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처럼 땅에 떨어지지 않는 예언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3) 땅에 떨어지지 않는 정확한 예언을 하려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해야 한다.
로마서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리랜드 라이큰은 이 구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 성구를 말하지만 이 구절의 의미를 잘 드러내주는 사람은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동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도록 이 구절의 의미가 더욱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예언에 관한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신디 제이콥스의 다음 말이 전부였습니다.
"공개석상에서 주님으로부터 듣는 어떤 것을 예언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믿음이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예언은 비일상적으로 보이며,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 12:6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말씀하신다."
신디 제이콥스는 이 구절의 의미를 예언이나 계시를 선포하는 것은 담대함과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믿음으로 예언하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그냥 '믿음으로 예언하라'고 하지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고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해석이 옳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외에 예언에 관한 어떤 책에서도 이 구절을 다루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만큼 난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뜻을 알기 위해 개인적으로 여러 번 묵상해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왜 오늘날 수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고 땅에 떨어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바울이 명한 대로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명한 대로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면 예언은 더 이상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는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해야 합니다.
그럼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이 시간 이 구절에 대한 가능한 세 가지 해석을 소개함으로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1)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가감하지 말라는 뜻이다.
로마서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영성운동의 책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의 책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다루는 동안 학자들의 글을 조금 많이 인용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근 박사님은 『로마서』 주석에서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분수대로 - 신약에서 이곳에만 보이는 낱말이다. 수학적 술어로서 '비례'를 뜻한다. 예언이란 믿음의 그릇을 따라 받는 은혜에 비례하여 할 것이지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가감해서는 안 된다. 그 비례 이상을 하면 거짓 예언이 되고, 그 비례 이하를 하면 불충이 된다. 은혜를 받고 느낀 대로 할 따름이다."
또, 유명한 강해설교자 로이드 존즈는 이 구절을 좀 더 길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로마서 12:6의 진술입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 '우리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첫 번째 제안은, 이 말씀이 '우리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예언하자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니 우리가 진지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 모든 은사들에게 있어서 찾아올 수 있는 위험은, 그러한 표현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 은사들을 지나치게 돋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해석은 사도가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지한 방식으로 예언해야 한다. 자기에게 계시된 것 이상을 넘억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마귀가 그러한 사람에게 찾아와서 너 자신을 신뢰하라, 다른 사람들의 견해보다 뛰어나도록 두드러지고 괄목할 만한 것을 말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런 사람의 위험은 자기를 아주 돋보이게 할 양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다 어떤 것을 더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것을 감하든지 하는 방식입니다. 이 경우 자기가 받은 대로 전하면 그것을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고, 결국 그것을 전하는 자기 자신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어떤 사람이든 그러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아주 잘 요약하였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의 능력과 명료함과 열심과 다른 여러 자질들에 따라서 예언하라. 자기 자신이나 육체가 그 예언하는 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매우 정직하라. 주어진 대로만 그 메시지를 전하라. 어떤 방식으로든지 더하거나 빼지 말라."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도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합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2: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그런데 이 금기는 성경뿐 아니라 예언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람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22: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발람은 실제로 자기 말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발락의 제안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거짓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로보암 왕에게 파송되어 이적을 행한 매우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사자에게 찢겨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늙은 선지자가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18절)라고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예언을 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지요!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영성운동 진영에서는 예언사역을 하면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언의 말씀에 가감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예언하는 이유는 잘못된 방식으로 예언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모 유명한 예언 단체에서는 환상 하나를 보고 여러 가지로 풀이하며 예언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예언을 하기 때문에 수장부터 예언이 자주 틀립니다. 예언은 언변이나 화술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계시입니다! 어떻게 겨와 밀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근거 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제가 울산에서 작은 교회를 할 때 광주의 한 영성운동하는 교회의 집회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이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집회에 참석한 역시 같은 네트워크에 소속된 목사들을 몇 사람 만났습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온 강사가 그 사람들과 저를 하나님이 엮어주셨다고 예언했습니다. 그것은 엉터리 예언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그들과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자신들이 그 단체에서 받은 예언 훈련에 대해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그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단체에서는 기도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거나 환상이 보이면 그것을 이렇게 풀어서 말할 수도 있고, 저렇게 풀어서 말할 수도 있고, 이런 각도에서 설명할 수도 있고, 저런 각도에서 설명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보고 길게 설명하고 예언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바른 훈련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사자'라는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쓰였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각기 다릅니다. 어떤 구절에서는 악인이 사자이고, 어떤 구절에서는 예수님이 사자이고, 어떤 구절에서는 마귀가 사자입니다. 그 구절에 맞는 의미는 하나뿐입니다. 모든 의미가 그 단에 안에 다 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언 훈련을 시킬 때 한 가지 환상에 가능한 의미를 다 가지고 와서 예언하게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정확한 예언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예언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후, 저는 그 목사님들에게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한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집회를 주최한 교회가 저와 잘 아는 목사님이었기에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사의 예언이나 지식의 말씀이 너무 많이 틀려서 보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최고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언은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고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닙니다. 분량이 아닌 정확도가 예언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막힘이 없이 술술 예언을 해야 잘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초대 교회의 유명한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한 것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21:10-11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얼마나 간단합니까? 아가보는 성령님이 자기에게 주신 대로 간단하게 예언했습니다. 그것으로 예언 끝입니다! 핍박이 있을 것이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란 말도 하지 않고 가란 말도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주신 말씀에 개인이 더한 말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예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길든 짧든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본래 예언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는 것입니다(고전13:9). 그래서 구약의 내노라 하는 선지자들도 자기들이 받은 예언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자기가 받은 것이 누구에 대한 예언이며 어떠한 때에 관한 것인지 알기 위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고 상고했습니다(벧전1:10-11). 때문에 받은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주제넘게 추측하고 단정 지어 길게 예언하면 예언이 부정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언을 하기 원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을 버리고 짧더라도 성령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2)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는 것은 성경에 맞는 예언을 하라는 뜻이다.
저는 "믿음의 분수"가 무슨 뜻인가 알기 위해 "바이블렉스 9" 프로그램에서 '분수'에 해당하는 원어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날로기아
비율, 부분, 몫, 정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날로기아는 아나와 로고스에서 유래했으며, '로고스에 일치하는'이란 의미에서 '일치, 조화, 균형, 비율, 부분, 몫, 정도'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날로기아는 신약성경에서 롬 12:6에 한 번 나온다: '믿음의 [분수].' 예언의 은사는 믿음과 일치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수'라는 단어가 '일치, 조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믿음'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성경의 진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므로,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는 말은 '예언은 반드시 성경의 진리와 일치되고 조화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 독서를 통해 저는 많은 신학자들이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유명한 신학자 더글라스 무는 이렇게 썼습니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여기서의 믿음은 우리의 믿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것,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선지자들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기독교의 진리의 표준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면 확실히 뜻이 잘 통할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바울에게서 이런 객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또, 여러분이 잘 아는 존 스토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에 정관사가 붙어 있는 데 유의해야 하며, 이 구절을 '믿음과 합의하여'라고 번역해야 한다. 즉 '선지자는 반드시 그의 메시지가 기독교 믿음과 어떤 면에서도 모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유명한 강해설교자 로이드 존즈는 이렇게 썼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을 가리키는 대목을 여러 차례 만나게 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진 진리의 체계를 뜻하는 것으로 쓰이는 경우들입니다. 유다서 3절에서 이에 대한 완벽한 실례를 만납니다. 유다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여러분은 신약성경에서 그 표현을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 영감된 발언은 항상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교회에게 주신 교훈과 교리 체계에 대해 일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 해석은 말합니다. 발설되는 모든 예언은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도의 차원에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 예언은 항상 '믿음'에 의해서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뛰어난 학자인 길성남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신자 개인이 소유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 즉 하나님이 계시하신 믿음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에서도 이 단어는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복음의 진리를 의미합니다(갈1:23; 딤전1:4; 3:9; 4:1, 6; 5:8; 6:21; 유3). 더구나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관사를 동반하고 있어서 '그 믿음'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 믿음'이란 '그 믿음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역개정판에서 '분수'라고 번역한 '아날로기아'는 본래 '비례', '바른 관계', 또는 '일치', '상응'을 가리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믿음의 분수대로'라는 표현은 '믿음의 진리와 비례하여' 또는 '믿음의 진리와 상응하게'를 뜻합니다. 예언은 반드시 믿음의 진리와 조화를 이루거나 그것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믿음의 진리가 예언을 판단하는 객관적인 표준입니다. 예언은 반드시 믿음의 진리에 근거하여 신중하게 분별해야 합니다(고전14:29)."
이제,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바울은 예언을 할 때 다른 이들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언을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지요? 저는 과거에 이 구절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과연 나는 예언하는 것을 들으면 분별할 수가 있나? 예를 들어 어떤 유명한 선지자가 미래에 대해 예언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내가 그 예언을 듣는 것만으로 그 예언이 적중할지 빗나갈지를 알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러면서 저의 부족을 통탄이 적이 있습니다. 혹 여러분은 저와 같은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그런데 사실은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 예언을 들어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처럼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분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분별이 가능할까요? 그 답에 대한 단서가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4: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여기서 바울은 이상한 말을 합니다. 예언을 하다가 만일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학자들마저도 흔히들 착각하고 있는데, 예언은 계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예언의 은사가 아니라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영분별의 은사 등 계시의 은사를 통해서 주어지며 계시안에만 미래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계시는 예언보다 더 우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중요한 사람이 오면 길을 비켜주듯이 예언하다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임하면 잠잠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해석은 바로 다음 구절을 통해 옳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고린도전서 14: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자, 여기에 예언의 기능이 나옵니다. 그것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게 하고 권면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3절에서 이미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이제, 예언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그래서 바울이 예언을 듣는 다른 이들에게 분별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언이 그런 것이라면, 성경 진리에 비추어 얼마든지 분별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바울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고 한 것입니다. 즉 성경 말씀과 일치되고 조화되게 예언하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예언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해가 되시지요!
우리는 예언을 들을 때 성경을 시금석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이런 방식으로 예언을 분별한 예들이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이적과 기사까지 행한 이 선지자를 어떻게 분별합니까? 바로 십계명의 1-2계명을 통해서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진리를 시금석으로 우리는 예언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이런 사례들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누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성경에 나온 것과 달리 말을 하면 그것은 절대로 성령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원리가 요한일서 4장에 더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일서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사도 요한은 영들을 분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들을 분별해야 할까요? 그가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에 대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는가? 아니면 성경과 다르게 성육신을 부인하는가? 이것을 통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과거에 어떻게 단순히 성육신이 영분별의 시금석이 될 수가 있는가? 의아해했던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이단과 양신역사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의미는 단지 성육신이 영분별의 시금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이 성육신을 시금석으로 말한 이유는 초기 영지주의 이단이 성육신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뿐 아니라 예수님이나 진리에 대해 무엇이든지 성경과 다르게 말하거나 가르치면 그것이 곧 거짓 선지자입니다. 즉 성경 전체가 시금석인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여러분에게 꼭 상기시켜드리고 싶은 것은 같은 장 37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여기서 바울은 선지자보다 더 큰 권위를 취합니다. 모든 예언이나 계시가 성경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특별히 선택을 받아 성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자들이 자신의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고 그 권위 아래 순복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예언과 모든 계시들은 성경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그것으로 성경에 무엇인가를 가감하거나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예언과 계시를 마땅히 성경이라는 시금석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교훈을 줍니다! 예언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예언의 말씀이나 계시를 사모하는 것보다 배나 더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분별력이 생겨 귀신에게 속거나 양신역사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언을 받는 사람들도 예언을 받는 것을 사모하는 배 이상으로 성경을 사랑하고 설교 듣기를 좋아하며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받은 예언을 분별할 수 있게 되어 잘못된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고 큰 유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듣는 것보다 말씀을 더 사모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언기도를 받는 것보다 설교를 더 사모하고 설교 듣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