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삼부(三府) 1회 ~ 9 회[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Ⅲ
1.만주 한인사회 형성
만주 지역 한인 50만 명, 독립운동의 둥지가 되다
반만년 한국사 가운데 그 무대가 한반도에 국한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10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한국사의 육상 무대는 만주와 내몽골 일대를 아우르는 대륙이었다.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인들의 자발적인 만주 이주로 한계에 봉착하고, 구한말부터 대륙사가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집단 망명자들이 거주했던 중국의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마을. 뒤에 보이는 산이 1911년 4월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했던 대고산이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길림성 정협문사자료위원회 등에서 편찬한 <길림조선족>(주필 김택, 연변인민출판사, 1994)은 청나라 장봉대의 <장백회정록>(1909)을 인용해 “광해군 때 강홍립의 조선군이 청나라에 투항한 이후부터 조선 사람들이 동북(만주)에서 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필자는 길림성(吉林省) 환인현(桓仁縣)의 고구려 오녀산성을 답사하던 중 묵었던 고려성(高麗城)의 여주인이 이 무렵 만주에 정착했던 조선인의 후예라는 말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광해군을 쫓아낸 뒤 인조 정권 때 발생한 정묘·병자호란으로 인해 만주로 끌려간 백성은 더 많아졌다.
만주로 끌려간 조선 포로들은 심양의 남탑(南塔) 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인조실록> 15년(1637) 4월 21일자는 “처음에는 속환가가 포 10여 필(匹)에 불과했으나 속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골육(骨肉)의 속환에 다급하여 값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아 값을 더 비싸게 요구하는 폐단을 초래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 측에서 조선 조정에 올린 <심양장계> 인조 15년 5월 24일자는 “요구하는 값이 비싸기 그지없어서 수백, 수천 냥이나 되니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돈을 주고 속환되지 못한 조선인들은 만주에 정착해 사는 수밖에 없었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근처에 있던 고려관자. 100여 년 전에는 조선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마을이었다. 현재는 유하현 광화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후기 대외교섭 문서집인 <동문휘고(同文彙考)> <사신별단(使臣別單)>에 따르면 이원진(李元鎭)은 인조 22년(1644) 사신으로 가는 도중 만주 봉황성(鳳凰城)에 속환되지 못한 조선인과 한인(漢人) 60, 70가구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조선 여인 여러 명이 이원진 일행에게 ‘나는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누이인데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전한다. 또 “남자들은 타작을 하거나 풀을 베고 물을 길었으며 혹은 길바닥에 엎드려 진정했는데, 어떤 사람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여서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백두산 일대를 자기네 선조들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封禁) 지역으로 묶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청사고(淸史稿)> <살포소(薩布素)열전>에 따르면 청나라는 강희 16년(1677, 조선 숙종 3년) 내대신(內大臣) 각라무묵눌(覺羅武默訥) 등을 백두산 등지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청나라의 발상지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산해관(山海關)~개원(開原)~길림(吉林)을 연결하는 선과 개원~봉황성(鳳凰城) 부근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루어진 ‘人’자 모양의 선을 만들고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두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현규환, <한국유이민사(韓國流移民史)>, 1967)
청나라는 백두산 지구를 포함한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500㎞ 정도를 청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封禁) 구역으로 삼아 사실상 이때부터 조선과 청 사이의 본격적인 영토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2년 후인 숙종 5년(1679) 12월 북병사(北兵使) 유비연(柳斐然)은 ‘청나라에서 백두산의 형세를 포함한 북방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보고하고 있다.
청나라는 중원을 모두 차지한 후에도 만주는 다른 지역과 달리 봉천(奉天·심양)에 성경장군(盛京將軍)을 두어 다스렸다. 이후 광서제 33년(1907)에야 비로소 중국 내지처럼 성경장군 대신 ‘동삼성(東三省) 총독’을 임명하고 봉천·길림·흑룡강(黑龍江) 세 성(省)에는 각각 순무(巡撫)를 두어 다스렸다.
그런 가운데 압록강·두만강 대안 지역은 산삼도 풍부하고 농사도 잘되는 옥토라는 소문이 나면서 조선인들의 월경이 잇따랐다. 청나라는 숙종 6년(1680) 윤8월 강희제가 청나라 사신에게 범월인(犯越人·국경을 넘은 사람) 문제를 제기하도록 조서를 내릴 정도로 이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강희제의 국서를 받은 숙종은 도강한 온성(穩城) 사람 유원진(柔遠鎭)을 사형시키고 온성첨사 한시호(韓時豪) 등을 유배했다.
급기야 청나라는 두 나라의 국경을 획정하자고 주장해 숙종 38년(1712)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라는 내용의 <백두산정계비>를 백두산에 세웠다. 그럼에도 조선인들의 도강은 끊이지 않았다.
<통문관지> 영조 38년(1762) 조에 따르면 평안도관찰사 정홍순(鄭弘淳)이 ‘강계부 백성 박후찬(朴厚贊) 등 10인이 월경해서 사냥하다가 4명은 체포되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고 보고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도 이때만 해도 청나라를 의식해 월경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월경이 백성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안 조선의 지방관들 사이에선 이 문제를 관대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강했다.
<통문관지> 고종 4년(1867) 조에는 청나라 성경장군 아문(衙門)에서 ‘조선 민간인 하명경(何名慶) 등이 사사로이 월경해서 봉천부(奉千府) 왕청문(旺淸門) 밖 육도하(六道河) 등지를 개간했다’고 항의할 정도로 도강 및 개간이 빈번했다.
같은 책 고종 6년(1869) 조는 ‘청나라 예부에서 봉황문(鳳凰門) 남쪽부터 왕청문 북쪽까지 찾아낸 개간지가 9만6000여 하루갈이(日耕)’라고 말하고 있다. 하루갈이란 성인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말하니 무려 9만6000여 명의 장정이 농사지을 수 있는 농지를 개간했다는 뜻이다.
조선인들이 개간한 농지가 수백만 향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는데, 청나라 양빈(楊賓)이 지은 <변기략(邊紀略)>은 “(만주의) 영고탑(寧古塔) 지역은 무(畝)로 계산하지 않고 향으로 계산하는데, 하루 동안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이 향으로서 절강(浙江)의 4무(畝)에 해당한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 6년(1869)과 7년 한반도 북부에 대흉년이 들면서 만주 지역을 개간하는 조선 백성은 크게 늘어났다. 그러면서 만주 지역이 조선 영토라는 자각도 생겨났다.
고종 20년(1883) 청나라가 함경도 경원부 등지에 공문을 보내 ‘9월 안에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하라’고 요구하자 조선인들은 거꾸로 백두산정계비를 직접 답사한 후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정계비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때마침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에게 조사시킨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고 거듭 확인했다.
그래서 대한제국은 고종 40년(1903)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北墾島) 관리(管理)로 삼고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해 상주시켰다. 또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 9월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맺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망국의 몇 가지 풍경⑪ 간도 강탈’ 참조).
청·일 두 나라의 야합과는 별도로 만주 지역의 유이민은 계속 늘어났다. 간도총영사(間島總領事)가 작성한 <재만조선인개황(在滿朝鮮人槪況)>은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6만5000여 명이었던 재만 조선인이 1910년에는 10만9000여 명으로 증가했다고 전하고 있다.
우시마루(牛丸潤亮) 등이 작성한 <최근 간도사정(最近間島事情)>(1927)은 망국 직후인 1911년에는 12만6000여 명으로 급증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최근간도사정>은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의 토지매수로 지가(地價)가 앙등하고 이들이 소작료를 인상해 소작 한인의 종전과 같은 수익이 없어진 점”을 들어 일제의 학정이 한 원인임을 시인하고 있다.
같은 책은 또 “한일합방에 불평을 가진 자와 일본 관헌의 간섭을 피함과 아울러 만주의 지가(地價)가 저렴한 점”을 들고 있다. 망국 후 일제의 학정으로 생계 수단을 잃은 빈농(貧農)은 생계를 위해, 일부 선각자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최근간도사정>은 또 북간도(동간도)의 이주 한인이 1921년에 30만7806명, 1924년에 55만7506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주 한인들은 마적들의 습격에 대비해 집단 마을을 형성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국경지방 시찰복명서>는 만주에서는 각 지역 자치제를 실시하는데 그 명칭을 사(社) 또는 향(鄕)이라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사’라는 명칭은 1911년 4월 집단 망명자들이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서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 것이 전 만주로 퍼진 것이다(‘절망을 넘어서⑧ 건국의 뿌리’ 참조).
1920년 50만 명에 달했던 만주 지역 한인들은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든 토양이었다. 이 토양에서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라는 만주의 삼부(三府)가 꽃을 피운다.
2. 독립군, 압록·두만강 건너다
홍범도 대한독립군, 망국 10년 만에 국내 진공작전 포문
망국 후 만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들의 한결같은 꿈은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를 내몰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곳에 흩어진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해 단일 독립군을 조직해야 했고 무장해야 했다. 역시 3·1운동이 그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만주 각지에서 통합 독립군이 결성돼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공격을 가하자 일제는 대규모 토벌을 계획했다. 사진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의 모습. [사진가 권태균 제공]
대종교 1세 교주 나철. 1916년 자결했다
1919년 8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두만강을 건넜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만에 개시되는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의 시작이었다. 평북 양덕 출신의 포수 홍범도는 이미 의병장으로 큰 명성을 떨친 바 있었다.
일제의 <간도지방 무력 불령선인의 동정에 관한 건>이란 정보보고는 “연길시 북쪽 의란구(依蘭溝) 지방의 민심은 대체로 전시(戰時) 기분을 띠고 있어 정신이 흥분 상태이며, 일반적으로 홍범도를 심하게 숭배한다. 그는…조선 및 간도 방면의 지리에 밝기는 신(神)과 같다”고 보고하고 있다.
대한독립군은 갑산(甲山)과 혜산진(惠山鎭) 같은 국경도시에 주둔한 일본군 병영을 공격했는데,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만포진(滿浦鎭)과 더 안쪽의 강계(江界)까지 공격했다.
‘독립신문’ 대한민국 원년(1919) 11월 8일자는 “자성(紫城) 지방에서 독립군과 적병(敵兵) 간에 격전이 있었는데 적은 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아군의 사상자는 별로 없으며 강계와 만포진은 아군의 수중에 점령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독립군이 내륙까지 들어와 공격하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에 더 큰 충격은 만주 여러 지역의 무장세력들이 큰 규모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통합 움직임도 3·1운동 때문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들 사이에서 통합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달리 이들의 통합은 독립군의 통합을 뜻한다는 점에서 일제에는 더 큰 위협이었다.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들은 몇 갈래로 뭉치기 시작했다. 만주는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남만주)와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동간도), 그리고 북만주로 나눌 수 있었는데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고 있었다.
중광단과 대한정의단을 결성한 서일. 군사전문가인 김좌진과 통합해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1910년 망국 직후 서간도에는 서울의 이회영(李會榮) 일가와 안동의 이상룡(李相龍) 일가 같은 양반 사대부들이 망명해 민단 자치조직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11년 가을 대흉작에 풍토병이 덮치면서 경학사는 활동 불능 상태에 빠졌지만 이듬해에는 다시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했다. 부민단 단장 이상룡은 <만주기사(滿洲紀事)>에서 부민단이 ‘삼권분립의 자치정부를 표방하는 단체’라고 전하고 있다.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는 뜻이다.
부민단은 1914년에는 산하의 신흥무관학교 외에 통화현(通化縣) 쏘베사 지역에 백서농장(白西農莊)을 세웠다. 일제의 눈을 속이고 중국인들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농장이란 명칭을 썼지만 사실은 독립군 밀영(密營)이었다. 현재 이 지역에 대해선 중국 군부가 민간인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천혜의 요새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부민단은 서간도의 자신계(自新契)와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했다. ‘독립신문’은 한족회 관내의 교포 수가 8만 호에 30만여 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족회가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자 상해 임정에서 여운형(呂運亨)을 파견해 임정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
군정부 내부의 반발도 작지 않았지만 이상룡 등은 “하나의 민족이 어찌 두 개의 정부를 가질 수 있겠는가”라면서 군정부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했다.
서간도에는 국내에서 의병전쟁을 일으켰다가 일제의 남한대토벌에 쫓겨 망명한 의병과 유림세력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대한제국 황실을 재건하자는 복벽파(復벽派)들이었다.
이들도 서간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다가 1919년 음력 3월 15일 단군의 어천절(御天節: 하늘로 승천한 날)을 기해 각 단체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 삼원보 대화사에 모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도총재(都總裁)에 박장호(朴長浩), 총단장(總團長)에 조맹선(趙孟善)을 선출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승학(金承學)이 편찬한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 따르면 조맹선은 하얼빈에 주둔한 제정 러시아 장군 세미노푸와 교섭해 러시아 군대 안에 2000여 명의 한인들로 구성된 한인청년부를 특설하기로 합의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는데, 이 때문에 울화병이 생겨 1922년 길림성(吉林省) 추풍(秋風)에서 순사(殉死)했다.
만주 지역 무장투쟁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이 단군교(檀君敎)라고 불렸던 대종교(大倧敎)다. 제1세 교주 나철(羅喆)은 을사늑약 직전 일본 왕궁 앞에서 사흘간 단식항쟁을 하기도 하고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을사오적(五賊) 중 박제순과 이지용을 제거하기 위해 폭탄 상자를 배달하기도 했던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대종교 중광 60년사>에 따르면 나철은 이 사건 때문에 정부 전복 혐의로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는데, 1909년 정월 15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서울 북부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여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중흥한다는 의미였다. 망국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단군교에 속속 입교했지만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은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망국 후인 1911년 7월 나철은 강화도 참성단을 참배하고 평양과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북록(北麓) 청파호(靑坡湖)를 답사한 후 만주 화룡현 삼도구(三道溝)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그 산하에 동서남북 사도본사(四道本司)를 두었다.
각 본사(本司)의 관할 범위를 보면 대종교의 광대한 역사의식이 잘 드러난다. 동도(東道)본사의 관할지역은 동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 함경도였고, 서도(西道)본사는 남만주와 중국, 몽골, 평안도였다. 남도(南道)본사는 전라·경상·충청도와 강원·황해도였고, 북도(北道)본사는 북만주, 흑룡강이었다.
각 본사 책임자를 보면 이 당시 대종교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동도본사는 서일(徐一), 서도본사는 신규식(申圭植)·이동녕(李東寧)이었고, 남도본사는 강우(姜虞), 북도본사는 이상설(李相卨)이었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상)>에 따르면 임정 수립 당시 의정원 의원 의장 이동녕을 비롯해서 29명의 의원 중 대종교 교도가 21명이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이 곧 신앙생활이었던 교단이었다.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한 후 30만 교도로 확장되자 중국과 일제가 모두 탄압에 나섰다. 1914년 중국 화룡현 지사가 해산령을 내린 데다,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도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 단체’라면서 남도본사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나철은 이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1916년 구월산에서 ‘삼십만 교도에게 격려하는 글’과 ‘순명(殉命) 3조’ 등 3종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철의 뒤를 이어 김교헌(金敎獻)이 제2세 교주가 되는데, 동도본사 책임자 서일이 서른한 살 때인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한 것이 청산리 대첩의 씨앗이 된다.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탈바꿈하는데, 서일은 대종교라는 탄탄한 대중조직이 있었지만 군사 부문에 전문가가 많지 않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등 한말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1919년 3월 결성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에 통합을 제의했다.
그래서 두 단체는 1919년 10월 군정부(軍政府)로 통합했지만 12월 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임시정부의 권고에 따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했다. 북로군정서는 독판(督辦)에 서일, 군사령관에 김좌진을 추대했고 무관들을 배출하기 위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도 설립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교관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북간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도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산하에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이 있어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통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20년 5월 28일 군사통일회의를 열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했다. 일제의 정보보고는 이 부대의 규모를 최진동 계열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 계열 약 550명 등 총 12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기는 기관총 2문, 군총 900정, 수류탄 100여 개, 망원경 7개, 군총 1정당 탄약 150발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했다.
독립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넘기고 간 무기들로 무장했다. 이 무기들은 제정 러시아가 미국의 레밍천사(社), 웨스팅하우스사 등에서 구입한 것을 체코군에 제공한 것이었다.
이렇게 무장한 독립군들은 서로 앞다퉈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경 도시들을 타격했다.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전야는 이렇게 만주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출처] : 중앙선데이 제256호
3. 봉오동과 청산리
‘무적 황군’ 신화 깬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
1910년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독립전쟁론의 씨가 뿌려졌다. 1919년부터 독립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했다. 일제는 만주 독립군을 뿌리뽑지 않으면 식민통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드디어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백두산 산록에서 벌어졌다.
백범영-청산리전투, 59×40㎝,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2]
1920년 6월 4일 새벽 5시, 화룡현(和龍縣)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한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의 일본군 1개 소대를 초토화했다. 일제는 즉각 육사 23기 출신의 아라요시 지로(新美二郞) 중위에게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를 보내 뒤쫓게 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최진동(崔振東)은 독립군을 매복시켜 놓고 유인해 남양수비중대를 격멸시켰다. 아라요시는 잔존 병력을 끌고 급히 도주했다.
함북 종성군 나남에 사령부를 둔 일본군 제19사단은 즉각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넜다. 19사단 보병 73연대 등에서 차출한 정예 부대였다.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少佐)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는 “봉오동 방면의 적을 추격해 일거에 적 근거지를 소탕하겠다”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왔다.
최진동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를 이끌고 있던 홍범도는 주민들을 산중으로 대피시키고 각 중대를 산 위 요지에 매복시켰다. 홍범도도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북면 북단에 매복했다. 군무국장 이원(李園)은 물자 보급과 만약에 대비해 퇴로를 확보했다.
홍범도는 2중대 3소대 1분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일본군 유인을 맡겼는데 전의가 충천해 계획보다 더 큰 타격을 입혔다. 그래서 월강추격대대는 이화일 부대의 공격을 유인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봉오동 안까지 쫓아 들어왔다.
6월 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이 봉오동 상동(上洞) 남쪽 300m 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 장군은 신호탄을 올렸다.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사상자가 늘자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강상모(姜尙模)가 2중대를 이끌고 쫓아가 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독립군을 대한제국 말기의 의병 비슷하게 얕보던 일제는 경악했다.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는 봉오동 패전 직후 육군대신에게 “대안(對岸)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독립군)……전적으로 통일된 군대 조직을 이루고 있습니다(조선군사령관 제102호 전보)”라고 보고했다.
또한 계총영사대리(堺總領事代理) 제166호 전보>는 “금회의 추격이 도리어 나쁜 결과를 잉태했다”고 말했으며, <조선군사령관 제45호 전보는 “(독립군은) 재전투 준비를 신속히 행하고 있는 것 같고 장정들이 속속 독립군에 들어가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일제는 독립군이 대거 도강해 한반도 내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면 식민통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1920년 8월 ‘간도지방 불령선인초토계획(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고 대규모 병력을 꾸렸다.
그러나 대병력이 도강하면 국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훈춘(琿春)사건’을 조작했다. 중국 마적 두목 장강호(長江好)에게 돈과 무기를 주면서 두만강 건너편 훈춘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조선군사령부에서 편찬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는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쯤 400여 명의 마적 떼가 훈춘을 습격해 40여 명을 살해하고 일본영사관 분관과 그 소속 관사를 방화하고 일본인 1인과 수십 명의 한인·중국인을 납치해 퇴거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은 미리 대기시켜 놓은 대군을 즉각 투입했는데, 조선군 제19사단 9000여 명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로 출동했던 포조군(浦潮軍) 14사단 4000여 명, 11사단·19사단·20사단, 그리고 북만주 파견대와 관동군 각 1000여 명 등 모두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단급 병력이었다.
일본군의 <대불령선인(對不逞鮮人) 작전에 관한 훈령은 “해외로부터 무력진입을 기도하는 불령선인단에 대하여는 이를 섬멸시킬 타격을 가한다”라고 해 도강 목적이 만주의 독립군 섬멸임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심양(瀋陽)의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여러 차례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해 독립군을 색출하자’고 제의했다.
장작림은 마지못해 우에다(上田)와 사카모토(坂本)가 주도하는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했지만 길림성장 서정림(徐鼎霖)이 “불령선인이라 하는 자는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서는 이를 토벌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하는 등 내부 반발도 심했다.
봉오동 전투 직후인 1920년 7월 16일 조선군 참모장 오노(大野) 등은 다시 심양에 가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에 중국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孟富德)은 독립군과 비밀협상을 벌여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상에서 군인 복장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진하지 않는다. 중국군은 토벌에 나서기 전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준다’는 내용 등을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만주의 독립군들은 기존의 기지를 버리고 험준한 백두산 산록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홍범도는 ‘일시 백두산 지방에 회피했다가 얼음이 얼 때를 기다려 조선 땅에 들어가 의의 있는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한 달 걸려 9월 20일께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에 도착했다. 안무(安武)가 이끄는 군사들도 9월 말께 이도구 방면에 도착했다.
서일과 김좌진이 이끄는 대종교 계통의 북로군정서는 1920년 9월 9일 사관양성소의 사관 298명의 졸업식을 치른 후 백두산으로 향했다. 북로군정서도 다른 독립군 부대처럼 중국군과의 약속 때문에 야음을 틈타 주로 산길로 이동해 한 달 만에 450리 길을 걸어 10월 12∼13일께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했다.
일본군과 독립군은 서로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군이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란 판단 아래 독립군은 일본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들여 결전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독립군들이 첫 번째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곳이 청산리 백운평이었다.
상대는 도마사히코(東正彦) 소장이 이끄는 동지대(東支隊)였는데 중화기로 무장한 5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야마다(山田) 대좌의 연대는 야스카와 소좌의 부대를 전위부대로 삼아 들어왔다.
독립군은 10월 21일 아침 8시쯤 200여 명의 전위 중대를 백운평 깊숙이 끌어들여 섬멸했다. 임정 군무부에서 발표한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정보(독립신문 제88호)>에 따르면 “맹렬한 급사격을 가한 지 약 20여 분만에 한 명의 잔여 병사도 없이 적의 전위 중대를 전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명이더라”고 전하고 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대신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甲山村) 부근으로 이동해 22일 새벽 천수평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중대 120여 명을 섬멸시켰다.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거듭 승리한 독립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일본군 동지대는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믿고 김좌진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도구 삼림지대로 들어왔다. 동지대는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남완루구와 북완루구로 병력을 나누었는데 독립군은 먼저 남완루구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자 북완루구의 일본군은 독립군에 응사하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사격했다.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자)는 “적이 적군을 맹사(猛射)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은 적의 일대는 전멸에 빠졌는데 그 수는 약 400여 명이었다”고 보도했다.
22일 아침에는 가노(加納) 대좌가 이끄는 기병연대가 천수평으로 들어왔는데 독립군은 역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기다렸다. 이렇게 또다시 매복작전에 걸린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독립신문 제88호는 ‘사격 개시 20분 만에 일본군은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고 함경도 이주민들이 개척한 어랑촌에 병력을 증파했다.
드디어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2000여 명과 일본군 동지대의 어랑촌 결전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촌락의 아낙네들이 입에 넣어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다.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이범석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나의 군도는 포탄 파편에 두 동강이가 났다“고 회상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야간 습격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를 포함해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청산리 대첩은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고등하 등지에서 벌어진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백두산 산록에서 벌어진 이 모든 전투에서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훈춘 사건까지 조작하면서 도강했던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연전연패했다. 그러자 자칭 ‘무적 황군(皇軍)’이라던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경신참변(庚申慘變)이 그것이다.
[출처] : 중앙선데이 제 257호
4. 일제의 패전 분풀이 ‘용정 장암동 학살’
망국 10년 만에 일본군 정규 부대를 맞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연전 연승한 독립군들은 결정적 시기에 독립전쟁을 치러 일본을 쫓아내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로 이주해 전열을 재정비하려던 독립군은 뜻밖에도 러시아에서 큰 수난을 당했다.
청산리 전투 당시 일본군이 부상병들을 후송하며 이동하고 있다. 독립군은 전열 재정비를 위해 러시아로 갔다가 자유시 사변을 겪게 된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봉오동·청산리 대첩에서 연전 연승한 독립군들은 일본군과 맞대결을 계속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만주 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독립군들이 북상한 뒤 생긴 공백을 만주의 한인 교포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메웠다. 독립군에 대한 지원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패전의 분풀이를 민간인들에게 자행한 것이다.
일제는 청산리 패전 직후인 1920년 10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중점적으로 한인 마을들에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일본군이 퇴각하는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조선군 19사단의 기무라(木村)지대(支隊)는 1920년 10월 22일 대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왕청현 서대파(西大坡)와 십리평(十里坪) 일대로 난입해 대한군정서 병영과 사관연성소 건물을 모두 소각하고 백초구(百草溝), 의란구(依蘭溝), 팔도구(八道溝) 등지의 양민 150여 명을 불령선인으로 몰아 학살했다.
10월 30일에는 일본군 제14사단 15연대 소속의 오오카(大岡) 대좌가 이끄는 일본군이 용정촌 동북 25리 지점에 있던 기독교도 마을의 장암동(獐巖洞)을 포위했다. 대부분의 젊은 남자들은 학살 소식을 듣고 피신했는데 일본군은 40대 이상 남자 33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3·1 운동 당시의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에 비견되는 장암동 학살사건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교회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런데 사건 다음 날부터 장암동을 비롯해 일본군의 만행 현장을 조사한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Martin S.H: 중국명 閔山海)과 캐나다 북장로회 선교사 푸트(Foote D.D.: 富斗一) 등인데 마틴의 보고는 일본군의 잔학상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다른 데로 갔는데 방화한 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사(燒死)의 악취가 나고 지붕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길에서 부인 네 명을 만났는데 각각 어린아이를 업고 각자 새로 만든 무덤 옆에 앉아서 우는 소리가 참극(慘極)하였다. 잔옥(殘屋: 무너진 집) 10채를 돌아다니며 촬영할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며느리가 통곡을 하며 회진(灰塵: 재와 먼지) 속에서 시신의 타다 남은 부분과 부서진 뼈와 아직 타지 않은 물건을 줍고 있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을 청해 기도 드리고 잿더미 속에서 잘라진 팔과 발을 얻어 언덕에 안치하고 사진을 찍었다… 내가 알고 있는 36개 촌에서만 피살자가 모두 140명이었다.”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1 청산리 전투 때 썼던 독립군의 탄약과 무기. 2 봉오동 대첩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 “급(急)사격으로 적에게 120명의 사상자를 낳게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본군은 마틴 등이 조사하러 다니자 민간인 대학살이 외국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이를 경계하는 기록도 남겼다.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에서 불령선인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죽이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저들 선교사는 다음 31일 그곳에 가서 사진기로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시체에 밤 껍질을 덮어 태웠으나 반만 타서 숯이 되어 있는 것을 촬영했다고 한다) 조위금 200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 것은 사실이다. 본건을 혹은 학살사건으로서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 측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다.”('장암동 부근의 토벌 상황', '장암동 소탕 상보', '간도출병사')
이때 이를 취재하던 동아일보의 장덕준(張德俊) 특파원도 실종되었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2일자는 ‘어디로 가고 어디에 있는데 생시에도 볼 수 없고 꿈에서도 만나지 못하는가?’라는 내용의 추모사를 싣고 있다.
1925년 8월 30일자에서는 ‘일본인과 함께 나간 후 소식이 끊어졌다’는 후속 보도가 있다.독립신문 93호(1921년 2월 5일자)에 따르면 1920년 12월 6일 일본군은 연길현 와룡동에 살던 교사 정기선(鄭基善)에게는 얼굴 가죽을 칼로 벗기고 두 눈을 도려내는 만행을 저질렀고 연길현 소영자에서는 부녀자 25명을 강간했으며, 연길현 팔도구에서는 유아 4명을 칼로 베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이 경신참변인데 장덕준 기자 행방 불명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가 철저하게 은폐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 상황을 알기 어렵다.
독립신문의 '서북간도(西北間島) 동포(同胞)의 참상혈보(慘狀血報: 1920년 12월 28일자)' 등은 1920년 10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훈춘·왕청·화룡·연길·유하·흥경·관전·영안 등 8개 현의 한인만 피살 3693명, 체포 171명, 부녀 강간 71명에 가옥 손실 3288채, 학교 소실 41개교, 교회 소실 16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산은 '아리랑'에서 삼원포에서 만났던 교사 조운산(趙雲山)을 다시 북경에서 만나 들었다면서 자신이 만났던 안동희 목사 일가가 당한 참변에 대해 전하고 있다.
“안동희와 그의 부인과 딸은 두 아들이 산 채로 세 동강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았다. 그런 후에 노목사는 억지로 맨손으로 자기 무덤을 파고 그 속에 누웠다. 그러자 왜놈 병사들이 산 채로 그를 매장하였다. 세 명의 죽음을 억지로 지켜본 후에 부인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내 학생 시절의 첫사랑이었던 열네 살짜리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알아내지 못했다.”(김산, '아리랑')
이때 북만주 밀산(密山)에 집결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전체 병력은 3500여 명에 달했는데, 봉오동·청산리의 잇따른 승전으로 사기는 드높았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대종교의 서일(徐一)이 맡았고 부총재는 김좌진·홍범도·조성환(曺成煥) 같은 장군들이 맡았다. 총사령은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은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은 지청천(池靑天)이었다.
이 무렵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文昌範) 등은 하바롭스크에 있던 적군(赤軍) 제2군단과 협의해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 독립군 주둔지를 마련했다. 문창범이 대한독립군단에 사람을 보내 자유시로 가도록 권유하자 일단 러시아로 퇴각해 전열을 재정비해 만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이때만 해도 이것이 자유시 사변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레닌이 1920년 7월 코민테른 제2회 대회의'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위원회 보고'에서 ‘우리 테제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피억압 민족과 억압 민족 사이의 구별’이라면서 식민지 민족의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약속한 것도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가게 된 주요 동기였다.
그런데 자유시에 러시아로 귀화한 한인 부대들이 가세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극동공화국의 제2군단 산하 특립부대 400여 명은 러시아로 귀화한 오하묵(吳夏默) 등이 이끌고 있었는데 보통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라고 불렀다. 1920년 3월 러시아 적군(赤軍)과 함께 일본이 장악한 니콜라예프스키(니항)를 공격했던 380여 명의 니항군(尼港軍)도 자유시로 집결했다.
이 두 개의 세력이 서로 군권을 장악하려고 다투면서 비극의 싹이 튼 것이다. 1921년 초여름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부대는 모두 4000여 명에 달했으므로 서로 군권을 탐냈다. 니항군은 러시아 흑룡주(黑龍州)를 관할하는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해 독립군 부대를 사할린의용대로 개조하고 대한총군부·대한국민군 등을 형식상 사할린의용대로 편제시켰다.
반면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교섭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만들고 사할린의용대의 지도권을 확보했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북경에서 캄차카 반도 연안의 어업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어업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시아 영내 한인 혁명단체들의 무장 해제를 거듭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27일 고려군정의회는 사할린의용대를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극동적군 제2군단 12여단 산하 4개 중대를 차출했다. 사할린의용대가 무장 해제를 거부하자 6월 28일 12시쯤 총격을 가하면서 무장 해제에 나섰다.
목격자였던 김승빈은 “(양측의 사격) 총소리는 해질 무렵에 가서야 그쳤다”고 전한다.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사상 큰 비극 중 하나인 자유시 사변, 또는 흑하(黑河) 사변이었다.
이 사건은 경위도 복잡하고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도 일치하지 않는다.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에서는 사망 36명, 행방 불명 59명, 포로 864명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만주의 항일단체들이 연명한 성토문에서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 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좌진과 이범석 등은 중도에 만주로 되돌아가 화를 면했다. 봉오동·청산리 승전으로 승기를 타던 독립군은 이 사건 때문에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러시아 적군(赤軍)의 공격을 혁명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면서 다시 만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5.독립군의 전열 재정비
통의부로 뭉쳤다, 그러나 청사진이 달랐다
독립운동의 최종 목적은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력으로 광복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주에는 각종 무장항일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각 단체의 통합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독립에는 뜻을 같이했지만 건설할 나라에 대한 그림이 달랐던 것이 문제였다
압록강 국경경비병들이 삼엄한 검문검색을 펼치고 있다. 일제는 압록강을 오가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검색했으나 독립군의 도강작전을 막지는 못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러시아령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고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은 전열 재정비에 나섰다.
당시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남만주)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망국 직후 집단 망명해 경학사(부민단·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를 만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세력으로 광복 후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공화주의자들이었다.
또 하나는 의병전쟁 끝에 만주로 망명한 유림(儒林) 계열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으로 황실(皇室)을 복원하려는 복벽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한 오동진 등이 조직한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광복군총영)와 서로군정서 소장파가 결성한 광한단(光韓團) 등도 있었는데 이들도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이렇게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 보니 각 단체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광복군총영 경리부장인 여성독립운동가 이관린(李寬麟)이 1921년 말 국내로 들어가 신민회 간부였던 양기탁(梁起鐸)을 안내해 건너오면서 통합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양기탁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가 1917년 11월 윤치호(尹致昊)·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4년7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다.
양기탁은 망국 직후 안동의 이상룡(李相龍)이 만주로 망명하는 도중 서울에서 만났을 정도로 집단 망명에 깊숙이 개입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남만주의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통일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도위원장에 양기탁을 선임한 것도 통합운동에서 그의 비중을 잘 말해 준다.
통일위원회는 통합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선전공작대를 두고 대장에 전덕명(全德明)을 선임했는데 그는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으로 대한독립단을 이끌던 전덕원(全德元)의 종제(從弟)였다.
그 결과 1922년 봄 길림성 환인현(桓仁縣)에서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광복군총영, 광한단, 평안북도독판부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남만(南滿)통일회’를 개최하고 통합 행정·군사조직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이후 통군부)를 결성했다
통군부는 총장에 대한독립단의 채상덕(蔡相悳)을 선임하고 비서장에는 서로군정서의 고할신(高轄信)을, 사령관에는 서로군정서의 김창환(金昌煥)을 선임했다. 그 외에 민사부, 교무부, 실업부 등의 행정조직도 갖춘 사실상의 정부조직이었다.
<독립신문>은 1922년 6월 3일 통군부 중앙직원회의에서 “통군부를 대개방하고 다른 기관과 더불어 무조건 통일하되 일체의 공적인 결정에 복종하자”고 결의하고 연통제(聯通制) 측과 군정서(軍政署) 측에 위원을 파견해 통합을 권유하기로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래서 1922년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8단(團) 9회(會), 17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서 ‘남만한족통일회의(일명 8단 9회)’를 개최하고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이하 통의부)를 결성하게 된다. 각 단체의 명의를 모두 취소하고 대한통의부로 단일화하는 한편 군대의 명칭을 의용군(義勇軍)으로 결정했다. 통의부는 총장에 서로군정서의 김동삼, 부총장에 대한독립군단의 채상덕을 선출해 계파를 안배했다. <오른쪽 그래픽 참조>
그러나 군사부장 양규열, 참모부장 이천민, 사령장 김창환 등 군부 3인은 모두 서로군정서 출신이었다. 민사부장 이웅해와 재무부장 이병기는 대한독립단 출신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공화주의를 추구하는 서로군정서의 우위가 관철된 인선이었다.
이는 대한독립단을 의도적으로 소외시켰다기보다 남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실제 지형을 반영한 인선이었다. 이 무렵 통의부 의용군에 가담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넌 정이형(鄭伊衡)의 <나의 망명추억기>에는 통의부와 의용군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눈길을 무릅쓰고 산 넘고 계곡을 건너 두어 시간을 가서 한 산골 어귀에 들어서니 갑자기 “누구야” 하는 소리가 벽력같이 들린다… 바로 길 옆에서 군인이 무장한 채 일어서면서 “조금 기다리십시오” 하고 군사용어로 ‘보고’ ‘전령’이니 하는 말을 외치니 산상(山上) 혹은 깊숙한 숲 속의 각처에서 대답이 오간다. >(나의 망명추억기)
의용군 사령부는 일제가 정보망을 총동원해 소재를 알려고 하는 곳이므로 기밀 유지가 중요했다. 정이형의 수기를 계속 보자.
<(의용군 사령부) 안에 들어서니 방에는 정복 군인이 많았다. 모두 일어나서 죽산(김동현) 형을 맞았다. 바로 아랫방에 들어가서 사령장 추당(秋堂) 김창환(金昌煥) 선생을 뵙게 되었다. 군복을 입은 추당 선생은 쾌활한 목소리로 껄껄 웃으시며 나를 이전에 본 사람처럼 대해 준다. “그래, 왜놈의 단련을 받고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셨소” 하고 연달아 묻고 기뻐하신다.>(<나의 망명추억기>)
이런 과정을 거쳐 의용군에 가담한 정이형은 훗날 정의부(正義府) 중대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는 독립군 맹장으로 성장했다. 통의부 의용군은 사령장 김창환, 제1대대장 강남도 휘하에 5개 중대와 유격중대, 헌병대를 두었다.
각 중대는 3개 소대씩을 두었는데 1중대장 백광운, 2중대장 최석순, 3중대장 최시흥, 4중대장 홍기주, 5중대장 김명봉이었다. 의용군 지휘관은 중국군과 비슷한 다갈색 군복에 중국군과 비슷하게 무장했다.
각 중대는 또 관할구역이 있었는데 1중대는 집안현과 통화현 일대, 2중대는 환인현 이구(裡溝) 일대, 3중대는 환인현 북전자(北甸子) 일대, 4중대는 집안현 노야령(老爺嶺) 일대, 5중대는 흥경현 왕청문(旺淸門) 일대였다. 의용군의 전성기 때 병력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예비 병력도 포함된 것으로 추측된다. 훗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 동북항일연군이 수백 명의 병력이면 사단이나 군단으로 호칭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소박한 명칭이었다. 여러 자료를 분석하면 1923년에만 만주 독립군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한 횟수는 모두 735회에 달한다.
1923년 6월 28일 의용군 제2중대 심도성 등은 초산군 서면 연담리에서 일본 경찰대 10여 명과 교전 끝에 3명을 사살하고, 정경순 등은 초산군 서면 무학동과 중은촌에서 다시 전투를 벌여 4명을 사살했는데, 국경 지역에서 매일같이 발생하는 이런 총격전에 대해 <독립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우리 무장대원 30여 명은 9월 21일 밤 9시경에 평북 희천군 북면 명문동에 도착해 먼저 전신·전화선을 끊고 적경(敵警)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자 적경(敵警)이 곧 응전했고 적경(敵警) 1명이 즉사했다… 아군이 여러 곳을 방화하자 또 총격전이 벌어져 적 1명이 전사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으나 아군은 무사했다. 그 후 아군이 다시 화경면을 습격한다는 설이 낭자해 부근 일대의 인심이 흉흉하고 우편 송달이 못 되었다.(<독립신문> 1923년 10월 13일)”
물론 아군의 피해도 작지 않았다.
“의용대 제1소대원 김범주, 윤창산 일행은 강계군 문옥면 두와령과 삼가령에서 다수의 적경(敵警)과 조우해 전투 중에 몇 명을 사살하고 퇴각했다가 어뢰면(魚雷面) 하청장(河淸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창귀(<5000>鬼:앞잡이) 계영식의 밀고로 적경 수십 명과 충돌해 교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김, 윤 양씨가 모두 순국했다.(<독립신문> 1923년 7월 21일)”
국경 부근은 매일같이 출동하는 통의부 의용군의 국내진공작전으로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통의부 내부의 이념 갈등이 불거졌다. 복벽주의자들의 불만이 쌓여가면서 1922년 10월 14일(음 8월 24일) 전덕원 계열의 대한독립단 군인 20여 명이 관전현 이종성(李鍾聲) 집을 습격해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를 사살하고 양기탁과 통의부 법무부장 현정경, 비서과장 고할신 등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립신문>은 이를 ‘서간도사변’으로 보도하면서 ‘통의부가 국체를 민국(民國:공화국)으로 규정하고 대부분의 요직도 신진인사들에게 배정된 데 대한 불만이 표출된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두 당사자인 양기탁과 전덕원이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고 상해 임정에서도 조문단과 진상조사단을 파견했지만 그해 12월 다시 쌍방 간에 총격전이 발생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결국 전덕원을 비롯한 채상덕·김평식·오석영·박대호 등의 복벽주의자들은 1923년 2월 환인현 대황구(大荒溝)에서 통의부 탈퇴를 선언하고 의군부(義軍府)를 설립했다. 그리고 1924년 8월에는 통의부 내의 파쟁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참의부(參議府)를 건설해 임정 산하라고 선언했다. 그해 12월 정의부가 건설되면서 한때 남만주 독립운동단체를 대표했던 통의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6. 내우외환으로 전력 약화
총독 저격, 고마령 참변 … 파란만장 ‘참의부’
상해가 외교 독립론의 무대라면 만주는 무장투쟁의 무대로서 독립전쟁의 최전선이었다. 임정은 정부 기구를 상해에 두는 대신 군정부는 만주에 두어 외교 독립론과 무장투쟁론을 병행하려 계획했다. 압록강 대안에 있던 참의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무장군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대원들. 192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참의부는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고 국내 진공작전을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1924년 5월 19일 새벽. 참의부 소대장 장창헌(張昌憲)을 필두로 이의준(李義俊)·이두성(李斗星)·전창식(田昌植)·김창균(金昌均)·현성묵(玄成) 등 13명의 참의부 소속 독립군들은 봉천성 집안현(輯安縣) 소량곡(小浪谷) 팔합목(八合目) 압록강 대안(對岸)에 매복했다. 건너편이 평북 강계군 고산면(高山面) 남산동(南山洞) 마시탄(馬嘶灘)으로 만주 독립군들이 국내 진공작전 때 이용하는 교통로의 하나였다
독립신문 사장이었던 김승학. 참의부 결성을 돕기 위해 만주로 파견되었다. 해방 후 한국독립사 편찬을 주도했다.
이들이 매복하면서 기다리는 인물은 다름 아닌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었다. 참의부 총사령관인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본명 채찬)의 지시로 사이토를 저격하기 위해 잠복 중이었다. 사이토는 다음 달 일본 국회에 출석해 자신의 식민통치가 성공적이었다고 강조하기 위해 국경 지대인 관북(關北:함경도)·관서(關西:평안도) 순시를 강행했다.
이날 오전 9시쯤 전 숙박지인 문흥(文興)을 출발해 벽동(碧潼)으로 향하던 총독 일행의 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시30분쯤이었다. 유희마루(雄飛丸)와 아스카마루(飛鳥丸) 두 척이었는데, 유희마루가 사정권에 들어오자 소대장 장창훈의 사격 지시를 신호로 13명의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갑자기 총탄이 쏟아지자 사이토는 물론 평북경찰부의 모리니시(森西竹次郞) 경부와 오가타(岡田忠) 순사부장이 이끄는 경비경찰도 크게 당황했다. 대응 사격에 나섰지만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마구 쏘는 방향 잃은 응사일 뿐이었다.
두 척의 배는 달아나기 시작했고 참의부원들은 계속 사격을 가했다. 일제는 총독이 위험지대를 겨우 벗어난 후 ‘접전 시간은 약 5분이고 독립군은 모젤 권총 또는 장총으로 약 40~50발을 발사한 반면 우리 측은 모젤 권총 44발, 기총(騎銃) 28발로 모두 72발을 발사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축소 발표였다. 총독순시선이 독립군의 저격에 쫓겨 도주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게다가 총독의 국경 시찰에 대비해 국내는 물론 압록강 대안인 중국 임강현(臨江縣)과 집안현 등지까지 정·사복 경찰을 삼엄하게 배치한 가운데 발생한 저격 사건이었다.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가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수색대를 편성해 독립군 토벌에 나선 것과 대조적으로 상해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독립신문 1924년 5월 31일자 머리기사는 ‘적괴(敵魁) 사이토를 습격’이란 제목이었다. 이때 ‘독립신문이 ‘우리 의용군 제1중대의 용투’라는 중제목을 뽑은 이유는 참의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였기 때문이다.
대한통의부 산하 의용군들은 통의부 지도부의 분열과 대립에 크게 실망해 통의부에서 갈라진 의병 계열의 의군부는 물론 통의부 지도부도 불신임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상해 임정을 상부 기관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런 방침에 동의한 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는 1923년 8월 의용군 1중대장 백광운과 조능식(趙能植) 등 5명의 대표를 상해로 파견했다. 이들은 임시정부에 그간의 경위를 진술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과거 만주에 있던 임정 산하의 전 광복군 사령부의 맥을 잇는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남만군단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임정에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임정은 전에 광복군사령부 설립을 주도했던 독립신문사 사장 김승학(金承學)과 이유필(李裕弼)을 만주에 파견해 이들을 도왔다. 드디어 1924년 4월 백광운을 비롯한 남만주의 군인 대표 78명 명의의 <선언서(宣言書)>가 발표되었다.
재중국 특명전권공사 요시자와 겐기치(芳澤謙吉)가 외무대신 마쓰이 게이지로(松井慶四郞)에게 보낸 비밀보고서(1924년 6월 2일)에 따르면 이 <선언서>의 공약 3장은
“1.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임을 적극 인정한다.
2. 우리는 대동통일의 선봉이 된 것을 내외에 알리고 임정의 기치하에 통일이 되도록 힘쓴다.
3. 우리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내외 무장 각 단체의 가입을 권유하여 가입시킨다.(<南滿統義府軍隊ノ宣言文及警告文送付ノ件f>)”라는 내용이었다.
임정이 직접 조직한 것은 아니지만 임정은 만주에 직할 독립군 부대를 갖게 된 것이다. 임정은 당초 국제도시인 상해에 정부를 두는 대신 군사부는 만주나 러시아령에 두기로 방침을 정했었다. 드디어 1924년 5월 대한통의부 의용군 1·2·3중대와 유격대·독립소대 대표들은 통의부 탈퇴를 선언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인물의 평(評)과 제도에 대한 의논이 있지만 이것이 불완전함도 우리의 책임이며 이것을 완전케 함도 우리의 당연한 의무라…그런즉 우리는 군민을 물론하고 단순한 혈성(血誠)으로 원리와 원칙을 따라 임시정부 기치하에 모이자….” (독립신문 1924년 5월 31일)
의용군 5중대도 6월에 동참을 선언함으로써 4중대를 제외한 모든 중대가 임정 산하로 들어갔다. 이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약칭 참의부(參議府)가 탄생한 것이다.
참의부는 무장투쟁을 우선했으므로 선임 중대장이 참의장을 겸임하고 행정조직으로는 군자금을 징수하는 민사부 정도만 설치했다. 국내 진공작전의 3분의 2 이상을 참의부에서 수행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로 수시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고 그때마다 국경지방은 전쟁터로 변했다.
그러나 참의부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통의부 잔존세력은 참의부에 시종 적대적 태도를 취하다가 급기야 1924년 10월 18일 통의부 제6중대장 문학빈 일파가 참의장 백광운(채찬)을 살해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돼지족발을 뼈째 씹어서 먹는 장사’로서 일제를 공포에 빠뜨렸던 백광운이 일경(日警)이 아닌 내부 공격으로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일제는 참의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1924년 7월에는 평북경찰부의 한인(韓人) 경찰 김덕기(金悳基)가 홍인화를 매수해 사이토 저격을 주도한 장창헌을 유인 살해했다. 홍인화는 그 대가로 순사로 특채되었으나 분노한 군중에 의해 주막거리에서 맞아죽었다.
그 전인 1925년 3월 16일 참의부 최대의 비극인 고마령(古馬嶺) 참변이 발생했다. 참의부는 비밀 통신망을 통해 각지의 독립군 간부들에게 집안현 고마령 깊은 산속의 비밀 아지트 두 채로 모이라고 통지했다.
참의장 최석순(崔碩淳)과 소대장 최항신(崔恒信), 전창희(田昌禧)·최항신(崔恒信)·전덕명(全德明)·안정길(安貞吉)·김용무(金用武) 등이 모여 국내 진공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으로 독립운동의 새 전기를 마련하자는 이 회의는 5~6일 계속되었는데 회의 도중 일경에 정보가 들어갔다. 밀정 홍재을(洪載乙)의 밀고라는 설과 참의부 간부의 밀고라는 설이 각각 제시되고 있다.
3월 15일 밤 평북 초산(楚山)경찰서 산하 연담(蓮潭) 주재소에 미즈노(水野宅三郞) 경부보(警部補)와 한국인 순사부장 고피득(高彼得)이 이끄는 6개 분대, 65명의 무장경찰이 모여 압록강을 건넜고 초산주둔군 120명이 지원했다. 밀정 이죽파(李竹坡)를 향도로 삼은 이들은 참의부 통신원에게 발견될까 두려워 한밤중에 출발했다.
16일 새벽 압록강에서 60리 떨어진 고마령에 도착한 일경은 포위한 참의부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다. 참의장 최석순과 소대장 최항신 등은 포위망을 뚫으려 백병전을 전개하다가 산화했는데, 모두 4시간여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전창희·최항신·전덕명·안정길·김용무·김학송(金鶴松)·반창병(潘昌炳)·최길성(崔吉星)·백명호(白明浩)·장경환(張鏡煥) 등 29명이 전사했다.
고마령 전투는 참의부의 비극이자 만주 항일무장투쟁 전체의 비극이었다. 주요 군사 간부 대부분이 전사한 참의부는 조직을 재정비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6월과 7월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 휘하의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于珍)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 사이에 ‘한인의 취체(取締)에 관한 쌍방협정’, 이른바 ‘삼시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한인들의 무장이 강제로 해제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조선총독부에 인계되었다.
잇따른 내우외환으로 참의부의 국내 진공작전은 1925년 이후 급감하게 된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24년에는 560여 건에 달하던 독립군의 국내 진공 횟수는 1925년 270건으로 반감했다가 1926년에는 69건으로 급감하게 된다. 그러나 참의부의 국내 진공작전은 계속되었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 18일자는 참의부 제3중대 별동대 6명이 평북에 진입하자 15개 경찰서가 총동원되어 3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나머지 3명은 500여 명의 일경에게 포위되어 굶주린 채 8일간 항거하다가 끝내 체포되었다. 내우외환으로 전력이 약화된 참의부는 난국 타개를 위해 정의부·신민부 및 다른 군정부(軍政府)들과 통합에 나서게 된다
7. 임정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
하얼빈 이남 한인에겐 ‘정의부’가 정부였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가 있던 유하현 삼원보. 망국 직후부터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와 장작림 군벌정권의 탄압으로 정의부는 근거지를 계속 옮겨야 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일반 국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의 판도를 바꿀 만한 큰 사건이었다.
3·1운동 이후 곧 독립이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지만 3·1운동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망라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였고, 상해에 위치해 무장투쟁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미주에서 활동하던 박용만(朴容萬)은 북경으로 건너와 국내외에 산재한 10개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해 1921년 4월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했다. 군사통일회의는 대체로 임정에 부정적이었다. 회의 자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임정에는 큰 과제를 던져주었다.
모든 독립운동 단체가 참가하는 ‘통일전선체’를 결성하라는 과제였다. 이런 여망 속에서 1923년 1월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와 상해, 북경, 만주, 러시아령, 미주의 120여 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가 총망라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통일적인 조직체가 건설된다면 그동안 분산되었던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 보다 통일적이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임시정부를 개조해서 존속시키자는 개조파(改造派)와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創造派)로 나뉘어 대립했다. 만주와 상해의 대표들은 대체로 개조를 주장한 반면, 북경과 시베리아 대표들은 창조를 주장했다.
대립이 계속되자 5월 15일 국민대표회의 의장이었던 김동삼(金東三)을 비롯해 김형식(金衡植)·이진산(李震山) 등 만주 대표들은 대표 사면청원서를 제출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창조파는 6월 3일부터 윤해(尹海)를 의장에 추대하고 단독 회의를 열어 국호를 한(韓), 연호를 단군 기원으로 삼는 새로운 한국(韓國)정부를 창조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1 삼원포(옛 삼원보) 동명소학교. 아직도 동명학교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2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 해방 후 남조선과도입법의회 관선의원이 돼 친일파의 공민권 제한을 주장했다
그런데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원으로 상해에서 개최한 국민대표회의”라고 말한 것처럼 대회 경비는 러시아 정부에서 나온 것이었다. 러시아는 민족단일전선을 만들어 항일투쟁에 나서라는 뜻에서 지원한 것이었지 한 파벌만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라는 의도는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가 창조파를 추방하면서 새로운 정부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한국독립사' 4권, 임시정부사).
만주로 돌아간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지역 내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 작업에 나서서 1924년 7월 ‘전만(全滿)통일회의 주비회(籌備會)’를 결성했다. 주비회에는 대한광정단(大韓光正團:대표 김호), 대한독립군(대표:이장녕), 대한독립군단(대표:윤각) 등이 가담했는데 그 중심은 대한통의부와 서로군정서였다.
이때 대한독립군이 임정 옹호를 주장하자 통의부 등에서 극력 반대하면서 다시 갈등이 발생했다. 통의부에서 갈라져 나간 군부 세력이 임정 산하의 육군주만참의부(약칭 참의부)를 결성했으므로 통의부는 임정에 적대적이었다.
결국 대한독립단과 학우회 등이 탈퇴하고 나머지 8개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화전현(樺甸縣)에서 전만통일회를 열고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했다.
1924년 11월 24일을 창립기념일로 삼은 정의부는 창립 결의문에서 ‘개국 기원(紀元:단군 기원)을 연호로 사용하고 구(區)의회, 지방의회, 중앙의회를 설치’했다. 또한 ‘각 단체는 명의 취소 성명서를 작성해 대표가 연서해서 공포하고, 각 단의 사무는 폐회일로부터 2개월 이내에 정의부로 인계한다’는 내용을 결정했다(채영국,'정의부 연구', 1998, 박사학위 논문).
이 결의에 따라 서로군정서는 1924년 12월 31일 가장 먼저 통합 선포문을 발표하고 해산했다. 서로군정서가 선포문에서 “오직 우리 독립운동의 유일무이한 정의부라는 기관을 조직한 후 헌법 전문을 새로이 준비한다”고 밝혔듯이 정의부는 군정부(軍政府)를 지향했다.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대표 기관을 자임했는데 입법·사법·행정의 3권이 분립된 민주공화제였다. 법률 제정권은 의회에 있었고, 중앙행정위원회(행정부) 산하에 민사·군사·법무·학무·재무·교통·생계(生計)·외무 등 8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법부에 해당하는 사판소(査判所)가 있었다.
지방은 촌락의 크기에 따라 ‘중앙→총관구(總管區:1000호)→지방(地方:500호)→백가장(百家長:100호)→구(區:50호)→십가장(十家長:10호)’ 등으로 나누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했다. ‘지방’이나 ‘구’에서 호수(戶數)를 비율로 중앙의회 의원을 선출하면, 의원들은 재만(在滿) 한인사회에 신망이 높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중앙행정위원회 위원들을 선임했다.
선출된 위원들은 위원장 및 각 부 위원을 상호 투표로 선출했다. 민주공화제를 운영한 경험이 전무했던 상황에서는 경탄할 만한 민주적 조직 운영 방식이었다.
정의부는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탁(李?)을, 현정경(玄正卿)·지용기(池龍起)·이진산(李震山)·김용대(金容大)·김이대(金履大)·윤병용(尹秉庸)·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만주 독립운동의 대표격인 이상룡(李相龍)이 빠진 이유는 이미 만 66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들 이준형(李濬衡)은 <선부군 유사(先府君遺事)>에서 ‘국민대표회의의 결렬에 실망해서 반석(盤石) 동쪽 호란하(呼蘭河)가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참의부가 군사 중심의 조직체라면 정의부는 행정과 군사 병행 체제였다. 정의부는 창립 선언서에서 “…광복사업의 근본 문제인 경제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산업 진흥을 시도하며 민족발달의 유일한 요소인 지식 정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육 보급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듯이 산업 부흥과 교육 우선, 그리고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정의부는 양기탁(梁起鐸)의 주도로 만주 여러 곳에 수전(水田)농업을 하는 ‘이상적 농촌 건설 계획’ 등을 계획했지만 토지 구입대금을 마련하지 못해 실패했다.
정의부 학무국은 1925년 소학(小學)·중학(中學)·여자고등·직업·사범학교 등으로 구성되는 학제를 발표하면서 소학교 의무교육 제도를 선포했다. 정의부는 각지에 설립되어 운영 중인 학교를 인가하기도 하고 새로 설립하기도 했다.
정의부 본부가 있던 유하현 삼원보의 동명중학교를 필두로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의 화흥(化興)중학과 남만주학원 등을 설립했으며, 그 외에 화성(華成)의숙, 부흥(復興)학교, 삼흥(三興)학교 등도 모두 정의부에서 운영했던 학교였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 정의부에서 22개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2년 숭실전문학교 경제학연구실의 이훈구(李勳求)는 이보다 2~3배 이상 많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장작림(張作霖) 군벌정권의 경무국장 우진(于珍)이 ‘삼시협약(三矢協約:미쓰야협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총독부에 넘겼다.
그래서 처음 삼원보에 중앙행정위원회를 두었던 정의부는 계속 이주해야 했다. 삼원보에서 화전현(樺甸縣) 공랑두(公郞頭)와 밀십합(密什哈)으로, 다시 길림현 대차(大?)와 신안둔(新安屯) 등으로 계속 옮겨간 것이다.
정의부는 산하에 의용군 사령부가 있었는데, 1925년 9월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司令長)은 한말 무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의 지청천(池靑天)이었다. 압록강 대안에 있던 참의부보다 더 북쪽에 자리 잡은 정의부도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에는 2개 대의 유격대를 국내로 잠입시켜 서울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 비록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 때문에 만주로 퇴각했지만 여건만 허락하면 다시 진입할 수 있었다.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은 1927년 만주에서 체포되어 해방 때까지 18년 동안 장기 복역한다. 그의 혐의 중 하나는 참의부 독립군이 평북 초산(楚山)경찰서에게 당한 고마령 참변에 대한 보복 투쟁이었다.
일제 신문조서는 ‘정이형이 김석하(金錫夏), 김정호(金正浩) 등 의용군 간부들과 다수의 독립단원이 초산경찰서 경찰관에게 피살된 일을 복수하기 위해 초산경찰서 추목(楸木)출장소(김석하)와 외연(外淵)출장소(김정호), 벽동(碧潼)경찰서 여해(如海)출장소를 각각 습격했다’고 판결했다.
정이형은 6명의 의용군과 함께 1925년 3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새벽 5, 6시쯤 여해경찰관 출장소를 습격해 순사 서천융길(西川隆吉)과 임무(林茂)·신현택(申鉉澤)의 두부를 저격해 즉사시키고 다수를 부상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정의부는 전 만주를 아우르지는 못했지만 이상룡의 손부(孫婦)인 허은(許銀)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단체 덕을 보았지 안 본 사람 어디 있나? 그 너른 천지에 자력으로 어디 가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겠나?”라고 말한 것처럼 재만 교포들에게는 사실상의 정부였다.
[출처] : 이덕일의 근대를 말하다-대한만주의 삼부(三府)⑦ / 중앙선데이 261호
8. 북만주의 통합 바람
신민부, 장작림 잡으려 장개석과 손잡다
신민부가 성립되면서 압록강 대안의 참의부, 그 북쪽의 정의부와 북만주를 관할하는 신민부의 삼부(三府)가 정립하는 삼부체제가 완성되었다. 삼부는 삼권분립의 정치체제와 독립군을 가지고 일제와 치열하게 투쟁했다. 삼부는 만주 한인들에게 사실상의 정부 같은 조직이었다.
백범영-독립군 도강작전, 143×75㎝,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2
봉오동·청산리 승첩 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다가 ‘자유시(自由市) 참변’을 겪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뜻밖에도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아일보 1921년 11월 15일자는 ‘배일(排日) 거두(巨頭) 서일(徐一) 피살설’이란 제목 아래 “군정서 군무총재 서일은… 부하 삼사십 명을 거느리고 웅거하여 있다가 동월 8일에 돌연히 마적과 충돌해 밀림지대에서 장렬하게 싸움을 하다가 마적의 탄환에 맞아 그만 사망하였다는 말이 있다(군사령부 발표)”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아직은 믿지 못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자세한 진상은 ‘독립신문’ 대한민국 3년(1921) 12월 6일자가 말해주고 있다. 이 날짜 ‘독립신문’은 ‘고 서일 선생을 조(弔)함’이라는 애도문을 1면 머리기사로 실으면서 3면에 ‘독립군 총재 서일씨 자장(自<6215>:자살)’이란 제목으로 자세한 내용을 보도했다.
서일은 1921년 9월 28일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무장 군사 12명을 대동하고 밀산(密山)현 흥개호(興凱湖) 부근 한 촌가에 머물러 있던 중 붉은 옷을 입은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을을 포위한 수백 명의 마적 떼가 주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자 서일의 호위병력이 응전했는데 수적으로 절대 열세여서 12명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서일은 이에 책임을 통감하고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서일은 1916년 자결한 대종교 1대 교주 홍암(弘巖) 나철(羅喆)의 유서(遺書) 중에서 “…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라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서일의 죽음은 북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큰 타격이었다.
신단민사(神檀民史)의 저자이기도 했던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이 1923년 11월 영안(寧安)현의 대종교 총본사에서 병사한 이유 중의 하나가 서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질 정도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도 북만주의 혈성단(血誠團), 북로군정서, 의군부, 광복단, 대진단(大震團) 등의 독립운동세력들은 통합운동을 전개해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남만주에서 대한통의부가 결성된 것과 같은 해 같은 달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두만강을 자주 넘나들었던 역전의 용사들이자 봉오동·청산리 승첩의 주역들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었기 때문에 북만주로 파고들던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러시아가 1920년 3월 하얼빈에 ‘동지철도 부속지(東支鐵道附屬地) 공산당 사무국’을 설치하고 사회주의 전파에 나서자 목릉현 소추풍(小秋風) 일대에서 소비에트 반대 활동을 전개하고, 1924년에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적화방지단(赤化防止團)’까지 만들어 대립하기도 했다.
남만주에서 참의부와 정의부가 잇따라 결성되자 북만주에도 단체 통합의 바람이 불어서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군정부(軍政府) 설치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3월 10일 영안현에서 신민부(新民府)가 만들어진다.
신민부는 김혁(金爀)·조성환(曺成煥)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서와 김좌진(金佐鎭)·남성극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의 두 군사세력이 주축이 되고 중동선(中東線)교육회장 윤우현(尹瑀鉉) 등 민선대표들과 국내 10개 단체 대표들이 참가했다.
신민부는 “아등(我等)은 민족의 요구에 응하고 이래(爾來:가까운) 단체의 의사에 기하여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일치된 정신 하에 신민부의 조직이 성립된 것을 자(玆)에 선포한다”라고 시작해 “래(來)하라 단결. 기(起)하라 분투”로 끝나는 선포문을 발표했다.
신민부도 행정부인 중앙집행위원회와 의회인 참의원, 사법부인 검사원을 두어 삼권분립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집행위원장은 대종교 계통의 김혁이었고, 민사부 위원장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외교부 위원장 조성환, 교육부 위원장 허빈(許斌)이었다.
참의원 의장은 의병장 출신의 이범윤(李範允)이었는데 이미 만 62세의 노령이었다. 검사원 원장에는 대종교 계통의 현천묵(玄天默)이 선임되어 대체로 대종교 계통의 우위가 관철되었다.
신민부도 재만 한인들의 생활 향상과 군사력 증강,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신민부는 결의안에서 “군사는 의무제를 실시할 것. 둔전제(屯田制) 혹은 기타의 방법에 의해 군사교육을 실시할 것.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양성할 것. 군사서적을 편찬할 것” 등을 규정했다.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열고 모두 500여 명의 장교를 양성했는데 교장 김혁, 부교장 김좌진, 교관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오상세·백종렬 등이었다.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해 전시가 도래하면 금방 대규모 병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했다. 군구제는 신민부 관할 내의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 장정들의 군적(軍籍)을 작성해서 독립군의 기본대오를 편성한 것이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가 지휘하면 금방 정규군으로 바뀔 수 있었다. 둔전제는 일종의 병농일치제도였다. 신민회는 결의문에서 교육에 관해 “소학교 졸업연한은 6개년, 중학교 졸업연한은 4개년으로 함. 단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1개의 소학교를 설치하고 필요에 따라 기관에서 중학교 또는 사범학교를 설치함. 교육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교과서를 편찬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신민부는 주하(珠河)·목릉(穆陵)·밀산(密山)·요하(饒河)·돈화(敦化) 등 15개 지역에 50개 이상의 학교를 건설하는데 이때 신민부에서 파견되어 안도현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이강훈(李康勳)은 <민족해방운동과 나(1994)>에서 “나는 아침 조회 때마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송화강 상류 언덕 위에 학생들을 집결시켜 놓고 마주 보이는 백두산 영봉을 바라보면서 애국가를 제창하게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만주 군벌당국이 신민부 탄압에 나섰다. 그럼에도 독립군은 중국군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기 어려웠다. 중국군 중에는 1920년대 초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孟富德)이 일본군의 토벌계획을 사전에 알려주면서 독립군의 이동을 권한 것처럼 독립군에 우호적인 인물도 있었다.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와 이른바 미쓰야협약(三矢協約:삼시협약)을 맺고 독립운동가를 조선총독부에 넘겨준 이후 환경은 극도로 열악해졌다.
장작림 군벌 경찰은 1925년 10월 영고탑(寧古塔)에서 회의 중이던 신민부 별동대를 급습해 박순보(朴順甫)·신갑수(申甲洙) 등 8명을 연행했다. 이듬해 4월 여섯 명은 석방되었지만 위 두 사람은 그 사이 옥사할 정도로 혹독한 취급을 당했다. 1928년 1월에는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기도 했다.
그 전에 신민부는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중국국민당의 장개석 정부와 연합전선을 결성하려 했다. 최형우(崔衡宇)의 <해외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에 따르면 신민부는 중국국민당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貢沛誠)과 연결해 ‘만주 군벌타도가 목적인 국민당 북벌정책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기본 계획은 중국국민당과 손잡고 신민부 군부를 중국 중앙군 제8로군으로 개편해 장작림 정권을 무너뜨리는 동북혁명군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국민당에서 무기와 군자금 400만원을 제공하면 중앙군 제8군으로 명칭을 바꾼 신민부가 목단강(牧丹江)과 하얼빈을 점명하고 봉천(奉天:장춘)으로 진군해 장작림 정권을 타도한다는 계획이었다.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사>(1956)는 1927년 2월 중국 구국군 제13군 사령관 양수일(楊守一)이 김좌진을 백두산 산록의 군구 사령부로 초청해 한·중연합부대 결성에 대해서 논의했으며, 그해 8월에도 왕청현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한·중연합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국민당 측에서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 기병 3000과 보병 2만을 지닌 악유준(岳維峻), 비슷한 규모의 군사력을 지닌 사가헌(史可軒)이 참석하고 신민부에서는 김좌진 외 2명이 참석해서 신민부를 중앙군 제8로군으로 바꾸고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작림이 공패성·사가헌·악유준을 체포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한·중 연합부대가 계획대로 결성되었다면 독립운동사 자체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5월 15일자는 김좌진이 1925년 3월 신민부 특공대원 강(姜)모 등에게 권총과 폭탄을 주어 사이토 총독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하고, 해림(海林)의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 배두산(裵斗山)을 처단하는 등 신민부는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북만의 15~6개 현, 40만~50만 명의 한인사회를 관장했던 신민부는 이후 민정파와 군정파로 갈라지는 분열을 겪으면서 삼부 통합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9. 일제 탄압과 내부 분열
삼부 통합은 멀고 만주사변은 가까웠다
재만 한인들이 일제 관헌과 중국 관헌 양쪽으로부터 핍박당한 것처럼 한국 독립운동 세력도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이라는 두 개의 적과 동시에 싸워야 했다. 이런 분열 상태를 끝내고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로 결집하자는 주장이 민족유일당운동과 삼부통합운동이었다.
북만주 산시(山市)에 있는 김좌진의 옛집. 김좌진은 신민부 군정파로서 삼부통합운동에 참가했다. [사진가 권태균
만주 이주 한인들, 즉 한교(韓僑)들은 중국과 일본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부평초 신세였다. 한교들의 사실상 정부였던 삼부(三府)는 1925년의 미쓰야(三矢)협정 이후 크게 위축되었다.
항일 언론인 이상협(李相協)이 발행하던 중외일보 1927년 11월 29일자는 만주 한인들이 중국인들로부터 억압받는 실태를 보도했다. 길림성 성장(省長)이 조선 농민의 이주를 일절 금지시키고 이미 이주한 농민들도 중국에 입적(入籍)하지 않았으면 1년 이상 경작지를 빌려주지 말라는 밀명(密命)을 내렸다는 보도였다.
여기에 만주 회덕(懷德)현 조선 농민들이 중국 관민에게 수탈당한 사례가 전해지자 국내에 반중 감정이 들끓었다. 회덕현 소오가자(小五家子)의 180여 호 조선인 마을의 삼성(三成)소학교를 중국 관헌이 강제로 폐쇄시켰으며, 중국인들이 도전공사(稻田公司)라는 ‘협잡간판’ 아래 한교들이 피땀으로 개간한 옥토와 농작물을 빼앗았지만 중국 당국은 되레 중국인들만 비호했다는 보도였다.
이런 소식을 접한 국내 민중은 그 분노를 국내의 화교(華僑)에게 돌렸다. 1927년 12월 7일 전라도 익산에서 화교 배척 운동이 일어나 곧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중국 국민당 광주(廣州)지부 기관지인 광주민국일보(廣州民國日報)는 이 사건에 큰 관심을 갖고 다양한 각도로 보도했다.
산시역(驛). 하얼빈을 중심으로 소·만 국경의 만주리와 대련·여순까지 연결하는 길이 2400㎞에 달하는 중동선(中東線)의 주요 축이었다
이 신문 1927년 12월 23일자는 “만주지역에서 중국 관헌이 한교(韓僑)들을 학대했으니 그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한인들이 화교들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다. 호남에는 만주 이주 친인척들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로이터 통신은 한국 전역으로 확산된 화교 배척 운동 때문에 동삼성(東三省·만주)으로 피난한 화교가 3000여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광주민국일보 취재진이 상해에서 활약하던 안창호(安昌浩)를 찾아가 해결책을 물었다. 그러자 안창호는 ‘한교들은 중국인들이 버려둔 계곡과 황무지를 개간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에게 이익을 주지 절대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 만주 관헌들이 시도 때도 없이 한인을 능멸하고 모욕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군인들에게 특히 이런 경향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안창호는 “정의부·신민부·참의부 등은 만주 반일파의 중심 기관이며, 한교 지도층은 참고 견딜 것을 바라고 있다”면서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서는 중·한 두 민족의 긴밀한 협조와 연계가 절실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광주민국일보 1928년 1월 9일).
화교 배척 운동으로 여러 명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조선중화총상회(朝鮮中華總商會)와 인천중화총상회 등은 “지금까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교포는 없다”면서 “사태가 점차 진정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조선인 지도층이 여러 차례 찾아와 유감의 뜻을 전하고 정중히 사과했는데 이들의 진중한 태도로 보아 사태 재발을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고도 전했다(광주민국일보 1928년 1월 27일).
중국 국민당이 상해에서 발행하던 중앙일보(中央日報) 1928년 6월 30일자는 ‘동삼성, 한국 교민의 민족운동’이란 제목으로 한교 배척 운동 이후 재만 독립운동계의 동향을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손문(孫文)의 장남 손과(孫科)가 동사장(董事長·이사장), 국민당 중앙선전부장 정유분(丁惟汾)이 사장이었는데 “일체의 언론은 본당(本黨·국민당)의 주의와 정책에 근거한다”는 신문이었다.
중앙일보는 위 보도에서 “1928년 6월 만주 거주 한교가 180만 명에 달하는데 ‘한교구축문제강구회(韓僑驅逐問題講究會)’ 등이 결성되어 한교 구축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교 구축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은 중국 국적으로 입적(入籍)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1928년 4월 19일 만주 각 단체·지역의 대표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해 ‘21일 일단 휴회’한 것처럼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중앙일보가 “최근 각 당파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정의부·참의부·신민부·청년당·노동당·남만청년동맹회·흥사단 및 한국 경내의 사상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일당통일회의를 열기로 했다”고 보도한 것처럼 이런 문제들이 재만(在滿)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논의를 부추기는 효과도 있었다.
모든 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해 민족유일당을 건설하자는 운동과 만주의 삼부를 통합하자는 삼부통합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926년 7월 임정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洪震)이 “전 민족을 망라하는 공고한 당체(黨體)를 조직하자”고 주장한 것처럼 상해 임정도 그 전부터 통합운동을 지지했다.
안창호는 1926년 8~9월께 북경에서 임정 창조파로서 임정을 부인해오던 사회주의자 원세훈(元世勳)을 만나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촉구했다. 이어 1927년에는 만주를 방문해 만주에서 우선 민족유일당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28년 1월에는 홍진과 정원(鄭遠)이 만주로 와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촉구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김동삼(金東三)과 김원식(金元植)은 갖은 고생 끝에 1928년 4월 북만주의 신민부 본부를 찾아 김좌진 등 신민부 지도자들에게 “광복의 제일요(第一要)는 혈전(血戰)인 바 혈전의 숭고한 사명 앞에는 각 단(團)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이라면서 ‘삼단체(참의부·정의부·신민부) 군부(軍部)의 합작’을 역설했다.
이 무렵 신민부에서 활동했던 이강훈이 “우리 일행이 (안도현에) 도착했을 때 정의부에서도 사람이 와서 지방 조직을 서두르고 있었다”라고 회고한 것처럼 같은 독립운동 단체끼리 경쟁하는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도 통합을 해야 했다.
드디어 1928년 5월 12일부터 길림성 화전현에서 정의부 외 18개 재만 단체 대표자 39명이 민족유일당 건설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크게 단체본위(團體本位) 조직론과 개인본위(個人本位) 조직론으로 나뉘었다. 단체본위 조직론은 기존 단체들이 연합하는 방식으로 민족유일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인본위 조직론은 각 단체를 그대로 인정하면 또다시 당파와 파벌이 난립할 것이므로 모든 단체를 해산하고 개인본위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주장이다.
두 노선이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단체본위 조직론자들은 전민족유일당협의회(全民族唯一協議會·이하 협의회)를 결성했고, 개인본위 조직론자들도 전민족유일당촉성회(全民族唯一促成會·이하 촉성회)를 결성해 각각 통합에 나섰다.
협의회 측은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대표 세 명씩 모여 1928년 9월 길림 신안둔(新安屯)에서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도 역시 통합 방식에 이견이 있었다. 세력이 가장 컸던 정의부는 단체본위 통합론을 제기했다.
반면 참의부와 신민부는 ‘삼부 완전 해체’와 함께 ‘전만일반(全滿一般)의 대당주비(大<515A>籌備)를 실행하자’고 주장해 기존의 모든 단체를 해산하고 새로운 민족유일당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참의부와 신민부는 이때 한교 배척 문제의 해결책으로 “이주민의 귀화를 장려하고 특수한 자치권(自治權)을 획득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에 입적해 중국법의 보호를 받되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때도 각 세력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신민부의 경우 김좌진 등이 주도하는 군정파(軍政派)와 최호(崔灝) 등이 주도하는 민정파(民政派)로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각 부(府)의 내부 분열 문제도 한몫했다.
결국 1928년 12월 길림에서 신민부 군정부를 중심으로 참의부 주류파, 정의부 탈퇴파, 그리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했다.
혁신의회는 회장 김동삼, 중앙집행위원장 김원식, 군사위원장 황학수(黃學秀), 군사위원 지청천, 민정위원장 김승학(金承學) 등을 선임하고 중앙집행위원회의 산하에 3개 분회(分會)를 설치했다. 제1분회는 참의부, 제2분회는 정의부, 제3분회는 신민부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혁신의회에 가담하지 않은 정의부 주류파와 신민부 민정파, 참의부 비주류 계열 등은 1929년 3월 정의부 주재로 길림에서 통합 회의를 개최하고 4월 1일 새로운 통합 단체인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했다. 이로써 만주는 혁신의회와 국민부라는 두 개의 통합 조직이 분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독립운동 세력들이 노선이나 주도권을 가지고 다툴 때가 아니었다.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이 이미 체포된 데 이어 통합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혁신의회 회장 김동삼도 하얼빈에서 체포되었고, 참의부 대표 김승학도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될 정도로 중국과 일본의 탄압이 극심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제가 만주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이 다가오고 있었다.
(‘만주의 삼부’ 끝, 다음 호부터는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다’가 시작됩니다)
[출천] :이덕일의 근대를 말하다-대한만주의 삼부(三府) / 중앙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