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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
단체(10인 이상) |
성인(19~64세) |
3,000 |
2,400 |
학생(만 7세~19세 초·중·고) |
1,500 |
1,200 |
4대궁 및 종묘 통합관람권 |
10,000 (구입일~1개월 사용) |
판매처 |
4대궁 및 종묘 매표소 |
※2011년 10월 1일부터 '내국인 초. 중. 고 학생은 무료입장
목표: 경복궁 답사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밝히고 궁의 내부에 대해 소개한다.
실내조사
경복궁에 대하여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지금의 세종로인 육조거리가 펼쳐져, 도시의 중심이기도 하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하여 총독부 건물을 철거, 흥례문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광화문부터 교태전을 잇는 중심부는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 변화와 통일을 함께 갖추었다.
1395년 태조 이성계 창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
1867년 고종 때 중건
(흥선대원군 주도의 중건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경복궁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남쪽으로 정전, 편전, 침전과 후원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개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역사 복원사업 2007년 현재 광화문은 문화재청이 2006년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철근콘크리트로 재건(1968년)된 현재의 광화문을 고종 때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철거해체되었다. 경복궁의 구조는 크게 근정전, 강녕전, 교태전과 아미산, 수정전, 향원정, 태원정, 자선당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왕족의 취침 및 생활공간을 담당하였으며 집무실도 되었고 휴식을 취할 수 있던 곳이었다. 특히 건청궁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이며, 수정전은 본래 집현전이 있던 곳이다. 현지조사 내가 계획한 경로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만춘전, 천추전) → 강녕전 → 교태전(아미산) → 자경전 일원 → 향원정 → 건청궁 → 예성문 → 함화당과 집경당 → 교태전 → 강녕전 → 사정전 →근정전 → 근정문 → 흥례문
설명순서
: 흥례문 → 근정전의 내·외부 → 사정전의 내부 → 강녕전의 내부 → 교태전의 내부
→ 아미산 → 향원정 → 예성문의 장독들
주중이고 구름 한 점 없어 햇볕이 여과 없이 내리쬐는 전형적인 여름날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과 나와 같이 방학숙제로 인해 찾아온 아이들로 인해 경복궁은 바빴다.
한류 열풍 때문인지 중국, 일본, 동남아인뿐만 아니라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들까지 바쁘게 궁궐내부를 오갔다.
사람이 많은 것도 덥고 습한 것도 싫어하는 나인지라 지하철 내부에서 나올 때부터 굉장히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 모습들을 보니 한국이 많이 알려진 듯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흥례문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 문으로, 중층 목조 건물이다.
근정전
경복궁의 으뜸가는 건물이기 때문에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2단 기단을 세우고 건물의 지붕을 2층으로 하고 처마 밑에는 화려한 장식을 했다.
또 실내는 1, 2층으로 뚫어 높고 넓은 큰 방을 꾸미고 그 한 가운데 임금이 앉는 옥좌를 설치하였다. 근정전의 난간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조각하고 12지를 조각해 놓았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지붕이 용 문양으로 장식된 청자기와로 지어져서 푸른 유리 지붕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사정전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는 편전으로 왕과 신하가 주로 공식적인 모임을 갖는데 이용하였고, 보통 때는 더 편하게 신하를 만나서 나라 일을 의논할 때는 좌우 부속 건물인 만춘전과 천추전을 이용하였다.
근정전에 비해 많이 간소화 되어 있으며 양 옆의 만춘전과 천추전은 신을 벗고 들어가며 온돌을 깔아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정사를 의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녕전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정면의 건물 간수가 11간이나 된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으며, 내부 중앙은 개방되었고, 양 옆으로 온돌을 깔았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 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녕전 뒤편 교태전으로 가는 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지었다.
교태전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때문에 강녕전보다 규모가 약간 작다. 가운데는 6간의 대청과 좌우에 4간의 온돌방이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의 특징은 지붕의 용마루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왕과 그의 부인이 주무시는 곳인데 용이 자는 집 위에 또 용마루를 둘 수 없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교태전 뒤 아미산에는 굴뚝이 솟아있는데 아름다운 벽돌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아미산
아미산은 왕비의 개인정원이라 봐도 무방하다. 아미산에 있는 아미산 굴뚝은 보물 제811호로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 장식을 설치하여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향원정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향원정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향원정은 과학적인 수리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고여 있는 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장치를 통해 썩지 않도록 잘 관리되고 있다. 더구나 향원정의 물은 열상진원이라는 샘에서 흘러들어와 식수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맑고 차가움을 유지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샘의 찬물이 흘러들어갈 때 물결이 자칫 세게 일렁여 향원정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깨뜨릴까 샘의 물길을 두 번에 걸쳐 직각으로 꺾어 놓았다. 세차게 뻗어나가는 물줄기가 두 번 꺾이는 절차를 거침으로써 일렁임 하나 없는 고요한 물줄기로 변하였다.
예성문 장독들
2012년 4월부터 개방된 예성문은 궁 안의 장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전라도 충청도 등 여러 지역의 장독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예부터 집안의 장맛이 변하면 흉조라고 여겼다. 장을 담글 때는 길일을 택하고 외부 사람의 출입을 금할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하물며 임금님 수라상에 오를 장을 보관하는 곳이었으니 얼마나 귀하게 여겼을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모습은 잡귀와 해로운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줄’을 쳐 놓은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후기
우리나라의 궁은 원래 8000칸이 넘었다고 한다. 사대문에 둘러싸여 수도로서, 정치의 중심으로서 제 역할을 행하던 우리나라의 궁. 그 중 경복궁은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으로 온갖 역사의 난을 겪은 곳이다. 왜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피해를 안 본 곳은 없겠지만 그 중 임금의 기척이 묻어있던 곳인 경복궁은 피해가 큰 것으로는 손에 꼽힐 정도일것이다.
나는 일주일 후가 광복절인 8월 8일에 직접 그 역사의 장으로 갔다. 때마침 지난 4월에 예성문 장독을 개방한 터라 그곳도 구경할 겸 오랜만에 경복궁을 나다녔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경회루에 가보지 못했다는 점. 가을이 될 때면 가보기로 다짐하였다.
여전히 경복궁은 복원하고 있던 중이었고, 사람들은 많았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경복궁이 달라진 모습이 눈에 쉽게 들어왔으며 예전에 비해 궁에 대한 지식이 많이 잊혀진것으로 보아 내가 경복궁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줄었는지 알 수 있어 굉장히 부끄러웠다.
즐거운 마음으로 경복궁에 왔던 이 날은 알게 된것도, 보게 된 것도, 부끄러운 것도 많은 날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