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오기륭
솔직히 대스압으로 대명궁에 대한 이야기를 1편으로 끝낼 수 없기에(...)
여러편으로 나눠서 찔 것 같아.
아... 흑역사인거 아는데 자꾸 궁이랑 황실얘기 하니까 모의전 하고싶으다.
대명궁에 대한 맨 처음 글에서 썼다시피 당나라의 황궁이었던 대명궁은 베르사이유의 3배, 자금성의 4배,
크렘린의 12배, 루브르의 13배, 버킹엄의 15배야(...) 대륙의 사이즈는 정말 알아줘야 할 것 같다는.
사실 우리나라 궁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번 쓴 적이 있어서 중국의 궁에 대한 것도 써보고 싶었는데 대명궁에 대한 고퀄리티
자료가 있어서 요러케 쓰게 됐습니당. 그럼 비록 CG지만 대명궁투어 함께 해 보시졍.
원래 당나라 초기의 궁은 장안에 위치한 '태극궁太極宮' 이었어.
우리가 당태종 이세민이 집권할때 벌였던 '현무문의 변' 있지? 그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 곳은 대명궁이 아니라 태극궁이야.
(현무문의 변에 대해 궁금한 여시가 있다면 쪄 드리겠습니당.)
태극궁은 대명궁보다는 좀 작았기도 한데다가 지형을 살피지 않고 좀 무작정 만든 감이 없지않아 있어서
낮은 지대에 위치했어. 그런데 하필이면 장안은 비가 많이 오는 도시였거든. 그래서 비가 오기만 하면 이 태극궁에 매번 침수될뻔
하기도 하고 습기가 너무너무 많이 차는거야. 그래서 당태종도 여름이 되면 태극궁을 내버려두고 장안에서 3백리 떨어져있는
여름 별궁에 가서 지내는 일이 허다했다고 해.
그리고 대명궁이 만들어진 이유중의 하나는, 당태종의 뒤를 이은 당고종은 척추에 장애가 와서 마비가 오는 병을 앓고있었어.
병이 있다보니 거동이 불편했고 당연히 습하고 좁은 태극궁을 몹시 싫어했지. 여기에 당고종을 부추긴 사람이 있었어.
바로 새 황후로 등극한 측천무후였어. 측천무후는 몸이 불편했던 당고종을 도와 국사를 돌보고 있었는데 고종에게 태극궁을
대신 할 새 황궁을 짓자고 했고 고종도 OK하면서 대명궁의 긴 역사가 시작 돼.
게다가 태극궁은 작고 소박한 감이 없지않아 있었어. 화려한 궁을 원하던 측천무후는 당고종의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662년 대명궁의 공사를 시작하게 되는거야.
대명궁은 당나라가 개국되고 나서 가장 큰 역사(役事)이기도 했어.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이화는 '자갈과 모래로 산 하나가 쌓이는구나' 라고 할 정도로 대명궁의 공사가 얼마나 큰 공사였는지
표현하기도 했지. 대명궁의 대들보가 될 목재들은 모두 남방에서 가지고 왔는데 얼마나 많은 나무를 베었는지 산 골짜기마다
나무베는 소리로 가득했다고 해. 더불어 남방에서 장안까지 목재 운반은 무려 6개월이 걸리기도 했지.
이 대명궁의 완공을 가장 기다린 사람은 다름 아닌 측천무후였어.
사실 측천무후는 황후가 되기위해 고종의 원후(元后)였던 왕황후와 총비였던 소숙비를 모함해서 가둔 후에 그들을 고통속에서
죽게했거든. (모진 고문을 하고, 그들의 손발을 잘라 술독에 넣는 등 아주 파렴치한 행동을 함)
그래서 일설에는 무측천의 꿈에 왕황후와 소숙비의 영혼이 산발을 하고나서 나타나기도 했다고 해.
그들이 죽어 영혼이 여전히 남아있는 태극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거지.
이런 측천무후의 재촉때문에 대명궁의 공사는 더욱 빨리 진행되어야했고, 대명궁의 조기완공을 위해 당나라의 조정은
무려 15개주(현재의 '도' 를 생각하면 빨라)의 세금을 끌어오기도 했어. 게다가 장안성 각급 관리들의 한달치 녹봉(월급)이
중단되기도 했지.
그리고 결국 663년 6월 5일,
아직 준공되지도 않은 대명궁으로 당 황실은 이사를 감행해.
그리고는 호위대의 호위를 받아 태극궁의 북문에서 대명궁의 남문까지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태극궁에서 벗어나 약 3Km를 가면 대명궁이 나와.
그리고 이 사진은 대명궁의 남문이자 정문인 '단봉문' 이야.
보통 성문은 3개의 문을 두는데 단봉문은 그림에서 보이다시피 3개가 아니라 5개의 문으로 구성되어있어.
그만큼 단봉문은 중국역사상 가장 컸던 문으로 기록되어있다고 해.
규모는 대략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숭례문, 흥인지문, 숙장문을 다 합친 크기의
4~5배라고 하면 되려나. 그 정도로 크다고 해.
그리고 문의 이름인 '단봉' 은 한자로 丹鳳. 붉은 봉황이란 뜻인데 붉은 봉황 = 주작을 뜻해.
단봉문의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에 정확히 나와있지는 않지만 측천무후의 등장과 연관이 있을거라는 사료가
많아. 왜냐, 중국 고대 서적에 따르면 나라에 태평성세가 지속 될 경우 봉황이 세상에 내려온다고 적혀있거든.
게다가 우리나라 왕후들을 봉황으로 표현했던 것 처럼 중국 또한 용인 황제의 배필인 황후를 뜻하는 상징으로 봉황을 사용했어.
게다가 봉황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붉은 봉황인 주작이니 필경 새로 황후가 된 무황후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
그리고 이 단봉문을 넘으면 그야말로 장대한 스케일의 대명궁이 펼쳐져.
대명궁 안의 전각이나 생활에 대해서는 2편에서 계속 알아보도록 해염 :D
첫댓글 저때로 타임리프트해서 내 눈으로 보고싶돠
쩐다..난진짜 옛날사람들이 신기해 지금같은 기술도 없이 어떻게 저런걸..
삭제된 댓글 입니다.
노노. 대명궁은 안록산의 날때 전소 됨. 현재 서안(구 장안)에 대명궁 터만 남아있슴.
[중국의궁] 애네 정말 스케일이 다른듯 ㅇ0ㅇ
무측천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다 ㅎㄷㄷㄷ
오와 오기륭 언니 글 항상 정독하고 잇숨!!!
와...마지막 성문 넘어선거 보니까 쩐다;; 자금성보다 컸다니; 지금까지 남았을 세월도 아니지만서도 그래도 전소라니 아깝다..
와... 저기에 생활도 궁금하다.... 저많은방 다 열어는봤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