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녀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니,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자만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정민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기차는 여전히 덜커덩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에 맞춰 그의 의식 한 쪽이 울렁울렁했다. 무슨 연유로 뜨거워진 그의 의식 한 자락이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되어 가슴팍으로 치밀어 올랐다. 그럴 때마다 그는 먹은 것이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해왔고 시야가 흐려졌다. 그 뜨거운 불덩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창 밖에 짙은 어둠이 점령군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나마 어슴푸레하게 남아있던 희미한 빛의 입자들이 어둠의 공격을 받아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대지와 하늘과 그 사이의 공간을 구별하던 빛이 사라지자 그 셋은 모두 합쳐져 하나가 되었고 오직 그 속에서 가끔 반짝거리며 지나가는 인가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낮게 깔린 별처럼 보였고, 그를 태운 기차는 허연 빛을 뿜어내며 수없이 달린 발을 꿈지럭거려 앞으로 나아가는 투명 애벌레 같았다. 그 컴컴한 허공 한쪽 귀퉁이에 노도같이 밀려드는 어둠의 점령군을 맞아 힘겹게 싸우느라 금방이라도 숨통이 끊어질 듯 실처럼 야윈 초생달이 걸려있었다.
정민은 펄쩍펄쩍 튀어 오르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 묻은 채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녀를 찾아가는 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눈에 띠는 것을 닥치는 데로 집어삼킬 듯 으르렁대는 칠흑같이 캄캄한 밤, 갈길 몰라 하염없이 헤매는 자그마한 나룻배 앞에 저 멀리 나타난 등대의 불빛, 그에게 있어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갑자기 어깨가 욱신욱신 쑤시며 양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정민은 두 손을 들어 양 눈 옆 부위를 짓누르다 지끈거리는 고통이 잦아들자 눈꺼풀을 들어올려 차창을 바라보았다. 지칠 데로 지친 남자 하나가 차창 뒷편에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퉁퉁한 얼굴이 붉어 있었으며 굵다란 수염은 비죽비죽 튀어나온 데다 길지 않은 머리칼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위로 솟구쳐 있었다.
언젠가 도심을 지나다가 선물용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러 들어간 가게에 붙어있는 거울 속에 비친 정민의 모습이 이와 같았다. 구부정한 등허리에 어둡고 칙칙한 잠바를 걸친 사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허물을 벗을 듯 허연 살갗이 거칠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그는 깊은 절망에 잠긴 적이 있었다. 그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에서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깊은 절망만이 음울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다시 감았다. 안구와 눈꺼풀 사이의 좁은 공간에 마련된 검정 스크린에 영상 하나가 비춰졌다. 그는 비누방울을 불고 있었다. 대롱 끝에서 피어 오른 둥그런 비누방울 하나가 머리 위로 날아가더니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구슬 만하던 것이 곧 밤알만하게, 야구공 크기로, 둥그런 탁상시계로, 배구공으로, 커다란 호박으로, 큰 쟁반으로, 고무 자배기만하게 크진 그것이 마침내 집채만한 무쇠덩이가 되더니 갑자기 대지와 하늘과 허공을 한번 들었다 놓는 듯 쿠쿵, 쾅, 펑 하는 소리를 내더니 산산 조각나서 그를 덮칠 듯 몰려오더니 온몸에 파편을 내리 꼽았다. 그 몸에서 붉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바늘을 백배로 확대한 송곳이 온몸을 깊숙이 찌르고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한 고통이 그에게 전해졌다. 곧 의식이 깊은 늪 속으로 까무룩 빨려 들어갔다.
2 꿈
그것은 거품이었다. 새 천년을 눈앞에 둔 1999년 말, 거품은 극에 달했다. 벤처 기업인들과 그 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황금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었다. 자그마한 회사로 시작해 이삼년 만에 천문학적인 재산을 끌어 모은 청년 사업가들은 사회적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새로운 세기를 개척하는 영웅으로 대접 받았다. 앞 다투어 벤처 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은 인터넷이란 이름을 내세워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백 배가 넘는 프리미엄을 받고 투자 회사에게서 막대한 자금을 유치했다.
그도 그때 두 번에 걸쳐 투자 자금을 받았다. 1999년 여름이 지날 즈음 개인 투자가에게서 3억원을 투자 받았고 가을이 지날 즈음 기관 투자자에게서 40억원을 받았다. 열 배가 넘는 프리미엄을 얹어 받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회사에 비해서는 그렇게 고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1998년 초봄에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세운 그는 개인용, 기업용 소프트웨어 개발에 힘을 쏟았다. 첫해는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상황이 어려웠지만 해가 바뀌자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99년 여름을 지나면서 미국 나스닥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인터넷과 정보기술 관련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올랐다. 그의 회사도 그 덕분에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아 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 회사 초창기 동업자 둘을 포함해 인원 셋에 불과하던 회사가 어느새 열 명으로 스무 명으로 오십 명으로 불어났다.
그는 꿈에 부풀어있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서부로 몰려가 금광을 발견해서 벼락부자가 된 운 좋은 사람들처럼 그도 첨단기술 사업에서 금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는 날마다 사업 확장에 골몰하며 부서를 신설했고 직원을 새로 뽑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는 이삼년 안에 국내 증권 시장에 그 회사를 등록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데로만 한다면 목표 달성에 아무 이상이 없을 것이었다.
증권 시장에 회사를 등록한 다음 보유 주식을 내다팔아 막대한 돈을 챙겨서 그 중 일부로는 남부럽지 않은 번듯한 아파트를 구입하고 일부로는 경치 좋고 물 맑은 곳에 아담하고 그윽한 별장을 짓고 나머지는 신규 사업 자금으로 사용할 구상까지 세워놓았다. 그때쯤이면 그는 회사의 경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휴식 겸 해외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창업 준비에 골몰하고 있을 터였다. 창업전문가, 그가 듣고 싶은 호칭은 그것이었다. 항상 기존의 관념과 양식에 머무르지 않고 새롭고 창의적인 분야에 도전하여 피와 땀으로 성공을 일구어서 그 열매를 맛보는 것. 그것만큼 짜릿하고 흥분되고 피가 거꾸로 솟고 성취감을 주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해가 바뀐 2000년 2월, 미국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다. 신경제를 자랑해온 미국 경제가 금리가 뛰어 오르고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임금상승에 대한 우려와 함께 높은 국제유가로 인한 경제 교란, 인플레이션 압력이 상존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러한 경기 과열에 대한 우려와 함께 신경제에 대한 거품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인터넷 기업들의 실적 악화가 몰고 온 2월 나스닥 대폭락이었다. 3월에 접어들면서 첨단 기업의 주가 하락이 본격화되었고 4월에 이르러 반토막 나는 종목이 수두룩하게 등장했다. 미국의 한 교수는 첨단기업의 주가가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거품을 ‘폰지 사기’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종의 ‘피라미드형 이식사기수법’으로 ‘스스로에게 치는 사기’와 같으며 ‘성공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한 뒤 나중에 참여한 투자자의 돈으로 먼저 투자를 한 사람에게 투자이익을 주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정민도 이러한 사태변화를 지켜보며 그의 회사가 인터넷 사업에 몰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사실 인터넷 주식에 대한 고평가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무료 서비스하는 회사와 엄청난 할인을 해주며 물품을 판매하는 회사가 어떻게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지 그로서도 납득이 가질 않았다.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단순해보이기만 하는 인터넷 사업 뒷편에는 사업 규모에 따른 막대한 장비 투자와 상당한 관리 비용과 잘 갖추어진 오프라인 배급 망에 대한 요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첨단 주 폭등세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꼭 필요한 것이니 만큼 이러한 하락세는 한바탕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잠시 머물렀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신경제가 연착륙을 한 뒤 다시 완만한 성장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나름대로 논리적인 희망을 가졌다. 그도 거품이 잔뜩 든 일부 인터넷 기업이 정리되면 그의 회사와 같은 실속 있는 기업이 보다 대우를 받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날 자금담당 임원인 김 이사가 그를 찾아와 말했다. 푸석푸석한 피부와 피로하고 퀭한 눈의 김 이사는 습기차고 음울한 목소리로 그에게 충고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투자를 대폭 줄이고 자금을 보수적으로 운영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민은 전날 밤 동종 업계 사장들과 어울려 밤 늦게 까지 술을 마신 뒤라 벌겋게 달구어진 초점 없는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며 손을 홰홰 내저었다.
그건 안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공격적으로 나가야지요. ……그렇다고 김 이사의 말뜻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돈 씀씀이를 줄이는 것도 현실적으로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보수적 운영은 안됩니다. 곧 상황이 풀릴 것이니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용기를 내요. 용기를…….
기존의 공격적인 사업 방침을 바꾸고 싶지 않았던 그는 한결 치밀하고 현실성 있는 제품 개발 계획을 세워 추진하면서 불안감을 언뜻언뜻 내비치는 직원들을 다독거렸다.
3 추락
날카로운 금속성 파장이 고막을 찢을 듯 들려왔다. 그 맹렬한 소리는 정민의 눈꺼풀 뒤 망막에 맺혀있던 영상을 흐트려 놓았다. 그는 마취에서 풀려난 듯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 초점 없는 눈망울로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어린 아이 하나가 유행가의 고음 처리부분보다 한 옥타브 높은 음으로 빽빽 울어대고 있었다. 아이는 원한 맺힌 세상을 향하기라도 한 듯 자그마한 몸뚱이 안의 힘을 모조리 끌어 모아 울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아이 옆에서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복도에서 시끄럽게 뛰어다니며 고함지르는 아이를 불러 세워 노인이 꾸짖자 아이는 자지러질 듯 울음을 터뜨렸고 아이의 아버지가 노인에게 항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고함을 지르고 떠들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당신 아들이오?
노인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의 말에 기가 막혀 혀를 끌끌 차면서 꾸짖었다.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다니면 부모 되는 사람이 주의를 줘야지, 오히려 감싸주면 되나. 그리고 자네는 어미, 아비도 없어? 그렇게 노려보면 어쩌겠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버릇없기는 자네나 자네 아들이나 한결 같구만!
젊은 아버지가 험한 욕설을 퍼부으며 금방이라도 한대 칠 듯 노인에게 덤벼들자 주위 사람들이 끼어 들어 말리면서 아이 아버지의 무례를 나무랐다.
소란이 잦아들자 그는 지친 몸을 다시 등받이에 기대고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소란 때문에 잠시 끊긴 망막 안의 영상이 다시 이어졌다.
사태가 심각합니다. 비상 시를 대비해야겠어요. 벌써 문닫은 회사가 적지 않아요.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듯 울먹울먹하고 을씨년스러운 겨울 어느 날, 김 이사가 말했다. 그 해 겨울에 접어들자 세계 경제가 몹시 어려워지리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한 조짐은 정민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인터넷 기업의 자금 사정이 어렵게 되자 고객의 절반이 인터넷 기업인 그의 회사도 심각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정민의 회사는 그 해 매출 목표액의 60퍼센트를 겨우 맞추었고 적지않은 적자를 기록했다. 사업을 확장하느라 무리하게 장비를 구입하고 신규직원을 채용한 탓이었다.
해가 바뀌어 2001년이 되자 회사에는 투자 받은 자금의 절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주주들의 성화가 걱정되었다. 봄에 열릴 주주총회에서 기관과 개인 투자자들이 이러한 적자 실적을 보고 무슨 소리를 할 것인가. 적자 경영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과 동일한 신경제의 추락에 있었고 일부는 그가 주도한 무리한 사업 추진에 있었다. 그리고 주주들도 전자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 할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개인 투자자들은 기관과는 달리 주주총회가 닥치기도 전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인터넷에 개설된 장외시장에 주식을 내다팔려고 시도한 개인 투자자들은 투자 시보다 오분의 일 이하로 떨어져있는 주가를 보며 성화를 내었다. 한줄기 빛도 없는 암흑 같은 경기 전망에 조바심을 내며 불안한 심기를 드러내던 그들은 정민에게 수시로 전화해서 그렇지 않아도 걱정에 휩싸여있던 그를 괴롭혔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주식을 정민이 도로 사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는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개인에게 투자 받은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일부 개인 투자자중에는 질 나쁜 사채업자가 있는 데 그들은 돈을 잃을 것이 확실시되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투자 자금을 되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동종 업계 사장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개인 투자를 받은 S소프트웨어 사의 경우, 지난 연말즈음 사채업자들이 동원한 깡패들의 위협 때문에 적지 않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고 사장도 한동안 잠적했다고 했다.
2월 어느 날, 한동안 개인 투자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그를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다. 짧은 머리에 눈이 옆으로 쭉 찢어지고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 대 여섯이 비서를 제치고 사장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정민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그는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한기를 느꼈고 몸이 갑자기 굳어버린 듯 했다.
김 이사와 몇몇 임원들이 사장실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낯선 사내들은 문 앞에 서서 막았다. 사장실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은 정민을 덩치 큰 사내들이 빙 에워쌌다. 그들은 선량한 개인 투자자로 위장한 사채업자들이 고용한 하수인이었다. 건장한 사내들은 사채업자들이 그의 회사에 투자한 돈을 터무니 없는 이자까지 포함해서 다시 내어놓으라고 을렀다. 그는 그럴 수는 없다며 저항했다. 어떻게 한번 적법하게 이루어진 거래 뒤에 손해가 생겼다고 해서 다시 물려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좋은 말로 하면 안되겠어.
사내 하나가 말했다. 갑자기 주먹 하나가 튀어나와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헉, 그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모래를 한줌 삼키기라도 한 듯 목이 따끔거렸다. 호흡이 가빠지며 갑자기 관자 놀이가 지끈거렸다. 우욱, 그는 헛구역질을 했다.
다시 한 사내가 주먹으로 반대편 가슴을 가격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가슴을 움켜잡고 상체를 수그려 무릎에 밀착시켰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그는 겁에 질렸다. 밖에서 애타게 정민을 부르는 직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놈들 말대로 할 순 없어. 어떻게 세운 회사인데. 어떻게 고생하며 키운 회사인데 위협과 폭력 때문에 굴복한단 말인가. 죽일 놈들. 그냥 두지 않겠어. 내가 직접 어쩌진 못하겠지만 경찰에 신고해서 콩밥을 먹여줄 테다. 내가 독기를 한번 품으면 얼마나 지독한 놈이 될 수 있는지 너희들은 모른다. 그래 두고 보자.
사내 중 두엇이 사장실 밖에 나가서 직원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서운 눈초리로 사무실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부르르 떨던 직원들은 속수무책 넋을 놓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사내들은 그를 다시 위협했다. 만일 일주일 내로 주식을 도로 매입하지 않을 경우에 그와 그의 가족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고, 이번에는 이렇게 가볍게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그를 죽여버릴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순간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커먼 망토를 두른 죽음의 그림자는 세상의 구석구석에 있는 어둠을 옷자락에 묻혀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이 그 음험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죽음, 그는 사지가 와들와들 떨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제길, 이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단 말인가. 그는 영원히 계속 될 것만 같은, 그의 삶에 암울한 그림자를 끊임없이 드리워서 움쭉달싹 못하게 옭아맬 것 같은 그 짙은 어둠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던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암흑 속으로 빨아들이는 소름 끼치는 블랙홀 같은 공포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면 그들의 요구를 못 들어줄 것도 없을 듯싶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을 사주한 사채업자들을 경찰에 신고한다 해도 발뺌하면 그만이고 두어 번의 구타와 위협정도로는 그들 무리를 모조리 잡아들인다는 게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은 정민에게 보복을 가할 수도 있었다. 더 이상 이런 소름 끼치는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사내들이 돌아간 뒤 직원들이 들어와서 그를 위로했다. 축 늘어진 표정으로 애처롭게 눈물을 떨구는 직원도 있었다. 다치지 않았느냐고 묻는 그들에게 별일 아니니 안심하라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그는 오히려 직원들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들의 주식을 회사가 매입할 수는 없었다. 회사 규정상 회사가 주식을 매입하는 경우는 철저히 투자회사에게 보고하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그는 회사의 자금을 임시방편으로 빌려 주식 매입 건을 처리한 다음 메우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 이사의 반대를 무마하고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전달한 그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마냥 안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주식을 장외시장에 내다팔아 회사 공금을 벌충하려고 했지만 극도로 악화된 시장 분위기에서는 헐값으로라도 그것을 매입하려는 자는 없었다. 이십 여일 앞으로 다가온 주총으로 불안해진 그는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은행대출을 알아봤지만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그는 가수금을 정상적인 거래인 것처럼 위장해서 장부에 기록하라고 김 이사에게 지시했다. 주총만 잘 넘기면 이후에 자금 마련의 방법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기관 투자자를 대신한 몇몇 심사역들이 그의 회사로 들이닥쳐서 장부 열람을 요구했다. 그들은 통장에 남아있는 잔고와 장부 가액을 일일이 대조했다. 마침내 허점을 찾아낸 그들은 정민을 으르기 시작했다. 그를 부도덕한 기업가로 몰고 갔다. 전후 사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어느 정도 심정적으로 이해는 하지만 자신들도 투자 회사에 상황을 그대로 보고하지 않을 경우 어떤 징계조치를 받을 지 모르니 그냥 넘길 수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몇 일 뒤 평소 정민과 가끔 만나서 함께 술자리를 갖기도 하는 B투자 회사의 이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민의 회사에 공동 투자한 투자 회사의 심사역 회합에 나가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는 것이었다. 이 팀장은 전체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니 아마 이번 주총에서 대표이사 교체가 안건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했다.
그는 육중한 해머에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머리 속에 벌레가 기어들어갔는지 꼼지락 꼼지락하는 이물감이 느껴졌고 관자놀이가 날카로운 송곳에 찔린 듯 욱신거렸다. 껍질을 벗겨내지 않은 벼를 씹는 듯 밥알이 거칠거칠 목구멍에 걸렸고 그나마 억지로 삼킨 것마저도 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밖으로 게워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죽음과도 같은 피로가, 갯벌에 밀물이 한없이 밀려오듯, 시커먼 먹구름장이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듯, 발끝에서부터 세포를 아귀아귀 먹어치우며 장딴지로 무릎으로 허벅지로 엉덩이로 아랫배로 윗배로 가슴으로 목으로 얼굴로 머리끝으로 밀려왔다. 지난 3년 동안 잠자는 시간만 빼고 일에만 파묻힌 그는 제대로 된 휴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오랜 세월 파도에 밀려 바닷가에 퇴적한 모래처럼 발끝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여진 노곤함이 이제는 목 부위를 넘어 머리통속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무서운 무력감이었다. 어떠한 일도 정신을 집중해서 처리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지쳐있었다. 그 노곤함과 피로와 무력감과 절망을 모두 걷어내자면 한 일년 동안은 꼼짝도 않고 죽은 시체처럼 누워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키워온 회사인데 어느새 그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되어있었다. 주식 지분으로 보면 그의 것보다 외부 기관의 것이 훨씬 많았다. 아직까지는 그가 최대 주주였지만 기관 투자자들이 의견을 모을 경우 우호 지분을 모두 끌어 모은다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이제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쫓겨나야 한단 말인가, 그는 참담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답답하고 처량하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불신임안이 통과되었다. 김 이사와 몇몇 임원이 그의 편을 들었지만 대세를 뒤집기에는 부족했다. 투자 회사 대리인 중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이 팀장만이 입장이 곤란했던지 기권표를 던졌다.
신임 대표이사로는 영업 이사가 선임되었다. 정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투자 회사와 그렇게 까지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김 이사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주총 전에 영업 이사가 몇 번 투자회사 관계자를 만난 것 같았는데 김 이사는 영업 이사가 영업 지원을 부탁하러 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민이 대기업에서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던 영업 이사의 눈에는 난감함과 의기양양함이 뒤섞여 있었다.
정민은 자신의 불신임안 통과에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개최된 주총이었고 합법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표 대결이었다. 더욱이 대표이사 마음대로 회사 공금을 빌려간 것은 공금 유용이 될 수 있다는 은근한 위협도 있었다. 표면적으로 그는 회사 경영 실적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하는 외양을 갖췄다.
많이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닥치는 데로 들이킨 그는 3월의 꽃샘 추위에 때아닌 한기를 느꼈다.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오돌오돌 떨었다. 지금까지 의식 구석구석에 남아있던 스산한 어둠 조각이 날카로운 얼음 칼이 되어 육신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사정없이 빗금을 그어대고 있었다. 그는 난데없는 추위에 이빨이 딱딱 부딪혔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고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이틀 뒤 깊고 깊은 잠에서 일어난 그는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보유 주식을 매각하면 다시 다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에서 가수금으로 꾸었던 돈도 갚아야 했다.
그는 날마다 경제 상황이 나아지길 바라며 주식 시장 동향을 주시했다. 주가가 올라가면 그도 희망을 가졌고 곤두박질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기를 한달,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일전에 생각해둔 소프트웨어 개발에 착수했다. 가족과 친지에게서 3천만원의 사업자금을 빌려 집 근처에 손바닥만한 사무실을 구한 뒤 집기를 들여놓고 후배 두엇을 불러들여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불과 석 달 만에 자금이 바닥난 그는 개발 용역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반응은 냉정했다. 세월이 예전 같지 않았다. 경기 불황으로 기업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소프트웨어 도입과 용역을 미루고 있었고 그나마 시장에 나와있는 일거리조차도 수주 경쟁이 격화돼 아무런 실적 없는 구멍가게 같은 그의 회사로서는 어떠한 일도 따낼 수 없었다. 게다가 예전에 그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까지도 그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고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은 측은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위로의 말만 전할 뿐이었다.
정민이 사업 협력을 요청하러 방문한 어느 회사의 나이 지긋한 사장이 “전에 무슨 일을 하셨지요?” 하고 묻자 정민은 “전에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비슷한 사업을 하다가 경기 불황 때문에…….”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그 말을 괜히 했다는 자책감에 휩싸였다. 마치 자신이 구걸이라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비참하고 참담해졌다. 갑자기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자식처럼 이 황량한 세상에 혼자뿐이라는 외로움이 엄습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업을 정리했다. 희망 없는 미래를 기약하며 후배를 내보내는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고 얼굴에 슬픔 같은 어설픈 미소가 어렸다. 사무실을 빼고 받은 몇 푼 되지 않는 보증금이 그의 전 재산이었다. 여러 군데 취직자리를 의뢰를 해보았지만 전직 벤처기업 사장이었던 그를 직원으로 채용하려는 기업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며칠간 술을 마시고 먹은 음식을 게워내는 일을 반복하며 지냈다. 죽음과도 같은 절망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는 지난 봄 이후 자력으로 한 푼의 돈도 벌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할만한 일도 없었다. 그의 앞에 있던 꿈이 모조리 사라졌다. 무엇을 할 것인가. 구멍가게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는 자본도 부족하고 자신감도 없었다.
무슨 사업 아이디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한때 일 관계로 알았던 사람의 회사를 찾아간 정민은 그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집으로 돌렸다.
휑하니 부는 늦가을 바람에 생명을 다한 가로수 나뭇잎이 떨어져 보도에 뒹굴었다. 곳곳에 듬성듬성 상처난 몸을 웅크리고 스산하게 휩쓸려 다니는 나뭇잎이 그의 신세처럼 느껴졌다.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그는 고개를 수그리고 등허리를 구부린 채 거리를 걸었다. 십여 미터 앞에 한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검정 스커트 정장 차림을 한 단발머리의 단정한 젊은 여자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영아…….
그 길로 곧장 서울역으로 간 그는 대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4 만남
곧 대전역에 도착한다는 열차 안내 방송이 들렸다. 이어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늘어진 카세트 테이프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처럼 점차 길어졌다. 이윽고 멈춰선 역에서 내린 그는 대합실로 들어섰다. 대합실 문 앞에 지영의 환영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삼년 전 늦가을 대전역 대합실에서 만난 그녀의 첫인사였다. 대합실 구내 문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간 그에게 그녀가 말했다. 자그마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 단정한 옷차림에 단발머리의 그녀였다. 균형이 잘 잡힌 얼굴에서 이지적인 느낌이 묻어나왔다. 그녀는 도저히 31살인 그와 동갑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젊고 생기가 있었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피시통신의 채팅을 통해서 였다. 1998년 10월 어느 토요일 오후, 일을 마친 그는 한결 서늘해진 가을 바람이 땀구멍 사이로 숭숭 파고들어와 가슴속에서 휘휘 소용돌이 치는 것을 견디지 못해 대화 상대를 찾아 나섰다.
처음 대화를 나눈 상대는 지영의 사촌 동생이었다. 사촌 동생은 정민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옆에 있는 언니를 소개 시켜주었다. 타이핑이 서툰 지영을 대신해 동생이 언니의 말을 글로 옮겨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지영이라고 해요.
가상공간에서 처음 그녀를 만난 그는 가슴 한 구석에서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끄집어 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은 뒤 두 눈에 머금었다. 그 이후로 그는 지영이 직접 입력하는 스크린상의 서투른 글귀를 그 눈으로 받아들여 가슴에 차곡차곡 그리움을 쌓았다. 깊은 밤이면 그는 전화 수화기를 붙잡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느라 새벽 두세 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평소에 무뚝뚝하던 그가 그렇게 수다를 늘어놓을 수 있는지 그는 처음 알았다. 그는 그녀에게 찍어둔 사진이 있으면 부쳐주길 부탁했다. 어느날 사무실로 날아든 그녀의 편지 속 사진을 본 순간 그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 속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옅은 미소를 띤 그녀의 하얀 얼굴 사진을 동료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대전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차를 옆 주차장에다 세워뒀는데 저쪽으로 가실래요?
지영의 차는 그녀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백합처럼 새하얀 차였다. 그를 조수석에 태운 그녀의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 시내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었지만 참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피우는 담배는 그 속도감과 어울려 더욱 짜릿한 맛을 느끼게 해주곤 했던 것이다.
처음 보는 그녀였지만 어디에선가 자주 본 듯한 느낌이었다. 시원한 가을 바람이 묻어나는 은은한 목소리, 30여년을 떠돌아다니다 마침내 찾은 어머니 품처럼 따스하게 느껴지는 편안함, 정민을 쳐다보면서 그의 속을 꿰뚫고 그 뒤쪽까지 응시하는 듯 약간 초점이 멀리 잡힌 그윽한 눈망울. 손수 운전을 하며 그를 옆에 태우고 도심을 빠져나가 풍경 좋은 곳으로 향하는 그녀의 배려가 문득 고맙게 생각되었다. 자동차 내부 공간이 이렇게 사람 사이를 친근하고 정답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그는 자동차를 현대의 이기적 소유욕과 차가운 금속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탓해온 지금까지의 판단을 처음으로 수정했다. 그는 운전을 가급적 기피했다. 그는 한때 차를 운전하면서도 머리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한가지 생각에 몰두하는 바람에 큰 사고를 낼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한 자신의 덤벙거림이 애꿎은 사람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고부터는 운전석에 장착된 기계 덩어리를 무서워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 기계가 돌연 악마로 변해 주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 것만 같은 생각에 소름이 좍 끼쳤다. 그 공포의 본질은 객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라는 존재가 광대한 우주에 존재하는 객관화된 실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그로서는 기계 덩어리로 이루어진 객관적 형체가 분명한 자동차를 자신이 다룬다는 것은 자신도 곧 그 기계와 한 몸뚱이가 되어 객관적 실체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둡고 깊고 으슥한 자신만의 동굴에서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는 밖으로 나오길 두려워했다. 그 주관과 객관을 가르는 거대한 강에서 허우적댔다. 그것은 마치 과거나 미래로 통하는 기나긴 파장의 동굴 끝에 있는 검은 젤리 장막 앞에 서서 그 뒤의 완전히 새로운 실제 세계로 들어서기를 망설이며 두려움에 부들부들 떠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그러한 두려움 하나 없이 차를 잘 몰고 있었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치밀어 들어와 그의 몸에 열려진 작은 구멍으로 숭숭 들어와 혈관 속으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5 상처
정민은 구부정한 등허리를 곧추세워 초점 없는 눈으로 대합실 구내를 휘둘러보았다. 그녀는 없었다. ‘차를 옆에다 세워뒀는데…….’하고, 가을 바람을 듬성듬성 몸에 묻힌 그녀가 금방이라도 나타나 그윽한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며 말할 것 같았다. 그는 신탄진으로 가는 버스를 집어 탔다. 버스는 덜커덩거리며 차량이 드문 밤길을 내쳐 달렸다.
지지난해 겨울 뉴욕으로 출장을 간 그는 어느 허름한 호텔에서, 핵전쟁 이후 세계를 그린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차갑고 황량하고 어둡고 음울한 도시의 밤 풍경을 내다보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잘 지내. 대전을 떠나 신탄진으로 옮겼어.
정민의 전화를 평소 기피하던 그녀였는데 그때 그녀 목소리는 그를 일부러 배척할 생각이 없는 듯 착 가라앉아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쓸쓸한 뉴욕의 밤거리를 설명해주면서 잘 지내라고만 했다.
그 이후로 그는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전에 하던 일은 계속 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상처에 그녀가 어깨를 들먹이며 울지 않았을까.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랬다. 그는 그녀가 어지간한 충격과 아픔에도 견뎌낼 수 있는, 먼 곳을 바라보는 눈망울과 쓸쓸한 바람을 잔뜩 묻힌 가슴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왜 그리 자주 초점 없는 눈망울로 먼 곳을 응시하는지, 가끔 슬픔 어린 희미한 웃음으로 그를 쳐다봤는지를 알게 된 것은 두 번째 만남 직후였다.
군산 공항에 내린 정민은 그녀를 찾아 출구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녀는 단정한 옷차림에 다소곳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태운 그녀의 하얀 차는 금강에 걸쳐진 다리 위에서 멈춰 섰다. 심하게 불어대는 가을 바람이 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멀리 나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가지를 흔들어댔다. 얼음장같이 차갑고 높은 가을 하늘보다 짙푸른 강물이었다. 미친 가을 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는 사람들이 다리 난간을 붙잡고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구름 한 점 걸리지 않은 하늘은 우주의 끝과 맞닿아있는 듯 푸르고 높았다. 살갗을 에어오는 바람에 한순간 그는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느꼈다. 미친 바람이 그를 휘둘려서 그의 마음까지, 눈물샘까지, 감각기관을 통제하는 신경까지 미치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곁에 그녀가 있었다. 그토록 몸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의식을 모조리 풀어헤치고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픈 그의 마음을 꼭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옆에 있었다.
그녀 손은 그의 손 절반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아담하고 작았다. 그 가녀린 손을 대천 해수욕장 끄트머리에 있는 제방에서 걸어 나오며 그가 잡았다. 그녀는 순순히 손을 잡혀주었다. 그녀의 손은 그의 손 바닥 안에 쏙 들어왔다. 그녀의 손등은 한창 젊어보이는 외모와는 정반대였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은 손이 말해준다고 했던가. 이따금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쓸쓸한 두 눈에서 묻어나는 외로움이, 상처 입은 가슴 여기저기 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손등에 모여 쭈글쭈글한 계곡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그는 가끔 농담조로 ‘쭈글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그녀는 그를 얼굴이 크다고 해서 ‘얼큰이’라고 놀렸다. 그녀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입은 상처를 쭈글쭈글한 손등에 가지고 있었고 그는 그러한 징표를 큼직한 얼굴 곳곳에 묻히고 다녔다.
어느덧 해는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고 사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소금기를 머금은 비릿한 바닷바람이 그들의 어깨를, 다리를, 가슴팍을, 얼굴을 물어뜯었다. 두 사람은 미친 바람을 피하기 위해 등허리를 살짝 구부렸다. 그들 앞쪽에 연인 한 쌍이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고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들도 연인처럼 보일까, 그는 생각했다. 짙어가는 어둠 속에 어둑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방과 남녀 두 쌍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따뜻해.
그녀의 말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새삼 깨달았다.
참 해맑고 좋은 사람, 당신에겐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어.
정민의 말에 그녀가 묘한 여운을 남겼다.
글쎄. 날 속속들이 알고 나면 그 생각이 달라질걸.
그날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녀에게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나, 지영인데…… 아까 밝히지 못한 말이 하나 있어…… 나, 전에 결혼 한번 했어.
그는 그건 상관없다고 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문제지 과거 경력이 무슨 문제가 되겠냐고 했다. 그게 문제가 되면 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 하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녀가 그날 바닷가에서 가슴에 안은 아픈 상처를 그에게 말할 것인가를 두고 마음을 졸였을 그녀를 생각하니 목이 따가웠고 눈시울이 메웠다.
그녀와 그는 두 번째 만남 이후로 더욱 가까워졌다. 날마다 책상 앞에서 채팅을 했고 밤만 되면 전화통을 붙잡고 한두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 밝았고 생기에 넘쳤다.
무거워.
그가 묵직한 팔을 그녀 어깨 위에 올렸을 때 그녀가 말했다. 무거워……. 금방이라도 목울음을 터뜨리며 들먹일 것만 같은, 모진 세월의 슬픔에 깎여버린 앙상하고 가냘픈 그녀의 어깨는 그의 무거운 팔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쑥스러워.
지영은 짐짓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정민이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려고 할 때였다. 그녀는 평소의 활달하고 당찬 모습을 걷어서 어디에 숨겨버리고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채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혀에서 얼음물 같던 금강의 푸른 물 맛이,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한겨울 산골에 새하얗게 내린 눈 맛이, 어머니의 달콤한 젖 맛이, 가을 바람이 잔뜩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때의 상큼함이, 세상과 마음의 벽을 쌓고 지내온 세월동안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못한 그녀의 달콤한 정(情)이, 그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는 그 감미로움의 원천을 한입 베어 물었다.
정민 씨, 한 달에 얼마 벌어?
그녀가 현실적인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그 구체적인 수입을 물었다.
남들만큼.
그 정도면 됐어.
뭐가 됐단 말일까. 그만하면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뜻일까, 그는 생각했다.
나, 정민 씨랑 살게 되면 서울에 내 차 가져가도 돼?
자동차는 사람을 슬프게 할 수 있어. 당신이 차를 타고 다니면 내가 날마다 당신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기도하면서 가슴을 졸여야 해.
6 이별
버스는 어둠의 장막을 찢어발기며 검은 먹물을 풀어놓은 도로를 내달렸다. 정민은 지영의 모교인 D대학 앞에서 내렸다. 학교 정문 좌우, 도로 건너 편으로 호프집과 노래방, 커피숍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 중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간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을 망설인 끝에 전화를 했다. 전화 신호음이 가는 동안 그는 천근만근 쇳덩이를 가슴팍에 올려둔 것처럼 답답했고 극도의 긴장감 때문에 핸드폰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호가 여러 번 간 뒤에야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나야, 정민. 보고 싶었어.
누구셔요? 전화 잘못 하셨어요.
그녀의 전화 번호가 분명했고 그녀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소리 파장의 끊김이 없는, 당당하면서도 은은하고 고저녁한 그 목소리. 그러나 그녀는 그와의 통화를 거부했다. 그는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목울음을 울었다. 그녀의 차가운 반응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그의 가슴 깊숙이 박혔다. 그는 그녀의 핸드폰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그녀가 올 때까지 모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부끄러워.
그 미친듯한 가을이 가고 겨울로 접어들어 처음으로 그와 그녀는 몸을 섞었다. 대천 해수욕장 앞 모텔에서였다.
그녀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그가 이런저런 이유를 설명하거나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그의 발길이 가는 대로, 분위기대로 자연스럽게 흘러 가기면 하면 되었다.
그날 그녀는 지금까지 외부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단단하게 감싸온 껍질을 벗으면서 몹시 부끄러운 듯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나, 가슴 작은 데 괜찮아?
응.
그녀의 가슴은 낮은 둔덕으로 그 정상에 붉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내 몸에 흉터 있는데 괜찮아?
응.
그녀의 허벅지에서 옆구리까지 기다란 수술 자국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에 그보다 짧은 흉터 자국이 닥치는 데로 그은 빗금처럼 남아있었다.
대학 3학년 때 같은 철학과 선배를 만나 사랑에 빠진 그녀는 그 해 곧바로 결혼을 해서 다음해 아기를 낳았다. 처음 별다른 문제가 없던 그녀의 결혼 생활은 아이를 낳고부터 달라졌다. 가족 부양하는 일을 등한시하던 남편은 자주 술을 마셨고 그녀의 사생활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눈덩이처럼 의처증을 키운 남편은 그녀를 거세게 몰아붙였고 급기야는 그녀에게 몽둥이를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병원에 실려가서 수술을 받은 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머지않아 남자와 이혼했다. 아이는 남편쪽에서 맡았다.
바닷가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녀는 어디인지 모를 먼 곳을 한동안 응시했다. 아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결혼해.
그는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 글씨를 썼다. 사랑해, 라고 적고 싶었지만 그녀를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는지 그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한구석에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는 이번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곧장 결혼해서 살림을 차리고 싶었다. 알 수 없는 어둑한 그것이 그에게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음 가을에 결혼을 하자고 했다. 한번 결혼 생활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은 그녀는 몹시 신중을 기했다.
우리 아이는 가지지 말자.
그녀는 새 생명을 잉태하는데 강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몸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녀는 다른 곳에서 자라고 있을 자신의 아이를 잊은 듯 했다. 어쩌면 아이 때문에 일찍 이혼하지 못한 그녀 스스로를 탓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아니면 먼저 낳은 생명을 두고 다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그녀 몸으로 낳는다는 것이 자신을 더욱 애처롭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지방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넣어 지영과 머지않아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영이가 전에 결혼경력이 있음을 알렸다. 어차피 살다 보면 드러날 사실이라 생각했고 아버지가 모른다고 하더라도 평생 그것을 숨기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눔아, 아버지 죽는 꼴 보고싶니? 네 어머니가 살아있었으면 펄쩍 뛰었을 거다. 내 죽고 나서 무슨 낯으로 네 어머니를 보니. 하고 많은 여자 중에…….
아버지와 한바탕 전화로 싸우고 난 뒤 그는 사실을 밝힌 것을 후회했다. 아버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냥 모른 척 숨기고 결혼해버리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 뒤에 사실이 밝혀진들 어떠하랴. 아니,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아들로서 할 짓은 아니지만, 지영을 직접 보지 못한 아버지 눈을 어떻게 속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정민의 마음에 생긴 불안감과 걱정, 그로 인한 초조함이었다. 그녀의 몸에 있던 끔찍한 상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만일 결혼한다면 그녀의 몸에 있는 상처를 평생 보며 살아야 할 것이었다.
내 상처를 건드리면 안돼.
언젠가 그녀가 한 이 말을 평생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이를 가지지 말자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하고 정민은 생각했다. 어쩌면 살아가면서 그녀의 전남편과 아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검은 먹구름장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전남편이 가혹하게 학대한 그녀의 몸이 한없이 애처로웠다. 정민이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엄청난 상처를 입은 그녀를 평생 따뜻하게 맞아줄 만큼 자신의 마음이 넓을까, 그는 생각했다. 그녀의 몸에 남은 전남편의 수많은 자국. 그는 그게 싫었다. 게다가 그녀의 몸 속으로 한없이 들락거렸을 전남편의 몸, 그녀의 온몸을 훑어갔을 그 독재자의 축축한 혀. 그가 무섭도록 싫은 것은 그것이었다. 그녀와 결혼을 하더라도 어쩌다 화난 마음에 그녀의 상처를 건드릴 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가슴속에 한 움큼 회한을 안고 살아온 그녀는 그런 정민의 반응을 견딜 수 없어 할 것이다. 언제 깨어질지 모를 살얼음판을 걷는 것, 그녀와 결혼한다면 그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녀와 신정 휴가를 함께 보내고 돌아온 그는 연휴가 끝난 다음날 그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나야, 왜 전화 안 해? 하루에 한번씩 하기로 했쟎아.
…….
뭐야? 말을 해봐. 무슨 일 있어?
…… 아버지가 우리 결혼을 반대하셔.
뭐? 그걸 말씀 드렸어?
그렇게 됐어. 미안해.
그는 이기적인 마음에 그녀와의 결합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야기해서 미안해, 그리고 내 마음이 불안해져서 미안해.’란 의미로 한 말을 그녀는 ‘너와 결혼할 수 없게 되었으니 미안해’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세상과 벽을 쌓고 살아온 세월의 끝 자락에서 힘겹게 마음의 문을 연 그녀에게 정민의 말은 가슴을 찢어발기는 비수 그 자체였다.
그 일 이후로 그는 여러 번 그녀에게 전화를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차가웠다. 전화를 받지 않을 때가 태반이었고 어쩌다 전화를 받으면 “할말 있으면 해봐…… 없어? ……그럼 끊어.”가 전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에 남아있던 그녀에 대한 불안감은 점차 사라지고 그리움이 목 위로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그녀를 만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철저히 잊어주기로 한 것 같았다.
7 무(無)
그녀를 기다리다 지친 그는 택시를 타고 대천 해수욕장으로 갔다. 그 바닷가였다. 그가 그녀에게 ‘결혼해’라고 모래밭에 손가락 글씨를 쓴 곳이었다. 암흑이었다. 바다와 하늘이 짙은 어둠에 묻혀 하나가 되었다.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끝이었다. 저 암흑의 세계로 한없이 걸어가면 우주 공간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우주공간에서 블랙홀 같은 어둠을 싣고 달려온 파도가 백사장을 날름날름 먹어치우며 쉬익, 쉬익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영아아.
그는 그 시공간을 향해 아랫배가 당겨 아파올 정도로 힘껏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는 얼마가지 못하고 쉬익, 쉬익하는 악마 같은 파도 소리에 먹혀버렸다.
그는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삼년 전 그녀와 함께 그곳에 온 흔적을 어둠 속에서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얼추 천 일전 그가 그녀와 함께 왔던 곳이 이곳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의식 한 자락에 남아있던 물컹한 기억의 원형질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그의 몸 세포를 모조리 먹어치우고 있었다. 과거의 시간을 지금 당장 되돌려놓는다면 그와 그녀가 여기에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는 생각했다. 그녀와 그 사이에 수천수만 조각으로 얇게 칼질해놓은 아득한 시공이 놓여있었다.
그는 어둠이 잔뜩 묻은 모래밭에 손가락 글씨를 썼다.
사랑해.
그는 해변으로 오는 길에 근처 상점에서 사온 술을 꺼냈다. 그는 울렁거리는 속과 날카로운 바늘로 관자놀이 신경을 꿰는 듯한 고통을 물리치려고 소주를 병째 들이켰다. 낮에 집어넣었던 음식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왔다. 우욱, 하고 그것들을 게워내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이대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다시 호흡이 돌아온 그는 속이 허전함을 느꼈다. 그는 내장을 모두 들어내고 속을 짚으로 채워넣은 박제가 된 기분이었다. 몸에 뚫린 구멍으로 찬 바닷바람이 쑥쑥 기어들어와 그 지푸라기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는 껍데기만 남은 몸 속으로 술을 쏟아 부었다. 텅 비어버린 몸뚱이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바람이 잠시 잦아들었다. 그러다 그는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정민 씨…….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정민 씨, 일어나요…….
그 소리가 더욱 뚜렷해졌다. 그는 눈을 비비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영이 암흑 한가운데서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우리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요.
그는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지르려다 멈칫했다. 그가 바라보던 곳에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5년 전에 죽은 어머니가 서 있었다.
민아아…….
그의 어머니가 확실했다.
어머니이.
그는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그는 어느새 어린 아이가 되어있었다. 앞으로 다가가도 어머니와의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천천히 그의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어머니 품속과 똑같아.
엄마아.
그는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계속 걸어갔다. 뒤뚱뒤뚱, 아장아장. 문득 그에게서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그는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그가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온 몸에 전달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따스함 뿐이었다. 바닷물이 양수가 되고 어머니의 손짓이 탯줄이 되어 그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깊숙이,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