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軍公과 尙書公의 繼代문제는 2004년도 KBS의 "무인시대" 史劇방송을 계기로 門中에서 論議 되었으나
全國支部長이 소집된 임시총회에서 贊反의 討論을 거처 留保키로 하여 2005년 乙酉補도 종전대로 편집발간 된 바,
당시 신중론을 주장했던 본인으로서 최근 본 카페를 통하여 5회에 걸처 當爲성을 주장한데 대해서 간단히
反對 見解를 붙이고자 합니다.
將軍公(大升)과 尙書公(蕃)
1 將軍공과 尙書공이 同一人이 아닐까 하는 심증으로 주위의 여러 정황을
들어 틀림이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 年代의 비교와 주위환경적 與件情況에서 나는 여전히
의구심을 갖는다. 족보에 將軍공과 尙書공이 父子간일 것으로 심증이 간다고 밝혔으나
將軍公의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기록 자체를 어디에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사 있었다
하더라도 尙書公과 同一人이라고 보는데도 시기적으로 확증이 어렵다.
尙書公이
보아 그 도 단순히
논거 해 가는 것은 맞지 않다. 고려 23대 高宗임금은 46년동안 반세기 가까운 46년간을 在位한 바,
王 초기와 말기까지는 두 세대가 거칠 수 있는 긴 기간임으로 벼슬시기를 모르는 상황에서 장군공의
아들이 있다면 벼슬시기가 고종 때일 것이기 때문에 尙書公과 將軍公의 아들이 同一人으로
주장논리를 펴는 것은 무리가 아닌 가 한다.
또한, 將軍公의 아들이 있었다 가정하고 그 출생시기를 1179년 擧事후 1180年代 初일 것이라는
추정에 대해서도 나는 오히려 擧事前 청주고향에 머물던 事審官 시절 1-2年間이 家庭的으로나
心身的으로 안정되었던 시기임으로 이 시기에 아들을 두지 않았을까 하는데 이는 추정일 뿐
아들을 두었다는 根本 자체를 알 수가 없는 사안인 것이다.
2. 將軍公의 아들이 있었다고 가정하고, 그가 곧 尙書公과 同一人일 것이라는 전제 하
尙書公 출생 싯점을 1180年代 初로하여 1世祖~5世祖 良靖公까지의 30년씩 年次를 두고
算하여 예시해 보면,
ㅇ. 1 世祖 尙書公(蕃) : 1180년 출생
ㅇ. 2 世祖 判書公(綏 ) : 1210년 출생
ㅇ. 3 世祖 代言公(斯萬) : 1240년 출생
ㅇ. 4 世祖 貞烈公(復興) : 1270년 출생
ㅇ. 5 世祖 良靖公(補) : 1300년 출생으로 가정하고 年度를 비교하여
합당성이 없는 부분을 지적해 본다.
1). 尙書公(蕃) : 1180년 출생(?)
尙書公의 子 判書公(綏)은 舊 安東金氏 中始祖인 金方慶의 二女와 혼인하였는데
金方慶의 생년은 1212년으로 사돈간인 尙書公과 30년의 차이가 나고, 장인인 金方慶과
사위 判書公 (출생년인 1210년)과도 出生年이 비슷하거나 자칫 사위의 출생년대가 더 위일 수도 있는데
타당성이 없고 尙書公의 出生年은 1180년보다는 적어도 30년 늦어야 합당성이 있다고 본다.
2). 判書公(綏) : 1210년 출생(?)
위 生年으로 가정하고 判書公이 忠烈王 중반(1291년경)에 正3品 벼슬을 지냈다면
이때는 80歲인데 원로 宰樞급 官職이 아닌 正3品직을 80대에 지냈다는 것은 맞지 않고,
그 장인되는 金方慶도 高宗 中期에 出仕하여 高宗때 까지는 從4品에 머물렀고, 元宗初에
從4品 지어대사를 거쳐 元宗9년 (1268년)에 이르러 정3품직(형부상서,추밀원부사) 에 올랐으며,
麗元연합 일본정벌때 도독사를 거치면서 忠烈王때 까지 명성을 떨친 바,그러므로 사위인 判書公의
정3품직 官歷은 충렬왕 중반(1290-1308년)이후로 추정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출생년도도 1210년
보다는 30년이 늦어저야 50세 전후(충열왕 중반기)의 정3품 官歷이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3). 代言公(斯萬) : 1240년 출생(?)
代言公은 忠肅王 1기 (1314-1331년) 王 9 년(1322년) 元나라에 억류된 忠肅王의 復位를 탄원하는
書訟사건을 주도했고, 同王 11년(1324년)에 摩尼山頂에서 醮祭시 短命 예언을 듣고 얼마 아니 있다가
과연 일찍 죽었다는 고려사 慶復興 編의 기록으로 비추어 代言公의 壽는 4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代言公은 朝廷안에서 상당한 위치와 활약이 있었음에도 從3品인 中正大夫 품계에 머문 것을 보면
일찍 卒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위 가상 출생년인 1240년부터 마니산 醮祭년도 까지
84년간인데 84년수치는 短命으로 볼 수 없고 적어도 30-40년은 늧추어 출생시기가
맞추어 저야 기록행적 사실과도 부합된다고 본다.
4). 貞烈公(復興) : 1270년 출생(?)
貞烈公은 忠肅王 2기 (1333-1341년) 初에 門蔭으로 出仕하여 忠惠, 忠穆, 忠定王조 까지
20 여년을 감찰등, 여러 官職을 거처 恭愍王 初에 이르러 軍簿判書(正3品)에 陞任되고 그 후 宰樞의
여러 高官직을 지냈으며 禑王 6년 (1380년) 侍中 재임중 奸臣 李仁任 의 모함으로 3월에 淸州로
流配되었다가 그 해 9월 청주 유배지에서 卒하였다고 高麗史에 기록된 바, 貞烈公 가상 출생년 (1270년)
부터 충숙왕 2기(1332년-) 初 出仕시 까지 62년 기간으로서 그러면 官職 出仕를 62세에 시작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타당성이 없고 , 우왕 6년 (1380년) 까지는 110년으로 110세에 侍中벼슬에 있었다는 것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貞烈公의 1270년 출생도 그 보다 30년정도 이후로 늧추어 져야 행적 사실과 부합된다고
할 것이다.
5). 良靖公(補) : 1300년 출생(?) -정열공의 長子-
良靖公은 비교적 상세히 기록된 < 朝鮮의 名人傳 >에 보면 高麗 忠肅王 1기 12년 1325 년
(단기3658년)에 태어나 李朝 太宗 7년 1407년(단기3740년) 에 卒하여 壽가 83세로 기록되어 있고
, 또 다른 年表에는 忠肅王 1년 ( 1314년) 출생으로 기록된 바, 비교적 상세하게 그 행적를
1180년대 初 출생은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世祖 尙書公의 출생을 1180年代 初로 보고 5世祖 까지의 행적,
관력을 연계하여 살펴 본 바, 한분도 수긍하기 어렵다면 尙書公의 1180年代 初 출생 추정은
타당성이 없다. 그러므로 1世祖 尙書公의 출생시기는 將軍公 사후 30-40년후에 출생했다고
보아야 행적 사실과 부합되기 때문에 將軍公의 아들과 尙書公이 同一人일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고 본다.
물론, 孫을 둔 시기가 20代냐 4~50代냐에 따라 年次계산이 유동적일 수도 있으나
평균 연차(30년)로 계산함이 객관성이 있고 임의로 長短을 계산한다면 이는 자의적 짜맞추기
계산이 되는 것이다.
3. 우리 上代는 1世祖부터 5世祖 까지 正3品 이상의 宰樞의 要職을 累代로 지켜 온 名門世族의
家門이다. 1世祖 尙書公(蕃)이 將軍公(大升)의 아들이라면 家族 周圍의 情況으로 보아 後에라도
父子의 관계를 모를리 없고, 또한 기록을 남기지 않을 리도 없으며, 隱遁으로 當代 系代
묻혀 버릴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추정도 이해하기 어렵다.將軍公 死後 그 家率들이 政敵인 이의민의
박해를 피하여 유아시절을 은둔속에 보내었다 하더라도 이는 不過 13년 (
다음해 1184년 부터~1196년 까지) 期間일 뿐이고 1196년
또, 尙書公이 자라서 科擧에 응시 할 때에는 家門에 대한 검증을 거쳤을 것인데 父子관계가 가볍게
영영 잊어 버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또 고려사회에서는 과거응시에도 부분적으로
계급신분에 대한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최소한 신분에 대한 확인 절차는 거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始祖公(휘,珍)의 사위
과정에서도 별로 탄압 받지 않고 계속 官職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96년
제거후 얼마 안 있다 시행한 인사발령 때에도
받았으며 , 더욱이
(母는 康宗임금의 女로
이러한 주변의 친인척 관계 情況上 將軍公과 尙書公간의 父子혈연 문제를 숨겨 갈 이유가 없겠고,
또 累代로 士大夫 가문을 이어 오면서 가까운 當代에서 家牒기록을 소홀히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누락 이유를 단순하게 將軍公 子孫들의 은둔생활 때문일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이해
하기 어렵다. 將軍公의 子가 확실하게 尙書公이었다면 尙書공, 判書공, 代言공, 貞烈공, 良靖공,
順節공 등, 당대 자손들의 입지로 보아 직계기록 연계를 간과할 리가 없다고 본다.
만일 將軍공과 尙書공이 가사 直系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 적어도 一代 이상의 보충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1~5世 선조님들의 행적사실과 년대 비교가 부합된다고 사료되다.
4. 2004년도 KBS 대하드라마 " 무인시대 " 가 방영되면서 고려 무인시대의 한 축에있었던,
누구보다도 정의감과 의협심이 크셨던 將軍공(慶大升)에 대해서 世人들의 깊은 관심을 불러 모았고 ,
더욱이 우리 淸州慶氏 일가들은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열심히 시청하였다. 방송극이 끝난 후 몇몇
다음 後世代에서 그대로 고착되지 않겠냐고 하는 의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 上代에서 기록을 누락한 것인지 , 유실된 것인지 불분명하고 父子間이라는 확증도 없이
900여년 전의 사실을 심증만으로 官職年代가 비슷할 것이라는 논리를 펴서 변경한다면
他姓씨에게 家門의 미화나 자손들 보기에 흡족한 생각이 들 지 모르겠으나 萬의 하나라도
잘못된 부분을 간과하게 된다면 이는 선조와 후손에게 씻을 수 없는
愚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그러기 때문에 先代에서도 累代로 고민하였고, 考證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을 것임에도 결론적 확증을 얻지 못하고 후세에 미루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미흡한 증거자료를 아전인수식 유추해석으로 합리화 하여 변경 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여야 하고 대다수의 宗中員 同意가 전제될 때에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현재와 같이 우리 일가가 平章공(휘,珍)을 始祖로 모시고, 將軍공과 尙書공이 父子間으로 연계되지
않더라도 將軍공이 始祖의 子로 기록을 보존하는 한, 將軍공에 대해서 우리 淸州慶氏 일가들은
당연히 지금처럼 先代 祖上으로 받들고 崇慕할 것이며 달리 父子관계로 世系를 연계하여 변경한다 해서
더욱 크게 돋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宗中員 절대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確信이 없는 한, 將軍公과 尙書公을 父子로 연계시키는
문제는신중하게고민하여야 할것으로 사료된다. 雲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