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기 5주차] 첫 연주회를 마치고
첫 피아노 연주회를 치뤘다. 살면서 피아노 연주회를 하게 될 거란 꿈을 꾼 적은 없었는데, 선생님의 권유에 "Yes!"라고 답한 후 2개월 동안 피아노에 푹 빠져 살았다. 피아노와 관련된 책들을 탐독하고 하루 일과 중 잠깐 틈이 나면 예술고등학교 근처의 연습실을 빌려 연습을 했다. 다양한 그랜드피아노를 경험해 봐야 연주회 당일에 덜 긴장할 것 같아, 여러 연습실을 다니며 연습실의 분위기와 악기에 대해 분석하는 전공생 같은 일상을 살았다. 연습실 스텝이 평일 저녁, 주말 이른 아침에도 연습실을 대여하는 내가 전문 연주자 또는 전공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인줄 알고, 연습실 방을 업그레이드(영창에서 야마하) 해주거나 피아노 건반이 무겁지 않냐며 방을 교체해주겠다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전공생도 아닌 내가 연습실과 관련한 재미난 에피소드를 몇 번 경험하며, 음악을 전공하고 음악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게 되었다. 엄격한 잣대로 평가 받으며 완벽성을 추구하는 전문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 곡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듬고 수정하고 다시 반복하는 지난한 연습의 과정은 치열했다. 10시가 넘어 연습실 불을 끄고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갈 때는 외로웠다. 1시간 내내 연습이 너무 안 되어 속상한 마음을 안고 집에 왔는데, 다음날 안 되던 부분이 잘 될 때는 무척 신기했다. 레슨 받을 때 어려운 부분이라 체크해둔 부분을 반복 연습하고, 1달 뒤 이 부분 정말 잘쳤다며 선생님께 '별표' 표시를 받을 때면 뿌듯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노력의 미덕이 정직하게 (시의적절하게) 열매 맺는 것을 보기란 참 드물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인정 받는 현대 사회의 풍조가 우리들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가성비를 따지지 않아도 되는, 때로는 가성비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부분들까지도 수치화해서 우리를 옥죌 때가 있다. 우직함은 어리석음으로, 정직함은 융통성 없음으로, 꾸준함은 트렌디하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깊은 사색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되어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다. 삶을 살아갈 때 지녀야 할 소중한 가치라 여기는 것들을 변질시키거나 사회생활이라는 명목하에 잠깐 내려두어야 살아가기가 좀더 쉬운 아이러니한 세상이라 지칠 때가 많다.
그러나 연습을 하며 피아노 앞에 정직하게 마주앉아, 노력할수록 소리가 다듬어지고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 곡이 여물어가는 것을 경험했다. 복잡한 생각들이 단순해지고 지친 마음들이 손가락을 움직일수록 위로 받는 것은, 지키려했던 가치가 이 순간만큼은 정직하게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지난번에 쓴 <피아노로 채우는 일상> 글을 피아노 카페에 올린 후 여러 회원분들이 댓글로 격려해주셨는데, 그 중 전공자분께서 해주신 조언이 연습을 이어갈 힘을 주었다.
"연주회까지 잡히셨다니 축하드려요! 무대 하나하나가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실 거에요! 무대가 잡힌다면 꼭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연주하시기 바래요! 연주 후에 관객들에게 받는 박수 갈채와 지인들에게 받는 선물과 꽃들은 평생 기억에 남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음악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겁니다!"
직장일이 힘들어 오늘 연습은 좀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연습실에서 답답함을 느껴 짐 싸서 집으로 가고 싶을 때 이 댓글이 힘이 되었다. '꼭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연주하시기 바란다'는 격려와 연주를 보러 오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한 번만 더!'를 되뇌었다. 기술적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니라, 곡을 생각할 때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 그리듯 건반에 담아내 전하고 싶었다. 곡 속에 등장인물을 넣어 대화하듯 스토리를 구상했는데, 연주를 하며 나 역시 연주를 들어주는 이들의 마음과 대화하고 싶었다. 빈 공간에서 연주하면 음이 공기 중에 파장을 잃고 사라지겠지만, 관객들의 마음에 들어간 파장은 각각의 마음, 심장과 공명하여 또 다른 파장을 나에게 전해주리라 믿었다.
얼마전 친한 친구가 "너가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거기에는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너의 마음이 담겼다. 소설책이나 다른 비문학 장르와는 다르게,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를 즐겨 읽는 것은 사람을 알고 싶고 소통하고 싶은 너의 성향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는 말을 했다. 그러고보면 글을 쓰고 공부를 하며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누군가와의 만남, 연결을 갈망하는 나의 소망과도 닿아 있다. 꽤 독립적인 성향이고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결국 '혼자로서의 나'를 오롯이 잘 살아내고 귀한 것들을 채워 의미 있는 타인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연유했음을 발견한다.
마지막 연주자분이 치신 <쇼팽 발라드 1번>을 들으시고는 "대학 졸업연주회 때 쳤던 곡이야. 나도 무대에서 연주하고 싶다"며 소녀처럼 설렘을 느끼시던 어머니, 예쁜 꽃과 달달한 디저트를 안겨준 가족들, 타지에 있어 가지 못해 아쉽다며 멀리서 마음 담아 선물을 보내준 친구들, 남편이 주문한 꽃을 보고는 축하의 문구와 함께 사랑스러운 꽃을 보내주신 꽃집 사장님, 피아노 연주회를 할 기회를 마련해주시고 대견하다며 처음부터 끝까지 사려 깊게 지도해주신 선생님, 그리고 풍성한 꽃과 함께 가족들과의 식사자리를 마련해준 남편의 사랑을 듬뿍 느꼈다. 피아노를 통한 대화라 그런지 요란하지 않게 따뜻하고, 영롱하게 기쁘다. 몽글몽글하고 감사한 이 마음을 2주 동안 품었다가 지면에 녹여내고 들뜬 마음을 내려놓는다. 첫 연주회를 마치고 글로 정리해보는 이 시간이 담담하고 평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