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상의 등장 6회 ~ 12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Ⅴ
6. 사회주의 세력의 공세
서울청년회 ‘3단계 공세’ 돌입, 사회운동 주도권 잡다
전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 자국 내에 뿌리를 둔 사회주의 세력과 러시아의 지시를 받는 코민테른에 뿌리를 둔 세력이라는 두 흐름이 거의 동시에 형성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코민테른 세력의 우위로 사태는 전개되기 마련이었는데,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견지동 청년회관 터. 현재는 서울중앙교회가 들어서 있다.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은 1920년대 초반 민족개량주의 세력을 공격해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사진가 권태균]
조선청년회연합회(이하 청년회연합회)는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과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전선이었다.
사회주의 운동 연구가인 이석태가 ‘처음에는 서울청년회 일파 세력이 상대적으로 불리했고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방대한 전력이었다(<조선청년운동사고>(朝鮮靑年運動史考) <신천지>4호, 1949)’라고 회고한 대로 당초 청년회연합회의 주도권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개량주의 세력이 잡고 있었다.
김윤식. 민족개량주의자들은 ‘김윤식 사회장’을 추진했으나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실패했다.
그래서 서울청년회의 김사국(金思國) 등은 청년회연합회 내부의 민족주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이는 대략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청년회연합회 교무부 상임위원 안확(安廓:1886~1946년) 퇴진운동과 김윤식 사회장 반대 운동, 그리고 ‘사기공산당’ 사건이었다.
안확은 서울 성내 서북쪽의 중인(中人)마을인 우대마을 출신이었다. 니혼(日本)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한 인텔리로서 이회영, 이득년, 오상근, 홍증식 등이 추진했던 고종의 망명계획에도 관여한 민족주의자였다.
일본 유학 시절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에도 관여했던 전력으로 청년회연합회 교무부 상임위원이자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을 맡았다.
그런데 안확이 <아성(我聲)> 제1호(1921년 3월 15일)에 쓴 <청년회의 사업>이란 글이 문제가 되었다. 안확은 이 글에서 “사업보다도 수양 목적이 큰 주안이 되리니……우리 청년회의 사업이란 것도 수양적 사업을 주로 할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것이 청년회연합회를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추진하는 정치단체로 이끌려는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을 샀다.
1921년 4월 1일부터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청년회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두 파는 충돌했다. 김사국 등은 안확이 개인 저서인 <자각론(自覺論)> <개조론(改造論)> 등을 청년회연합회 명의로 발간한 것을 비판하면서 사임을 요구했다. 형식은 개인 자격의 저서를 청년회연합회 명의로 발간한 것에 대한 비판이지만 내용은 개조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1년 후인 1922년 5월 <개벽(開闢)>제23호(1922년 5월)에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게재하면서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하게 된 것을 무상(無上)한 영광으로 알며…”라고 말했지만 사실상 안확의 <개조론>이 1년 더 빠른 것이었다.
김사국을 겨냥한 비판에 대해 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장 오상근과 장덕수가 안확을 옹호하고 나섰지만 결국 안확은 교무부 상임위원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안확. 일제 식민사학에 맞서 역사와 국어·음악 등의 주체성을 세우려 노력한 국학자였다
이 사건 직후인 1921년 7월 12일 김사국은 경성고학생 갈돕 순회강연단의 강사로 개성에서 <실력론의 오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실력양성론이나 민족개조론은 모두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이론이었고, 김사국은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이 이론의 모순에 대해 숙지했다.<‘새 사상이 들어오다②사회주의 단체 조직’ 참조>
그는 이날 강연에서 “뒷사람이 앞으로 나가면(推進) 앞선 자는 더 앞으로 나가는 것(更進)이 이치상 당연하므로 실력양성론으로는 결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사국이 실력양성론의 대안을 이야기하려 할 때 임석 경관이 제지하는 바람에 연설은 중단되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두 번째 공세는 김윤식(金允植:1835~1922) 사회장 반대 사건이었다. 1922년 1월 21일 운양(雲養) 김윤식이 87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동아일보>는 23일자에 “운양 선생의 장서(長逝)를 도(悼)하노라-조선의 문장, 사회의 원로-”라는 장문의 1면 사설로 애도했다. 김윤식은 <동아일보> 창간 축하 휘호를 썼고 <동아일보>도 ‘폐호한거(閉戶閑居:문을 닫고 한가하게 거함)하는 운양로인(雲養老人)’이란 기사를 실을 정도로 우대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기 석 달 전인 1910년 5월 하지메 호소이(細井肇)가 쓴 <한성의 풍운과 명사(漢城の風雲と名士>는 김윤식을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일본당(日本黨)의 영수(領袖)”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강제합병 직후인 그해 12월 도모유키(大村友之丞)가 편찬하고 조선총독부 인쇄국에서 발간한 <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에 따르면 김윤식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은 데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었다.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지탄을 받던 김윤식이 일약 <동아일보>의 후견인으로까지 등장하는 것은 3·1운동 때의 처신 때문이었다. 3·1운동 때 이완용이 자제를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과 대조적으로 김윤식은 을사조약 때 분사(憤死)한 조병세(趙秉世)의 사위 이용직(李容稙)과 함께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때문에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고 징역형 선고를 받고 집행유예됨으로써 일약 민족주의 세력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이다.
<동아일보>는 초대 사장 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청년회연합회 위원장 오상근과 장덕수 등도 실행위원으로 들어갔다. 100여 명에 달하는 운양선생 사회장 위원들까지 선임하다가 사회주의 세력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제동이 걸렸다.
조선노동공제회와 무산자동지회 등은 물론 조선학생대회, 고학생구제회 등이 일제히 반대했다. 무산자동지회는 ‘김윤식씨가 사회의 신망하는 이상적 인물이 아닐뿐더러 주최 측에서 사전 동의도 없이 각 계급 인사들의 성명을 신문지상에 발표했다’고 비판했으며, 서울청년회의 김한은 무산자동지회 명의로 <조선일보>(1922년 2월 3일)에 “귀족사회를 매장하자! 자본주의적 계급을 타파하자! 명사벌(名士閥)을 박멸하자! 사회개량가를 매장하자”고까지 주장하는 논설을 게재했다.
결국 장례위원회는 1922년 3월 1일 청진동 중앙구락부에서 회의를 열고 상주(喪主)가 ‘사회장을 사양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명분으로 사회장을 취소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동아일보>는 발행부수가 크게 떨어지는 타격을 받았고, 아울러 민족주의 세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배성룡은 이를 ‘3·1운동 이후 처음 있는 격렬한 여론투쟁’이라면서 “확실히 조선에서 처음 있게 된 일대 도전, 즉 귀족계급 양반벌(兩班閥) 또는 장래에 사회에서 우월한 계급의 지위를 점령하려고 몽상하는 자들과 저 민중 본위의 평등한 사회를 이상하는 자들과의 큰 도전이었다(<조선사회운동 소사>, 1929)”라고 평가했다. 이 사건은 사회 갈등이 계급투쟁 단계로 한발 더 나아갔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서울청년회는 이 사건 직후인 1922년 4월 열린 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 사건’을 제기함으로써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 자금, 이른바 레닌 자금을 국내 공산주의 운동과는 관계없는 국내 인사들에게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재무위원 김철수는 오상근, 최팔용, 장덕수 등 9명의 사회혁명당 당원에게 코민테른 자금을 제공했는데, 배성룡은 “혹 4만원, 혹 8만원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일제 수사 자료에는 8만원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거액이었다.
이 자금은 청년회연합회의 영남· 호서 지역 순회강연 경비로 일부 지출되었고, 청년회연합회 기관지 <아성>의 발간 경비로도 사용되었다.
자금을 수령했던 인물들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국내 조직인 사회혁명당 당원들이기 때문에 수령 계통으로 따지면 큰 문제는 없었지만 사회혁명당 자체가 비밀조직인 데다 배성룡이 앞의 글에서 “적지 않은 금전을 재료로 삼아 각 개인 각자의 세력을 부식하기에 급급해 그 경쟁이 격렬했고 요리점 출입과 자동차 타기에 눈코 뜰 새가 없다는 세인의 비난이 자심(滋甚)했다”는 말처럼 공사(公私)가 뒤섞이면서 큰 물의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이면에는 서울청년회와 청년회연합회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깔려 있었다. 제3회 대회에서 장덕수는 청년회연합회를 대표해 “조선에는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면서 “민족의 잠재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서울청년회의 김사국은 “혁명적 투쟁으로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소비에트 권력의 원칙에 따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기공산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제명 요구가 청년회연합회에서 부결되자 서울청년회는 평산(황해도), 함흥(함경도), 김해(경상도)청년회 등 8개 지방 청년단체들과 함께 청년회연합회를 탈퇴했다. 또한 사건 관련자들인 장덕수·오상근·최팔용·김명식·이봉수를 서울청년회에서 제명했다.
1922년 4월 서울청년회는 이사제를 집행위원제로 바꾸는데, 이때 김사국과 1919년 4월의 국민대회를 주도했던 장채극이 집행위원으로 선임된다.
안확 퇴진 운동, 김윤식 사회장 반대 운동, 사기공산당 사건 등을 거치면서 서울청년회는 그간 국내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족개량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한국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들이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진정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싸워야 할 또 다른 상대가 있었다. 바로 코민테른 파견원들이었다.
7. 서울청년회와 코민테른 파견원
서울파·해외파의 대결, 목표는 코민테른 조선지부
국내의 자생적 사회주의자 그룹인 서울청년회와 해외 세력이 주축이 돼 1924년 결성되는 화요회(코민테른 파견원+북성회)는 경쟁적으로 국내 세력 확장에 나섰다. 두 세력의 목표는 모두 국내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코민테른 지부인 공산당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 대회가 열렸던 중앙기독교청년회관(현 종로 YMCA). 서울청년회는 조선청년총동맹으로 사실상 전국의 거의 모든 사회운동 조직을 통합한 셈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서울파, 즉 서울청년회 계열은 김윤식 사회장 반대 사건과 ‘사기공산당’ 사건 등을 주도하면서 민족개량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후 서울파는 두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했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운동을 장악하는 한편 공산당을 건설해 코민테른 조선지부로 가입하는 것이었다. 서울파는 이를 위해 양동작전을 썼다. 겉으로는 합법 대회를 개최해 일제 경찰의 시선을 쏠리게 해 놓고 비밀리에 공산주의 조직을 건설하는 작전이었다.
현재의 YMCA.
서울파는 먼저 노동대회를 열어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는데, 내부 문제가 발생했다. 노동대회 의장 문탁(文鐸)이 일본의 우익단체인 동광회(同光會)와 연관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고등경찰관계연표(高等警察關係年表)’ 등에 따르면 1921년 5월 한국에 지부를 설치한 동광회는 총독 통치를 철폐하고 군사·외교를 제외한 내정(內政)은 한국인에게 맡기자고 주장하는 단체였다.
유사 독립운동처럼 보이는 이런 운동이 참정권 운동인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부분적인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것이어서 좌파는 물론 혁명적 민족주의자들로부터도 큰 반발을 샀다.
상해 임시정부의 김지신(金芝愼) 등이 작성한 자료는 데라오 도루(寺尾亨), 구즈우 요시히사(葛生能久),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같은 일본 동광회 간부들이 국내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해 방한했을 때 협의했던 단체들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송병준이 이끄는 유민회(維民會), 이완용이 후원하는 태을교(太乙敎), 정병조(鄭炳朝)가 주도하는 국민공진회(國民共進會), 손병희의 천도교에서 갈라져 친일파로 전락한 김연국(金演局)이 주도하는 시천교(侍天敎) 등이었다.
송병준·이완용 등으로선 군사·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는 대신 자신들이 국내 정치를 주도하도록 참정권 허용을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을 축하하는 음악회 모습. <동아일보 1924년 4월 25일자>
1922년 동광회 한국지부는 일본 대의사(代議士: 국회의원) 아라카와 고로(荒川五郞)를 초청해 명월관에서 환영 연회를 개최했다. 임정 보고서에도 아라카와를 “일본 의회 내에서 그나마 양심 있는 인물”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연회에 참석한 100여 명 중 서울청년회의 이항발(李恒發) 등이 발언권을 요구했다.
일본 의회에 한국 내정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던 동광회 조선총지부 간사장 이희간(李喜侃)이 발언권을 거부하자 서성달(徐成達)·김태규(金泰圭) 같은 청년들은 내정독립론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더러운 무리들이 주최한 연회에서 식사를 할 수 없다”고 밥상을 뒤엎었다.
이들은 “내정독립운동자 정훈모(鄭薰謨)와 문탁을 쳐죽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탁은 구타당하고 서울청년회에서 제명당했다.
서울청년회는 1922년 9월 7일 공개적으로 노동대회 임시대회를 열어 김사국, 이항발 등을 간부로 선임하는 한편 10월에는 비밀회의를 열어 서울콤그룹을 건설했다.
서울청년회의 김사국, 이영, 김영만, 임봉순, 이중각, 장채극, 김유인 등은 비밀 회의에서 “종래 상해파의 무원칙한 지도를 거부할 것”을 선언하면서 “우리 당은 굳건히 1848년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당 선언’을 습득했고 그 선언은 우리 당 강령의 근본적인 지주”라고 주장했다.
또 “우리 당은 코민테른의 직접적이고 확고한 지도 하에서 전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우리 당’이라고 칭하는 것은 나중에 코민테른 지부로 가입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서울콤그룹은 또 “일본제국주의 권력과 제국주의의 주요한 세력을 구성하는 그의 수많은 하수인을 박멸하는 것이 필수이고, 조선의 모든 혁명세력을 민족 해방운동의 통일전선 슬로건 하에 단일한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것을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동시에 근로대중이 이 운동의 중요한 세력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요구된다”며 민족통일전선 결성과 노동자·농민의 헤게모니 장악을 주장했다.
서울콤그룹의 이런 노선은 제3 국제공산당, 즉 코민테른 노선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의 제4회 대회에서 ‘전술에 관한 테제’를 채택해 “코민테른은 모든 공산당과 공산주의 그룹이 통일전선전술을 가장 엄격하게 수행하도록 요구한다”면서 ‘통일전선체 건설을 각국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테제는 또 “①프롤레타리아트의 총체적 이익을 대표하는 공산당의 핵심을 만들어내는 것 ②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 혁명운동을 전력을 기울여 지지하고, 이 운동의 전위로 되고, 또한 민족운동의 내부에 있어서 사회운동을 강조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서울청년회는 코민테른의 이런 노선에 따라 겉으로는 각종 사회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안으로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한 것이었다.
서울콤그룹은 13명으로 중앙총국을 구성하고 중앙총국 안에 비서부·정치부·조직부·선동부·검사부·노동부 등 6부와 농민과·청년과·여성과·연락과 등 4개 과를 설치했다. 이들의 양동작전은 전조선청년당대회(이하 청년당대회) 개최에서 다시 나타난다.
서울파는 1923년 3월 23일부터 청년당대회를 개최한다면서 2월에 준비위원 명단을 발표했다. 서울청년회의 이영, 천도교 유신회(維新會)의 강인택(姜仁澤), 불교 청년회의 이종천(李鍾天), 대종교 중앙청년회의 민중식(閔中植) 등이 선임되었는데, 일경의 시선이 청년당대회에 쏠린 틈을 타서 2월 20일에 전위당인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했다.
고려공산동맹은 김사국, 이영, 김영만, 장채극, 임봉순 등 17명을 중앙위원으로 선임하고 각도 책임자를 임명했으며, 고려공산동맹 청년부 책임자 이정윤을 책임비서로 하는 ‘고려공산청년동맹’도 결성했다.
명칭을 동맹(同盟)이라고 한 것도 코민테른의 승인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강령에는 당(黨)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3월 23일부터 열린 청년당대회에는 94개 단체, 200여 명이 참가했는데 국제공산청년회와 일본공산청년회 등에서 축하문을 보내와 국제연대를 과시했다.
당초 집회를 허가했던 일제는 청년당대회의 성격과 주도 인물을 모두 파악하고 난 후인 청년당대회 마지막 날(3월 29일) 밤 집회 금지령을 내려 대회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서울청년회도 이미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해 감출 것은 감추었다. 일제 고등경찰과 치열한 두뇌싸움을 전개한 것이다.
서울청년회가 사회운동을 주도하자 코민테른 파견원 김찬(金燦)과 박일병(朴一秉) 등은 일본 유학생들 중심의 토요회(북성회)가 1922년 10월 결성했던 무산자청년회를 확대 강화해 대응하기로 했다.
김찬, 박일병 등 22명은 1923년 8월 서울 관훈동 싱거 미싱회사 사무실에서 새로운 청년회 건설을 결의했다. 단체 명칭에 ‘무산(無産)’자가 들어가면 당국이 사사건건 간섭하고 전단 한 장도 마음대로 살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무산(無産)’ 대신 ‘신흥(新興)’자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해 9월 ‘경성신흥청년단’ 창립 총회 집회계를 냈지만 일제는 이 또한 불허했다. 결국 1924년 2월 코민테른 파견원과 토요회가 연합한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했다.
김찬·박일병 등은 서울청년회와 합동할 것을 제의했지만 이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청년회는 거부했다. 대신 신흥청년동맹이 결성되는 1924년 2월 서울파는 조선청년총동맹 발기준비회를 열었다.
“계급적 대단결을 목표로 청년운동의 통일을 도모하고,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기도하고, 조선 민중해방운동의 선구가 되기 위한 조직”이라고 선언했다.
1924년 4월 21일, 지방에서 올라온 대표들이 경운동(慶雲洞) 91번지 숙소에서 일제히 서울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으로 몰려들면서 청년총동맹 발기대회가 열렸다.
서울청년회의 한신교(韓愼敎)가 사회를 보았는데 30~40여 통의 축전(祝電)과 223개 단체에서 600~700명이 참가한 대규모 대회였다.
동아일보(1924년 4월 25일)는 장 내에 종로경찰서의 경관이 다수 출장해 팔에 ‘호위(護衛)’라는 붉은 완장을 차고 단속해 분위기가 긴장됐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청년총동맹에 신흥청년동맹도 가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 시기 사회운동의 중심은 서울청년회였다. 서울청년회는 25명의 중앙집행위원에 이영, 박원희(김사국의 부인), 최창익, 임봉순 등 자파뿐만 아니라 김찬, 김단야, 조봉암, 신태악 등 신흥청년동맹 계열도 선임해 명실상부한 전국 단일의 청년단체임을 과시했다.
223개 단체, 4만3000여 명의 회원을 둔 청년총동맹은 청년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농민(소작)운동, 사상운동, 여성운동 등 모든 운동의 전위를 자임했다. 서울청년회는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코민테른 조선지부를 자신들이 창건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코민테른의 생각과는 달랐다. 코민테른은 국내에 확고한 기반을 가진 서울청년회보다 자신들이 직접 보낸 파견원들에 의해 공산당이 건설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8. 화요회·북풍회 ‘아서원’서 조선공산당 결성하다
국내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서울청년회는 조선공산당을 창당해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인 화요회는 서울청년회에 공산당 창당의 주도권까지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화요회는 북풍회를 끌어들여 당 창건에 나섰다
1925년 4월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렸던 수운회관. 이 행사는 조선공산당 창당 날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사진가 권태균]
1925년 4월. 일제 경찰(日警)은 정신 없었다. 4월 15∼17일 ‘조선기자대회’가 열릴 예정인 데다, 20일부터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24년 1월 출옥한 박헌영·임원근·김단야가 동아·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자들 중에는 이른바 ‘주의자’들이 많았다.
4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수운회관)에서 열린 ‘조선기자대회’는 1921년 한인 기자들이 조직한 무명회(無名會)가 주최한 것으로, 당초 2월에 열기로 했다가 4월로 연기된 행사였다.
연기 이유는 조선공산당 창당 날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자대회 마지막 날인 17일에는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서 간친회가 열렸는데 일경의 시선은 각종 언론 대표 693명이 모인 기자대회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상춘원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3·1운동을 기획한 곳이기도 했다.
일경은 조선기자대회 행사가 별일 없이 끝난 데 안도할 사이도 없이 4월 20일부터 시내 장곡천정(長谷川町)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이하 민중대회)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4월 18일까지 민중대회에 참가 의사를 밝힌 단체 수는 노농단체 263개, 청년단체 100여 개, 백정 등 신분 해방 단체인 형평단체 18개, 사상단체 44개 등 도합 425개나 되었다.
그러나 민중대회는 서울청년회 계열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샀다. 민중대회 배후에 화요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청년회는 1925년 4월 7일 서대문 한성강습원(漢城講習院)에서 230여 개 단체가 모여 ‘전국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전국연합회(이하 연합회)’를 결성했다.
연합회는 결의문에서 “화요회 일파가 주최하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는 그 소집 시기와 방법, 주최의 동기로 보아서 운동선(線)을 규란(糾亂)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반대 대회를 개최한다”고 결의했다. 민중대회가 조선 민중의 투쟁 역량을 나누어 결과적으로 일제를 이롭게 한다는 논리였다.
1 서울 낙원동 민중대회 준비회 앞. 일제가 교통까지 막고 민중대회를 금지시킨 데 대해 관련자들이 항의하고 있다. 2 기자간친회가 열렸던 상춘원. 일경의 시선이 상춘원에 쏠린 틈을 타서 화요회는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연합회는 조선 사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을 분규와 혼란으로 규정짓고 그 원인은 “화요회 일파, 해외에 있는 전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 일파의 수령(首領) 등에 있다”면서 “아등(我等)은 조선운동전선의 통일과 정의를 위해서 화요회 일파 및 전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파 수령 등을 철저히 구축하겠다”고 결의했다.
서울청년회는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인 화요회가 자파의 세력 확장을 위해 국내 운동선을 분열시킨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연합회는 화요회 일파의 죄악서(罪惡書)를 작성해 발표하고, 화요회 성토 전국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했다.
주목할 것은 서울청년회에서 화요회의 뿌리인 이르쿠츠크파뿐만 아니라 상해파도 격렬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결의문은 ‘해외에 있는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파 수령’ 등에 대해서 ‘저들이 조선운동선상에서 범한 상세한 죄악서를 발표하되 특히 흑하사정(黑河事情: 자유시 참변)과 40만원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적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르쿠츠크파에 대해서는 독립군을 무차별 학살한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묻고, 상해파에 대해서는 레닌 자금 횡령 사건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요회에 대한 서울파의 공세는 일제가 18일 밤 11시쯤 돌연 민중대회 불허를 통보하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로 옮겨갔다. 19일 아침 민중대회 관계자들은 낙원동 대회준비회로 몰려들었으나 일경에 의해 해산되었다.
일경은 준비회 정문과 집안 곳곳에 정·사복 경찰들을 배치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봉쇄했다. 그러자 민중대회 관계자 300여 명이 오후 3시쯤 낙원동 파고다 공원으로 몰려들었지만 다시 일경에 의해 공원 밖으로 쫓겨났다.
밤 9시쯤에는 종로 2가 단성사와 우미관 앞에 2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붉은 기 5개를 들고 ‘전조선 민중운동자 대회 만세!’ ‘무산자 만세!’라고 외치며 종로 3가 방향으로 진행했다.
가두시위에 야시(夜市)에 나왔던 수천 명의 군중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깃발 중에는 ‘무리한 경관의 압박에 반항하자!’라는 내용도 있었다. 종로경찰서의 송천(松川) 경부보는 예비경비대와 사복 경관, 기마경찰대 등 50여 명을 출동시켜 진압했다.
동아일보(1925년 4월 22일)는 ‘시위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은 물론 거리에 번적거리는 사람은 부인만 빼놓고는 누구든지 닥치는 대로 곤봉으로 구타를 하는 등 극히 폭력적으로 해산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밤 10시쯤에야 단성사 앞에서 시위 군중을 겨우 해산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저항은 격렬했다.
일경은 시위 광경을 촬영하던 시대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부수거나 구타하고 사진을 압수해 언론계와 법조계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일경은 마산청년회원 김상주(金尙珠), 대구청년회원 신철수(申哲洙), 서울청년회원 정용석(鄭溶錫), 신흥청년동맹회원 김창준(金昌俊) 등 주모자 15명을 체포했다.
이 중 마산청년회원 김상주는 이틀 전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이었다. 이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시위를 조직한 세력이었다. 조선기자대회와 민중대회는 화요회가 조선공산당 창당 움직임에 쏠릴 일제의 정보망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일경의 눈이 기자간친회가 열리는 상춘원에 쏠려 있던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서울 황금정(을지로)의 중국음식점 아서원(雅<53D9>園) 2층 방에 20여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김재봉·김찬(김낙준)과 김약수, 윤덕병, 조봉암, 조동호(趙東祐:조동우), 송봉우, 유진희, 독고전 등이었다.
겉으로는 주연(酒宴)을 가장했지만 코민테른 파견원 김재봉이 ‘오늘의 집회 목적은 공산당 조직을 논의하는 데 있다’는 개회 선언을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공산당 결성을 위한 것이었다.
김약수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지방 대표들의 현지정세 보고 때 신의주 대표 독고전(獨孤佺)은 ‘국경 지방의 사상 동향이 사회주의자들에게 고무적이다’고 보고했고, 이틀 후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되는 마산의 김상주(金尙珠)는 ‘공산주의 사상이 점차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장래가 유망하다’고 보고했다.
이것이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하는 제1차 조선공산당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숱한 파란과 족적을 남긴 조선공산당은 이렇게 출범했다. 이 대회의 의사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 내용을 파악하려면 체포되었던 관련자들의 진술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대략 김찬, 조동호, 조봉암 3명을 전형위원으로 선출해 이들에게 중앙집행위원 7명과 중앙검사위원 3명의 선임을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
7명의 중앙집행위원은 책임비서 김재봉, 조직부 조동호, 선전부 김찬, 인사부 김약수, 노농부 정운해, 정경부 유진희, 조사부 주종건이었고 중앙검사위원은 윤덕병, 조봉암, 송봉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봉·김찬·조동호·조봉암 등은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인 화요회에 속했고, 김약수·송봉우·정운해는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인 북풍회(북성회) 소속이었다.
조선공산당은 국내 최대 사회주의 운동세력이었던 서울청년회를 배제한 채 화요회와 북풍회가 연합해 결성한 것이었다. 당의 명칭을 고려(高麗)가 아니라 조선(朝鮮)이라고 한 것에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악명 높은 파쟁을 연상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코민테른 파견원들의 계보를 따지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관련자들이므로 이르쿠츠크파가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것이었다. 그래서 북풍회의 김약수는 일경에 체포된 후 화요회가 주도한 당 건설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아서원에 모였을 때 최초의 집합인 것처럼 자신에게 보이게 했고, 화요회가 북풍회를 서울청년회와 대립하는 데 끌어들였다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은 일종의 장식물로 만들면서 비밀에 속하는 일은 모두 화요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처리했다고도 말했다.
김약수는 민중운동자대회에 소비한 5000여원에 대해서도 진술했는데(<金枓佺 外 6人 調書>) 결국 코민테른 자금이 유입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책임비서 김재봉과 김찬, 유진희 등은 훗날 일제 신문조서에서 ‘강령, 규약 등을 통과시켜야 했지만 때가 때인 만큼 중앙집행위원회에 맡기기로 하고 오후 4시쯤 산회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 창건 대회가 3시간 만에 끝나면서 필수적인 당 강령과 규약도 통과시키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당 강령은 전해지지 않지만 김찬은 일제 신문조서에서 당의 당면 문제 슬로건을 “일본제국주의 통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 8시간 노동제·최저임금제·사회보험제, 여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평등,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중국 노동혁명 지지·소비에트 연방의 옹호 등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민족개량주의자와 사회투기주의자의 기만을 폭로하자’는 것도 들어 있었다. 이렇게 조선공산당은 결성됐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는 일과 일제의 수사망을 따돌리면서 세력을 확장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9 신의주 사건
조선공산당 망친 신의주 청년들 ‘신영웅주의’
사회주의 운동은 국제주의 운동이기 때문에 국제적 관점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계량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일(對日) 항쟁기 때 한인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이런 국제적 시각 속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객관화할 능력이 부족했고, 이것이 운동 역량 강화에 많은 장애를 초래했다.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관련자에 대한 재판 내용을 보도한 신문 지면(동아일보, 1927년 4월 3일자). [사진가 권태균]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지 약 7개월 후인 1925년 11월 22일 밤 10시쯤. 국경도시 신의주 노송동 경성식당 2층에선 신의주의 청년 단체인 신만청년회 집행위원장 김득린(金得麟) 등 28명이 모여서 결혼식 피로연을 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층에서는 신의주의 변호사 박유정(朴有楨)과 의사 송계하(宋啓夏)·최치호(崔致鎬)가 신의주 경찰서 순사 스즈키 도모요시(鈴木友義), 한인 순사 김운섭(金運燮)과 회식하고 있었다. 스즈키와 김운섭은 2층의 결혼식 피로연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년회원들이 술김에 먼저 친일 변호사와 의사, 일경(日警)들에게 시비를 걸면서 ‘신의주사건’이란 대사건이 촉발되었다.
청년회원 김경서(金景瑞)가 박유정과 스즈키에게 “나의 동지 결혼식 피로연인데 축배를 받으라”고 강권하면서 시비가 붙자 2층에 있던 청년회원 10여 명이 내려와서 “순사를 때려라. 잘난 체하는 변호사, 자산가를 때려 부수라”면서 집단 구타를 했던 것이다.
스즈키는 식당 밖 일본인이 많이 사는 영정(榮町) 노무라(野村)상점으로 도주했다. 청년들이 상점 안까지 쫓아가서 스즈키를 구타하자 상점 주부는 이웃집으로 달려가서 신고했고, 일경이 달려오자 청년들은 일본어로 ‘적(敵)이 왔다’고 호응하면서 도주했다.
그 전에 집행위원장 김득린은 박유정 등을 구타하고 나서 오른쪽 팔의 붉은 완장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성공했다’고도 말했다. 신의주 경찰서 측은 붉은 완장을 가리키면서 ‘성공했다’고 말하고 경찰을 ‘적’으로 지칭한 것 등이 ‘혁명’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치밀한 내사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청년회원들은 다음날 밤 8시쯤 진사정(眞砂町) 영생루(永生樓)에 모여 ‘체면 있는 사람을 음식점에서 구타하면 체면상 고발 못한다’ ‘관권 및 자산가를 구타한 축하회를 개최하자’ 등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는데, 이것도 고스란히 일제 정보망에 들어갔다.
모스크바 공산대학. 고려공산청년회 박헌영은 이 대학 출신이었는데 청년회 결성 후 비밀리에 21명의 한인 학생을 뽑아서 유학을 보냈다
김경서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서들을 압수했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이 상해의 여운형을 통해 코민테른으로 보내는 비밀문서들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의 회원 자격 사표(査表) 및 통신문 3통’ 등의 문서들을 통해 일제는 국내에 이미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고려공청)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결성 다음날인 1925년 4월 18일, 서울 훈정동 4번지 박헌영의 집에서 20여 명의 ‘주의자’가 모여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했던 것이다.
박헌영이 개회사를 하고 김단야가 낭독한 강령 및 규약을 통과시켰는데, 참석자들은 ‘동아일보’의 박헌영·임원근, ‘조선일보’의 김단야·홍증식, ‘시대일보’의 조리환(曺利煥), 노동총동맹 권오설(權五卨), 신흥청년동맹 김찬·김동명·조봉암 등과 각 지방 청년회의 대표들이었다.
그 가운데 마산 청년대표 김상주는 하루 뒤에 민중대회 개최 금지 항의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었는데, ‘신의주사건’으로 비밀결사 조직 혐의가 추가되었다. 고려공청은 조봉암·김단야·박헌영 3인을 전형위원으로 선출해 7인의 중앙집행위원과 3인의 중앙검사위원의 선임을 맡겼다.
증언이 일치하지 않지만 중앙집행위원은 책임비서 박헌영, 국제부 조봉암, 조직부 권오설, 교양부 임원근, 연락부 김단야, 그리고 김찬·홍증식 등이 선임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공청도 조선공산당처럼 화요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조선기자대회, 민중대회 등에 일경의 시선을 쏠리게 해놓고 당과 청년회를 결성했기에 조직 결성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일제에 국경지방 청년들의 소영웅주의 행태가 조직의 기밀을 넘겨준 셈이었다.
박헌영은 비밀문서를 ‘조선일보’ 신의주지국 기자 임형관(林亨寬)에게 주어 상해로 보내게 했는데, 신의주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독고전·임형관은 일경의 주목을 받는 자신들보다 김경서의 집에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리라고 판단했다가 거꾸로 피해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루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4월에 허겁지겁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를 제정해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했다.
제령 7호의 제1조는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가 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코자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고, 제2조는 “이를 선동한 자의 죄도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령 제7호로써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는 이른바 ‘주의자’들을 처벌하기가 애매하자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을 제정한 것이었다.
치안유지법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본토의 사회주의자들도 겨냥한 것이었다. 제1조는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그 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으로서 ‘사유재산제도 부인’이 추가되었다.
제2조와 제3조는 ‘이의 실행을 협의한 자나 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 본토와 식민지 또는 조차지였던 조선, 대만, 화태(樺太:하얼빈), 관동주(關東州:대련), 남양제도 등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 고려공청은 결성 직후 각각 조동호·조봉암을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회(이하 국제공청)에 보내 승인을 받으려 했다. 승인을 받을 경우 공산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계기도 되고, 예산을 비롯해 많은 물적 지원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요회는 어떻게 국내의 최대 운동세력이었던 서울청년회를 배제한 채 조공과 고려공청을 조직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을까? 서울청년회, 곧 서울파는 화요회의 조선공산당보다 2년여 빠른 1923년 2월(일제 정보자료는 1924년 10월) 고려공산동맹(이하 공산동맹)을 결성했다.
공산동맹은 책임비서 김사국을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부로 보내 코민테른 국내지부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책임비서 김사국이 직접 간 것은 경성자유노동조합 사건으로 수배 중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코민테른 승인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승인을 거부했다. 서울청년회는 국내 사회운동을 장악하는 세력이 국내 공산당도 조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코민테른의 생각과 달랐다. 이 무렵 코민테른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지휘부가 아니라 러시아 공산당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초기만 해도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사회주의 혁명이 확산되리라고 생각했다. 레닌이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볼셰비키 노선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모아서 코민테른을 결성한 것 자체가 러시아 혁명을 유럽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볼셰비키들이 특히 주목한 나라는 자본주의가 발달했던 독일이었는데, 독일혁명이 지지부진하면서 러시아의 볼셰비키 사이에서 노선 투쟁이 발생했다. 크게 보아서 영구혁명론과 일국(一國)사회주의론이 대립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장한 영구혁명은 원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50년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의 동맹자에 대한 호칭’에서 사용한 용어였다.
영구혁명론의 핵심은 후진국인 러시아 일국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유럽 혁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으로서 세계혁명론이라고도 한다.
이 노선에 따르면 러시아 공산당도 세계 혁명에 우선 종사해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 공산당이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공산당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주장할 수 없었다. 여기에 맞서 스탈린이 제기한 일국 사회주의론의 핵심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뒤따르지 않아도 러시아 일국만으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이 노선에 따르면 러시아 공산당은 전 세계의 모든 공산당을 지휘할 수 있고, 각국 공산주의자들 역시 러시아 혁명의 보위를 최우선의 혁명 과제로 삼아서 활동해야 했다.
1922년 5월께 레닌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에 들어가면서 스탈린의 권력이 강해지고 코민테른은 사실상 러시아 공산당의 하부조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코민테른 지부와 각국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소련에 대한 충성이 가장 우선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국내 최대 운동세력이라는 기반으로 코민테른의 승인을 획득하려 했던 서울청년회의 공산동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을 수가 없었다.
화요회가 서울청년회를 종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문서를 코민테른에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사국이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부의 노선 변화의 의미를 정확히 간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화요회도 일국 사회주의론이 한국의 혁명노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화요회로서는 국내 공산주의 운동 주도권 장악에 국내의 지지보다 해외, 곧 러시아의 지지가 중요해져 자파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이른바 국제무대에서 서울청년회는 화요회에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10. 2차 조선공산당
순종 인산일에 6·10 만세운동 주도한 고려공청
대일 항쟁기 때 조선공산당은 일본공산당과 함께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의 잘 정비된 고등경찰은 조산공산당이 본격적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일제 검거로 무너뜨리곤 했다. 그러나 조공도 여기에 맞서 순종 인산일에 6·10만세 시위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했다.
1926년 순종 인산일에 발생한 6·10만세 시위 장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과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1926년 순종 인산일에 발생한 6·10만세 시위 장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과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신의주 사건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고려공청)는 일경의 급습에 대거 붕괴되었다. 중앙집행위원 7명 가운데 김두전(金杜佺), 유진희(兪鎭熙), 정운해(鄭雲海)가 검거되었고,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도 체포되었다.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출국한 조동호를 제외하면 김재봉(金在鳳), 김찬(金燦), 주종건(朱鍾建) 세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코민테른 파견원으로 거처가 불분명했던 김재봉·김찬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원 검거’였다.
서울 돈의동 명월관 뒤 김미산(金美山)의 한옥에 은신해 있던 김재봉은 김찬·주종건과 후계당(黨)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세 사람은 간부 후보였던 강달영(姜達永), 홍남표(洪南杓), 김철수(金綴洙), 이봉수(李鳳洙), 이준태(李準泰) 등에게 후계당을 맡기기로 했다. 책임비서 김재봉은 조선일보 지방부장 홍덕유(洪悳裕)를 통해 조선일보 진주지국장 강달영(姜達永)을 만났다.
경남 진주·합천의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복역했던 강달영은 중앙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후계당 재건에 적임자였다. 민족주의자였다가 사회주의로 전향한 강달영은 1924년 4월 화요회 계열의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이기도 했다.
또한 동아일보 경제부장 이봉수(李鳳洙), 시대일보 업무국장 홍남표(洪南杓)와는 같은 언론계 인사로 안면이 있었고, 새로 고려공청 책임비서가 된 권오설과 이준태와는 같은 영남 출신에 노농총동맹 집행위원으로서 친분이 있었다.
김철수와 이봉수는 상해파였지만 분파적 견해를 내세우지 않아 김재봉 책임비서 시절처럼 극심한 내분이 없었다
.
6·10만세시위를 주도한 권오설. 박헌영이 투옥된 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강달영은 조선일보 진주지국장 자리를 조공 경남 간부인 김재홍(金在泓)에게 넘겨주고 상경했다. 1926년 2월 경운동 29번지 구연흠(具然欽)의 집에서 회의를 개최해 책임비서 강달영, 비서부 차석 이준태, 조직부 이봉수·홍남표, 선전부 김철수로 구성된 후계당을 출범시켰다.
고려공청의 새로운 책임비서 권오설은 당 규칙에 의해 자동으로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전덕(全德)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러시아 공산당학교 출신의 김정관(金政琯)까지 모두 7명이 중앙집행위원이었다
일경의 집중 추적을 받던 김재봉과 김찬은 해외 출국 기회를 엿보았다. 이준태가 일제 신문 조서에서 “자기들(김재봉·김찬)은 일시 조선을 떠날 뿐이고 해외에 나가서도 간부의 성질은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그때그때 적당히 지휘할 것(‘강달영 외 48인 조서’)”이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망명지에서 계속 조공을 지휘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김재봉은 고급 담배가 다수 소비되는 것을 매음굴로 의심한 일경에 의해 12월 19일 체포되고 말았다. 상해 밀항에 성공한 김찬은 강달영에게 자신과 조동호·조봉암을 ‘중앙간부 해외부’라고 자칭하면서 ‘대내·대외의 중대한 문제는 언제라도 자신들과 협의해 처리해야 하며, 국제(코민테른)에 보내는 보고문 및 기타 중대한 교섭 같은 것도 전부 임시부(중앙간부 해외부)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달영은 조공 중앙집행위원회 황산(黃山:강달영)이란 가명으로 답장을 보내 조봉암을 중앙위원으로 인정할 수 없고 ‘우리가 대리일지라도 정원을 모두 정해 중앙의 실권을 잡고 있는 이상, 두 동지(김찬·조동호)는 중앙간부 직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중앙의 지도를 받아 일에 종사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반박했다.
레닌이 스위스로 망명해 볼셰비키당을 지도한 적은 있지만 강달영은 김찬 등을 조선의 레닌으로 대접할 생각은 없었다.
강달영이 후계당을 이끌 무렵인 1926년 4월 26일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조공은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일제는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지만 비밀리에 후계진용을 갖춘 조공과 고려공청이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상해로 망명한 김찬은 직접 “곡복(哭服)하는 민중에게 격(檄)함. 창덕궁 주인의 서거에 제(際)하여”라는 격문 5000장을 이삿짐으로 가장해 만주 안동현을 거쳐 고려공청 책임비서 권오설(權五卨)에게 보냈다. 황제라는 표현 대신 ‘창덕궁 주인’이라고 쓴 것이 이채롭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은 고려공청 책임비서 권오설이었다. 그는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공 학생부의 프랙션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시위를 준비했다.
권오설은 천도교 청년동맹 간부이자 조공 야체이카 책임자였던 박래원(朴來源)에게 원고 5종과 200원을 주면서 인쇄를 부탁했다. 박래원은 민창식(閔昌植)과 명치정(明治町:중구) 앵정(櫻井)상점에서 인쇄기 2대를 구매해 약 5만 장의 격문을 인쇄했는데, 서울은 물론 지방에도 배포해 3·1운동 때처럼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해의 김단야가 보내기로 한 거사자금이 도착하지 않으면서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격문을 일단 천도교 잡지사인 개벽사 구내에 있는 손재기(孫在基)의 집에 숨겨두었는데 뜻밖의 사건으로 시위 계획이 탄로났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중국 화폐 위조사건이 발생한 뒤 오사카 경찰서에서 한국인 연루자 세 명의 체포를 종로경찰서에 요청한 것이 계기였다. 이들이 체포될 때 위조지폐와 격문 한 장도 압수되었다.
격문의 출처를 탐색한 결과 권오설이 평북 선천에서 금광을 경영하는 안(安)씨에게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단야로부터 자금이 오지 않자 권오설은 안씨에게 5000원의 자금 지원을 부탁하면서 격문 서너 장을 준 것이 발각된 것이라고 동아일보(1926. 6. 19)는 보도하고 있다.
격문을 인쇄했던 박래원은 손재기 부인과 친했던 개벽사 제본부 여직공이 격문이 담긴 상자를 우연히 발견하고 1~2장을 가지고 간 것이 지폐 위조사건을 수사 중이던 일경에 발각된 것이라고 달리 증언했다.
일경은 천도교 계통의 개벽사 수색 와중에 손재기 집안에 보관 중이던 격문 상자를 발견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것이 6월 4일께였는데 조공의 많은 간부가 체포되거나 수배당했다.
6월 10일 인산일 하루 전 조선총독부는 용산 조선군사령부 소속의 보병·기병·포병 5000여 명에게 시내를 행진하게 하고 3·1운동 발생지였던 파고다공원에 주둔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순종의 시신을 실은 대여(大輿)는 6월 10일 오전 8시에 돈화문을 떠났다. 기마경찰대가 애도행렬을 주시하는 가운데 인산 행렬이 황금정(黃金町:중구 을지로)까지 늘어섰다.
순종의 후사였던 이왕(李王:영왕)과 이강(李堈:의왕)이 탄 마차가 대여 뒤를 따르는 와 중에 8시40분쯤 행렬이 송현동(松峴洞)에 이르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학생 수십 명이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격문이 이왕의 마차 부근까지 휘날리는 가운데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가세하고 기마경찰들이 달려들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9시쯤에 종로 3정목 동양루(東洋樓) 앞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교)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격문을 뿌렸고, 9시20분쯤에는 황금정 부근의 도립 사범학교 학생들도 가세했다.
인산 행렬이 동대문을 지나던 오후 1시쯤에는 동대문 부인병원(婦人病院) 앞에서 양복을 입은 청년 한 명이 깃발을 들고 호각을 불며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자 군중이 대거 가담했고 장사동(長沙洞) 부근에서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 격문을 뿌렸다.
3시쯤에는 동묘(東廟) 앞에서 중동(中東)학교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는 등 인산 행렬이 지나는 곳곳마다 만세시위가 발생했고 일경과 기마경찰이 달려들어 아수라장을 이뤘다.
시위는 고려공청 산하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 대학생들과 중앙고보·중동학교 학생들이 중심인 통동계(通洞系)에서 주도했다.
사건 당일 종로경찰서에 105명, 동대문서에 50여 명, 본정(本町)서에 10여 명 등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순종 인산일에 발생한 6·10만세시위사건이다.
일경은 김찬이 상해에서 화물로 위장해 보낸 격문의 교환증이 강달영을 거쳐 권오설에게 들어간 사실을 확인하고 강달영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7월 17일 명치정(중구)에서 바나나 행상으로 변장한 강달영을 체포했다. 일제의 ‘제2차 조공당 검거(朝共黨檢擧)’라는 사료에 따르면 강달영이 체포 후 일절 자백을 거부한 채 몇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고 전한다.
당시 일제 고등계의 심문은 상해 영사관 경찰에게 고문 받던 병인의용대원 이영전(李英全:본명 이덕삼)이 숨진 데서 알 수 있듯이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나중에 자신이 책임비서라고 자백한 강달영은 투옥 후 고문후유증으로 한때 정신이상이 발생했다.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권오설도 1930년 고문 후유증인 폐렴으로 옥사했다. 전국적으로 100여 명의 관련자가 체포되면서 조공과 고려공청은 또다시 붕괴되었다.
[출처]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중앙선데이
11. 잇따른 수난
조공, 악조건 속 당 재건 … 일경 대검거로 또 붕괴
대일 항쟁기에 조선공산당(조공)의 역사는 조선총독부 고등계 형사들과의 숨바꼭질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운동가와 ‘주의자’를 검거·고문하는 총독부 고등계의 능력과 실력은 세계 제일이었다. 그러나 조공은 이런 일경의 대대적인 검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당을 재건했다.
제3차 조선공산당은 ML당으로 불렸다. ‘마르크스·레닌당’이란 뜻이다. 1928년 초반의 대검거로 인해 제3차 조선공산당도 또 무너진다. [사진가 권태균]
일본 오사카에서 발생한 중국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불똥이 조공으로 번지면서 1926년 6월 4일께부터 조공과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조공과 고려공청은 6·10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조선총독부 고등계가 눈에 불을 켜고 관련자들 체포에 광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해 8월까지 무려 130여 명에 달하는 관련자가 체포되었다.
겨우 검거를 피한 제2차 조공 선전부 책임자 김철수(金綴洙)는 1926년 9월 3일 오후 9시쯤 서울 동소문(東小門:혜화문) 부근의 삼림 속에서 중앙위원 후보 원우관(元友觀)·신동호(申東浩)와 오희선(吳羲善)을 만났다.
한밤중에 동소문 삼림 속에서 조공 재건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이후 강달영의 거처였던 서울 인사동 42번지 집과 동소문 부근 산중에서 10여 차례 회합한 끝에 조공을 재건했다.
이것이 강달영의 뒤를 이은 김철수 책임비서 시대의 제3차 조공인데 조직부 오희선, 선전부 원우관, 무임소 신동호 등을 선임했다.
정상적인 당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김철수가 훗날 일제의 신문조서에서 ‘10회에 걸친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결의는 당원 모집 및 서울계(서울청년회) 동지의 입당 권유였다’고 전하는 것처럼 당원 숫자를 늘리고 서울청년회를 끌어들여 명실상부한 국내 사회주의 세력의 정당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김사국의 묘비 일부. 원래 서울 망우리 묘지에 있던 것이다. 김사국의 묘는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다
신의주 사건과 6·10 만세시위는 제1차, 제2차 조공을 주도했던 화요회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원래 상해파였던 김철수는 그 공백을 서울청년회로 메우려고 했다.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이었던 화요회는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국내 운동기반이 서울청년회보다 약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던 화요회는 몇 차례에 걸쳐 서울청년회와 회합해 통합조건을 논의했다.
1925년 11~12월의 제1차 회합에서 화요회는 서울청년회 리더 김사국을 배제시킬 것을 요구했다. 서울청년회의 영수를 배제하라는 요구를 서울청년회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양파(兩派)의 제2차 회합은 1926년 1~2월에 있었는데 화요회는 제2차 조공의 중앙집행위원 김철수·이봉수가 대표였고 서울청년회는 이영(李英)·박형병(朴衡秉)·이정윤(李廷允)이 대표로 나섰다.
화요회는 김사국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당의 중앙간부 숫자에서도 화요회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김사국은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요양(療養)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울청년회는 화요회의 요구사항을 수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요회는 이를 거부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서울청년회 계열의 합법적 사상단체인 전진회에서 1926년 2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발기를 계획했기 때문이라고 내세웠지만 서울청년회에 주도권을 빼앗길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자 1926년 5월 서울청년회에서 제3차 회합을 제의했다. 서울파의 이영·이정윤과 화요회의 이준태·김철수가 회합을 했는데, 서울청년회에서 김사국 배제와 당 간부를 화요회가 더 많이 차지해도 좋다고 양보했지만 화요회는 다시 “중앙 간부는 화요회에서 특정하는 인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서울청년회 출신 간부도 화요회에서 선임하겠다는 것으로서 서울청년회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었다. 꼬르뷰로 국내부 출신의 이준태는 “우리 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은 코민테른 한국지부인 만큼 1대1 합당이란 있을 수 없다”면서 “서울파는 개별적인 입당 절차를 밟고 당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서울파의 실체 자체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서울청년회는 당 대 당 통합파와 개별 입당파로 나눠졌다. 코민테른의 권위에 복종하려는 인물들이 개별 입당파였다.
강달영이 1926년 4월 상해의 김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울청년회 김사국파에 대한 분해운동이 주효해서 개인 입당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화요회는 서울청년회를 해체시키거나 약화시켜 주도권을 계속 장악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청년회의 리더 김사국이 1926년 5월 8일 병사하면서 개별 입당파가 크게 증가했다. 그 직후 6·10 만세시위가 터져서 화요회가 대거 검거되면서 김철수가 책임비서가 된 것이다.
김철수는 ‘나를 일부에서는 상해파라고도 하고, 화요회라고도 하지만 나 자신은 파벌 관념이 없었다’ 라면서 서울청년회 계열 통합에 나섰다. 당 대 당 통합을 반대했던 화요회 출신의 조공 비서부 차석 이준태는 이미 검거돼 투옥 중이었다.
이준태는 고문 피해자들과 연명으로 고등계 형사들을 고문 혐의로 경성지법 검사국에 고소할 정도로 투쟁성은 있었지만 화요회라는 파당적 시각이 너무 강했다.
김철수는 이동휘의 레닌 자금을 국내의 최팔용에게 전달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와세다대 출신의 김철수는 1921년 상해에서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했고, 1922년 9월에는 이동휘의 심복 김립(金立)에게 1만원을 받아서 서울 영락정 욱(旭)여관에서 최팔용에게 전달했었다.
김철수는 자신의 임무는 후계 당 체제 건설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철수는 “우리는 조만간 도망하지 않으면 안 될 몸이므로 후사를 맡길 수 있는 인물을 한 사람 선택해서 중앙간부에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서울청년회도 화요회도 아닌 무소속을 물색했다.
그가 바로 대한제국 시의(侍醫) 안왕거(安往居)의 아들이자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의사 안광천(安光泉)이었다. 1926년 9월 20일 입당한 안광천이 3개월 만에 선전부 책임자가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안광천이 소개한 양명(梁明)도 중앙위원으로 선임됐다. 김철수 책임비서 시대는 1926년 9월부터 11월까지 불과 3개월 정도에 그치는데, 김철수는 1926년 12월 6일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제2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선임한 것이다.
선전부장 김준연(金俊淵), 선전부원 한위건(韓偉健), 조직부원 하필원(河弼源)·권태석(權泰錫) 등의 진용이었다.
제2차 당 대회에서 조공은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을 한다. 민족단일당 결성을 결의한 것이다. 이것이 이듬해 사회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전선체인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된다.
이런 작업을 마친 김철수는 1926년 12월 중순 국내를 몰래 빠져나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조공 재건상황을 코민테른에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모스크바로 갈 생각이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의 ‘선봉(先鋒)’사에서 상해로부터 온 조공 ‘중앙간부 해외부’의 김찬을 만났다.
김찬은 김철수가 재건한 조공은 물론 제2차 당 대회 자체를 부인했다. 자신들로 구성된 해외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재건된 당 조직은 무효이자 규율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김찬은 상해로 가서 극동부 간부의 지시를 받자고 주장했으나 김철수가 거절하고 모스크바로 떠나자 모스크바까지 쫓아와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상해파의 윤자영(尹滋瑛)과 서울청년회의 김영만(金榮萬)도 모스크바로 와서 김철수를 도왔다.
이때 코민테른은 김철수가 재건한 조공을 승인하는 한편 11개 조의 지령을 내려 김찬·조봉암 등으로 구성된 해외부 해체를 지시했다. 11개 조는 ‘①조선운동은 민족혁명 단일전선이 필요한데 노동자, 지식계급, 소부르주아, 일부 부르주아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 당대회에서 결정한 민족단일당 조직을 지지한 것이다. 코민테른은 또 ‘③조선의 현상에서는 단일민족당을 만들려고 하면 단일공산당이 있어야 한다, ④공산주의자 등이 민족단체에 들어가 활동할 때는 공산주의자임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 단체 안에 있는 노동자·농민을 토대로 하여 전체 단체를 좌경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⑧아직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은 공산주의자들은 유일의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기치 아래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조선공산당도 전체 공산주의자를 망라하는 데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해외에 있는 단체 및 개인 등이 조선운동에 접근해서 지도적 간섭을 행하기 때문에 당 파쟁을 야기시킨다.
국제당으로서는 앞으로 지도적 간섭을 행하지 말 것을 엄명하며 중앙간부는 해외부를 철폐할 것을 명한다’고 지시했다. 코민테른의 지지를 얻어 당권을 장악하려던 해외부는 오히려 코민테른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안광천은 1926년 12월 6일부터 1927년 9월 20일께까지 10개월 미만의 짧은 기간 동안 책임비서로 있으면서 당 조직을 확장시키고 특히 민족단일당인 신간회를 발족하고, 해외부를 확대했다. 만주총국과 상해부, 일본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일경이 조공 재건을 눈치채자 1927년 9월 20일께 책임비서를 김준연(金俊淵)으로 교체했다가 3개월 만인 1927년 11월께 다시 김세연(金世淵:본명 김성현)으로 교체했다.
이후 1927년 말부터 김철수 등이 국내로 밀입국했다는 첩보가 입수되다가 이듬해 2월 3일 <ec2e>동아일보<ec2f>에 실린 ‘ML당을 중심으로 종로서(鐘路署) 돌연 검거에 착수’라는 보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검거가 다시 시작되면서 조공은 또 붕괴되었다. </ec2f></ec2e>
[출처]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중앙선데이 제274호
12. 조선공산당의 해체
‘민족 단일당’ 신간회, 열 달 새 지회 100개로 勢 확장
화요회에서 조직했던 조선공산당(조공)은 김철수 책임비서 시절부터 서울청년회 계열이 대거 입당했다. 제4차 조공에서는 노동자 출신의 서울청년회 계열 차금봉이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러나 일경의 대검거와 식민지 상황에 맞지 않는 코민테른의 재조직 지시로 조공은 해체되고 만다.
안동예안지구 신간회 지회 결성을 기념하는 사진이다. [사진가 권태균]
서울청년회의 비밀당 고려공산동맹과 화요회의 비밀당 조공은 표면적으로 민족주의 세력과의 민족협동전선, 즉 민족 단일당 결성에 나섰다.
먼저 시작한 것은 서울청년회여서 1926년 7월 조선물산장려회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발족했다. 조선민흥회는 “정치, 경제, 산업 등에서 조선민족의 공통의 이익을 목적으로··· 각 계급을 망라한 조선민족의 단일전선을 조직한다” (동아일보 1926년 7월 10일)고 선언했다.
조선민흥회는 발기 취지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와 혁명적 민족주의자가 서로 제휴하여 공동전선을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 분석했다. 혁명적 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란 일본의 지배하에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민족 개량주의자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1926년 5월 서울청년회의 리더 김사국이 병사하고, 1926년 9월 조공 책임비서가 된 상해파 출신의 김철수가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공 입당을 독려하면서 서울청년회와 화요회의 대립 구도는 약해졌다.
코민테른은 김철수가 재건한 조공을 승인하면서 내린 11개조 지령문에서 가장 먼저 ‘조선은 민족혁명 단일전선이 필요한데 노동자, 지식계급, 소부르주아, 일부 부르주아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시했기 때문에 조공도 민족 단일당 결성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조공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신간회(新幹會) 결정을 추진하는데, 1927년 1월 19일 발표한 신간회 3개 강령은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함’이었다.
‘기회주의’란 물론 자치를 주장하는 민족 개량주의를 뜻했다.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5회에 걸쳐 ‘민족적 경륜’이란 사설을 썼는데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의 식민 지배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그리고 천도교 신파의 최린(崔麟) 같은 민족 개량주의자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1 신간회원 검거를 보도한 중외일보. 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자 일제는 대검거로 맞섰다. 2 코민테른 대회 광경. 1928년 코민테른이 계급 대 계급 전술을 채택하면서 국내 좌우 합작운동도 위기를 맞았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要史)>는 이에 대해 “사회주의 운동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 및 동경 유학 조선인 일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어 마침내 (동아일보의: 괄호는 인용자의 설명) 일부 간부의 경질까지도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쓸 정도였다.
<고등경찰요사>는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화합하여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형성해서 각지에 성토문을 발송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고 전한다. 그 여파로 이광수는 동아일보를 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광수의 사설 ‘민족적 경륜’은 거꾸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결집시켰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가 공표되자 조선민흥회도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고 신간회와 합동을 서둘렀다.
신간회는 조선민흥회의 합동 조건을 모두 승인해서 1927년 2월 15일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명실상부한 민족 단일당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회장은 민족주의자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은 사회주의자 홍명희(洪命憙)였고, 각 부서도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반분했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만인 1927년 12월 27일 지회 100개 돌파 기념식을 거행할 정도로 급격히 확장되었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는 “본회(本會: 신간회)는 조선공산당의 지지가 있었고 각지 사상단체에서도 극력 지원했다”고 분석했다. 신간회의 배후에 조공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1928년 초 전국 지회 총수 143개, 회원 2만여 명에 달하게 되자 이에 놀란 일제는 1928년 2월의 신간회 정기대회를 금지시키는 한편 1928년 2월 2일부터 ML당에 대한 대검거에 나섰다. ML당은 김철수→안광천→김준연→김세연 책임비서로 이어지는 제3차 조공을 뜻하는 것이다.
제3차 조공은 1926년 9월부터 1928년 2월까지 1년5개월에 불과하지만 책임비서가 자주 교체된 것은 일경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때의 대검거로 30여 명이 체포되면서 제3차 조공은 또 붕괴되었다.
그런데 대검거가 진행되는 와중인 1928년 2월 27일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阿峴里: 현 마포구 아현동) 537번지 김병환(金炳煥) 집에서 조공 제3차 당 대회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조공 당책을 통과시키고, 코민테른 결정서를 가결했다. 이는 이정윤이 1928년 1월 상해의 코민테른 기관에서 받아온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 결정서’였다.
코민테른은 이 문건을 통해 “조선의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임무는 완전한 당의 실현이며, 상존하는 모든 종파 및 그룹의 즉각적인 해체이다. 조선공산당은 편협하게도 지식계급과 학생의 결합체로 되어 있다··· 새 중앙집행위원회와 그 밖의 당 지도기관에 노동자 출신을 더 많이 배치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조공은 이 대회에서 29개 항에 달하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에 보고할 국내 정세’란 논강(論綱)을 채택했다. “유럽과 미국 특히 일본 자본주의의 침입은 조선 재래사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였다. 서양과 같은 근대적 대공업은 당초부터 발달하지 않았기에 조선에는 강대한 부르주아지도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대한 집단도 없다”면서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낱낱이 보고했다.
예컨대 조선 내 일본인 수는 전체 농민 수의 0.028%에 불과하지만 소유 토지는 56.6%라는 내용 등이다.
보고서의 내용은 이어진다. “조선의 객관적 정세는 혁명적이다. 그러나 직접혁명의 조건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시민적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투쟁은 노동대중의 민주적 집권자를 갖는 인민공화국을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 민족해방운동은 이른바 자치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또한 사업 보고에서는 “홍명희를 수반으로, 권태석·송내호(宋乃浩) 두 사람을 보조자로 신간회 안에 프락치를 설치하고 신간회로 하여금 당 정책을 구현하도록 노력 중”이라고 말해서 신간회를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검거된 간부 대신 새로운 중앙위원을 선임할 전형위원으로 정백(鄭栢)·이정윤(李廷允)·이경호(李慶浩)를 선임했는데, 정백과 이정윤은 모두 서울청년회 계열이었다.
그런데 당 대회가 끝난 28일 당일 정백·이정윤 두 전형위원이 종로서에 체포되었을 만큼 일제 수사망은 바싹 좁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위원은 3월 10일 석방되는 윤택근(尹澤根)에게 새 중앙위원 명단을 주어 전형위원 이경호에게 건네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안광천, 차금봉(車今奉), 김한경, 한명찬, 김재명, 이성태, 양명, 한해, 윤택근 등이 새 간부로 선임됐다. 책임비서는 차금봉이었다.
차금봉은 용산 기관차화부 견습공 출신으로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선노동공제회를 주도했고, 또 1923년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정재달(鄭在達)을 동소문 근방의 산중에서 구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당 지도기관에 노동자 출신을 더 많이 배치해야 한다’는 코민테른 결정서가 영향을 미쳐서 최초로 노동자 출신 책임비서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8년 6월 중순 이성태가 체포되자 당 조직이 드러난 것으로 판단한 간부들은 6월 20일 공덕리(孔德里: 현 마포구 공덕동) 뒷산에서 회합해 일시 해산을 결정해야 할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다. 아니나 다를까 1928년 7월 5일부터 다시 대검거가 시작돼 10월 5일까지 모두 175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중앙위원 한명찬의 압수품 중에서 유독 사상 색채가 없는 ‘재계연구’(財界硏究: 1928년 4월 발행)란 잡지와 명반(明礬)을 발견하고 불에 쪼여 검사한 결과 명반으로 쓴 조공 세칙 및 정치 논강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143명이 검사국에 송치되면서 노동자 출신이 책임비서였던 제4차 조공도 붕괴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조선의 공산당원은 대부분 지식계급 및 학생”이라면서 조공의 승인을 취소하고 재조직을 요구하는 이른바 ‘12월 테제’를 발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간회도 새 중앙집행위원장 김병로(金炳魯) 집행부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품은 지회들의 반발이 잇따르다가 1931년 5월 대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해소 요구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는 1928년의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스탈린의 극좌 정책에 따라 코민테른이 계급 대(對) 계급 전술로 전환하면서 국내 좌우 합작운동 지속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한국인의 시각이 아니라 코민테른의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봐야 했던 식민지 사회주의자들의 한계였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끝)
[출처]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중앙선데이 제2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