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시대 1회 ~ 6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Ⅰ
1. 고종 독살설
북경 망명 준비하던 고종, 이완용 대궐 숙직 다음 날 급서
대한제국을 강탈하고 난 일제에 고종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성격의 고종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일제와 친일파는 전전긍긍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의 가치를 높이 샀다. 일제와 친일파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고종이 독립운동가들과 손잡고 해외로 망명하는 것이었다.
고종 장례식과 덕수궁 함녕전에 설치된 고종 빈소. 고종독살설은 3·1운동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황제로서 시종 기회주의적이고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고종은 망국 후에는 오히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중요도가 높아졌다. 고종이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황실을 복위시키려는 복벽파(復<8F9F>派)뿐만 아니라 민주공화파들도 고종 망명에 긍정적이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을 가장 먼저 추진한 세력은 1914년 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였다. 이상설은 1915년 3월 상해 영국 조계 내의 배달(倍達)학원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유동열·이춘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했다.
신한혁명단은 광복군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고종 망명 계획을 수립했다. 신한혁명단 본부장 이상설은 외교부장 성낙형(成樂馨)을 국내로 잠입시켜 고종을 신한혁명단 당수(黨首)로 받들고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려 했다.
1 우당 이회영. 고종의 사돈이기도 했던 이회영은 고종 망명계획의 중심 인물이었다. 2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 일본의 왕족이었던 이방자 여사는 해방 후 한국 국적을 취득한 후 평생을 장애인 봉사활동으로 보냈다.
성낙형 등은 1915년 7월 26일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大勢)>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중한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독립운동가 이정규(李丁奎)의 <우당 이회영 약전(略傳)>과 구 한국군 부위였던 이관직(李觀稙)의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는 고종 망명 계획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어서 이회영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 기록은 모두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망명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이 선뜻 승낙했다고 전한다. 고종이 해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 외적인 조건은 1918년 초 미국 대통령 윌슨이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였다. 여기에 피압박 민족들이 크게 고무되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왜(倭) 황실 방자(芳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교영으로부터 고종의 승낙 의사를 전달받은 이회영이 홍증식(洪增植)과 함께 고종의 측근인 전 내부대신 민영달(閔泳達)을 만나 의사를 타진했다.
<우당 이회영 약전f>에 따르면 망국 후 남작(男爵) 작위를 거부했던 민영달은 “황제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신하 된 나에게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나는 분골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황제의 뒤를 따르겠다”고 동의했다고 전한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水路)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그날 밤 고종의 병세가 깊다면서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子爵) 이완용과 이기용(李琦鎔)이란 점이다. 고종은 그 다음날 묘시(오전 6시)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는 것인데, 일제는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라는 비공식적 방법으로 발표했다. 일제가 발표한 사인(死因)은 뇌일혈이었다.
김윤식이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고종이 갑자기 승하해 아들들도 임종치 못했다고 기록하는 등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사망한 데 대해 의혹이 일면서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유력하게 퍼진 설은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 탄 식혜를 올려 독살했는데, 그 두 명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은 자서전 <운명의 여진>에서 고종의 생질 조계진(형수)도 고종 사후 5일 후 운현궁에 갔다가 이런 내용을 듣고서 부친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듯이 왕실 사람들도 고종독살설을 믿었다. 의병장 곽종석(郭鍾錫)과 교류했던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역신 윤덕영(尹德榮)·한상학(韓相鶴)·이완용이 태황(太皇)을 독살했다”고 독살 가담자의 이름까지 명기하고 있다.
작자 미상의 <대동칠십일갑사(大東七十一甲史)>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전한다. 이완용이 어의 안상호(安相昊)로부터 집안에 미친 개를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무색무취(無色無臭)한 독약 두 통을 구해 큰 개에게 사용해보니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완용이 이를 어주도감(御廚都監) 한상학에게 올리게 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ec2e>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독살설은 고종의 인산일에 3·1운동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1919년 3월 15, 1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왕직(李王職) 명의의 해명 기사를 냈다. 그날 밤 고종이 식혜를 마시긴 했지만 여러 나인과 함께 마셨으며 그 후 안락의자에 앉아 자다가 새벽 1시15분쯤 갑자기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뇌일혈이 왔다는 것이다. 숙직사무관 한상학과 촉탁의(囑託醫) 안상호의 조치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해 새벽 6시30분쯤 사망했다는 보도였다.
이 기사는 “또 모(某·이완용:괄호 필자)의 사주를 받아 식혜에 독약을 타 드렸다는 궁녀 2인도 함구(緘口)를 위해 독살했다 하지만 병사(病死)가 확실하다”면서 의문의 궁녀 두 명의 소식도 덧붙였다.
그중 한 명인 침방 나인 김춘형(79)은 감기에 걸려 동소문 밖 안장사에 있다가 1월 23일에 죽었으며, 덕수궁 나인 박완기(62)는 고종 사후 낙담하다가 2월 2일 기침을 하다 피를 토하고 사망했다는 것이다.
매일신보는 ‘이들은 미천한 궁녀이기 때문에 어선에 참여할 수 없고 입을 막기 위해 독살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고 변명했다. 일제는 독살설을 부인하기 위해 이 기사를 게재했지만 고종이 식혜를 마셨다는 사실과 두 궁녀가 고종 사후 석연치 않게 사망했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에 독살설은 증폭되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오흥순(吳興順)에 대한 <제2회 신문조서(1919년 4월 1일)>는 3·1운동 때 뿌려진 <국민회보f>에 “고종이 천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여관(女官) 2명이 독살했는데, 그 여관도 비밀 누설 우려가 있어 죽여 버렸고, 독살 수모자는 이완용 외 1명”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의친왕 망명기도사건(대동단사건)에 관련되었던 <이재호(李在浩) 신문조서(1919년 11월 14일)>에도 고종독살설과 관련한 증언이 있다. 이재호는 “덕수궁에서 이태왕(李太王·고종) 전하의 훙거(薨去) 때 직접 모셨던 민영달 및 의사 안상호(安商浩), 아울러 간호부를 데려와서 미국에 보내 이태왕 전하 독살사건(毒殺ノ事)의 증인으로 널리 알리려는 방책까지 준비해서 민영달과 교섭 중”이라고 진술했다.
이회영이 민영달을 통해 고종을 망명시키려던 계획이 사실이었음은 이 증언으로서도 사실로 드러난다.
백성들에게 큰 비난을 샀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자 을미의병이 일어났듯이 고종도 왕위에 있을 때는 백성들의 큰 불만을 샀지만 그의 의문사는 3·1운동이 일어나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고종 부부는 죽음으로써 일제에 타격을 입히는 묘한 운명이었다.
2. 쌀소동과 3·1운동
산업화이농에 日 쌀난리 … ‘무력통치’ 데라우치 실각
무사 나라’ 일본은 무력이면 한국을 영구히 통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헌병경찰제 아래서 한국인에게만 태형을 실시하고 초등학교 교원까지 긴 칼을 차고 교단에 서게 했다. 10년에 걸친 이런 폭압 통치는 한국인의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리게 됐다
일제가 군산항을 통해 한반도에서 생산된 미곡을 반출하고 있다. 일본의 쌀소동에 놀란 일제는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세워 식민지 수탈을 강화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1918년 11월 1일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이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동맹 국가가 선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삼국협상 국가에 맞서 식민지 및 시장을 분할하기 위해 전개했던 전쟁이었다. 1914년부터 4년간 벌어진 세계대전은 2000만여 명이라는 막대한 사상자를 남긴 채 협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무기 삼아 유럽 전선에 직접 참전하지 않고도 막대한 이익을 본 수혜국이 됐다.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독일 조차지(租借地)인 중국 산동(山東)반도의 교주만(膠州灣)을 점령하고 청도(靑島)를 차지했다. 독일은 산동반도에까지 군사를 보내 일본과 다툴 형편이 아니었다.
일본은 1915년 5월 25일 중국의 원세개(袁世凱) 총통에게 21개 조항을 강요해 받아들이게 했다. 산동반도 내의 독일 이권은 물론 만주에 일본의 조차지를 설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21개 조항은 중국 내 반일감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성격이 강했던 일본 자본주의는 전쟁 특수로 급성장했다. 전쟁이 발발한 1914년에 11억 엔(円)의 채무국이었던 일본은 수출액이 네 배 이상 증가해 1920년에는 27억 엔의 채권국으로 탈바꿈했다. 전쟁 특수로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에 대해 생사(生絲) 수출이 급증하고 전쟁 당사국이었던 영국과 러시아로도 수출이 증가했다.
1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일본 유학생들의 기념사진. 왼쪽 두루마기 차림이 대표인 최팔용이다. 2 춘원 이광수.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만 해도 이광수는 신망받는 문필가이자 청년 독립운동가였다. 3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총독과 일본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무력통치에 의존했다
유럽 열강이 전쟁에 전념하느라 아시아 시장에서 퇴조하자 일본의 수출이 늘어났다. 무엇보다 군수품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이 크게 성장했다. 1913년 기선(汽船) 건조는 5만1525t에 불과했으나 1918년에는 62만6695t으로 12배 이상 급성장했다(三和良一, <近現代日本經濟史要覽>). 그러면서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해운 조선국으로 급성장했다. 화학공업과 전력산업도 급속히 발전해 도쿄에서 이나와시로(猪苗代)까지 200㎞ 장거리 고압 송전에 성공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했지만 그 이면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농촌에서는 농토를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고 사는 기생지주제(寄生地主制)가 여전했다. 공장 노동자 수는 85만 명에서 178만 명으로 급증했는데, 농촌 인구가 공장 노동자로 빠져나가면서 임금과 물가가 동반 상승했다.
농촌인구 감소와 함께 쌀 생산량이 급감함에 따라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16년 5844만여 석에 달했던 쌀 생산량이 1917년과 1918년에는 각각 5469만여 석으로 400만 석 가까이 감소했다. 1918년 3월 한 되(升)에 20전 정도이던 백미(白米)가 7월에는 40~45전으로 치솟더니 8월 초순에는 50전으로 상승했다. 도시 노동자의 일급(日給)이 50전 정도였으니 하루 종일 일해 쌀 한 되 사면 끝이었다.
1918년 7월 23일 도야마(富山)현 우즈(魚津) 마을의 부녀자들이 쌀값 폭등에 항의하면서 현 바깥으로 미곡을 반출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전국적인 쌀소동(米騷動)으로 번진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자연발생적이었던 쌀소동은 도시 노동자와 빈농(貧農)이 대거 가세하면서 1도(道)·3부(府)·32현(縣)·33시(市)의 500개소로 확대됐다.
일본 민중은 전국 곳곳에 집결해 쌀값 인상과 매점매석, 정부의 무대책을 비난했는데, 마침 일본 총리는 무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5185>正毅)였다. 조선총독으로서 공적을 인정받아 1916년 10월 총리가 된 데라우치의 머리는 비리켄 인형의 머리와 비슷했다. 이 때문에 헌법도 무시하는 그의 내각을 ‘비입헌(非立憲·비리켄) 내각’이라고 불렀다. 쌀소동이 격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고와 황실·재벌 자금까지 투입해 쌀값 안정에 나서는 한편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동원해 탄압했다.
그러나 무력통치로 일관하던 데라우치 내각도 쌀소동이 확산되자 책임을 지고 1918년 9월 29일 총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쌀소동은 더 이상 민중을 무력으로 억누를 수 없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산미증식 계획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
데라우치의 뒤를 이어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 총재이자 온건파였던 하라 다카시(原敬·재임 1918년 9월 29일~1921년 11월 13일)가 취임하면서 정당 내각 시대가 열렸다. 이 무렵 국제 정세가 요동쳤다.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그해 말 무병합·무배상 강화(講和),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자결, 비밀외교 폐지 등을 주장하고 나서 자본주의 국가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 맞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14개조 평화원칙’에 민족자결주의를 집어넣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이었던 독일 등이 지배하던 식민지 국가에만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민족자결’이란 언어 자체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8월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2월 파리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한편 선우혁·김철 등을 국내로 파견했다.
선우혁은 1919년 2월 초 평안북도 선천의 양전백 목사와 정주의 이승훈·길선주 목사 등을 만나 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협의하고 김철은 서울에서 천도교 측과 접촉했다. 신한청년당은 일본에도 조용은(趙鏞殷·조소앙)과 장덕수·이광수 등을 파견했는데, 이광수는 서울을 거쳐 도쿄로 가서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19년 2월 만주에서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좌진(金佐鎭), 조용은, 려준(呂準), 유동열(柳東說),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상룡(李相龍), 이세영(李世永),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문창범(文昌範),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翊),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윤세복(尹世復), 허혁(許爀) 등 39명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는 항일 독립전쟁을 “하늘의 인도와 대동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하고도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1919년 1월 6일 일본의 한국 유학생들은 도쿄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최팔용·백관수·김상덕·김도연·전영택 등 10명을 실행위원으로 선출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및 각국 대사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병으로 사임한 전영택 대신 이광수·김철수가 더해져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4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청년단 대회를 개최했다.
‘조선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국장 최팔용의 사회로 개최된 이 대회에서 백관수는 이광수가 기초한 ‘됴션쳥년독립단션언셔(2·8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은 4개 항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됴션쳥년독립단션언셔’는 ‘10년간 독립을 회복하려다가 희생된 자 수십만’이라면서 ‘한·일합병은 조선민족의 의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선언서는 ‘합병 당시의 선언과 달리 일제는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대하듯이 했으며 참혹한 헌병정치하에서 참정권·집회·결사·언론·출판의 자유와 신교의 자유까지 억압당했다.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일본과 혈전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새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유학생들은 도쿄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서 출동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다가 27명이 체포돼 최팔용 등 9명이 금고 1년 정도의 형을 받았다. 당초 내란죄를 적용하려 했으나 하나이 다쿠조(花井卓藏),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등 민권변호사들이 “학생들이 자기 나라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 어찌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하는가”라며 무료 변론에 나서면서 처벌이 가벼운 출판법 위반죄가 적용된 것이다.
2월 23일에는 유학생들이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조선독립청년단 국민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인쇄물이 사전 발각돼 변희용(卞熙瑢)·최승만(崔承萬) 등이 구금됐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후 2시에는 최재우(崔在宇)가 150여 명의 유학생과 함께 유인물을 배포하며 시위했다.
이런 와중인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붕어 소식이 전해졌다. ‘고종 독살설’은 불타오르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천도교계의 이종일(李鍾一)은 묵암 비망록(默菴備忘錄)에서 “어제 고종이 일본에 독살당했다. 이것은 무엇보다 대한인의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일대 요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민중시위 구국운동은 이제 진정한 민중운동으로 성숙될 것이다…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라고 예견했다. 3월 3일 국장(國葬)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백성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3월 1일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3·1운동은 단순한 만세시위가 아니라 그간 역사의 객체였던 민중이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향해 던진 비수였다. 3·1운동으로 한국인이 원해서 병합했다는 일제의 선전은 사기였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드러났다. 그렇게 민중은 스스로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했다.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과 고종의 인산이 겹치면서 3·1운동은 전 민족적 거사가 되었다. [그림=백범영 한국화가, 용인대 미대 교수]
노론 당수 이완용이 일진회의 이용구·송병준과 매국(賣國) 경쟁에 나선 것은 망국 후에도 자신들에게 정치적 지분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어떤 정치적 배려도 하지 않았다.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주어진 자리는 총독이 임면권과 해임권을 갖고 있는 중추원 고문이란 명예직에 불과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8년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의 직원 수는 촉탁(囑託)과 고용원을 포함해 2만1302명인데, 그중 일본인은 1만2865명, 조선인은 8437명이었다. 조선인 숫자가 40%에 가깝지만 그중 말단 순사를 보조하는 순사보가 3067명, 헌병보조원이 4749명으로 도합 7816명이나 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부분 최하위 말단직이었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재임 1910년 10월~1916년 10월)와 2대 총독인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재임 1916년 10월~1919년 8월)는 첫째도 무력, 둘째도 무력으로 한국을 통치했다. 일본 육사 출신 박영철(朴榮喆)은 1912년부터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전북 익산군수를 역임하는데, '삼천리' 1934년 5월호에 데라우치가 익산을 순시했을 때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1913년 데라우치가 ‘아카시(明石) 경무총감, 구라토미(倉富) 법부장관(法部長官) 등을 거느리고 장관이 군대를 검열(檢閱)하는 듯한 모양으로 도착했다’는 것이다. 접견실에서 재무주임이 칼을 차지 않고 나오자 데라우치는 “너, 검(劍)을 어떻게 했어?”라고 대갈일성(大喝一聲)했다고 전한다.
박영철 같은 친일파까지도 데라우치는 무용제일(武容第一)이었다면서 “군속(郡屬), 철도원(鐵道員), 기사(技師) 같은 평화(平和)한 직무를 보는 자는 물론 심지어 벌레 하나 아니 죽일 듯한 여학생을 교육하는 여학교 교사들에게까지 칼을 채워 살기횡일(殺氣橫溢)한 외관을 이루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데라우치나 하세가와는 헌병경찰제도와 태형(笞刑)이면 한국인을 영구히 지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박영철도 “데라우치 자신은 겁 많은 이로 관저 이외에는 나다니지 못했고 다니더라도 사복(私服) 헌병(憲兵) 등으로 열을 지을 지경이었다”고 데라우치의 무단통치가 내면적 두려움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이런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과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전민족적인 3·1운동으로 결집된다. 1919년 1월 20일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은 동대문 밖 천도교 소유의 상춘원(常春園: 현 숭인동)에서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일제의 각종 신문기록과 <의암(義菴) 손병희 선생 전기(1967)> 등에 따르면 이들은 한규설(韓圭卨)·윤치호(尹致昊)·박영효(朴泳孝)·김윤식(金允植)·윤용구(尹用求) 등 대한제국 관료들은 물론 심지어 이완용까지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고 전한다.
손병희가 이완용까지 끌어들이려 했던 것은 이완용도 총독부에 의해 사실상 팽(烹)당한 상황이란 점과 “매국적(賣國賊)까지 독립을 원한다면 삼천만이 다 독립을 원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라는 손병희의 말처럼 3·1운동을 전 국민의 총의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천도교계의 이런 움직임은 최린이 당시 경성지방법원의 <신문조서>에서 ‘최남선이 기독교계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면서 합동으로 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해 이승훈을 자택에서 만났다’고 전하는 것처럼 기독교계와 만나게 된다.
기독교계는 당초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을 계획했으나 천도교 측과 만나 독립선언을 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기독교계의 이승훈·함태영은 2월 22일께 최린의 집에서 회동해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독립을 선언한다”는 계획에 합의했다.
'손병희 신문조서' 등에 따르면 천도교 측에서 이때 5000원의 자금을 기독교 측에 제공했다. 또 불교계도 참여시키기 위해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하던 한용운(韓龍雲)과 백룡성(白龍城)을 합류시켰다. 유림(儒林)도 참여시키기 위해 곽종석(郭鍾錫) 등과 접촉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경북 성주의 김창숙(金昌淑)과 접촉했다.
김창숙은 자서전 ''벽옹' 73년 회상기'에서 서울의 성태영(成泰英)으로부터 ‘광무 황제 인산일에 모종의 일을 일으키려고 하니 바로 상경하라’는 편지를 받았지만 모친의 병환 때문에 2월 그믐에야 서울에 올라오니 이미 때가 늦었다고 회고했다.
김창숙은 '독립선언서'를 읽고 “지금 광복운동을 전개하는데 3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겠는가”라고 통탄했다. 김창숙은 대신 전국 유림 134명 명의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파리장서(巴里長書)'를 파리평화회의에 전달하는 파리장서 사건(1919년 4월)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양교 인사들은 연희전문학교 김원벽(金元璧), 보성전문학교 강기덕(康基德),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韓偉健) 등 학생대표들과 만나 범위를 확대했다.
손병희 등 천도교계 인사 15명, 이승훈·길선주 등 기독교계 인사 16명, 2명의 불교계 인사들이 민족대표 33인이 되는데, 준비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던 천도교계의 박인호(朴仁浩)· 노헌용(盧憲容), 기독교계의 함태영·김세환(金世煥) 등은 뒷일을 처리하기 위해 명단에서 빠졌다.
이들까지 포함하면 48인이 된다. '이종일 신문조서' 등에 따르면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는 최남선 경영의 신문관(新文館)에서 활자를 만들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에서 인쇄했는데 1, 2차 도합 3만5000장이었다. 서울 시내는 학생대표단이, 지방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나누어 배포하기로 분담했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오후 5시 서울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서 23인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모임을 가졌는데, 손병희와 최린의 '신문조서' 등에 따르면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 손병희가 명월관(明月館) 인사동 지점인 태화관(泰和館)으로 장소를 변경했다고 전한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낮 12시쯤부터 태화관에 모여들었고, 파고다공원에도 수천 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생대표인 '강기덕 신문조서'에 따르면 강기덕·김문진·한국태 세 사람이 태화관으로 가서 민족대표들에게 파고다공원으로 가자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최린은 '신문조서'에서 ‘손병희가 이런 일은 젊은이들이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니 선진자들에게 맡기고 돌아가라고 했고, 다른 사람들도 빨리 돌아가라고 해서 학생들은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강기덕은 '신문조서'에서 “그때 나는 실례되는 태도를 취했으므로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나의 팔을 잡고 제지하는 등 혼잡했다”고 전해 양측 사이에 상당한 이견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강기덕은 누군가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더라도 “책임은 자기들(민족대표)이 진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전해 발표 장소와는 무관하게 책임은 민족대표들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다만 독립선언이 폭력시위로 발전할 경우 자신들의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태화관을 고집했던 것이다.
최린은 '신문조서'에서 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있을 때 이미 종로 쪽에서 만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태화관 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데, 대략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최린이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 사실을 통보했으며, 총독부에는 이갑성이 김윤진을 보내 통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린은 '신문조서'에서 “선언서를 배부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한용운이 인사말을 하고 일동이 만세를 부르고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오세창은 '신문조서'에서 ‘한용운이 인사말을 하고 만세를 제창했다’고 전한다.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서 파고다공원에 있었던 이의경(李儀景: 필명 이미륵)은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갑자기 깊은 정적이 왔고 누군가가 조용한 가운데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었다……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좁은 공원에서 모두 전율했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대한문 앞 광장에서 고종을 애도하던 각도 유생들은 물론 상인들도 철시하고 합류했다.
서울 거리거리마다 수십만의 인파가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데라우치와 하세가와의 무단통치는 이렇게 전 민족적인 항거에 맞닥뜨렸다.
4. 무너지는 무단통치
하세가와 총독, 본국서 군대 지원 받아 시위 유혈 진압
3·1운동의 중요한 특징은 자발성이다. 민족대표들은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지만 시민·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전개했으며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또한 일제의 총검에 맨몸으로 맞섰다. 일제 통치의 폭력성과 야수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마치 인간과 야수의 싸움처럼 전개되었다.
북간도 용정 시내. 용정 서전평야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가 열리자 일제의 영사관 경찰은 중국 군인들 틈에 끼어 있다가 총격을 가해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탑골(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하면서 탑골공원에서는 혼선이 생겼다. 독립선언서 낭독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선언서를 낭독했는데, 태화관으로 민족대표를 모시러 갔던 학생대표 강기덕과 김원벽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는 누가 선언서를 낭독했는가”라는 경성지법의 ‘신문조서’에 “모른다”거나 “자동차를 타고 온 일본 유학생이 낭독했다고 들었다”고 모호하게 답변했다. 낭독자는 오리무중이었다.
일제는 연행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는데, 박쾌인(朴快仁)은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사범과(師範科)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 공원에 갔다’며 “육각당(六角堂) 위에서 중절모자를 쓴 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지만 누군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김교승(金敎昇)과 의학전문학교 유완영(劉完榮)도 ‘낭독자는 누군지 모른다’고 답했다. 일제는 끝내 낭독자를 체포하지 못했는데, 1970년 고양군 벽제면에 사는 해주 출신의 경신(儆新)학교 졸업생 정재용(鄭在鎔·86세)이 자신이 낭독했다고 증언했다.(<독립운동사> 제2권, 1975)
만세행진 방향에 대해서는 박쾌인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종로로 나가 남대문, 의주통(義州通: 무악재 부근), 영성문(永成門: 덕수궁)·대한문(大漢門) 앞까지 갔다가 다시 서대문 밖 프랑스 영사관 앞을 지나 서대문정(町), 장곡천정(長谷川町: 소공동)에 이르러 본정(本町: 충무로)으로 가니, 해산 명령이 내려 하숙으로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박쾌인은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 체포되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홍순복(洪淳福)은 “영락정(永樂町: 저동), 황금정(黃金町: 을지로) 순서로 각 장안을 통과해 종로에서 해산했다”고 전했지만 같은 학교 손덕기(孫悳基)는 “본정 2정목(丁目: 충무로 2가) 파출소 앞까지 갔다가 체포당했다”고 말해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한다.
1 서울 종로의 만세시위. 일제의 무력 진압에 몸을 피하는 모습이다. 2 서간도 삼원포. 해외에서 가장 먼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경무총감부는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을 비롯해 모두 134명을 연행했지만 이날만 해도 발포까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언제 최초로 발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상해, 1920)는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군대를 동원해 뿌리째 없앨 방침이었으나 조선주둔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가 ‘군대를 출동시킬 수 없다’고 거절해 하세가와가 본국 정부에 새로운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며 “새로 온 군대가 학살을 자행했다”고 전한다. 평화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자는 총독 하세가와란 뜻이다.
2007년에 발견된 우쓰노미야 일기는 그간 일본에서 부인해 왔던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 ‘일본군이 30여 명의 주민을 교회에 가두고 살해, 방화했다’고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제국의 입장에 심각한 불이익이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려 간부들과 협의해 담당 중위에게 30일간 근신처분을 내렸다고 자백하고 있다.
만세시위에 당황한 하세가와는 3월 3일의 고종 장례식을 크게 우려했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는 하세가와가 3월 1일 ‘(고종 인산일에) 경거망동하거나 허설부언(虛說浮言)을 날조해 인심을 요란케 하는 것과 같은 언동을 감행하는 자는 본 총독이 직권(職權)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이라는 협박 유고(諭告)를 발표했다고 전한다.
드디어 3월 3일 덕수궁과 훈련원(동대문운동장)에서 거행되는 장례식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들었다. 오전 6시 20분 덕수궁에서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8시쯤 재궁(梓宮: 시신)은 대한문 밖에 있는 대여(大輿)로 옮겨져 유생·시민·학생들의 애도 속에 훈련원으로 운구되었다.
오후 1시30분에 훈련원을 출발한 운구는 오후 2시40분쯤 청량리에서 노제(路祭)를 지내고 5시반쯤 망우리에서 전(奠)을 올린 후 밤 11시10분쯤 명성황후가 누워있는 금곡(金谷)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총독부는 국장 내내 긴장했다. 하지만 <고등경찰관계연표(高等警察關係年表)>가 이날 경기도 개성에서 낮에 1000여 명, 밤에 2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에 나섰다고 전하는 것처럼 지방에서는 시위가 발생했지만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세가와의 협박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비운의 황제를 경건하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3월 5일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韓偉健) 등의 주도로 아침부터 남대문역(서울역) 광장 일대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경찰들이 칼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서 많은 시민이 부상을 입고 남자 40명과 여자 35명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에 놀란 하세가와는 “앞으로 정학(停學: 동맹휴업), 폐업(廢業: 상가철시)하거나 광분하는 데 열중할 것 같으면 반드시 다른 날에 후회하게 될 것”이란 내용의 협박 유고를 다시 발표했다.
그러나 3월 9일 서울 상인들이 “일체 폐점하고 시위운동에 참여하자”는 내용의 ‘경성시 상민일동 공약서(京城市商民一同公約書)’를 발표하면서 일제 철시에 나섰다. 또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던 학생들과 고종 인산에 참가했던 시민·유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만주와 러시아령 등 해외로도 파급되어 3월 12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서 첫 시위가 발생했다. 삼원포는 망국 직후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사대부들이 1911년 4월 경학사를 조직했던 추가가의 길목이었다.(<절망을 넘어서> 참조)
다음 날인 3월 13일에는 이상설이 망명해 서전(瑞甸)서숙을 열었던 북간도 용정촌 서전평야에서 ‘독립선언 경축식’이 열렸다. 용정의 명동학교를 필두로 70, 80리 거리로부터 280리 거리의 12개 한국인 학교 학생들은 물론 일본 학교의 한국인 학생들까지 모여들었다.
참석인원에 대해 <독립신문>은 3만 명, 일제의 <재외 조선인 독립운동개황(在外鮮人の獨立運動槪況)>은 4000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용정의 일본영사관은 연길 도윤(道尹) 도빈(陶彬)에게 ‘조선인은 일본 국민이어서 경비 임무를 맡겠다’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영사관 경찰은 권총을 가지고 중국 군인들 틈에 끼어 있다가 행진 대열에 발포해 기수(旗手) 박문호(朴文鎬)를 비롯한 17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용정 교민들은 3월 17일 영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제창병원(濟昌病院)에서 4000여 명이 운집해 일제를 성토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서간도의 유하(柳河)·통화(通化)·집안(輯安)·흥경(興京)·관전(寬甸)·환인(桓仁)·장백(長白)·안도(安圖)·무송(撫松)현과 북간도의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旺淸)·훈춘(琿春) 등 한인들이 이주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가 열렸다.
3월 17일에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태극기를 앞세운 시가행진이 있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건설한 신한촌에서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뿐 아니라 니콜리스크·라즈토리노예·스파스코 등 러시아령 각지에서도 만세시위가 발생했다.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 25년사>는 1919년의 시위 횟수가 617건, 참가 인원 58만7000명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자료 수집의 어려움 때문에 많은 부분이 빠졌다’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울 57회 57만여 명, 경기 304회 67만여 명, 강원 57회 10만여 명, 충청 156회 12만여 명, 전라 216회 30만여 명, 경상 132회 11만여 명, 함경 94회 5만7000여 명, 평안 314회 51만여 명, 황해 120회 9만2000여 명 등 모두 1393회 195만4000여 명이다.”
일제가 평화시위를 총검으로 진압하면서 사상자가 속출했는데, <ec2e>시정(施政) 25년사<ec2f>는 조선인 사상자 2000여 명, 일본인 군인·헌병경찰 사상자 200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서울에 있는 통신원의 기록을 토대로 “창으로 찌르고 칼로 치는 것이 마치 풀 베듯 해서 즉사한 사람이 3750여 명이고, 중상을 당해 며칠 후에 죽은 사람이 4600여 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연행자들은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 해주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던 김명신은 3월 2일 연백군 벽란도에서 체포되었다가 그해 10월 석방되었는데, 그의 친구는 방문기에서 “그의 하체불수(下體不遂: 하체를 사용하지 못함)를 보고 경악했다. 군은 본시 나의 동창으로서 생룡생호(生龍生虎: 용과 호랑이) 같은 청년이었는데 입감한 지 수개월에 이렇게 하체불수가 돼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심양초부(沁陽樵夫나의 일기(1919년 11월 12일자 반도신문< 제24호)”라고 전하고 있다.
일제는 평화 시위에 야수적인 폭력진압으로 대응했지만 이미 무단통치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었다. 일제 10년 지배의 총체적 파탄이 전 세계에 드러났다
5. 문관총독 사기극
요미우리, 조선소요 사태 풀기 위해 문치 전환 촉구
조선총독부는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만세시위를 진압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일본 본토에서 군대를 증파해 잔혹하게 진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관만 임명할 수 있었던 조선총독을 문관도 할 수 있도록 바꾸었다. 그러나 문관총독제 또한 겉모습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계속 무관이 총독으로 부임했다
광화문 비각 앞에서 시위하는 한국인들. 일제는 본토에서 병력을 급파해 맨손 시위대를 잔혹하게 사냥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1921년 서울에서 발간된 <조선독립소요사론(朝鮮獨立騷擾史論)>은 흥미로운 책이다. 복면유생(覆面儒生)이 저자인데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휘호를 써 주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자신을 ‘일본제국의 유생 청류남명(靑柳南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책 속에선 3·1운동의 원인을 천도교, 무단정치, 이주 식민정책, 민족자결주의 등 여러 가지로 논하고 있는데, 그중에 ‘은사수작편당론(恩賜授爵偏黨論)’도 들어 있다. 총독부로부터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사람들이 노론에 편중된 것이 시위의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재상(宰相) 이완용은 노론의 거두요, 소론파로는 조중응이 있지만 중요하지 않고, 전부 노론 천하가 되어 소론은 극단으로 압박되었으며 소론에서는 노론에 붙은 조중응을 실절자(失節者:절개를 잃은 자)로 여긴다’고 주장했다. 그
는 ‘(합방 이후) 천하의 사업(事業), 미명(美名), 세리(勢利)는 모두 노론이 차지한 것이 3·1운동의 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분석이지만 노론세가 강했던 충청도에서도 156회의 시위에 연인원 12만여 명이 참가해서 590여 명이 살해당한 사실(<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비추어 보면 설득력은 크지 않다. 3·1운동은 역사의 객체였던 민중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이 망국 후에도 얼마나 조선총독부와 긴밀하게 지냈는지를 말해주는 산 증언은 될 수 있다. 실제로 노론 당수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란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1912년 3월 ‘조선 귀족(貴族) 심사위원’으로 임명되어 총독부에 붙어 부귀를 누리려는 자들에게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세했다.
이완용은 손병희의 3·1운동 합류 권유를 거부한 데 이어 3·1운동 직후와 4월 9일, 5월 30일 연이어 독립운동을 중지하고 일본 통치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완용도 그만큼 당황했다는 방증이었다.
1 하라 다카시 총리. 일본 정계의 문치파를 대표한다. 1921년 11월 암살되었다. 2 일본 중의원 가와사키 가쓰 의원. 군국주의에 맞서 의회정치를 지키려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4월 들어서도 만세시위는 진정되기는커녕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4월 18일자에 “함경도 홍원군 보청면 삼호(三湖)에서 수백 명의 아동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변경의 어린아이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물론 일본 정부도 당황했다. 매국적(賣國賊)을 제외한 남녀노소 모두가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한국민은 총독부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다’라던 선전이 사기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급기야 일본 중의원(衆議院)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8일자는 일본헌정회(憲政會) 출신의 대의사(代議士: 의원) 가와사키(川崎克)가 질문서를 제출해 “정부는 왜 이런 중대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는가”라면서 “헌병행정(憲兵行政)의 무능을 유감없이 폭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가와사키는 또 “정부는 공안 유지의 필요상 이런 기관들을 쇄신할 의도가 없는가”라면서 조선인들을 공직에 임용하는 방안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헌병경찰제를 주축으로 하는 무단통치를 시위의 주범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조선독립소요사론>도 ‘모두가 일시에 발흥해서 소요의 원인을 무단통치의 죄(罪)에 모두 귀결시켰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여전히 무력으로 진압하면 된다는 생각이었고, 일본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매일신보 4월 10일자는 일본 육군성에서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 8사단 보병 5연대와 2사단 보병 32연대의 각 대대를 아오모리(靑森)에서 원산으로, 13사단 보병 16연대와 9사단 보병 36연대의 각 대대를 쓰루가(敦賀)에서 부산으로, 10사단 보병 10연대와 5사단 71연대를 우지나(宇品)에서 부산으로 증파하고, 오사카(大阪)에서도 헌병 400명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맨손 시위대에 총칼로 맞서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야만의 제국이었다.
같은 날 하세가와는 세 번째로 협박 유고(諭告)를 발표해 ‘군사를 동원해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득이한 조치’라고 강변했다. 하세가와는 4월 17일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기자에게 “조선소요 사태의 진정은 조선 주둔 사단과 헌병, 경찰만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래서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군대를 증파시켜 일거에 진압할 방침”이라고 토로했다. 조선 주둔 사단과 헌병, 경찰력만으로는 만세시위를 진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토한 것이다.
하세가와는 4월 15일 제령(制令) 제7호를 발포해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 공동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하고자 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시위는 물론 모의만 해도 징역 10년이라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하세가와는 도쿄아사히신문 기자에게 “조선인의 지위와 경우(境遇:형편)를 존중하고 일시동인주의(一視同仁主義:일본인과 한국인을 같이 바라봄)를 철저하게 기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자신이 앞장섰던 민족 차별주의 정책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월 28일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은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조선병합은 일본 제국의 존립을 확보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지 단순히 조선인의 이익을 위함이라고 교시하는 것은 오히려 해롭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국인을 위해서 병합했다’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숨어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대소 관리로부터 의사와 보통학교(초등학교)의 훈도(訓導:교사)까지 모두 장검을 차고 시중을 왕래하는데 순박하고 정직한 자라도 어찌 유쾌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통치의 요체는 빨리 무치(武治)를 폐하고 문치(文治)를 함에 있다”고 문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개혁 요점으로 ‘①문관총독제 ②헌병제도의 근본적 개혁과 성적이 불량한 보조헌병제 폐지 ③관리 임용을 식민지 인민을 위해 할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나아가 “요컨대 조선을 일본의 부속지(附屬地)라는 관념으로 (통치)하지 말고 전적으로 조선을 주(主)로 하여 수립하라”고 제안했다.
한국인이 원하는 것은 독립이었지만 대안은 기껏 문관총독제였다. 총독 하세가와는 앞의 도쿄아사히신문 기자에게 문관총독론에 대해 “위대한 수완을 가진 문관 대정치가를 기다리는 것은 참 좋을 것이다”라고 애매하게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인물이 어디 있겠느냐는 뉘앙스였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식 무단통치의 파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만주 안동(安東)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의 기관지 <반도청년보>는 6월호에서 “총독 하세가와는 불가불 사직청원을 올렸다”면서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체적으로 하등 발표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일본 정부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풍자하고 있다. <반도청년보>는 하세가와가 시위 발생 직후 사직서를 낸 것처럼 보도했지만 <조선총독부 관보> 7월 1일자에서 하세가와는 여전히 “조선인은 제국의 신민(臣民)으로 일본인과 하등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통치 또한 일찍부터 동화(同化)의 방침으로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대의에 준칙하여 편사(偏私:사적으로 편향됨)가 없었다”라는 기만적 언사를 계속했다.
<재팬크로니클>은 4월 22일자에서 “금번 소요가 무관제도하에서 발생했으므로 그 대신 문관총독을 임명하는 것은 반대할 일이 아니지만, 조선인의 심중에 저들이 원하는 것은 즉시 주어지리라는 사상이 생기는 것은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경계해 곤혹스러운 일본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다.
계속 침묵을 지키던 일본의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는 1919년 8월 19일 일왕(日王)의 명으로 반포되는 칙령(勅令) 386호를 통해 “조선총독은 문관 또는 무관 중에서 임용할 수 있다”고 밝혀 문관도 총독으로 임용할 길을 터놓았다.
또한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도를 실시하고 관리 및 교원들의 장검 패용도 폐지시켰다. 원성이 자자했던 무단통치의 상징적 조치들은 조선 민중의 항거로 폐지되었다. 또한 한국인에게만 자행되던 태형(笞刑)도 1920년 4월 1일 폐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관보> 1919년 8월 18일자는 ‘조선총독 백작 하세가와와 정무총감 야마가타(山縣伊三<90CE>)를 의원(依願) 면직하고 해군대장 남작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조선총독에 임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무총감은 법학박사(法學博士)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였다. >
앞의 <반도청년보>에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혈전하기로 맹서한 자라 무관총독이니 문관총독이니 하는 것이 무슨 관계인가”라고 선언한 터인데, 말만 문관총독 운운해놓고 다시 해군대장 출신의 무관총독을 임명한 사기극이었다. 새 무관총독 사이토의 부임 길을 만 예순셋의 청년노인 강우규(姜宇奎)가 기다렸다
6. 청년노인 강우규 의사
강우규 거사날, 민중 습격 두려워 조선총독부 건물 소등
서울역 광장의 강우규 동상. 64세의 강우규는 신임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지고 사라졌으나 친일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일제는 1919년 8월 칙령으로 “조선 총독은 문관 또는 무관 중에서 임용할 수 있다”고 바꾸고서도 3대 조선총독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고토(齋藤實)를 임명했다. 여전히 한국을 군사점령지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해군대신 시절의 신임 총독 사이토 마고토. 금강함 사건으로 내각이 무너지면서 군복도 벗어야 했다.
사이토는 1906년 해군중장 때 제1차 사이온지(西園寺) 내각의 해군대신에 임명된 데 이어 1912년에 해군대장으로 진급하는데 1914년 야마모토(山本權兵衛) 내각까지 5개 내각에서 해군대신으로 재직했다. 그는 1914년 4월 ‘지멘스 사건’이란 암초를 만난다.
독일 지멘스사는 ‘금강함(金剛艦)’을 수주하기 위해 해군 요로에 뇌물을 뿌렸다. 지멘스의 독일인 직원이 이 서류를 가지고 도쿄지점장에게 돈을 뜯으려다 실패하자 로이터통신 특파원에게 팔았다. 그러다 독일에서 공갈미수죄로 기소된 사건이다.
당시 해군 예산 증액에 비판적이었던 일본 신문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야당인 입헌동지회·입헌국민당·중정회(中正會)는 내각 탄핵 결의안을 상정했다. 2월 10일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내각 탄핵 국민대회 개최 도중 164 대 205표로 탄핵안이 부결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한 민중이 의사당을 포위하고 구내로 들어가 경찰과 충돌했다.
2 야마모토 정권을 무너뜨린 금강함. 당시 일본 군부는 뇌물비리의 온상이었다. 금강호는 1944년 11월 대만 지룽(基隆)항에서 미국 잠수함의 어뢰 두 발을 맞고 침몰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는가 했지만 영국 비커스사의 일본 대리점인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이 해군중장 마쓰모토(松本和)에게 40만 엔의 뇌물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야마모토 내각은 1914년 3월 24일 무너졌다.
그 뒤를 이은 오쿠마(大<9688>) 내각은 해군 숙정을 요구하는 여론에 밀려 해군대장 신분의 전 총리 야마모토와 사이토의 군복을 벗게 했다. 이로써 사이토의 정치인생은 끝나는 듯했지만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활한 것이다.
행정·치안을 담당하는 부총독 격의 정무총감에는 도쿄대 법학과 출신의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가 임명됐다. 1919년 8월 12일 도쿄에서 신임 총독·정무총감 취임식을 치렀는데 사이토에게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3·1운동 이후에 일본 안팎에선 ‘일본이 한국을 계속 통치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사이토와 미즈노는 신문기자들은 물론 추밀원·내각·법제국·척식국·대장성·내무성·육해군 등 한국 지배와 관련 있는 기관의 인사들과 잇따라 초대회를 열었고 사카타니(阪谷)·요시노(吉野) 같은 조선문제 전문가들의 의견도 경청했다.
8월 25일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가 베푸는 만찬회가 있었다. 드디어 28일 사이토는 정무총감 미즈노, 경무국장(경찰총수) 노구치(野口), 식산(殖産)국장 니시무라(西村), 비서관 모리야(守屋) 등 20여 명의 일행과 함께 도쿄를 출발했다.
마치 전선이라도 가는 듯 수백 명이 역으로 나왔다. ‘삼천리’ 1936년 11월호는 ‘남대문 역두일기(驛頭日記)’라는 사이토의 부임 수기를 싣고 있는데, 교토(京都)로 가는 도중 이세산전(伊勢山田)에서 1박했다.
일본 왕실의 선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사이토 일행과 함께했던 야마가미(山上昶)는 “조선 통치를 위해 지성을 경주할 것을 신 앞에 맹세하겠다”는 뜻이라고 전하고 있다(조선총독부 편찬,<조선통치비화(朝鮮統治秘話:1937)>, 이충호·홍금자 번역(1993))
교토로 가는 기차 안에서 미즈노 총감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신심(神心)마저 감동하게 이루어간다면/어찌 백성들이 복종하며 따라오지 않으리”라는 시가를 읊조렸다.
이에 아카이케(赤池濃)는
“오랜 역사 속에서 거칠 대로 거칠어진 고려 황야를/
아침 햇살 눈부시는 국가로 성장시키리/
풍랑이 아무리 거칠게 밀어닥친다 해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고려 백성들/…
조선에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위업을 이루리”
라는 시로 화답했다. 지금도 다를 바 없는 일본 극우파들의 정신병자 같은 의식 수준을 잘 보여주는 시구다.
교토 택문(澤文)호텔에 도착한 이들에게 ‘조선의 형세가 아주 심각하고, 총독 암살 계획이 세상 풍문으로 들려오고 있으며, 각지에서 소요가 발발할 우려가 있다’는 서울발 전문(電文)이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사이토는 도조(東條) 해군 대좌와 후쿠토리(福島) 중위를 먼저 한국으로 보냈다. 사이토는 8월 30일 일왕 메이지(明治)의 교토 모모야마릉(桃山陵)을 참배하고 오사카(大阪)호텔에 투숙했다.
이곳에서 총독부 경무국장 노구치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경찰 총수가 급사하자 사이토 일행의 사기는 다시 꺾였다.
8월 31일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해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는데, 새로 경무국장을 맡게 되는 아카이케가 배 안에서 경무관계자들과 조선 치안 방책을 논의했다.
아카이케는 “모두가 예상보다 훨씬 형세가 열악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부산·대구·서울 등 전국 곳곳에서 총독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란 정보가 전해지면서 사이토는 9월 2일 오전 7시에 부산을 출발하기로 했던 시간을 전격적으로 바꾸고 무장군대까지 탑승시켰다.
순종이 보낸 이왕직(李王職) 사무관 엄주승(嚴柱承)과 총독부의 고쿠분(國分三亥), 조선 귀족 대표 이완용이 함께 탑승해 서울로 향했다.
야마가미(山上)는 이때 사이토가 수원에서 해군대장 군복으로 갈아입었다고 전한다. 문관총독 따위는 없다는 시위였다.
이날 오후 5시쯤 특별열차가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자 총독부 관리들과 조선 귀족, 이왕직 직원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예포 17발이 울려퍼졌다. 사이토와 미즈노가 마차로 바꿔 타고 출발한 직후 갑자기 폭발소리가 들렸다. 예포가 계속되는지 의아해하는 와중에 갑자기 “폭탄이다”라는 외침이 터져 나오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라다(村田) 육군소장, 고무다(小牟田) 혼마치(本町) 경찰서장, 구보(久保) 만주철도 이사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이토의 뒤를 따라 도주하던 미즈토 총감 마차의 마부도 파편에 맞았다. 미즈노는 ‘언덕 아래 문 앞에서 내려 도보로 관저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朝鮮統治秘話>)’고 회고하고 있다.
아카이케는 “경찰의 신용은 떨어져 있었고, 인원도 부족했고,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며 “폭탄 투하 소문이 있었음에도 직접 뛰어들어 조사할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었다”고 파탄에 달한 치안 상태를 전해주고 있다.
아카이케는 “사방이 어두워졌는데도 총독부에서 전등을 켜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점등을 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민중의 습격이 두려워 총독부의 불도 켜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카이케가 “폭탄 소동은 의외라면 의외였고, 예상이라 하면 예상대로였지만 이 사건으로 우리들의 사기는 뚝 떨어졌다”고 전하는 것처럼 일행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카이케는 다음날인 9월 3일 ‘경성에 있는 대부분의 상가가 정치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철시했다’고 전한다.
또 “감옥 내에서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고, 이전까지 친밀했던 사람조차 일본인과는 소식이나 왕래가 끊어졌다. 민족자결, 조선독립, 조선자치라는 말이 왕왕 제창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 경찰은 폭탄 투척 범인을 검거할 단서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사 보름 뒤인 9월 17일 친일 경찰 김태석(金泰錫)이 서울 루하동(樓下洞) 임재화(林在和)의 집에서 64세의 노인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체포함으로써 무너져가던 일본 경찰을 살렸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역사가 김승학은 <한국독립사(하)>에서 강 의사가 재거사를 준비하다가 김태석에게 체포됐다고 전한다.
<조선민족독립운동비사(秘史)> 등에 따르면 평안도 덕천(德川) 출신의 야소교(耶蘇敎·기독교) 신도 강우규는 북간도로 이주해 교육사업을 전개한 뒤 러시아에서 폭탄을 구입해 블라디보스토크와 원산항을 거쳐 기차로 8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강우규는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폭탄을 선물로 던지고 유유히 사라졌다가 부역배 김태석에게 체포된 것이었다.
1920년 4월 27일 재판장 와타나베(渡邊暢)를 비롯해 다섯 명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된 경성고등법원은 강우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김윤식은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강우규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그 아들 중건(重建)이 종로로 뛰쳐나가 격렬한 항의연설을 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됐다고 전하고 있다.
일제는 1920년 11월 4일 형사자 신취체법(刑死者新取締法)이란 희한한 법률을 만들었다. 사형당한 자나 복역 중 사망자에 대한 일체의 제사나 추도회를 금지시키는 법인데, ‘개벽 7호’(1921년 1월호)는 ‘경신년의 거둠(하)’이란 기사에서 “강우규의 사형 집행을 위한 일종의 준비였다”고 제정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강우규 의사는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30분 서대문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데 ‘경신년의 거둠’은 사형 전날 “의연히 성경을 탐독하며 태연자약했다”면서 마지막 유시(遺詩)를 전하고 있다.
“동포들은 내 용모를 더듬거릴 수 없겠지만/
하늘이 내린 충렬 뼈에 새겼네/
죽음과 삶의 자취 지금 다시 찾아보니/
낙원에는 이미 의사림이 활짝 열렸네”
(同胞莫期我容貌/天賜忠烈銘骨/死生踪跡方更尋/樂園已開義士林)
[출처] : 이덕일 : 이덕일의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중앙선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