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 선생의 《이야기 한국 불교사》
집사람이 한 달에도 몇 번씩 절에 가서 무엇을 빌고 오는지 궁금해서일까? 아니면 그냥 단순한 호기심 때문일까? 불교가 내게, 아니 우리에게 끼친 영향이 무엇이며 내 생활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 생각해 보기 위해서 이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간단히 쉽게 생각하면 불교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고 하니 나쁠 것이야 있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불교 정신과 달리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시대정신을 외면하거나, 세속과 타협해 탐욕에 빠지거나, 세력 확장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면서 민중의 삶에는 관심도 없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한국 불교사의 이면’을 살피기 위해 저자는 이 책을 썼다고 책머리에서 말했다.
저자 이이화 선생은 잘 알려진 사람으로 그는 작년 2020년에 타개했지만 그의 저서들은 명저로 남아 있다. 『한국사 이야기』(22권), 『인물로 읽는 한국사』(10권),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전봉준 혁명의 기록』,『허균의 생각』, 『위대한 봄을 만나다』, 『민란의 시대』등.
오늘날 세계 곳곳에는 현실의 모순으로 고통받는 민중이 늘고, 종교·민족·지역·계층·빈부갈등 등으로 쉬는 날이 없이 대립과 전쟁과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 현실은 어떤가? 이러한 시대에 한국불교의 전통은 하나의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한국불교는 고통받는 민중에 다가가야 하고,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평화와 공존,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물론 민족통일과 평화운동에도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저자가 본 한국불교의 나아갈 방향이다.
고구려의 왕들은 직접 전장에 나가 군사를 지휘했다. 고국원왕은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고, 어떤 왕은 적군이 보낸 자객의 손에, 혹은 내부반란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왕은 지방세력의 발호를 막고, 조세권·부역권, 형벌권을 엄격히 하기 위해 왕권강화에 힘을 모아야 했다. 371년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형벌권을 기초로 성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했다.
그 무렵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를 차지한 흉노족 부견(符堅)은 진(秦)나라를 세우고 장안을 수도로 하여, 고구려와 우호를 다지고자 사신을 보냈는데, 382년 고구려에 도착한 사신 속에는 순도(順道)라는 승려가 있었다. 그는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왔다. 이때는 ‘구마라집’에 의해 번역된 『법화경』같은 경전이 없었으므로, 고승 도안(道安)이 요약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등을 가져왔을 것이다.“《삼국사기》에는 순도가 전진에서 왔다”고 하였으나 “《해동고승전》에는 순도가 동진(東晉)에서 왔다”고 하여 차이가 있다.
그로부터 2년 뒤 전진과 대립 관계에 있던 동진에서 아도(阿道)가 왔다. 아도는 인도사람이라는 설, 오나라 사람이라는 설, 고구려 사람으로 위나라에서 수학한 뒤 돌아왔다는 설 등이 있으나, 그가 동진에서 왔다면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동진에서 승려를 파견한 것일 것이다. 고구려는 ‘초문사’라는 절을 짓고 순도가, ‘아불란사’에는 아도가 거처하게 하는 등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이 부분도 “《삼국유사》는 순도가 처음 불법을 전하고 아도가 절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최치원이 지은 지증도헌(智證道憲-봉암사 지증대사)의 비문에는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이는 담시(曇始)”라고 하는 등 차이를 보이는데, 우리 역사는 《삼국유사》도 거짓이 아니라고 보고 이대로 가르치고 있다. 후한 시대에 인도 승려가 고구려에 왔다는 연대로도 중국보다 305년 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고, 순도가 고구려에 올 무렵에 소수림왕이 태학을 세워 유교 정전을 가르친 기록으로 미루어 불교와 함께 선진문물을 수용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12년 뒤 백제도 불교를 수용할 의사를 보이자 동진의 효무제(孝武帝)는 망설임 없이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를 백제로 보냈다. 이는 동진이 전진과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었던 것으로, ‘마라난타’에 대해서는 ‘위험한 곳에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는데 인연이 있으면 아무리 멀어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해동고승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가 백제로 가겠다고 자원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라난타가 배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백제 침류왕은 그를 마중하고 극진히 대접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8년 뒤 아신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불교를 백제 국교로 삼았다. 이렇듯 고구려와 백제는 별다른 저항 없이 불교를 수용하고 승인했다.
하지만 신라는 달랐다. 400년 신라의 도움 요청으로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대군이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왜와 가야를 정벌했는데, 그 뒤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광개토태왕을 이은 아들 장수왕은 더욱 강력한 남진정책을 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신라를 병탄해 버리려고 했다. 이에 신라는 연달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복속 의사를 전했는데, 이로 인해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활발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불교를 조용히 수용한 것과 달리, 신라는 여전히 샤머니즘 중심의 정치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한 사람의 진객(珍客)이 신라에 들어왔는데, 그의 이름은 묵호자(墨胡子)로 인도 승려였다. ‘까무잡잡한 오랑캐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일선군(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 토굴을 파고 지냈다. 모례는 이름에서 ‘절’이라는 이름이 전해졌다고 하고, 《삼국유사》는 439년(눌지왕23)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옷감, 불경, 불상 그리고 향물(鄕物)을 보냈다고 했는데, 양나라는 중국 남쪽에서 일어나 주변국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신라에도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한 67년 뒤, 신라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말이다.
514년 왕위에 오른 23대 법흥왕은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율령을 반포하고, 관복을 통일하고, 가야와 혼인 관계를 맺으며, 양나라와도 수교했다. 하지만 민간에 불교가 전승되고 있었으나 왕실과 귀족은 이를 외면하고 여전히 무당을 받들었다. 부당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신당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이를 관리하면서 지배세력과 끈을 대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 제사를 받들며 지배강화 수단으로 삼았다. 이때까지 제정일치 시대의 부족장의 잔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법흥왕은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을 의지가 있었으나 이를 실천하지는 못했다.
이때 사인(舍人) 벼슬을 하며 왕의 수발을 들던 젊은 이차돈(異次頓)이 왕의 마음을 알고, 무속의 터전인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베어버렸는데, 당산목을 벤다는 것은 무속파와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경주 한가운데 있다가 폐사된 흥륜사(興輪寺)를 다시 설립하겠다고 하자 비난이 쏟아졌다. 법흥왕은 군신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다. 왕이 말했다.
“성스런 조상 미추왕께서 아도와 더불어 불교를 펴려고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지 않았소. 짐이 매우 통탄스럽게 여기오. 이제 가람을 크게 세워 불교를 중흥시켜 선왕의 공렬을 따르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신하들은 연이은 흉년에 이웃 나라들이 국경을 침범하니 백성을 괴롭혀 쓸데없이 집을 짓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자, 왕은 탄식하며 “신하들이 거슬려 따르지 않으니 누가 묘법을 내어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칠 수 있겠는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곁에서 이 말을 들은 이차돈이 자신이 천경림에 절을 지으라는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전달하면 신하들이 반대할 것이니 그때 왕이 “내가 그런 분부를 내린 적이 없다. 누가 이런 거짓을 꾸몄느냐?”고 하면 신하들이 이차돈에게 죄 주라고 할 것이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목을 베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변이 일어나고 이를 본 신하들이 다시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왕과 이차돈이 짜고 일을 벌였다.
결국 이차돈은 형장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처님이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나리라”라고 외쳤다. 과연 그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피가 수십 발 높이까지 치솟았고, 머리는 북쪽으로 날아가 경주 외곽 금강산 정상에 떨어졌다. 햇빛이 사라져 어두워진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져 내렸으며 땅이 크게 울렸다. 신하들이 두려워하면서 곡을 했다. 이차돈의 머리를 금강산 서쪽에 묻고 순교를 기리는 백율사(栢栗寺)를 지었다. 법흥왕과 신하들은 “지금부터 부처를 받들고 스님에 귀의하리. 맹세를 어기면 밝으신 신명의 죽임이 있으리로다”고 맹세했다. 법흥왕은 살생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고, 일연은 《삼국유사》에 “이 임금이 없었다면 이 신하가 없었을 것이요. 이 신하가 없었더라면 이런 공업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이차돈의 순교비는 817년(현덕왕9)에 만들어져 백율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비에는 이차돈의 목에서 흰 젖이 뿜어져 나오고 땅이 흔들리며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는 모습은 새겨져 있으나 멀리 날아갔다는 머리는 그 옆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옆에 “목 베었을 때 벤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색깔이 우유와 같이 희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순교 내용을 모두 다 새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아주 자세히 순교 과정을 과장되게 미화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이차돈의 순교내력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윤색되고 미화되었을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고, 이후 아무런 제약 없이 절을 지을 수 있었다. 고려 때 승려 각훈(覺訓)이 지은 《해동고승전》* 에는 법흥왕은 아무 반대도 받지 않고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흥륜사〉를 지었다고 했다. 그리고 왕위를 물려준 뒤 출가하여 이 절에 머물렀는데, 그의 불명은 법운(法雲), 자는 법공(法空)이라고 했다. 왕비도 출가하여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흥륜사는 진흥왕 때 창건되었고 법흥왕이 아니라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불명을 법운이라고 하고, 왕비와 같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했다. 이는 진흥왕의 사적을 법흥왕으로 혼동했는지? 진흥왕의 사적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법흥왕을 높이려고 조작한 것인지? 후세의 우리가 함부로 제단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무튼 법흥왕과 진흥왕은 불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창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해동고승전 : 고려시대 고승 각훈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불교 관련 인물 서적이다. 각훈은 해동고승전을 집필하여 불교가 전래된 이후 있었던 여러 승려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해동고승전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고승전이다.
고려 무신정변(1170) 이후 사회적 혼란과 몽골의 침략으로 전통문화와 민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다양한 역사책이 편찬되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동명왕 주몽에 대한 영웅 서사시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불교사 외에 고대설화 등을 정리하여 전통문화를 보여주고, 단군을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 처음 수록하였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도 중국사와 한국사를 병행하여 서술하면서 한국사가 단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왕권을 강화한다는 것은 민중의 삶을 고단하게 하는 것이고, 병고에, 수탈에, 기아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현세에서 낙토를 기대하고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극락왕생을 원하면서 아미타불을 염송했는데, 이를 ‘염불사상’이라고 하고, 염불종·정토종이 생겼다. 신라 전설에 어느 승려가 염불을 열심히 한 끝에 극락왕생했다, 어느 계집종이 쉼없이 염불한 끝에 정토에 현신했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전한다.
정토신앙은 귀족은 물론 노비에게도 유행했는데, 현세에서 부귀를 누린 귀족은 죽어서도 극락세계에서 영화로운 삶을 연장하고 싶었고, 노비들은 현세에 찌든 삶에서 벗어나 내세에는 극락세계에서 잘살아보겠다는 염원으로 아미타불을 신봉했다. 절에는 아미타불을 미타전에 모시고 신도들을 끌어들였다.
지금은 그렇게 성행하지 않는 것 같은 밀교(密敎)가 신라 후대에는 널리 퍼져 있었는데 ‘비밀스런 가르침’이라는 밀교는‘진언종(眞言宗)’또는‘밀종’이라고 부른다. 진언은 범어 만트라(mantra)를 한역한 것으로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말’이라는 뜻이다. 진언은 방편이 되기 때문에 ‘다라니(dharani)’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신성한 어구로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밀스런 가르침이라고 한 것이다.
원래 대일여래(大日如來)는 법신불(法身佛)이어서 응신불(應身佛)인 석가여래와 구분된다. 응신불의 설법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데 비해, 법신불의 설법은 중생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다. 중생이 알아듣지 못해도 읽고 수행하면 중생이 이익을 보게 된다고 한다. 이는 부모라는 범부의 육신을 빌어 태어나 금생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밀교가 아닌 종파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신라에 밀교를 처음 전한 이는 635년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명랑(明朗)이었다. 그리고 665년 중국 밀교의 종주로 불리는 삼장(三藏)의 제자 혜통(慧通)이 신라로 돌아와 이것을 널리 전파했다. 우리가 잘 아는 혜초(慧超)는 당나라에서 불법을 공부하다가 인도승 금강지(金剛智)와 인도로 갔다가 4년 뒤 당나라로 돌아와 금강지와 함께 밀교경전인 『유마경』을 번역하다가 죽었다. 그의 인도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이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되어 더욱 유명해지고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보통 한 절 안에는 석가모니를 모시는 ‘대웅전’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약사여래를 모시는 ‘약사전’이 있다. 게다가 토착 신을 모신‘산신각’과 ‘칠성각’도 있는데, 이것은 다양한 대중의 신앙 형태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토착 신과의 조화는 한국불교 전통이 되고 있다.
신라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불국사와 석굴암, 성덕대왕 신종을 보자. 불국사와 석굴암은 귀족 출신인 김대성이 현생과 전생의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원력으로 세운 것인데, 불국은 극락정토를 뜻한다. 경내에 다보탑과 석가탑을 조성할 때는 백제 석공들이 동원되면서 백제 양식이 가미되어 완숙미를 보여주고, 석굴암은 한층 더 기술적 완숙미를 보여주고 완벽한 기하학적 비율까지 적용했다. 따라서 석굴암은 불교 설화까지 수렴하는 종합 불교예술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종(鐘)은 중생을 깨우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상원사 동종은 구리 10만 근, 황룡사 종은 구리 31만 근(몽골의 침입으로 유실), 봉덕사 성덕대왕 신종은 구리 13만 근으로 만들었는데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이 종은 애잔한 전설까지 담겨있다. 이는 종을 만드는데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이 따랐다는 것으로, 지배자가 시주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갈취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신도들은 즐거운 신심으로 내세를 위해 불사에 동참했던 것으로, 이렇듯 신라불교는 이율배반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흔히 참선이라고 하는 선(禪)을 중국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전한 이는 달마(達摩)다. 그는 470년 소림사에서 면벽수행(面壁修行) 9년을 하였다. 선은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精慮) 등으로 번역되는데, 선이 중국에 전해진 뒤, 7세기 말 남종(南宗)을 일으킨 혜능(惠能)과 북종을 일으킨 신수(神秀)에 의해 발전되고, 이후 임제종·법안종·조동종 등이 창시되었고 유교의 성리학과 더불어 심학(心學)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8세기 중엽 지리산 언저리에 창건된 단속사(斷俗寺)창건비에 ‘선지식들에게 남보다 먼저 헤아린다면 손가락을 꺾어놓고 달을 찾으라고 하거나 달걀을 깨뜨리고서 새벽을 알리게 울라고 시킬리가 있겠는가’라고 새겨놓았는데, 이는 문자를 세우지 않고, 화두를 통해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종에서는 수많은 불경을 읽고 터득해야 하는 것으로 석가가 남긴 8만 대장경으로 승려들은 글자 하나하나를 놓고 끝없는 논쟁을 벌였다. 이로서 재가 불자들은 조용히 앉아 불경을 외거나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여가가 없으니 화두를 가지고 깨우침을 얻는다는 선정(禪定-속세를 끊고 삼매경에 듬)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9세기 후반에 교종사찰에서 벗어나 선종 사찰이 독자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무염이 주석하던 보령 성주사에는 한때 2,000명의 신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선종 사찰은 자구책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절을 짓기 시작했으나, 몰락한 왕족과 부유한 평민, 중앙정부에 반감을 가진 지방호족들이 적극 도왔고 기술자들도 흔쾌히 불사에 동참했다. 상계사, 성주사 등은 모두 이렇게 조성된 도량이다. 그중에 ‘선문(禪門)’이라 부른 아홉 개 사찰이 두드러졌는데 ‘실상산 실상사(남원)’‘가지산 보림산(장흥)’ ‘사굴산 굴산사(강릉)’‘동리산 태안사(곡성)’‘성주산 성주사(보령)’ ‘사자산 흥령사(현 법흥사-영월)’‘희양산 봉암사(문경)’‘봉림산 봉림사(창원)’등이 그것이다. 가장 늦게 일어난 해주 광조사도 크게 번창했고 범일국사가 개조한 사굴산 선문, 무염이 주석한 성주사, 도선이 주석한 동리산 선문도 신라 후기에 영향을 주었다. 가지산 선문을 개조한 도의는 오늘날 조계종의 종조로 불린다.
9산 선문이 일어난 뒤에는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는데, 선종이 사상적 측면을 강조한데 반해, 미륵을 받드는 사람들은 단순한 신앙에 치중하기 때문이었다. 신라 중기는 정토신앙과 관음신앙이 미륵신앙을 앞질렀으나 하대로 오면서 뒤바뀐 것이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미륵에 쏠리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미래에 미륵이 출현하면 교통과 차별은 사라진다고 믿은 때문으로 미륵은 당초 석가모니 제자였으나 석가모니보다 먼저 입멸했다. 입멸하기 전 석가모니로부터 미래 주세불(主世佛)이 되라는 예기(豫記)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도솔천에 올라가 이후 56억 7천만 년 뒤 성불하여 현세로 내려온다고 한다. 성불하기 전에는 ‘미륵보살’이라고 부르고, ‘자시(慈氏)’라고 한자는 번역했다.
경주 남산에는 절터 150곳, 불상 130여 채, 석탑 100여 기, 석등 20여 기 등 많은 불교 유물이 발견되는데, 바위가 있는 곳에는 모조리 불상을 새겼고, 빈터에는 절을 짓거나, 탑을 세운 셈이었다. 남산리 석탑은 석가탑을 흉내 내었고, 미륵곡 석불은 석굴암 불상을 닮았다. 이 같은 모방은 이름 없는 민중의 손에 의해 조성 된 것으로 칠불암 4면 석불도 그렇지만 용장사에는 석가불이라고도, 미륵불이라고도 하는 불상이 있는데, 아예 그 골을 미륵곡이라 부른다. 미륵불이 있는 곳은 민중의 안식처로 신라 사람들은 남산을 용화회상이 깃든 곳으로, 재앙을 물리쳐 주는 신앙처로 여겼던 것이다. 불국사와 황룡사가 왕실 귀족의 차지였다면, 남산은 민중들의 기도처였다. 승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미륵의 화신으로 믿고 용화세계로 올라갔다고 신도들에게 가르쳤다. 민중들은 미륵 앞에서 까다로운 예불 절차도 필요하지 않았고, 진언을 외우지도, 경의 가르침을 몰라도 되었다. 교종이니 선종이니 따질 이유도 없었다. 그저 두 손 모아 자신의 소망을 빌면 되었다.
지금까지 신라 시대 이전의 불교를 보았다. 그렇다면 고려 시대 불교는 어땠을까? 고려는 불교와 유교를 동시에 인정했다. 국가이념의 정신적 역할은 불교가, 정치와 교화는 유교가 담당하는 통치 철학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승려와 유학도가 충돌할 소지를 안고 있었으나, 4대 광종은 과거제를 실시하고, 승려에게도 자격시험을 보게 했는데 시험에 합격하면 대선,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라는 직위를 주었고, 교종에서는 수좌, 승통, 선종에서는 선사, 대선사라는 칭호를 주었다.
‘불사를 함부로 벌이지 말라’고 한 아버지 왕건의 유훈을 지키지 않고 전국 곳곳에 절을 짓고, 팔관회와 연등회를 확대하여 폐단이 커졌는데, 982년 송나라에서 돌아온 최승로가 광종을 비판하면서 “부처를 너무 믿어 늘 거행하는 재齋가 많았는데도 별도로 기원하는 불사를 적지 않게 벌였습니다. 오로지 복福과 수壽만을 구하고, 기도에만 의지하며 제한 있는 재물을 다 써서 한이 없는 인연을 맺으며, 지극히 높은 몸을 스스로 낮추어 작은 선善 베풀기를 좋아했습니다. 잔치를 벌이고, 놀이하는 경우에 극도로 사치스럽게 했으며, 눈앞에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을 두고 불법의 힘이라고 하여 자신이 저지른 여러 일을 반성하지 않았습니다.”(『고려사절요』- 성종) 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6대 성종은 최승로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았지만,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는 유학 정치를 표방한 고려 최초의 군주였으며,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최승로 등 유학자들을 우대했다. 팔관회·연등회 등을 재정적문제로 폐지했으나, 1010년 부활하여 고려 말까지 이어졌다. 막대한 물자 소비와 인력 동원이라는 폐단은 있었으나, 지배세력과 민중이 집단으로 일체감을 다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사찰에서 파·마늘을 재배하고, 소금과 꿀, 기름을 가공해 팔아 이익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역사책에서 배우지 못한 것 같은데, 양주의 한 절에서 360섬의 술을 빚은 사실도 있었다고 한다. 절에서 금기시하는 파·마늘을 재배하고 파는 것은 묵인되었으나, 술 제조 판매는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원(院)이라는 숙박 시설도 운영했는데, 장안사 승려가 전라도 토지를 소유하고, 승려가 직영상점에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 오갈 때 원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문벌 귀족이 형성되면서 불교는 이들과 결탁하고, 귀족들은 특정 종파를 대변하여 불교는 점차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11대 문종은 재위 37년 동안 불법의 진흥에 앞장섰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0여 년에 걸쳐 개성 덕적산에 흥왕사를 짓고, 원당으로 삼았으며 그 규모가 2,800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율배반적 행동이기는 하나 그는 불교 개혁에 힘썼다. 문종이 여러 아들을 불러 놓고 “누가 스님이 되어 복전福田의 이익을 얻겠는가?”라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11살 의천이 “제가 출가할 뜻이 있습니다. 오직 부왕의 분부를 기다릴 뿐입니다.”고 대답했다. 그가 출가해 화엄종 교지와 유학까지 두루 섭렵한 뒤, 송나라에서 돌아와 형인 숙종에게 화폐사용을 권장하고, 선禪과 지혜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부처가 마지막에 설법한 『법화경』사상을 강조한 천태종을 고려의 현실에 뿌리내리고자 했다. 의천을 천태종 교조로 보는 이유다. 의천은 승려의 최고직인 ‘대각국사’시호를 받은 것은 왕자로서 혈통에 힘입은 것도 있겠지만, 의천은 귀족불교를 민중불교로 끌어내리는 데 실패했고, 그가 가장 존경한 원효의 깊은 뜻을 올바르게 실현하지도 못했다. 그가 죽은 뒤에는 불교의 타락이 더 심화 되었는데, 밑으로부터 개혁을 시도하지 않는 점, 너무 이념제시에 편향된 점 등이 지적된다. 하지만 의천의 개혁의지는 뒷날 지눌(智訥)에게 영향을 주었다.
의천의 개혁의지에도 사원전(寺院田)은 확대되었는데, 임금이 내려준 땅, 신도가 시주한 땅, 절에서 개간한 땅과 절에서 사들인 땅이 늘어나는 현상이 빚어진 데다 이자 놀이에 열중해 소득이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절에서 소유한 토지에는 장생표(長栍標)를 세우 경계를 표시했는데, 통도사의 경우 나라에서 허가한 것이 12개였다고 한다. 양산 하북면 백록리에 1085년에 세운 높이 166m의 장생표가 보존되어 있으며, 장생표 안에는 국가나 개인 소유의 토지와 산판은 있을 수 없고 절 소유만 있었다. 금강산 장안사의 경우 경기, 전라, 황해도 지역에 소유토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재산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원전은 사패지(賜牌地)여서 조세를 물지 않았다. 승려들은 잉여생산물을 축적할 수 있었고, 문벌 귀족들은 재산의 도피처로 삼았는데, 문벌과 결탁하지 못한 선종 세력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불법에 정진하는 절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스스로 베를 짜거나 작은 규모의 농사와 장사로 생계를 꾸리거나 탁발로 연맹해 갔다. 다만 승려와 신도를 많이 가진 절에서는 자위조직이 생겼는데, 처음에는 도둑을 막기 위한 조직이었으나, 여진이 침입해오자 숙종과 윤관이 여진 정벌을 계획하면서 여기에 승려를 뽑아 항마군(降魔軍)을 만들기도 했다.
1135년(인종13) 묘청妙淸이 인종의 신임을 받고, 서경천도운동을 벌이자 유학파 김부식은 이를 규탄했다. 묘청 일파는 대위국(大爲國)을 선포하고 자주적 황제국가를 표방했으나, 토벌군 사령관이 된 김부식에 의해 섬멸되었는데, 이로 인해 유학파 세력은 더욱 힘을 얻어 무신들을 아예 무시했다. 1170년 정중부, 이의방 등이 김부식 일파를 제거하고,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세웠다. 1174년 귀법사 승려 100여 명이 왕을 보호하려 했으나 이의방에게 죽임을 당하고, 뒤이어 2,000명의 승려가 봉기하였으나 역시 이의방의 군사들에게 참살당했다. 이의방은 절을 불태우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교종을 후원하던 왕실은 위축되고, 권력을 독점적으로 틀어쥐었던 문벌 귀족도 몰락했다. 이는 불교 전래 이후 최대의 수난이었다. 다만, 선종은 교종이 득세할 때도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학일學日이 운문사에 거처하면서 가지산문이 경상도 지역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선종 승려들은 왕실과 문벌의 지원을 받지 못해 교종에 빌붙어 살면서 참선으로 도를 깨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었는데, 부처를 믿어야 극락에 간다거나, 재앙을 물리친다거나 하는 기복祈福 불교에 매달려 재를 올리고 천도하는 일을 축제 수단으로 삼아 불법의 구현을 외면하고, 더욱이 사주나 관상을 봐주는 민간신앙에 영합하기도 했다. 이때 지눌은 담양 청원사, 경상도 보문사를 거쳐 팔공산 거조사에 와 결사운동(結社運動)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지눌은 지리산 상주무암에서 정혜(定慧)사상을 연마한 뒤 그것을 현실 세계에 심기로 마음먹고 대중과의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 송광산 길상사(현 조계산 송광사)를 중창하기로 했다. 당시 길상사는 폐사 직전의 퇴락한 작은 절이었다. 딸린 토지가 없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가 힘들었다. 지눌이 길상사를 중창한다는 소문이 돌자 목수인 백암사 승려가 찾아와 공사를 맡고, 나주 등지의 향리들이 비용을 댔다. 우여곡절 끝에 8년 만에 공사를 마쳤는데, 지눌과 제자들은 울력으로 공양을 지었으며, 왕실이나 권문세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절을 중창하고, 스스로 노력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면서 지눌은 대중들에게 외쳤다.
“부처란 마음이다. 마음은 사람의 몸속에 있다. 사람은 오래 미혹되어 있어서 마음이 참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하고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는다. 이렇게 되면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꺼내고 몸을 찔러 피를 내서 경을 베낀다 해도, 밤을 지새우고 밥을 굶으면서 많은 대장경을 읽거나, 여러 고행을 한다 해도 이는 모레알을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 헛된 수고일 뿐이다.”『수심결』
참으로 명쾌한 법문이다. 부처와 대중을 일치시켜 대중에게 파고드는 처방이었다. 결사운동의 주체들은 그의 개혁의지에 열성으로 동참했다. 실상사는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로 길이 메워질 지경이었다. 그를 찾는 사람들은 신분의 귀천이 없었다. 1204년 실권자 최충헌은 지늘의 결사를 공인하여 ‘수선사(修禪社)’라는 액자를 내렸는데, 편액은 희종이 섰다. 여기 ‘수선’은 결사가 선사상 중심의 운동이라는 의미이고, ‘사’를 절 사寺로 쓰지 않음은 결사의 의미를 존중하고, 기존의 절과 구분하여 승속이 모두 참여함을 나타낸 것이다. 희종은 무신정권에 업혀 지냈으나 결사운동을 지지하면서 지눌을 흠모했다. 지눌은 53세 죽었는데, 조정은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지눌의 뒤를 이어 결사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무신정권에 맞서지 않고 타협하는 자세를 보였는데, 그것은 무신정권의 강력한 무력 앞에 겁먹은 탓일지? 아니면 지난 날을 거울삼아 정치에 초연하겠다는 것인지? 지눌의 제자 혜심은 단속사, 월남사 등으로 옮겨 다니며 끝까지 정혜결사 중심 지도자로 추앙받았다. 수선사는 1208년 희종이 ‘송광사’로 바꾸었고, 지눌 이후 연달아 16국사를 배출했다. 이는 유래가 없는 일로 송광사는 불보의 통도사, 법보의 해인사와 더불어 승보사찰로 꼽힌다.
‘대장경’을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처의 말씀인 경, 불교의 계율인 율, 고승들이 논증한 논을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삼장경(三藏經)’이라고도 하는 대장경은 불교 국가들은 그것을 새겨 보관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부처의 보호를 받아 나라의 안녕을 기약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 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호국불교의 상징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현종 때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고려를 침략하자 대장경을 새겨 나라를 보호하겠다고 서원했는데, 우연히도 얼마 뒤 요나라가 물러갔다. 1011년 작업을 시작해 76년 만에 만든 이것을 ‘초조대장경’이라고 하며, 흥왕사에 보관하다, 뒤에 의천에 의해 보완된 ‘속대장경’까지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던 중, 몽골이 쳐들어와 모두 불타고 말았다. 그러자 1236년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이’가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 남해에 분사도감을 설치해 본격적으로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판목은 산벚나무, 돌배나무, 참나무 따위로 나무들은 몇 년간 말려서 경판을 만들고, 승려들과 서생들이 종이에 글자를 썼는데 글자는 한 줄에 14자, 한 경판에 23줄을 원칙으로 썼다. 글씨는 획이 분명한 ‘구양순체’를 따랐으며, 글자를 쓰고, 교정하고 새길 때 지극한 정성을 들였다고 하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글자를 쓰거나 새길 때마다 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팔만대장경판에는 ‘오자가 딱 한자 숨이 있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전체 5,000만 자가 넘고, 판수가 8만장이어서 《팔만대장경》이라 하는데, 불교의 번뇌와 법문이 8만 4,000가지라는 데서 유래한다. 고대 인도에는 많은 숫자를 말할 때 8만 4,000이라고 했고, 언젠부턴가 8만 4,000을 줄여서 8만이라고 했다. 실제 경판은 앞뒤로 새겼기 때문에 16만 장이라고 해야 하나, 상징적으로 팔만이라고 한 것이다. 팔만대장경에 수록된 불경의 종류는 1,497종, 중국·티베트·거란에서 만든 대장경을 거의 다 수록하였고, 고승의 전기와 사전류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고려 고승의 선문답도 있는데, 지눌의 제자로 결사운동을 벌인 혜심의 『선문염송집』도 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은 최이가 강화도 선원사에 대장도감을 설치하면서 만든 것으로 처음에 이 절에 보관하다가 강화도에도 왜구가 자주 출몰하자, 1398년 경상도 해인사로 옮기기로 하고, 해인사에 판고(板庫)를 지었는데 90년 동안 준비해 1488년에 옮겼다. 해발 645m 지점에 지어진 장경각은 4채의 건물로 ‘법보전’과 ‘수다라전’에는 대장경판을, 동서 두 건물에는 다른 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법보전과 수다라전은 각기 30칸, 365평 넓이이고 기둥은 108개, 이 숫자는 1년과 불교의 번뇌를 의미한다.
트럭 수십 대 분량인 이 대장경판을 어떻게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겼을까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처음에 한강을 거쳐 서울 지천사로 옮겼다가 뱃길로 남한강과 낙동강으로 내려가, 육로로 해인사로 옮겼을 것이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추정이다. 대장경은 여러 번 수난을 겪기도 했는데, 조일전쟁, 즉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해인사로는 들어가지 않았으나, 전쟁 후에 일본이 끊임없이 대장경판을 요구한 것으로 보아 당시 대장경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위기를 맞았는데, 미군 사령부는 인민군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해 한국인 조종사에게 해인사 폭격을 지시했으나 당시 조종사가 해인사 상공을 맴돌다 안개로 폭격을 중지했다고 보고했다. 혹은 편대장이 정면으로 해인사 폭격을 거부했다는 말도 전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계적 문화유산이 민중에 의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무신정권이 기획하고 왕권이 인민을 동원하는 등으로 만들고 또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 문화창달을 위해 우리 대한민국이 얼마나 힘을 보태고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21.4.17 오전)
원나라 지배 시기 충렬왕의 뒤를 이은 아들 충선왕은 불교보다 유학에 몰두했다. 그는 공자를 모시는 석전(釋奠)을 정례화하고, 국사인 도선과 설총, 최치원을 유종(儒宗)으로 받들게 했다.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경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고, 고국의 유학자들을 불러 유학공부에 전념하도록 했는데, 만권당은 고려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안향, 이제헌 등 유학자들을 길러냈다. 안향은 북경에서 돌아와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공자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을 설립했는데, 그는 공자에 대해 “공자의 가르침은 만세에 모범이 되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을 누구를 시켜 가르치겠소?”(『고려사』열전 안향)라고 했다.
이때는 승려들에게 ‘도첩(度牒)’을 주었으며 도첩이 없는 자는 군인으로 충당하고, 새로 지은 절은 모조리 철거하되 철거하지 않으면 수령에게 죄를 물었다. 그러면서 양민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곡(李穀)과 아들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로 이어진 온건 개혁파들이 전면에 있었으므로 불교가 이단이라고 배척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정도전 일파의 급진 개혁파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몰아갔다.
조선 시대 문정왕후가 궁중에 내불당을 짓고, ‘정란정’이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전횡할 때 보우(普雨)가 있었지만 이와 달리 고려 말에도 보우(普愚)가 있었다. 그가 내원당과 봉은사에서 설법할 때 왕과 왕비가 예물을 바치고 극진히 모셨다고 하는데, 1356년 공민왕은 그를 왕사로 추대했으며, 신종·교종의 절 가릴 것 없이 주지 임명권을 주었다. 보우는 한양으로 천도하면, 36국에서 조회 올 것이라고 건의해 왕이 한양에 궁궐을 짓도록 했다. 한양 천도는 개경의 기득권 세력을 뿌리채 흔드는 조치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중단되었다. 또한 공민왕은 나옹(불명 惠勤)을 왕사로 모셨는데, 양주 회암사 출신인 나옹懶翁은 고려 왕실은 물론 새로 건국한 조선왕조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기도 했다.
공민왕 시대 개혁주의자 신돈(辛旽)은 역사가 바르게 기술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하는데, 정치의 중심인물로 개혁과 민중의 고통을 해결해주려고 한 승려 출신 정치가는 우리 역사에는 그리 많지 않다. 역사는 그를 막된 인물로, 신진사대부들은 그를 단순히 불승이라는 이유로, 불교 세력은 선종을 탄압한 승려로 치부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승자의 기록이 아닐까?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집권한 뒤에는 성리학자들이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정도전·조준 등은 불교는 이단으로 몰았다. 돌아보면 ‘이것이 정치다’싶기도 하다.
나는 내 스스로 불교보다도 성리학에 대해 잘 모른다고 느끼기에 이를 알아본 후에, 그것이 불교보다 무엇이 나은지 비교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자’가 정립한 ‘성리학’은 노장(老莊)의 허무주의와 신비주의를 극복하고, 불교의 현실부정을 타파하여 현실 세계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다. 북송의 사대부들이 이를 수용하고, 양자강 주변의 중소 지주층이 여기에 호응했다. 주자는 남송 출신으로 이를 대변하는 이론가이고 선구자였다. 성리학의 ‘이기론’은 우주 자연의 원리와 인간사회의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우주와 만물은 초자연적인 형이상의 이(理)와 현실의 질서를 지닌 형이하의 기(氣)가 결합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는 완전한 선이고, 기는 선악이 뒤섞여 있다고 한다. 인간은 하늘의 이를 받아 선천적인 성(性)을 갖고, 후천적 기를 받아 형체를 이룬다.
본래 성은 선하나 기를 받아서 선악이 뒤섞여 나타나므로 수양을 통해 선의 길로 나가야 한다. 여기서 성과 이를 따라 ‘성리학’이라고 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생기면서 임금은 이요 신하는 기, 상전은 이요 노비는 기, 남자는 이, 여자는 기라는 논리의 성립이 이루어졌다. 이런 차별적인 논리는 명분에 따라서 조화를 이루기도 하는데, 곧 사람은 상하와 귀천의 차등을 인정하고 주어진 직분을 갖고 살아야 하며, 이것의 실천 윤리는 삼강(三剛)과 오륜(五倫)으로 집약 된다.
정도전은 “이는 심(心)과 기의 근본이다. 본디 이가 있은 뒤에 기가 있고, 기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다. 사람도 만물의 하나로 이와 기가 합쳐져 발생하고 존재한다. 그러기에 이는 천지에 앞서 존재하고 이로 해서 기도 생기고 심도 생겨난다’고 『심기리편』에서 주장했다. 그는 도교는 기로만, 불교는 심으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이가 근본임을 모르는 그릇된 이론이라고도 했다. 또 모든 사람에게는 성으로, 자연에는 오행으로 구현되는 이가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결정하고 사회 윤리도덕과 질서를 주관한다고 하여, 불교는 윤리 도덕을 저버린 이단이라고 했다.
사람은 ‘기가 모여서 태어나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고 하여 불교의 ‘윤회설’과 ‘극락설’은 터무니 없다고 했다. 사람의 운명은 후천적 기질의 차이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부처의 의사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복을 빈다고 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정도전의 이론은 주자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불교 이단론’이 옳든 그르든 정치적 대세는 성리학자들의 손에 넘어갔으니, 불교는 필연적으로 규제받을 수밖에 없었다.
『연려실기술』과 야사에 보면 이성계와 무학의 만남으로 한양 천도가 이루어졌고 그 당위성을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한양 천도는 태조의 강력한 추진과 정도전의 적극적인 협조로 결실을 보았다고 볼 수 있다. 무학은 그저 조연급으로 역할을 했을 뿐이다. 태조가 즉위한 다음 해 성석린 등 신하들을 데리고 계룡산으로 가면서 회암사에 머물던 무학을 불러 동행했다. 태조가 높은 곳에 올라 ‘도읍지로 어떻겠느냐’고 묻자, 무학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같이 간 하륜이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도읍지로 마땅하지 않다고 하면서 모악산(신촌 일대) 쪽이 좋겠다고 하고 같이 간 권중화는 모악산 남쪽은 좁다고 반대했다. 그러자 태조는 이전에 고려 이궁이 있던 한양을 돌아보고 확신에 차서 무학에게 의견을 물으니 “이곳은 주변의 산이 높으며 가운데가 평평하고 넓어서 도읍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어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태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무학을 어용승(御用僧)으로 보기보다 조선불교에 도움을 준 인물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1464년(세조 10년)흥경사를 원각사(元覺寺)로 바꾼 세조는 4월 초파일 원각사 종을 완성하고는 경찬회(慶讚會)를 열었다. 여기에 승려 2만 명을 불렀다고 하며, 1467년에는 10층 석탑을 완성했다. 아름다운 대리석에다 현란을 문양을 층 마다 다르게 조각한 이 석탑은 조선 최대 걸작이었다. 1471년 원각사 건립 내력을 적은 ‘원각사지비’를 세웠고, 이 비문은 ‘김수온’이 짓고, 추기追記는 ‘서거정’이, 전액은 ‘강희맹’이 섰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로 세조는 현재의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를 중창해 불교를 진흥시켰으나 그 후 여러 차례 수난을 겪어 지금은 원형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그 자리에 10층 원각사탑 만이 남아 있다.
오늘날 헌법에 비견될 정도로 조선의 《경국대전》은 당시 사회를 규제하는 지침서였다. 성종 2년 간행된 여기에는 통치의 기본방향이 설정되어 있는데, 불교 관련 조항으로 이런 것이 있다. 1) 중이 되고 싶은 사람은 선종이나 교종에 신고하면 석 달 안에 불경 외우기를 시험하여 예조에 보고한 다음 임금에게 알려 정전(丁錢-장정에게 매기는 세금)을 받아들이고 나서 도첩을 발급한다. 2) 선종과 교종은 3년마다 한 번씩 시험을 보되 전등(傳燈-법맥)과 염송(念誦-참선의 화두)를 보며, 각각 30명씩 뽑는다. 3) 절과 암자를 새로 짓지 못한다. 4) 중은 자신에게 관련된 일이나 외아들인 처지에서 보모와 관계된 일 말고는 소송을 심리하지 않는다. 5) 부녀 또는 비구니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 길거리에서 불공을 드리거나 초혼을 하는 자, 개인 노비와 토지를 절간에 시주한 자에게는 모두 죄를 주고 그 개인 노비와 토지를 몰수한다. 이외에도 주지도 국가에서 임명하고, 절의 보수공사는 임금의 재가를 받아야 하고, 승려의 통행과 거주는 제한되었으며, 여자는 절에 가지도 시주도 금했다.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의 장례에 불공은 물론 초혼도 금했는데 이는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규정이 아닐 수 없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에서 승병들의 활약이 눈부시었다는 것은 역사가 기록하고 또 증명하고 있지만, 전쟁이 끝나고 1604년 선조의 어가를 호위한 호성(扈聖)공신, 무공을 떨친 선무(宣武)공신 등 138명을 책록했을 때 승려는 한 명도 들지 못했다. 공신 책록이 잘못되었다는 여론이 빗발치자 1605년에 호성 2,475명, 선무 1,060명, 정난공신(이몽학 난 평정)995명을 추가 지정했는데, 여기에도 휴정·유정은 끼이지 못했다. 후에 광해군은 불교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는데, 그는 조일전쟁 때 일선에서 몸소 승려들의 활동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존명배청(尊明背淸)논자들은 광해군을 군신의 의리를 저버렸다고 맹비난했으며, 결국 광해군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고 왕이란 이름도 얻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성지(性智)는 풍수의 대가로 그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서대문 밖의 사대부 집에 사미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많은 승려들이 출입했다고 한다. 그는 인왕산 아래 왕기(王氣)가 있으니 궁궐을 지어 이를 눌러야 한다고 해 광해군의 승낙을 받아 팔도 승군과 목재를 징발하고, 심지어 벼슬까지 팔아 경비를 마련해 인경궁, 자수궁, 경덕궁(경희궁)을 짓기도 했다.
허균은 유학을 공부했고, 광해군 때 벼슬을 했는데, 그가 삼척부사로 있을 때 금강산 낙가사, 건봉사 등지에서 옥준이라는 중을 만났다. 옥준은 고승이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술 마시기, 말 타기, 활쏘기, 바둑 두기를 일삼았다. 허균이 관아에 딸린 기생 한 명을 보내 주면서 네 가지에 한 가지를 더 즐기라고 하면서 ‘오기가(五嗜歌)’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1602년 그가 34살 때 휴정에게 네 차례나 편지를 보내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으며 그는 “남과 나 그리고 만물이 모두 공이다”고 하면서 같은 해 금강산 도솔원 미타전 비문에 이렇게 언급했다.
“나라에서 이단을 막아 불교를 높이지 않는 것은 옳기는 하되 사람들이 복을 신불에게 비는 것은 또한 한 길이다. 위에서는 유학을 높여 선비의 습속을 맑게 하면서 아래로는 부처의 인고의 화복으로 민심을 깨우친다면 그 다스림이 고를 것이다’ (『惺所覆瓿藁』)
허균은 최초로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쓰면서 해인사의 재물을 털어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설정했는데, 이는 많은 재산을 끼고 도는 총림불교의 승려들에게 중생제도를 실천하라는 ‘할’은 아니었을까? 계율보다 대승불교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허균은 생활불교를 표방했고, 조선시대 드러내 놓고 불교도임을 자랑한 벼슬아치였고, 불교의 민중화, 대중화의 기수였다.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 석장비’의 비문은 서로 도반처럼 가까웠던 허균이 지은 것이다.
‘남한산성’하면 인조와 삼전도비, 김상현과 최명길 등이 생각나는데, 인조를 떠받던 세력은 명나라에 충성하고 청나라를 배척한 ‘존명배청’파였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을 제압하려 들었고 조선은 항전을 준비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청나라군의 고립 작전에 말려 항복하고 말았다. 1624년 둘레 8㎞나 되는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는 서울 도성을 축성할 때처럼 주변의 승려들을 동원했다. 하지만 공사가 진척되지 않자 승려 각성(覺性)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승려를 동원해 공사를 진행했다.
2년 만에 서울 도성에 버금가는 산성이 완성되자, 각성을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과 교지, 의발(衣鉢)를 내려 주었지만 허울 뿐인 영광이었다. 산성의 평상시 방어군은 승려들이었고, 성안에는 승도청(僧徒廳)을 별도로 두어 승병을 총괄했으며 성안의 아홉 개 절은 승병들의 막사로 사용됐다. 이때 승병조직은 500명 정도로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에 따라, 전국의 절에서 번갈아 불려왔다. 승병은 아침저녁에는 예불하고 낮에는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았다. 1627년 1차 조청전쟁(정묘호란), 1636년 2차 조청전쟁(병자호란)때 모향산 승려 명조(明照)가 승병과 군량비를 모아 돌아가는 청군을 격퇴한 공로로 ‘의승도대장’이라는 직함을 받았는데 이것이 조선왕조의 마지막 승군이었다.
1675년 숙종이 등극하자 송시열의 노론계열이 정권을 잡고 조청전쟁의 원수를 갚는다며 ‘북벌론’이 대두되었다. 이때 다시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이 벌어졌으며, 불교와 무속은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탄압했다. 숙종 또한 한유(韓愈-한나라 유학자)의 영향을 받아 철저한 배불론자였다. 숙종은 청나라 정벌을 염두에 두고 강화도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돈대들은 거의가 승려들의 공력으로 만들어졌다.
1682년 서해 앞바다에 검은 칠을 한 나무상자 수십 개가 떠내려왔는데, 상자마다 유지로 단단히 묶은 책 두 권씩이 들어 있었다. 1,000여 권이나 되던 이 책들은 서울로 보내졌고, 5∼6년 뒤에는 금칠을 한 나무불상이 제주도에 표류해왔다. 제주 목사가 심상치 않다며 서울로 보냈고,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책과 불상을 싣고 가던 일본 배가 난파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이 일어나자, 불교가 중흥할 것이라며 염려했고, 승려들은 이적이라며 고무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숙종이 절에 글을 지어 보내는 등 타협을 의미하는 행동을 보였는데 그러자 한동안 눈치를 살피던 궁중에서는 드러내놓고 부처를 섬겼다. 심지어 공주, 옹주들은 절에 가서 향을 피우고 연등회를 열었으며 시주도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세상에 죽을 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자들이 절을 목숨 보존하는 소굴로 여기고, 머리를 깎고 모양을 바꾸어 먹물 옷을 입으니 알아볼 수가 없다. 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무리가 어찌나 많은지 호미 찬 농부나 창을 맨 군졸보다 많다. 절이 궁궐보다 100배나 크고 화려하여 금은보화가 민중의 재산보다 100배나 많으며, 관가에 바치는 것이 조금 있다 하더라도 이는 금방 지방 관장의 개인 재물이 되고, 국가의 재정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코로나19’시대에 비교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이야기가 있다. 조선후기 면역(免役)과 도피를 위해 중이 되려고 하기도 했지만, 연달아 생긴 역질과 흉년에도 원인이 있었다. 1684년 2월 우역(牛疫)과 역질(疫疾)로 평안도 30개 고을에서 석 달 동안에 소 4,000두가 병들어 죽었고 차츰 전국으로 퍼진데 이어, 남쪽에서는 염병이 휩쓸었는데 한번 염병이 돌면 찬바람이 불어서 자연소멸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1698년 한 해 동안 흉년과 염병으로 25만 340호, 인구는 141만 6,300명이나 줄었다고 한다.
절에 모시는 ‘산신’과 ‘칠성’은 본래 불교와 관련이 없으므로 이를 봉안한 건물은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이라 한다. 이 두 신앙을 불교에 수용한 것은 하근기(下根機)의 중생을 접수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하나, 이는 자의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억불의 시대 승려들이 절을 유지하고, 또 생계를 마련하기 위해 토속신앙의 민중을 끌어 들이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 시대정신에 맞을 것이다. 절에서는 조왕신 등 다른 민속신도 수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절에서 민속신앙을 믿는다는 것은 불교가 기복 불교로 전락해 부처의 참 가르침을 변질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봉승 작가의 〈이동인의 나라〉를 읽은 기억이 나기도 하지만, 이제 부터는 이동인과 경허에 대해 알아보자. 이동인은 통도사로 출가하여 범어사, 서울 보원사를 거쳐 3포 개항 직후인 1877년 일본이 부산에 본원사(本願寺) 별원을 설치하자, 이듬해 별원장이던 ‘오쿠무라 엔싱’을 찾아갔다. 오쿠무라가 만난 이동인은 30세 전후로 품위가 있고, 문필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 뒤 이동인은 여러 번 오쿠무라를 찾아갔고 며칠씩 별원에 머물기도 했다. 본원사 별원은 조선 불교가 핍박받고 있는 것을 보고 일본불교를 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추운 겨울 이동인은 통도사 중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오쿠무라를 찾아갔다.
몇 달 뒤에 이동인은 “박영효, 김옥균의 위촉을 받고 일본의 정세를 시찰해 보기로 했다. 일본을 시찰하고 문물을 연구함으로써 조선의 문화 개혁에 공헌하고 싶다”면서 서울로 올라와 일본공사 ‘하나부사’에게 일본어를 배웠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이동인을 신임하여 일본으로 밀항할 여비로 큼직한 금덩이 4개를 마련해 주었다. 이를 들고 부산으로 내려온 이동인은 다시 오쿠무라를 만나 1879년 6월 같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에 있는 본원사는 ‘동본원사’와 ‘서본원사’로 나누어져 있지만 원래는 하나였다. 도쿠가와 막부가 정치적 권력을 약화시키려 두 교파로 나눈 것이며,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본산인 이 절은 부산을 개항하자 동본원사가 먼저 별원을 두어 정토진종을 포교하려고 나선 것이다. 이동인은 오쿠무라의 주선으로 교토 동본원사에서 9개월쯤 머물며 이름을 ‘아사노(朝野繼光)’라고 가명을 썼는데, ‘조선의 야인으로 광영을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때때로 새로운 제도, 과학기술 관련된 책을 구입해 인편을 통해 김옥균에게 보내 주었고, 1880년 3월 도쿄로 가 동본원사 별원인 ‘아사쿠사’에 머물렀는데 이때 일본의 정치인은 물론 서양 외교관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해 7월에 2차 수신사인 김홍집 일행이 도쿄에 와 이동인이 머물던 아사쿠사 별원에 유숙했는데, 이때 일본은 조선의 인천항 개항을 추진하고 있었다. 김홍집은 자기가 관여할 바 아니라며 거절하자 하나부사가 도쿄 본원사 중 ‘스즈키’에게 김홍집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고, 스즈키는 이동인에게 주선을 부탁했다. 그래서 이동인과 김홍집이 아사쿠사에서 만나게 되었다.
둘은 시와 문장을 논하고, 세계정세와 조선의 장래에 대해 토론했다. 김홍집은 이동인이 조선말을 잘하고, 조선의 사정에 밝은 것을 보고 조선사람이라는 의심을 하자, 이동인은 사실을 실토하고 밀항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김홍집은 이동인을 부여잡고 울면서 감격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홍집은 고종에게 이동인을 추천했다. 그는 승려 신분으로 고종을 만났고 밀항의 죄를 용서받았으며, 이후에도 자주 고종의 부름을 받았다.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고 ‘별선군관’이라는 이름의 어학사(語學司-외국어 관련 부서)참모관으로 이동인이 임명되었다. 조선 승려가 실제 벼슬을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
이동인의 참모관 임명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유림 척사파는 이동인을 참모관으로 발탁한 것에 대해 “중을 장관의 자리에 임명하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홍집은 자신이 추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정과 임금이 다 안다고 변명했다. 다른 사람이 추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화파를 이끈 김옥균이나 통리기무아문의 군무사 당상인 민영익이 추천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881년 이동인의 의견에 따라 ‘신사유람단’이 꾸려졌는데, 유람단의 대표로는 이원회,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등이고, 이동인은 참모관으로 총포, 전선구입 등 특수임무를 띠고 있었으나 그의 이름은 표면적으로는 없었다.
일본에서는 유람단의 일정과 이동인의 동정 등을 신문에 보도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으며 일본공사인 하나부사가 외무대신인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고할 때 신사유람단이 출발할 즈음인 이때 이동인이 갑자기 없어졌다고 보고했다. 이동인은 일본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전에 이동인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는 인촌(燐寸-성냥)을 가져와 우리나라에 소개했고, 많은 책을 가져와 청년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이동인이 사라진 것은 죽음과 연관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의문에 싸여 있다. 그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갈 때는 문기수(문지기)가 데리고 들어갔다고 한다. 행방불명되기 직전에도 문기수가 민영익의 집으로 와서 그를 데리고 갔다. 그가 도망쳤다고도 하고, 죽임을 당했다고도 하는데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죽였을 것이라고 의심했고, 김옥균은 급진 개화정책을 추구한 탓에 온건파인 김홍집이 제거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또 그가 민씨에게 의지하여 급하게 공로를 탐낸다고 김옥균이 자주 충고했다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튼 승려 신분으로 많은 일을 벌인 그의 짧은 생애는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경허는 벼슬아치들의 수탈에 화가 치밀어 죽은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생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23세 때에 ‘동학사’에서 설법을 했는데, 사방에서 학인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 31살 때 길을 가다가 폭풍과 소나기를 만나자, 마을에 들어 비를 피하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거절했다. 당시 염병이 돌아 나그네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죽음의 벼랑에 다다른 듯이 마음이 떨렸고, 문자를 통한 공부로는 생사를 면치 못할 것을 깨닫고 바로 절로 돌아왔다. 그는 문을 닫아걸고 참선에 들었는데 이렇게 3달을 보냈다고 한다. 한용운은 이것을 두고, “이때부터 육신을 초탈하여 작은 일에 걸리지 않고 마음대로 자재해 유유자적하였다”고 했다. 이렇게 25년을 서산 부석사, 합천 해인사, 동래 범어사 등에서 운수행각을 하고 설법으로 제자들을 길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나라의 껍데기만 남자, 그는 고민 끝에 환속을 결심했는지 상투를 튼 뒤 관을 쓰고, 때로는 저자에서, 때로는 주막을 떠돌면서 훈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절에 기숙한 것이 아니라 서당을 생계의 터전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다 발길이 강계에 이르렀을 때,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아낙을 보자 대뜸 다가가 입술에 뽀뽀를 하는 등 희롱했다. 이를 본 동네 청년들이 몰려 와 뭇매질을 했는데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얻어맞기만 했다. 길을 지나던 지인 ‘김탁’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 청년들을 겨우 뜯어말리고 물었다. 그러자 경허는
“이 미친놈아, 할 일이 없으면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네 이놈 어찌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고!”했다나.
그 후에도 김탁은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해 주었다고 한다. 경허는 67세 되던 해 4월 25일 함경도 갑산에서 죽었다. 경허는 서산 천장암에서 1년 동안 참선한 적이 있는데, 대소변 말고는 한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양치질도, 목욕도 하지 않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잠을 자려 눕거나 벽에 기대는 일도 없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떠들어도 말을 듣지 않고, 눈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숨 쉬는 부처상’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법문을 한다고 한 다음 어머니 앞에서 옷을 주섬주섬 벗어 어머니가 낭패스러워 하자, “저래 가지고 어찌 어머니 노릇을 한단 말인가 내가 어려서는 이 몸을 벌거벗겨 씻기고 안고 빨고 하시더니 지금은 왜 그렇게 못하시나? 세상 풍속 참 한심하다”면서 웃은 이야기, 해인사 조실에서 문둥병 여자의 썩어 문드러진 다리를 베고 누워있었다는 이야기, 재 지낼 음식을 구경 온 아이들에게 모조리 나눠주어 승려들이 낭패를 보기도 하고, 기근에 시달린 화전민을 위해 탁발을 해서 양식을 대기도 했다는 이야기 등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낳은 경허, 조선불교가 친일화의 길을 걸으며 무너져 내릴 때 그의 가르침과 행동은 새 바람을 일으켰고, 제자 송만공, 방한암, 전전강으로 선맥이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 경허 그런 스님이 이제는 왜 없을까?
구한말까지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는 3%에 불과했다. 미 군정을 이어 받은 이승만은 감리교 신자였다. 그는 취임식에서 ‘하나님에게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맹세했으며, 내각 42%를 기독교인으로 채우고 불교도는 백성욱, 김법린 뿐이었다. 그리고 1954년 기독교 방송을 인가해 주었다. 한국전쟁은 산속 사찰을 초토화시켜 무수한 문화재는 오유(烏有-불에 타거나 없게 된 비유)로 돌아갔다. 이와 달리 도시에는 미국의 원조로 교회가 연달아 들어섰다.
1950년대 초 대처승의 숫자가 7,000여명인데 비해, 비구승의 숫자는 그 10분의 1도 못 되는 400여명 이었으며 본산 사찰의 주지는 거의가 대처승들이었다. 대처승들은 사찰 재산을 관리하고, 비구들이 수좌전용 사찰을 요구하여 마지못해 동화사, 직지사, 보문사, 신륵사, 월정사 등 18개 사찰을 지정해 주었다. 하지만 삼보사찰이 포함되지 않았고, 재정형편도 열악해 수좌들의 불만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승만은 “전국 승려는 일본식 정신과 습관을 버리고 불교의 빛나는 전통을 살리라”는 유시를 내렸는데, 이에 고무된 비구승들은 구체적 행동을 위해 자금을 모았다. 그러자 일부 브로커들이 비구승이 힘을 얻을 것이라고 판단 해 이권을 염두에 두고 재빨리 자금을 대 주었다. 그러자 승복을 입은 깡패들을 동원해 서울 태고사에 난입했다. 그들은 몽둥이, 쇠파이프, 자전거 체인 등으로 무장하고 들어가 태고사를 차지했다. 그러면서 태고사 대신 ‘조계종중앙종무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태고사를 ‘조계사’로 바꾸었다.
비구승과 대처승의 노골적인 대립이 도를 넘자 마침내 1955년 이승만은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담화를 노골적으로 발표했다. 이에 힘입어 비구승들은 다음 해 8월 조계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일방적으로 주지를 임명하고 정부는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대처승들은 절을 접수하려고 온 비구승들을 몽둥이로 몰아냈다. 그렇지만 대세는 기운 상태였다. 대처승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절의 재산은 깡패 동원 경비에서 변호사 비용으로 탕진되었다. 법정 분쟁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나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대처승들은 본산 사찰을 거의 비구승들에게 내주었지만, 유래가 있는 사찰로는 서울의 봉원사나 순천의 선암사(2018년 현재 조계종-태고종 분쟁 중)정도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비구 측은 ‘대한불교조계종’이란 이름으로 중국에서 조계의 선풍을 들여온 도의를 종조로, 지눌을 중천조(重闡祖), 보우를 중흥조(重興祖)로 삼고 있으며, 대처 측에서는 경복궁 옆 ‘법륜사’에 종무원으로 두고‘태고종’이라고 하는데 곧 태고를 종조로 받든다. 이렇게 보면 종지는 둘 다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군인, 경찰 등 많은 친일파를 하수인으로 부려먹으면서 왜 하필 불교도에게만은 친일불교를 배척했을까?
“일반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이용한 반일 이데올로기를 선동 확산하여, 반이승만 세력을 배척하는데 활용했던 것으로 생각 한다”( 조명제「1950년대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고 하기도 한다.
1980년 신군부의 등장은 또 한번 불교계를 뒤집어 놓았다. 광주민주화 운동에 조계종단에서는 구호봉사단과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다. 더욱이 총무원장이 용감하게도 전두한 지지성명을 거부하고 나섰다. 예전에 볼 수 없는 결단이었다. 드디어 10월 27일 새벽 총을 든 전두한의 하수인들은 전국의 사찰에 들어 닥쳐 군홧발로 짓밟고 승려들을 연행했다. 이어 간첩을 소탕한다는 이름으로 절을 수색하고 신도들을 연행했다. 다음날 새벽 계엄사령부는 ‘폭력배들이 난동하는 사찰을 사회 정화 차원에서 철퇴를 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나는 장전1파출소에 근무했는데 외근 형사가 범어사에서 압수한 것이라며 ‘외설 야동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는데 그것이 범어사 승방에서 압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때 이서응, 송월주 등 원로와 일반 승려, 신도 55명이 연행되었으며 98명이 조사받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또 흥국사에 연금시켜 강제로 참선 교육을 받게도 했는데, 일찍이 일제도 저지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를 ‘10.27 법란’이라 하는데 불교계가 신군부를 반대한 것을 빌리로 탄압을 가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천주교, 개신교는 건드리지 않고 만만한 불교계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다.
민주화 시대, 통일시대를 앞두고 한국불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첫머리에서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이만 줄일까 한다. 202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