읍성, 남포읍성, 동래읍성, 보령읍성,
낙안읍성, 진도읍성, 경주읍성, 거제읍성, 홍주읍성,
언양읍성 등이 있다.
개심사(開心寺)
개심사는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백제 말기인 654년에 혜감(慧鑑)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개원사(開元寺)였는데
1350년에 처능(處能)이 중창하면서 명칭을 개심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개심사는 주차장 밑의 '세심동(洗心洞)' 표시에서
출발하여 800여 미터의 계단을 올라가면 근대의
명필 해강 김규진(海崗 金奎鎭)선생이 예서체로 쓴
'象王山 開心寺'라는 현판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판이 걸려있는 안양루(安養樓)는
개심사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개심사의 현존하는 당우는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심검당(尋劍堂), 무량수각, 명부전,
팔상전, 객실, 요사채 등이 있으며, 가람배치는
북쪽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당우를 놓고 그 전방에 누각건물을
배치하고 있어, 조선 초기의 배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1.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1484년에 짓고 1644년과 1710년에 개수한
건물로 앞뒷면이 좀더 긴 장방형이다. 조선초기의
건물로서 고려시대 건축처럼 단정한 맞배지붕을
간직하고 있고, 공포는 다포계이지만 건물
안쪽에서는 다시 주심포식 지붕구성을 보여 주어
천장 구조를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과도기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입상이 있는데
군더더기 없는 얼굴 모양, 정연한 조각 등이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또한 삼존불 위로는 따로 화려한 보개를 하지
않고 높직히 천장 가까이에 그리 크지 않은 운궁형(雲宮形)을
만들어 보개로 삼았다, 그리고 여기에 매달린 학은
정교한 목조 조각으로 그 입체성이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2. 심검당
개심사의 가장 오래된 건물인 심검당은 휘어진
나무를 건축재료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심검당의 유명한 이 부분은 후대에 이어
지은 것이고 원래 건물은 맨 오른쪽부터 3칸이다.
그 형식은 맞배지붕이며, 주심포계 양식의
건물로서 그 형태가 단아하다. 또한 1962년 해체수리
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477년에 3중창하였고
영조 때까지 여섯 번이나 중창을 거쳤다고 되어
있어서 가장 오래된 것을 알 수 있고, 중창 연대와
시주자 이름, 목수 이름까지 나와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3. 명부전
명부전은 무량수각의 동편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風板)이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건물이다. 이 명부전의 내부에는
목조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흙으로 빚어 채색한
조선 후기의 시왕과 역사상이 모셔져 있다.
이 밖의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과
청동향로, 조선 영조 때 제작되어 석가모니의
영산회상 장면을 그린 괘불화, 남연군 묘 앞의
보덕사에 소장되어 있는 개심사 동종이 있으며 이
뿐 아니라 원래 대웅보전 삼존불 뒤쪽 벽에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도상화한 '개심사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가
있었으나 전문범에 의해 도난 당하고, 현재는 다른
탱화를 걸어 놓았다.
(참고자료)전통가옥의 지붕형태
우리의
전통 건축물의 지붕 모양에는 맞배지붕,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등의 기본형이 있습니다. 삼국
시대부터 우리 목조 건축은 대부분
맞배지붕이었습니다. 그러다 고려중기에 중국에서
새로운 형식인 팔작지붕이 건너온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 중에서 부석사 무량수전이
가장 오래 되었습니다. 맞배지붕의 특징이
엄숙하고 경건한 기풍에 있다면, 팔작지붕은
날아갈 듯한 화려한 멋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
각각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볼까요?
① 맞배지붕 : 건물의 측면에서도 지붕면이
용마루까지 올라가게 되어, 측면에 삼각형의 벽이
생기는 지붕을 말합니다. 지붕의 앞면과 뒷면을
마치 사람 인(人)자 모양(영어에 익숙한 학생에게는
A자 형태로 보이겠군요.)으로 배를 맞댄 모양을
하고 있으며, '뱃집지붕', '박공지붕'이라고도
합니다.
맞배지붕은 초가나 너와로 지붕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주로 기와가 이용되었습니다. 맞배지붕은
주로 상류주택의 행랑채와 서민주택의 본채의
건축양식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맞배지붕 건축물로는 수덕사 대웅전·
무위사(無爲寺)의 극락전·예천 용문사 대장전·
개심사 대웅전 등이 있습니다.
② 우진각지붕 : 맞배지붕의 양측면을 다시
삼각형 모양으로 끌어내려 추녀가 4면에 고르게
만들어져 흔히 우리가 함석 지붕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형식입니다. 건물의 네 면에 처마를 두는
형식으로, 용마루의 길이가 짧고 측면에서 보면
경사가 완만한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해인사의 대장경 판고가 그 좋은 예입니다.
③ 팔작지붕[八作屋蓋] : 우진각지붕의 세모꼴
측면에 다시 여덟 팔(八)자의 모양을 덧붙여 마치
부채살이 퍼지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고 해서 합각(合閣)지붕이라고도
합니다. 기와지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성미를
지닌 지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로 건물의 규모가
크거나 격식을 차릴 때 사용하는 지붕의
형태입니다.
팔작지붕은 외관상 위엄이 있어 중심이 되는
건축에 즐겨 쓰였으며, 창덕궁 인정전이 그 좋은
예입니다.
④ 기타 : 이외에도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이
결합한 형태의 '솟을지붕', 용마루가 한 곳에서
만나는 삿갓지붕이 있으며, 지붕의 각 수에 따라
육모지붕, 팔모지붕 등이 있습니다.
(참고자료) 천장(天井,天障;반자,盤子)
(1) 개요
천장은 건물내부의 기둥 윗부분의 총칭이며
가구재가 노출되거나 은폐됨에 관계없이 천장이라
불리어진다. 즉 지붕 밑,위층의 바닥 밑 또는
그것을 가려 막아 수장한 반자를 지칭한다. 지붕의
이면에 해당하되 그 이면 중에서도 벽체의 안쪽을
칭하는 것으로, 주도리 밖의 들연 부분은 처마라
해서 구분하여 말한다.
천장은 가구 구조상 필연적으로 생긴 것이 있고
의도적으로 천장시설을 한 것이 있어 전자의 것을
구조천장(構造天障)이라 하고,후자의 것을
의장천장(意匠天障;장식천장)이라 할 수 있다.
구조천장에는 연등천장(삿갓천장), 귀접이천장(抹角天障,鬪八天障)
등이 있고, 의장천장에는 우물천장(격자천장),
빗천장(斜天障), 층급천장(層級天障), 닷집 등이
있다.
(2) 종류 및 세부설명
1) 구조천장(構造天障)
① 연등천장(삿갓천장)
움집·귀틀집·토담집·오두막집·초가집 등이나
이동식 여막집을 구조할 때에는 서까래 사이의
연골을 앙토(仰土)하지 않아서 산자를 엮은 부분이
휜히 들여다 보이는데 비해 기와집이나 공청에서는
연골을 앙토하여 산자가 보이지 않도록 정리하거나
널빤지로 서까래사이를 덮어 정리하는 수도 있다.
전자를 삿갓천장이라 부르고, 후자를 연등천장이라
부른다. 이 천장의 특색은 가구재인 보로부터 지붕
구조재인 서까래까지 한눈에 보이게 되어
건물내부를 莊嚴하게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천장의 집은 대략 주심포계통의 양식을 지닌
집으로, 주심포계 양식을 열거하는 중에 이
연등천장의 구성도 손꼽힌다.
② 귀접이천장(抹角天障,鬪八天障)
귀접이천장의 초보적 구성에는 대들보가 소용되지
않는다. 대부분 귀틀집에서 응용하는데, 귀틀로
말을 짜서 실(室)을 구성하고 그 높이에서 굵은
나무로 井 자형의 광정틀을 구성한다.
이것만으로는 지붕 낙수면의 경사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井자형의 간격이 넓어 지붕을 덮기도
어려우므로 井자형 틀을 몇 켜 덧쌓는다. 그냥 치켜
쌓는 것이 아니라 井자형 위로 井자형이 되도록
쌓는 것이어서 저절로 형을 ◇ 형으로 귀를 접는
기법에 따르게 된다. 즉 목조건축에서 주로
모임지붕형식 즉, 4모정, 6모정, 8모정 등에 가구
구성상 필연적으로 기붕물매를 만들기 위해
모서리를 귀접이 하여 층층이 보나 도리를 45°각으로
오그려 짜올린 천장이다.
2) 의장천장
서까래가 숨겨지도록 자재를 써서 가린 구조물을
반자라 하고, 반자로 꾸민 천장을 반자틀천장이라
부른다.
① 우물반자(격자천장)
천장구성 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구조이다.
대들보와 도리에 의지하고 수평이 되도록 각재들을
일정한 간격을 두며 건너지른다. 반자틀의
장다리가 된다. 장다리 사이에 역시 같은 넓이의
간격이 되도록 고려하면서 짧은 각재를 끼운다.
동다리가 된다. 장다리와 동다리가 울거미를
이루면 井자형이 연속되는 형상이 된다. 반자틀이
완성된 것이다. 이 틀에 널빤지를 간격에 맞도록
일정하게 다듬은 청판을 덮게 되는데, 청판만 그냥
덮는 방식과 소란대를 설치하고 덮는 두 가지
기법이 있다. 소란대가 있는 반자를 소란반자라
하며, 궁전·법당 같은 최고급 건물에 만든다. 이런
천장에는 아름답게 단청되어 장엄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물반자를 천장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② 층급천장(層級天障)
건물내부에서 높고 얕게 층단을 두어 설치한
천장이다.7樑架의 경우에는 중도리사이 宗樑
위치에 가장 높은 우물천장을 시설하고 중도리와
하중도리 사이에는 한단 낮게 하중도리 높이에서
천장을 만들며 9樑架일 때에는 中宗樑 높이에 가장
높은 천장을 시설한다.
서산 보원사(普願寺)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전에
소멸된 것으로 전해지는 보원사는 현재는 터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현재 사찰터로 보아 당시
보원사에는 크고 작은 암자 100여 개가 운집해
있었다. 기록과 이 지방의 전설을 종합해보면
보원사는 백제 말에 창건하여 고려 초에
이르러서는 99채의 절집을 갖춘 매우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서산 마애산존불의 본사라고도
하고 고란사라는 이름이었다고도 한다. 전설로는
절간의 승려가 많아 쌀을 씻은 뜨물이 내를 흐르게
했고 절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백성들이
냇물을 떠다 끓여서 숭늉으로 마셔 그 벌판이
숭늉벌이라고 불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보원사는 백제 멸망 이전까지 크게 융성했을
것으로 짐작되나 백제 멸망 후에는 어떠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최치원이 남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의하면 화엄 10찰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탄문(坦文, 900∼975) 스님과 관련되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음이 탄문의 탑비
명문에 의해 밝혀졌다. 이후 보원사는 화엄종의
성쇠와 궤를 같이 하여 고려 후반 이후로 사세가
기울어져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까지도 폐사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
《호산록(湖山錄)》을 참조하면 보원사의 사우는
모두 없어지고 비석, 탑, 철불 1좌만이 남아
있었는데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발굴 당시 백제 때의 금동여래 입상과 통일신라
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기와장들은
백제 때부터 고려 때의 것까지 다양하게 나왔다.
1. 보원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신라 하대에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당간지주로 규모는 2층 건물 높이 정도인 4.2m이다.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당간지주의 안쪽은 장식이
없고, 바깥면에는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세로띠가
볼록새김하고, 중앙에는 다시 호형의 세로줄을
조각하여 장식해 두었으며, 앞뒤 양측면에도
둘레에 세로띠를 볼록새김하고, 그 중앙에 원조의
세로선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꼭대기 부분은 안쪽 상단에서 바깥면으로 내려
오면서 둥근 선을 그리면서 깍여져 있다. 위 아래
두 곳에 간구(杆溝)를 두었는데, 윗부분 안쪽
상단에 직사각형 간구와 아랫 부분 안쪽 지상 1m
지점에 사각형의 간공을 뚫어 두었다. 당간지주를
받치고 있는 간대는 보기 드물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1장의 돌로 구성하였고, 정사각형의
높은 기대를 각출한 뒤 둥근 형태의 원좌를
각출하여 당간의 받침대로 활용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당간지주는 밭의 한가운데 서 있다.
2. 보원사지 5층 석탑 (보물 제104호)
보원사지의
대표적인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가 9m나 되는
석탑이다. 이 탑은 체감률이 급격해서 솟아
보이면서도 지붕돌이 넉넉하게 펼쳐져서 안정감도
갖추고 있다.
하층 기단의 면석에는 기둥 모양이 형식적으로
칸을 나누었는데, 한 칸마다 사자상을 새겨 열두
칸에 모두 열두 마리가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대개
부도에는 기단석에 사자 조각이 있는 편이지만
석탑의 경우에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사자들은
각각 다른 자세를 하고 있고 발 모양이나 표정들이
매우 생생해서 사실성이 높은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잘 이어받은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상층
기단도 기둥 모양을 새겨 칸을 나누고 한 면에 둘씩
팔부중상을 새겼다. 그 중 서쪽면에 새겨진
아수라상이 가장 선명한데 돋을새김이 그리
도톰하지는 않지만, 인체비례는 매우 현실적이며
조각 솜씨도 뛰어나다. 기단부나 탑신부에 모두
층층이 갑석 위에 몸돌을 받는 굄대가 있는 것은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방식으로,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이다. 지붕돌의 기울기가
완만하고 처마도 반전이 거의 없이 평평하게 퍼진
것은 부여의 정림사탑 이래로 내려오는 백제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으로, 충청도
지역의 고려 시대 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붕선이 탑의 자태를 한층 아름답게 한다. 고려
초기에 절을 중창하였을 때에 세운 것으로 본다.
3. 보원사지 석조 (보물 제102호)
신라 하대에 조성되었다고 전하는 화강암 석조(石槽)로,
같은 시기의 일반적인 석조 양식을 따르고 있는
직사각형 석조이다. 규모는 길이 3.5m, 너비 1.8m,
높이 90cm로 커다란 상자를 연상하면 된다. 한
덩어리의 거대한 화강암 석재를 파내어 만들었는데,
밑바닥의 별다른 구조 없이 구석 한 켠에 둥근
구멍을 내어 배수구(排水口)를 만들어 두었다. 안팎
4면에는 별다른 장식이나 문양이 없는 평평한
벽으로, 현재 3면에는 세로의 균열이 있다. 거대한
규모는 물론 조각 수법이 소박·웅장하여 당대의
대표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바로 옆에 내가 있어
보원사 스님네의 공양거리인 쌀을 씻는 함지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나 현재 석조(石槽)의
위치가 사찰의 입구를 상징하는 당간지주의 밖에
있어 함지 용도보다는 보원사를 찾는 이들이 타고
오는 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 마실 물을
담아두었던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한다.
4. 보원사지 법인국사 부도 (보물 제105호)
절터
맨 뒤쪽 정리된 공간에 부도비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건립 시기를 고려 경종 3년(AD 978)으로
추정하는 전체 높이 4.7m의 화강암 석재로 만들어진
8각 원당형 부도이다. 부도치고는 규모가 큰 편인데
이는 법인국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한다.
8각의 지대석 위에 올려 놓은 하대석은 측면석과
상면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측면석은 각 면에 안상과
사자 1구씩을 조각해 두었고, 상면석은 운룡문과
귀꽃을 조각 장식하였다. 그 위의 중대석은 8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다. 상대석도 8각으로 3단의 받침
위에 16엽(葉) 단판 연화를 조각하고 그 윗면에
우각마다 동자주를 세운 난간이 돌려져 있다.
탑신도 8각이며 8개의 우주, 문비형과 열쇠형,
화염의 두광이 있는 사천왕상, 관을 쓴 인물입상이
새겨져 있다. 오개석은 전체적인 탑비의 비율로 볼
때 넓고 두꺼운 편인데 밑에 연목이 조각되어 있고
3단의 옥개 받침도 묘사되어 있다. 상륜부는 단판
연화가 돌려진 위로 복발과 보륜 3층이 올려져 있다.
5.
보원사지 법인국사 부도비 (보물 제106호)
비신과 거북이가 온전히 남아 있고 법인국사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소상히 적혀 있어 사료로서도
귀중한 부도비이다. 이는 고려시대에 화강암
석재로 만들어진 전체 높이 4.2m의 웅대한 탑비이다.
비머리에는 '가야산보원사고국사제증휘법인삼중대사지비(迦倻山普願寺故國師制贈호法印三重大師之碑)'라는
제액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비문은 `김정언이 글을
짓고, 한윤이 글씨를 썼는데, 구양순체의 해설이다.
비문은 법인국사 탄문의 생애와, 화엄종이 강력한
전제왕권을 수립하는 사상적 배경으로서 그가 고려
왕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음이 서술되어 있다.
비문에 새겨진 바에 따라 건립 연대는 고려 경종(景宗)
3년(AD 978)임을 알 수 있으며 부도도 함께 세워진
것이니, 연대가 분명하여 부도와 부도비의
기준작이 된다.
서산 마애삼존불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운산면(雲山面) 용현리(龍賢里)에
있는 화강석 불상으로 가야산록의 고란사 왼쪽에
있는 큰 바위 동남면에 조각되어 있다. 거대한
본존여래입상(本尊如來立像)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반가사유형(半跏思惟形)의 보살좌상이,
왼쪽에는 보살입상이 각 1구씩 배치되어 있다.
조성된 연대는 기록문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학계에서 태안군의 백화산에 조성된 태안
마애삼존불에 이어 백제후기 6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다.
서산 마애불이 있는 가야산 계곡은 태안 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지름길 위에 있는데, 이 길은 옛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고로(古路)였다. 옛길의 어귀가
되는 서산 마애불이 있는 지점은 600년 당시에는
중국 불교 문화에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단적인 예가 서산 마애삼존불이다.
특히 이 불상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미소짓는
모습이 각기 달라서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삼존불은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빛을 받을 때만 가슴에
와 닿는 미소를 대할 수 있어 자연 조명과의 협화에
의한 진가를 보이도록 한 백제인의 슬기가
돋보인다.
묵중하고 중후한 체구의 입상인 본존(本尊)은
머리에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이 있으며 소발(素髮)
형태의 머리에 육계(肉계)가 작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으며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는 미소가 있으며
눈은 행인형(杏仁形)을 하고 있다. 얼굴 윤곽은
전체적으로 둥글고 풍만하며 자비로운 얼굴과
미소를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법의(法衣)는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앞부분에 U 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발등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옷자락은 L
형으로서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依)이다.
수인(手印)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소원을 받아
준다는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 형태로
왼손 끝 두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다. 발밑에는
큼직한 복련연화좌(覆蓮蓮華座)가 있으며 광배
중심에는 연꽃이, 주연(周緣)에는 화염문이
양각되어 있다. 대좌로부터 광배에 이르기까지 2.8m이다.
우협시보살(右脇侍菩薩)은
머리에 일월식(日月飾)이 있는 높은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상호(相好)는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다.
얼굴은 약간 긴 편이며 실눈에 반원형의 입은 약간
벌려 미소를 띠며 목에는 짧은 목걸이가 있으며
가슴 앞에 위치한 두 손은 보주를 잡고 있다.
천의는 두 팔을 휘돌아 앞에서 U자형으로 늘어져
있으나 교차되어 있지는 않다. 상체는 나형(裸形)을
이루고 하체의 법의는 발등까지 내려와 있다.
발밑에는 복련연화좌가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그 중심에 연꽃은 있으나 화염문이 없다.
천진한 웃음과 함께 전체적으로 4등신의 비례를
보여 어린아이상임을 느낄 수 있다. 높이는 1.7m이다.
좌협시보살에는
이례적으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배치되어
있다. 한 다리는 내리고 한 다리만을 반대편 무릎에
올려 반가부좌를 하고 한 손을 팔꿈치를 구부려
뺨을 괴고 생각하는 자세로 앉아 있다. 이 보살상은
두 팔이 크게 손상되어 있으나 전체적인 윤곽은
그대로 남아있다. 머리에는 관이 씌워져 있으며
상호는 다른 보살상과 마찬가지로 원만형(圓滿形)을
이루고 있고 만면에 미소를 지니고 있다. 상체는
나형으로 목에 짧은 목걸이를 걸쳤고 허리 밑으로
내려온 옷자락에는 고식의 옷주름이 나 있다. 발
밑에는 큰 꽃잎으로 수놓은 복련대좌(覆蓮臺座)가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으며, 그 형식은
우협시보살의 광배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는 1.66m이다. 이런 미륵반가사유상은 7세기 초
무렵 삼국에 공통했던 신앙경향을 보여 주는
상으로 이 마애불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삼존상은《법화경(法華經)》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즉 석가불·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의 삼존불로서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하는 사료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백제 불교사
내지 사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조선조
사원에 일반적으로 건립되어 있는 응진전(應眞殿)
수기삼존불의 가장 오래된 원조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하겠다.
♬가을 노래가 흐르고 있습니다♬
흐르는 곡은
가을 우체국앞에서 (윤도현),
가을이 빨간 이유 (김원중),
가을 사랑 (신계행),
가을 나들이 (햇빛촌),
가을은 어디 (정태춘 & 박은옥),
다시 이 가을에 (이동원),
가을 나무의 고백 (여행스케치),
그대를 위한 가을의 노래는 (이동원),
Reason (가을 동화) 정일영,
가을 속으로 (Piano Ver.) Various Artists,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Live) 김광석
첫댓글 구경꾼님..정말 감사드립니다..즐거운 추석 되세요.
제 핸드폰 번호가 잘못됐네요...ㅎㅎㅎ
오잉... 지송허구먼유...-.-;; 답사자료집 아래한글 화일에 그 번호로 적혀있어가꼬예... 긍께 수정해버렸어라...^^;
답사자료를 보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 만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여요...종원님 구경꾼님 답사자료 열심히 보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