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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목요일. - 갈림길에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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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갈림길에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께서 끝날까지 애쓰신다는 나눔을 어제 했는데
그 나눔을 하고 어제 내내 그리고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이런 반성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으로 이끄시려 이렇게 애쓰시는데 나는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런 반성을 하다 보니 이런 거창한 질문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 강의하러 정동에 가고,
내일 회의하러 지방에 가고,
모레 월례회를 하러 가고,
이렇게 매일 여기저기를 가는데 나는 진정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가다 보면
갈 데까지 갈 것이고,
갈 때까지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갈 것입니다.
그런데 갈 데까지 가고,
갈 때까지 갔는데 그곳이 엉뚱한 곳이고 낯선 곳이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럴 리 없습니다.
저는 지금 머리로는 갈 곳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안전하게 가려면, 부산 갈 때 경부선을 타듯이
아버지께 가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이신 아드님께 올라타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올라타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머리로가 아니라 실제로 올라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경부선은 안 타고 서울 시내 여기저기만 왔다 갔다 하듯
주님이라는 길을 올라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성찰도 해야 합니다.
곧 우리의 길에 대한 성찰과 함께 우리의 양식에 대한 성찰입니다.
가는 길뿐 아니라 가는 길에 먹을 양식도 진정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라고 하신 다음, 생명의 양식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당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씀인데
가나안까지 가는 길에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하느님 나라 가는 길에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몸이요,
미사로 치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매일 듣지 않으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것이고,
성체를 매일 영하지 않으면 가는 길에 힘을 잃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유튜브만 보면 길을 잃을 것이고,
성체를 영하지 않고 맛집 기행만 하면 힘을 잃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길도 찾고 힘도 얻는 길을 갈 것인가,
길도 잃고 힘도 잃는 길을 갈 것인가,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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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로마제국의 정치인인 세네카는 ‘모든 바보의 한 가지 공통점은 항상 살아갈 준비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고,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는 ‘나는 다른 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도 할 수 있다는 주문을 끊임없이 왼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명언을 읽으면서 얼마나 미루지 않고 지금 즉시 행동했는가를 떠올려 봅니다. 사실 미루지 않고 25년 가까이 해 온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글 쓰기입니다. 의무감을 느끼기 위해 매일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써왔습니다. 우연히 2,000년 초반에 썼던 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25년을 계속해서 쓰다 보니 지금 역시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25년 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루지 않고 지금 행동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더구나 행동해야 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미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루는 것은 지금 훌륭해질 수도 있는데, 굳이 내일 훌륭해지기로 마음먹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은 절대로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윤택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자기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주님의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했다고 해서 지금 특별한 무엇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는 지금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없는데, 굳이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나의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양식이라며,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통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나눠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어떤 형제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부님,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성당 나올 시간이 없습니다. 성당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주말에는 자기 취미 활동하느라 시간이 없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충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지만, 자기 취미 활동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나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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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내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뿐이다(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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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군중들은 그분을 두고 수군거렸습니다(요한 6,4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살아있는 빵”이란 당신께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생명의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살아있는 활동 중인 빵’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동시에 “살리는 빵”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당신의 살”, 곧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진 살’입니다. 먹혀서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그를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고,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는 ‘살’입니다.
이는 당신의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를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신비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단지 ‘죽지 않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드높여지고 영광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탄하올 신비인지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이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인 것입니다. 사실, “먹다”(τρωγω, ‘씹다, 씹어서 부수다’)라는 동사는 인간이 음식을 씹을 때 사용하는 동사가 아니라, 초식동물이 풀을 먹을 때, ‘새싹을 입으로 뜯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초식동물이 풀을 씹을 때는 입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의 근육을 연계해 온 몸이 함께 움직여 씹듯이, 말씀을 온 몸으로 음미하며 먹는 것, 곧 삶으로 ‘실행’하는 것, ‘실행’으로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를르의 체사리우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들끓었듯이 구더기가 들끓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바로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고 살아갑니다. 바로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요한 6,51)이라 하셨으니, 동시에 그 살을 먹은 우리 역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 주시오니,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제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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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살아있는 생명의 빵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었지만,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속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그때 이미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믿음은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응답을 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한 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부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오시는 아드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시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살아있는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고해성사는 영혼과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시켜 주는 매우 훌륭한 방법입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모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셨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별로 할 일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우 할 일이 많은 사람도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많이 영성체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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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책길에 신기한 현상을 봤습니다. 둥근 보름달이 서쪽 하늘에 환하게 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쪽 하늘에 여명이 생기면서 점차 밝아졌습니다. 서쪽 하늘에 있던 둥근 달이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마침내 태양이 붉게 떠오르자, 서쪽 하늘에 있던 둥근 달은 이내 사라졌습니다. 자연현상이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그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6월 24일입니다. 이는 절기상 하지입니다. 하지까지는 낮이 길어지지만, 하지가 지나면 낮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25일입니다. 절기상 동지입니다. 동지까지는 낮이 짧아지지만, 동지가 지나면서 낮은 점차 길어집니다. 둥근 달이 태양이 떠오르자, 자리를 양보했던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오시자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셨다고 하면서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달과 태양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태양이 주는 강렬한 힘도 좋지만, 달빛이 주는 은은한 감성도 좋습니다.
한국에서 천만 명이 넘게 보았다는 ‘파묘(破墓)’를 댈러스에서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월광에 물드는 신화가 생각났습니다. 어릴 때, 동네에 ‘무당집’이 있었습니다. 무당집 아들이 친구였습니다. 친구 집에 가면 굿을 하는 것을 보았고, 먹을 것도 많았습니다. 벌써 50년이 넘은 기억입니다. 친구 집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여름에도 시원한 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회에 자리를 내어 주었지만, 예전에는 동네에 무당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가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풀이하였습니다. 길과 복은 청하고, 흉 화는 멀리하도록 굿판을 벌였습니다. 그것은 불교와 유교가 채워주지 못했던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내는 굿판이었습니다. 태양과 달, 바위와 나무, 곰과 호랑이, 혼과 영은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던 월광에 물들던 신화였습니다. 영화 파묘는 무당과 지관이 함께 어우러져 신명 나는 굿판을 벌이는 내용입니다. 그 서사에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있고,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의 사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의 옹골찬 연기가 있습니다. 디지털과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태양에 바래진 역사와 월광에 물든 신화가 어깨동무하고 있었습니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면 결국 남는 게 없습니다. 양파는 껍질을 벗기는 것보다 요리해서 음식의 재료로 쓰는 것입니다. 종교는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시작과 끝을 파악하는 것보다 지치고 힘든 우리의 삶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증명하고, 해석할 필요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교회의 사도와 공동체가 온몸으로 증언하고, 살아냈던 신앙의 신비입니다.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접근했던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직접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가 직접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만져봐야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저는 어머니가 저를 낳은 모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낳으신 어머니를 믿습니다. 어머니의 젓을 먹었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2000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미 햇빛에 바래진 역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교회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모든 걸 버렸던 신앙인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던 신앙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작은 물방울도 시간만 있으면 큰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길을 찾으면 주님께서는 능히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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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침 식사를 하시나요? 저는 되도록 아침 식사하려 합니다. 어릴적부터 아침 식사를 했던 습관도 있지만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저는 어김 없이 식사했습니다. 내일도 식사할 것입니다. 어제 먹은 제 식사 즉 음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맞습니다. 입을 통해 배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무의미하게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제 안으로 들어가 제게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되어주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살게 해 준 것입니다. 음식은 제게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고 죽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빵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에게 생명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빵은 자신의 죽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어야지만 누군가에게 생명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빵입니다. 주님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영원의 힘을 지니신 살아있는 빵께서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누군가에게 생명이 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설령 내가 죽음과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한데도 말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거저 받았으니, 우리도 나눠줄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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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시중한디?
이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기기를 희망하는 것이 전부다.
-빈스 룸바르디-
결과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결과를 얻기까지의 동기와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한 마음은 다음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 결과보다는 과정을 걷고 있는
우리 마음을 봐주세요.
희망차게 걷고 있는지, 억지로 끌려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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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꽃’같은 삶
-영원한 삶-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하셨네.
알렐루야!”(입당송;탈출 15,1-2참조)
온 누리가 파스카의 봄꽃들로 가득한 파스카의 축제시기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할 바, 파스카의 꿈, 파스카의 삶입니다. 파스카의 꽃같은 삶입니다. 늘 새롭게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삶이 바로 영원한 삶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 늘 함께 할 때 바로 영원한 삶, 파스카의 꽃같은 삶입니다. 예전에 써놨던 ‘꽃’이란 시의 발견인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꽃마다
그리도 반갑고 아름다운 건
잠시 동안 폈다지기 때문이다
일년내내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인생이
그리도 반갑고 아름다운 건
잠시 동안 살다 떠나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는 인생이라면
누가 반갑다 하겠는가?
아,
꽃지므로 꽃 좋은 줄 알겠다
죽음 있어 삶이 선물인줄 알겠다
짧은 인생
날마다 파스카의 꽃처럼,
반갑고 아름답게 살 일이다”-2005.4
2005년 수도공동체와 제 자신이 참 곤경중에 처해 있을 때 수시로 선물같은 시들이 저를 위로하고 격려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개나리, 배꽃, 수선화...등 봄꽃들이 지자 라일락, 영산홍이 뒤를 이어 만발합니다. 파스카의 축제시기 파스카의 꽃처럼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파스카의 꽃같은 삶,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께 보내신,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살라 보내신, 하느님의 선물같은 우리 믿는 이들의 고귀한 신원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우리의 고귀한 신원이 밝혀집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께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기에 나를 모르고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방황하다 아까운 인생, 허망하게 끝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아 참나를 아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평생 사랑하고 공부해야할 하느님이요 예수님임이요 나임을 깨닫습니다.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참나를 알아가는 여정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닮아갈 때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의 삶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어 우리의 구원이 생명의 빵이신 당신께 있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로 예수님과 함께 하라 주어진 참삶임을 깨달을 때 저절로 사랑의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인생들이요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참삶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의 제자이자 참사람으로 하느님이 보내신 선교사의 빛나는 모델이 혜성같이 등장한 사도행전의 필리포스입니다.
하느님의 선물, 에티오피아의 여왕 칸다케의 내시를 이끌어 예수님께 인도하는 필리포스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내시에게 성경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내시를 최종 목적지인 예수님께 성공적으로 안내하는 선교사의 모범 필리포스입니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내시의 자발적 청에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고, 이어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고, 필리포스는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예수님께 보낸 하느님의 선물들임을 깨달을 것이며 참된 선교사들이라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데 온힘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내시는 필리포스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길을 갑니다. 복음선포자이자 주님의 제자, 주님 파스카의 꽃인 필리포스를 만나 예수님께 인도되어 주님 파스카의 꽃같은 삶을 살게 된 내시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주신 제자중 으뜸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가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임을 엄숙한 선거 과정을 통해 새롭게, 깊이 깨닫습니다. 선거현장의 묘사가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2013년 3월13일, 전 세계가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의 굴뚝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경당 안의 풍경들이다. 추기경들은 차례로 자기 자리에서 투표용지에 교황 후보의 이름을 적은 다음 네 겹으로 접어 손가락에 꼽아들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제단 앞으로 나아간다.
인류의 종말을 선고 내리려고 오른팔을 높이 쳐든 그리스도의 눈이 선거인을 내려다보는 그림이다. 제단에는 투표참관인 추기경 2명이 서있었고, 제대 위에는 접시로 덮은 투표함이 놓여 있다. 제대 앞에서 투표자는 모두가 듣게 큰 소리로 선서한다.
“나는 나를 심판하실 주 그리스도를 증인으로 불러 나의 투표가 하느님 대전에 마땅히 선출되어야 할 분에게 갔음을 선서합니다.”
이어서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고 제대에 무릎을 꿇어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간다.”(성염 칼럼, 가톨릭프레스 2017.3.6.)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한 교황선거 장면인지요. 민심이 천심입니다. 추기경들의 진실한 마음이 하느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중에서 교황직무에 마땅한 이를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잇는 주님의 제자를 뽑는 엄중한 선거이기에 선거결과에는 누구나 승복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하느님의 선물답게, 예수님의 제자답게, 영원한 삶을 살게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에 생기를 주시고,
우리 발이 흔들리지 않게 하셨네.”(시편66,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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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되고 싶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세상을
먹고 사는
사람보다
세상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참으로
되고 싶다
우리 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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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
직무를 맡을 자격이 없는 자들
거룩한 직무에 멋대로 들어서고, 성전에 접근할 자격을 갖추기도 전에 성소부터 차지하려 하는 그 모든 자는 한심합니다. 그들은 그 지위를 덕의 본보기가 아니라 생계 수단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직무가 아니라 절대 권한으로 여기는 듯 거룩한 제단 주위에서 무리하게 요구하고 주제넘게 나섭니다. 사실 그들의 수가 그들이 다스리는 이들 수보다 많을 정도입니다...
이런 불행한 상황이 계속되다가는 머지않아 그들에게는 다스릴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는 대신 저마다 가르치려 들고, 약속 말씀대로 모두가 예언하려 들 것입니다.(참조: 민수 11,29; 1코린 14,2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이 설교는 대단히 여성적이다. 아마도 이 설교는 베긴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액카르트는 베긴회 회원들과 다른 여성들에게 귀를 기울여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이 설교에서 그는 하느님을 일컬어 몸푼 여인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이미지를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사 42,14 참조). 하느님은 몸 폼 여인처럼 분만용 침대 위에 누워 있다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은 계속해서 낳고 싶어 한다. 하느님이 분만용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하는 일마다 아들을 또다시 낳기 위해서다. 하느님은 아버지일 뿐 아니라 어머니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만물의 어버이, 모든 존재의 해산 어미다. 하느님의 일은 존재를 낳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마리아와 레아와 라헬을 본받으라고 말한다.(155)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언제나 새로운 희생을 발명하며
동네 어떤 아주머니가 어느 날 양떼를 위해 좋은 목초가 많이 난 목장을 빌려 주겠다고 루치아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 목장은 먼 곳에 있었다. 때는 한여름이었는데 그 부근에는 웅덩이가 있어서 양떼에게 물도 먹일 수 있고 또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나무 그늘도 있어서 아이들이 그 그늘에서 낮잠도 잘 수 있을 거라는 말에 마리아 로사는 감사하며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가는 중턱에서 그 거지 아이를 만나게 되어 히야친타는 전에 하듯이 도시락을 주었다. 하늘은 푸르고 햇볕은 뜨겁게 내리쪼여 메마른 이 광야를 태우는 듯했다. 몹시 갈증이 났으나 물 한 모금 마실 데가 없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 희생을 기쁘게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바쳤으나 정오 때가 되자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 작은 마을이 있어서 루치아는 물을 조금 얻으러 가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마침내 한 집에 가서 사정을 했다. 아주머니가 나와서 친절하게 물통에 물을 넣어 주면서 한 조각의 빵까지 주었다. 공복이었던 세 아이는 빵을 나누어 먹고, 그리고 프란치스코에게 물을 먼저 건네 주었다.
“난 마시지 않겠어!" 하고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왜?"
“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고통을 받고 싶어."
“히야친타는 마시지?"
“나도 희생할 테야."
루치아는 물을 바위 움푹한 데 따라서 양들에게 먹이고 물통을 아주머니께 돌려 드렸다.
그러나 숨가쁜 더위는 조금도 가셔지지 않았고 매미와 귀뚜라미는 옆에 있는 시궁창같은 못의 개구리와 함께 서로 경쟁하듯 시끄럽게 울어 대었다.(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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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의 뜻과 생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와 관련된 아름다운 예를 한 가지 소개합니다.
에티오피아의 관리로서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고관은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야 하였던 필리포스에게 “성령께서 ……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라고 지시하시는데, 이때 ‘바싹 다가서라’라고 옮긴 그리스 말 동사 ‘콜라오’는 매우 가까이에서 마치 하나가 되는 것처럼 바짝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답답해하는 관리에게, 바로 곁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알아듣다’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이론적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고 그 현실을 굳게 믿음으로써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내재화하는 ‘구원적 앎’을 뜻합니다.
필리포스의 설명으로 구원적 앎을 얻게 된 관리는 기뻐하며 말합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그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면, 살아가는 데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으로 접근하지 않을 때 매우 심각한 오류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말씀을 정보와 지식으로만 접근하였기에 끝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성경 연구가 그저 이해되지 않는 고대의 문장을 붙들고 있는, 억지스럽거나 고단한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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