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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
일본열도의 탄생신화
본 열도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부부이자 남매인 두 신의 포옹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가장 먼저 흡혈아가 태어났고, 두 번째로 일련의 섬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 후 두 신은 태양의 여신을 낳았는데, 이 여신이 일본 황족에게 황실의 징표로 구리 거울과 쇠검, 보석을 하사했다 해서 일본인들은 황실의 직접적인 기원을 이 신들에게서 찾고 있다.
조몽(繩文) 문화
일본열도는 아시아 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약 6만년 전에 대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조몽이란 토기 형태(새끼줄 무늬)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들은 돌·나무·동물 등 모든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으며, 주술로써 영혼을 달래어 생활의 안전을 기원했다.
유적으로부터 호두·밤·도토리 등이 출토되어 식량으로 이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6000년쯤 전에 도토리의 떫은 맛을 제거하는 물표백법이 개발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물표백 기술의 개발에 의해 급속히 발전했으며 정착성이 높은 대규모의 취락이 생겨났다.
토우 등의 의례유물이 늘어나고 계급발생을 나타내는 돌로 만든 귀걸이나 조개로 만든 팔찌도 발견된다. 조몽시대는 약 4000년전 최성기를 맞이하고 동일본이 그 중심지였다.
유적으로 추산한 당시의 인구는 27만명이고, 그 후 화전과 벼농사 기술이 대륙으로부터 들어왔지만, 큰 사회적 혼란없이 이를 받아들여 한층 더 문화적 발달을 보였다. 이와 같은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약 만년 전부터 8000년 정도 계속되었다.
야요이(彌生) 문화
기원전 3세기경 벼농사가 시작되고 동이나 철 등의 금속기가 사용되었다. 벼농사 기술은 중국남부로 부터 직접, 혹은 한반도 남부를 경유하여 전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이로인해 일본은 수렵채집경제에서 본격적인 농경시대로 이행해 갔다.
벼농사로 인해 저지에 촌락을 형성했다. 한편, 토기는 전시대의 것보다 튼튼하고 모양도 더 세련되었다. 이들 토기가 토오쿄오 분쿄오구의 야요이쵸오(彌生町)에서 최초로 발견되어 야요이식 토기라고 부르고, 기원전 3세기경부터 약 600년간을 야요이시대라고 한다.
야마토(大和) 시대
4세기경, 야마토지방(지금의 나라현)의 호족세력이 연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야마토정권을 성립시켰다. 야마토정권은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중앙의 정치조직을 정비하고 야마토라는 국가를 세우고 지배자를 대왕으로 불렀다.
이때의 귀족들은 자신의 소장품과 함께 고분에 묻혔는데 현재 수천 개의 고분군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고훈(古墳)시대라고도 한다. 고분중 가장 큰 것은 사까이시(堺市)에 있는 닌토쿠천황(仁德天皇) 무덤이다. 당시의 고분은 앞이 4각형이고 뒤가 원형인 전방후원분이 많으며, 고분 주위에 인간, 동물, 집, 배 등의 모양을 한 토기(하니와)를 배치하고 있다.
서기 5세기경 한반도나 중국대륙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살게 되었다. 이들의 앞선 기술이나 지식을 통해 일본인의 생활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보여진다. 유교서적과 불교경전이나 불상이 한반도에서 전파되어 일본의 학문, 사상, 종교, 예술등의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전래된 불교로 인해 왕실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쇼토쿠 태자에 의해 불교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의 도덕 법전을 공포하고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 야마토의 이카루(斑鳩)에 호오류우지(法隆寺)를 세웠다.이절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으며, 이곳에는 석가삼존상을 비롯하여 훌륭한 미술·공예품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나라에 있는 츄우구우지(中宮寺), 쿄오토에 있는 코오류우지(廣隆寺)에도 예술성이 뛰어난 미륵보살상이 남아 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야마토의 아스카(飛鳥)나 이카루를 중심으로 번성했기 때문에 아스카문화 라고 부른다. 아스카문화는 대륙의 영향이 강하여, 멀리 그리이스나 서아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적지 않다.
6세기 중엽, 쇼토쿠 왕자는 호족과 손을 잡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의 기초를 닦기위해 노력했는데, 우선 관위 12계를 만들어 관리들의 순위를 정하고, 능력있는 자를 관리로 발탁했다. 그는 또 사신과 유학생등을 중국에 파견 (견수사), 선진문화 수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또한, 쇼토쿠 태자의 사후, 황태자인 나까노 오오에(中大兄)와 호족의 한 사람인 나까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 등은 645년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이것을 大化의 改新이라고 한다. 大化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연호로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나라(奈良) 시대
천황이 바뀔 때마다 수도가 바뀌던 전통이 폐지되고 처음으로 항구적인 수도를 세웠다. 서기 710년, 조정은 중국의 당왕조의 수도인 장안을 모델 삼아, 나라에 헤에죠오교오(平城京)라는 도읍을 건설했다.
넓은 도로를 만들고, 궁전, 귀족들의 저택, 절 등을 세웠으며, 형형색색의 기와지붕과 기둥, 흰 벽의 당나라풍의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는 새로운 도읍지는 마치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비록 75년이란 짧은 기간동안 이었지만 귀족 문화가 발달했고,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국가의 보호 아래 불교가 크게 번성했다. 또한 일본이란 국호가 정식으로 사용되었고, 천황의 세력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중국의 후원하에 나라는 문화적으로 융성했다. 일본 왕실은 사신들을 바다 건너로 보냈고, 그들에게 서적들과 정부의 학자들, 철학과 종교를 가지고 오도록 했다. 나라시대 중반, 계속되는 흉작과 전염병의 유행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귀족과 승려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불심이 깊었던 쇼오무 천황(聖武天皇)은 부처의 힘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라에다 토오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고, 그 안에 본존으로 높이가 16m나 되는 금동대불을 만들었다. 토오다이지 바로 옆에 쇼오소오잉(正倉院)이 있는데, 이것은 쇼오무 천황이 사용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지금도 수많은 보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중국이나 인도, 페르시아 등으로 부터 수입된 진귀한 공예품도 섞여 있다.
한편,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여러차례 견당사를 파견, 당왕조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텐표오 문화(天平文化)라고 불려지는 이 시대에는 불교문화가 고도로 발전했다. 국가에 의한 당문화의 적극적인 섭취를 반영하여, 현란한 문화의 추진자는 귀족계급이었으며, 중앙편중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万葉集』와 같이 각계 각층 사람들의 적나라한 생활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생겨났으며, 천황 가문의 유서 깊음과 그 권력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사편찬이 국가적 사업으로 거행된 것은 당나라에 대한 일본의 국가 의식의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헤이안(平安) 시대
칸무(桓武)천황이 혼란한 정계의 기풍을 일신하고 율령정치를 쇄신하기 위해 794년 헤이안쿄오(平安京=오늘날의 교토)로 수도를 옮겨 400년간의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역시 중국을 모방해 세워졌으며, 궁정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이기도 하다. 즉, 앞시대와 마찬가지로 귀족문화이긴 하지만 종래의 唐風文化와는 달리 문화의 일본화가 진척되어 國風文化가 꽃을 피우게 된다.
국풍문화는 당풍문화를 일본적으로 소화시켜 생겨난 귀족문화로서, 수도인 쿄오토에 사는 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하여 우미·화려하긴 하지만, 시야가 좁고 매우 감각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일본문학인데, 그 기초가 된 것은 바로 카나문자의 발명이었다. 카타카나는 한자의 획에서 생겨난 것으로, 주로 승려들 사이에서 발달했으며, 히라가나는 한자의 초서에서 발달한 것으로 처음에는 여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女手라고도 불렸다). 이로인해 그들의 생활감정을 자유롭게,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궁중에 출사한 여자들이 이 카나문자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모노가타리(物語=일종의 소설), 수필 등을 많이 남겼다. 일본의 모든 산문중 최고봉인 <겐지 이야기>는 1000년경에 황후의 시녀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는 설도 있다.
여성들은 12겹의 기모노를 입기 시작했는데, 색깔과 무늬에 따라 계층과 계절, 상황을 나타냈다. 이들은 머리카락을 바닥에 닿도록 길렀으며 태양을 보지 않았고 병풍과 가리개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했다.
헤이안 중기 이후 귀족들이 교토에서 영화를 누릴때, 지방에서는 새로운 계급층인 무사들이 세력을 다지고 있었다. 이들 무사들은 유력 호족을 중심으로 단결하게끔 되어 무사단(武士團)을 형성하게 되었다.
Tips) 사무라이의 역사
헤이안(784~1192) 중기 이후 후지와라씨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계급들이 쿄오토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새로운 계급층인 무사들이 세력을 다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방의 토호나 부농들이 자기의 토지를 지키고, 자기 영지내의 농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생겨난 계층이다. 이들 무사들은 유력한 호족을 중심으로 단결하게끔 되어 무사단(武士團)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겐지(源氏,미나모토)와 헤이지(平氏,타이라)였다.
11세기 중엽, 후지와라씨들의 권력이 약해진 틈을 노려, 시라까와(白河)천황은 상황이 되어 원정정치를 펴면서,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 후 12세기 중엽 상황과 천황의 대립이 생기자 겐지는 상황측에서, 헤이지는 천황측에서 싸웠다.(호오겐·헤이지의 난) 무사들은 이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는 정치의 실권을 잡고, 1167년에 태정대신에까지 올라 平氏들의 권력은 극에 달했다. 平氏들의 권력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고시라까와법황(後白河法皇)은 겐지세력과 결탁,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平氏들을 전멸시키고, 源氏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平氏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조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고, 카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여 무사정권을 수립했다. 카마쿠라 막부는 이후 약 140년간 지속되는데, 이 기간을 카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이 때부터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700여년간 무사들에 의한 군사독재정치가 지속된다.카마쿠라막부의 성립은 종래의 귀족정권에 대해 무사가 독자적 정권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며, 이는 장군과 그 부하(고케닌=御家人이라고 함)가 토지를 매개로 맺은 주종관계를 그 기초로 하고 있으며, 막부는 그중 유력한 자를 슈우고(守護)·지토오(地頭)로 임명하여 전국적 지배를 실시했다. 하지만, 정권의 구조 자체에는 고대적 성격이 남아 있었고, 쿄오토에는 천황과 귀족들의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마쿠라 막부는 봉건제도 형성의 한 단계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즉, 카마쿠라 시대는 公·武 2중정권의 시대였던 것이다.
요리토모가 죽자, 그의 처인 마사코(政子)의 친정인 호오죠(北條)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싯켄(執權) 정치를 하게 된다. 13세기 후반,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원정(1274, 1281)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두 번 모두 태풍의 덕택으로 여·원 연합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하층민의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어 불만이 누적, 막부의 세력을 따르지 않게 되고 막부의 세력은 현격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 고다이고 천황은, 카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 시대 정치의 이중성은 문화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전통적 귀족문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신흥 무사계급이 갖는 실질적이고 강건한 기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생겨나고, 또 무사계급은 고전문화를 받아들여 무가의 독자적인 문화도 창출해 냈다. 그 경우, 문화의 창조에 민중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점과 송나라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는 전란이 계속되는 불안한 세태였기 때문에, 무사나 백성들은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불교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것은 헤이안 시대의 불교가 엄격한 계율이나 학물을 중요시 한 것과는 달리, 알기 쉽고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신란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정토진종을 열고, 니찌렌은 남묘호오렝게쿄오를 외우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일련종을 개창했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은 무사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다. 좌선을 통해 정신을 단련시키는 선종의 엄격함이 무사들의 심정과 일치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의나 경전을 갖지 못하고 있던 일본 고유의 신도도 이 무렵, 이세신궁의 신관이 불교 등의 교의를 참고로 해서 신도의 이론적인 기초를 정립하려고 했다.
무로마찌시대(室町時代)인 1334년, 고다이고천황은, 천황 중심의 정치를 부활시켰다. (建武의 중흥) 그러나 그것은 고대적인 천황과 귀족정치의 이상을 쫓는 것이었고, 무사계급의 요구나 의향을 무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무사들의 불만을 샀다. 그중 가장 유력한 무사였던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반란을 일으켜 쿄오토로 쳐들어 가자, 천황은 요시노(지금의 나라 현)로 도망쳐 버렸다. 1336년, 타카우지는 쿄오토에서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고(북조), 1338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쿄오토에서 막부를 개설했다. 이 아시카가막부는 타카우지의 손자인 3대 장군 요시미쯔가 쿄오토의 무로마찌에 화려한 저택을 지어 그곳을 막부로 이용했기 때문에 무로마찌막부라고 하고, 이 시대를 무로마찌시대라고 한다. 한편, 요시노로 도망간 고다이고천황은, 거기에서 조정(남조)을 세웠기 때문에 두 개의 조정이 대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시대를 특히 남북조시대(1336-1392)라고 부른다.
무로마찌막부는 카마쿠라막부보다도 장군과 무사의 유대가 약했기 때문에, 유력한 슈우고는 자신의 소유지를 확장하고, 군사력을 양성, 그 지역을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슈우고를 슈우고 다이묘오(守護大名)라고 한다. 카마쿠라시대 말기부터 왜구가 한반도와 중국에 걸친 해역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요시미쯔는 그것을 단속하여 중국의 명왕조와 정식 무역을 개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467년, 8대 장군 요시마사의 때, 장군의 후계문제를 놓고 무사들은 두 파로 나뉘어, 쿄오토를 중심으로 전란이 11년간이나 계속되었다(오오닌의 난). 이 싸움으로 말미암아 장군의 힘이 약화되고, 장원제등이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실력만 있으면, 신분이 아래인 자가 윗사람을 제거하고 지배자가 된다고 하는 하극상의 사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가 100여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고 하고, 이 시대의 새로운 지배자들을 센고쿠다이묘오(戰國大名)라고 한다.
가마쿠라(鎌倉) 시대
헤이안시대 말에 일어난 중앙귀족과 지방호족 사이의 권력쟁탈전에서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조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고,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여 무사정권을 수립했다. 이때부터 무사도 정신이 확립되었고, 명치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700여년간 무사들에 의한 군사독재정치가 지속되었다.
정권구조 자체는 고대적 성격이 아직 남아있어 교토에는 천황과 귀족들의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는 봉건제도 형성의 한 단계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 즉, 公·武 2중정권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3세기 후반, 여·원 연합군의 일본원정(1274, 1281)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두 번 모두 살인적인 태풍에 의해 여·원 연합군의 침략선을 난파시켰다. 이 태풍을 가미가제(神風), 즉 ‘신성한 바람’이라고 불렀으며,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외국 침략에 직면했을 때 이말이 다시 유행했다.
문화면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귀족문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신흥 무사계급이 갖는 실질적이고 강건한 기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생겨나고, 또 무사계급은 고전문화를 받아들여 무가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했다.
이 시대는 전란이 계속되는 불안한 세태였기 때문에, 무사나 백성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불교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것은 헤이안 시대의 불교가 엄격한 계율이나 학문을 중요시 한 것과는 달리, 알기 쉽고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은 무사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는데, 이는 좌선을 통해 정신을 단련시키는 선종의 엄격함이 무사들의 심정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교의나 경전이 없었던 신도도 이 무렵, 이세신궁의 신관이 불교 등의 교의를 참고로 해서 이론적인 기초를 정립하려 했다.
Tips) “섬기는 사람” 사무라이
군주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개인의 윤리로 확립시킨 사무라이는 칼로써 주군을 섬겼으며 전쟁의 신인 하치마와 검을 숭배했다. 명예를 보존하는 방법인 할복자살(세푸코, 하라키리)도 이들로부터 유래되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
무사들에 의해 여러차례 계속되는 반란끝에 아시카가 막부는 타카우지의 손자인 3대 장군 요시미쯔가 교토 무로마치에 화려한 저택을 지어 막부로 이용했기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라 하고, 이 시대를 무로마치시대라고 한다. 고다이고 천황 역시 도피처에서 조정(남조)을 세웠기 때문에 두 개의 조정이 대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시대를 특히 남북조시대(1336-1392)라고 부른다. 1467년, 8대 장군 요시마사의 때, 후계문제를 놓고 두 파로 나뉘어, 교토를 중심으로 전란이 11년간 계속되었다(오오닌의 난). 그후 100여년 간을 전국시대라고 한다.
한편,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벼농사 뒤에 보리를 심는 이모작도 널리 행해졌다. 더구나 무기 수요가 늘어나면서 상공업 역시 발달하여, 상품 유통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각지에 시장이 서고, 운송업을 전문으로 하는 대상인들도 증가했다.
이시기에 꽃을 피운 예술은 오늘날 남아 있는 일본 전통 문화의 원류가 되었는데, 무사다움과 귀족적인 것이 융합되어 새로운 무가문화를 창조하기도 했다. 그것은 중국의 원·명조의 문화나 선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간소하면서도 깊이있는 문화였다.
건축물로는 장군 요시미쯔가 쿄오토의 키타야마(北山)에 지은 은각이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은각은 선종의 양식으로, 이 양식은 점차 무사들의 주택에 사용되게 되고, 현재 일본주택 건축의 원형이 된 것이기도 하다.
정원은 자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카레산스이(枯れ山水)라는 양식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류우안지(龍安寺)의 정원이 유명하다. 회화는 송·원나라에서 수묵화가 전해져 발달했고, 독자적인 일본적 수묵화양식(산수화)을 창조해낸 화가도 나타났다.
전통 예능면에서는,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소박한 연극을 노가꾸(能樂)로 완성시켰다. 이때의 노가쿠와 교겐의 연출형식은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져 공연되고 있다. 이밖에 중국과의 교역으로 단색 회화와 도자기가 들어 왔고, 선종 승려들에 의해 관습화된 차 마시기는 예술품과 차, 다기가 숭배되는 문화를 낳게 하였다. 그 후 다도는 일본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아즈찌 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
지리적 발견과 항로개척 등으로 인해 유럽의 동양진출 일본에도 닥쳐오게 된었다. 유럽인의 내항과 함께 총의 전래, 기독교의 전파가 일본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오닌의 난 이후 계속된 전국시대는 16세기 후반이 되자 비로소 통일의 기운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선두 주자가 바로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識田信長)였다. 그는 1543년 타네가시마에 전래된 조총을 국산화하고 대량생산하게 하여 소총부대를 편성, 재래의 전투양식을 바꾸게 만든 인물이다. 1573년, 노부나가는 무로마찌 막부를 멸망시키고, 아즈찌(安土)에 자기의 거성을 짓고 천하통일 사업에 전념했다.
부나가는 상공업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하고, 기독교를 보호 장려하고,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과 무역을 했다. 노부나가는 불교세력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무역에 의해 유럽의 앞선 문물을 입수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 사업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심복가신인 아케찌 미쯔히데(明智光秀)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된다.(本能寺의 변 : 1582) 그 후, 권력을 장악한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히데요시는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었으나 무사가 되어 노부나가 밑에서 출세를 거듭, 노부나가의 휘하의 가장 유력한 무장이었다.
그는 아케찌 미쯔히데를 처단해 주도권을 잡고, 오사카에 성을 근거지로 삼아 천하통일 사업을 계승하여 1590년 끝내 천하통일을 완성했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출병했으나 두 번 다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노부나가·히데요시가 활약한 시대를 아즈찌·모모야마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문화는 호화롭고 웅대한 성격을 가졌다.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성(城)이다. 아즈찌·모모야마라는 시대의 이름도, 노부나가의 아즈찌성과 히데요시의 모모야마성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다도가 성행하여, 다도에 쓰는 차(말차)는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되어 선승들 사이에 유행했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풍습은 귀족이나 무사, 부유한 상인들 사이에서 번져나갔고, 무로마찌 시대에 다도 예법으로서 완성되었다. 남만무역을 통해, 여러가지 서양문물이 들어왔다. 현재도 쓰여지고 있는 빵, 즈봉, 카스테라 등의 외래어는 당시 포르투갈어로부터 일본어에 유입된 것들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
막번체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세력을 키워, 히데요시 사후 1600년에 세끼가하라(關ヶ原) 전투에서 승리하여 에도(현재의 도쿄)에 막부를 세웠다. 이후 약 260년 간을 에도시대라고 한다.
막부는 전국을 지배하기 위해 실제적인 조직(막번체제)을 구성했다. 이런 체제내에서 다이묘들은 독자적인 정치를 펼 수 있었다.
신분제도
막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총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배하는가 였다. 농민으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세금(年貢)이 막부의 주된 재원이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무사계급이 많은 수의 농민이나 쵸오닝(町人=상인이나 기술자층)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막부는 사공농상(무사·농민·직인·상인)이라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최상위 계급인 무사는 무예나 학문을 닦으며 허리에 두 자루의 칼을 차고, 농민이나 쵸오닝 등이 무례를 범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 죽였다.
농민이나 쵸오닝은 무사들과 달리 성도 없고, 다이묘오 행렬을 만나면 길에 엎드려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이와 같이 상·하를 차별하는 사고방식은 무사사회에서는 주군과 부하의 주종관계를,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막부는 이와 같이 하여 막부체제를 견고하게 다져 봉건사회를 유지했다.
쇄국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해외도항을 허가하고 주인선(=막부의 허가를 받은 무역선) 무역도 허가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맹렬한 기세로 전파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이에야스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고, 이어 3대 장군 이에미쯔는 일본인의 해외도항금지 및 해외도항자의 귀국을 금지시키고, 이 규칙을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이에따른 계속적인 민중의 항거를 저지하고, 마침내 막부는 1639년, 쇄국령을 공포하여 기독교와 관계가 없는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에게만 나가사끼의 데지마(出島)에서의 무역을 허가했다. 이로인해 일본은 서양문명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일본 독자적인 문화나 산업이 발달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산업의 발달
전란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자 농업은 더욱 발달했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을 넓히고, 농구를 개량, 재배작물의 종류를 다양화 했다. 각지의 특산물을 상인에게 팔아 부농이 되는 농민도 있었고, 견직물, 술, 종이 등의 수공업도 발달했다.
산업의 발달로 도로교통이 발달하여 전국에 5개의 가도가 생기고, 대량의 물자를 수송할 때는 배가 빈번이 이용되게 되어 항로도 발달했다.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상업도 발달하여 정치의 중심지였던 에도는 인구 100만에 가까운 대도시가 되었고, 오사카는 상인의 도시, 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천하의 부엌」이라고 말해졌다.
문화
학문과 예술도 번창하여 중국의 유학, 특히 주자학을 보호하고, 막부에 學問所를 설치하고 무사의 자제들을 배우게 했다. 주자학은 주군과 부하, 부모와 자식 등의 상하질서를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에, 막부정치에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이런 학문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학(國學)이나 양학(洋學)등의 학문도 생겨났다.
국학은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고유의 사상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실증적인 학문이었다. 한편, 쵸오닝들도 「읽기, 쓰기, 주산」등의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다. 서민의 교육은 처음에 절에서 행해졌으나 나중에는 데라코야(寺子屋)라고 하는 교육기관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고, 승려나 신관, 무사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Tips) 에도시대 여행 안내서 분야의 베스트 셀러는?
전대미문의 여행붐으로 들끓던 에도시대. 여행 안내서적은 날개가 달린듯이 팔렸다. 그중에서도 문화7년(1810년)에 간행된 八隅蘆菴(야스미로안)의 [旅行用心集]은 서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책에는 여행할 때의 소지품부터 도움이 되는 약의 안내, 여러 가지 문제발생시 대처방안까지 자세하게 충고가 기록되어져 있다. 예를 들어 동숙자와 입욕시 선후를 따지는 방법-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양보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길가나, 잡초위에서 잠을 자지 말것 등 당시의 여행의 모습이 눈에 떠오르게 하는 것도 있는반면,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라, 밭의 과실, 열매를 따지 말것,사투리를 비웃지 말 것, 등 현대에도 통하는 여행의 매너도 있다.
강 건너기, 독충에 물렸을 때 등과, 모든 상황을 상정하고 기록되었던 호신술의 다양함은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아마도 든든함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몇몇 부분에는 '발의 장심에 종기가 났다면, 흙묻은 지렁이를 짓이겨 발라라' 등의 놀라운 것도 쓰여져 있지만.(자료 출처 ; 동해도를 간다.(東海道おゆく)
개국
계속되는 쇄국속에,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 네척을 이끌고 개항을 요구하자, 막부 정권은 재정상 궁핍과 약한 군사력으로 이를 허가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불평등 조약에 조인했다. 결국 사무라이의 반란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은 사임하게 되었다.
메이지(明治) 시대
메이지유신
1868년, 메이지천황은 신정부의 정치방침인 5개조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에도를 도쿄(東京)로 개칭하고 수도로 정했다. 또 연호를 메이지(明治)라 했다. 메이지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기구를 수립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이 시기의 정치개혁을 메이지유신이라고 한다. 다이묘들의 영지와 영민들을 천황에게 반납하게 하고, 전국을 현으로 나누어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했다. 천황의 일족은 황족, 귀족과 다이묘는 화족, 무사를 사족, 농민·직인·상인을 평민으로 개칭하여 四民平等을 선언했다. 이에 평민들도 姓을 가지게 되고, 직업이나 주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부국강병
일본을 구미열강과 같은 수준의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취했다. 정부가 직접 구미의 앞선 기계나 기술을 사들이고, 병기공장, 제사, 방적등의 관영 공장을 짓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근대산업을 발전시켰다. 또 전신, 우편시설을 정비하고, 토오쿄오와 요코하마간의 철도건설이나 새로운 화폐제도를 제정하기도 했다.
한편, 국가재정을 늘리기위한 조세 개정 후, 농촌의 가난한 소작인이나 자작농의 2,3남은 농촌을 떠나 도회지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은 일본의 근대산업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이 되고, 또한 징병제도를 지탱하는 중요한 병력이 되었다.
문명개화
문화적인 면에서의 근대화도 착착 진행되어 1872년, 학제를 제정하고 신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또 구미 선진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구미로부터 학자,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서양의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국민들의 생활면에서도 교육, 학문, 의식주 등의 생활 전반에 걸쳐, 새로운 서양의 문화나 습관을 받아들여 문명을 개화시켰다.
입헌 정치
구미의 근대사상이 소개되자 국민들 사이에 자유·평등·인권사상이 전파되어, 전제정치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타가끼 타이스케(板垣退助)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 자유민권운동을 시작했다. 1889년, 독일 헌법을 모델로 하여 만든 헌법 초안을, 대일본제국헌법으로 공포하고, 다음해인 1890년 제국의회를 개설했다.
청일·러일 전쟁
메이지정부는 근대산업 발달에 노력하면서, 해외진출도 고려하게끔 되었다. 우선 우리나라를 개국시켜 일본제품을 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는데, 당시의 우리나라는 청국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일본과 청국의 대립이 심화되어갔다.
1894년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당시의 조선정부는 청국에게 출병을 의뢰하자, 일본도 출병, 양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단기간에 승리를 거두고, 다음 해 시모노세끼 조약을 체결,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대만,요동반도를 손에 넣었다.
그 후 만주에서 조선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러시아와, 반대로 조선에서 중국대륙으로 나아 갈려고 하는 일본과의 대립이 점점 더 격화되어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일본은 사할린 남쪽반과 남만주철도등을 얻었다. 그 후, 일본은 1906년 중국에 남만주철도회사를 세우고,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발달
일본의 근대산업은 1890년경이 되자, 방적업·제사업 직물업 등에서 기계화가 진척되어 면사나 생사를 중국·조선·미국으로 수출했다. 1901년에는 일본 최초의 관영 야하타제철소가 완성되어 중공업 발달의 기초가 되어 제철이외에 조선·기계 등의 생산도 개시되었다.
이러한 산업혁명의 결과,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자본이 대기업에 집중되고, 유력한 대자본가 즉 재벌은 금융·무역·운수·광산 등을 중심으로 다각적 경영을 하여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게 되었다.
Tips) 명치왕의 신하 사랑
일본의 역대왕중 넘버원을 꼽는다면 단연 明治王 일 것이다. 明治王은 1852년 출생, 명치유신군에 의해 16세에 왕위에 올라 45년간이나 일본을 통치하면서 동아시아의 섬나라에 불과했던 일본을 근대국가로 대약진토록 했다고 보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왕들과는 차별화, 신주쿠 인근의 요요기의 대지(내원 70만평, 외원 30만평)에
그를 제사하는 명치신궁을 창설, 제사(명치왕과 왕비)와 다양한 행사등을 하고있다. 일본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明治王의 업적과 행적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손꼽는 것이 재위기간중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총 326일에 걸친 순행을 한 것이라 판단된다. 명치왕의 문화관에 가면 그가 재위 5년에 오사카, 중국(일본의 중부지방),큐우슈우를 순행했고, 14년에는 동북지방인 야마카타,아키타,호까이도를, 18년에는 야마구치,히로시마,오카야마등을 순행했다는 기록이 상세하게 전시되고 있다. 어쨌든 재위기간중 국토의 대부분을 순행했다는 점은 분명히 다른 왕등과 차별화 되는 것이라 보여진다.
다음으로 명치신궁 문화관에 주요하게 전시되고 있는 것은 그가 신하들을 아꼈다는 내용들이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죽은 이토오 히로부미(이등방문)와 명치왕의 관계를 보면, 이등방문이 왕을 찾아오면 왕이 의자에 앉도록 했다는 것이다.
당시 왕 앞에서는 정좌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특별히 이등방문에게는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아 명치왕이 이등방문을 매우 아꼈던 것을 알수 있다. 당시 왕과 대면하면서 의자에 앉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단 두사람으로 그중 하나가 이등방문이고 또 한사람은 田中光현(해당 한자가 없음) 이었다고 한다.그리고 이등방문이 안중근 의사의 총에 쓰러졌다고 신하로부터 말을 들었을때 명치왕은 말문이 막힐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주요한 원인이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으며 급기야 죽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명치왕이 이등방문을 얼마나 아꼈는 지 알 수 있다.
명치왕이 이등방문을 그렇듯 아꼈기 때문에 그가 발 벗고 나서서 식민지 만들기에 앞장 섰을까? 이등방문 보다는 연장자로 명치왕은 사이고다카모리를 아꼈다는 기록이 문화관 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이고다카모리는 사쓰마(현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에도막부를 무너뜨릴때 막부의 2인자와 담판, 무혈로 명치혁명을 성공시킨 인물로 명치왕을 즉위케 한 주요 공로자이다. 그래서 인지 사이고다카모리가 명치군에 대항하여 서남전쟁을 일으키고 실패하여 자결하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향후 그를 복권시켜주었으며, 그의 자제를 독일에 유학까지 시켰다고 한다.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사이고다카모리도 정한론을 편 인물이라고 한다. 그 역시 명치왕이 아꼈기때문에 정한론을 펴다가 실각(직)하여 귀향하게 되고, 전쟁실패로 자결하게 되었을까? 일본인들에게는 명치왕, 이등방문, 사이코다카모리 모두 대단한 인물들이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식민지의 아픔을 직간접적으로 안겨준 주요한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의 업적과 행적을 둘러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무엇을 배울것인가를 자문하게 된다.(자료출처: 명치신궁 문화관)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쇼와(昭和) 시대
극단적인 군국주의자들은 정복을 위해 더 깊은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어, 1932년 만주는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유럽의 비난을 받자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특히,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을 기점으로 군부는 점차 정부를 장악해 갔다. 마침내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에 뛰어 들었으나 1945년 8월 연합군에게 항복하게 된다.
연합군의 지시하에 새 헌법이 쓰여졌고 1952년까지 점령 상태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다시 부를 축적했으며, 1950년대 말부터의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 시작한 일본은 현재 거대한 경제신화를 만들어 냈다.
Tips) 태평양전쟁과 일본 민중의 생활
ㅇ 기아의 행진
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이 감행되어 남방 침략이 개시되었다. 이 뉴스에 민중은 환호하였지만 민중의 생활은 기본적인 의식 배급도 어렵게 되어 궁핍은 날로 심각해져만 갔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도저히 계속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날이 감에 따라 배급물자가 격감하였고 1944년 1월 전반의 쿄토시 배급기록을 보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아 행진이 시작되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고, 의복의 표를 갖고 있어도 현물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1945년에는 결국 의복표의 배급조차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ㅇ 생활 기초의 붕괴
1945년 B29 폭격기의 공습으로 많은 민중이 살상되고 주택은 소각되어 일본 각지에는 불에 탄 허허벌판이 출현하였다. 그 최대의 현장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다. 미군의 오키나와 공격은 전 일본을 순식간에 초토화시켜 버렸다.
생활의 기반을 의식주라고 한다면 패전 당시 민중의 생활 기반은 모두 상실되었고 일본 전토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한편, 1942년 기업 정비령이 발포되고 섬유와 식료품 등의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상점원에게 징용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군수공장에 동원되어 어설픈 손놀림으로 기계를 돌려야 했다. 또, 43년 6월부터는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도 공장에 동원되어 일해야 했고 이 해 10월에는 학도출진이 시작되어 학생들은 펜 대신 총을 들어야 했다.
44년에는 도시의 국민학교 초등과 아동이 농촌으로 소개되었다. 전쟁의 진행은 민중의 생활을 완전히 예기할 수 없을 정도로 바꾸어 놓았다.
ㅇ 암거래의 횡행
민중은 대공황과 농촌공황에 의한 생활불안의 배출구를 전쟁에서 구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생활의 간소화 정도로 그쳤지만 이윽고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 기아상태로까지 확대되고 의식주 전부가 붕괴되었다.
정부는 물가통제령을 실시해서 임금과 물가를 동결하고 배급제도를 실시하였다. 여기에서 배급 이외의 루트를 통해 몰래 공정가격을 상회하는 가격으로 물품을 거래하는 암거래가 생겨났다.
사법성 통계에 의하면 물가통제령이 시행된 1939년 10월에 경제통제법 위반으로 단속을 받은 자는 24만 5천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배급만으로는 생명의 유지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암거래만이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전쟁 말기에는 민중의 거의 대부분이 암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어 전국의 유치장과 형무소는 경제사범과 그 용의자로 넘쳐났다.
ㅇ 노동의욕의 상실
암거래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으나 물가 통제로 인해 노동자의 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그 임금으로는 배급물자를 사기에는 충분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다.
암거래 물자를 사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게다가 쌀이 없어 감자나 고구마를 입수하려면 일을 쉬고 나가 돌아다니며 구해야 했는데 이렇게 한다는 것 또한 '직영봉공'의 슬로건 아래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기아상태가 일반화된 1944년이 되면서 노동자는 출근을 해도 직장의 구석이나 그늘진 곳,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있는 일이 많아졌고, 이 담배조차 생각대로 피울 수 없었다. 자연발생적으로 태업이 확대되고 있었다.
ㅇ 징병기피와 배반
중국에서는 일본병사들 중에서 탈주병과 포로에 의해서 반전동맹이 조직되었는데 그 중에는 전기공 출신의 아카다 세이지처럼, 인텔리 병사를 통해 이 전쟁이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쟁의 본질에 눈을 떠 국민당군으로 도망, 뒤에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으로 달려간 병사도 있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몇몇 사람이 징병 기피에 성공한 이래, “소집되면 붉은 고추를 항문에 넣어 치질이라고 칭하고, 팔과 다리 등에 뜸을 떠서 점을 만들어 관절염, 신경통이라고 칭하고, 또 간장을 마셔 목소리를 쉬게 만들어 인두결핵이라고 사칭하는 등”의 일이 속출하였다.
이렇게 전 부락을 중심으로 반은 공공연하게 소집 기피의 언동을 일삼게 되자, 사태의 중대함을 탐지한 관헌이 43년 7월 관계자를 체포하는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집단적인 반항이 거의 공공연하게 행해진 실례였다.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헤이세이(平成) 시대
1989년 요시히토 천황의 사망 후 아키히토가 천황에 올랐다. 천황에게 실질적 권한은 없어졌지만, 천황은 여전히 상징적 원수이자 국민의 정신적 통합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고 있다.
Tips) 일본의 연호 계산 방법
일본 관공서에서는 아직도 연호를 사용하고 있고, 대부분의 나이 먹은 사람들도 연호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외국인이라도 낮설지만 연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일본의 근대사라 볼 수 있는 메이지(明治)시대는 1868∼1910년(43년간), 타이쇼우(大正)시대는 1911
∼1925년(14년간), 쇼우와(昭和)시대는 1926∼1988년(63년간), 헤이세이(平成)시대는 1989년부터
현재에 이른다.
자동차 면허증에도 생년월일부터 교부일과 만기일이 전부 일본의 연호로 기입되며 의료보험증에도
생년월일이 연호로 적혀 있다. 이렇게 생활에 밀접한 연호의 간이계산법은 다음과 같다.
ㅇ 쇼우와(昭和)△△년 : △△ + 25(Fixed) = □□ 즉, 19□□년이 된다.
ㅇ 헤이세이(平成)△△년 : △△ + 1988(Fixed)이 된다.
이런 공식을 외워두면 빠르게 일본 연호를 서기로 계산할 수 있어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될 것다.
Tips) 이해하기 힘든 일본인의 역사관
일본은 8월 15일을 '종전(終戰)기념일' 이라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독립기념일' 이 아니라 '光復節'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해석과 인식이 다르다. 일본 스스로 8월 15일을 '敗戰기념일' 이라고 할 수 는 없겠지만 '終戰기념일' 이라고 명명한 배경이 것이 흥미롭다.
'종전'이라고 표현 한것은 상대방(미국)의 마음이나 처지를 이해해 주려는 일본 특유의 오모이야리(思いやり:타인의 마음을 배려하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패전'이라고 표현 할 경우 미국이 가해자(원폭 투하 등)이고 일본이 피해자가 되어 결국 상호 좋지 못한 상황이 계속될 것을 우려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해석이 다른 일본인도 있지만.
올해도 여지없이 불거지고 있는 각료급 인사 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주변국들의 생각과는상당히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천황때 국영신사로 운영되다가 태양전전쟁후 군국주의의 부활 등을 우려한 점령군 맥아더사령부에 의해 일반 신사로 성격이 바뀌었으나 여전히 태평양전쟁에서 죽은 246만여명의 전몰자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문제는 국제재판에 의해 사형당한 도조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1978년 야스쿠니로 옮겨지면서 마찰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 에서 패전한 일본은 미국의 GHQ 점령하에서 수상 도조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 등을 A,B,C급 전범 5416명(조선인 23인, 대만인26명 포함) 중 937명을 사형집형 했다고 한다. -이상 동경서적 발행 '일본사' 238페이지- 일본인의 대부분은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에 대해 내정간섭이라고 생각하는 측등 여러의견이 있지만 우리와 같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같다. 일본 자신들도 미국에 대해 피해자(인류 최초의 원폭피해)이지만 "이제와서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정도의 인식정도 인 것 같다.
다른 이야기 이지만 '동해'에 대한 명칭 문제도 한국이 볼 땐 동해가 동쪽에 있는 바다이겠지만 일본이 볼땐 '일본해' 아니면 '서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이 '황해'를 '서해'라고 안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더러 하고 있다. 서해가 아니라 황해인 이유가 역사적으로 중국과의 종속관계 때문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객관적 답변이 궁색해 질 수 밖에 없다.
아울러서 '한반도'가 아니라 '조선반도'라는 것이 더 보편적으로 불리워지고 있고 '한국어'보다는 '조선어'로 더 불리워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또 다른 얘기이지만 1868년 메이지유신 때, 한국은 오로지 내정때문에 쇄국의 길을 겉고 있을 때 사이고 다카모리 등 일본의 유신론자는 한국이 국제정세를 알도록 설명해서 북방국가(청나라와 러시아 지칭)로 부터 침략당하지 않토록 대원군을 만나 설명해 주겠다는 명분이 "정한론"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은 국명이 '朝鮮'이었다. "征韓論"이 아니라 "征朝論"이어야 마땅했을 터인데 "정한론"이었다는 것이 이상하지않은가?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 "가고시마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 묘지옆에 있는 자료관에 가면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가 표방했던 것은 '정한론'이 아니라 정유론(征遣論)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나름대로의 해석에 혀를 두를만하다. 아무튼 우리는 일본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는 것이 많고, 생김새나 말이나 문화나 닮은 것이 많지만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모르고있는 부분 감추어진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일본신문과 뉴스를 보면서 일본인의 혼네와 다테마에를 함께 보려고 한다.
일본의 고대와 근대역사
일본의 영어 이름인 'Japan'은 지판구가 어원으로 '황금이 나는 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본은 한국과 관련이 많은 나라로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4개의 큰 섬과 1000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 졌다. 한국과 200Km, 중국과 800Km 떨어져 있으며, 정기적 태풍 그리고 예고 없는 지진과 화산은 그들을 체념과 복종 그리고 불안이라는 집단심리가 잡신과 신의 대리자에게 절대복종을 만들어 냈다.
1. 일본의 고대
1) 일본 신화시대
AD712년에 가장 오래된 한자로 쓴 역사책 고지키(고서기)에 건국신화가 나온다.
천상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오누이신 오빠 이자나기와 여동생 이지나미가 결혼하여 바다뿐인 세상에 일본 땅을 만들고 내려와 다스리는데 여동생은 여러 신을 낳았는데 불의 신을 낳다가 죽었다. 오빠는 홀로 남아 눈과 코로 3아이를 낳았다.
그중 하나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인데 이 사람이 일본민족의 시조(始祖)신이다.
아마테라스의 손자 '호노니니기(천손-하늘의 자손 뜻)'이가 지상으로 내려와 못생긴 '이와(바위)'와 미인인 동생 고노하나(고노-나무, 하나-꽃)라는 자매 중에 고노하나라는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것은 고노하나가 꽃이라는 한정된 삶을 살아야 함으로 신으로 내려온 덴노도 인간처럼 죽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호노니니기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 올 때에 3가지 신기를 가지고 내려왔는데,
옥구술(풍요의 뜻), 거울(종교의식에 사용), 신검(강한 권력 상징)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덴노의 상징으로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호노니니기의 손자가 이모인 간야마토와 결혼하여 막내 아들 가무야마토이와레비를 낳았고,
그가 일본의 초대 덴노 지무(간야마토 이와레히코)를 낳으니 이가 아마테라스의 5대 손이다.
현재의 덴노인 아키히토는 125대로 1989년에 즉위하였다. 왕실의 문장은 국화로 '만세일게'라고 한다.
2) 고대
1만년 전: 홍적세 시대는 대륙의 끝에 연결되어 있다가 지금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
즈몬(조몬-원시)문화: 8000년간 지속되었고 BC 3-2세기경에 와서야 발전을 보게되었다.
원시시대로 역사가 열리기 전을 말한다.
일본의 역사는 아주 늦게 시작되어 중국에는 공자가 시대를 지나 진시황제시대이고,
한반도는 고조선의 말기시대에 일본은 농경시대에 들어갔다.
야요이 문화(BC3세기-AD3세기): 토쿄(동경대학 근처)의 야요이 거리에서 토기가 발견되어 붙인
이름으로 토기 속에 곡식이 있었다.
AD57년: 중국 후한서에 왜인의 나라 나노쿠니(노국)의 사신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청동기와 철기문화를 대륙인(한반도)이 들어와 짧은 시간에 이룩하였다.(한반도는 신라가 건국하였다.)
AD239년: 야마타이(야마토=대화-大和)라는 최초로 국가 모습을 갖추고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그들이 옹립한 왕은 무녀 '히미코'인데 그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 금도장과 구리거울을 받아왔다.
AD6세기: 고대국가가 성립하여 천황(天皇-덴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우지가미 오키미'가 지방호족
위에 군림하였다. 백제는 538년 불교를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였다.
신라와 교류하였고 중국에는 수백 명의 사절을 보냈다.
이 시대에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문화가 들어와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특히 불교를 널리 장려하고 고구려의 담징이 호류사(法隆寺)에 그린 금당벽화는 중국의 윈강 석불,
경주 석굴암 등과 함께 동양 최고의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AD604년: 성덕태자가 17개조의 최초의 헌법을 만들고 반포하였는데 '제 1조가 와(化)를 존중하라'이다.
와는 일본을 1400년 동안 일본을 지배한 사상으로 국시이자 국가의 이념이 되었다.
와(化)는 융화, 친화, 평화, 조화, 화합의 총칭으로 이것을 깨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았다.
이것을 밑거름으로 경제대국을 이룩하였다.
그는 고구려승 혜자(惠慈)와 백제승 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배웠고,
일본이 불교국가로 자리잡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AD645년: 지금까지 세도를 누리든 소가 가문을 제거하기 위하여 덴노 '오우지'는
'나카토미 가마타리'와 손잡고 소가 가문을 몰아내고, 나카토미 가마타리가 실권을 장악하고 직제를 개편하고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로 옮겼다.
최초로 연호를 '다이카(대화-大化)'라고 하였고, 가문을 황제(덴노)로부터 '후지와라'라는 성을
받아 '후지와라' 가문을 열게되었다.
1192년 바쿠후 정권이 등장 할 때까지 덴노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550년간 통치하게 된다.
정식으로 나라이름을 대화에서 니폰(일본-日本-태양이 뜨는 곳)으로 바꾸었고,
중국에도 알려져 '지펀(Japan)'이라고 발음하였다.
AD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에 백제가 멸망하여 백제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실패하고 백제의 난민과 함께 퇴군하였다.
AD701년: 행정, 소송, 민법, 형법 법체제가 형성되어 '율령제도'가 완성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덴노의 단독정권이 형성되었다.
토지는 국가가 관리하고 고쿠시는 넓은 지역을 관리하고 군시는 작은 지역을 관리하며 6세 이상의
남자아이들에게 농지를 빌려주었다. 농지의 분배로 호적제도가 실시되었다.
불교도 전파되어 쇼무 천황은 구니마다 사찰과 16m의 대 불상을 갖춘 도다이사를 짓게 하였다.
AD720년: 덴노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한자로 역사서 '고지키'가 편찬되었고,
일본글인 '가나'의 50음도 이 때에 완성되었다.
AD794년: 간무 덴노(50대)가 즉위하고 불운이 뒤따르자 수도를 헤이죠쿄(당시 장안의 1/2크기)를
버리고 지금의 도쿄(구명 헤이안쿄)로 옮겼다. 이로서 1,000년 동안 일본의 수도가 되었다.
<담징의 그림이 있는 호류사>
(2)중세역사
중세에 들어와 장원제는 농토를 가진자들이 여려 갈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작은 지주들이 영토를 잃어버리게 될 처지에 놓이자 큰 영주에게 찾아간 사람과 절에 바치고 보호를 받은 사람들이 생기게 되어 그들은 무사를 길러 영토를 지키므로 무사들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무사에게는 '무사도(武士道)'가 있어 의리, 체면, 명예를 존중하며 이것을 어기면 자결하여 생명과
같이 지켰다.
10-11세기: 영주, 사찰, 신사들이 독자적으로 무력을 갖추어 '사무라이(시종의 뜻)'이라는
무사집단이 생겨 호족들이 거느리는 무사단은 세력다툼을 만들어 내란 속에 빠져들게 된다.
1086년: 덴노 후손에 후지와라 가문의 대가 끈기고 후지와라 가문의 피가 섞이지 않은 덴노가 등장하여
다시 불법 장원을 몰수하고 세력이 강하여 졌다.
시라카와 덴노가 즉위하고 7살의 아들에게 덴노의 자리를 물려주고 '조우고(상황)'가 되어 덴노를
섭정하였는데 이것은 책임은 덴노가 지고 자신이 마음 편하게 정치를 하려는 속셈이었다.
이 때부터 덴노의 후계자와 조우고의 후계자가 생기게 되었고 모든 권력과 토지는 '조우고'로 넘어가
100간 지속되었다.
'스토쿠' 덴노는 자리를 조우고로 옮겨가면서 사생아 고시라카를 덴노의 자리에 앉자 권력싸움이
시작되었다.
후지와라가문도 두 형제가 다투다가 갈라섰고, 실제의 힘인 무사계급도 겐지 가문과 헤이지 가문이
서로 반반씩 갈라섰다.
덴노 편[ 후지와라 다다미치(형), 무사 겐지 요시모토(동생), 무사 헤이지 기요모리(조카)]
조우고 편[ 후지와라 요리나가(동생), 무사 겐지 다메토모(형), 무사 헤이지 다다마사(숙부)]
1156년: 스토쿠 조우고파의 공격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는데 전쟁의 주역은 무사(부시)가문이었다.
덴노파가 승리하여 무사 가문이 중심부에 올랐고, 전쟁과 처형으로 죽은 자도 무사 가문뿐이었다.
이 전쟁을 '호겐의 난'이라고 한다.
1159년: 덴노와 조우고가 또 다시 대립이 되자 무사계급의 겐지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덴노를 지지하고,
헤이지의 미나모토 요시토모는 조우고를 지지하며 다시 대결한 것을 '헤이지 난'이라고 한다.
헤이지의 미나모토 요시모토는 패하여 죽임을 당하고 8살의 아들 '미나모토 요리모토'는 유배당하였다.
유배지 영주 딸 마사코가 아버지의 반대을 물리치고 '미나모토 요리모토'와 결혼하였다.
1185년: 미나모토 요리토모(1192-99)는 군사를 일으켜 지역을 평정하고 7년 후 쇼군이 되어
가마쿠라(鎌府)에 최초의 바쿠후(幕府)를 설치하였다.
천황정부의 법적인 귄위는 그대로 인정되었고 가마쿠라 바쿠후가 군사, 행정, 사법 기능을 장악하였다.
가마쿠라 바쿠후는 각 구니(國)의 우두머리로 총독 역할을 하는 슈고(守護)를 임명하였다.
구니(國)의 분할로 생겨난 개인영지에 대한 감시자로 지토(地頭-세금 징수관리자)를 임명하여 효율적인
전국 지배조직을 확립하였다.
바쿠후(막부-幕府)는 군사독재자 또는 실권자의 뜻으로 이들이 즉 정부(政府)이기도하다.
허수아비 천황으로부터 '*쇼군'이라는 칭호를 받고 실권을 택하였다.
이 근대적 정권이 1192-1868년까지 675년간 지속되었다.
*쇼군
세이이타이 쇼군(征夷大將軍-정조 대장군)은 794년 동북부 지방의 에조(아이누족)를 정벌하기
위하여 편성된 토벌군의 총대장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3대로 끝나고 명칭만 남아
군사최고지휘자를 의미하였다. 시종인 사무라이가 세력이 귀족을 몰아내고 후에
바쿠후(부시=무사)정권을 수립하고 귀족계급이 되었다. 이것을 줄여서 '쇼군'이라고 한다.
1274-1281년: 고려의 해군력을 가지고 몽고 군이 규수를 침공하다가 폭풍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나자 신통력으로 가미카제를 일으켜 막아냈다는 신도와 불교주장이 설득력을 얻었고, 병력과 물자를 총동원한 가마쿠라의 바쿠후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어 무사집단이 지방의 호족이 되어 봉건체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바쿠후가 위치한 도쿄에서 멀리 있는 지역은 힘이 우선하는 풍조가 일어나고 쇼군 가의 내분문제로
내란상태가 되었다.
1333년 가마쿠라 바쿠후가 와해된 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수도 교토에 자신의 정부를 세워 바쿠후를 부활시켰다.
이 때에 고다이고 덴노는 남쪽으로 도망가 나라를 세우니 이것을 남조라고 한다.
다카우지는 고묘덴노를 즉위시켜 이를 북조라고 하며 역사상 처음으로 2명의 덴노와 2개의 나라가
갈라져 남북조 시대가 60년간 지속되었다.
북조가 통일하여 덴노는 계열은 북조를 택하였으나 정통성은 남조가 해당함으로
지금도 학자들은 덴노의 계열 때문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과거의 가마쿠라 바쿠후는 쇼군을 등에 업은 외척들이 정권을 잡았으나 다카우지 쇼군은 직접 강력한
통치력을 구사하고 1378년 교토에 쇼군이 거쳐하고 전국을 지배하는 저택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차츰 독립적 성격을 강화해가고 있던 '슈고 다이묘'는 무사를 감시하는 관리자로 하였다.
'슈고 다이묘'는 가마쿠라 바쿠후 시대의 '슈고(총독 역할)'와 구별하기 위하여 '슈고 다이묘'라고 하였다.
이 세력들은 16세기에 이르러 다이묘(大名)라고 불리며 군벌영주는 군사 관리와 세금을 거두어 사실상
작은 나라의 왕과 같았다.
이들이 아시카가 바쿠후의 권력을 잠식해 들어가 바쿠후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1358-1408) 쇼군은 1392년 남북조(南北朝) 체제를 통일시켰다.
그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를 받고는 덴노를 무시하고 자신이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중국천자의 신하라는 국서를 보낸 것을 일본역사에 수치로 여긴다.
궁정생활이 화려해지고 선승들이 정부 내 고위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웅장한 사원과 궁전들이 축조되었다.
1428-1600년: 계속되는 전란 속에 느슨해진 장원과 공령에서 불안해진 농민들은 자구책으로 촌락들이
뭉쳐 조직적인 공동생활을 하였는데 이것을 '고우손세이'라고 한다.
이들이 최초로 농민의 봉기를 일으켜 세금과 빚을 탕감 받았고 봉기는 50여 차례나 일어났다.
<'쇼군'인 미나모토 요리토모>
1467년: 쇼군의 내분으로 다이묘들이 편을 갈라 11년간 전투를 치렀다.
이것을'오닌의 난'이라고 하고 교토는 완전 잿더미가 되었고 쇼군은 완전히 권력에서 밀려나 이름만
유지하다가 1573년 '오다 노부나가'가 공식적으로 없앴다.
오닌의 난으로 중앙권력의 약화로 각 지방에는 독자적인 권력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바쿠후가 파견한
슈고 다이묘와 달리 '센코쿠 다이묘'라고 하였다.
센코쿠 다이묘는 지방지주나 유력농민 출신으로 전쟁 중에는 무사가 되었고,
평시에는 농촌조직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들은 철저한 무력을 바탕으로 농민과 가신 무사와 계약관계로 그들을 만족시켜야 자신의 권력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센코쿠 다이묘 시대에 3명의 영웅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이다.
이 3사람의 성격을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
손안의 새가 울지 않는다면 오다는 죽여버리고, 도요토미는 어떻게 하든 울게 하고,
두쿠가와는 울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라고 한다.
[서양에서 전래된 철포로 신구세력은 각 지역에서 군사력을 키우고 무사와 상공업자가
새로운 형태의 군사상업도시 '조카마치(성 밑의 도시 뜻)'의 발달로 각 영지 국의 중심이 되었다.
도검, 구리, 유황을 주고 동전, 비단을 받아오는 조공무역이 이루어졌으나
1550년 이후에 끊기자 거상들이 뒤를 돌보는 왜구의 노략질이 시작되고 명은 해안지대를 봉쇄하고
주민을 이주시키고, 고려의 이성계는 왜구정벌을 통해 실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왜구침략은 임진왜란까지 지속된 외환이다.]
1549년: 예수회 선교사가 들어오고 서양무역이 왕성할 때에 전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오다 노부나가 아시카가 바쿠후(1573년)를 무너뜨리고 지나치게 비대해진
사원의 세력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1582년 주력부대가 교토를 떠나 원정길에 오르자 부하장수 아케치 미츠히데가 배반하여 깊은 밤에
혼노지를 기습 공격하였고 중과부적으로 오다가 할복자살하였다.
일본에는 '적은 혼노지에 있다'란 말이 내부의 적을 가르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배신자들을 죽이고 오다의 뒤를 이어받아 1583년 오사카에 거대한
요새인 성을 쌓아 근거지로 삼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외지지방 에도의 다이묘로 쫓아냈다.
덴노로부터 '하시바'라는 성 대신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 받았다.
그는 전국에 무기를 몰수하고 사, 농, 공, 상의 서열을 정하여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여 자기 일에만
충실하도록 하였다. 근세봉건사회를 만드는데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였고 이것을 명나라의 교역에서
얻으려고 하였으나 명나라는 문을 열지 않으므로 무력으로 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의 이유로 조선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명을 섬기는 조선이 허락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명을 정복하여 공을 세운 다이묘에게 정복한 땅을 나누어주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1592, 1597년: 2차례에 걸쳐 7년간 조선 땅은 폐허가 되는 임진왜란(분로쿠노에키)과
정유재란(게이초노에키)이 일어나 이순신과 조선인의 저항으로 시달리던 왜군은
1598년 도요토미가 죽음으로 철군하였다. 명나라도 왜란의 부담으로 청나라에 망하였다.
가장이득을 본 것은 일본으로 조선의 도공과 기술자를 조직적으로 계획하래 데려가고 당대최고 수준의
인쇄술과 신유학에서 의학까지 약탈하여 부진한 그들의 학문과 산업부흥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에서 흥미로운 점은 4개국이 참전한 국제전쟁이란 점이다.
4개국은 조선, 중국, 일본인데 하나는 어느 나라일까? 포르투갈이다.
이 나라는 임진왜란과 중요한 관계가 있는데 하나는 그들이 일본에 전하여준 조총 2자루이다.
그런데 일본은 불과 30년 사이에 15만 자루를 제작하였고 이것은 당시 전체 유럽의 조총 숫자와 맞먹는
엄청난 양이라고 한다. 그리고 명나라는 조선에 출병하면서 포르투갈 잠수병들을 용병으로 데려와
일본군과 싸우는데 활용하였는데 그들의 임무는 주로 일본함대를 기습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포르투갈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가 일본사(History de Japan) 가운데
임진왜란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것을 주한 포르투갈문화원장인 '안토니오 브라가'가 최근
'포르투갈 신부가 본 임진왜란 초기의 한국'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하여 당시에 임진왜란을
제3국 인이 본 기록으로 비록 짧지만 중요한 기록이다.
<3명의 영웅에 하나인
오다 노부나가>
'다테마에'와 '혼네'
이 말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이중성격을 말한다. 일본인은 이 관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1467-1568년의 '전국시대'에 생긴 것으로 이 시대는 살아 남아 생존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조카가 원군을 청하면 '알았다'고 해놓고 관망하다가 강한 상대에 붙어 조카를 치는 것이 이 시대에
도리었고 아무도 그것을 욕하지 않았다. 이 관습은 일상 삶에 각인되어 지금까지 내려온다.
그들은 절대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말하지 않는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고지고데로 믿다가는 낭패를 보게 된다.
겉으로는 정직하고 속으로는 야비함은 지금도 얄미움의 대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6-98, 다이코 1585-98)
그는 단신으로 155cm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나 당시는 평균키이었고 160cm넘으면 위대하게 보았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 따라 양아버지 아래 자랐다.
장난이 심하고 못난 그를 양아버지는 싫어하였고 그의 몸이 날렵하여 나무 위에서 많이 보내기 때문에
원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몸이 허약하여 커서는 장을 돌며 가벼운 바늘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그는 군인이 되고 싶은 생각에 오다의 부하에게 바늘을 주고 부탁하였다.
부하의 소개로 오다의 신발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명석하여 겨울에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뜻한 신발을 신게 하였는데 이것을 기특히 여겨 취사반을
맡겼다. 당시 취사반의 큰 문제는 땔감의 조달이었다.
그는 땔감의 나무를 성냥 같이 잘게 쪼개어 사용함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옹졸하고 편협한 사람은 아니었다.
쾌활한 성격과 세련된 매너 그리고 총명한 두뇌로 인해 사무라이로 발탁되었고 그에게도 군대가
주어졌고 오다의 원정군 사령관을 맡아 가장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오다가 죽은 후에 원정에서 돌아와 배신자들을 소탕하고 대권을 이어 받아 전국을 통일하였다.
'천인 킬러'라는 별명을 가진 당대의 최고 호색가인 그는 전국에서 차출되어 온 처녀만 즐겼는데
나중에는 부하의 나인까지 범하였다고 한다.
그는 미천하였기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인물로 여긴다.
그러나 그는 독학하여 시를 지을 수 있었고 다도에는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정실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하였고, 측실이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이름은 '도요토미 히데요리'로
그가 죽을 당시 6세에 불과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3)근대역사
1600년: 전쟁 중에 힘을 기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일을 완결 짖고 수도를 에도(도쿄)로 옮기고
공헌이 많은 부하에게 정치, 경제, 군사 중심지인 에도(도쿄)로부터 순차적으로 2500개의 영지를
나누어주었다. 에도는 265년간 실질적인 수도로 있을 때를 에도시대라 하고,
1868년 메이지이신이 정식으로 에도로 수도를 옮겼다.
이 때부터 무사들은 칼을 찬 관료가 되어 칼은 관료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5년 아들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오고소(대어소-大御所-조우고와
같음)가 되어 실권을 잡아 후에 실권을 쥔 명예회장을 '오고소'라고 한다.
1614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20대 성인으로 자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계획적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상징인 호고지 절을 짓게 하고 절에 걸릴 쇠종에 새겨진 문구를 의도한 데로 쓰게 하고 이것을
트집잡아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사카성의 2겹의 호수 때문에 점령하지 못함으로 철군의 조건으로 1겹의 호수만 메우면
돌아가겠다는 요구조건을 히데요리는 받아 들였다.
그들은 약속과 다르게 밤사이에 모두 메우고 점령하니 히데요리는 자결하였다.
전국의 다이묘를 불모로 하기 위하여 1년씩 번갈아 영지와 에도에 살게 하였다.
이것은 에도에 많은 귀족이 가족을 거느리고 왕래하여 에도를 번창하게 하는 결과를 가저 왔다.
도쿠가와 바쿠후(쇼군) 시대는 안정된 생활로 도시와 농촌의 균형 된 발전을 보았고 산업발전으로
도시 수준은 유럽과 비견 할만하여 에도의 인구가 100만이 넘었고 군 장비와 일용품,
공예품 생산도 활발하였다.
화폐가 통일되어 금융업, 소매상, 도매상, 소개업 등으로 돈을 번 거상이 들의 위세가 커져갔다.
에도시절의 전설적 거상 미쓰이 다카토시는 지금의 최대재벌 미쓰이 상사를 설립한 사람으로 고객을
위하여 전 품목 전시(당시는 하나씩 보여 주었다)하고, 원하는 만큼 소량 판매하며, 현금은 할인하여주고
옷감은 즉시 완제품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금 일본의 상술은 300년간 쌓은 철저한 고객위주라는 상술의 뿌리 위에 자란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에 자이바쓰(재벌)는 17세기부터 축적된 자본이라고 한다.
외국과는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이것은 문물 교환의 이득을 바쿠후가 장악하기 위하여 창구를
하나로 일원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종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장사에만 열중하는 네덜란드에게는 국교를 맺고 출입을 허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680-1709년: 전성기를 이루어 이 시대를 '겐로쿠 시대'라고 하며 최고의 경기를 상징한다.
성과 돈을 스스럼없이 하여 생활인에게 거리감을 주지 않는 현실적인 것은 당시의 조선과는 반대되는
면모이다. 이런 현상은 성인(聖人)들이 규정한 '도(道)'역시 시대의 부름에 호응한 것으로 불변이
아니라 역사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그 점에 있어서는 도쿠가와는 하나의 영웅인 이유이다.
왜란 후 국교가 정상화하고 20년에 한번 꼴로 400-500명되는 통신사절단이 왕래하고 청나라도 교역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될 정도였다.
조선통신사의 비용은 약 600억 원이 소요 된다고 하는데 이것을 일본이 부담하였고 우리는 주자학이나 유교를 일본에 전하여주었다. 일본은 고구마, 담배, 고추 등을 전하였다.
고추는 포르투갈 상인이 중남미로부터 일본에 전하고 일본사람 들이 임진왜란 때에 고추를 태워 매운 연기로 적이 화살을 못 쏘도록하는 화생방 무기로서 쓰기 위하여 가지고 왔다는 설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기록되었는데 왜국에서 건너왔기에 '왜개초'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17세기 그리스도인이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서양인끼리 경쟁하고 비방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서부 영주세력이 강화되자 이것을 견제하려고 바쿠후는 서양인과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을 색출하기 위하여 성화(예수, 마리아 그림)를 밟게 하거나 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발급 받게 하였다.
1853년: 미국의 해군제독 매슈 C. 페리가 흑선을 타고와 문호를 개방하라고 할 때에 일본은 변혁의
논리에 갖추고 있었고 외국사정에 어두운 국가도 아니었다.
이듬해에 승인되고 뒤이어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가 조약을 맺었다.
이 때에 천황의 허락 없이 승인한 것이 왕정복고 반란으로 이어진다.
1866년: 사쓰마(현재: 가고시마)는 영국상인을 살해하여 영국함대로부터 폭격을 받아 그들의 문물을 받아드리는 계기가 되었다.
조슈(현재: 히로시마)는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가는 미국상선에 대포를 쏘았다가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연합함대의 폭격을 받아 육지까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어 그들도 서구문명에 받아드려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2 지역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바쿠후를 몰아내기 위하여 비밀동맹을 맺은 것을 '삿쵸 동맹'이라고
하고 후에 바크후를 몰아내고 일본을 이끌어 가는 주역이 되었다.
조슈인들이 군부를 장악하여 제 2차대전말까지 군바츠(군벌)의 본거지가 된다.
2지역은 서양문물을 받아드고 막강한 상업자본으로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사를 늘려나갔다.
1867년: 250년의 도쿠가와 바쿠후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개혁을 하였지만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서양과 맺은 조약은 불평등조약으로 청나라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되자 곳곳에서 혁명이 퍼지고 왕정복고의 여론에 제 2인자 자리를 지키려고 쇼군 요시노부는 바쿠후의 모든 권력을 덴노에게 받치고 1192년부터 시작한 바쿠후의 무인정치는 막을 내리고 뒤로 물러앉았다.
새 정부는 아예 그들을 제거하고 영지를 몰수하려고 하자 요시노부는
1868년 1월 1일에 바쿠후의 마지막 전쟁에 패하고 본거지 에도로 도주하였다.
새 정부의 신식무기에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정부군이 에도를 포위하고 협상에 들어다.
요시노부의 근신처분과 바쿠후의 인사들은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메이지는 무혈 입성하였다.
메이지는 즉위식을 올리고 연호를 게이오에서 메이지로 고치고 에도를 도쿄로 고치고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다. 천황제의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이듬해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의 막이 올랐다. 이것은 종교, 인종, 민족, 언어에서 대립이 없는 동질성이 강한 일본이 외세침략에 두려움을 느끼고 서둘러 정권투쟁을 마무리한 결과이다.
사, 농, 공, 사의 신분제를 폐지하고 평등을 주장하였으나 결과는 왕족과 다이묘 등의 권력층은
가조쿠(화족: 화려한 귀족)와 지배당하는 농, 공, 상 만 평등하게되어 2계급으로 나뉘게 되었다.
거주와 직업을 마음대로 선택하며, 징병제도의 개혁으로 전 국민이 병역의 의무가 채택되어 무사는
직업을 잃었다. 한편으로 유럽선진국에 견학을 보내어 독일의 정신과, 프랑스의 문화,
영국의 제도를 본 받아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갖추고 관료, 지방행정, 교육, 군사,
공업보호와 '부국강병'을 이루어 군사와 경제에 눈부신 근대화를 마련하여 유럽과 미국에 이어
아시아 식민지 경쟁에 참여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영국의 제도를 본 받아 입헌군주제도가 되었고, 영국교육제도가 들어와 일류대학, 일류고등학교가
생기고 이것이 우리 나라에 전하여지고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1876년: 강화도의 운요오호 사건으로 빌미로 삼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강화도와 서울의 관문을
포격하고 무력 시위함으로 민 황후(민비)일파가 불평등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인천과 원산항을 개항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을 핑계로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일본과 맞섰다.
1884년: 청나라를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독립당을 지원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하였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였으나 일본은 1885년에 톈진 조약을 맺어 2나라는 조선에서 물러날 것과
출병 할 때는 상호 알릴 것을 약속하였는데 일본이 청나라와 일본의 공동출병권을 확보하는 소중한
전과를 얻었다.
1889년: 일본에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1945년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헌법의 논쟁와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그는 독일헌법을 본 떠서 황제와
실권 가진 내각총리제 헌법을 만들었다.
1894년: 갑오경장과 동학운동(동학란)으로 청나라에 전쟁의 구실을 만들려고, 조선의 요청도 없는데
군대를 보내므로 청나라도 군대를 보내어 대립이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아산만에 있는 청나라 군함에 선제 포격(황해해전)하고 서울에 와 있던 일본군이 동시에 청군에게
기습 공격함으로 시작한 전쟁으로 조선 땅을 폐허로 변하였다.
일본의 야비한 기습공격은 로일전쟁, 진주만 기습, 그 외에 어디든지 그들은 가는 곳에는 지금까지도
그들은 야비함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일본 승리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어 라오뚱 반도, 타이완(대만), 펑후 섬을 차지하고 많은 배상금을
받았다. 랴오뚱 반도에 일본이 거점을 가지면 중국 대륙에 위험을 우려한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돌려주라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세 강국과 맞설 수 없는 일본이 이것을 되돌려 준 것을 '3국 간섭'이라고 한다.
이 전쟁은 '잠자는 사자'라고 중국을 두려워한 유럽의 열강들은 작은 일본에 패하는 중국을 얕잡아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현대역사
(1) 대륙침략과 2차 대전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극동의 헌병'이라고 조롱 받았다.
1904-05년: 러시아가 '3국 간섭'의 댓가로 랴오뚱 반도의 뤼순과 따롄에 조계지를 얻고 남만주
철도를 부설함으로 만주일대에 세력을 심는데 성공하고 조선으로 세력을 남하하여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일본은 러시아 남하를 염려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어 만주에 주둔하는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첫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한편 조선은 러시아가 주도권을 가지자 일본은 38도선 경계로 남쪽을 일본이 차지하고
북쪽은 러시아가 차지 할 것을 제의 하였으나 러시아는 조선 전체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과
조선을 일본에 대한 완충지로 만들려는 계획으로 거절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하고, 2월 8일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9일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0일 선전포고하여 러일전쟁은 시작되었다.
1905년 7개월에 걸쳐 30.000Km을 항해하여 지친 러시아 함대를 일본 해군의 유명한
토오고 사령관은 하루 반만에 승리하였다.
육군도 승리를 하고 있었으나 계속 할 힘이 없었고 러시아도 국내의 혁명으로 전쟁을 계속할 수 없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알선으로 포오츠머드조약으로 전쟁을 끝냈다.
일본은 조선에서 우월권 인정과 러시아로부터 남만주 철도와 뤼순, 따렌, 남사하린을 차지하고 연해주의
어업권을 빼앗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전에 미국의 루스벨트 딸 앨리스와 약혼자가 한국에 왔다.
믿을 만한 것은 미국밖에 없다고 생각한 민영환, 이준, 이상재가 앨리스를 몰래 만나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하여 한국과 미국이 공수동맹을 맺어 줄 것을 대통령인 아버지을 설득하기로 언약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이 필린핀 통치를 승인하는 대신 일본은 조선에서 종주권을 승인한다는
일본의 가쓰라와 미국의 '태프트 밀약사건'으로 조선의 바램은 물 건너가고 그 해 11월에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마저 잃었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긴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하여 유럽의 나라들은 아시아 문제를 일본과
의논하게 되었다. 한반도를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묵인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을 묵인
받았고, 영국은 인도의 점령을 묵인 받았다.
이토히로부미는 한반도의 국제적 마찰을 염려하여 합병을 미루고 있었으나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암살 당함으로 1910년 8월 29일에 합병하여 우리 나라의 국치일이 되었다.
1914년:1차 세계대전에는 영국과 동맹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였으나, 유럽의 전선에는 관심 없고
중국에 기반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전쟁으로 수출이 중단되었으나 일본은 역으로 유럽에 수출이 증가하고
조선업계와 해운업은 호황을 맞아 세계 3위의 해운국으로 성장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 하여
'나리킨'이라는 벼락부자도 생겼다.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48만 세대 중에 30만 세대가 무너지고 불타 버리고 또 14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때에 조선인이 불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6,000명의 조선인이 살해당하였다.
파시즘주의 자들은 이 틈을 이용하여 사회주의자와 반정부 인사를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학살하여
인간청소를 마친 후에 파시즘의 길로 들어섰다.
1924년: 캘리포니아에서 일본인을 적대시 하고 배척하며 배격하는 이민법이 상, 하원을 통과하자
반미여론과 선전포고까지 거론되었고 제 1의 적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서양인들에게 유색인 박해를 갚자는 여론이 일어나고 '대동아 공영권'이 경제적 야심과 함께 혼합된
산물로 나타났다.
<러일전쟁 중에 부상병을
치료하는 일본군인들>
1931년: 1929년 1차 세계대전 후유증으로 대공황이 일어났다.
해외에 의존하는 일본도 마찬가지로 중소기업이 도산하여 거리는 실업자로 채웠다.
타개책으로 중국을 겨냥하여 만주에 군사도발을 일으켜 푸이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만주침략으로 국제 연맹에 제소하자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1936년 독일과 이탈리아와 방공협정을 체결하였다. 강국들이 대공황으로 보호주의를 실행하므로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 경제를 다지고 남방으로 자원확보에 나섰다.
1937년: 난징을 점령한 뒤 불과 몇 달 사이에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고 30만을 살해하였고, 일본군 장교들은 중국인의 목베기 시합을 유행처럼 벌였고 일본 신문은 이를 대서특필 하였다.
1년 안에 중국의 주요지역이 일본 점령지가 되었다.
1940년: 독일과 이탈리아가 군사동맹을 성사시키고 조선에서는 창씨개명으로 '황민화'정책을 강제로
실시하였다.
1941년: 영국과 미국이 이미 전쟁 결의가 굳어지고 전쟁을 피해보려고 필사적으로 일본의 기업가와
외교관은 협상을 하였으나 결렬되고 강경 주전파 도조 히데키가 내각을 맡고는 12월에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였다.
초기는 기선을 잡았으나 국력의 차이로 태평양의 동남으로부터 밀리기 시작하여 1945년 오키나와 섬이
점령당하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의 공군이 대도시를 공습하였다.
물자가 부족한 일본은 군사력을 몸으로 치르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초기 군대는 240만 명이 후에는 학생까지 동원하여 700만 명을 넘었다.
소녀까지 포함한 여자정신대를 만들어 장병의 성적욕구를 담당하게 하고 조선에서 70만 명을
징병하여 혹독한 노동현장에 투입하였다.
1941년 1월에 도조는 '살아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하지 말라'라는 전진훈(戰陣訓 )을 만들어 숱한
자국민과 식민지인을 떼 죽음으로 몰아 넣었지만 정작 자신은 정작 교수대에서 굴욕적인 생을 마쳤다.
1944년 인간을 폭탄으로 하는 인간어뢰와 가미카제로 미국을 공격한자나 군대나 모든 종사자는
항복 없이 '옥쇄(玉碎: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충절을 위해 죽는 것)'라는 명분아래 전부가
'천황 만세'를 외치고 참혹한 개죽음하고 산사람이 거의 없었다.
만주의 관동군 직속 731부대는 악랄한 세균전쟁을 위하여 탄저균, 발진티푸스, 파라티푸스,
장티푸스 등 병균을 60일간 배양하여 300㎏의 벼룩과 빈대 등 매개체에 감염시킨 다음
이시이 폭탄(발명한 장군 이시이의 이름)에 채워 투하시켜 500㎢ 이내의 모든 사람에게 2시간 안에
감염시킬 수 있었다.
2차 대전 말기에 한반도에 유행하였던 장티푸스와 빌진티푸스도 이 세균부대의 소행으로 여기고 있다.
또 군인의 헌혈을 위해 동물의 피를 인간에게 실험하였으며 동상에 걸리는 과정을 실험하였고,
세균전쟁을 위한 세균실험을 인간에게 행하였다.
비행조종사들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압시험을 하기 위하여 진공시험을 하기도 하였다.
5년에 걸쳐 실험인간을 그들은 '마루타(통나무)'라 불렀다.(배경영화 '마루타')
지금도 세계 유익을 위해서는 없어지면 좋을 민족으로 손꼽힌다.
그들의 악랄함도 소용없이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의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8월 6일에 히로시마와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원폭투하로 2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로서 점령지에서 행한 죄의 대가를 조금은 받았다.
이 때에 동아시아를 미국이 독차지 할 것을 염려한 소련은 부전(不戰)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포고한 후 일본점령지를 공격하였다.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고 일본역사상 최초로 외국의 군대에게 점령당하였다.
<부대를 사열 중인 일본 천황
히로히토>
(2) 2차 대전 후의 일본
1945년 9월2일 항복문서가 조인되고 전범자는 처형되었다. 1951년까지 연합군 사령부(*맥아더 사령관)
아래 미 군정정치가 이루어졌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헌법 제정으로 국민의 주권, 기본권, 언론과 출판, 결사자유를 보장하고 영구히
전쟁을 없앨 목적으로 헌법 9조에 육, 해, 공군 기타 전력의 보유를 금지 시켰다.
참전과 패전은 일본사회는 격렬한 변동을 가져왔다.
패전에 의해 국가목표가 해체되고 사회적 통제는 전적으로 힘을 잃었다.
곧 목표상실, 사회적 규범이 무력화 상태가 되었으나 폐허와 빈곤 속에서도 산업화, 도시화의 진행이
사회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직접 사회적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다.
연합군 점령아래서 추진된 개혁은 신헌법 제정, 천황의 신격성 부정, 농지개혁, 지방자치의 확충 등으로
개인주의와 민주주의로 가치의식이 변화되었다.
또 하나는 귀족제, 지주제 등 신분제의 잔재가 일소된 것이다.
최근의 일본사회는 기본적으로는 고도산업사회, 고도 도시사회, 대중소비사회 등으로 불리는
단일사회로 변화해가고 있다.
3년간 한국동란으로 특수가 일어나 전쟁 전의 경제를 거의 회복하였다.
미국 원조와 민간자본의 바탕으로 급속한 고도성장을 이루어 1980년까지 연 평균 7,7%라는 고도의
성장률은 서구의 2배가 넘어는 것으로 1968년부터는 국민총생산량(GNP)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오름으로 경제대국이 된 것이다.
1980년대의 일본사회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국민생활은 안정된 것처럼 보인다.
국민의 의식은 생활보수주의로 정치태도도 보수화 되었다.
학생운동 역시 저조하며 노동운동은 정치화하지 않는다.
1960년대부터 일본경제의 성장과 맞물려 1980년대의 일본은 그 존립기반을 대외교류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정부는 '국제국가 일본'을 내세우고 재계는 국제인 육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현상은 국제화로의 진전과 정보화의 침투를 더욱 촉진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와 관계된 생산(가공 및 해외투자), 유통(수출입, 외국환), 관광 등의 업종에
종사하며 그 수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사람의 이동도 활발하여 1985년에 외국으로 나간 일본인은 495만 명이며, 그중 402만 명이
해외관광이었다. 나머지는 직업, 생활, 유학 때문에 출국하였다.
일본거주 외국인은 84만 명(1984)이며 한국, 북한, 중국인의 순서로 많다.
일본거주 외국인은 납세 의무는 있으나 취직, 생활, 인권 면에서는 차별된다.
일본에서의 주요종교는 신도, 불교, 그리스도교가 있다.
신자수는 신도(고유종교) 9,100만 명, 불교 8,608만 명, 신, 구 그리스도교 93만 명,
그리고 기타 종교 831만 명을 합쳐 모두 2억 1,355만 명(1988)으로 실제 일본 인구의 약 1.8배나 된다.
신도는 정령신앙과 조상숭배를 바탕으로 한 신앙계보 위에 발달하였는데 이것은 해외에서 전파된 불교,
도교의 영향하에 그 이전부터의 토착적인 고유신앙이 혼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탄생, 결혼 의식은 신도 의식으로 행하고 장례의식은 불교의식을 따른다.
일본 이야기
공자의 유교권에서 성이 개방적인 것은 도쿠가와 바쿠후시대에 성(sex)과 돈(economy)을 스스럼없이
하여 생활인에게 거리감을 주지 않는 현실적인 정책으로 일본은 성이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일본은 성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학원은 직업 접대부 출신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테크닉을 교육하는데 키스, 흥분, 기절,
혼절의 방법을 가르쳐 완전한 성 지식으로 성생활에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옛날에 중매쟁이 부부들이 학원대신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실습을 통하여 체득하도록 하였다.
간통죄가 없는 대신에 돈으로 지불하였고 잘 생기면 7.2문 정도 하였는데 신발에 돈을 넣어 놓으면
남편이 많다고 생각되면 거스름돈을 신발 속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유부녀는 이를 검게 칠하였는데 창녀도 검게 칠하고 사기행각을 하였다고 한다.
때로는 결혼 계약금이 주어졌는데 오줌싸는 여인은 해약할 수 있는 것을 악용하여 계약금을 가로채려고
오줌싸는 사기꾼이 생기기도 하였다.
백년 전에만 하여도 시골에서는 여인들이 서서 오줌을 누었다고 한다.
나가사키현의 인구 12만 중에 7천명의 창녀가 있고 현재 고등학교 남녀 1/3이 성 경험이 있다고 한다.
세계인들이 그들을 'sex animal'라고 부르고 돈만 안다고 하여 '경제 동물(economy animal)'이라고
부른다. 성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화재라고 한다.
다다미방에 목조 건물이라 화재에 약할 수밖에 없는데 일본 1만원 권의 그림이 정한론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보험을 처음 소개하였다고 하는데 보험금을 타기 위한 방화가 많았다고 한다.
고의로 행한 방화는 소방관도 방관하고 구경만 하였다고 한다.
화재의 예방으로 보행 중에 흡연금지, 폭죽금지, 쓰레기 소각을 금지하였다고 하고,
특히 외국의 사절단(우리 나라는 통신 사절단)이 올 때는 목욕탕, 떡집, 두부집, 우동집 등
불 많이 쓰는 직업은 영업이 금지되었다.
그들은 덥고 많은 습기로 인하여 집 내부의 방바닥도 불을 때지 않는 다다미를 사용하였고,
방은 커튼으로 칸막이를 하였기 때문에 도둑만이 자유를 누렸다고 한다.
일본 천황의 계보 (-은 기원전 붉은 색은 여성 천황)
1 |
진무 神武(신무) |
-660. 1 ~ -585. 3 |
2 |
스이제이 綏靖(수정) |
-581. 1 ~ -549. 5 |
3 |
안네이 安寧(안녕) |
-549. 7 ~ -511. 12 |
4 |
이토쿠 懿徳(의덕) |
-510. 2 ~ -477. 9 |
5 |
고쇼 孝昭(효소) |
-475. 1 ~ -393. 8 |
6 |
고안 孝安(효안) |
-392. 1 ~ -291. 1 |
7 |
고레이 孝霊(효령) |
-290. 1 ~ -215. 2 |
8 |
고겐 孝元(효원) |
-214. 1 ~ -158. 9 |
9 |
가이카 開化(개화) |
-158. 11 ~ -98. 4 |
10 |
스진 崇神(숭신) |
-97. 1 ~ -30. 12 |
11 |
스이닌 垂仁(수인) |
-29. 1 ~ 70. 7 |
12 |
게이코 景行(경행) |
71. 7 ~ 130. 11 |
13 |
세이무 成務(성무) |
131. 1 ~ 190. 6 |
14 |
쥬아이 仲哀(중애) |
192. 1 ~ 200. 2 |
15 |
오진 応神(응신) |
270. 1 ~ 310. 2 |
16 |
닌토쿠 仁徳(인덕) |
313. 1 ~ 399. 1 |
17 |
리츄 履中(리중) |
400. 2 ~ 405. 3 |
18 |
한제이 反正(반정) |
406. 1 ~ 410. 1 |
19 |
인교 允恭(윤공) |
412. 12 ~ 453. 1 |
20 |
안코 安康(안강) |
453. 12 ~ 456. 8 |
21 |
유라쿠 雄略(웅략) |
456. 11 ~ 479. 8 |
22 |
세이네이 清寧(청녕) |
480. 15 ~ 484. 1 |
23 |
겐소 顕宗(현종) |
485. 1 ~ 487. 4 |
24 |
닌켄 仁賢(인현) |
488. 1 ~ 498. 8 |
25 |
부레츠 武烈(무열) |
498. 12 ~ 506. 12 |
26 |
게이타이 継体(계본) |
507. 2 ~ 531. 2 |
27 |
안칸 安閑(안한) |
531. 2 ~ 535. 12 |
28 |
센카 宣化(선화) |
535. 12 ~ 539. 2 |
29 |
긴메이 欽明(흠명) |
539. 12 ~ 571. 4 |
30 |
비타츠 敏達(민달) |
572. 4 ~ 585. 8 |
31 |
요메이 用明(용명) |
585. 9 ~ 587. 4 |
32 |
스슌 崇峻(숭준) |
587. 8 ~ 592. 11 |
33 |
스이코 推古(추고) |
592. 12 ~ 628. 3 |
34 |
죠메이 舒明(서명) |
629. 1 ~ 641. 10 |
35 |
고쿄쿠 皇極(황극) |
642. 1 ~ 645. 6 |
36 |
고토쿠 孝徳(효덕) |
645. 6 ~ 654. 10 |
37 |
사이메이 斉明(제명) |
655. 1 ~ 661. 7 |
38 |
텐지 天智(천지) |
661. 7 ~ 671. 12 |
39 |
고분 弘文(홍문) |
671. 12 ~ 672. 7 |
40 |
텐무 天武(천무) |
673. 2 ~ 686. 9 |
41 |
지토 持統(지통) |
686. 9 ~ 697. 8 |
42 |
몬무 文武(문무) |
697. 8 ~ 707. 6 |
43 |
겐메이 元明(원명) |
707. 7 ~ 715. 9 |
44 |
겐쇼 元正(원정) |
715. 9 ~ 724. 2 |
45 |
쇼무 聖武(성무) |
724. 2 ~ 749. 7 |
46 |
고켄 孝謙(효겸) |
749. 7 ~ 758. 8 |
47 |
쥰닌 淳仁(순인) |
758. 8 ~ 764. 10 |
48 |
쇼토쿠 称徳(칭덕) |
764. 10 ~ 770. 8 |
49 |
고닌 光仁(광인) |
770. 10 ~ 781. 4 |
50 |
간무 桓武(환무) |
781. 4 ~ 806. 3 |
51 |
헤이제이 平城(평성) |
806. 3 ~ 809. 4 |
52 |
사가 嵯峨(차아) |
809. 4 ~ 823. 4 |
53 |
쥰나 淳和(순화) |
823. 4 ~ 833. 2 |
54 |
닌묘 仁明(인명) |
833. 2 ~ 850. 3 |
55 |
몬토쿠 文徳(문덕) |
850. 3 ~ 858. 8 |
56 |
세이와 清和(청화) |
858. 11 ~ 876. 11 |
57 |
요제이 陽成(양성) |
876. 11 ~ 884. 2 |
58 |
고코 光孝(광효) |
884. 2 ~ 887. 8 |
59 |
우다 宇多(우다) |
887. 8 ~ 897. 7 |
60 |
다이고 醍醐(제호) |
897. 7 ~ 930. 9 |
61 |
스자쿠 朱雀(주성) |
930. 9 ~ 946. 4 |
62 |
무라카미 村上(촌상) |
946. 4 ~ 967. 5 |
63 |
레이제이 冷泉(랭천) |
967. 5 ~ 969. 8 |
64 |
엔유 円融(엔융) |
969. 8 ~ 984. 8 |
65 |
가잔 花山(화산) |
984. 8 ~ 986. 6 |
66 |
이치죠 一条(일상) |
986. 6 ~ 1011. 6 |
67 |
산죠 三条(삼상) |
1011. 6 ~ 1016. 1 |
68 |
고이치죠 後一条(후일상) |
1016. 1 ~ 1036. 4 |
69 |
고스자쿠 後朱雀(후주성) |
1036. 4 ~ 1045. 1 |
70 |
고레이제이 後冷泉(후랭천) |
1045. 1 ~ 1068. 4 |
71 |
고산죠 後三条(후삼상) |
1068. 4 ~ 1072. 12 |
72 |
시라카와 白河(백하) |
1072. 12 ~ 1086. 11 |
73 |
호리카와 堀河(굴하) |
1086. 11 ~ 1107. 7 |
74 |
토바 鳥羽(조익) |
1107. 7 ~ 1123. 1 |
75 |
스토쿠 崇徳(숭덕) |
1123. 1 ~ 1141. 12 |
76 |
고노에 近衛(근위) |
1141. 12 ~ 1155. 7 |
77 |
고시라카와 後白河(후백하) |
1155. 7 ~ 1158. 8 |
78 |
니죠 二条(이상) |
1158. 8 ~ 1165. 6 |
79 |
로쿠죠 六条(육상) |
1165. 6 ~ 1168. 2 |
80 |
다카쿠라 高倉(고창) |
1168. 2 ~ 1180. 2 |
81 |
안토쿠 安徳(안덕) |
1180. 2 ~ 1185. 3 |
82 |
고토바 後鳥羽(후조익) |
1183. 8 ~ 1198. 1 |
83 |
쓰치미카도 土御門(토어문) |
1198. 1 ~ 1210. 11 |
84 |
쥰토쿠 順徳(순덕) |
1210. 11 ~ 1221. 4 |
85 |
츄코 仲恭(중공) |
1221. 4 ~ 1221. 7 |
86 |
고호리카와 後堀河(후굴하) |
1221. 7 ~ 1232. 10 |
87 |
시죠 四条(사상) |
1232. 10 ~ 1242. 1 |
88 |
고사가 後嵯峨(후차아) |
1242. 1 ~ 1246. 1 |
89 |
고후카쿠사 後深草(후침초) |
1246. 1 ~ 1259. 11 |
90 |
가메야마 亀山(구산) |
1259. 11 ~ 1274. 1 |
91 |
고우다 後宇多(후우다) |
1274. 1 ~ 1287. 10 |
92 |
후시미 伏見(복견) |
1287. 10 ~ 1298. 7 |
93 |
고후시미 後伏見(후복견) |
1298. 7 ~ 1301. 1 |
94 |
고니조 後二条(후이상) |
1301. 1 ~ 1308. 8 |
95 |
하나조노 花園(화원) |
1308. 8 ~ 1318. 2 |
96 |
고다이고 後醍醐(후제호) |
1318. 2 ~ 1336. 8 |
97 |
고무라카미 後村上(후촌상) |
1331. 9 ~ 1333. 5 |
98 |
쵸케이 長慶(장경) |
1336. 8 ~ 1348. 10 |
99 |
고카메야마 後亀山(후구산) |
1339. 8 ~ 1368. 3 |
北朝1 |
코곤 光厳(광암) |
1348. 10 ~ 1351. 11 |
北朝2 |
코묘 光明(광명) |
1352. 8 ~ 1371. 3 |
北朝3 |
스코 崇光(숭광) |
1368. 3 ~ 1383. 10 |
北朝4 |
고코곤 後光厳(후광엄) |
1371. 3 ~ 1382. 4 |
北朝5 |
고엔유 後円融(후만축) |
1383. 10 ~ 1392. 10 |
100 |
고코마쯔 後小松(후소송) |
1382. 4 ~ 1412. 8 |
101 |
쇼코 称光(칭광) |
1412. 8 ~ 1428. 7 |
102 |
고하나조노 後花園(후화원) |
1428. 7 ~ 1464. 7 |
103 |
고츠치미카도 後土御門(후토어문) |
1464. 7 ~ 1500. 9 |
104 |
고카시와바라 後柏原(후백원) |
1500. 10 ~ 1526. 4 |
105 |
고나라 後奈良(후내랑) |
1526. 4 ~ 1557. 9 |
106 |
오기마치 正親町(정친정) |
1557. 10 ~ 1586. 11 |
107 |
고요제이 後陽成(후양성) |
1586. 11 ~ 1611. 3 |
108 |
고미즈노오 後水尾(후수미) |
1611. 3 ~ 1629. 11 |
109 |
메이쇼 明正(명정) |
1629. 11 ~ 1643. 10 |
110 |
고코묘 後光明(후광명) |
1643. 10 ~ 1654. 9 |
111 |
고사이 後西(후천서) |
1654. 11 ~ 1663. 1 |
112 |
레이겐 霊元(령원) |
1663. 1 ~ 1687. 3 |
113 |
히가시야마 東山(동산) |
1687. 3 ~ 1709. 6 |
114 |
나카미카도 中御門(중어문) |
1709. 6 ~ 1735. 3 |
115 |
사쿠라마치 桜町(앵정) |
1735. 3 ~ 1747. 5 |
116 |
고모모조노 桃園(도원) |
1747. 5 ~ 1762. 7 |
117 |
고사쿠라마치 後桜町(후앵정) |
1762. 7 ~ 1770. 11 |
118 |
모모조노 後桃園(후도원) |
1770. 11 ~ 1779. 11 |
119 |
고카구 光格(광격) |
1779. 11 ~ 1817. 3 |
120 |
닌코 仁孝(인효) |
1817. 3 ~ 1846. 2 |
121 |
고메이 孝明(효명) |
1846. 2 ~ 1866. 12 |
122 |
메이지 明治(명치) |
1867. 1 ~ 1912. 7 |
123 |
다이쇼 大正(대정) |
1912. 7 ~ 1926. 12 |
124 |
쇼와 昭和(소화) |
1926. 12 ~ 1989. 1 |
125 |
헤이세이 平成(평성) |
1989. 1 |
에도시대 개막 -일본역사 이해의 지름길
일본사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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