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화와 근대기 사진 속 조선의 목수와 목가구
목가구는 자연환경과 인문적 환경을 기반으로 한 의식주 생활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인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목기의 제작이 발달하였습니다.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했던 옛 가구들은 잦은 전란과 온돌의 과열로 인한 화재, 망자의 기물을 소각하는 관습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현존하는 것들은 불과 100~200여 년 전의 것들입니다. 이들 조선시대의 가구 또는 그와 유사한 양식의 가구들이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아낌을 받고 있죠.
우리나라의 전통 목가구를 연구하고 감상하는 방법은 문헌조사와 목가구의 실측, 관찰, 비교, 감상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방법 외에 조선후기의 풍속화나 개항기의 풍속화 및 외국인이 촬영한 우리 나라 풍속 사진 등에서도 목가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후기 풍속화의 거장인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와 신윤복(申潤福, 약 1758~1813 이후)의 그림을 비롯하여 조선 말기와 20세기 초에 활동한 김준근(金俊根, 19세기 후반)의 풍속화, 개항기에 외국인이 찍은 다양한 사진과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등 외국인 화가가 그린 그림 속에서 조선의 목수, 그리고 조선인의 삶과 함께 한 목가구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조선의 목수
나무를 다루는 장인을 일반적으로 목수라 하며 이 목수에는 집을 짓는 대목장(大木匠)과 가구나 문짝을 짜는 소목장(小木匠)으로 분류를 하고, 또 나무 그릇을 만드는 장인은 별도로 갈이장이라 하여 구분합니다. 대목장․소목장․갈이장의 구분은 중국 송나라의 이계(李誡)가 1103에 편찬한 『영조법식(營造法式)』에 나타나 있습니다. 전통한옥을 짓는 대목 이외의 일반 목수들은 나무를 다루는 모든 일을 하고 있으며, 일반 목수들이 나무를 다루는 작업은 크게 5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전통기법으로 가구․기물을 만드는 목공예, 목조각, 갈이작업
둘째, 가구제작
셋째, 창호제작
넷째, 인테리어 작업
다섯째, 가구나 문짝의 수리를 업으로 하는 목공작업 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 도 01) 김홍도, 기와이기, 18세기 후반, 지본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부터 나타나며 조각장․나전장과 더불어 중상서(中尙署)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에서는 일괄하여 목장(木匠)이라 하였습니다. 조선 초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 계층의 소용으로 제작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잡다해져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지방에서는 목수를 초치해서 필요한 기물을 제작하는 자급자족 형태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목가구는 일정한 규격품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 도 01-1) 김홍도, 기와이기 부분
▲ 도 01-2) 김홍도, 기와이기 부분
단원 김홍도가 그린 <기와이기>(도 01)는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리는 목조 건축의 현장을 그렸습니다. 허공으로 던져 올린 기왓장과 그것을 받으려는 동작 등 공사장의 현장감이 생생하죠. 이 그림에는 두 명의 목수가 등장하는데, 한 명은 기둥 옆에서 먹통을 들고 수직을 잡느라 한 쪽 눈을 찡긋 감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비스듬하게 올려놓은 목재에 대패질을 하고 있습니다(도 01-1, 01-2). 손잡이가 달린 대패를 바깥 방향으로 밀어내는 전통 방식의 대패질입니다. 이 두 명의 목수는 아마도 대목장에 해당할 것입니다. 대패질하고 있는 목수의 옆으로는 자귀와 톱, 정자자 등 목공구가 놓여 있습니다.
대패질과 톱질하는 장면은 김준근의 그림이나 흑백 사진 속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김준근은 조선말기에서 근대기에 활동한 풍속화가로 호는 기산(箕山)입니다. 원산․부산․제물포 등 개항장에서 풍속화를 제작하여 서양인에게 판매했죠. 김준근의 풍속화는 간략한 선묘와 채색으로 이루어졌으며, 같은 소재를 반복적으로 그렸습니다. 이는 여러 범본을 놓고 자유로이 조합하면서 공동제작방식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도 02) 김준근, 목공(木工), 1895년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도 03) 김준근, 목혜공(木鞋工), 1895년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도 04) 김준근, 목기제조(木器製造), 1895년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김준근이 그린 목수의 모습은 <목공(木工)>, <목혜공(木鞋工)>, <목기제조(木器製造)> 등 세 점의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도 02, 03, 04). <목공>(도 02)은 톱으로 작업대 위의 널빤지를 자르고 있는 목공의 모습입니다. 땅바닥에는 자, 먹줄, 대패, 자귀, 끌, 칼 등이 널려 있습니다.
<목혜공>(도 03)은 두 명의 목혜장이 목혜 즉 나막신을 만드는 모습입니다. 목혜의 최초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평판에 끈을 하였던 것이 차츰 사방에 울을 하게 되고, 굽을 달아 극(屐)의 형식으로 발달하여 요즈음 볼 수 있는 나막신이 되었습니다. 평극에 울과 굽을 다는 것은 비올 때 발에 물이나 진흙이 튀어 들어가는 불편을 막기 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막신의 재료는 다양한데 특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쳤습니다. 그림에서 두 장인들은 호비칼로 굽이 달려 있는 신의 속을 파고 있는데, 대개 나막신은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다. 바닥에는 나막신의 재료가 될 통나무가 있고 톱, 까뀌, 소도(小刀) 등의 공구가 흩어져 있다. 나막신은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는데 굽이 높아서 비나 눈이 올 때는 좋으나, 무겁고 활동적이지 않아 말을 탈 때나 먼 길을 갈 때는 신지 않았습니다. 맑은 날에도 많이 신었으며, 특히 어린 남자아이가 신었던 채극은 진신으로서 뿐만 아니라 마른신으로도 애용하였습니다.
<목기제조>(도 04)는 두 명의 목기장이 갈이틀과 갈이칼로 목기(木器)를 만드는 모습입니다. 홍두깨 같은 굴대가 가로질러 놓인 갈이틀의 한쪽 끝에는 어린 소년이 가죽끈을 감아 끈의 양쪽 끝을 두 손으로 번갈아 잡아당겨 굴대가 쉴 새 없이 앞뒤로 돌게 하고 있고, 목기장은 굴대의 다른 한 끝에 갈릴 재료를 단단하게 끼워 놓고 굴대가 도는 대로 목기 모양을 깎아내고 있습니다. 바닥에는 완성된 목기와 인두 및 숯돌이 보입니다. 목기로 특히 유명한 지역은 남원인데, 특유의 향기,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양, 그리고 단단한 목질과 벗겨지지 않는 옻칠 등으로 조선 초기부터 명성이 나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궁중 목기의 반 이상을 진상하였다고 합니다. 목기제품은 대부분 제기(祭器)이고 그 외에 찬합․찻잔․상․쟁반 등 각종 공예품과 바릿대도 생산되었습니다.
▲ 도 05) 톱질, 20세기 초, 사진
▲ 도 06) 톱질, 20세기 초, 사진
개항 이후 외국인이 찍은 흑백 사진 몇 점에서도 목수들의 작업 장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도 05, 06).
톱질하는 장면 중 첫 번째인 <톱질>(도 05)은 네 사람이 톱 하나로 통나무를 자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 사람은 서고 반대편에는 세 사람이 앉아 발을 펴고 힘 쓰기 편한 자세로 톱을 잡아당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산에서 벌채된 나무는 이런 방식으로 치목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두 번째 톱질 장면 사진은 나무결 방향으로 켜는 작업 장면입니다(도 06). 비스듬하게 눕힌 통나무 아래 나무 기둥을 받치고 한 명의 목수는 나무 위에서, 다른 한 명의 목수는 아래 쪽에서 톱을 마주잡고 톱질을 하고 있습니다.
▲ 도 07) 장농 공방, 일제강점기, 사진
일제 강점기의 모습으로 보이는 사진 중에는 <장농 공방>(도 07)이 있습니다. 한옥의 기둥에 ‘각종장농제조소(各種粧籠製造所)’라는 간판을 붙이고 마루에서는 목수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뒷 편으로는 장석까지 마무리하여 완성된 장이 서너점 보입니다. 살림집을 공장으로 쓰면서 주문에 의해서 명맥을 유지하던 소목장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 도 08) 상 직인, 20세기 초, 사진
<상 직인>이라 명명된 사진 속 소반을 만드는 목수들 뒤로 개다리 소반과 책상반들이 보입니다(도 08). 그 옆을 자세히 보면 기다란 톱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사진 왼편의 수는 상판을 다듬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먹선을 그어놓은 목판이 작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른편의 목수는 다리 제작을 위해 나무를 다듬질하고 있습니다.
· 조선인의 삶과 함께 한 목가구
가구(家具)의 사전적 의미는 집안 살림살이에 쓰이는 기구․집물, 목물을 주로 해서 세간․책상․의자․찬장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삶을 여위하는데 필요한 기구․기물 등의 살림살이가 가구죠. 우리나라에서 가구라는 용어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현재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기구(器具)․기용(器用)이란 단어가 쓰였습니다. 조선의 목가구는 그야말로 조선인의 삶에서부터 죽음까지 일생과 함께 했습니다.
▲ 도 09) 전(傳) 김홍도, 돌 잔치(初度弧筵), 18세기, 비단에 담채, 53.9×35.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傳)하는 풍속화 중 일부에 돌 잔치 모습이 있습니다(도 09). 아기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날에는 첫돌을 기념하고 아기가 장차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 날 남자 아이는 보통 남색 쾌자에 복건을 여자 아이는 색동치마저고리에 굴레나 조바위를 썼습니다. 돌옷에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이나 ‘수복다남자(壽福多男子)’ 등의 문구로 장식하여 아기의 건강, 장수, 복을 기원했습니다. 돌상에는 건강, 장수, 재물, 출세 등을 기원하는 여러 가지 물건을 놓고 마음대로 골라잡게 하여 아이의 장래를 점쳤죠. 이 그림에서는 온 가족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가 돌상 위에 놓인 여러 가지 물건을 고르는 돌잡이 행사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 도 10) 돌상(原盤), 19세기, 나무에 칠, 지름 44cm 높이 1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돌상(原盤)>은 천판이 넓고 높이가 낮은 형태로 잔치 때 음식을 차려 놓던 소반의 기본 형태입니다(도 10). 이러한 소반은 두리반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잔칫상으로 사용되다가 점차 돌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천판을 원형이나 8각, 12각으로 만들어 아기가 모서리에 다치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돌상에는 잔치 음식뿐만 아니라 쌀, 국수, 대추, 흰색 타래실, 청홍색 타래실, 붓, 먹, 벼루, 책, 활, 돈, 자와 같은 물건이 준비되었습니다. 이러한 음식과 물건들은 아이의 무병장수, 자손번영, 부귀, 재주, 출세 등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 도 11) 생일 기념 사진, 1932년,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과일과 떡을 비롯하여 풍성한 음식이 사각형과 원형의 상 위에 차려져 있습니다(도 11). 생일을 맞아 축하의 상차림을 앞에 두고 남자 아이가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뒤로 여덟 폭의 책거리 병풍이 둘러쳐 있고,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이 차려진 것을 보면 부유한 집안의 귀한 후손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사진은 1932년 조선총독부가 평양의 생활을 조사하면서 남긴 것입니다.
▲ 도 12) 김홍도, 서당(書堂),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
▲ 도 13) 김준근, 학교선생(學校先生), 1895년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남자 아이들이 조금 자라 6~7세가 되면 동네 서당에 나가 천자문과 사서삼경을 배웠습니다. 김홍도가 그린 <서당>에는 사방관을 쓴 훈장님과 학동들의 수업 장면이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훈장님 주변에는 벼루가 담긴 연상(硯床)과 서안(書案)이 놓여 있습니다(도 12). 김준근의 풍속화에도 김홍도 풍의 서당 그림이 있는데, 제목은 <학교선생(學校先生)>입니다(도 13). 제목에 나타난 학교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서당 대신 사용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세기말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교육기관 설립 이후 서당이라는 용어와 함께 통용되었던 듯 합니다. 서당은 16세기 중엽 중종 이후부터 반상의 구별을 비롯한 유학적 질서를 향촌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확산되었기 때문에 교육과정은 유교적 덕목이 일관되게 강조되었습니다. 서당은 설립에 필요한 기본재산이나 법적인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존폐가 자유로웠으며, 필요에 따라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서당을 유지, 경영할 수 있었습니다. 서당의 선생인 훈장은 직업적인 유랑지식인이거나 마을의 유식한 촌로 가운데서 초빙하거나 선택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대우는 양식으로 쓸 쌀과 땔나무, 그리고 의복 정도였습니다.
▲ 도 14) 나카무라 킨조(中村金城), 촌부자(村夫子), 1905년경
김홍도 및 김준근의 풍속화와 흑백 사진 속에서 본 서당의 이미지는 나카무라 킨조(中村金城)가 그린 풍속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도 14). 나카무라 킨조는 일본의 가슈(현재의 이시카와현(石川縣) 남부)의 가나자와(金澤) 사람입니다. 그는 1902년에 대한제국 궁내부(宮內府)의 고문이었던 가토 마쓰오(加藤增雄)의 집에 머물렀으며, 1905년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그 동안 그린 백여 점의 그림을 책으로 내고자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1905년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 도 15) 나카무라 킨조, 결혼(結婚), 1905년경
나카무라 킨조가 그린 <결혼(結婚)>이란 그림에서는 커다란 의례용 상을 앞에 두고 혼례식을 치르는 신랑 신부가 그려져 있습니다(도 15).
▲ 도 16) 결혼식, 1903, 사진
▲ 도 17) 신행길, 20세기 초, 사진
1903년경에 찍은 결혼식 사진은 신랑과 신부가 절을 하는 장면입니다(도 16). 큰 상 위에는 백자 항아리 두 개가 올려져 있고, 아래쪽 사각형 소반에는 맥주병 두 개가 올려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혼례식을 마치고 시집으로 가려는 가마를 잡고 친정 어머니는 떠나려는 딸에게 무엇인가 자상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도 17). 가마의 앞 뒤에는 물건을 담은 함과 궤가 놓여 있습니다.
▲ 도 18) 앙리 쥐베르(Henri Zuber, 1844~1909), 선비의 방, 1873년, 삽화
다음으로는 서양인이 보고 그린 주택과 가구의 모습입니다.
1866년에 두 차례의 강화도 원정에 출정하였던 프랑스 해군 장교 앙리 쥐베르(Henri Zuber, 1844~1909)가 스케치한 선비의 방입니다(도 18). 이때 강화도에서 스케치한 삽화 10컷과 종군기가 1873년 『르 투르뒤몽드(Le tour du monde)』에 소개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그 중 하나죠. 방 안에는 이층책장이 놓여 있고, 상투 차림의 선비가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씨를 쓰거나 사람을 그린 종이가 벽면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모습과 천장 서까래와 시렁, 앞뒤의 문, 작은 창호, 방바닥까지 자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 도 19) 엘리자베스 키스, 한옥 내부, 1920년대
영국인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와 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Elspet K. Robertson Scott)은 자매입니다. 이들은 1919년 3․1운동 직후에 한국을 여행하면서 언니 엘리자베스는 그림을 그리고 동생 엘스펫은 글을 썼습니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한옥 내부의 풍경입니다(도 19). 대청마루 위 사각형의 고동색 소반 앞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가장의 뒤로 노란 두석 장식이 빛나는 이층장과 청화백자 항아리를 쌓은 뒤주가 보이고, 열린 문 사이로 안방의 화려한 장과 병풍 등이 보입니다. ‘자연유취(自然幽趣)’라 쓴 부엌 문 위 선반에는 소반이 거꾸로 놓여 있고, 댓돌 위 신발 두 켤레 중 한 켤레는 나무를 깎은 나막신인데, 한 짝이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동생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여유 있는 집의 내부 풍경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줍니다.… 한국에서는 방 출입문 흰 벽(앉아 있는 여자의 양쪽 벽)에 값싼 종이에 그린 전통적인 문양을 붙이는데, 처음 붙였을 때는 색깔이 유치하지만, 시간이 지나 퇴색하면 아름답고 부드러운 색으로 변한합니다. …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으며,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사랑방 나무 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킵니다.
▲ 도 20) 농가 안뜰에서의 점심, 20세기 초, 사진
▲ 도 21) 신윤복, 선술집(酒肆擧盃), 18세기 후반, 지본담채, 28.2×35.2cm, 간송미술관 소장
▲ 도 22) 김홍도, 담배썰기, 18세기 후반, 지본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도 23) 신윤복, 무녀신무(巫女神舞), 18세기 후반, 지본담채, 28.2×35.2cm, 간송미술관 소장
여름철이면 농촌에서는 안뜰 마당에서도 식사를 했습니다. 멍석을 깐 위에서 소반에 오른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도 20). 가장과 장남이 먼저 식사를 끝낸 다음 부인과 아이들이 그 상을 물려받는 시절이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장소에도 목가구는 빠질 수 없는 일상의 도구였죠. 신윤복(申潤福)이 실감 나게 그린 주막 풍경에서는 그릇이 놓인 찬탁의 측면을 비롯하여 뒤주와 찬장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도 21).
김홍도가 그린 <담배썰기>에는 연초를 자르는 풍경과 함께 잘린 연초를 보관하려는 듯 커다란 궤(櫃)가 그려져 있습니다(도 22).
신윤복의 그림 <무녀신무(巫女神舞)>를 보면 무당이 굿을 하는 굿판의 한 켠에 소반이 놓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도 23).
▲ 도 24) 김준근, 종명초혼(終命招魂), 1895년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김준근의 풍속화를 보면 사람이 죽고 난 후의 의식에도 목가구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있습니다. <종명초혼(終命招魂)>은 남성 한 명이 죽은 사람의 저고리를 들고 초혼하는 모습입니다(도 24). 초혼은 유교식 상례 절차 중 첫 번째 의식인 초종례(初終禮)의 하나입니다. 사람이 숨을 거두면 곡을 하고, 이어서 죽은 사람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휘두르면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불러 초혼(招魂)을 합니다. 이 때 ‘사잣밥’을 마련하는데 대개 사잣밥은 밥 세 그릇, 짚신 세 켤레, 동전 세 닢을 상이나 채반에 담아 대문 밖 바로 옆에 놓는 상을 말합니다. 또는 그림에서처럼 망자의 속적삼을 오른손에 들고 사잣밥 앞에서 복혼(復婚)을 한 다음 지붕 꼭대기에 올려놓기도 합니다. 그림은 초혼의식에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초혼을 하는 사람이 양손으로 옷을 들고 있고 상 위에는 촛대와 세 켤레의 짚신, 술잔 3개, 밥그릇 1개, 기타 그릇 등이 있습니다.
▲ 도 25) 제삿날, 20세기 초, 사진
죽은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 의례의 목가구는 엄숙한 분위기에 맞게 제작되었습니다. 사진은 제상을 차려놓고 그 앞에서 재배하는 모습입니다(도 25). 선조를 공경하는 것은 유교 사회이던 조선시대에는 최고의 도덕이었죠. 엄격하고 복잡한 절차에 따르지만, 이제는 이것도 많이 간략화되었습니다. 열지어선 제상 앞에 각각 향상이 하나씩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도자기로 만든 주병이 보입니다. 상 위에는 음식과 함께 촛대가 놓이고 그 뒤로는 병풍이 둘러쳐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장수하기를 염원합니다. 그리하여 평균 수명이 현재보다도 길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성대한 환갑잔치나 회혼례 등을 통해 장수를 축하하였는데, 이 자리에서도 빠지지 않고 목가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도 26) 환갑잔치, 20세기 초, 사진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수연(壽宴) 또는 경수연(慶壽宴)이라고 합니다. 수연은 61세가 되는 생일날 벌이는 회갑(환갑)잔치뿐만 아니라 60세 생일에는 육순 잔치, 회갑 다음 해 생일에는 진갑 잔치, 70세 생일에는 고희(古稀) 또는 칠순 잔치, 77세 생일에는 희수(喜壽), 88세의 생일에는 미수(米壽)라고 하여 때마다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잔칫날에는 친척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와 환갑을 맞는 주인공을 축복했습니다(도 26). 사진 앞 열 어린 손자와 손녀를 안은 노인들 앞으로 사각형 상과 소반 위로 풍성하게 음식을 차렸습니다.
▲ 도 27) 회혼례첩(回婚禮帖), 조선 18세기, 비단에 담채, 33.5×44.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또 조선시대 회혼례는 회갑보다 더 큰 경사로 여겨진 잔치였습니다. 회혼례는 결혼한 지 60년 되는 해에 부부가 다시 혼례 의식을 치르는 행사입니다. 부부가 건강하고 자식들이 무고하며 자손이 번성할 경우에만 열 수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장수와 복록을 알려주는 중요한 의례였죠. 회혼례에서 회혼을 맞은 부부는 신랑과 신부가 처음 혼인식을 치르듯 혼례복을 입고 전안례부터 합근례(合巹禮) 까지의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혼례 의식이 끝난 후에는 잔치를 벌여 회갑과 같이 자식과 친지로부터 장수에 대한 축하를 받았습니다(도 27). 그림은 회혼례첩에 그려진 다섯 면 중의 하나로 부부가 자손들로부터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받는 헌수(獻壽) 광경입니다. 참석자들마다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독상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조선의 목수와 목가구를 풍속화 및 사진 등 시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조선의 목수는 건물을 짓는 대목장과 가구나 창호를 만드는 소목장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소목장의 기능은 목가구의 제작과 건축상의 소목 일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 계층의 소용으로 제작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잡다해져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는데, 지방에서는 목수를 초치해서 필요한 기물을 제작하는 자급자족 형태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목가구는 일정한 규격품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가구는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살림살이입니다. 조선의 목가구는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고 성장하여 가족을 이루며, 장수를 축하하는 경수연이나 장례 및 제사를 지내는 등 각종 통과의례의 현장에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기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목가구는 조선인의 삶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일생과 함께 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 박본수(경기도박물관 학예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