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을 보내며
아, 나에게도
백기완 1933~2021.2.15
아, 나에게도
회초리를 들고 네 이놈
종아리를 걷어올리거라 이놈
그러구선 이 질척이는 항로를
살점이 튕기도록 내려칠 그런
어른이 한 분 계셨으면
아, 나에게도
갈데가 없는 나에게도
새해 새 아침만은
쏘주병을 들고 가 큰절 올리면
엄하게 꾸짖는다는 것이
잔을 받아라
그러구선 아무 말이 없으시는
그런 이가 한 분 계셨으면
인고의 끝은 안 보이고
죽음의 끝과 끝가지 맞선
외골수의 나에게도 아, 나에게도
속절없이 엎으려져
목을 놓아 울어도 되고
한사코 소리내어 꺼이꺼이 울어도 될
그런 밤이라도 한 번 있었으면
위의 시를 읽었다. 2022년이 하루 남은 오늘. 이 시의 "한 분"이라는 단어를 읽고는 김호성 선생님이 연상되어 이렇게 글을 쓴다.
나는 이상하게도 학교에 인연이 많아 20대에 대학과 대학원 2년을 다녔고 40대에 동국대학교 한국불교융학학과에서 박사과정을 포함 6년을 다녔다. 그러니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고 중고등학교까지 합치면 꽤나 긴 기간임에도 내가 마음으로 좋아하는 "한 분"은 김호성 선생님이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나보다 낫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 천지이다. 그러나 직접 겪지 않은 이상 그림의 떡에 대해 그 맛을 말하는 것과 같아 뭐라 말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살아온 경험상 반전을 숱하게 본 까닭에 사람을 액자의 모습이나 경력의 나열만으로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때로 화려한 이력을 지녔지만 하는 짓이 너무 이상할 때 "적어도 나는 저 놈처럼은 행동하지 않았으니 저 놈 보다는 낫다."라고 자부하는 일이 이 땅에서는 너무나 잦다. 한 두명이 아니라 오히려 놀랐다. 나는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무우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라는 말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나보다 못한 사람과는 벗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여 오만방자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라고 끝나는 20대 후반의 정희성鄭喜成(1945-) 시인의 시가 비록 1971년 봄 관악산 종합 캠퍼스 기공식 축사였지만 서울대 중심의 학벌 중심주의의 현상 때문에 지금 오만방자해 보이는 것과 비슷하게. 관악을 보면 공대 건물이 관악산 풍경을 망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 출신 인물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특히 정치에 있어 표리부동하고 부화뇌동하여 사람들을 좌절시킨 사건들이 생각나 더욱 좌절스럽다. 좋은 맥락으로 이해해 줘야 할 말이 때로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는데 논어의 이 구절 역시 충실과 신뢰[忠信]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공자가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귀감으로 삼아 더욱 노력하라는 뜻으로 말했으리라.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가 곧 바로 이어지는데 스스로의 허물을 고치는 걸 꺼리지말라는 말은 앞의 말과 관련시키면 나보다 허물이 많은 사람을 만나 물들듯 허물이 많아지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볼만 하다. 물론 이론상으로 여전히 반박은 가능하다. 사귐은 상호적인데 무우불여기자 원칙을 적용하면 나보다 뛰어난 상대방이 자신을 벗하면 이 원칙을 위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은 스승이라고 뱉다보니 글이 조금 빗나갔다. 스승은 범어로 구루guru 또는 아짜리아ācārya 阿闍梨라고 하는데 이하 구루라고 호칭하며 글을 이어 가겠다. 나는 구루의 성실함과 절제, 불교에 대한 진지함, 남여를 가리지 않고 노소를 구별하지 않는 평등성, 그리고 배려 및 실천성 등에 감동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한문을 배웠기에 훈장님이기도 하신데 한문을 빨리 읽어내시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아직 갖고 있다. 법장의 탐현기를 구루께서 번역하신 적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남다른 눈으로 새겨보게 된다.
아무튼 딸 자랑하면 딸 바보, 아들 자랑하면 아들 바보, 아내 자랑하면 팔불출 등등이 있는데 스승 자랑하면 바보니 하는 말이 없다. 다행이다. 아마도 그런 일이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스승 만나기는 그야말로 맹구우부목공(盲龜遇浮木孔, 눈 먼 거북이 떠나니는 나무 구멍을 만나다.)이 아닐 수 없는데 스승을 깊이 사모하는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입었으니 복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주관적이지만 나 또한 그 대열에 들었으니 복 받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구루는 훌륭한데 그 제자는 어떤가 하면 거참 초라해진다. 석사논문 쓸 때까지는 참으로 성실하기 그지 없고 불교에 대한 열정도, 불교한문과 논문, 서적 탐독에 열심이었건만 박사 마지막 학기 무렵 생긴 세속적인 일 때문에 마음의 병이 깊어 그야말로 구슬의 줄이 끊어져 땅에 뿔뿔이 흩어지든 하였다. 사극에서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불초소생不肖小生...으로 말을 시작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스승과 관련하여 쓰면, 말 그대로 " (스승을) 닮지 못한", 곧 "불초不肖한" 제자인 셈이다.
올해 년말에 드니 지나 간 것들 중에 못한 점들이 생각난다.
올 해 구루께서 통도사 반야암에서 주는 학술상을 받으셨는데 그 때 청중으로 참여해 그 경사스런 일에 한자리 끼일 수 있었다. 무언無言스님의 자동차에서 구루께서 저에게 "내가 책들을 일일이 힘들게 운반해 우체국에서 택배로 보냈는데...그 잘 받았다는 답장을 안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지금 여기 타고 있는 이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셨다. 유구무언으로 잘못했습니다는 말도 어떤 핑계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지나보니 내가 유마힐도 아닌데 침묵으로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에 대해 몇 자 적고 년말에 주로 술 모임 생각만 하고 지냈는데 생전 처음으로 스승에 대해 생각하며 감사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아마도 조계종 출판사에서 간행한 김호성 지음 <<정토불교 성립론>>이라는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억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책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내 기억으로는 책을 받자마자 메일을 "선생님 손수 보낸 책 받아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짧게 쓴 뒤 보내려는 순간 "이건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닌가, 책을 받았으면 응당 다 읽고 보내는 것이 예의이니 하루나 이틀만에 다 읽은 뒤 보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쩌다 시간이 거의 일주일이 들어 메일을 "책을 보내 주셔서 덕분에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쓸 때 파순波旬의 말과도 같은 "달랑 그렇게만 보내면 어찌 하는가, 어떤 부분이 좋았고 또 어떤 부분은 안좋았는지 써야 예의에 맞지 않는가?" 저는 이 생각에 "그렇다."라고 동의 하고는 한 두 시간을 끙끙거리다가 결국 그 내용을 완성하지 못하고 못 보내게 되었다.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실질주의를 따랐는데 결국 단순히 외견을 보이는 것보다 못한 결말이 난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소극성과 형식보다는 실질을 더 강조하는 생각이 어우려져 이런 이상한 결과가 나온 것 같다. 그래서 보내지 않았지만 거의 보냈다고 그것도 두 번이나..라고 신 포도 비슷하게, 사구의 네 번째 "보낸 것도 아니고 보내지 않은 것도 아니고" 라는 식으로 자위하기는 하는데 바둑으로 치자면 장고 끝에 악수 두는 꼴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생각해 보면 더 있었다. 계절학기 학부 수업을 선생님이 배려해주시어 몇 년 전에 한 적이 있었는데 수업 끝나는 날 찾아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중간시험 문제를 그 전에 거의 알려줬는데 서너명이 백지를 제출하는 일이 있었는데 도대체 어이가 없고 백지 낸 학생들 다 과락시켜야 하나 고민도 많이 하고 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는 자괴감도 들고 해 선생님 볼 면목이 없었다. 아무튼 이 사건 아닌 사건으로 선생님이 이렇게 신경을 써주셨는데 나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참담하다, 이런 마음이 그 당시 내내 가득하였다. 이 또한 괜한(?) 자괴감 때문에 뵐 면목이 없어 생긴 일이다.
저의 어머니 고향인 경상북도 봉하군 법전에 문맹인 아들이 군에 가 첫 편지를 문맹인 어머니에게 편지지에 써 보낸 것이 굴뚝과 새와 가위표가 그려진 그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에 글자를 아는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전전한 끝에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과 같으나 군대에 매어 있다보니 볼 새가 없다."는 향가 풀이식 해석을 마침내 얻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마음은 굴뚝같으나 못하는 일들이 있다. 저의 경우에는 어떤 부끄럼 때문이 아닐까? 살가운 언어에 약한 집안내력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올해까지는 그렇다하고 내년부터는 바꿔야지 하면 바꿔질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새해 결심은 "인사가 만사다"는 그 인사를 그리팅greeting 또는 아이사츠あいさつ [挨拶] 인 뜻으로 바꿔 중시해 볼까 한다. "할 의사도 있고willing", "할 능력도 있고able" 라는 기준으로 어떤 것을 따지는 서양 국제정치 논문을 예전에 본 기억이 있다. 지금 다시 보니 의사will와 능력ability 말고 용기courage도 그와 다른 중요한 다른 요소임을 알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비루투virutu를 강조한 이유도 새롭게 알게 된다.
무외無畏 abhaya!
년말이 되다보니 이런 글도 쓰게 된다.
혹 지금까지 읽으신 분 있다면 괜한 개인 잡일로 새로운 지식을 주지도 못하면서 남의 시간을 약탈했구나 하는 마음 없이 "수고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또 덧 붙혀 송구영신,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라고 인사 드린다.
박 오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