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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 章 =별 장
※ 以前 모두가 다 그렇지만 이것은 읽고、보고 등 삶을 살면서 느낌 받은 바를 말한 것이니 醉醒狂氣의 말을 베껴쓴 거나 진배없다。표절인 것이다 차 운행 중에 머리파장이 고뇌를 터뜨려서 얻은 것이 많음으로(위험하지만 안잊기위해서 그때그때 적다。긴 내용같으면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우고 기술한다.)名 주마탑승록, 마상록(馬上錄)이라 해두자.
法이 뭣인가? 法 中엔 行動의 指針이라하는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것도 있다。즉 行할 것을 말함이 다。이것이 어떠한 가르킴(行動의 指針向方處)을 띄는 것을 相이라한다。즉 法相이란 것엔 行할 것을 나타내 보임을 말함도 있다。다시 말한다면 행할 것을 나타내 보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함을 뜻하는 諸樣象의 法相 中엔 心相(上)에서 일어나는 生覺과 그 生覺이 겉 行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도 포함되지만 이 말씀이 글월化(文字現相) 된 것을 法身現著의 一片이라 할 것이니 곧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의 法方이요 佛의 말씀은 佛法인 것이다.
西學은 이것을 聖人에 말씀글이 들은 聖書라 하고 釋氏말씀은 佛經이라 하고 諸者百家는 제자 백가 理念思想經書라 한다。諸氏가 가르치시는 말씀 및 그 말씀을 收錄한 經書를 法身(理致의 깨뜨림으로 일궈진 몸틀、凡人의 想理又常理로 측정지 못하는 것까지도 포함한 無理治인 것 같은 것까지도 포함된다 할 것이다)의 一片이라 하는 것이다。이렇게 가슴에 와 닿게 알아듣게 말씀해야지 삼척동자도 法이나 法身이란 뜻을(自修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작은 凡周의 法身。즉 깨우쳐줌 쪽으로) 이해할 것이다。선생님과 가르치고 배우는 학습교재와 학생들이 具備된 것을 釋類에선 세 가지 보배라 한다。以中에 하나라도 缺如되면 두 가지의 보배로선 아름다운 제모습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세 가지가 구비되어가지고 뭘할라하는가?
이른바 目的을 보기위해서 인데 목적이란 뜻인가?
뜻이 갈구하는 念願相(象)인 것이다.
뜻은 대체 뭣인가?
心相을 엮는 性覺이라 하기도 하고 心相에 담긴 性이 일으킨 覺의 象이란 것이다. 覺이 어떻게 形成되 나오는가?
저 ㅡ 앞에서도 말했지만 맞던 맞지않던 性의 흐름선이 모여서 뭔가(目的事의 始初와 같음) 지어보이려는 사귐(交)에서부터 凝固되어 튀는 것이니 (合과 相反順從과 갈등이 어울어져 짓게 되는 것이다。)性線이 모여 만남엔 흡수이거나 반탄이거나 그 표현되는 모습이 있게 된다.
이 모든 구차한 설명을 心性의 갈등象으로 본다면 性線의 갈등이 이는(起) 곳 交差되는 곳이 정체현상을 일으켜 엉기어 붙음으로 因해서 覺이란 塊果가 形成되는 것이다.다시 말한다면 갈등 相은 無方으로 막힘없이 흐르는 性多線이 어느 한 것을 집 지으려 할 때 모여서 일어나는 現相으로써 多象線이 되어 사람이 모이면 의견이 화합과 충돌이 있듯이) 접촉 충돌에 의해서 그 새김刻이 一定方向과 같이 아니하여 일어나는 諸線의 自己表現 樣相의 現象인 것이다.
性線이 無爲流動이니 아무런 形象없는 器를 말함인 것이나 一團의 覺象이 形成되면 連繫作用에 의해 움직이는 線처럼 (각념선) 化하여 諸相家를 우그려 짓게 되는 것이다.그렇게해서 생각생각이 衆生化하여 삼라萬有象이 存在케 되어 저 念願한 目的象을 보게 되는 것이다. 목적상이란 파괴상、해탈상이니 꽃이 피어 결과를 보았다는 상이니 감상 감상해 본다의 감상의 歐分이 輪劫을 만들어 ((감상의 구분이 윤겁을 만든다는 것은 갖갖은二元正斜論 등의 屢數多比念相觀을 일으켜 비교하고 살펴 自心上에 흡족치 못한 풀이가 있으면 또는 無로 한(無妨·무량·무수·無限 등등하는 無意味) 貪慾에 의해 새로운 염원을 일으켜 다시 相을 짓는데 들게 되므로 감상의 구분이 윤겁을 만든다 함인 것이다))。끊임없는 諸象이 緣起되어 일어나는 것이며 이것이 永遠性이나 長久한 것이거나 그 反하는 立場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無常이 有常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니 설령 空개념을 두지 않더라도 空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늘상(恒常)에는 左右(前後 上下 어딜 뜻하던 無方處)처럼 과현래가 붙어 있어 어느것을 軸으로 하던 늘 이런 상태라는 것이다.
報身이 缺如된 것은 가르칠 對象이 없는 것이요 法身이 결여되면 말씀 등의 가르칠 內容이 없는 것이고 化身이 결여되면 베풀 主體者가 없는 것이다.이 세 보배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그렇다고 하나로 있다거나 諸合相으로만 있다는 것만이 아니요 대상체 적응에 있다는 것이니 이럴 땐 이렇고 저럴 땐 저렇다는 것이니, 융통과 경직은 대상체 적응에 있는 것이니 상대성인 것 같으나 상대성 만이 아니요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 같으나 그를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니 無常이 有常이요 갖은 얽힘 속에 든 것이 곧 그를 벗은 것(벗게 되는 것)(옷)이요 어찌 뭐가 달리 없다는 것이다. 특출나게 나대는 돌출된 독선 독단이 없어 쌓이고 쌓인 모든 섞임속에 세 구슬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생각ㆍᆢㅡㅡ 以上의 글들이 모두 先覺이 일궈낸 것을 내 정신을 괴뢰로 여겨 부림이 아닌가 하는 이제보니 어느 한 구석의 삿견해가 고개를 쳐들고자 한다.
◎ 自慢에 빠졌거나 고뇌를 벗지 못해 허덕이는 如他라 하는 것의 修行이나 일궈논 業積을 헐뜯어서 그批評이 빛을 발하게 하여 自己 功果를 삼아서 後代에 이름을 두고자 함만이 아니라 巨視的인 眼目 視野를 넓혀서 관찰하여라 이런 內容으로써 諸者에게 깨우침을 주겠다는 것이 對相的適應論理로써 곧 何醉者들의 말씀인 것이다.
一末의 求道者가 되어 어떤 일궈논 果라하는 것의 울(테두리 범위내) 속에 갇혀있는 것(그에서만 處心하는 것 거기에 準해서 하겠다고만 하는 고집스런 마음 마음따라 諸行爲가 일어나 옷과 같은 여러 모습을 걸치게 되는 것이다)은 진솔한 깨뜨림이 아니라 自繩自縛이니 그것을 벗어 제낀 無碍行實이 이 진정한 깨뜨림이라는 것이다。(※ 깨뜨리는 술을 먹되 취하는 것이 常理이나 오히려 취하지 않는 체 하는 것이 諸行의 보탬이나 유덕함을 보일 적에는 (보탠다해서 利得相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得失이란 의미가 達覺에 영향을 미친다면 취해볼 만도 하다할 것이다) 그렇게도 한다는 것이니 하필 한 울테에 갇혀 행
동만 하는 것이 술취한 자의 굳이 行할 本分이 아니라는 것이다。그 술취한 것도 한때나 한 가지의 멋나보이게 생긴 옷과 같은 것을 걸친 양상일 뿐이니 그 심취한 것이 영원성을 띄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아름답다고 말할 게 없다는 것이다(왜냐? 心性이 무위유동함으로써 권태염증、고달픔、역겨움과 같은 감상이 와 닿게 되어 固守치 않기 때문이다) 그도 깨고 나면 부질없다는 뜻이니 諸心相에서 衆生이 일어 流動하는 것이니 어떤 것을 指稱하던 띈 相에는 오랫동안의 停處가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一切衆生(※ 생각이 연이은 것도 일체중생이요 그로부터 일어난 것이 萬有象이니 제 宇宙양상의 감상이 또한 一切衆生이다 설령 무감상이 있는게 있더라도 일체중생이다) 社會大衆과 같이 더불은 가운데서 참은 없지만 참과 같이 느껴지는 깨뜨림이 있다는 것이다.
所謂 우월한 立場에 사랑을 주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자세를 낮춰 사랑을 받는 방법을 배워보겠다는 마음을 일으켜라다. 진정으로 사랑을 주겠다는 것은 오히려 사랑받아 남에게 인정받겠다는 뜻이니 자세를 낮춰 내라 함을 버릴 때 빈그릇처럼 되어 담기는 참사랑에 맛을 받아볼 것이다.
※ 필자가 사랑이란 어휘를 잘 쓰지 않을려 하였는데 부득이 방편적으로 들었을 뿐이다. 사랑이란 말을 쓰지 않을려하는 理由 그는 왜인가? 내가 편견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愛란 뜻은 당기는 끈과 같아 피안(彼岸)의 거리를 멀게 하는 것으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이(사랑이란) 말씀 뜻이 세상을 덮어 씌운것이 오늘날 현실의 世態의 돌아감 꼬락서니인 것이니 모두 제 입에 넣고 씹어삼키고 있으니 욕심하곤 겉은 諸아름다운 상인체 함인 것이라도 속은 우왁스런 魔상으로 보일 뿐인 것이다.)
以上의 여러 흩틀어 놓은 말씀들이 大乘적 가르침이라고 옛 先知가 牙角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감언이설로 自빛을 발해보겠다는 뜻이니 별로 취택할 것 없다 할 것이다。이런 類가 모두 영리추구
돈을 요구하는 서적으로 둔갑하여 사람의 호주머니를 털고 있는 것이다.
우리 향우가 예전에 내게 말하길 먹기 위해 살지 그 알량한 살라고 먹는다는 말은 걷어치우라는 것이다. 一言해서 솔직하라는 것이다。빙빙돌려서 정신 어지럽게만 할게 아니라「이런거 하면 먹고 살것 생긴다」이렇게 말이다。괜히 말로만 먹이지 말고 실제 실천 음식으로 먹이라는 뜻이다.또 할말을 빠쳐 먹었는데 윗-사랑의 말도 편견이니 힘은 없어 갖은 것은 없더라도 남에게 부담 안주는 편안한 모습을 취해서라도 주겠다는 마음을 가져보라는 것이다.이것이 진정한 사랑을 받겠다는 마음이니 깨뜨림의 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참여하여 어울리는 가운데 깨뜨림은 있다는 것이다。이것이 달콤한 말을 이루어 도둑해 먹는 것으로 利用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우선 낯모르는 사람이 오면 의심부터 하라는 것이니 心의 門단속이라는 것이다。사랑받겠다는 것, 그래서 흡족한 가짐은 여한 없는 고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조용한 곳에선 망상이 나오고 대중과 부닥 시끄럽고 일그럭거리는 속에서 궁리소견이 넓어져서 正邪의 개념을 저마다 定立할 수 있는 達覺이 튄다。궁리소견이 넓어지면 諸疑問이 파괴되는데 달하게 돼 無碍관점(彼岸)무한으로 확터짐에 이른다는 것이다.
◎ 明鏡之水가 명경지수가 아니라 함은 相이 相이 아니란 뜻이니, 이 뜻은 그것이 방편으로 쓰여지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다。그 방편相을 무너뜨리면 아무런 相이 없는 本性이기 때문이다.즉 實다웁다 하는 眞相이 없는 것이니 만일에 진상이 아무런 형상이 없는 그릇(器) 本性이라 한다면 이 또한 말과 뜻에 모순이 되어 폐단이 인다 할것이니 왜냐하면 그릇이 또한 한 모양이기 때문이다。그릇이 아무런
형상이 없다하나 또한 어떠한 방편상과 같이 하게 되므로 (이 말은 어울리던가 싸안다던가 해서 기타 등등 같이 하는 것을 뜻함) 그 방편이 그 그릇의 상에 의한 것임으로 그 그릇의 상을 代辯하게 되므로 없다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直設(說=脫)하여 상은 상이요 물은 물이라고도 또 함인 것이니 시각 생각을 이렇게도 기울겨보고 저렇게도 기울겨보는 것이 또한 念相觀인 것이다。明과 無明과 淨 不淨이 또한 相이니 어느 한편에 치우쳐 고집한다면 메인 것이니 벗지 못했다는 뜻이다。물들이겠다는 것도 相이요 깨끗하니 물들어 오라는 것도 相이니 담고 베풀음이 이 모두 그릇이요 相인 것이니 그 어떤 것이 득달에 그럴듯하다고 치우친다면 메이게 하는 말뚝이 된다는 것이니 心이 自由自在로 내왕하여 유통치 못한다는 것이다. 유통치 못한다는 것은 협소한 소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누굴 흉내(표절)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타를 할려하는 개념이 머리를 들고자 하나 또한 생각이 괘념치 말라하니 누구의 꼭두각시인지 알 수 가 없도다.
果報(因果應報=業報)가 輪劫을 만듦이 아니라 念願이 윤겁을 만든다。마치 물개가 물에서 머리를 물 속으로 들여밀었다 내밀었다 담방구질하듯 本性이 흡족함을 얻기 위해 念願이 輪劫을 만들어 諸相이 있게 되는 것이다。만일에 果報가 윤겁을 만들어 거듭된 고뇌 海속에 태어나서 그를 벗으려 허우적거리는게 모든 모습이라한다면 이것이 立場의 번복 顚倒이니 我心相에 片見을 일으킨 것이라는 것이다.다만 지나친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잠깐의 짧은 句節의 방편으로 쓸 수 있을 따름이요 視野를 넓힌다면 전도의 개념(뒤짚히는 槪念)이라는 것이다.이를테면 내가 너를 잡아먹고자하는데 以前劫에 너, 나를 잡아 먹었
음으로 내가 너를 잡아먹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니 용서함이 내게 있지 않고 네게 있다는 것이니 왜? 잡아 먹고자하는 나만 갖고 잡아먹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인가? 너가 용서하는 개념을 먼저 가지면 안될게 뭐가 있는가? 왜? 나더러만 용서 안하면 윤겁에 들어 고통한다고 공갈협박하느냐? 이런 뜻이다。以上의 장군멍군相이 내 心上에 있음이니 내 行動이나 저쪽 作爲態度에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내 心相이 너가 먼저 용서해 나는 너를 먹어 즐긴다하면 구애될 게 없고 너가 용서안한 作爲모습으로 본다면 꺼림직해 구애될 바가 있다는 것이니 마음을 어디다 두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저 작위의 모습이 고통스레하는 相을 띄는 것처럼 보여 용서한 걸로 본다면 구애(속박당해 장애가 될 것임 될 것이고 저 작위의 모습이 어떤 상을 지어 갖고 있던 좋은 맛을 보여준다하는 깨뜨림相으로 보인다면 이것이 진정코 먹지 않아 구애 될 지언정 먹어서 구애될 것은 없다는 것이다(이것이 自己合理化인가?)
이러므로써 과보가 윤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디로 기우느냐하는 염원에 의해 흡족하던 꺼림직하던 긍부(肯否=善好한 것에 말려든것을 肯이라 한다면 疾惡한 것에 구애된 것을 否라할 것이다)의 윤겁이 일어나는 것이라 할 것이다。以上은 果報와 念願의 양편을 들어 편당을 짓는 것이니 實다운 法相(一乘) 논리가 아니라 한다면 양편을 싸잡은(싸안은) 以上의 깨뜨림의 논리가 크게(굳이) 實하다 할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法身(다스림의 틀。깨뜨리기 위한 가르침의 몸틀) 現著에 가까웁다할 것이다。먹어야될 立場이라면 먹는 것이고 먹히어야할 立場이라면 먹히는 것이고 변통해야 할 立場이라면 변통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적응 판단이라고 할 것이다。힘부쳐 당한다는 개념을 버리고 한토막의 성취의 개념을 갖는것이 實은 없지만 實다운 깨뜨림이라는 것이다。實은 없지만 實답다하는 것은 영속성을 띄는 억매임은 아니라는뜻이니 그 이뤘지만 이룬 것은 무너짐을 일으키는 것임으로 영속성을 띌 수 없으니 實답지만 또다른 변재
와 같은 法身깨뜨림 現著에 의해 무너지는 성취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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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輪劫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앞서 論에서 윤겁이란 말뜻이 대체 뭣을 意味하는 것이란 말인가? 여기서 윤겁이라해서 윤겁이 時空物事的 윤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本性이 걸친 諸相이 緣起되어 지어진 現著상태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시간적인 거리에 의해서 회전하듯 번복현상이 이는 것을 가르킴만이 아니요 공간적이거나 物事的인 거리나 어떤 생김상에 의해서 회전되는 수량을 가르킴만이 아닌 것이니 連連히 이어져 일어나듯 지어진(이것이 있음 또 그것이 있어야 되고, 그것이 있음 또 다른 그것이 있어야 하는 등 마치 자동차의 여러 부속품이 맞춰져 자동차가 생겨나 행하듯 서로가 엉겨붙어 하나의 果를 形成하여 있는 것이니 諸相이 둘이 아닌 옷 한 벌을 걸친거와 같다는 뜻이니 그것은 그러나 또 다른 理辨에 의해 무너진다는 것임)諸相을 말하는 것이라
그럼 왜? 윤겁이라 하는가? 앞서도 말했듯이 中空을 잡아 화락한 퍼짐을 보기 위해서니 어느한 것의 지나친 行(여러 가지 與件에 의한 行)은 치우치게 되니 그러한 行 法方片(깨뜨림을 줘) 을 갖고 제어하여 균등한 諸相의 아름다움을 맛보기 위해서 임인 것이다。과욕을 부리는 것 같이하면 하지 않아도 될 반복현상이 일(起)어 똑같은 內容속에 허거덕 거리는 걸 윤겁의 一片이라 하는 것인데 그런 걸 未然에 防止하여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또한 편견이다。그것을 즐긴다 한다면 어떻게 고통이라 할 것인가? 一切 판단이 생각에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먹어 윤겁됨이 아니요 너가 나를 먹는 것을 또한 말함이 아니니 그냥 이대로 뭉게 지듯 지어진 상태가 윤겁에 의한 것이니 윤겁은 연연히 諸象(相)이 일어나듯 지어진 상태를 말함인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윤겁은 시공간적 거리에 의한 회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윤겁은 제상의 연기를 말하는 것이니 갓갓은 相으로 피어나 보인다는 것이다. 만유의 갖은 허울상으로 化하여 있다는 틀(機)을 가르키는 것이지 길게만 느껴지는 늘어진 상태의 연이어져 되돌아 來往함을 가르킴만이 아니다。本性이란게諸相의 옷을 걸치고 길가듯 이대로 行함을 말함인 것이다。해석이 미흡해 번복되는 말 같지만 마치 저뭉실뭉실 피어나는 뭉게구름처럼 本性의 발로에 의해 여러 제상의 옷을 걸치는게 윤겁의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이니 相食의 고리가 연결되어서만이 윤겁이 아니니 윤회의 겁이란 뜻에 속박될게 없는 것이다. 왜냐? 시간적으로 그 없는 것으로 몰아 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시간이란 것 자체가 허망한 옷이라 그 옷이라하여 입혀보기도 하고 벗겨보기도 하는데 그로 한 윤겁의 틀이 어디 고정되어 있겠는가? 벗겨서 집착 개의치 않고 버리면 없어지는 것이다.그 방편을 들어 지나친 행을 制禦하여 諸相의 균형을 모색하였을 따름이니 제상의 균등균형의 모색이란 제상의 저마다의 立場을 좋게 살려놓아 서로가 잘 어울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의미를 誘導하여 그 연이은 말씀구절의 뜻을 해석하려 듦이 또한 이론 양상의 옷 입길 계속하여 억매인것이니 그 옷을 벗어 놓으면 역시 그릇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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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知見이 편견이요 삿된 것이니 이 옷을 벗어야 탁 터짐에 이른다는 것이다.또한 탁터졌다는 것이 知見이요 偏見이니 그 곳이 탁터진 것인지 어찌 알아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단지 物理事理相에서 따와서 그렇게 말하는 것임이지 그 곳에 이르면 諸껍질 옷을 일로써 성취해논 양식처럼 싸안거나 담고 있다 말인가? 담고 있는게 그릇이란 말인가? 이것이 또한 偏知見이라는 것이니 그릇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諸양상 허울옷과 같이 할 따름이라서 그것일 뿐이니 그 편지견이 옷이요 그릇이 될 뿐인 것이다。반드시 있긴 뭐이 있는가? 이 말이다。아무도 없는 空房에 벗어논 옷꾸러미만 그 房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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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釋論이 結局에 가선 一統屬이 되니 하나님이 被造物을 創造했다는 것이나 自性에 의한 發露諸現相이 諸解脫相이라는거와 뭐이 다를게 있는가? 이런 뜻이다。兩論 및 諸 思想論이 사람의 精神만
攪亂[교란]시켜갈피를 못잡게 할 뿐이다。서석이 마치 재는 자(尺)는 틀리더라도 거리 수는 똑같게 나오는거와 다를바 없으니 여러말 늘어놓아 정신만 어지럽게 할게 아니라 그냥 솔직하게 창조논리를 믿어 하나님을 찾으라하는게 어떨 것인가? 이래서 서석에서 무엇을 취해 볼 것인가? 하는 회의만 일 뿐이다。사람에 정신을 甘論으로 유혹 물들이어 同패 종 삼고자 하는데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일체하는 수작이 편히 먹고 살려하는 영리추구의 수단일 뿐이니 귀신 맡은 무리들의 고단수 속임에 넘어가 物心을 빼앗기지 말아야할 것이다.
속이는게 아니라 진리말씀이고 威神力있어 利德있다한다면 그게 바로 낚시미끼니 佛類가 저들 뜻에 안맞음을 비유해서 하는 말인 범을 피해 달아나다 우물속에 들어가 숨으려다 밑에 사갈을 보고 生死虫이 갉아먹는 칡넝쿨에 매어달려 벌이 싼 꿀맛을 보는 거와 같다 할 것이다 그 벌꿀의 단맛에 닥칠 환난 한시름 잊는거나 낚시미끼에 맛들여 自心身 및 물질을 어거지로 보시 당함과 뭐이가 다를게 있다 할 것인가? 주위팔방이 모다 뜯어 먹고자하는 늑대라 무슨 수작을 하던 의심하고 일체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니 참은 없지만 참으로 남을 위하고자하는 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보살이라。거기 함정있다하지 않고 와서 메꾸던지 우선 行으로 救하고 볼 것이다.이것이 편견의 좁은 방편이요 또한 巨視的인 方便은 못된다.는 것이니
先知를 내지 않고 스스로 알아 처신케시리 나버려 두는 것이 실제겪음이라 사리판단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나 이 또한 편견이요 남의 어려움을 내몰라라 하는 자의 빙자하는 방편의 말이 된다는 것이니 무엇을 들어 의론하거나 함에서 걸리는 모순이 일어 취택할게 하나도 없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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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ㅡ 아 이런 번뇌망상 털어놓는 속에 깨뜨림은 이루어져 간다는 것이니 계속 털어놀고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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器가 있으니까 以 모든 시공우주天地 삼라만상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창가에 의자갖다 놓고 앉아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면서 잘 생각해봐라。그렇지 않은가?
그 器는 感할 수 없는 것 같아도 가슴에 와 닿듯 느낄수 있는 것이니 五感相이 없는 相이라도 느낄 수 있는 相이 되는 것이다。그 器는 性品이라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이 말씀을 필자의 머리가 그렇게 쇠뇌되어 따라 주어 섬김이니 바로 이것을 갖다 受敎라 하는 것이니 自破는 아니라는 것이다。그러나 또한 삼라만상이 또한 自性覺에 의해 지어진 相이니 그렇게 因識하는 기관(구조)과 그 因識 역시 受敎만 아니라 自性覺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 器라 하는 것이 하필 諸것을 담음만 아니라 옛이야기에서 나오는 소금맷돌처럼 맷돌에서 나온 소금이 철철 넘쳐 그 소금맷돌을 속속들이 싸안고 있더라도 그 소금맷돌은 생김만 다르고 쓰임새만 차별될 뿐 器라 함엔 변함이 없다할 것이다。그릇이라 하는 意味는 平等無側이라 하더라도 그 껍질은 여러 모양을 지을 수 있으니 大小장단、경중、질량 등의 모습이 다 그 안에 담겨져 있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五感치 못하는 것이지만 五感相이 그로부터니 오감상이 곧 그를 代辨는 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그 器의 생김이 어떠냐고 의문을 갖을게 없다。설령 소금맷돌처럼 철철 넘치게하여 諸相이 그를(절로) 싸안은 것처럼 되더라도 器는 器요 諸相을 無現하게 싸는 器라도 器는 器인것이니 그 器가어떤 形象을 띄던간 구애될게 없는 것이다。諸相이 그 器에 의한 것임으로 諸相의 相이 그 器의 相이라해도 또한 잘못됐다 할게 없는 것이다。
性과 相이란 區分이 境界가 되니 그 구분을 타파하면 구애될게 없는 것이니 잠깐의 담배피울 시간이라도 평생의 장한몽을 담을 수 있고 그 평생의 장한夢속에 들어있길 그 잠깐의 담배피움의 시간 또한 순간을 무량으로 나눔만도 못할 것이니 구분짓는 시간이란 허울막을 걷어치우면 ㆍ드고、남에 무슨 拘碍될게 있으며 諸相 一時처럼 지어보임이 어찌 可能하지 않겠는가? 空間相이 또한 그러하니 구분짓는 경계막을 타파하면 大小가 무슨 구애될 것인가? 이런 말이다。설령 바늘 구멍 속이라도 우주는 유통된다할 것이니그 바늘 구멍이란 것이 또한 늘리거나 주리거나 하는게 없는 것이니 왜냐? 그 바늘구멍이란 相과 宇宙란相의 區分을 타파하였으니 늘리거나 주릴 건덕지가 있겠는가 이 말씀이다。微塵의 界에 우주가 들어있어도 그 우주는 운신의 폭이 자유로와 좁다하지 않을 것이니 실제로 늘거나 줄어든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微塵의 界라 하는 것 또한 現相을 담는 그릇이니 一定한 形象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度尺質量의 개념을 떠난 것이니 器인 것이다.혹은 이를 갖다 이것이 우주를 만들었다하고 이것이 우주를 있게 하였다하고 이것이 우주의 집이요′우주를 입는 옷처럼 여긴다 하는 것이다.또 우주의 여하한 구석진 곳이라도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곧 이것이 宇宙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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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森羅象이 本性이 거울게(거울과 같은 反射象으로도 볼 수 있다=즉 거울을 만들어 비춰도본다는 것이다.) 비춰진 것을 말함일 것 일진데 心相을 잘 가다듬을 이루어 그릇(非)됨이 없게 비춰지게
한다 함도 修行에 어긋난 말은 아니다。(이것이 枝葉的인 것이요 修業에 初入門이라 할 것이나 그 門을보지않고 그 門을 들 수 없으며 그 門에 들지 않곤 어찌 그 內部를 구경할 것이며 그 後末에 서지 않곤 어찌 그 근본을 볼 것인가? 이런 뜻이다. 이것을 거추장스런 꾸밈장식의 겉치레로만 볼 것이 아닌 것이다。깨뜨림의 방편은 어느 방편이던지 취택할 수 있는 것이지 하필 어느 것 만이라는 것(이것은 얻어논果를 갖고 딱들어 맞는다는 것을 가르쳐보임에 불과한 것이니 破한 다음의 敎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은 치우친 관점이라는 것이다。破보단 敎에 접근한다해서 깨뜨림이 아주 없단 하지 못할 것이니 授受의 立場에 差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 지어진 象이 本性그대로를 비추어진 것임으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그릇됨이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릇되다하면 본성이 그릇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임으로서다。本性은 是非가 없으나 觀하는 이의 知見이 그러한 개념을 일으킴에서부터 시비가 일어나는것이다。즉 이렇게 저렇게 어느한 것을 또는 모두를 當不當해 하는 것이다。本性이 비춰진 모습이 諸樣相이라하니 마음을 잘 다스려 本性 一相을 찾는다하나 내 마음이 本性인데 또 무슨 本性이란 것을 찾아 相을 求한단 말인가?(혹시나 마음이 本性인 것을 잊었던 것을 되찾듯 깨닫는다 한다면 말이 될줄몰라도 合相은 不當한 모색인 것이다.) 이것이 未達한 견해라는 것이다。지금 내 本性의 發露를 보고 있는 것이 비춰진 諸모습인 것이다。단지 諸 樣相이 서로간 隔한 차단막이 되어 對面共話 心隔千山하듯 未知의 諸樣相事가 있게 되고 투시능력(초월된 능력수리法則의 各 等式과 같은 논리 또한 未知의 초월의 一片일 일 수도 있다)의 갖은 方式을 동원치 않는 以上 本性이 迷妄(未開)속에 갇힌 것이니 그 알 수 없다는 것이다。본성이 비춰진 모습이 諸모습이라 해놓곤 투시능력을 쓰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하니 모순이아닌가? 이 말은 본성이 미망이란 樣相을 또 쓰고 있다는 것이니 이 옷 저 옷 벗고 입는거와 같은 논리이니 그 옷입고 벗는 행동이 諸修業의 一科로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본성이 미망의 옷을 입는 것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니 그 왜 필요한가하는 의문짓는 의문제기의 옷을 입어봐야 아는 옷도 보인다 할 것이다. 본성이 미망의 옷을 입는 原因은 이런 저런 모습을 찾아 감상하고자 하는 감상을 구분하기 위해서일 것이니 구분해서 그 맛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 小大乘이라는 視野의 廣峽관점을 打破하라는 것이니 펴고 베풀어 위한다는 개념과 내가 뭣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해놓고 그를 알기 위함과 自己의 염원 성취 해탈이란 개념의 區分을 打破하라는 것이다. 편가름을 타파하여서만이 자동차가 大路를 달리듯 평등의 탁 터짐에 이른다는 것이다. 해탈이 자승자박이나 그러한 뜻의 울막을 친 것이라면 자기가 짜는 합리성에 묶인 것이요 갇힌 것이니 누가 그것을 해탈이라 할 것이며 오막에 문잠그고 내왕치 않겠다는 것이니 누가 그것을 世外高人처럼 벗어난이라 여길 것인가? 꽁생원도 그 보단 낫다 할 것이니 (필자의 집필노력도 世上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오직 世波를 타고 大衆속에 파고 들어가 活動하는 功德他行(남을 공덕성취케 한다)속에 功德自行도 들었으니 그 마음가짐을 잘 다듬어 대상체에 적응한다면 흑백 등 多數區分없이 一切것이 모다 염원이나 염원아닌 無相의 속박시키는 것이 내게 있더라도 나를 벗겨주는 보살이요 은혜를 베푸는 上達者라는 것이니 聖賢 말씀에 三人行 二人 모다 나의 스승이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할 것이다。諸번뇌交亂相이 모다 깨달음의 眞髓 佛보살이라는 것(覺醒體로써 未發한 자를 위해 준다는 것이니 하필 달콤하게만 느껴지는 善이란 意、言、行實만 그대를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편견으로 어찌 그렇다느냐? 그것 뿐이냐 하는 攻駁을 불러들여 무너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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