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머문 자리
임병식 rbs1144@hanmail.net
때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멀리 던져 보는 때가 있다. 언제냐 하면 뭔가가 사무치게 그리워지거나 울적해진 마음을 추스르고자 하는 때이다. 그밖에, 땀 흘리며 산에 올랐을 때도 탁 트인 시야가 지평선에 걸려서 아름답게 보일 때도 그리 한다. 그런 때는 나도 모르게 아련한 그리움이 눈망울에 어려서 속눈썹 가득히 그리움이 담긴다. 그러한 건 모두 마음속 그리움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련해 지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그것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라는 시처럼 어떤 간절함이 하나의 영상으로 맺혀 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잠시 피어났다 스러지기 일쑤다. 그래서 그리움은 허망함을 동반한다. 마음속에는 분명히 어떤 영상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한데, 그런 가운데서도 오래도록 눈자리에 남아서 또렷이 기억이 되는 자리도 있다. 그것을 뭐라 할까. 마치 제주도 사람들이 이상향으로 여기고 살아온 이어도가 평소에는 좀체 눈에 띄지 않다가 파도가 심히 일렁일 때면 한 번씩 물빛이 달라지는 그런 형체라 할까. 나는 그렇게 아련한 그리움을 자리 잡은 어떤 곳을 잊지 못한다. 바로 고향 마을이 있는 인동의 군두(軍頭)라는 곳이다. 이곳을 일러 고향 사람들은 보통 ‘군머리’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지명이 붙은 것은 읍내로 들어가는 들머리란 뜻은 아니다. 군(軍)의 우두머리가 활동하던 곳이라 하여 그리 붙여진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 인물과 관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최대성 장군이 크게 활약했는데 그 활약상을 기린 것이 고유 지명으로 굳어졌다. 이곳은 사거리로써 교통 요충지이기도 하다. 북으로는 보성읍, 남으로는 예당, 동으로는 겸백, 서쪽으로는 고향 마을로 연결된다. 거리는 우리 마을로부터는 대략 시오 리쯤 된다. 그런지라 기차가 다니지 않는 대처로 출타를 하려면 반드시 버스를 타기 위해 이곳까지 걸어 나와야만 한다. 이 군머리는 들판 한가운데 있지만 그리 삭막하지는 않다. 한쪽은 득량 발전소가 위치하고, 다른 한쪽에는 제법 큰 물방앗간이 있어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나는 어려서 장흥 읍내에 외갓집을 갈 때면 꼭 이곳에 나와 버스를 탔다. 유일하게 노선버스가 서던 곳이었다. 나는 지금도 승용차를 몰고 고향에 갈 때면 꼭 어느 한곳을 바라본다. 당시 버스가 서던 바로 그 자리이다. 따로 무슨 표시가 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곳에 이르면 어김없이 시선이 한곳에 꽂힌다. 아련한 그리움이 오롯하게 남은 장소여서일까. 오늘날 이곳은 길도 확장되고 포장이 되어서 옛날의 모습은 찾아 불 수 가없다. 그렇지만 표시가 없어도 나는 그 점을 정확히 찾아낸다. 나는 이렇듯 눈이 머물면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달려간다. 영상 속에는 한 꼬마가 떡 동구리를 이고 앞장선 어머니의 뒤를 따르던 모습으로 어려 온다. 그렇게 와서는 표지판도 없는 정류소에 이르러 행여 버스를 놓칠까 봐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 날은 대개 트럭 몇 대가 지나가고 달구지가 몇 차례 지난 다음에 버스가 나타났다. 그만큼 버스의 운행 횟수가 드물어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마침내 버스가 모습을 보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당시에 다니던 버스는 지금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전면이 마치 멧돼지 주둥이처럼 뾰족하게 돌출되어 있고 옆면은 일본 순사의 모자처럼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 버스가 다가오면 손을 들어 세우는데 그럴 때마다 회오리를 일으킨 흙먼지가 온몸을 덮쳤다. 그래도 차를 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신이 났다. 버스에 오르면 어머니는 떡 동구리를 밀어 넣어 주셨다. 그것을 받아들고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 뜨끈한 온기가 온몸에 퍼져 왔다. 그렇게 오른 버스를 어머니는 한참이나 손을 흔들어 전송했다. 그런 떡 동구리는 외갓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따스했다. 내가 외갓집을 갈 때면 어머니는 하루 전부터 부산하게 움직이셨다. 찹쌀을 불려 떡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외할머니가 워낙에 인절미를 좋아하셔서 그렇게 준비를 하셨다. 그렇게 마련해 준 떡을 외할머니 앞에 내 놓으면, “뭐 할라고 어미는 이런 걸 보냈다냐” 하시면서도 흐뭇해 하셨다. 방학 때면 내가 꼭 외갓집을 가는 목적이 있었다. 바로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구수한 옛날이야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이야기를 잘 하셨다. 어린 손자가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디” 하시면서도 못 이긴 척 들려주시곤 했다. 그런 이야기 중에는 엄마를 찾아 나서며 시련을 겪는 ‘독살새 이야기’와 마음씨 착한 부인이 얻었다는 ‘생금 이야기’, 지네를 물리친 어느 ‘원님 이야기’가 있다. 그중 지네 이야기는 나중에 알고 보니 김자점의 출생 비밀과도 관계가 있는 이웃 낙안 지방에서 전해진 이야기여서 여간 흥미롭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저런 추억 때문에 나는 지금도 버스의 출발지, 그 군두에 이르면 마음이 설렌다. 생각하면 그곳이 외부로 열린 미지의 세계인 동시에 가슴을 뛰게 만든 곳이어서 일까. 그곳에서 대처로 나가면 동네에서는 볼 수도 없는 서커스나 난장, 그밖에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가 별천지만 같았다. 그런 면에서 군두는 호기심 많은 소년에게 새로운 세계에 눈 뜨게 만든 추억의 장소요, 둥지를 벗어나 대처로 나가게 한 첫 이소(離巢)의 장소가 아닌가 한다.( 2010) |
첫댓글 선생님의 어릴적 모습을 상상하니 먼길을 떡심부름가는 착한소년이 눈앞에 보입니다. 할머니의 얘기를 귀담아 듣던 손자는 작가가 되어 郡頭를 기억하며 글을 쓰시고... 세월은 흘러갑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그리운 것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어려서 고향 군두에서 한시간 여를 달리면 외가집이 나타났지요. 문득 외할머니 생각이 스쳐갑니다. 함선생님, 잘 계시는지요?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윤재근선생의 철학우화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마라'라는 책에 보면 할머니한데 들은 두꺼비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한번 그래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선생님의 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시다는 것을 접해서 알고 있습니다. 좋은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글을 읽는 내내 어릴적 본 동네의 모습이 연상이 되머 가슴이 뭉클애졌습니다. 선생님의 끊임없는 글에 대한 열정 정말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