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에 관한 시모음 9)
성묘 /이화은
여자라는 이름이 낡은 갑옷처럼 너무 무겁구나
네게 빨리 물려줘야 할 텐데 딸아 너는 어디 있는 거니
옷이나 집이나 사람이나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감옥이 되는 법이지
구속이 즐거운 때도 있었지만 봄날 같은 얘기란다
봄에 피는 복사꽃 같은 얘기란다
속절없다는 말은 상처에서 나온 말이지
딸아
어젯밤 너는 꿈속에서 내게 무거운 질문을 하더구나
엄마 낙태가 뭐예요?
그 질문이 너무 무거워 결국 나는 꿈의 문턱에 걸려 발목을 삐고 말았지
하느님과 씨름하여 아킬레스건을 다친 야곱처럼
원래 비유란 비겁한 자들의 비열한 방편이란다
직방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약은 수단일 뿐이야
사주팔자에 있다는 딸아
사주팔자에 주저앉아 아직도 내게 도착하지 않은 딸아
내 몸이 온통 사막이라 너를 찾을 수가 없구나
네 무덤을 찾을 수가 없구나
아프고 시린 곳이 무덤이라면 가슴에 있는 거니
사철 얼음꽃이 만발한
딸아 너는 아직도 자궁 속에 있는 거니
넝마 같은 나이를 걸치고 주저앉으니 거기가 무덤이네
내 몸 곳곳이 무덤 천지네
딸아 너는 도대체 몇 번을 죽은 거니
나는 다만 무덤의 어미일 뿐
태어나지도 늙지도 병들지도 않은 싱싱한 죽음의 어미일 뿐,
성묘 /정영숙
성묘를 하러 갔습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삼십 년을 주무십니다
나는 할아버지 얼굴을 모릅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나를
잘 아신다고 아빠가
말했어요
내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부르면
할아버지는 잠에서 깨어나
반갑다고 하십니다
추석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성묘(省墓) /고 은
아버지, 아직 남북통일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성묘 길 /최홍윤
뜨거운 피가 흐르던
저승의 가족과 상봉하는
가장 뜨거운 나들이 길
이런 길을 한해 한번 가 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상큼한 가을을 마시며
서로 닮은 사람들과 눈웃음치며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것
고조 부모보다도 증조 부모가
조부모보다도 아버지가 더 뜨겁다
혈액형과 촌수도 촌수지만
이승을 등진 섭섭함이 더 진해서
아버지의 무덤이
내 가슴을 가장 뜨겁게 달군다
성묘 길
세대 차니 종교니 하는 것은
부차적인 그들만의 문제이고
얼굴을 모르거나
오래된 이별을 그리워하며 다녀오는 길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겐 분명히
아름답고 즐거운 길이다.
성묘객들은 밝은 옷을 입는다 /이수명
그는 컵에 담긴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휘휘 저으며 성묘를 가자고 한다. 성묘객들은 모자를 쓰고 밝은색 옷을 입는다. 손에 꽃을 들고 있다. 무덤을 빙 둘러 서 있다.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서 절을 한다.
그는 컵을 휘휘 젓는다. 컵 속을 들여다보며 세상을 떠난 사람의 성묘를 가자고 한다. 공원묘지에는 성묘객들이 많아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전개된다. 미리 성묘한 사람들과 미리 성묘하려는 사람들이 벌초를 권장한다. 무덤을 정리하고 벌집을 숨긴다. 벌초를 하는 사람이 있고 벌초하고 잔디를 입히는 사람이 있고 벌초하고 잔디 입히고 다시 와서 벌초하는 사람이 있다. 올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벌초를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컵을 계속 열심히 휘젓는다.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그만두고 그는 밝은색 옷을 입는다. 운동을 그만두고 성묘를 가자고 한다. 컵 속에는 아직도 얼음이 둥둥 떠 있다. 그는 컵을 들어 올린 채 성묘에 접속한다. 성묘 문화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성묘객들이 무리를 이루어 나란히 걷는다. 입은 옷을 넓게 펼치며 벌떼를 스쳐 지나간다. 벌들이 전부 다른 무덤에서 기어 나온다.
성묘객들은 서로의 존재를 비밀에 부친다.
성묘 /이상국
ㅡ야덜아 내 죽거든 태워서 울치 바다에나 뿌려다오
어머니는 살아생전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선산이 수만평이나 있고 아들자식들이 모두 이름 석자는 쓰고 사는 집에서
될 법이나 한 일이냐고 감동골 솔밭 속의 아버지와 합장을 해드렸습니다
30촉짜리 전등이라도 하나 넣어드릴걸
평생 어두운 집에서 시시던 분들
성묘 /문인수
11월의 오후는 짧다.
그러나 그 어떤 죽음에도
제 몸의 반경을 지니는 억새의 춤,
여러 무덤 주변에 아직 환한 것처럼
또 다른 동작으로 주춤주춤 갈아입는 것처럼
사람들도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그 다음이 금세 일몰이다.
성묘 /이사라
공원묘지 가는 길에 구절초 한 세상
살아서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둥근 세상을 먼저 만들고
우리에게는 봉분을 건네주는데
손으로는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따뜻한 햇살 한 줄기 흘러들어
나를 키우네
누군지 모르는 그를 사랑하라거나
이름뿐인 그대를 섬기라는 눈빛도 아닌데
가다 말고 돌아보는 저 세상에서의 속삭임을
나는 듣네
공원묘지 가는 길에 구절초 같은
생각 한 세상
살아서도 만날 것만 같은 둥근 세상
가을볕을 함께 걷네
성묘를 다녀와서 /정연복
당신은 나뭇가지처럼
여린 몸에
나를 열 달 동안
알뜰히 품어 주셨는데
살며시 눈물 감춘
은은한 목련꽃 미소로
당신은 한평생
나의 수호천사이셨는데
깜빡깜빡 당신을 잊고
바쁘게 살아가다가
오늘은 산 같이 큰
당신의 존재 앞에
꽃잎 지듯
사르르 무너졌습니다
어머니!
성묘 /곽재규
무릎을 꿇어라
이 못난 후레자식
핏대를 세우며 삿대질을 하며
아버지는 거친 억새풀로 일어나
억새풀 아래 무릅 꿇은 잡풀보다
허름한 자식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들아 니 애비 못나 설운 마음
지천으로 패랭이꽃으로 빈 들판에 널렸는데
너 이제 한 주먹의 허름한 눈물로
불쌍한 애비 앞에 무릎 꿇었느냐
생각해라 잘살기 위해서라면
사군자에 곁들인 채색화도 잘 팔리고
미국 땅 삼류 음대 옆문으로 빠져나와
떡잎 그른 조선 호박잎들 바이올린 레슨 벌 만하고
잘살 일 하나로 죽어 가는 그 길이 가깝다면
너를 보는 애비 두 눈에 피눈물이 맺히리라
아들아, 별이 뜨는 가을밤을 너는
걸었느냐 여름의 진창 섞인 어둠 속을
헤매었느냐 눈을 감아라
겨울은 오고 홀로라도 네가 걸어야 할 길은 멀다
겨울은 오고 네가 맞을 눈송이는 아직 포근하다
돌아가거라 네 가슴에 남은 그리움이
내 가슴의 그리움과 함께 지천으로 피는 날
허름한 내 무덤 쓰러진 억새풀 위에도
뜨거운 이 세상의 송이 눈이 흩날리리라.
성묘 /장석원
왜 죽었어 왜 죽었어
당신 앞에서 녹는 듯이 우는데
바스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내가 왔어 내가 왔어
당신이 나를 안아주는데
그 가슴
그 냄새
해 넘어가자 푸시식 사라지니
바람 불어 흔적도 없어지니
어쩌란 말인가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아무 날에 아무렇게나 죽은 나
아부지
아부지
나 좀 데려가요
오랜 탄식
허공에 파란 불꽃 이네
어머니를 찾아서 /조태일
이승의 진달래꽃
한 묶음 꺾어서
저승 앞에 놓았다.
어머님,
편안하시죠?
오냐, 오냐,
편안타, 편안타.
성묘하던 날 /박종영
추석날 아버지 어머니 찾아가
상석(床石)에 준비한 배 사과 놓고 술 따르고
장성한 자식들과 절을 하면서,
살아생전 다짐한 말 기억나는데
애초에 지키지 못한 약속이
허망한 세월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이승의 허물이 저승까지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간격임을 알면서도
엄격한 아버님 말씀 매양 들어온
가르침의 덕목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이 나이 들어 생각해 봐도
미욱한 허물이 많아
세상살이 더 슬기롭게 살아 갈수록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유는,
성묘하는 추석날
경건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리니
이제야 본심으로 훈육하는
인자한 말씀이 들린다.
산소에서 성묘를 하며 /박의용
처서 백로 지나도 여전히 무덥습니다
조상을 모시는 산소에 성묘를 했습니다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에
나보다 먼저 간 동생까지
묘지를 보니 인생 무상이 확 다가옵니다
결국은 저렇게 돌아가는구나
살아 생전 온갖 영욕은 한갓 헛된 꿈이었으리라
그러니
살아서 무리하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으랴
서열 대로 자리한 산소를 보며 생각합니다
돌아가시면
처음엔 각 방을 쓰다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한 방을 쓰시는구나
살아선 갓 결혼하여 한 방을 쓰다가
늙어감에 따라 각방을 쓰는 게 편하더니
저 세상 가서는 그 반대로구나
저 세상 가는 날이 다르니
각 방을 쓰다가
내외가 다 저 세상에 당도하면
다시 한 방을 쓰시게 하는구나
북망산천 얼마나 춥고 외로우면
다시 한 방에 모실까
춥고 외로운 그곳에서
서로의 싸늘한 체온일 망정
부둥켜 안고 계시겠지
체온은 비록 싸늘하게 식었어도
마음만은 아직도 따뜻할 테니
정은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니
그 마음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식지 않고 따뜻하게 유지되는 것
우리 부부 살아 생전
때론 상대의 행동이 못마땅하고 미워도
마음만은 미워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보듬어주자고
산소에서 다시금 다짐을 합니다
성묘 문화 /靑山 손병흥
산소를 찾아 성묘하는 문화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화장문화에 익숙해져버린 결과
후손이나 연고자가 찾지 않거나
전국 산재한 사설 공원묘지마저도
관리비 장기 체납하는 경우가 많아
이른바 버려진 무연고의 묘들로 인한
효율적인 국토이용 증진 절실해진 세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