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의 호신불 반가사유상과 죽지랑
半 跏 思 惟 像
화랑의 호신불 반가사유상과 죽지랑
半 跏 思 惟 像
우리나라 반가사유상 목록
황수영(전동국대 총장)
봉화석조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높이 1.75m 경북대박물관
단석산 신선사 마애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8.2m 경주 건천읍 우정동
불교는 삼국시대 유입되면서부터 이미 예배대상을 지니고 내려온 종교로 불경 이외에 불상과 불사리를 먼저들여왔을 것이다. 불상은 법당 안에, 불사리는 탑 속에 깊이 봉안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堂과 塔을 중심으로 우리의 사원이 조영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사택지적(砂宅智積)이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금을 쪼아 보배스런 법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탑을 세웠다)'는 것도 당탑을 세워 절을 이룩하였다는 말이다.
법당에 봉안되는 불상으로서는 불교가 처음 들어온 삼국시대에는 대략 세종류였다. 첫째는 여래상, 둘째는 보살상, 셋째가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은 보살상으로 미륵보살로 추정되고 있는데 형식이 여래상이나 보살상과는 달리 특이하다. 서기 6, 7세기에 걸쳐 삼국에서 모두 유행하여 삼국미술의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고대의 조각사는 이같은 반가상이 삼국에서 유행하였으므로 우리나라 불상 조각사의 첫머리를 장식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1. 半跏思惟像 樣式
반가사유상이라는 명칭은 두 가지 특징에 기인한다. 첫째는 그 자세가 둥근 의자에 걸터앉아 발하나(오른쪽)를 올려서 다른 쪽 다리 무릎 위에 얹고 있다. 둘째는 오른손을 들어 손끝을 턱에 댐으로써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첫째 특징을 '반가(半跏)'라하고 둘째는 '사유(思惟)'라 불러 반가사유양식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부를 때에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라 하는데 보통 반가상, 반가사유상이라 한다.
물론 이러한 반가사유의 불상 형식은 우리나라에 앞서 인도와 중국에서 먼저 나타난다. 인도의 반가사유상은 태자상(太子像)으로 조성된 듯 하다. 석가여래가 젊어서 왕궁을 빠져나와 속세로 들어가 수도하면서 깊은 사유에 잠겼던 당시의 모습이라고 한다. 다만 삼존 조각 가운데에는 좌우대칭으로 반가사유상을 조각한 예도 있다.
중국에서도 초기에는 태자상으로 조성된 듯 하다. 그러나 점차 시대가 흐름에 따라 용수보살(龍樹菩薩)이라 불리게 되고 당시 유행하던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에서는 태자상으로 조성된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으며, 삼국에서의 유품은 모두 미륵보살상으로 신앙을 받던 것이다. 그것도 오랜 기간동안이 아니라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삼국의 통일전쟁기간을 거쳐 통일된 초기까지 유행하였다.
현존하는 반가사유상의 유례에서 보면 삼국 중에서도 신라에서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三國時代의 半跏思惟像
반가사유상도 다른 불상과 마찬가지로 고대에서는 얻기 쉬운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무, 흙 같은 재료로 하였을 것이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직 나무의 유례가 있으나 그것은 국내가 아니고 일본에서 전하고 있다. 또 흙으로 조성된 작품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이들 재료 외에는 금속과 돌이 주요 재료가 될 것인데, 현존하는 삼국의 반가사유상은 모두가 이 두 가지 재질을 보이고 있다.
1) 高 句 麗
해방전까지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은 알려진 예가 없었으나 평양에서 발견된 반가상이 해방되면서 38선을 넘어왔다. 이 평양시내 평천리(平川里)출토의 반가사유상(國寶 제118호)은 오른손이 일부 절단되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잘 남은 편이
어서 원형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머리에는 보관흔적이 있고, 앞뒤에는 흘러내린 의문의 조각이 뚜렷하다. 몸 좌우로도 긴 띠가 흘러내려 초기 반가상의 양식을 보이며 도금흔적이 남아있다.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은 이 상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2) 百 濟
百濟의 반가사유상으로는 납석제(蠟石製)가 먼저 알려졌다. 부여 부소산(扶蘇山)의 건물터에서 발견된 납석제 반가사유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은 허리이상이 없어졌지만 하반신은 잘 남은 편으로 앞뒤로 의문이 새겨지고 좌우로 긴띠가 내려있어 근사한 형식을 보여준다.
1956년 서산에서 발견된 서산(瑞山)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國寶 제84호)의 협시가 반가상이어서 백제의 반가사유상으로서는 최대의 작품이 된다. 이 상은 일부 손상은 있으나 대좌와 광배를 갖추었고 제작이래 자기 위치를 지켜온 것이어서 백제의 불교조각을 대변하는 상이기도 하다.
석제가 아닌 불상의 유례는 많지 않은 편이나 백제 반가상 중에는 금속판으로 된 예가 있다. 김제 대목리(大木里) 발견의 동판(銅版) 반가사유상(국립전주박물관 소장)인데 사각형의 동판 중앙에 반가상 1구를 주존으로하여 좌우에 나한 입상을 새긴 것이다. 백제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형식은 앞서의 상과 동일하게 상체나형(上體裸形)을 보이고 있다.
백제 멸망후 그 유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일련의 비상(碑像) 중에도 반가상이 보이고 있다. 비암사상(碑巖寺像)은 T자형의 돌 중앙에 반가상만을 크게 새기고 좌우 양면에 보살입상을 새기고 뒷면에는 보탑을 새겨 반가상이 미륵보살임을 상징한 것을 알 수 있다. 비암사는 이외에도 아미타삼존불비상(阿彌陀三尊佛碑像)이 있어 백제 멸망후인 673년경 아미타와 미륵 양 상(兩像)에 대한 신앙의 추세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백제의 반가상은 이외에도 현재 일본에 있는 상이 몇 구가 있다. 대마도(對馬島) 정림사(淨林寺) 전래의 동제 반가사유상이나 나가노(長野)현 관송원(觀松院) 전래의 동제 반가사유상 등이 있다.
3) 古 新 羅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는 공인이후 급속한 불교문화의 발달을 보이는데 반가사유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불교를 비롯한 문화유입의 경로를 살펴보면 한강과 낙동강의 두 흐름이신라문화형성의 중요한 루트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반가상의 출토 현황과도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어 주목된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반가상은 경주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의 마애 반가사유상, 경주 남산(南山) 금동 반가사유상(國寶제83호), 현재 일본 경도(京都)에 있는 광륭사(廣隆寺) 목조 반가사유상, 경주 금산재(金山齋) 석조 반가사유상 등을 들 수 있고, 경주이외의 지역에서도 많은 반가상을 찾을 수 있는데 전 영주(榮州) 청동반가사유상, 전 안동(安東)출토 금동 반가사유상(國寶제78호) 등이 현재 삼국시대의 신라지역에서 확인되는 반가사유
상들이다. (표. 우리나라 반가사유상 목록 참조) 단석산 마애군의 반가상은 이곳이 김유신(金庾信)의 연무(練武)과정에 등장하고 있어 당시 미륵신앙과 화랑(花郞)과의 연관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불입상들이 왼손을 들어 주존으로 있는 반가상 쪽을 향하고 있어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3. 統一新羅時代의 半跏思惟像
통일신라에 들어서도 초기에는 반가상의 제작이 유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통일이후에도 한동안의 미륵신앙의 유행을 보이는 것이고, 또한 백제 멸망이후 그 유민에 의한 일련의 작품들이 충남 연기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반가상은 봉화 북지리(北枝里) 석조 반가사유상, 문경 관음리(觀音里) 석조 반가사유상, 양산 물금 출토 청동반가사유상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봉화 북지리의 반가상은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들어와 발달한 지역으로 삼국시대의 상보다 대형의 석재상으로 하반신만 남았으나 동양에서 가장 큰 반가상으로서 이웃한 평지의 마애좌상(阿彌陀佛)과 더불어 당시 신앙의 내실(內實)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신라초기 대형의 석재 반가상이후 한동안 반가상의 조영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반가상을 대신하여 입상이나 좌상의 미륵보살이 조성되었 것으로 짐작된다. 감산사(甘山寺) 미륵보살이 입상을 하고 있어 시대에 따른 미륵상 양식의 변화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반가상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직후까지 곧 6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서 유행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초기 또는 그 뒤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매우 드물게 돌이나 금동의 반가상이 조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충북 중원군 미륵리 미륵당(彌勒堂-세계사) 석실(石室)에서 반가형식의 석상이 발견되었고, 경기도 양주군 수종사탑(水鐘寺塔)에서는 작은 금동의 반가사유상이 발견된 일이 있다. 소품이며 관음보살상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또한 시대에 따르는 변천상의 하나라 할 것이다.
4. 半跏思惟像의 日本傳來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에 관한 일본의 기록에는 금동석가상과 태자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석가여래 탄생 당시의 모습을 새긴 탄생불(誕生佛)이라는 설과 반가상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이는 '돌미륵(石彌勒)'은 미륵반가사유상으로 6세기 후반에 일본으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불상 가운데 백제나 신라에서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 반가상은 대마도 정림사 전래의 반가사유상과 나가노현 관송원신사에 있는 동제 반가사유상이 백제계열(百濟系列)의 양식을 보이는 것들이며, 신라에서 전래된 것으로는 일본 경도(京都) 광륭사(廣隆寺)의 목상(木像)이 대표적이다. 이 상은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는데 해방 뒤 이 불상에 대한 일본 각 전문가의 조사와 우리의 연구에서 일본의 불상과 다른 몇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일본의 초기 반가사유상들은 모두 히노기(노송나루, 檜)를 사용하였지만 이 상은 적송(赤松)을 쓰고 있는 점이다. 적송은 일본에서도 분포하지만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적송의 산출이 많았다. 둘째, 제작기법상의 차이이다. 일본의 초기 반가상은 나무의 외피(外皮)로부터 내부를 향하여 조각하는데, 이 상은 나무의 목심(木心)에서부터 조각을 시작하고 있는 점이다. 셋째, 이 광륭사상은 한 토막 나무에서 그 전체를 조각해 낸 것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이만한 불상을 만들자면 몸의 각 부분을 여러 개의 나무로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넷째, 『일본서기』나 광륭사 관련기록에 623년 신라에서 다른 불구(佛具)들과 같이 일본에 보낸 불상에 관한 기사가 있어 이 상을 기록에 나오는 상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광륭사의 창건주(創建主)가 하다 가와가즈(泰河勝)라는 신라계의 호족으로 당시 일본의 쇼오도쿠(聖德)태자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도 고려해 볼 만 한 문제이다. 또 이 상이 경주에서 전래한 한국의 국보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와 양식이나 연대에서 닮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된다. 우리나라의 조각공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땅에서 만든 반가상도 적지 않게 일본에 전래하고 있어 일본 초기 3대 불상양식 가운데 하나인 반가사유상 또한 우리나라의 공인에 의하여 그 양식과 기술이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해외에 있는 반가사유상으로서는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Mus? Guimet)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주목할만 하다. 아마도 금세기 초에 유출된 것으로 보이는데 상반신 나체의 어린 용모와 균형잡힌 자세, 그리고 둥근 대좌를 돌아서 새겨진 옷주름의 솜씨 등으로 보아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6, 7세기경의 백제작으로 보인다.
5. 彌勒과 新羅花郞
반가사유형의 미륵보살이 삼국을 통하여 고루 유행한 사실은 발견 유품을 통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삼국이 똑같은 발달상을 이룬 것은 아니며, 각국이 신앙의 내실에 따라서 그 믿음의 깊이에는 차별이 있었을 것이고, 신앙 그 자체
도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의 미륵신앙은 삼국통일의 국가적 과업과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통일의 과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신라의 국민들은 미륵불에 대한 남다른 신앙을 지녔다고 추정된다. 김유신(金庾信)의 소년시절의 미륵불에 대한 두터운 믿음 같은 것이 또한 통일을 앞둔 신라의 젊은 지도층 사이에 널리 퍼졌던 믿음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신라 화랑(花郞)의 배후에는 미륵신앙에서 우러나는 사생관(死生觀)이 밀접하게 연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신라 화랑의 무덤앞에는 돌로 미륵상을 만들어 세우면서 그들의 환생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 경주 남산 삼화령에서 전하는 삼국 말기의 고분군과 그들을 향하여 봉안된 미륵삼존석상은 서로의 깊은 관계를 전해준다. 『삼국사기』에 죽령(竹嶺)에서 죽은 거사(居士)의 무덤 앞에 돌미륵을 두었더니 뒤에 신라의 유명한 화랑인 죽지랑(竹旨郞)으로 환생(還生)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 반가사유상은 신라 화랑들의 가장 소중한 호신불(護身佛)이였을 것이다.
불교가 들어온 초기에는 미륵신앙이 삼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미륵은 미륵불과 미륵보살이었는데, 미륵불은 먼 미래에 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제도한다고 믿었고, 그 사이는 보살의 모습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불과 보살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구별하여 조성하였고, 삼국에 이르러서는 반가사유상 양식이 되어 보급되었다.
삼국시대말부터 통일초기에 걸쳐 미륵보살상으로 신앙되고 조성된 사실은 틀림없다. 삼국 가운데 신라에서 더욱 깊은 믿음과 더욱 많은 작품이 조성된 사실도 밝혀졌다. 신라에서만 유독 많은 반가사유상이 조성되었느냐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반가사유상의 유행시기는 정확히 삼국시대의 막바지 통일 격동기에 해당하고 있기도 하다. 미륵반가사유상은 예배와 공경의 대상이며 호국, 호신의 불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하늘의 미륵보살이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신라국토에 태어나 마침내 신라의 국선(國仙 ; 으뜸의 화랑)이 된다고 믿어왔다. 곧 미륵신앙의 상생과 하생의 두가지 모습이다.
반가사유상...그 오묘한 미소
금동반가사유상....
그 힘없는듯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반가사유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반가사유상은 비슷한것이 우리 나라의 국립박물관에 2개, 그리고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일본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 등 현재까지 알려진것은 모두 3개 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지만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반가사유상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3개의 반가사유상이 모두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유사한 형태이면서도 결코 같은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두번째는 3개 모두의 정확한 출처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양식적 특성으로도 유사한 형태의 불상이 나타나지 않는 관계로 다른 불상과 비견하여 결정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문헌이나 출처를 근거로 하여 어느시대의 조성물인가를 판단해야 하지만 그 마저도 일관성이 없어 지금은 그저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이라고 명기하여 이 불상의 출처로 인한 갑론을박을 애써 피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국보 제 78호(좌)와 국보 제 83호(우)로 지정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입니다.
좌측 불상의 높이는 83.2cm,우측 불상은 93.5cm로 우측 불상이 10cm가량 높이가 높습니다. 이 두개의 비슷한 반가사유상을 자세히 눈여겨 보신다면 똑같은것 같으면서도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이 두 불상의 미술사학적 고찰과 아울러 출처에 관한 문헌과 관계자의 증언, 그리고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반가사유상에 관하여 각각의 특성을 설명하므로써 어느 시대의 불상으로 판단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실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과연 백제의 불상인가? 또는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신라불상으로 봐야 하는가?
일본의 불상을 일본인들은 비조시대의 불상으로 바득바득 우기고 있는데 과연 그들이 주장하듯 정말 일본 불상일까? 아니라면 우리의 두 개의 불상과 매우 비슷한 양식이어서 우리것인데 일본으로 건너갔던가, 또는 적어도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나라 사람이 제작한 것인가? 에 대한 고찰을 해 보는것도 바람직할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와 일본 사이에 문화교류의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는 실정으로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각각의 불상이 갖는 미적 감상기준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금동반가사유상이 갖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우선은 반가사유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알아보는것이 중요하다 할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인 셈입니다.
그리고 '사유'란 고뇌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 반가사유상은 과연 어떤 고뇌에 빠져 있는것일까요? 사유상의 출현은 출가하기전의 태자의 신분이었던 '싯다르타'가 인간이 갖는 4가지 고뇌, 즉 生老病死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고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4가지 고뇌속에서 번민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무엇을 느꼈기에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턱을 괸것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가 얼굴과는 닿은듯 만듯 정말로 손가락 전체도 아닌 점으로써 뺨과 닿아있으며, 고개는 약간 숙인채 얼굴에 담고 있는 미소....한마디로 오묘하다고 표현되는 얼굴표현에는 나름대로의 중생 구제의 방법에 대해 수만가지의 말을 뱉어낼것만 같습니다. 즉, 오랜 고뇌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중생구제의 방편을 알아냈다는 미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왼 무릎위에는 한 쪽 발을 올려놓고 있는데 엄지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분명 잔뜩 힘을 주고 있읍니다만, 미사려구를 구사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모습이 달리 보이는지 발가락의 구부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합니다만, 자연스럽다는 말은 힘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그냥 힘을 주지 않고 오른 발을 왼 무릎에 올려놓으면 전혀 지금의 모습은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은 자세히 보면 입가의 살포시 웃는 모습과 어울리게 지그시 내려깔고 중생을 굽어보듯 하는데 바로 미소와 더불어 이런 눈매가 미륵보살로서의 위엄을 한껏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반가사유상의 미소에 대해 최순우 선생은 "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초월한 것이며.......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아(閑雅 :막을수 없는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을 내쉬게조차 한다....서양인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로 여겨 '영원한 미소'라고 예찬하는데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나란히 놓는다면 모나리자의 미소 정도는 당장 안색을 잃을것임에 틀림없다" 고 하였습니다.
아주 점잖게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치켜세웠지만 다른말로 이야기 하자면 모나리자도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보면 울고 간다는 말 정도로 해석을 하면 될것입니다.
이 반가상의 머리에는 도교사상에서 나온 삼산관이 얹혀있어 간단하게 "삼관미륵"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반가사유상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시기는 1912년 입니다.
당시 이왕가박물관(일본인이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에 대한제국의 황제칭호를 깔아뭉개기 위해 조선 임금의 가계를 <왕가(王家)>로 낮춰 부르게 되었습니다)이 이 반가사유상을 입수할때는 중계인이 '경주 근처의 폐사에서 가져왔다'고 하였기에 신라의 작품으로 알았었으나 한일합방 이전부터 우리 나라의 고적을 조사해온 일본인 학자 이네다(稻田)가 '1910년 충청도에서 올라왔다'고 하는 바람에 신라것이냐 백제것이냐를 놓고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미술사>의 저자인 세키노(關野貞)는 "조산 삼국시대의 조각"에서 두 구의 미륵반가사유상을 고신라의 유물로 단정하여 '후치가미 사다스케가 총독부에 기증한 것으로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나 경상도에서 발견한듯 하다'고 기록하여 경상도 출토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후 1915년 바로 이네다의 충청도 출토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때는 구체적인 높이(2자9치7푼)가 제시되어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인정하기에는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금동, 석불, 마애불 등 모두 32구의 반가사유상이 있지만 1945년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발굴된것 이외에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의 것인지 또는 신라나 백제의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애석하게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불상이 고가에 거래되었지만 그 출처에 대한 추궁이나 법적 책임이 두려워 대부분은 오랜 동안을 숨겨 두었다가 내다 파는 악덕 골동품상(거의 일본인)들로 인하여 유물이 갖고 있는 족보가 멸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네다'의 주장대로 이 반가사유상은 충청도 지역에서 올라온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돌아가신 김원룡, 최순우 두분은 이 불상이 백제의 작품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있는 두 구의 불상이 어디것이냐 하는것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고 갑론을박 하고 있는데 엉뚱하게도 일본에서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불상에 대해 더 애써 원산지를 찾는 작업을 추진하는 일이 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금동반가사유상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국보 83호인 '삼관미륵'의 복제품이나 마찬가지로 쏙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일본의 고류지(광륭사)에 소장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불상의 원적이 어디냐에 따라 이 불상의 원적도 덩달아 원적 변경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또는 "한반도 사람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었다(대부분의 일본학자 주장)"는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주로 우리 학자들은 위의 두 가지 학설을 추종하고 일본의 학자는 자존심 때문인지 자기네 조상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분석하였다고 호들갑을 떨며 한국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나무로 일본의 해안가에 자생하는 나무라며 애써 일본내에서 제작되었음을 강조하려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래 그림은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지에 있는 또 다른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1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보다 후대인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중반의 비조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똑 같이 일본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언뜻 보아도 똑같은 목제임에도 국보 1호보다 상당히 조형미가 떨어지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아마도 국보 1호를 본뜬 불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조각 기법이나 제작기법이 국보 1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것을 사진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불상은 당연히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거나 한반도의 불상을 모방한 불상이라는 말 조차 꺼내지 못하고 일본의 비조시대의 제작품으로 인정을 하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백제계의 불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한 학자가 동국대학교의 황수영 박사였습니다.
황수영 박사는 1959년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 원래 이 불상이 경상도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세키노의 발언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불상을 이왕가박물관에 판매시 거래된 금액은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2900원이었는데 중간의 악덕 상인들이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 부터 구입을 했기에 원산지는 알 수 없는것 처럼 했기에 지금까지도 어디에서 출토가 되었는지 잘 모르게 되었지만, 최초에 이 불상에 대해 언급한 세키노의 말 처럼 "경상도"지방에서 출토되었다면 신라 땅 어디에선가 이 불상이 있던 자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경상도 신라땅을 수소문하여 이 불상이 정말로 신라의 옛 절터에서 나왔는지를 찾아보기로 한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박사(현 단국대 박물관장)와 더불어 경주지역에서 수소문한 결과 드디어 원래 이 불상이 있었던 절을 찾게 되었습니다.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옷칠이 된 위에 회분을 칠하였는데, 대부분의 목불이나 금동불은 칠을 하기전에 옷칠을 하는데 원 소유주는 옷칠 위에 다른 칠을 하지 않고 회분을 칠했던 것을 근거로 하여 수소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받게되자 경주 오릉 근처에 있던 불상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고 이소문을 접한 두 사람은 1964년 경주 남산의 산방谷에 있는 산방사라는 절의 할머니가 당시 4원(또는4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판매를 하였다는 사실과 원래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차례 방문하여 노보살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분명 신라의 불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직도 이 불상의 족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까요? 한동안은 <미술사학>에 이 문제에 관한 연구 논문이 게제되고 맞느니 틀리느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원래 그 장소에 있는것을 본적도 없을뿐만 아니라 단지 노보살(이 노보살은 그후 사망하였음)의 증언에 의존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성을 입증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입장이었고,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의 정확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계다 백제계다를 말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라계라는 확신을 가진 황수영 박사, 정영호 박사측은 신라의 불상으로 보고 있으며, 김원룡박사, 최순우 선생 등의 계열은 백제계의 불상으로 보는 것이며 두 학설간에 뚜렷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위대한 모나리자의 미소가 울고가게 할만한 이 위대한 공예품은 그저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출처가 애매모호한 반가사유상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하고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발표논문은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불상은 우리 나라에는 부지기수로 많아져서 미처 제대로된 연구가 나오기도 전에 온통 사찰에 범람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용화사상을 주로 하여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성종계열에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미륵반가사유상을 수입을 해 왔기 때문인데,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는 매우 흡사하지만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면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교한 불상이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우리 나라에 유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땅 속에 묻어두고 거름을 주거나 화학 성분을 부어 1~2년을 묻었다가 마치도 오래된 금동불에 녹이 슬은 모습으로 수입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중국인들은 이런 모조품을 만들어 우리 나라에 수출할 생각을 다 하게 되었는지 기가막힐 따름이지만 이런 문제는 제가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짝퉁 생산지인 그들의 제작 현장을 확인을 해볼 요량이며, 그 불상이 단순하게 비슷하게 만든것이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은 궁금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제 블로그의 사진도 바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지만 저도 모조품을 하나 가지고 늘 대하고 있는데 제가 소장하고 있는 모조품은 한국미술 5000년전을 기념하여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 할 때 관련자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중의 하나이며 늘 제 책상앞에서 오묘한 미소로 저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봉화석조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높이 1.75m 경북대박물관
단석산 신선사 마애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8.2m 경주 건천읍 우정동
불교는 삼국시대 유입되면서부터 이미 예배대상을 지니고 내려온 종교로 불경 이외에 불상과 불사리를 먼저들여왔을 것이다. 불상은 법당 안에, 불사리는 탑 속에 깊이 봉안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堂과 塔을 중심으로 우리의 사원이 조영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사택지적(砂宅智積)이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금을 쪼아 보배스런 법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탑을 세웠다)'는 것도 당탑을 세워 절을 이룩하였다는 말이다.
법당에 봉안되는 불상으로서는 불교가 처음 들어온 삼국시대에는 대략 세종류였다. 첫째는 여래상, 둘째는 보살상, 셋째가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은 보살상으로 미륵보살로 추정되고 있는데 형식이 여래상이나 보살상과는 달리 특이하다. 서기 6, 7세기에 걸쳐 삼국에서 모두 유행하여 삼국미술의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고대의 조각사는 이같은 반가상이 삼국에서 유행하였으므로 우리나라 불상 조각사의 첫머리를 장식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1. 半跏思惟像 樣式
반가사유상이라는 명칭은 두 가지 특징에 기인한다. 첫째는 그 자세가 둥근 의자에 걸터앉아 발하나(오른쪽)를 올려서 다른 쪽 다리 무릎 위에 얹고 있다. 둘째는 오른손을 들어 손끝을 턱에 댐으로써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첫째 특징을 '반가(半跏)'라하고 둘째는 '사유(思惟)'라 불러 반가사유양식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부를 때에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라 하는데 보통 반가상, 반가사유상이라 한다.
물론 이러한 반가사유의 불상 형식은 우리나라에 앞서 인도와 중국에서 먼저 나타난다. 인도의 반가사유상은 태자상(太子像)으로 조성된 듯 하다. 석가여래가 젊어서 왕궁을 빠져나와 속세로 들어가 수도하면서 깊은 사유에 잠겼던 당시의 모습이라고 한다. 다만 삼존 조각 가운데에는 좌우대칭으로 반가사유상을 조각한 예도 있다.
중국에서도 초기에는 태자상으로 조성된 듯 하다. 그러나 점차 시대가 흐름에 따라 용수보살(龍樹菩薩)이라 불리게 되고 당시 유행하던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에서는 태자상으로 조성된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으며, 삼국에서의 유품은 모두 미륵보살상으로 신앙을 받던 것이다. 그것도 오랜 기간동안이 아니라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삼국의 통일전쟁기간을 거쳐 통일된 초기까지 유행하였다.
현존하는 반가사유상의 유례에서 보면 삼국 중에서도 신라에서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三國時代의 半跏思惟像
반가사유상도 다른 불상과 마찬가지로 고대에서는 얻기 쉬운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무, 흙 같은 재료로 하였을 것이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직 나무의 유례가 있으나 그것은 국내가 아니고 일본에서 전하고 있다. 또 흙으로 조성된 작품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이들 재료 외에는 금속과 돌이 주요 재료가 될 것인데, 현존하는 삼국의 반가사유상은 모두가 이 두 가지 재질을 보이고 있다.
1) 高 句 麗
해방전까지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은 알려진 예가 없었으나 평양에서 발견된 반가상이 해방되면서 38선을 넘어왔다. 이 평양시내 평천리(平川里)출토의 반가사유상(國寶 제118호)은 오른손이 일부 절단되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잘 남은 편이
어서 원형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머리에는 보관흔적이 있고, 앞뒤에는 흘러내린 의문의 조각이 뚜렷하다. 몸 좌우로도 긴 띠가 흘러내려 초기 반가상의 양식을 보이며 도금흔적이 남아있다.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은 이 상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2) 百 濟
百濟의 반가사유상으로는 납석제(蠟石製)가 먼저 알려졌다. 부여 부소산(扶蘇山)의 건물터에서 발견된 납석제 반가사유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은 허리이상이 없어졌지만 하반신은 잘 남은 편으로 앞뒤로 의문이 새겨지고 좌우로 긴띠가 내려있어 근사한 형식을 보여준다.
1956년 서산에서 발견된 서산(瑞山)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國寶 제84호)의 협시가 반가상이어서 백제의 반가사유상으로서는 최대의 작품이 된다. 이 상은 일부 손상은 있으나 대좌와 광배를 갖추었고 제작이래 자기 위치를 지켜온 것이어서 백제의 불교조각을 대변하는 상이기도 하다.
석제가 아닌 불상의 유례는 많지 않은 편이나 백제 반가상 중에는 금속판으로 된 예가 있다. 김제 대목리(大木里) 발견의 동판(銅版) 반가사유상(국립전주박물관 소장)인데 사각형의 동판 중앙에 반가상 1구를 주존으로하여 좌우에 나한 입상을 새긴 것이다. 백제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형식은 앞서의 상과 동일하게 상체나형(上體裸形)을 보이고 있다.
백제 멸망후 그 유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일련의 비상(碑像) 중에도 반가상이 보이고 있다. 비암사상(碑巖寺像)은 T자형의 돌 중앙에 반가상만을 크게 새기고 좌우 양면에 보살입상을 새기고 뒷면에는 보탑을 새겨 반가상이 미륵보살임을 상징한 것을 알 수 있다. 비암사는 이외에도 아미타삼존불비상(阿彌陀三尊佛碑像)이 있어 백제 멸망후인 673년경 아미타와 미륵 양 상(兩像)에 대한 신앙의 추세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백제의 반가상은 이외에도 현재 일본에 있는 상이 몇 구가 있다. 대마도(對馬島) 정림사(淨林寺) 전래의 동제 반가사유상이나 나가노(長野)현 관송원(觀松院) 전래의 동제 반가사유상 등이 있다.
3) 古 新 羅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는 공인이후 급속한 불교문화의 발달을 보이는데 반가사유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불교를 비롯한 문화유입의 경로를 살펴보면 한강과 낙동강의 두 흐름이신라문화형성의 중요한 루트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반가상의 출토 현황과도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어 주목된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반가상은 경주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의 마애 반가사유상, 경주 남산(南山) 금동 반가사유상(國寶제83호), 현재 일본 경도(京都)에 있는 광륭사(廣隆寺) 목조 반가사유상, 경주 금산재(金山齋) 석조 반가사유상 등을 들 수 있고, 경주이외의 지역에서도 많은 반가상을 찾을 수 있는데 전 영주(榮州) 청동반가사유상, 전 안동(安東)출토 금동 반가사유상(國寶제78호) 등이 현재 삼국시대의 신라지역에서 확인되는 반가사유
상들이다. (표. 우리나라 반가사유상 목록 참조) 단석산 마애군의 반가상은 이곳이 김유신(金庾信)의 연무(練武)과정에 등장하고 있어 당시 미륵신앙과 화랑(花郞)과의 연관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불입상들이 왼손을 들어 주존으로 있는 반가상 쪽을 향하고 있어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3. 統一新羅時代의 半跏思惟像
통일신라에 들어서도 초기에는 반가상의 제작이 유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통일이후에도 한동안의 미륵신앙의 유행을 보이는 것이고, 또한 백제 멸망이후 그 유민에 의한 일련의 작품들이 충남 연기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반가상은 봉화 북지리(北枝里) 석조 반가사유상, 문경 관음리(觀音里) 석조 반가사유상, 양산 물금 출토 청동반가사유상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봉화 북지리의 반가상은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들어와 발달한 지역으로 삼국시대의 상보다 대형의 석재상으로 하반신만 남았으나 동양에서 가장 큰 반가상으로서 이웃한 평지의 마애좌상(阿彌陀佛)과 더불어 당시 신앙의 내실(內實)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신라초기 대형의 석재 반가상이후 한동안 반가상의 조영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반가상을 대신하여 입상이나 좌상의 미륵보살이 조성되었 것으로 짐작된다. 감산사(甘山寺) 미륵보살이 입상을 하고 있어 시대에 따른 미륵상 양식의 변화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반가상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직후까지 곧 6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서 유행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초기 또는 그 뒤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매우 드물게 돌이나 금동의 반가상이 조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충북 중원군 미륵리 미륵당(彌勒堂-세계사) 석실(石室)에서 반가형식의 석상이 발견되었고, 경기도 양주군 수종사탑(水鐘寺塔)에서는 작은 금동의 반가사유상이 발견된 일이 있다. 소품이며 관음보살상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또한 시대에 따르는 변천상의 하나라 할 것이다.
4. 半跏思惟像의 日本傳來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에 관한 일본의 기록에는 금동석가상과 태자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석가여래 탄생 당시의 모습을 새긴 탄생불(誕生佛)이라는 설과 반가상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이는 '돌미륵(石彌勒)'은 미륵반가사유상으로 6세기 후반에 일본으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불상 가운데 백제나 신라에서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 반가상은 대마도 정림사 전래의 반가사유상과 나가노현 관송원신사에 있는 동제 반가사유상이 백제계열(百濟系列)의 양식을 보이는 것들이며, 신라에서 전래된 것으로는 일본 경도(京都) 광륭사(廣隆寺)의 목상(木像)이 대표적이다. 이 상은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는데 해방 뒤 이 불상에 대한 일본 각 전문가의 조사와 우리의 연구에서 일본의 불상과 다른 몇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일본의 초기 반가사유상들은 모두 히노기(노송나루, 檜)를 사용하였지만 이 상은 적송(赤松)을 쓰고 있는 점이다. 적송은 일본에서도 분포하지만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적송의 산출이 많았다. 둘째, 제작기법상의 차이이다. 일본의 초기 반가상은 나무의 외피(外皮)로부터 내부를 향하여 조각하는데, 이 상은 나무의 목심(木心)에서부터 조각을 시작하고 있는 점이다. 셋째, 이 광륭사상은 한 토막 나무에서 그 전체를 조각해 낸 것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이만한 불상을 만들자면 몸의 각 부분을 여러 개의 나무로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넷째, 『일본서기』나 광륭사 관련기록에 623년 신라에서 다른 불구(佛具)들과 같이 일본에 보낸 불상에 관한 기사가 있어 이 상을 기록에 나오는 상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광륭사의 창건주(創建主)가 하다 가와가즈(泰河勝)라는 신라계의 호족으로 당시 일본의 쇼오도쿠(聖德)태자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도 고려해 볼 만 한 문제이다. 또 이 상이 경주에서 전래한 한국의 국보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와 양식이나 연대에서 닮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된다. 우리나라의 조각공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땅에서 만든 반가상도 적지 않게 일본에 전래하고 있어 일본 초기 3대 불상양식 가운데 하나인 반가사유상 또한 우리나라의 공인에 의하여 그 양식과 기술이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해외에 있는 반가사유상으로서는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Mus? Guimet)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주목할만 하다. 아마도 금세기 초에 유출된 것으로 보이는데 상반신 나체의 어린 용모와 균형잡힌 자세, 그리고 둥근 대좌를 돌아서 새겨진 옷주름의 솜씨 등으로 보아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6, 7세기경의 백제작으로 보인다.
5. 彌勒과 新羅花郞
반가사유형의 미륵보살이 삼국을 통하여 고루 유행한 사실은 발견 유품을 통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삼국이 똑같은 발달상을 이룬 것은 아니며, 각국이 신앙의 내실에 따라서 그 믿음의 깊이에는 차별이 있었을 것이고, 신앙 그 자체
도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의 미륵신앙은 삼국통일의 국가적 과업과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통일의 과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신라의 국민들은 미륵불에 대한 남다른 신앙을 지녔다고 추정된다. 김유신(金庾信)의 소년시절의 미륵불에 대한 두터운 믿음 같은 것이 또한 통일을 앞둔 신라의 젊은 지도층 사이에 널리 퍼졌던 믿음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신라 화랑(花郞)의 배후에는 미륵신앙에서 우러나는 사생관(死生觀)이 밀접하게 연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신라 화랑의 무덤앞에는 돌로 미륵상을 만들어 세우면서 그들의 환생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 경주 남산 삼화령에서 전하는 삼국 말기의 고분군과 그들을 향하여 봉안된 미륵삼존석상은 서로의 깊은 관계를 전해준다. 『삼국사기』에 죽령(竹嶺)에서 죽은 거사(居士)의 무덤 앞에 돌미륵을 두었더니 뒤에 신라의 유명한 화랑인 죽지랑(竹旨郞)으로 환생(還生)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 반가사유상은 신라 화랑들의 가장 소중한 호신불(護身佛)이였을 것이다.
불교가 들어온 초기에는 미륵신앙이 삼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미륵은 미륵불과 미륵보살이었는데, 미륵불은 먼 미래에 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제도한다고 믿었고, 그 사이는 보살의 모습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불과 보살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구별하여 조성하였고, 삼국에 이르러서는 반가사유상 양식이 되어 보급되었다.
삼국시대말부터 통일초기에 걸쳐 미륵보살상으로 신앙되고 조성된 사실은 틀림없다. 삼국 가운데 신라에서 더욱 깊은 믿음과 더욱 많은 작품이 조성된 사실도 밝혀졌다. 신라에서만 유독 많은 반가사유상이 조성되었느냐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반가사유상의 유행시기는 정확히 삼국시대의 막바지 통일 격동기에 해당하고 있기도 하다. 미륵반가사유상은 예배와 공경의 대상이며 호국, 호신의 불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하늘의 미륵보살이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신라국토에 태어나 마침내 신라의 국선(國仙 ; 으뜸의 화랑)이 된다고 믿어왔다. 곧 미륵신앙의 상생과 하생의 두가지 모습이다.
반가사유상...그 오묘한 미소
금동반가사유상....
그 힘없는듯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반가사유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반가사유상은 비슷한것이 우리 나라의 국립박물관에 2개, 그리고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일본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 등 현재까지 알려진것은 모두 3개 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지만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반가사유상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3개의 반가사유상이 모두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유사한 형태이면서도 결코 같은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두번째는 3개 모두의 정확한 출처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양식적 특성으로도 유사한 형태의 불상이 나타나지 않는 관계로 다른 불상과 비견하여 결정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문헌이나 출처를 근거로 하여 어느시대의 조성물인가를 판단해야 하지만 그 마저도 일관성이 없어 지금은 그저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이라고 명기하여 이 불상의 출처로 인한 갑론을박을 애써 피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국보 제 78호(좌)와 국보 제 83호(우)로 지정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입니다.
좌측 불상의 높이는 83.2cm,우측 불상은 93.5cm로 우측 불상이 10cm가량 높이가 높습니다. 이 두개의 비슷한 반가사유상을 자세히 눈여겨 보신다면 똑같은것 같으면서도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이 두 불상의 미술사학적 고찰과 아울러 출처에 관한 문헌과 관계자의 증언, 그리고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반가사유상에 관하여 각각의 특성을 설명하므로써 어느 시대의 불상으로 판단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실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과연 백제의 불상인가? 또는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신라불상으로 봐야 하는가?
일본의 불상을 일본인들은 비조시대의 불상으로 바득바득 우기고 있는데 과연 그들이 주장하듯 정말 일본 불상일까? 아니라면 우리의 두 개의 불상과 매우 비슷한 양식이어서 우리것인데 일본으로 건너갔던가, 또는 적어도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나라 사람이 제작한 것인가? 에 대한 고찰을 해 보는것도 바람직할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와 일본 사이에 문화교류의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는 실정으로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각각의 불상이 갖는 미적 감상기준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금동반가사유상이 갖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우선은 반가사유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알아보는것이 중요하다 할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인 셈입니다.
그리고 '사유'란 고뇌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 반가사유상은 과연 어떤 고뇌에 빠져 있는것일까요? 사유상의 출현은 출가하기전의 태자의 신분이었던 '싯다르타'가 인간이 갖는 4가지 고뇌, 즉 生老病死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고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4가지 고뇌속에서 번민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무엇을 느꼈기에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턱을 괸것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가 얼굴과는 닿은듯 만듯 정말로 손가락 전체도 아닌 점으로써 뺨과 닿아있으며, 고개는 약간 숙인채 얼굴에 담고 있는 미소....한마디로 오묘하다고 표현되는 얼굴표현에는 나름대로의 중생 구제의 방법에 대해 수만가지의 말을 뱉어낼것만 같습니다. 즉, 오랜 고뇌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중생구제의 방편을 알아냈다는 미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왼 무릎위에는 한 쪽 발을 올려놓고 있는데 엄지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분명 잔뜩 힘을 주고 있읍니다만, 미사려구를 구사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모습이 달리 보이는지 발가락의 구부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합니다만, 자연스럽다는 말은 힘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그냥 힘을 주지 않고 오른 발을 왼 무릎에 올려놓으면 전혀 지금의 모습은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은 자세히 보면 입가의 살포시 웃는 모습과 어울리게 지그시 내려깔고 중생을 굽어보듯 하는데 바로 미소와 더불어 이런 눈매가 미륵보살로서의 위엄을 한껏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반가사유상의 미소에 대해 최순우 선생은 "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초월한 것이며.......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아(閑雅 :막을수 없는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을 내쉬게조차 한다....서양인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로 여겨 '영원한 미소'라고 예찬하는데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나란히 놓는다면 모나리자의 미소 정도는 당장 안색을 잃을것임에 틀림없다" 고 하였습니다.
아주 점잖게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치켜세웠지만 다른말로 이야기 하자면 모나리자도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보면 울고 간다는 말 정도로 해석을 하면 될것입니다.
이 반가상의 머리에는 도교사상에서 나온 삼산관이 얹혀있어 간단하게 "삼관미륵"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반가사유상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시기는 1912년 입니다.
당시 이왕가박물관(일본인이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에 대한제국의 황제칭호를 깔아뭉개기 위해 조선 임금의 가계를 <왕가(王家)>로 낮춰 부르게 되었습니다)이 이 반가사유상을 입수할때는 중계인이 '경주 근처의 폐사에서 가져왔다'고 하였기에 신라의 작품으로 알았었으나 한일합방 이전부터 우리 나라의 고적을 조사해온 일본인 학자 이네다(稻田)가 '1910년 충청도에서 올라왔다'고 하는 바람에 신라것이냐 백제것이냐를 놓고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미술사>의 저자인 세키노(關野貞)는 "조산 삼국시대의 조각"에서 두 구의 미륵반가사유상을 고신라의 유물로 단정하여 '후치가미 사다스케가 총독부에 기증한 것으로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나 경상도에서 발견한듯 하다'고 기록하여 경상도 출토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후 1915년 바로 이네다의 충청도 출토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때는 구체적인 높이(2자9치7푼)가 제시되어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인정하기에는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금동, 석불, 마애불 등 모두 32구의 반가사유상이 있지만 1945년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발굴된것 이외에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의 것인지 또는 신라나 백제의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애석하게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불상이 고가에 거래되었지만 그 출처에 대한 추궁이나 법적 책임이 두려워 대부분은 오랜 동안을 숨겨 두었다가 내다 파는 악덕 골동품상(거의 일본인)들로 인하여 유물이 갖고 있는 족보가 멸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네다'의 주장대로 이 반가사유상은 충청도 지역에서 올라온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돌아가신 김원룡, 최순우 두분은 이 불상이 백제의 작품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있는 두 구의 불상이 어디것이냐 하는것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고 갑론을박 하고 있는데 엉뚱하게도 일본에서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불상에 대해 더 애써 원산지를 찾는 작업을 추진하는 일이 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금동반가사유상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국보 83호인 '삼관미륵'의 복제품이나 마찬가지로 쏙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일본의 고류지(광륭사)에 소장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불상의 원적이 어디냐에 따라 이 불상의 원적도 덩달아 원적 변경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또는 "한반도 사람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었다(대부분의 일본학자 주장)"는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주로 우리 학자들은 위의 두 가지 학설을 추종하고 일본의 학자는 자존심 때문인지 자기네 조상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분석하였다고 호들갑을 떨며 한국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나무로 일본의 해안가에 자생하는 나무라며 애써 일본내에서 제작되었음을 강조하려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래 그림은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지에 있는 또 다른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1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보다 후대인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중반의 비조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똑 같이 일본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언뜻 보아도 똑같은 목제임에도 국보 1호보다 상당히 조형미가 떨어지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아마도 국보 1호를 본뜬 불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조각 기법이나 제작기법이 국보 1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것을 사진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불상은 당연히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거나 한반도의 불상을 모방한 불상이라는 말 조차 꺼내지 못하고 일본의 비조시대의 제작품으로 인정을 하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백제계의 불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한 학자가 동국대학교의 황수영 박사였습니다.
황수영 박사는 1959년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 원래 이 불상이 경상도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세키노의 발언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불상을 이왕가박물관에 판매시 거래된 금액은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2900원이었는데 중간의 악덕 상인들이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 부터 구입을 했기에 원산지는 알 수 없는것 처럼 했기에 지금까지도 어디에서 출토가 되었는지 잘 모르게 되었지만, 최초에 이 불상에 대해 언급한 세키노의 말 처럼 "경상도"지방에서 출토되었다면 신라 땅 어디에선가 이 불상이 있던 자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경상도 신라땅을 수소문하여 이 불상이 정말로 신라의 옛 절터에서 나왔는지를 찾아보기로 한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박사(현 단국대 박물관장)와 더불어 경주지역에서 수소문한 결과 드디어 원래 이 불상이 있었던 절을 찾게 되었습니다.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옷칠이 된 위에 회분을 칠하였는데, 대부분의 목불이나 금동불은 칠을 하기전에 옷칠을 하는데 원 소유주는 옷칠 위에 다른 칠을 하지 않고 회분을 칠했던 것을 근거로 하여 수소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받게되자 경주 오릉 근처에 있던 불상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고 이소문을 접한 두 사람은 1964년 경주 남산의 산방谷에 있는 산방사라는 절의 할머니가 당시 4원(또는4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판매를 하였다는 사실과 원래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차례 방문하여 노보살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분명 신라의 불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직도 이 불상의 족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까요? 한동안은 <미술사학>에 이 문제에 관한 연구 논문이 게제되고 맞느니 틀리느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원래 그 장소에 있는것을 본적도 없을뿐만 아니라 단지 노보살(이 노보살은 그후 사망하였음)의 증언에 의존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성을 입증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입장이었고,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의 정확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계다 백제계다를 말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라계라는 확신을 가진 황수영 박사, 정영호 박사측은 신라의 불상으로 보고 있으며, 김원룡박사, 최순우 선생 등의 계열은 백제계의 불상으로 보는 것이며 두 학설간에 뚜렷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위대한 모나리자의 미소가 울고가게 할만한 이 위대한 공예품은 그저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출처가 애매모호한 반가사유상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하고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발표논문은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불상은 우리 나라에는 부지기수로 많아져서 미처 제대로된 연구가 나오기도 전에 온통 사찰에 범람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용화사상을 주로 하여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성종계열에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미륵반가사유상을 수입을 해 왔기 때문인데,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는 매우 흡사하지만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면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교한 불상이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우리 나라에 유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땅 속에 묻어두고 거름을 주거나 화학 성분을 부어 1~2년을 묻었다가 마치도 오래된 금동불에 녹이 슬은 모습으로 수입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중국인들은 이런 모조품을 만들어 우리 나라에 수출할 생각을 다 하게 되었는지 기가막힐 따름이지만 이런 문제는 제가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짝퉁 생산지인 그들의 제작 현장을 확인을 해볼 요량이며, 그 불상이 단순하게 비슷하게 만든것이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은 궁금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제 블로그의 사진도 바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지만 저도 모조품을 하나 가지고 늘 대하고 있는데 제가 소장하고 있는 모조품은 한국미술 5000년전을 기념하여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 할 때 관련자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중의 하나이며 늘 제 책상앞에서 오묘한 미소로 저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