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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회화 모음
정약용 / 매화병제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 또는 일명 매조도(梅鳥圖)라고도 불리는 이 시화(詩畵)는 어버이가 딸애에게 줄 요량으로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려 넣고 그에 알맞은 시를 지어 반듯하게 만든 작은 가리개에 쓰인 것으로 넘치는 사랑의 가르침이 그득하게 담겨있다. 그림을 대하면서, 눈으로 보고 읽는 데에 그치지 않고 느꺼움이 일어나 가슴으로 안다면, 동진(東晋)사람 고개지(顧愷之, AD 344∼406)의 필치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얽힌 안견(安堅, AD 1418∼?)의 예지를 얻으려는 간절함이 구체적인 사실을 경험적인 감정으로 표현하였음에서 읽을 수 있으며 삶의 진정성과 시대의 아픔을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구도에다 소재도 평범하여 보통의 그림처럼 여겨지지만, 그 속에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AD 1762∼1836)이라는 태산만큼이나 거대한 인물에 감추어진 그에 못지않은 솔직하고도 담백한 인간적인 냄새가 숨겨져 있으며, 그 가운데에 다산이 자신을 진솔하게 표현한 속내의 깊고 정미(精美)한 것까지도 읽어낼 수가 있다. 그림 앞에 마주하고 서면, 오랜 동안의 유배생활로 지친 외로움을 달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더해서 끝없는 부성애(父性愛)를 함께 담아 마음이 가는대로 붓이 따라가며 안타까움을 여과 없이 토해내고 있는 심경을 대하는듯하여 보는 이를 더 한층 애달프게 한다. 몇 줄의 글귀를 읊조리며 음미하다보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무한한 사랑의 애틋함이 아직도 줄지 않고 진하게 다가와 눈시울을 젖게 한다. 이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시공을 초월하여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것은 모두가 지극한 인정(仁情)의 발현 때문일 터이다.
먹빛도 선연하게 한 획 한 획 정성껏 그림과 시(畵題)를 마무리하고 줄을 바꾸어 여백에 작은 글씨로 다시 발문을 꼼꼼히 썼다. 연호(年號)와 간기(干紀)를 쓰고 관서(款署)에 이어서 간략한 문장으로 애끓는 부성을 함께 넣어 적었다. 그렇게 마음으로 채우고 애간장을 녹여서 완성한 그림이다. 아쉬움의 크기야 태산보다 높았을 것이고 바다를 채우고도 남았겠지만, 더 이상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눈을 감아보라. 그림을 손에 받아들고 어릴 적 기억 밖의 저편의 어버이를 생각하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을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떠올려지지 않는가. 어찌 처연해지지 않겠는가. 그리움이 느꺼워 아쉬움 속에 있으면서 꿈속을 회상하는 만큼이나 쓰라린 것이 없다 해도 어버이와 자식으로 천륜인 것을, 오늘도 그리워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서로를 향해서 하늘만을 바라보고 눈물짓고 있었을 그 광경을 떠올려보라. 송곳이 뼈 속까지 찌르듯 아픔을 느끼지 않겠는가. 하릴없는 바람인줄 알면서도 갈망의 소리는 하늘 향해 끝없이 날아오른다. 아직도 팔팔뛰고 있는 살아있는 어버이와 자식 간의 끝없는 사랑의 잔영들을 허공에 가득히 띄워놓고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좌절의 어둠에 빠져 방황할 때에도 그랬다. 체념의 허방다리에서 허우적이며 헤맬 때에도 똑같았다. 결코 잃지 않았던 희망의 끈을 붙잡고 애쓸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해와 달을 다스리는 하늘이 가없는 은혜를 베풀어 왜곡된 세상을 되돌리고 삭막한 광야로부터 이끌어 소생할 새 길을 다시금 열어 줄 그날이 오기를 손꼽고 있다. 끝없는 기다림으로.
翩翩飛鳥 훠얼 훨 날아 온 새가
息我庭梅 내 집 뜰 매화나무에서 쉬는구나.
有列其芳 그윽한 그 향기가 짙기도 하여
惠然其來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구나.
爰止爰棲 여기에 머물러 깃들어 지내며
樂爾家室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華之旣榮 꽃이 이제 활짝 다 피었으니
有蕡其實 열매도 주렁주렁 많이 달리겠네.
이방운 / 절매저구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절매저구도(折梅著句圖)-이방운은 함평인(咸平人)으로 자는 명고(明考), 호는 기야(箕野), 심재(心齋), 순재(淳齋), 순옹(淳翁), 기로(箕老), 심옹(心翁), 심로(心老) 등 이다. 그의 생애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현존하는 작품을 보면 주로 고사(故事)나 고시(古詩)를 소재로 삼았으며, 화풍은 산수나 인물 등 남종화풍으로 일관되게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신춘에 막 피어난 매화가지를 꺾어(折梅) 화병에 꽂아 놓고 이를 감상하며 시구를 짓는(著句) 선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매화나무는 선비의 초당(草堂) 옆의 구멍이 많이 뚫린 태호석(太湖石) 뒤에서 자라나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림은 보통 ‘매화서옥도’라고도 한다. 초당의 뒤에는 대나무 숲이 보이며, 담 밖으로는 산골짜기 폭포가 이른 봄의 계절에 맞지 않게 굵은 줄기를 이루고 쏟아져 내려온다. 모든 경물들은 간략하게 절제된 필선과 담채로 묘사되어 초당안의 선비의 차분한 마음가짐을 반영하는 듯 하다. 화면의 상부에 ‘절매저구(折梅著句)’라는 문구가 반듯한 해서체로 쓰여 있고, 그 아래에 ‘기야(箕野)’라는 그의 호를 새긴 백문방운(白文方印)이 있다.
정수영 / 산수도, 지본담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정수영은 산수화, 특히 기행, 사생의 진경산수화를 많이 제작했는데, 이런 면모는 지리학 연구의 가풍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진경산수의 일반적인 경향인 겸재 정선 화풍의 양식화를 배제하고 독특한 구도, 갈필의 암준법과 담청색의 사용 등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문인화풍을 이루었다. 이 작품에는 크기가 비슷한 두 개의 산봉우리를 짙은 연무대(烟霧帶)로 분리하여 상하로 배치한 독특한 구도가 있다. 여러번 끊어지며 이어지는 가필로 모든 경물을 묘사하고 약간의 농담 변화가 있는 담청색을 군데군데 가하여 더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효과를 냈다. 인적이 없는 산골에서 물가의 정자에 홀로 앉아 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선비의 모습이 맑은 산수 묘사와 더불어 탈속의 분위기를 한층 더해준다. 관서는 없으나 ‘군방’이라는 정수영의 자를 새긴 백문방인이 있다. 왼편 상단에 다음과 같은 화제가 적혀 있다.
나무숲에 녹음 우거지고 / 철새들 소리가 달라지면 / 그게 또 너무나 좋아서 / 그 사람 자칭 태고적 / 사람이라고 한다네.
이경윤(李慶胤, 1545~1611) / 관폭도(觀瀑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중기의 사대부 화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수길(秀吉), 호는 낙파(駱坡) 또는 학록(鶴麓)이다. 그는 성종의 열한 번째 아들인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증손이다. 그의 동생인 이영윤과 아들 이징도 모두 그림과 글씨를 잘 하였다. 작은 폭의 산수인물화는 인물들의 고결한 품격이 돋보이고, 배경의 산수에서 당시에 많이 그려지던 절파 화풍을 보여준다. 대표작으로는 인물화첩 외에도 <탁족도>와 <산수도> 등 많은 작품이 있다. 당시에도 명성이 높았던 화가인 만큼 그의 작품이라 전해오는 그림이 많아 모두가 진품인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가 그림은 이경윤이 그린 10폭의 산수인물화첩 중 일곱번째 그림이다. 산수인물화첩에 실린 그림들은 모두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낚시, 음주, 탄금(彈琴), 바둑, 탐매(探梅), 초옥(草屋), 관폭(觀瀑), 관안(觀雁), 취적(吹笛), 탁족(濯足) 등 은일(隱逸) 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화면은 <관폭도>인데, 한 선비가 언덕에 앉아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화면전체를 가득채운 강, 폭포, 언덕 등의 산수를 배경 단정히 앉은 선비가 무심히 폭포를 바라보는 은일자의 삶을 나타내었다. 바위에 나타나는 먹의 농담(濃淡)와 갈대잎의 강한 선에서 절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시자를 데리고 온 한 선비가 폭포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구도가 매우 간단하다. 배경도 단순하다. 감상자가 서 있는 바위 곁에 대나무가 몇 그루 자랄 뿐 화면은 온통 폭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런데 ‘가득 채워져 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폭포를 그린 붓질은 ‘가득 채워져 있지 않다.’ 길게 떨어지는 폭포 한 줄기만을 그렸을 뿐 산과 주변에 대한 세부묘사는 전부 생략했다. 폭포도 그림자처럼 흔적만을 남겼을 뿐이다. 바닥에 떨어지는 폭포수의 끝부분을 아스라히 처리함으로써 주인공과 폭포와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사이를 폭포에서 떨어졌다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채우고 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하늘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보고 떨어지는 폭포수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엷은 먹을 우려낸 수증기는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가만 귀기울여보면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관폭도>는 여백의 미를 즐길 줄 아는 작품이다.
최북 필 영모도(崔北筆翎毛圖) /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최북(崔北, 1712~1760)은 조선 숙종, 영조 때의 화가로, 본관은 무주,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ㆍ유용(有用)ㆍ칠칠(七七), 호는 월성(月城)ㆍ성재(星齋)ㆍ기암(箕庵)ㆍ거기재(居基齋)ㆍ삼기재(三奇齋) 또는 호생관(毫生館)인데, 이름인 북(北)자를 반으로 쪼개서 자를 칠칠(七七)로 짓고, 호는 붓[毫] 하나로 먹고 산다[生]고 하여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했답니다.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훼(花卉), 괴석(怪石), 고목(枯木)을 두루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와 메추리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혹은 최순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필법이 대담하고 솔직하여 구애(拘碍)받은 곳이 없었으며 남화(南畵)의 거장인 심사정(沈師正)과 비길 만한 인물입니다.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으며 성질이 괴팍하여 기행(奇行)이 많았고 폭주가이며 여행을 즐겼습니다.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周遊),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외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일도 있습니다. 칠칠거사(七七居士)로 알려진 많은 일화(逸話)를 남긴 위인으로 시에도 뛰어났으며 49세로 서울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이 梅鳥圖는 매화나무의 굵고 짤막한 나무줄기가 화면의 위쪽으로 부터 내려오다가 오른쪽으로 급하게 구부러져 끊어지고 이 나무줄기로부터 몇 개의 작은 가지들이 꽃을 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수직으로 뻗어 내려간 가지에 고개를 틀어 균형을 잡으려는 듯 억지로 매달려 있는 새의 모습은 화면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 넣어 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거운 구성 요소가 화면 상반부에 몰려 있어 하반부의 대범한 여백이 긴장감을 어느 정도 이완시키고 여유를 찾아주는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메추라기 그림은 대개 一角構圖로 약간 경사진 지면에 한쪽으로 새를한두 마리 배치하고 갈대잎, 난초잎 또는 수선화 잎을 몇 개, 혹은 이 그림의 국화처럼 조그만 식물을 곁들여 둔채 새의 형태와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도록 합니다.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수록된 北宋의 화가 趙昌의 '순도 鶉圖 '나 徽宗皇帝에게 傳稱되어 오는 메추라기 그림들이 모두 이와 같은 구도를 보입니다. 최북이 그린 이 작품도 이와 같은 전형적인 구도와 화면구성 요소를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세밀한 공필의 메추라기와 몰골법으로 묘사된 갈대잎과 국화가 대조를 이루며 최북의 기량을 한 것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오른쪽의 여백을 향하여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메추라기의 시선을 따라 공간이 화면 밖까지 확대되는 효과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두 마리의 게와 수초가 서로 얽혀 화면의 중심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트러져 있는 담묵의 수초와, 한 마리는 담묵, 다른 한 마리는 농묵이 주조를 이루도록 묘사된 게들의 모습이 적절한 조화를 보여줍니다. 수초의 꾸브러진 잎과 게의 꾸브러진 다리가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몰골법의 호방한 필치를 보여 작은 그림이지만 힘이 가득 찬 인상을 줍니다. 화면의 왼쪽 아래 부분에 '崔北'이라는 주문방인과 '七七'이라는 白文方印이 연이어 찍혀 있습니다.
학림정 이경윤(鶴林正 李慶胤, 1545~1611) / 조옹도(釣翁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경윤은 조선왕조 9대 임금이신 成宗의 11번째 아들인 이관(李慣)의 종증손으로 宗室화가이다. 호는 낙파(駱坡), 낙촌(駱村), 학록(鶴麓)인데, 학림정(鶴林正)을 제수받아 號보다 정삼품에 해당하는 이 작호가 더 통용되고 있다. 조선중기에 선비화가들 간에 유행한 절파화법(浙派畵法)으로 산수인물도를 잘 그렸다. 총 10폭으로 구성된 이 화첩은 제6폭의 <설경도>를 제외 하고는 매 폭마다 소경산수를 배경으로 한두 명의 인물들이 화면 중앙에 포치(布置)되는 구도를 수묵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釣翁圖)은 이경은 筆 산수인물화첩<山水人物畵帖>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직접 쓴 관서와 연기도 없고 도장도 찍혀있지 않으나 이경윤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이경윤은 이영윤(李英胤), 이징(李澄) 등으로 이어지는 선비화가 집안을 대표하는 화가 였는데, 16세기 중엽부터 절파화풍을 배우고 익혀 개성이 강한 작품을 남겼다. 시원한 여백, 강한 농담묵(濃淡墨)의 대비, 시선을 끄는 인물 묘사, 억센 수지법(樹枝法)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경윤의 회화세계는 이 <산수인물첩>에서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이 조옹도(釣翁圖)는 수양버들 아래에서 낚시에 열중하고 있는 노인을 그린 것이다. 대각선 구도이면서도 인물은 화면의 가운데에 있다. 인물과 원경은 담묵으로 간략하게 그렸고, 앞쪽의 바위는 농묵으로 힘차게 그려냈다.
이경윤(李慶胤, 1545~1611) / 기려도(騎驢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이경윤 筆 『산수인물화첩(山水人物畵帖)』의 다섯 번째 그림이다. 나귀를 타고 다리를 막 건너가는 선비와 주인의 지팡이를 들고 그 뒤를 따라가는 어린 동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배경으로는 S자형으로 굽이쳐 흐르는 개울물을 그렸을 뿐 산은 없다. 조금은 힘들고 무거운 듯한 나귀의 모습과 나귀 등을 타고 가는 선비의 늘어진 어깨와 휜 등과 주인의 지팡이를 들고 따라가는 동자의 모습에서 처연함을 느끼게 한다.
이경윤(李慶胤, 1545~1611) /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학림정 이경윤은 조선 중기(1545-1611)의 화가로 동생 이영윤(李永胤) 또한 이름 난 화인이었고, 특히 서자인 이징(李澄, 號:虛舟)은 도화서 화원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친 화가였다. 그는 왕실의 종친으로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증손이며, 청성군(靑城君) 이걸(李傑)의 아들이다.
그가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찍부터 절파풍(浙派風)의 대가 김시(金)와 교유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특히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를 잘 그렸으며, 영모화(翎毛畵)와 동물화(動物畵) 등도 즐겨 그렸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 중기 절파풍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탁족이란 말은 글자그대로 발을 씻는다는 뜻인데 조선의 선비들은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강과 계곡에서 ‘탁족지유’의 풍류를 즐겼다. 조선 시대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유월조(六月條)에, “삼청동 남북 계곡에서 발 씻기 놀이를 한다.”(三淸洞……. 南北溪澗 爲濯足之遊) 는 기록이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가 당시의 풍속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아 탁족놀이가 일부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여름 풍속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일반 서민들에게 있어서 탁족놀이는 단순한 피서의 한 방법에 지나지 않았지만, 선비들에게 있어서는 피서의 차원을 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들이 실제로 즐겼던 피서 방법에는 ‘탁족’ 외에도 ‘물맞이’나 ‘목물하기’등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오직 ‘탁족지유(濯足之遊)’만을 소재로 그림으로 그리고 또 감상하기를 즐겼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선비들이 특별히‘탁족지유’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중국 고전인 《초사(楚辭)》의 내용과 관련이 깊다. 《초사(楚辭)》 어부편(漁父篇)을 보면 어부와 굴원(屈原) 사이의 문답을 서술한 마지막 부분에,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노를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것이라고 하면서 사라지니 다시 더불어 말을 하지 못했다.” (漁父莞爾而笑 鼓 而去 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遂去 不復與言)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부분을 특별히 〈어부가(漁父歌)〉, 또는 〈창랑가(滄浪歌)〉라 이름 지어 불렀는데, 이 노래에 나오는 ‘탁족(濯足)’과 ‘탁영(濯纓)’이라는 말을 특별한 의미로 새겼다.
<창랑가〉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맹자는,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하니, 이것은 물 스스로가 그런 사태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淸斯濯纓 濁斯濯足矣 自取之也) 라고 해석을 하였다.
그는 이것을 다시 인간의 삶의 태도에 비유하여 말하되,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욕되게 한 뒤에라야 남이 그를 모욕하고, 가문은 반드시 그 자신들이 파괴한 뒤에야 남이 그 가문을 파괴하고, 나라는 그 자신들이 망친 뒤에야 남이 그 나라를 토벌한다. 그러므로 태갑(太甲: 書經의 편명)에 ‘하늘이 지은 재(災)는 그래도 피할 수가 있으나, 자기가 지은 재는 모면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런 점을 두고 한 말이다.”
맹자는 〈창랑가〉의 의미를 행복이나 불행은 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처신 방법과 인격 수양 여부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던 것이다. 맹자다운 해석이지만 우리 선비들을 조금 다른 해석을 하였다.
이경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아주 험악한 시대를 살아왔던 인물이다. 전쟁으로 무수한 생명을 죽어 가는걸 보았고 실제로 먹을 게 없어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죽은 시체를 서로 뜯어 먹는 광경이 심심치 않게 이야기되는 사회는 분명 당시 성리학적 가치를 추구했던 선비에게는, 더욱이 자연과 벗 삼기를 좋아했던 이경윤에게는 충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확실히 깨달았던 이 경윤은 세상사는 데는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즉 이 풍진 세상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탁영탁족의 의미를 즉,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도의(道義)와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말함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다는 것은 도의가 무너진 어지러운 세상을 비유한 말이라고 했다.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것은 ‘세상이 올바를 때면 나아가 벼슬을 한다’는 뜻이요, ‘발을 씻는다’는 것은 ‘풍진에 찌든 세상을 백안시하고 은둔하며 고답을 추구한다’는 의미라 이해하는 것이다.
“천지소이능장차구자(天地所以能長且久者). 이기부자생(以期不自生) ”
하늘과 땅이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이 모든 만물을 낳고 길렀지만 사사롭게 만물에 개입하지 않듯, 인간도 자연의 질서를 본받아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겠다는, 무엇인가 깨달아야 되겠다는 욕망마저도 부질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탁족은 언제든지 강호(江湖)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선비의 이상향이자 선비 자신의 내면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옛 어른들은 더위를 이겨내면서도 우주와 세상의 진리,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 지식인의 참다운 책무에 대해 고민했다.
김식(金埴: 1579-1662) / 우도(牛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퇴촌(退村) 김식은 선비화가인데, 1606년에 진사가 되었고, 1635년에 원종어진 제작에 참여했으며 숭은전(崇恩殿) 묘례(廟禮)때 일자(一資)가 가해졌다. 벼슬은 찰방을 지냈으며 후년에는 선산(善山)에서 살았다. 그는 산수도 잘 그렸으나, 그를 유명하게 해준 것은 독특한 소 그림이다. 조선 중기의 가장 유명한 소 그림 전문화가였기 때문에 웬만한 소그림은 모두 그의 작품으로 불리어왔다.
그의 소 그림들은 할아버지 김제(金褆, 1524~1593)의 절파화풍(浙派畵風)과 영모화풍(翎毛畵風)을 토대로 간일한 산수를 배경으로 묘사되는 것이 상례인데, 음영(陰影)으로 표현된 소의 퉁퉁한 몸이나 엑스자형(X字形)의 주둥이, 달무리진 듯 선량한 눈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롭고 따뜻한 그림의 분위기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소그림들은 전형적인 한국적 특색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소 그림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특색들을 지니고 있다. 대표작으로 〈고목우도 枯木牛圖〉와 〈영모도〉 등이 있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 / 송하선인취생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筠管參差排鳳翅 月堂淒切勝龍吟 最宜輕動纖纖玉
醉送當觀灩灩金 緱嶺獨能征妙曲 嬴台相共吹清音
好將宮征陪歌扇 莫遣新聲鄭衛侵
(筠管參差排鳳翅 月堂凄切勝龍吟)
(균관삼차배봉시 월당처절승룡음)
(檀園)이라는 관서와 `사능(士能)이라는 백문방인이있다. 길고 짧은 대나무통 봉황이 날개를 편 것인가, 달빛들어찬 마루에(들려오는) 생황 소리는 용의 울음보다 더욱 처절하네. 라는 내용의 시가 적혀있다. 하늘로 치솟은 노송의 껍질이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굳이 용을 찾자면 그림의 위쪽을 보면 작은 가지 하나가 있는데, 영락없는 용의 머리이다. 용머리를 그리면서 나뭇가지인 양 슬쩍 지나간 단원의 재치인 것이다.
김홍도 나이 50세 전후하여 그려진 작품이며 禪적인 느낌이 든다. 생황(笙簧)이란 악기는 길고 짧은 17개의 대나무관을 박통에 꽂고 취구를 통해 호흡하며 지공을 개폐하는 방법으로 소리를 내는 중국에서 전해진 전통 악기이다. 생황을 잘부는 신선으로는 옥자진이 있으며 아마 단원 자신일런지도 모르겠다. 오른쪽 상단에 쓰여진 아름다운 제발(提跋)은 당나라 시인 라업(羅業)의 생황시 일부를 차용한 듯하다.
유덕장(柳德章, 1675~1756) / 묵죽도(墨竹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덕장(柳德章)[자(字) 자고(子固), 호(號) 수은(峀雲)ㆍ가산(茄山)]은 조선후기의 묵죽화가로서 벼슬은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는 조선중기의 이정(李霆)과 후기의 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꼽히고 있다. 우상부에 황강노절(黃岡老節)이라 묵서한 그의 통죽도를 이정의 통죽도와 비교하여보면 줄기의 배치나 잎사귀의 위치가 유사하여, 그가 이정의 묵죽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덕장의 왼쪽 대나무 줄기가 둥글게 꺾였으며 이정의 댓잎이 탄력성있고 유연하다면 유덕장의 것은 딱딱하고 날카로워진 변화를 보인다. 또한 대나무 줄기의 묵색이 의도적으로 진해지고 이정의 호형(弧形) 마디가 보다 직선화되어 자연스러움이 덜하다. 토파 표현도 변하여 절파의 잔영은 보이지 않고 단순한 윤곽에 대소의 세로점이 짝을 지어 찍혔다. 이처럼 유덕장의 묵죽화는 이정의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이정의 작품이 갖고 있는 여유로움과 생동감보다는 강인하고 견고한 분위기가 강조되어 있다.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1~1938) / 산수도(山水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허형은 소치 허련의 넷째 아들로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화업을 이어나갈 큰 아들 허은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허은의 호인(米山)을 물려받고 허련의 화필을 전수 받았다. 다산 정약용의 장남 정학연의 문하에서 시와 서를 배웠다. 1912년 강진으로 이주하였다가 1921년 목포에 정착하여 가난한 삶 속에서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아버지 허련의 재주를 그대로 이어 받아 특별히 독창적이지는 않으나 능숙한 필치를 구사하였다. 산수, 모란, 노송 등을 그렸으나 산수 보다는 사군자에 수작을 냈다.
허형의 화풍은 부드러운 붓 놀림으로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 구성과 수많은 미점으로 명암과 양감을 살려 포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두 아들 남농 허건과 임전 허림 형제를 통하여 자신의 예술혼을 꽃 피우게 하였으며 의제 허백련도 유년 시절 허형에게 그림을 배우는 등 가문의 화맥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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