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이 시대는 의식이 퇴락되어 혼탁하고 어려운 때인데, 한사람이 정진을 잘하면 그 지역 전체가 깨끗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 이 자리의 여러분은 정진하는 마음의 광명과 힘으로 이 사회와 전 인류가 다 함께 맑게 사는 세상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정진을 하면서 ‘공부가 잘 안된다’, ‘화두의심이 잘 안된다’, ‘어떻게 하면 빨리 해 마칠 수 있느냐?’ 이렇게 묻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밥 먹고 잠 자고 대소변 보고 하는 것은 본인이 해야지 남이 해줄 수가 없습니다. 남이 도와서 될 일이 있고, 남이 아무리 도와줘도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식이 공부 안 해도 서울대학교에 척척 갈 수 있도록 부모가 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깨달아서 성불할 수 있는 것을 부처님이 다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어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이가 있다 하더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부터 현실까지 오면서 공부를 얼마만큼 했느냐에 따라서,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육조스님처럼 무식하지만 나무지게 지고 시장에 가다가 금강경 한 글귀 읽는 소리에 그만 확철대오를 해서 자기 인생의 문제가 완전히 풀려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는 우리들이 똑같은 금강경 글귀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수 없이 듣지만, 육조스님처럼 깨닫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그 대목은 깨달을 수 있는 데 가까이 온 사람, 그 만큼 공부가 성숙된 사람한테 필요한 양식입니다. 들으면 단박에 계합이 되고 심경변화가 일어나서 깨닫는 것인데, 거리가 아주 먼데 있는 사람, 공부에 대한 닦은 것도 없는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물음에 조주스님이 “무無” 라고 하자, 물었던 이는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달정)은 과거 전생에 조주스님의 도반입니다. 조주스님은 일대사를 해 마쳤지만 그 도반은 전생에 해 마치지 못하고 입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주스님은 그 도반이 다시 찾아와서 법을 물을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120살까지 사신 것입니다. 그 도반이 다시 태어나 찾아와서 의심 나는 걸 물었을때 조주스님이 ‘무’라고 대답한데서 바로 해결할 수 있을만큼 그분은 공부를 많이 해서 성숙이 된 것입니다. 종기가 고름이 다 빠지고 딱지만 남아서 그 딱지만 떼면 되는 것처럼 다 성숙이 되어서 온 겁니다. 그래서 한마디에 계합이 되어서 해 마쳤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렇게 안 되는 원인은 자신이 앉아서 참구해보면 압니다. 과거 전생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언하에 못 깨닫더라도 일사천리로 의심일념이 죽 지속됩니다. 반면, 과거 전생에 공부를 안한 사람은 그것이 안 됩니다. 법문 들어도 의심 나는 것도 없고 감각이 없습니다. 감동이 일어나는 것도 와 닿는 것도 없습니다. 공부에 대한 것이 생판 아무것도 안된, 천리나 거리가 먼데 있는 ‘박복중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공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수행해서 성숙된 게 없기 때문에 의심이 안 나더라도, 지극하게 화두를 생각해 보면 의심이 안 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두를 갖다 놓고, ”너 일주일 안에 무엇인고를 알아내! 만약 못 알아내면 작두로 목을 잘라버리겠다." 실지로 목이 잘려나가는 걸 약속해놓고 한다면 아마 대단히 열심히 할 겁니다. 공부에는 급한 게 있어야 됩니다. 실지로 아주 다급하다는 것을 본인이 뼈져리게 느껴야 됩니다. 그래야 심지에 불 붙듯이 공부에 불이 붙어서 화두가 지극히 일념으로 잘 순숙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못하고 공부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럴 때는 본인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내가 전생에 얼마나 닦았는가 안닦았는가는 현실의 내 모양을 보면 압니다. 또 공부를 해보면 압니다. 그래서 공부가 안 될 때 분심을 낸다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수행을 안하고 삼계윤회를 하면서 헛된 세월을 보냈으면 공부가 이렇게 안되는가! 내가 또 이생에 공부가 안되어서 허송세월을 보내면 다음생에 또 퇴락이 되어서 이보다 더 못한 업보를 받아서 나야할텐데. 이제 나도 생명을 바쳐서 한번 공부를 해봐야겠다.’ 이러고 여기다가 아주 지극히 전력을 다해서 생명을 던지는 것입니다. 화두 드는 게 힘이 미약하면 혼침에 휘말려 들어가고 망상에 휘말려 들어갑니다. 그러면 헛된 시간을 보내는 거고, 망상만 더해지고 혼침만 커지게 됩니다. 망상이나 혼침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있는 힘을 다해서 화두를 참구해야 됩니다. 그 힘이 강하고 커야 그 엄청난 수마와 번뇌망상을 항복 받을 수 있습니다. 망상을 안 일으키려고도 하지 말고, 잠이 온다고 잠을 안 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그건 관계를 하지 말고 다만 화두를 돌이켜 보세요. ‘내가 이걸 알지 못하면 헛일인데. 내가 무슨 살아도 가치가 있는가? 이걸 모르면 아무것도 아닌데.’ 하고 일초도 화두를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잠이 오면 잠이 오는 줄 알고, 망상이 나면 망상이 나는 줄 본인이 압니다. 망상인줄 아는 그 놈, 잠이 오는 줄 아는 그 놈, 그 놈이 어떤 물건인지 얼른 돌이켜서 깊이 참구해 들어가야 됩니다. 그걸 되새김질 한다고 합니다. 소가 잔뜩 먹어 삼킨 것을 게워내어 다시 잘 씹어서 넘긴다는 겁니다. 망상이나 잠에 시달려 따라갈게 아니고 얼른 순간 포착으로 빨리 돌이켜서 잠이 오는 줄 아는 그놈, 망상이 나는 줄 아는 그놈을 빨리 잡드려야 합니다. 빨리 낚아채서 ‘무엇인가?’ 깊이 파고 들어가면 잠 오는 것도 넘어지고, 망상도 넘어지고 없어집니다. 또, 화두가 되는지 안 되는지 멍하니 밋밋하게 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때 본인이 얼른 알아채서 ‘아 이건 아니다!’ 하고 낚아채야 됩니다. 무엇일까 하는 성성히 깨어 있는 의심이 중요합니다. 오롯하게 그걸 지극하게 돌이켜서 다시 천근만근 되는 쇠뭉치를 바다 밑에서 끌어올리는 힘을 들이라, 연탄불에 밥을 올려놓은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양은솥에다가 쌀을 해서 연탄불에 올려놓고 밥 다 되도록 그것만 보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동안에 국 안치고 반찬하고 상 차리는 걸 다 하면서도 연탄불의 밥이 다 된 때를 안놓치고 그걸 들어낼 줄 압니다. 그렇듯이 행동은 수 백 가지로 하지만 한 놈이 그렇게 다 하고 있으니까 그 놈을 되돌려 잡도리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지극히 애써서 생명을 던져 일초도 놓치지 말고 잡도리해야 합니다. 그걸 대혜스님의 서장(書狀) 같은데서는 ‘화두를 제시(提?)한다’ 라고 나옵니다.
공부하는 이것이 우주 만유, 이 세상 살아가는데 원동력이고, 살아가는 현실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 모든 곳에서도 이 공부하는 힘이 전체를 좌우합니다. 그 힘이 없이 그냥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엉망진창이고 살아가는 게 형편없습니다. 그러나 공부의 중심, 힘이 딱 잡힌 사람이 사회에 살아가는 건 완전히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목전에 닥친 것을 정말 멋지게 잡도리해서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이 화두일념입니다. 화두일념의 힘이 크면 거기에 의해서 바깥으로 생활하는 것도 순화가 되고 잘 됩니다. 그런데 그 힘이 없는 사람은 곤란합니다. 여러분이 그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도록 정진을 열심히 해 주시고, 또 여기 오신 여러분은 죽으러 온 겁니다. 죽어야지만 새로운 것이 살아납니다. 그러니, 나라는 생각, 아상은 버리고 항상 내가 어떻게 하면 옆사람을 편하게, 잘 해주는 것인가, 공부에 도움을 주는 것인가 하고 옆사람을 생각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잠이 오면 무릎을 꿇고, 꿇어서 안되면 일어나고, 일어나서도 잠이 오면 한쪽 다리를 들고 합장을 해 보세요. 그렇게라도 잠을 쫓아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19.4.25 용맹정진 용상방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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