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
(행 2:37-40) “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3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말로 증언하고, 잘못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고 그들에게 권하였다.”
첫째로는 3천 명의 사람들이 완전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들의 생각도, 행동도, 시야도 모두 변했습니다. 너무나 완전한 변화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놀랄 뿐입니다. 정의하자면 기독교는 여러분을 취하는 그 무엇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여러분이 행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에게 행해지는 그 무엇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해부하거나 분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는 메타노이아 (metanoia)입니다―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성경은 매우 정직한 책입니다. 여러 복음서 끝 부분에는 주님의 가장 가까운 무리들인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침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입니다. 이들의 지도자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시신은 무덤에 묻혔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낙담해 버렸지요.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헤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고기나 잡으러 갑시다, 어쨌든 좀 쉬어야겠군”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고기를 잡으려 해보았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생각입니다. 예, 교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닙니다. 인간의 산물이 아닙니다. 국가의 지부가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교회의 존재와 지속에 대한 설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과 교회의 일반적인 메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매우 중대한 질문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한 개인은 어떻게 교회라는 영적 사회의 일원이 되는가? 한 개인은 어떻게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가? 한 개인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이 질문은 긴급할 뿐 아니라 장엄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군요. 결국 이 세상에서 우리의 최후 운명을 고려한다면, 이것 말고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 드리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살펴보다 보면, 사도행전의 가르침과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이해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까요? 여기서 찾게 되는 답은 모호하거나 불분명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분명합니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때가 있지만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 한 번에 3천 명의 교인이 더해진 것을 듣습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교회에 “더해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에 속하지 않았지만 다음에는 속하게 됐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불확실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속했으며 무엇을 믿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 3:15).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들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모호한 개념만 갖고 있습니다. 어쨌든 때때로 하나님과 종교적인 문제들을 생각하고, 얼마간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또 그렇게 산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 교회로 인도된 후 그저 왔다 갔다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기독교는 우애와 호의의 정신이며,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어떤 현대작가들은 사랑이나 친절을 발견할 때면 언제나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 드리지만, 이것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것과는 너무나 벗어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바는 전혀 다릅니다. 여기에 3천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저곳에서 이곳으로,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갔습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첫째로는 3천 명의 사람들이 완전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들의 생각도, 행동도, 시야도 모두 변했습니다. 너무나 완전한 변화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인지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의(定義)상으로 볼 때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는 독특하고 특별하며 구체적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고상한 생각을 하며 큰 희생도 기꺼이 감수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며, 사실이 그렇습니다. 휴머니스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교리나 구호 없이도, 당신들이 스스로의 가르침에 덧붙이는 모든 첨가물과 신화 없이도 당신들이 주장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소.”
요즘 손꼽히는 휴머니스트의 글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자신이 듣고 보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에 관해 언급하더군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들[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매우 부끄러워합니다. 결국 저들이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것이지요.”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 바깥에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누가는 사도행전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기독교는 온전히 그분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언급도 않고, 말하는 것이라고는 좋은 견해와 선한 생각, 그리고 이런저런 것을 하는 방법뿐이라면,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이들이 완전한 변화를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의 설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읽어보면, 그가 성경을 인용해 특별한 논증을 펼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논증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논리적으로 견실합니다. 논증을 펼치는 그를 여러분은 반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차가운 글자로 읽히는 베드로의 설교로는 3천 명에게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설명이 안됩니다! 이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성령의 역사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행 2:37). 그곳에 서서 구약 강해를 듣던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불안을 느꼈고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교회는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만든 것도 성령의 역사며 교회를 지속시키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모든 역사의 부흥과 개혁에 대한 설명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놀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를 ‘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취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교(邪敎)를 취할 수 있습니다. 여러 운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등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정의하자면 기독교는 여러분을 취하는 그 무엇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여러분이 행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에게 행해지는 그 무엇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해부하거나 분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가 사도행전 2장에서 고전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3천 명의 회심은 전적으로 성령의 강림과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성령은 연약하고 무지한 한 인간의 말을 사용하셨고 듣는 자들의 마음과 가슴과 양심에 그 말이 박히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똑같은 주제에 관한 예와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의 위대한 선언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고린도인들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학식 있는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들의 시인들이며 여러 가지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을 거부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기” (2절)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거듭 말씀 드리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다뤄지고 있으며 우리보다 큰 능력이 우리를 단련시킨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 말고 교회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들 자신이 이 놀라운 변화를 특히 성령 세례 후에 어떻게 경험했는지 보았습니다. 이들은 변화되었고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 이어져 오는 이야기이며, 모든 부흥과 모든 위대한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1∼5).
이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첫 번째 것입니다. 3천 명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습니다. 이들 속에서 어떤 일이 진행됐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을 사용하셔서 이들에게 적용하셨습니다. 그분은 강력한 힘이십니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며 어떤 분석이나 설명도 할 수 없는 힘입니다. 우리는 다만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입니까? 여기서 옆으로 빗나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당신네 기독교 전파자들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당신들은 지적인 자살을 옹호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들은 사고(思考)하기를 멈추고 보이지 않는 것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러니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지요. 줄곧 당신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왔고, 그래서 당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자신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힘입니다. 사람들은 놀랍고 이상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초감각적인 인식과 심리에 관심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처럼 자신을 맡긴 당신들이 그 결과로 이상한 경험을 하는 것에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잠깐만 멈추십시오! 제가 말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 그분이 한 인간에게 행하시는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무엇을 행하십니까? 흥미로운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성령께서는 이처럼 사람들에게 강하게 임하실 때 그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십니다!
제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3천 명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불과 몇 주 전 나사렛 예수가 재판 받을 때 “이 사람을 없이 하소서. 못박으소서.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라고 외치던 무리의 일부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 이 같은 똑똑한 사람들과 정치가들과 성직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 때문에 자신들이 곤란에 처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렇게 말했지요. “나라를 구하려는 이 자를 제거하자! 저들로 그를 멸하게 하자. 그러면 우리가 안전하리라.”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군중을 선동하고 조종했습니다. 이들 무리는 얼마 전까지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분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그분을 에워싸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노래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생각 없고 무분별한 무리들이, “남이 말하는 대로 따르는” 얼간이들이 전혀 생각도 안 해보고 상투적인 말에 넘어가 자신들의 말을 바꾸었습니다. “이 세상 신”에 눈먼 채 외쳤습니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변화의 첫 번째는 바로 이들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 예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죽이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이제 그분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성경은 이런 예로 넘쳐납니다! 기독교가 하는 일, 복음이 하는 일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듯이 기독교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집니다”(갈 1:4). 그렇다면 이 악한 세상의 주된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할 수 없으며 군중심리에 휩싸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과장합니다.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바를 알지 못합니다. 이해력이 없습니다. 자신을 조종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권세들에 희생당할 뿐입니다.
지금 저는 사도행전 2장을 설교하고 있지만, 사도행전 마지막 장의 유사한 예를 통해 이것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이 죄수로 로마로 이송되고 있을 때입니다. 배가 난파해 결국에는 선원과 죄수들이 멜리데라는 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2 섬사람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비가 내린 뒤라서 날씨가 추웠으므로, 그들은 불을 피워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3 바울이 나뭇가지를 한 아름 모아다가 불에 넣으니, 뜨거운 기운 때문에 독사가 한 마리 튀어나와서, 바울의 손에 달라붙었다.
4 섬사람들이 그 뱀이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살아나왔지만, 정의의 여신이 그를 그대로 살려 두지 않는다" 하고 서로 말하였다.
5 그런데 바울은 그 뱀을 불 속에 떨어 버리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6 섬사람들은, 그가 살이 부어오르거나, 당장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생각하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런 이상이 생기지 않자,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서, 그를 신이라고 하였다.”(행 28:2∼6).
제 인용에서 관련성을 찾으셨습니까? 이 세상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군중은 이렇습니다. 한 순간에는 그가 살인자이며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가 다음 순간에는 “이 사람은 신이다!”고 외칩니다. 군중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군중은 한때는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전쟁광이고, 도저히 같이 일할 수 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은 성격이 안 좋은 개인주의자야. 원하는 것은 독재자가 되는 것뿐이야. 그러니 그 사람 조심해야 돼. 그 사람을 다스리는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돼. 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마, 위험한 사람이니까!” (이것은 윈스턴 처칠에 대한 언급이다. 이 설교는 그의 장례식이 끝난 후인 1965년 1월 31일에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사람이 신이었다고 말하고들 있을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이들은 틀렸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틀렸습니다. 이들은 전쟁 전에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습니다. 이들은 생각할 줄 모르고 무분별하며 무지한 군중입니다. 예루살렘의 무리가 주님을 무시한 것처럼 오늘날 이 나라의 대중들도 기독교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성령께서 사람들을 다루기 시작하실 때 그들에게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전에는 결코 갖고 있지 않던 시각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합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것은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어리석은 주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합리주의 출판협회(The Rationalist Press Association)가 출판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무엇이라 불리는지 아십니까? ‘생각하는 사람들의 문고’(Thinker s Library)입니다! 이들만이 생각하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생각 없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약”― “대중의 마약,” “민중의 아편”(여러분이 뭐라고 부르든 간에)―을 삼켰습니다.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억누르는 마약일 뿐이라는 말을 우리는 듣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노동자 계급의 최대의 적이었고, 따라서 자유를 원한다면 이 악몽, 이 마약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제가 올바르면 좋겠습니다. 거짓 종교는 마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거대한 신성함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매우 멋지고 거대하며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이 거대함이 일종의 위로를 준다는 것밖에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거짓 종교입니다. 이방 종교입니다. 이방 종교는 언제나 비지성적입니다. 이것은 두려움의 종교이고 허식과 의식의 종교이며 교리와 극히 중대한 진리가 빠진 종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장엄한 것에 두려움을 느낄 뿐입니다. 저는 이런 종교를 변호하려고 이곳에 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민중의 아편입니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렇듯 기독교가 미치는 첫 번째 영향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어떤 큰 사건에 겁먹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아냐, 난 이것을 직시해야 해. 생각해야 해!”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회개했으며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는 메타노이아 (metanoia) 입니다―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생각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것처럼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잠시 생각하다가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는 생각을 멈춥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리려고 술잔을 들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무엇이든 합니다.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이 중독된 상태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사람들은 사실을 회피합니다. 대단한 에너지를 쏟아서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매우 지적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언제나 무위로 끝나 버립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하게 하십니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야만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억압하는 죄를 제거하고 싶지 않습니까? 행복을 원하지 않으십니까? 평안을 원하지 않으십니까? 인도하심을 원치 않으십니까?”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것은 사교(邪敎)의 접근법입니다. 네, 예루살렘 사람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 사람에 대한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사실들을 제시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방금 이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어 그 다음절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해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메시지는 언제나 이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들을 직시하도록 합니다. 제가 이것을 또 한번 말하는 것은, 거짓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에 가보면 가장 높임을 받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크고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직시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 같은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 라는 분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베드로가 이들이 한 일을 상기시켰을 때―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그 다음 요점은, 메시지에 임한 성령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 대해 생각하게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이 우리 자신과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깨닫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의자에 앉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을 읽을 수 있고, 성경에서 그분에 관한 내용을 읽을 수 있으며, 신학 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매우 흥미 있는 일입니다. 지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매력적인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 속의 몇몇 위대한 지성들을 사로잡아 온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더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예수님이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깨닫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 이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구경꾼이나 비판자나 멋지고 객관적인 시각을 취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비판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모습은 저에게도 해당됩니다. 지금은 제가 이 모든 것과 결부돼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전에는 깨닫지 못했었지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문제도 이것입니다. 이들은 몇 주 전만 해도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없애 버려라! 십자가에 달아라! 바라바를 석방하라! 예수가 누구냐? 이 모든 소란이 누구 때문이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스스로 해방자요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미친 놈 때문에 우리가 로마 당국과 마찰을 일으켜야 되겠는가? 이건 말도 안돼! 그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리고 이들은 돌아가 맘껏 마시면서 더 없이 즐거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멋진 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도 무시하고,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그렇게 쉽게 제거해 버린 예수가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맞서 싸워 왔고 그분의 그리스도를 거부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소리치며 이렇게 했습니다. 이들은 로마 당국자들에게 그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강요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인민재판에 의해 집행된 것입니다.
이것이 여전히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여전히 기독교의 복음이며 오늘날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해가 갑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그를 없이 하소서’하고 소리쳤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그분의 죽임 당하심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제가 한 일은 아닙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관심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중립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존경 받는 사람들과 휴머니스트들과, 매우 착하게 살며 자신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밖의 사람들께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이 그분과 관계가 없다면, 그분을 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령으로 죄를 깨닫게 되면, 이것도 깨닫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요, 저는 착하게 사는 것 아닌가요? 간음한 적도 없습니다. 술 취한 적도 없고요. 이런 짓은 전혀 해본 적 없습니다. 저는 정말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도덕적으로 제 의무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온 세상이 죄악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은 그리스도를 전혀 생각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목사를 찾아와서 “제게도 희망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비열하고 더러운 깡패들보다도 훨씬 더 나쁩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희망 없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에게는 그분이 필요하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비극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그분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원들에게 동의함으로써 하나님께 대적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사랑의 절정인데, 이들은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속(救贖)이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의 축이자 중심인데, 이들은 그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은 생각 없이 소리 질렀지만 이제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죄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죄에 대한 깨달음은 두려움으로 이어집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목소리에 배어 있는 두려움이 들리지 않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적인 관심이 아닙니다. “그래, 이제 생각해 보니 그분은 좋은 말을 한 매우 선한 분이고 위대한 지도자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이야”라는 뜻의 의견 제시도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이들은 죄를 깨닫고 두려워졌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러한 질문들을 여러분 자신에게 던진 적이 있습니까? 왜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을까, 나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살게 될 것인가, 나는 그분을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가, 지금까지 그분은 내 생각의 중심이셨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2천여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이 내 삶을 지배하는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왜 연도는 그분을 기준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정해지는가 하고 자문한 적은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이런 질문들을 전혀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겠지요. 관심 가져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물론, 그분에 대해서는 다 알지!” 그러나 복음서를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깨닫고는 멈추어 이런 질문들을 한다면, 이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 (conviction)입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는 말합니다. “왜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무관심했을까?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여기 있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지. 위인들도 알아. 위대한 왕들과 지도자들과 수상들도 안다.”
저는 지금 역사의 위인들을 아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려는 것은, 역사와 역사적 인물들에 관심이 있는데 왜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분은 여러분에게 그렇게 의미가 없었을까요? 왜 여러분에게는 세상의 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을까요? 왜 이들이 여러분의 삶에 그분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요? 여기 이 세상에 오셨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신 위대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그분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을까요? 왜 여러분은 이 사실들은 알면서 그 이상은 알지 못할까요? 왜 이 사실들이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했을까요?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전부였던 바울과 다른 사도들에 대해 읽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복음이 저에게는 전부가 되지 못할까요?”
역사를 훑어 내려오다 보면 그 밖의 사람들도 읽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철학자요 위대한 천재인 어거스틴이 있습니다. 그는 한때 악한 삶을 살았고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가르쳤으며 자신만의 놀라운 방법으로 복음을 해석했습니다. 여러분은 순교자들과 고백자들, 종교개혁의 거장들에 대해 읽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청교도 시대의 위대한 그리스도인들, 스코틀랜드의 서약자들에 대해 읽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느니 차리리 죽기를 더 기뻐했으며, 그분과 함께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영광스럽고 당당하게 죽은 사람들입니다.
왜 여러분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까? “왜 나는 그들과 같지 않을까? 알긴 하지만 안다는 것이 나에게는 조금도 차이가 없어. 나는 그분에게 전율을 느낀 적이 없어. 감동 받은 적도 없어. 누군가 그분을 역사에서 제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나는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해! 왜 그런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성령 때문에 하게 되는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왜 나는 내게 그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분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위대하고 엄숙한 사건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과 꼭 같은 모든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왜 여러분은 그분을 거부한 결과를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습니까? 이제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질문들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고통스런 질문들이겠지요. 여러분은 이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전에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냐! 기독교는 끝났어! 그를 죽여라!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를 없애 버려라! 기독교는 한 물 갔다! 그는 이제 쓸모 없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좀더 지혜로웠다면 ‘그분은 사실이야. 그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분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렇게 말했을 텐데.”
여러분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하는 순간 그 해답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난 그분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분이 내게 필요하다고 느낀 적도 없어. 이유는 단 하나, 나의 무지 때문이야. 그 중에 첫 번째가 하나님에 대한 무지이지!”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세상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경이와 완벽함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까? 이 모두가 우연의 결과이겠습니까?
둘째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자신의 참된 본성에 무지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은 멋지고, 20세기 인간은 특히 멋지다고 말합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매일 듣는 상투적인 문구를 되풀이할 뿐입니다. 우리는 항상 찬양을 받으며 서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이 세상을 무엇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란 무엇인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죽음의 의미에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에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죽음은 인생의 끝이야. 멋진 생애의 끝이지. 끝일 뿐이야!” 죽음은 사람들에게 엄숙함을 느끼도록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죽음은 어디로 이어집니까? 성경은 이렇게 답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영혼은 계속 존재하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 앞에 보이게 됩니다. 오,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지요! 그 위대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친구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책임을 주셔서 인간들은 생명의 선물과 영혼의 선물을 가지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 모든 일에 대해 무지했고,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셨습니다. 장엄함과 화려함과 장관, 그것으로 끝납니까? (이것 역시 윈스턴 처칠의 장례식을 가리킨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넘어가 있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영원한 운명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 운명 중 하나만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아니면 그분 앞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의인들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과 모든 거룩한 천사들 가운데서 영원히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는 것 아니면 괴로움과 비참함과 고통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무지에 덧붙여 여러분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는 것도 발견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 앞에 제시될 때조차도 이 사실들을 떨쳐 버리려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적인 일들에 민감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계속 지껄이시오. 나는 관심 없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이오.” 사도 바울이 우리의 영적 죽음을 표현한 말은 아주 유명하지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같은 장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의 관원이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을”(고전 2:8) 것이기 때문이지요. 왜 이들은 그분을 알지 못했을까요? 지성(知性)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영적 죽음 때문입니다. 이들은 갈릴리의 목수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 엄청난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난 분명 영적으로 죽었어! 나는 생명이 없어. 내 심장은 돌과 같아! 내게 뭔가 문제가 있어. 난 곤경에 빠졌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제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무지와 영적 죽음 때문이며 그 결과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패역한 세대,” 곧 베드로가 그들에게 구원을 받으라고 말한 세대에 속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40절). 이들은 자신들이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는 눈 먼 바보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큰 죄를 저질렀으나 여기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주님께 울부짖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분의 대리자들, 곧 베드로와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이 우리와 관계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자신이 반드시 죽을 것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모두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어디로 갈까요? 우리들 각자를 위한 블레돈(Bladon, 윈스턴 처칠이 묻힌 곳)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블레돈이 있으며 여러분은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 그곳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과 세상의 똑똑함을 뒤에 남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은 마지막 여행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서 말입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해봤습니까? 이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지만, 부주의하고 생각 없는 무리는 결코 이 질문을 하지 않지요. 죽음은 여행의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확실하고 피할 수 없으며 냉혹합니다.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갑니까?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그래서 두렵지 않은 것입니까? 이제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외치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결론은 하나뿐이고 매우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메시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하여”―다시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제시한 것을 이해했다면, 여러분이 한 일을 하나님께 말씀 드리고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오. 자신이 지금까지 바보짓을 했으며, 자신이 자랑한 모든 똑똑함이 쓰레기와 같다는 것을 고백하십시오. 자신의 모든 오만을 인정하십시오. 그분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시인하십시오. 아무것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고백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온전히 맡기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여러분이 세상과 세상의 덫 없는 영광에 매여 살아왔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그분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중요시했다는 것을 말씀하십시오. 그분 앞에 엎드려 나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며 변명이나 핑계거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부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아보시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괜찮다! 내가 너를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냈다. 그를 믿기만 해라. 그가 너와 네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고, 그에게 감사해라.”
그러고 나서는 여러분 자신과 삶을 그분께 드리십시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그분께 복종시키고, 세례를 받으십시오. 예루살렘 새 신자들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엄청난 박해와 가족의 냉대와 추방과 그 밖의 수많은 것을 대가로 치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했고, 실제로 로마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들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입니다.
출처: God`s Will, 글쓴이 / 서성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