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다델라 아파트주민들은 첨에는 한국인들에게 엄청 우호적이며 잘 대해주었다. 말도 모르고, 우물쭈물 어리벙벙한 한국인이기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우러러나왔던것이다. 그러던것이 옆집도 한국인, 뒷집도 한국인, 거리를 걸어다니면 한국인...어느순간에 한국인 천지가되자..."어~ 한국인들이 아르헨티나를 침범했나?" 하면서 그들의 도와주고싶은 마음은 차차 사라져갔고, 대신 3가지로 분류되었다. 한국인을 엄청 싫어하고 coreano~ 하면서 약올리거나 욕하는 분류, 아직도 한국인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진한 분류...그리고 뭘하건 아무관심도 없는 분류....
역시 숫자가 많아지면 말썽도 생긴다. 한국인 숫자가 많아지는것에 반비례해서 그들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시우다델라 아파트단지를 나오면 상대적으로 한국인의 수는 적어지고, 따라서 아르헨티노들은 여전히 한국인에게 잘 대해 주었다. 가령,길을 잘 몰라서 물어보면 아주 자세히 가르쳐주는것은 물론, 맞게 가고있나 잠시 섰다가는 끝까지 키켜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지면 후다닥~ 뛰어와서는 그길이 아니고, 저길이예요..하고 가르쳐줬다.
아르헨티노는 그들이 길을 몰라도 아는체 하면서 적당히 가르쳐준다. "잘 모르겠는데요." 하질 않는다. 그것은 동양인에게 모른다고 하는게 자존심 상한다고 믿기때문이다. 그래서 반만 믿어야한다.
내가 동생과 함께 다니던 초등학교는 시몬 볼리바르 라는 이름의 학교로 헤네랄 빠스 (부에노스 아이레스 수도외곽) 근처에 있었다. 그곳까지는 한참을 걸어다녔어야만 했지만, 시우다델라 내의 학교는 이름 그대로 "똥통학교" 라서 어쩔수 없었다. 대신 공립이라 졸업할때까지 일전 한푼 안들었다.
또 아르헨티나는 촌지도 치맛바람도 없었기때문에, 부모님이 한번도 학교에 찾아온적이 없던 우리에겐 정말 천만다행인셈이었다. 만약, 그런 병패가 있었다면 우리들은 영락없이 강남살때의 이유없이 구박만 받던 원주민학생들 신세가 됐을것이다.
학교에서 선생에게 아부를 떨거나 "세뇨리따,세뇨리따 ~"하면서 따르는 chupamedia 들은 꼭 있었다.
그러나 그 학생들이 선생을 위해 특별히 잘 보인다고 놓고나가는것은 고작해야 깨끗히 닦은 빨간 사과 나 그들이 정성들여 그린 그림카드 같은것일 뿐이었다. 나와 동생은 그런것에 적응이 안된터로 대신 공부를 잘해서 인정 받자 생각했기에 아주 열심히 했다. 학생에게는 공부잘 하는게 최고였다. 사과 한박스나 그림카드 100 장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 chupamedia 란 "양말을 핧는다." 라는 뜻으로 유난스럽게 아부떠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즉, 그들의 양말을 혀로 핧을정도로 소갈머리없다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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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에 뉴낀뇨 라는 문제아가 있었다. 친구하고 고함치면서 싸우기도 하고, 선생에게 대들기도 했으며, 성격이 참 더러웠다. 그런데 어느날 선생은 최후의 결단을 했뜻히 부모님 모셔오라고 하고는 그 친구를 특수학교로 전학시킬려고 하고 있었다.
말이 특수학교지, 그곳은 문제아들만 모이게하는 일종의 정신병원이나 소년원 같은곳이었다. 부모님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제발 좀 봐 달라고...앞으론 그런일 없겠다고...집에서 교육 잘 시키겠다고...애원 애원하는것 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착하기만 했던 우리 담임선생이 화나면 보통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으며, 선생의 파워가 무서움을 새삼 느꼈다. 사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다니는 동안 줄곧 국립학교에서만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항상 선생의 파워는 대단했다. 학생도 부모님도 선생의 파워앞에서는 꼼짝 못했다. 사실 그들의 월급은 나라에서 나오지, 우리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게 아니라는것을 다 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끔 학교에서 학생들이 우리보고 chino~ 하고 놀리면서 자기들의 눈을 손가락으로 찢어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나 역시 당황해서 어찌할바를 몰랐다. 시우다델라 에 있었다면 나도 고함치면서 argentino puto~ 하고 대들었겠지만, 여기는 학교였다.
또 그들은 나이도 나보다 한참 어렸다, 그러기 때문에 더 까불었으며 순진하기 때문에 더 솔찍했던 것이다.
나는 다른 학생들의 귀에는 안들어가길 바래며 두리번 거리면서 신경이 쓰였는데, 합세해서 chino~chino~하면서 놀리면 정말 대책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썩은 억지 미소를 띄면서 놀린학생에게 다가가 "요런 귀여운것~"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던지 어깨를 톡톡 치면서 장난하지마~ 하는 의사표시를 했는데...사실은 머리를 쌔게 쓰다듬거나 어깨를 강하게 쳐서 아프게 함으로써 남들이 보기에는 토마스가 놀림에도 착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내 하고 생각들게 했으나, 사실은 "너 까불면 죽어~" 하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런건 알아차리고는 시무룩해져 조용히 사라져주는것이었다.
정말 나는 지킬박사와 하이든같았다. 시우다델라 내에서는 대들고, 싸우고, 욕하고 하면서 놀려대는것에 맛섰지만, 학교에서는 여간해서는 화내지 않는 착하고 조용한 모범생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료들도 차차 우리들을 좋아했으며, 오히려 우리들을 놀리는 학생이 있으면 내 편이 되어줬다. 헤네랄 빠스 하나 건너오는것으로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그런데 문제는 우리학교에 다니고있는 나 같은 시우다델라 에서 먼길을 온 학생들이었다. 짜식들, 그냥 시우다델라 똥통학교에 다닐것이지 이 먼곳까지 와서 신경쓰이게 만들다니... 이들은 한국인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함께 지지고 복고 살았기때문에 나의 많은 행동이 정말로 가식적으로 보였다. 동양인에 대한 신비감이 우리들의 무기였는데, 이들은 그러한 환상이 깨진지 이미 오래된 족속들이었다. 그들은 착하고 모범적이도록 보일려고 진땀빼는 우리형제들에게 피씩 웃으면서 "웃기지마~그냥 생긴대로 행동해~" 하고 말하고있는것만 같았다. 제발...협조 좀 해라....
그밖에는 뭐 그런대로 우리들의 초등학교 생활은 순조로왔고, 선생들은 좋았다. 동료들도 그들의 생일에 초대하기도 했고...
생일파티는 케잌자른후 춤추는것이었기때문에 많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아르헨티노사회에 섞여 살면서 차츰차츰 그들의 생활이나 사고방식을 습득해가고있었다. 이렇게 아르헨티나화 되가고있는것은 후에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되는 시간폭탄 역활을 하게되기는 했지만...즉, 부모세대와 1.5세대간의 문화적 마찰로 발전되가고 있던것이다. 싹을 키우고, 싹은 자라고 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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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kiosco 는 수입을 더 늘리기위해 포도주도 팔고, 한국인들에게 두부도 팔았다.
포도주는 아르헨티노들의 저녁식탁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기때문에, 저가 포도주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들은 포두주를 소다수에 타서 마셨다. 아르헨티나가 포도주생산이 칠레를 휠씬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다 국내에서 소비해버린다니 놀라울다름이다. 그러나 술취한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포도주를 즐기지,취할 정도로 마시진 않기 때문이다.
두부는 나와 동생이 친구들과 함께 한국집의 초인종을 눌려가며 배달하는것이었다. 두부배달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초인종 눌리고 "두부 배달왔어요~" 하면 귀엽다고 또는 장하다고 사줬다. 또 두부배달하는 날은 집에서 두부로 파티를 했다. 찌개해먹고,날로먹고,부쳐먹고...질리도록 먹는것이었는데, 땀흘린후에 오는 휴식같은것이라 더욱 맛있었다.
두부배달하고 용돈도 받고, 그날 두부파티하는것은 즐거운 일이었는데, 어머니는 우리가 딱해보였는지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 두부배달은 임시로 하는거야~ 늘 두부배달을 하게되는것은 아니다. 우리는 잘 살수있다. 조금만 참아라~" 하시는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아르헨티노화 되어가고 있는 우리형제에게 있어서 두부배달로 용돈의 댓가를 받는것은 당연하고도 떳떳한 일이었다. 사실, 학교에 가면 거의 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부러웠었다. 나도 집에서 kiosco 일을 돕고 있기는 했지만, 밖에 나가서 떳떳한 아르바이트다운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동료들 앞에 " 난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 얼마를 벌고있다. " 하고 자랑하고싶었는데, 그럴수가 없기에 아르바이트 얘기만 나오면 괜히 기가 죽고는 했기때문이다. 다음에는 두부를 배달해서 무려 얼마를 벌었단 얘기를 할수있겠지...하고 생각했다.그러나 부모님의 생각은 우리들 생각과는 달랐던 것이다.
두부배달은 우리 형제만 했던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도 손수 나셨다.
우리들보다 휠씬 더 무거운 량을 가지고 나가셔서 한국인집 문을 두들기며 두부를 팔으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자랑스럽고, 멋져보였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가정과 선생이기도 하셨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서 체면이란 겉치례를 발길로 뻥~차고 떳떳히 밖을 나가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그런 모습이 우리형제에게 용기도 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를 울리시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머니가 어느날 처럼 두부배달을 위해 한국인집 초인종을 누르자, " 우리 두부 안사요~" 하고 거칠게 나왔던 것이다. 그때만 했어도 젊으셨던 어머니는 목소리에 놀라서였는지, 서러워서 였는지,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주루룩~ 하고 흘리고만것이다.
정말 이 사건은 가슴아폈던 일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지만...
첫댓글 모든 걸 꾸~욱 참고 두부배달 하신거죠..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용기를 불러 일으키는 말만 필요한거죠.... 우리에겐 '모른다'는 개념이 있지만 외국인에게는 '모른다가 아니라 알지 못한다'라는 개념이죠 그러니깐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를 깔고 있지요. 글 쓰신다고 수고 많으십니다.
어느 곳이나 명암이 있기 마련이죠.살기위해 노력하신 결과가 지금 있는 것이지요. 어려웠던 시절에 비추어 제2,3세대들이 이곳의 사회에서 뿌리를 박을 때 어떻게 역할을 하고 어떤 노력을 해야 함으로 한국인의 위치가 살아 나는가를.. 동화를 하되 무시당하지 않으며, 있으되 난~체하지 않는 겸손함,은근과 끈기를 갖은 우리..그러나, Samsung과LG는 알아도 Made in Korea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 현실입니다.정부와 기업, 그리고 민간 모두가 다자간 틀을 제시하고 만들어 나가야죠.. 좋은 글 항상 마음을 안고 읽습니다.
글의 장면들이 눈에 선합니다.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글 솜씨에 점점 빠져들고 있나 봅니다.. 가끔 마음속으로 어린시절 토마토님을 안아드리곤 한답니다.. ^^
저도 눈에 선합니다 .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격었던 많은 어려움들 특히 딸아이들.....그러나 그런 어려움들이 아이들을 많이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딸들도 저도 아르헨티나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