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아이'의 동심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싶다.
-운동화 신고 매달 한 번은 이발소 가며, 일일이 변명하지 않는 '사내아이' 이미지, 그걸
버리고 싶지 않다.
이제 나는 도저히 '사내아이'라고는 불릴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사내아이'라는
말에는 아직껏 이상하게도 마음이 끌린다. 그 말의 울림이나 거기에 담긴 느낌 같은 것이
참 좋다. 세상에는 "야, 저 녀석은 진짜 사나이야"라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지만, 나에게는
역시 '사나이'라는 말보다는, '사나이'라는 말보다는, '사내아이'라는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듯
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니까 너는 덜 떨어지고 사회화 되지 못한 데다 유아적인 거라구"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현실적인 연령과는
별관계없이 - 물론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 성립되어 있는 일종의 사물에 대한 견
해, 가치관의 문제가 아닐까?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어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사내아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게다.
"그럼, 사내아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 되는데, 이런 것은 대가 심정적이
면서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굳이 정의를 내리려고 들
면 못할 것도 없지만, 빙빙 돌려서 말을 하게 되니까 꽤나 답답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당신에게 있어서 '사내아이'의 이미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
까? 라는 의미의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것이다. 조목조목 쓰자면 다음
과 같다.
(1)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2)한 달에 한 번(미장원이 아니라)이발소에 가며
(3)일일이 변명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의 '사내아이'의 이미지다. 간단하다. 이 세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이라면 나이와는 관계없이, 적어도 나한테 그 사람은 '사내아이'인 것이다. 그리고 나도
꽤 오래 전부터 이 세 가지 조건을 어떻게든 만족시키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제시된 조건이 간단 명료하다고 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간단한가 하면,
물론 그렇지가 않다. 단 세 개의 단순한 항목일지라도, 오랜 기간에 걸쳐 부지런히 지켜 나
가려면 역시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고, 그 결과 일종의 철학 같은 게 생기게 된다.
아니, 철학이라는 표현은 약간 과장일지도 모른다. 경험적 관점이라고 하는 게 더 가까울
것 같다. 그런 조건을 지키려고 고생하다 보면 - 그 고생이 어느 정도 객관적 필연성을 갖
느냐, 라는 것과는 거의 관계없이 - 종종 철학, 아니 경험적 관점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여하튼 내 경우를 검증해 보라.
항목 (1) 에 관해서는 지금도 완전히 사내아이의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 나는 1년이면
320일 정도는 운동화를 신고 지낸다. 가끔 구두를 신거나 하면 어쩐지 신분을 사칭하는 듯
한 기분이 들어 도무지 안정감이 없다. 특별한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이 점에 관한 한은 거
의 문제 없다.
그러나 (3)의 "일일이 변형하지 않는다"는 항목을 실행해 나가기란 정말 어렵다. 생활을
해나가면서 딱히 변명할 작정은 아니었어도 무심결에, "아니, 사실은요 ......" 하고 마치 변명
하는 투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퍼뜩 깨닫고 씁쓸해 했던 적이 종종 있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젊은 시절은 제쳐놓고, 어른이 되어 깊고 폭 넓
게 사회와 관계를 맺고 어느 사이엔가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 말려들게 되면, 변명과 해명
을 전혀 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런 단계 단계에서 해야만 할 해명을 하지 않으면
현실적인 손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오해 끝에 깊은 상처를 받게도 된다. 다른 사람에게 폐
를 끼치게 되거나 본의 아니게 소중한 친구를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평범한 세계에서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내가 속해 있는 문학 관계 사회는 얘기가 한 층
더 복잡해 진다. 이곳에서는 여러 의견이 속속 활자화되어 광범위하게 배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에 대한 변명, 해명도 결과적으로 광범위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단 그 변명 사이클에 들어가고 나면, 그야말로 하나에서 열까지 일일이 변명을
해야만 된다. 어디까지가 정말로 필요한 해명이고, 어디까지가 정말로 필요치 않은 변명인
가, 하는 경계선을 점점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됐을 때부터 글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변명을 하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그리 강인한 사람이 못 되니까, 일상생활 속에서는 무심코 변
명 따위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글을 이용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약간 과장된 변명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설령 전세계적으로 오해를 받는
다고 해도, 그건 그것일 뿐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소설가라는
건 좋든 싫든 그렇게 모두에게 쉽게 이해 받을 수 잇는 존재는 아니다"라는 뜻이다.
"아는 게 힘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소설가에게는 오히려 "오해는 힘이다"라는 쪽이 옳지
않을까? 소설의 세계에서는 이해에 이해를 거듭해서 얻어진 이해보다는, 오해에 오해를 거
듭해서 얻어진 이해쪽이 때때로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뭐 그런 일에 대해 쓰기 시작하자면 한이 없고, 그야말로 푸념이 될 것만 같으니, 슬슬 항
목 (2)의 이발소 얘기로 옮겨야겠다. 사실은 이 이발소 문제야말로 이번 원고의 중심적인 화
제다 .
최근 6년간 거의 외국에서 살면서 나는 이발소 때문에 정말 고민하고 괴로워해 왔다. 이
세상에서 나처럼 자주, 그리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이발소에 대한 걱정을 하며 살아온 사람
은 - 물론 이발업계 관계자는 별도로 하고 - 여간해선 없을 거라는 생각조차 들 정도다. 어
쨌든 이발소 문제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쓸 공간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나는 특별히 헤어스타일에 공을 들이는 사람은 아니다. 사전을 보면 알겠지만, 별로 이렇
다 할 만한 멋이 없는 평범한 헤어스타일이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걸쳐서는 시대적
인 사정도 있고 해서 비교적 머리를 길렀지만, 그 이후로는 달리거나 수영하기 좋게 되도록
짧게 머리를 자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술미적 감각이라곤 완전히 배제된 헤어스타일이다. 사실 헤어스타일
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퍼머도 하지 않고, 포니테일형으로 묶지도 않고, 크림도 오일도
무스도 아무 것도 바르지 않는다. 그저 똑바로 깎아서 빗으로 빗을 뿐이다. 그런 평범한 헤
어스타일을 고집하며서, 왜 그렇게까지 심각한 고민을 해야만했는지, 당신은 의문을 갖게 될
런지도 모른다.
내 머리카락은 약간 특이해서 균형을 잡기가 무척 까다롭다. 적당히 짧게 깎으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까딱 잘못하면 정말 비참한 꼴이 된다. 이발소에서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
고, 망연자실해서 1주일 동안밖에 나가지 않았던 적도 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간단하게
는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일본에 있을 때는 언제나 도쿄의 한구석에 있는 이발소에 다녔었다. 나는 그 이발소를 15
년 쯤 다녔다. 두 달에 세 번 꼴 정도로 그곳에 가서 "안녕하세요" 하고 의자에 앉곤 했다.
그뿐이다.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라. 그곳 사람들은 내
머리카락을 어떻게 깎으면 좋은가를 잘 알고 있어 요령 있게 처리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나라시노에서 후지사와로, 후지사와에서 오이소로 옮겨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깎을 때는 늘 전철을 타고 도쿄까지 나왔다. 이른바 유니섹스 미장원 같은 데는 가
본 적이 없다.
원래 나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머리를 감는 건, 인간성에 대한 대단한 모독이라고 생각
했다. 그때 사람은 완전히 얼빠진 바보처럼 보일 테고, 그런 얼굴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건
치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외국에서 살게 된 이후에는, 머리가 자랄 때마다 일일이 도쿄로 돌아갈 수도 없어,
어쩔 도리 없어 현지의 이발소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이발소와 외국의 이발소 사이
에는 상당한 기술적 차이가 있다. 딱 잘라 말해서 분재 가꾸기와 잔디 깎기 정도의 차이다.
미국 이발소의 중심 명제는 그저 단순히 자라난 머리카락을 짧게 깎는 것이지, 결코 머리
카락을 다듬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어찌 됐건 소요시간만큼은 압도적으로 짧다. 손님이 의
자에 앉으면 가위로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자른 뒤에, 전동 이발 기계로 목덜미 부분을 찌리
릭 찌리릭 다듬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10분 내지 15분 정도면 거뜬히 끝나 버린다.
머리를 감겨 주지 않는 것조차 많다. 머리를 감겨 준다 해도, 자르기 전에 감겨 주기 때문
에, 목이며 옷이 머리카락투성이가 되어 버린다. 감수성이란 손톱만큼도 없다. 물론 대개의
경우 머리 모양은 지독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한 번은 런던의 스위스 가든이라는 지하철 역 근처의 이발소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의자
에 앉자 젊은 남자 이발사가 와서 내게 일본인이냐, 자기네 가게에는 처음이냐고 물었다. 그
렇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누군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여기에 왔느냐고 또 물었다. 나는 아니
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럼 당신은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군요" 하고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왜냐하면 말이죠. 일본인의 머리카락은 서양인의 머리카락과는 머릿결이 다르거든요. 머
리 생김새도 다르고 얼굴 생김새도 다르죠. 그러니까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에게 맞는 헤어
컷이라는 게 있는 법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확실히 그렇죠"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도 영국의 이발소에서는 그렇게 까다로운 건 생각지도 않을뿐더러, 또 실제로 일
본인에게 머리를 깎을 수 있는 사람도 없죠. 이해하실 수 있어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녀석들은 머리라는 걸 쓰지 않는답니다. 경험에서 배우질 못하죠. 그렇지만 나는 그걸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이발소를 했는데, 이 근방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래서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본인의 머리를 깎아 왔거든요. 어떤 식으로 일본인
의 머리를 깎으러 온 당신에게 행운이라고 한 겁니다."
나는 "아하. 그렇습니까" 하고 대꾸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런던에게 도저히 이발소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쫓겨, 어쩔 수 없이 눈
을 질끈 감고 근처의 아무 이발소에나 뛰어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발소는 정말로 지독했다. 컷은 서툴고, 가위는 잘 들지 않
았으며, 셔츠는 머리카락 투성이가 되었다. 완성된 헤어스타일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도저히 내 얼굴이 아니었다.
하기야 원래 그렇게 칭찬 받을 얼굴도 아니지만, 그렇게 까지 심하게 만들건 없지 않나
싶었다. 이런 얼굴을 한 사람과 어떤 사정으로 마주 앉아서 밥을 먹게 된다면, 틀림없이 뭘
먹어도 입맛이 싹 가실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진짜 내 얼굴이었다.
이발사 아저씨 본인은 "어떻습니까? 행운이었죠?" 하고 대단히 만족해 했고, 이야기의 흐
름으로 봐서는 팁도 보통 이상으로 많이 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얼마 동안
은 외출할 수 없었다. 면도할 때에도 되도록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덕분에 방안에 틀
어박혀 내내 일반 할 수 있었으니 뭐 잘된 일인 것 같지만, 어쨌거나 런던에 체류할 때는
머리가 길어져도, 절대로 스위스 가든역 근처의 이발소만큼은 가지 말기를 이 나라를 찾는
모든 분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스에서 살았을 때는, 이따금 아테네의 미장원에 갔었다. 나는 줄곧 섬에서 살았기 때
문에, 언제나 아테네까지 머리를 깎으러 갈 수는 없는 일이어서, 무슨 용무가 있어 아테네에
나갈 때마다, 그 미장원에 들르는 게 얼마동안의 습관이었다. 그 곳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
로 들어간 유니섹스 미장원이었다.
마침내 그리스의 이발소에 질려 버린 나로서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것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그 곳에 들어갔던 것이다.
"아아, 더 이상 사내아이가 아니어도 좋다. 제대로 된 인간한테 제대로 머리를 깎고 싶
어."
그런 심정이었다.
미장원은 아테네의 고급 주택가 안에 있고, 청결하고 밝은 유리로 들어쳐진 장식도 여피
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했다. 물론 요금은 싸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술은 좋아서 깎은 모
양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아테네에 갈 때마다 그 미장원을 찾게 되었다.
종종 머리말에 서글픈 표정의 이발사 아저씨가 서서, "어째서 당신은 우리와의 관계를 끊
고 미장원 같은 데만 다니게 되었소?" 하고 힐책하는 꿈을 꿨다. - 이건 사실이 아닌 이야
기지만, 그래도 이발소에 다니지 않게 되니까, 퍽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딱
히 이발소에 의리라든가 빚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그 미장원에는 약간 기묘한 문제점이 있었다. 머리를 감겨 준 뒤에, 면봉을 양손에
하나씩 아무 말 없이 건네주는 것이다. 똑바로 나를 눕히고 머리를 감겨 주고나서는, 수건으
로 쓱쓱 닦아 준 후에 머리 감겨 주는 아가씨가 다짜고짜 면봉 두 개를 쥐어 주고는 어디론
가 가버리는 것이다.
"이걸로 스스로 귀를 청소하세요"라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틈도 없이 머리 감기가
끝나면 미용사가 다가와서 가위를 들고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는 면봉 두 개를
꽉 쥔 채, 끝까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는 거다.
보기에도 바보스러울 뿐더러 거북하기 짝이 없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나는 이해
가 되지 않았고,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당신처럼 귓속이 더러운 인간의 귀는 청소해 줄 수 없어, 앞으로는 깨끗이 하고 다니라
구."
그런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귓속이 더러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자 점점 더 신경이 쓰여 결국 그 미장원에도 가지 않게 되고 말
았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면봉을 건네 받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건 심장에 좋
지 않을 것 같았다.
미국에 와서도 얼마 동안은 집 근처의 이발소를 시험해 보았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이발소 아저씨들은 거의가 이탈리아계 사람들이다. 20세기 초에 뉴저
지에서 건축 붐 같은게 일어났고, 그때 건축 노동자 수가 모자라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석공
을 불러왔다는데, 미국에서 사는 게 더 편했는지, 많은 사람이 그대로 눌러앉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신천지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 보려고, 빈곤과 불황에 찌들린 고향 마을에서 일
가 친척들은 불러 들였다.
이탈리아 이민자들 대부분은 뱃삯만 내고 겨우 미국 땅을 밟긴 했지만, 자본이라고 불릴
만한 건 전혀 없었고, 개척자가 사라져 버린 미국에서, 농사 지을 땅을 새로이 얻는 것도 쉽
지 않았기 때문에, 재빨리 급료를 받을 수 있는 기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프린스턴 부근의 건축업자, 조경업자, 빵 가게 주인 중에는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많다. 마찬가지로 자본을 갖고 있지 않았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 역시, 재빨리 급료를 받을
수 있는 경찰, 군인, 소방원 등 공직 사회로 많이 진출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미국의 각 민족
의 직업적 분포도를 살펴보면 꽤나 재미가 있다.
그런 까닭에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 대학에 있었던 무렵부터, 줄곧 이발소를 해오고 있을
것 같은 할아버지들이, 지금도 여전히 이탈리아 어가 섞인 영어를 지껄이면서, 여유롭고 한
가하게 교수들이며 학생들의 머리를 깎아 주고 있다. 이발소 분위기도 퍽이나 고풍스런 아
메리카 스타일로 제법 운치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술적으로는 확실히 전근대에 가깝다 몇 집 시험해 보았지만, 두
번 다시 가고 싶은 이발소는 한군데도 찾을 수 없었다.
집 근처의 유니섹스 미장원에도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과연 기술적으로는 좀더 세련되고
머리도 나름대로 정성껏 깎아 주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미용사 중에 무턱대고 마
구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어서 두손을 들고 말았다.
이발소의 이탈리아 아저씨는 세면대로 갈 때 "안디아모 시뇨레"라고 하는 정도일 뿐 거의
말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유니섹스 미장원 쪽은 서비스를 한답시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
지만, 훨씬 수다스러웠다.
"무슨 일을 하고 계세요?", "대학에 계십니까? 전공은 뭔데요?", "미국은 마음에 드세요?",
"일본에는 징병제가 있나요?", "일본에는 왜 미국차가 팔리지 않죠?" 등등의 얘기를 연달아
물어서 좀 피곤했다.
지난번에 내 머리를 깎아 주었던 앤드류라는 미용사는 나이가 40대 중반 정도로, 이미 머
리숱이 성근 사람이었다. 그의 전용 거울 앞에는 세 딸과 아내의 사진, 집과 개의 사진이 장
식되어 있었고, 게다가 작은 성조기가 다섯 개 정도 죽 세워져 있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머리를 깎으려고 미장원을 찾아온 처지라서 미
용사의 가족 사진이나 성조기 같은 걸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머리를 깎는 동안 언제
끝날지도 모를 딸 자랑을 하는 데는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었다.
결국 지금은 뉴욕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장원에 다니고 있다. 구태여 1시간 15분이
나 걸리는 뉴욕까지 나가서 머리를 깎는 것 도 바보 같은 짓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런 선
택에 이르기까지는 2년 간에 걸친 다양한 시행착오와 절망과 낙담뿐만 아니라, 무산된 기대
와 쓴 웃음과 피곤함이 있었던 것이다. - 변명할 생각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뉴욕에 나갈 볼일도 있어서, 내친김에 미장원도 들르지 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깎으러 간다.
미장원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싹둑싹둑 하는 가벼운 가위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문득 도쿄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아마 그 '싹둑싹둑' 하는 소리가
외국인 이발소 내지는 미장원이 내는 '싹둑 싹둑' 하는 소리와 약간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본인 이발소나 미장원인 경우, '싹둑싹둑'이 일의 흐름에 따라 '삭삭' 하는 가벼운 소리
가 되고, 그 소리가 또다시 시냇물 소리 같은 '사각사각' 하는 소리로 바뀌어 간다. 그런 작
업의 진행 방식에는 '일본이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설득력이 있다.
그런 까닭으로 현재는 (2)의 "이발소에 가며"라는 항목은 유감스럽지만 실천되고 있지 않
다. 매달 위를 보고 누운 채 남의 손으로 머리를 감고 있다. 사람이 언제까지고 '사내아이'로
머무르고 있다는게 쉽지는 않은 가 보다. 도쿄로 돌아가면 다시 전의 단골 이발소에 다녀야
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과연 그게 언제가 될지.
뒷 이야기 지금은 보스턴에서 단골 헤어 살롱을 발견했다. 유감스럽지만 이발소는 아니고
유니섹스 미장원이다. 거기에서 레니라는 미용사에게 매달 한 번 머리를 깎고 있다.
레니는 스포츠맨인 데다 채식주의자라서 내가 가면 늘 스포츠나 채식에 관한 얘기를 한
다. 왜냐하면 내가 맨 처음 갔을 때 수영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그
의 머리속에 이 사람은 건강파구나, 하는 정보가 입력된 것 같다.
프린스턴에서 이웃으로 지냈던 경제학자 캔들리 씨가 미국의 이발소에서는 맨 처음에 나
누었던 화제가 영구적으로 정착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었
다. 병아리가 태어나서 맨 처음으로 본 것을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는 근처의 이발소에서 맨 처음에 우연히 테킬라 얘기를 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장장 몇 년 동안이나 테킬라를 마시는 법이며 테킬라를 사용한 칵테일 만드는 법 같은 것에
대해 이발소 아저씨와 얘기를 나누는 처지가 되었다고 했다.
"정말 피곤해요. 원래 테킬라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정말 딱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