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교토여행기 4일차 (二条城/니조성-2)
일본 답사기의 마지막 글이 될 니조성에 대한 두 번째 글은 건축에 대한 글이다. 일본 건축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없으니 막연한 편견도 있었고, 이해가 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 그런 문제를 이번 일본건축을 공부하면서 일본 고건축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부족하나마 성과를 얻은 것은 내가 건축을 전공했다는 것과 우리 건축에 대한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번 여행 전부터 일본 건축에 대해 의문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왜 건물을 동으로 나누지 않고 여러 기능을 한꺼번에 넣어 크게 짓는가?’와 두 번째는 지붕구조에 대한 것이다. 일본건축 지붕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기와로 얹는 것이 있는가 하면 ‘히와다부키檜皮葺’로 편백나무 껍질로 올린 지붕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소위 적산가옥에서 살았다. 그 적산가옥은 매우 규모가 컸던 집으로 서울 중구에 있는 ‘한국의 집’ 대각선 쪽 교차로에 있었던 집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헌병대사령부가 남산한옥마을에 있었고 현재 ‘한옥의 집’에 일제 총독부 정무총감관저가 있었다. 이런 곳이니 이 주변에 일본 사람이 많이 살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살던 적산 가옥은 규모가 컸다. 아마도 엄청난 부자가 살았던 곳이라 생각했다.
이런 집에 살다고 보니 일본 주택에 대해서는 익숙하다. 내가 살았던 적산가옥도 내부는 복도 등으로 연결됐지만 밖에서 보면 한 동으로 보인다. 이번 교토에서 본 건물은 대부분 절인데 예전 막부정권을 잡았던 사람들이 살던 집을 절에 희사해 절로 개조되거나 부속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역시 건물들 역시 대부분 동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보였다. 니조성에 있는 니조마루나 혼마루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나 중국은 모두 건물을 기능별도 나눠 놓았다. 일본이 이렇게 건물을 한 동으로 들거나 모두 복도로 건물을 연결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가 일본 기후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무위키 자료에 의하면 도쿄 우기가 더 길다고 한다. 우리는 장마철에 강우가 집중되지만 도쿄는 3월부터 100mm 이상으로 내리는 비가 10월까지 꾸준히 내린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실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집을 지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각 동도 지붕이 있는 복도로 연결된 것이다.
* 중국주거건축인 사합원四合院에 대한 것은 아래 링크 참조
https://blog.naver.com/seongho0805/150007283136
이런 이유로 일본건물에서는 ‘겐칸玄關’이 발달했다. 우리나라 옛 건물에는 현관이 없다. 중국 옛 건물도 현관 개념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현관이 도입된 것은 서구와 일본에서 유입된 것이다. 기후 문제는 실내 바닥재료에서도 나타난다. 다다미도 기후 때문에 생긴 바닥재다. 내가 살았던 적산가옥에도 다다미방이 있었다. 여름 나기는 다다미 방만한 것이 없다. 즉 춥지 않고 습기가 많은 기후에서는 다다미가 적절하다. 그러나 겨울나기는 힘들다. 그래서 내가 살던 적산 가옥에서도 사람이 기거하는 방은 온돌을 깔았다.
다음은 지붕이다. 일본 건물은 지붕을 어떻게 만들까 하는 궁금증이 많았다. 기와는 후대 중국과 한국에서 도입된 것이다. 지붕에 궁금증은 이조성 혼마루 지붕보수공사사진을 보고 해소됐다. 일본 고유 지붕을 ‘히와다부키(檜皮葺ひわだぶき)’라고 부르는데 ‘檜’는 편백나무(노송나무)인데 일본어로는 ‘히노끼’라고 한다. 편백나무껍질을 작게 잘라 대나무 못으로 고정해서 지붕을 잇는 것이다. 이런 지붕방식은 일본에만 있다. 이 재료는 곡선을 만들기 쉽기 때문에 일본 건축물에서 많이 보이는 곡선지붕을 만들 수 있다.
히와다부키 지붕 원리는 직사각형으로 재단한 얇은 나무껍질을 중첩시켜가며 덮어 물이 흘러내려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조금씩 물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지붕 구조부재까지는 물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중첩시켜 지붕을 덮는 것이다. 우리 초가도 같은 원리다. 볏짚을 두껍게 중첩시켜 지붕 구조부재까지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지붕이 두께는 건물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비를 새지 않게 하려면 그리 두껍지 않아도 되는데 건물 규모가 커지면 지붕이 너무 초라해 보이니 수십 겹 이상 중첩시켜 지붕을 만든다.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지붕이다.
이번 일본건축을 공부하면서 서까래에 대한 궁금증도 풀렸다. 일본 서까래는 사각형 단면이고 지붕 하중에 비해 부재가 작다. 그리고 추녀부분도 우리와는 달리 다른 서까래와 같은 방향으로 설치하는 평연平椽이다. 이렇게 추녀단면이 작은 것이 과거에는 지붕하중이 적어 그런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지붕하중을 받혀주는 ‘하네기桔木’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네기는 하앙의 변형이다.
일본 건축사나 국내 일부 자료에서 일본 하네기가 지래대 원리를 응용했다고 하는데 이런 지랫대 원리를 이용하는 것은 우리나라 한옥의 서까래나 하앙식 모두 지대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일본 건축이 지래대 원리를 활용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일본에서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붕하중을 받는 것을 하네기에 전담시킨 일본 건축에서는 우리처럼 서까래를 노출시키지 않고 하네기를 감추는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즉 외부에 나타나는 서까래는 치장재일 뿐이다.
니조성은 정문을 동쪽으로 냈다. 그런데 안에 있는 건물은 남향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했는데 교토 옛날 배치를 보면서 이것이 의미 있음을 알게 됐다. 니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왕의 궁이 있다. 메이지 유신이후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일본 왕이 도쿄로 이어하기 전까지는 교토는 일본 수도였다. 쇼군체제로 들어서면서 일본 왕이 실권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왕이었다. 그러므로 교토는 일본 왕 궁전이 있었고, 일본 왕을 보좌하는 구게公家를 포함한 도시체계가 어느 정도 자리 잡혀있었다.
교토가 이곳에 도읍 했을 때 중국 성제를 기본으로 했다. 그러므로 왕궁과 남문을 잇는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된다. 주작대로는 남북 방향이다. 이렇게 되면 주변건물은 동향이거나 서향일 수밖에 없다. 에도시대 교토에 성내에 있는 마치야町家를 보면 동서로 배치했다. 이런 건물배치를 기본으로 니조성을 계획한 것이다. 그렇다보니 신하의 집이 남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남향한다는 것은 왕이 됐다는 뜻이므로 신하로써의 예를 갖춰 동향하는 성을 지은 것이 아닐까 한다.
카하라 토시는 ‘이조성 앞에서 동쪽으로 이어져 교토를 북쪽과 남쪽의 두 부분으로 나누는 니조도리二条通를 ’이에야스가 스자쿠대로朱雀大路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즉 이에야스가 동서대로를 주작대로화 함으로써 새로운 권력을 상징을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남면이 왕권의 상징임을 보여주는 예는 1915년 다이쇼 일왕 즉위를 니조 성 니노마루에서 거행하면서 남문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폐쇄됐지만 이때 남문을 만든 것은 왕은 동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니조성에서 눈에 띠는 것은 성벽과 건물에 설치된 버팀기둥 즉 버트레스buttress다. 처음에는 성벽 내부 쪽에 설치된 것이 눈에 띄어 전쟁 때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벽이 설치된 곳에는 모두 버팀기둥이 설치돼 있었다. 버팀기둥은 돌로 만든 것과 반은 돌로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얹어 만든 것도 있다. 이런 것은 성벽이든 일반 벽이든 벽이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벽 쪽은 외부 공격에 대비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내부벽체에 있는 버트레스 역시 공격에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설치된 것이다. 니조성 혼마루에서 나가는 쪽으로 가는 곳에 문이 있다. 문은 우리가 가는 방향과 반대쪽으로 열리게 돼있고 안쪽에 다시 문기둥을 버티게 버트레스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 문 좌우 벽에도 버트레스를 설치했다. 이런 모습은 버트레스 있는 쪽이 방어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즉 성안 벽체에 있는 버트레스도 방어목적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사진에 나온 문을 보면 비로부터 나무를 보호하려는 장치를 볼 수 있다. 기둥머리 부분은 동판으로 뚜껑을 씌웠고 보 상부는 동판으로 덮었다. 빗물이 나무에 스며들지 않고 흘러내리게 한 것이다. 이런 장치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의 ‘기요미즈부타이/淸水の舞臺’를 받치는 높은 기둥에서도 볼 수 있다. 거기서는 판재를 기울여 놓아 물이 밖으로 흐르게 했다. 아무래도 격이 높은 건물이니 신경을 쓴 것 같다.
그런데 이 기둥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다. 기둥 하부에 판제로 사방을 붙이고 동못으로 고정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판재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쉽게 썩는다. 현재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기둥 하부에 덧판을 붙였다고 해서 구조적으로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왜 저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 문제는 지금보다 기초를 조금 더 높이고 돌을 다듬어 경사지게 만들면 물이 잘 빠진다. 그리고 우리로 치면 하인방을 더 낮춰 고맥이돌을 설치하고 인방을 기둥 하부에 걸리게 하면 더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
이 문을 보면서 코오라이몬(高麗門)이라는 시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니조성에서 니노마루로 들어가는 문은 중국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카라몬唐門이 있다. 카라몬은 한자 그대로 당나라 양식의 문이라는 뜻이다. 코오라이몬은 ‘高麗門’이라는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건너온 것이라 한다. 코오라이몬은 우리나라 일각문과 같은 형식이다.
그러나 일각문은 외부에서 파괴하려는 시도에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부에 각 대문 기둥마다 하나씩 올리고 사진에 있는 것처럼 버트레스를 설치했다. 한국에서 일각문을 가져와 전쟁이 많은 일본에 맞춰 변형한 것이다. 이런 코오라이몬은 후대에 절이나 신사 등에 문짝이 없이 설치해 우리나라 일주문처럼 영역의 시작을 알리는 문으로 변했다고 한다.
고라이문(高麗門/こうらいもん)
https://ja.wikipedia.org/wiki/%E9%AB%98%E9%BA%97%E9%96%80
추신 : 니조성에서 유명한 것이 바닥에서 소리나는 우구이스바리(鴬張り/うぐいすばり)라는 마루다. 이에 대해 니조성 팜플렛에 침입자를 대비한 것이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일본 위키백과에 의하면 고정 장치가 오래돼 나는 소리라고 한다.
<일본 위키의 우구이스바리(鴬張り, 삐걱거리는 바닥)>
https://ja.wikipedia.org/wiki/%E9%B6%AF%E5%BC%B5%E3%82%8A
글을 마치며
나흘이란 짧은 여행이지만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은 또 다른 책읽기다. 보고, 느끼고, 지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책읽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깊게 느꼈다. 여행을 통해 내가 가졌던 일본에 대한 여러 지식을 교정할 수도 있었고 과거 콤플렉스에 대한 극복 과정도 있었다.
글을 쓰다보면 최소한 백과사전정도의 지식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문화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찾아봤고, 일천하지만 일본역사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고대역사도 그렇지만 이조성을 자료를 찾으면서 개화기 일본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서구에 개방한 시기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차이는 2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그 20년의 격차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렇게 격차가 존재하는 이유는 근대서구문화를 받아드리는 방법에 근본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개항하기 전부터 이미 네덜란드와 교류를 통해 제한적이지만 서구문물을 접해왔다. 그 기간이 300년이나 된다. 그리고 18세기에는 난학蘭學이라고해서 네덜란드문화를 연구하는 학풍이 있었다. 그렇기에 서구문화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1854년 미국에 함대의 위력에 굴복해 조약을 맺고 서구근대문명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일본은 내부적으로는 쇼군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체제다. 쇼군체제가 흔들리자, 개방에 대한 자세가 번마다 달랐다. 개방에 대해 가장 적극적이었던 번은 죠수 번과 싸스마 번이었다.
당시 군소 번에 지나지 않던 이들 번이 페리 이후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유학을 다녀온 두 번의 사람들이 중심이 돼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 모든 체제를 바꾼다. 이후 일본 정치는 지금까지도 죠수 번이 이끌어 왔다. 일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영향권 밖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우리 개방은 1876년 2월에 일본과 체결된 강화도 조약이다. 페리에 의한 일본의 개방과 우리나라의 개방과는 20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우리는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선택을 강요받은 것이다. 개방 이후에도 우리는 소극적이었다.
이런 것이 현재 일본과 우리의 차이를 만든 것이다. 현재 일본문화에는 서구문화의 영향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음력을 버리고 양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와는 완전히 문화적으로 과거와 단절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좋은 것인가는 차치하고 적극적으로 서구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는 역사에서 최초로 다른 나라에게 지배를 받게 됐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뼈저린 부분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이런 선택의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매우 위중한 상황이다. 정확히 보고 제대로 대처하길 바랄 뿐이다.
참고 문헌
- 일본건축사/고토 오사무(後藤 治)/김왕직‧조현정 옮김/한국학술정보(주)/2011.11.
- 일본건축사/西 知夫‧穗積 知夫/이무희‧진경돈 옮김/세진사/2015.03.
- 건축잡상(2)-전통 목조 건축물의 가능성과 하네기/이양재/NCE 제37권 제4호, 2019
- 皇に徳川の権勢を見せつける二条城にこれだけ見つかる西洋の痕跡>
https://www.gqjapan.jp/lifestyle/article/20220311-shiro-8
- [일본건축] 일본 전통 목조건축의 특징
https://blog.naver.com/daitouryou/221043701969
- 히와다부키檜皮葺
https://ja.wikipedia.org/wiki/%E6%AA%9C%E7%9A%AE%E8%91%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