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탁구 신앙 탁구 목회
들어가면서…
나는 탁구 애호가이다. 내가 탁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있다. 학부시절 대전에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탁구는 나의 정신적 치료제였다. 기분 전환의 좋은 모티프(motif)가 되었다.
나는 작년에 부산 장신대신대원에 입학을 해서 줄곧 탁구를 즐겼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나의 이미지는 “탁구만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굳어진 것 같다. 기도꾼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벌레도 아닌 탁구 매니아로 알려진 것 같다. ‘또 탁구치러 가냐?’ 이런 이야기를 너무도 많이 들었다.
나는 매일 학교에서 한 시간 정도 탁구를 친다. 학교에서 치는 건 일단 공짜라서 좋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는 나처럼 탁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리고 라이벌이 몇 사람 있는데 우리들은 모여서 진지하게 신학적 담론을 한번도 이야기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오로지 일명 탁구파다. 그래서 만나면 “탁구 한 게임 칩시다!” 이 말에 안 들을 정도다. 매일 학교에서 탁구를 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고 했다면, 우리는 하루라도 탁구를 치지 않으면 손이 건질건질하다. 그만큼 탁구 매니아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에 탁구를 소재로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데오빌로 회지에 실릴 글 치고는 졸작이지만 감히 붓을 들었다.
다음은 부산장신대 신대원 재학 중 탁구를 치면서 느낀 단상을 기록한 에세이다. 탁구 경기를 비유로 들어 ‘신앙론’과 ‘목회론’을 에세이로 정리해보았다.
여담이지만 나는 12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12명이었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형성한 구약의 지파들도 12지파였다. 일년이 12개월로 되어있고, 요즘 유행하는 목회철학도 G12(Government 12)이기에 나에게 12라는 숫자는 다른 숫자보다 의미있게 다가온다.
탁구운동이 신앙과 목회에 끼치는 의미
그러면 “탁구 운동이 신앙과 목회에 끼치는 의미”가 무엇인지 12가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삶의 문제를 얼른 주님께 맡기는 탁구신앙 ☞ 문제 앞에 근심할 틈을 주지 말라!
첫째로, 탁구는 나에게 “삶의 문제를 얼른 주님께 맡겨야 함”을 가르쳐준다.
내가 탁구를 시작한 지는 십 년이 지났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이었다. 왜냐하면 여태껏 살아오면서 나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대원에 들어오기 전에 이해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과 채무의 고통이 가중되다보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공부하다가도 채권자들의 빚 독촉에 시달릴 때면 하던 공부도 안 된다.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탁구는 기도와 아울러 내 마음의 비상구가 된다. 나는 스트레스를 푸는 탈출구로서 탁구를 선택하게 되었다. 탁구를 치는 동안은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왜? 근심할 틈이 안 생기기 때문이다. 그만큼 박진감이 넘치는 운동이다.
탁구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그래서 탁구가 매력있다. 집중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탁구 경기를 할 때 상대편으로부터 공이 날라온다. 그러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받을까 말까 고민할 시간이 없다. 곧바로 날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들 삶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들 중에 삶의 문제로 고민하는 자들이 있는가? 혹시 내가 그 문제를 끌어안고 있지는 않은가?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했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고. 던져진 존재, 주어진 존재가 인간이기에 이 세상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생기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 그로 인해 생기는 근심들을 우리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탁구공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유머가 있다. 학부 시절 어떤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던 유머인데 「여자와 공」에 관한 유머이다. 10대 여자를 가리켜 ‘축구공’이란다. 이유인즉, 우리 편 남의 편 가릴 것 없이 스물 두 명의 선수들이 일편단심으로 하나의 공을 쫓아다니듯이 남자들의 인기를 많이 받는 시기라는 것이다. 20대 여자는 ‘농구공’이라고 한다. 축구보다 수가 좀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열 명이서 공 하나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인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남자들한테 인기가 있다는 뜻이겠다. 30대 여자는 ‘탁구공’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두 사람이 하나의 공을 가지고 ‘너나 가져라’라 하면서 힘을 다해 라켓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그럼 40대 여자는 무엇인가? ‘골프공’이다. 왜냐? 정해져 있는 공을 가지고 혼자서 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잊어버리면 찾지도 않는다나… 50대 여자도 가관이다. ‘피구공’이다. 왜 그런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피한다는 것이다. 공이 무서운가 보다. 그리고 60대 여자는 ‘오재미’라나… 너나 할 것 없이 여러 사람들이 오재미를 손에 들고서 목표물(?)을 향해 던져도 여간해서 잘 터지지 않는 그 오재미 놀이… (여성 비하의 글로 읽지 말고 유머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이 유머에서도 탁구공은 오랫동안 들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얼른 상대방에게 던져야 하는 것이다. 탁구공을 ‘여자’에 비유할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들’에 비유해서 생각해보라. 탁구칠 때처럼 우리들에게 근심을 불러일으키는 여러가지 삶의 문제들을 얼른 주님께 던져버리자! 탁구공을 치듯이 말이다.
2. 파트너를 소중히 여겨야만 하는 탁구신앙 ☞ 독불장군 스타일을 경계하라!
둘째로, 탁구는 “파트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운동”이다. 반드시 파트너가 있어야만 게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탁구는 절대로 혼자서 하는 운동이지만 혼자서 할 수 없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파트너가 있어야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구 매니아들은 파트너를 소중히 여길 줄 안다. 탁구 선수에게는 파트너십(partnership : 협력)이 있다.
오늘날은 파트너십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 동안 한국사회는 수직구조의 ‘사다리꼴 사회’였다. 그러나 시대는 바야흐로 수평구조의 ‘거미줄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산업사회는 수직구조였고 사다리꼴 사회였다. 그러나 21세기는 산업사회가 아닌 지식사회요 고도정보화사회다. 이러한 수평구조의 사회는 절대적으로 파트너십이 요구된다. 그러나 과거에는 수직구조의 사회였기 때문에 권위와 질서를 중시했다. 그래서 파트너십(partnership)보다는 딕테이터십(dictatorship), 즉 독재권, 절대권이 요구되었다. 이러므로 수평구조의 사회, 21세기 사회에서는 경영 스타일도 “두뇌경영에서 하트경영으로 바뀌어야한다”고 정보전략연구소장 윤은기 박사는 강조한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 안에는 권위주의가 남아있다. 부교역자는 여전히 회색분자로 남아서 목회자 대우도 못 받고 그렇다고 해서 교인축에도 못 낀다. 왜 한국교회는 담임목회자 중심의 1인 체제를 고수하는지 모르겠다. 특출한 카리스마와 능력이 없는 데도 부교역자가 잘 하는 꼴을 못 본다.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 부하로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유급 (교육)전도사로 만 7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나를 파트너로 생각해 주는 교회는 지금 사역하고 있는 교회 단 하나 뿐이었다. 설교를 잘 하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짤리고 찬양인도를 잘 하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부교역자의 달란트와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게 해서 팀사역(team ministry)을 하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못하는지 안타깝다.
이제 더 이상 주종 개념은 동료 개념이 대두된다. 산업사회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 때문에 이기고 지고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Win-Lose(승/패)》가 아니다. 이제는 상생공존(相生共存)의 법칙,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원리로 인해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게임은 끝났다. 모두가 승자가 되는《Win-Win(승/승)》사회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은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 포용적이어야 한다. 나는 기독교의 구원론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배타주의’ 입장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내 신앙의 요체(要諦)다. 기독교의 기초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다른 종교에도 경전이 있고 방언이 있고 윤리가 있지만 부활은 기독교에만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구원론에 있어서는 배타주의 입장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그의 일기장에 고백한 것처럼 “나도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실천을 요구하는 자리에서는 ‘포용주의’ 입장을 취한다. 기독교 윤리학이 조직신학과 긴장관계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케리그마 예수’와 더불어 ‘역사적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좀 비약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다른 종교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 불신자들은 ‘전도대상자’임과 동시에 인권(人權)을 가진 ‘자연인(自然人)’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기독교인들의 사고(思考)는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폭넓은 ‘다원주의’ 입장을 취한다. 왜? 글로벌(Global)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방면의 독서를 즐긴다. 자칭 독서광이다. 일주일에 평균 3권을 읽는다. 생각을 “크게 하기” 위해, 생각을 “글로벌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내 신앙 아닌 다른 사람의 신앙, 내가 추구하는 영성이 아닌 다른 색깔의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독서광인 셈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긴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상대방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 상대방을 아는 것을 뛰어 넘어 상대방과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우리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살아야 한다. 사장은 사원을 파트너로 생각해야 하고, 교사는 학생을 파트너로 생각해야 하며, 담임목회자는 부교역자들을 파트너로 생각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연을 파트너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탁구는 나로 하여금 파트쉽(partnership)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파트너가 없으면 탁구를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 혹시 독불장군(獨不將軍)들이 있는가? 그들에게 탁구를 비롯한 일대일 운동을 권하는 것은 어떨까?
3. 최대의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 되는 탁구신앙 ☞ 철통같이 수비하라!
셋째로, 탁구가 다른 경기에 비해 수비가 중요하다. 그래서 탁구운동의 철칙 중의 하나는 “최대의 공격이 최선의 공격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탁구의 경우 공격의 적중률이 상당히 낮다. A급 선수들이야 80% 이상의 성공률이 있겠지만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는 50%도 좋은 결과다. 그러니까 수비만 좋아도 얼마든지 득점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탁구 같은 경기는 심리적 작용이 상당히 많은 경기이다. 그래서 애써 휘둘렀는데 볼이 테이블 밖으로 튕겨져 나가서 자꾸만 실점이 되면 은연 중 나도 모르게 심리적으로 위축되어서 자신감이 떨어지게 되고 그런 다음 공격을 해도 잘 안 될 때가 많다.
우리 학교에는 나와 라이벌 선수들이 몇 있다. 그런데 내가 상대하기 참 힘든 사람이 한 명 있다. 내가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사람이다. 게임할 때마다 내가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더 많다. 왜 그런가 곰곰이 분석해 보았더니 “수비 부족” 때문이었다. 수비에서 내가 밀렸던 것이다.
그런데 왜 자주 졌을까? 그 선수는 수비를 철통같이 소화해내기 때문이다. 수비에서는 우리 학교에서 1인자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수비만 잘해도 경기에서 이길 수 있구나!’ 이런 인싸이트를 가지고 지난주 오후예배 때 설교도 했었다. 우리는 대개 “최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고의 수비가 최선의 공격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비단 탁구 경기만 그럴까? 그렇지 않다. 인간관계에도 수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상대방을 제압해서 “자기 힘을 과시하는 것”도 좋지만 “져 주는 것”도 좋다. 흔히들 결혼 초에 부부간에 기선 제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부부간에 기선 제압이 어디 있는가? 사랑하면 져 주는 것이다. 사랑하면 수용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아내의 잔소리에도 혹은 남편의 구박에도 대꾸하지 않는 것이다.
영적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수비가 중요하다. 왜냐? 원수 마귀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향해 “공격”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우리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단 한 가지만 공격에 대한 무장(武裝)이고, 나머지 여섯 가지는 수비에 관한 무장(武裝)이다. 곧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갖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전장에 나가는 것은 수비를 두고 하는 말이고, ‘말씀의 검’은 공격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수비를 위한 무장은 다섯 가지나 되는데 공격을 위한 무장은 하나 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것이 “신변 보호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아무리 잘 달려도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 없는 차다. 마찬가지로 경기에서 혹은 전투에서 검으로 적을 무찌르는 것도 좋지만 일단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갑옷을 입고 자기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한다. 공격보다 수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또 하나는 그것이 “더 쉬운 무장 방법이기” 때문이다. 방어를 위한 수비 무장은 챙겨서 갖추어 입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공격은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다른 무장에 비해 말씀의 검은 성경의 지식과 신학적 배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말씀은 단순히 문자적 이해도 중요하지만 신학적 이해가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수비 무장에 비해 많은 노력과 투자가 따른다. 한 마디로 쉽지 않은 영적 무장 방법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쉬운 무장을 더 소홀히 여기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비 훈련부터 해야 한다. 칼을 갈기 이전에 칼집부터 만들어야 한다. 공격하는 실력을 쌓는 것만큼 수비하는 실력도 쌓아야 한다. 적어도 탁구 만큼은 “최선의 수비가 최대의 공격이 되는 경기”임에 틀림없다.
4. 무엇보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 탁구신앙 ☞ 심리적 영향을 최소화하라!
넷째로, 탁구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게 만든다.
나는 탁구를 칠 때 유독 심리적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다. 나는 외향적이고 적극적이고 기분파라 할 수 있는 ‘다혈질’과 주도적이고 조직 장악을 좋아하는 ‘담즙질’의 소유자이다. 이런 사람들이 탁구를 잘 치려면 많은 연단(鍊鍛)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지는 꼴을 못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연단이 요구된다. 그래서 탁구는 차분하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점액질’과 꼼꼼하면서도 지나치리만큼 완벽함을 추구하는 ‘우울질’을 가진 사람들이 더 잘 치는 것 같다. 물론 탁구는 승부욕이 강한 다혈질과 담즙질 같은 기질도 효과가 있겠지만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기질, 즉 점액질과 우울질의 기질에게 더 유리한 것 같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론일 뿐이지 검증된 통계는 아니다.
그러고 보면 탁구 만큼 심리적 저항을 많이 받는 운동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승부욕이 강한 기질을 소유해서 그렇는지는 몰라도 탁구 경기에 심리적 영향을 참 많이 받는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몸이 굳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스포츠도 그러하겠지만 유독 탁구는 공격의 정확도와 수비의 완벽도를 요구하는 종목이기에 심리적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
어디 탁구만 그러겠는가? 우리가 교회에서 사역할 때 인내의 한계를 느끼게 만드는 족속들이 얼마든지 있다. 살다보면 정말 다윗의 원수였던 사울과 같은 그런 원수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가까운 예로 운전할 때 정말 원수처럼 느껴지는 사람들도 많다. 뒷 차 줄 서고 있는 것 생각 안하고 핸드폰 전화통화 하는 데에 정신이 없는 사람, 예상치 않고 갑자기 옆에서 확 나타나서 혼을 빼놓는 스포츠카의 새치기, 또 차에 충돌을 일으켜 놓고 도망가버린 차 등 운전할 때 웬수들이 있음을 느낀다. 그럴 때도 마음을 잘 다스려야지 십원 짜리 욕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어떤 목사님은 운전하면서 정말 원수 같은 운전기사를 만나면 욕 대신 ‘에잇, 겟세마네!’, ‘이런, 신발끈!’ 그런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5. 민첩한 상황 판단력이 있어야 승리하는 탁구신앙 ☞ 두뇌를 잘 사용하라!
탁구를 칠 때 가슴은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지만 머리는 “민첩한 상황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탁구신앙의 다섯 번째 교훈이다.
대개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운전을 잘 못하는 편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상황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자들을 비하하기 위한 발언이 아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우뇌가 발달한 까닭이다. 능숙한 운전은 상황 판단력을 조정하는 죄뇌가 발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자라 하더라도 좌뇌가 발달하면 운전을 잘 하게 되고, 남자라도 여성처럼 우뇌가 발달하면 운전에 미숙하다.
탁구는 우뇌 신경 보다는 좌뇌 신경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왜냐하면 민첩한 상황 판단력, 승리하기 위한 잔머리를 많이 굴려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시시각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른 판단력을 요구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 탁구 만큼 민첩하고 빠른 판단력을 요구하는 운동도 없다. 그래서 탁구는 다른 경기에 가장 두뇌 싸움을 필요로 하는 경기인 것 같다.
삶의 현장에서도 두뇌를 잘 못 써서 폐를 입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카드 사용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서 채무의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부가 알뜰하게 쇼핑하지 못하고 쇼핑 중독에 걸려 절망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머리를 써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부간에 싸우는 것도 머리로 생각해서 싸울 일이 있어서 싸우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감정에 이끌리어 화부터 내고, 짜증부터 부리고 나서 반성한다.
6. 절대로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탁구신앙 ☞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시작하라!
탁구의 교훈 여섯 번째는, 탁구 실력은 “절대로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탁구를 친 지가 족히 10년 이상은 된 것 같다. 그런데 1년 동안 열심히 쳐도 1점 올리기가 힘들다. 그만큼 탁구 실력은 빨리 나타나지 않는다. 기본기가 좋으면 실력은 빨리 향상된다. 그러나 피나는 훈련과 노력이 없으면 탁구 실력은 올라가지 않는다.
7. 한 시도 방심을 허락하지 않는 탁구신앙 ☞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마라!
일곱째로, 탁구는 경기 내내 “한 시도 방심을 허락하지 않는 운동경기”이다.
탁구는 그야말로 경기 내내 긴장을 풀 수 없는 운동 경기이다. 그래서 한 시도 방심할 수 없다. 약간만 방심해도 금새 전력은 역전된다. 탁구는 아무리 초반에 우세해도 후반에 역전되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경기이다. 초반에 이겼다가 후반에 지는 경우는 십중팔구 방심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탁구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명절날 혹은 인터넷으로 고스톱을 칠 때도 그렇다. 절대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순식간에 판도가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역전의 묘미, 이것이 탁구와 고스톱의 재미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인생도 그렇다.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과정에 충실할 수 있다. 만약 인생의 역전이 불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은 숙명적(宿命的)으로 살아갈 것이다. 변화와 변혁에 대한 의지를 망각할 것이다. 노력과 투자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깨어있으면 라이프 스타일은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 독일의 경제학자 R. 리스트는 말하기를 “정신적인 자원이 없이는 물질적인 자원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 생활은 달라진다. 부요의식을 심으면 부요할 수 있고, 가난의식을 심으면 가난할 수밖에 없다. 절대로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사고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아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역전을 꿈꾸는 자라면 정신을 딴 곳에 팔아서 안 된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통해 인생역전을 일구어내야 한다.
영적생활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영적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마귀와 그 졸개들인 귀신들과 싸워야 하기에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내가 아무리 깊은 영성을 소유했다 하여도 나중에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한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다미선교회(92년)의 부정적 영향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인들은 종말론적 신앙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종말론적 신앙은 창조적 신앙 못지않게 중요하다. 주님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들 신앙은 날로 새롭고 싱싱할 것이다.
8. 순간 순간 빠른 동작이 요구되는 탁구신앙 ☞ 스피드를 잃지 마라!
여덟번째, 탁구는 “순간 순간 빠른 동작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탁구 만큼 스피드를 요구하는 경기도 없다.
나는 스포츠를 통해 배울 것이 많다고 본다. 심판이 없는 골프에서는 ‘자율’을, 야구와 축구에서는 ‘팀워크’를, 럭비에서는 ‘투지’를, 탁구는 ‘스피드’와 ‘집중력’을 배울 수 있다. 매사가 다 설교적 소스를 준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스피드 시대이다. “빨리 빨리 문화”가 수지 맞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리모콘 작동을 좋아한다. 집집마다 리모콘이 다 닳았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보고 싶은 방송을 빨리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도 속도가 생명이다. 그래서 인터넷 회사마다 속도를 경쟁력으로 삼고 프로모션(promotion)한다. TV 광고에는 자기 회사의 속도가 제일 빠르다고 홍보한다.
시대가 이렇게 스피드를 좋아하다보니 설교도 조금은 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격이 급해서인지 느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강의도 느리면 졸린다. 영화도 그렇다. 나의 경우에 중간 중간에 화끈한 장면, 액션 장면이 없으면 그냥 졸린다. 설교도 그렇지 않을까. 느릿 느릿한 템포의 설교 어투보다는 약간 빠른 템포의 설교 어투가 회중들을 집중시킨다고 본다. 서론에서는 좀 천천히 말하더라도 본론과 결론은 좀 강렬하면서도 빠른 말이 좋을 것 같다. 한마디만 던진다. “KTX 열차는 졸린다. 그러나 청룡 열차는 절대로 졸 수 없다!”
9. 복잡한 조건이 필요 없는 단순한 탁구신앙 ☞ 본질적 가치에 집중하라!
아홉 번째 교훈은, 탁구는 “가장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탁구 게임을 즐기기 위해 복잡한 조건이 필요 없다.
탁구는 다른 경기에 비해서 운동에 필요한 조건이 굉장히 단조롭다. 좁은 실내 공간과 탁구대만 있어도 가능하다. 그냥 탁구대와 탁구공과 라켓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다른 경기는 어떤가? 축구만 해도 엄청난 주변 공간과 환경이 따라야 한다. 농구도 그렇다. 12명이 뛰어다닐만한 넓은 실내 공간이 있어야 한다. 둘이서 치는 테니스도 탁구보다 많은 장비와 환경이 요구된다. 그런데 탁구는 다른 어떤 경기보다도 단순한 조건만 갖추면 된다.
왜 우리들 삶이 복잡해졌는가? 인간의 문명(文明)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팽창과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 또한 쉴 틈이 없이 바쁘게 돌아가게 되었다. 기업에서도 단순함이 경쟁력임을 외치고 있다. 그래서 『단순함이 경쟁력이다』는 책에서 단순함이 기업의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원리를 실천해서 성공한 기업이 핀란드의 노키아이다. 원래 노키아는 제지, 펄프, 철강, 전기 등의 대기업 회사였는데 21세기의 경쟁력있는 아이템이 무엇인가 연구한 끝에 핸드폰임을 알고 다른 것을 다 정리해버렸다. 구조조정을 한 것이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 즉 기업 구조를 단순화함으로써 경쟁력을 키운 것이 노키아를 세계적 브랜드로 창출한 이유이다.
삼성그룹은 서류결제에서 전자결제로 바꾼 지 이미 오래고, 현대그룹도 교회의 셀조직과 같이 그룹을 소몰화하고 있다. 단순함이 경쟁력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기업에서는 리스트럭춰(restructure : 구조조정),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 : 기계의 재설계), 다운사이징(downsizing : 군살빼기), 아웃소싱(outsourcing : 외부위탁) 등을 시행하는 기업이 많다. 왜냐? 단순함이 최고의 경쟁력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가정의 행복은 남편은 남편의 역할만 잘하고 아내는 역할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의 역할을 겸하고 아내가 남편의 겸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좋은 남편이 어떤 남편인가? 단순한 남편이다. 아내밖에 모르고, 아내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는 남편이다. 아내가 해주는 대로 잘 먹고 아내의 말에 존중하는 남편이 좋은 남편이다. 반대로 좋은 아내가 어떤 아내인가? 단순한 아내이다. 남편이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그것에 감사하고 살림을 알뜰히 꾸미고 애 잘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잘하고 여유가 나는 대로 자기계발해서 사는 사람이다.
믿음생활도 단순함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심장을 품기 어렵다. 단순함이 키워드이다. 목회는 복잡한 지식과 생각을 요구하지만 신앙은 단순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신앙생활을 정리했다. 구약의 십계명을 2개로 줄였다(downsizing).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다. 왜 사람들의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는가?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마태복음 6장 33절을 암송하게 만들어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10. 작은 것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탁구 신앙 ☞ 작은 것에 프로가 되라!
탁구가 주는 열 번째 교훈은 “작은 것도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교훈한다.
탁구공은 구기 종목 가운데 가장 작고 가벼운 공을 가지고 운동하는 종목이다. 무슨 말인가? 작은 것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작은 것에 프로가 되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가? 큰 것을 너무 좋아한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못한다. 작은 것에 충실하면 큰 것에도 충실할 수 있다. 이것이 ‘달란트 비유’가 주는 교훈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목회는 가장 작은 것도 귀히 여겨야 한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잘 섬겨야 한다. 그런데 목회를 오래 하면 할수록 한 영혼 한 영혼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는 이것을 배우고 싶지 않다.
우리는 작은 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밑바닥부터 해나가야겠다는 바닥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낙하산을 좋아한다. 세상에 ‘낙하산 경영’을 해서 성공한 기업이 있는가? ‘낙하산 목회’를 해서 성공하는 목회자가 있는가? 드물다.
나는 목회자가 목회를 잘 해서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후임으로 생각하지 세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 세습’이란 용어는 잘못되었고 ‘교회 후임’이 맞는 말이다. 조용기 목사님은 그렇게 못해서 아쉬워했고, 이중표 목사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했고, 김선도 목사님은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심장이식으로 설명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의 경우 아들이나 딸에게 물려주는 것을 우리 한국처럼 요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교회 세습’을 반대하는 이유는 낙하산 목회 때문이다. 교회 경영을 낙하산으로 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십중팔구 실패다. 공수부대원들이 낙하산 훈련을 위해 필드에서 얼마나 피나는 훈련을 하는가? 이런 훈련 과정을 무시한채 공부한 것과 학벌 가지고 아들에게 검증도 없이 물려주다간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히는 꼴이 된다. 이것은 아들이 아닌 다른 후임자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
왜 한국의 대형교회는 후임자를 고를 때 학벌과 유학 라이센스로 목회자의 역량을 결정하고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유학가지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그러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장에서, 바닥에서 리더십을 검증받은 사람을 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11. 더 높은 성장을 위해 지도가 필요한 탁구 신앙 ☞ 겸손히 지도를 받으라!
탁구의 열한번째 교훈이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탁월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는 태도”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그러나 모르면 이해하지 못한다. 콜럼부스가 우연히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드을 인디언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실제로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 신대륙이었다. 콜럼부스가 죽고 난 후 이탈리아 항해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 대륙이 된 것이다.
모르면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용감하다.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은 가장 무식한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 왜 자기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왜 인정하지 않는가?
모든 분야에서 더 높은 성장을 위해 끊임없는 지도가 필요하다. 탁구에서 승자가 되길 원하는가? 지도를 받으라! 그렇게 배우는 자가 승자가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더 높은 성장을 위해 부모와 스승으로부터, 책으로부터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 신앙도 그렇다. 영적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기억하라! 길을 모르면 혼자서 지도를 찾기 위해 끙끙대는 것보다 차를 잠시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라. 금방 알게 될 것이다.
12. 높은 실력과 낮은 자세를 요구하는 탁구신앙 ☞ 끊임없이 실력과 자세를 점검하라!
끝으로 탁구가 가져다주는 마지막 교훈은 “실력은 높이고 자세는 낮추는 것”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탁구의 수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그러나 공격도 해야 한다. 탁구의 공격에는 드라이브와 스매싱이 있다. 이것은 뻣뻣히 선 자세로 하기란 어렵다. 자세를 낮추고 타점을 정확히 해야 득점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탁구는 농구처럼 키 큰 사람이 불리하다. 많이 구부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구는 키가 작은 사람에게 더 유리할 수 있다. 자세를 낮추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사이판에 가면 1천 년이나 되는 나무가 있다.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인터넷으로 확인한 결과 나무의 나이만큼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 놀라웠다. 게다가 바람이 부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구부러져 있는 모습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 나무의 겉모양은 그리 크지 않아도 뿌리는 수십 미터나 뻗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 1천 년을 버티기 위해 뿌리가 그렇게 깊어진 것이구나! 바람과 맞서 싸우려 하지 않고 바람이 불면 구부러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는 구나!’ 진리는 이것이다. “실력은 높게! 그러나 자세는 낮게!” 항상 이 두 가지를 잘 유지해야 대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탁구 실력이 없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실력도 없으면서 자세를 낮추지를 않는다. 자세를 낯추라! 그리고 실력은 높여라! 오늘도 스매싱과 드라이브가 잘 되지 않는가? 혹시 자세가 뻣뻣하지는 않는가? 자세는 낮추라! 그리고 실력은 높여라!
나오면서…
신학교 다니는 동안 탁구를 즐겨라! 탁구만큼 좋은 운동도 없다.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동역자들끼리 즐길 수 있는 운동이 있다면 당구가 아니라 탁구다. 그러나 요즘 목회자들은 탁구를 즐기지 않는 것 같다. 테니스와 배드민턴 그리고 축구를 즐기는 것 같다.
서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은 탁구를 즐긴다고 한다. 한 30년 동안 탁구를 쳤다고 한다. 바라기는 우리 학교에도 탁구 애호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탁구를 통해 사제간에, 동기간에 교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운동을 통해 약간의 땀을 흘리는 것은 기도를 통해 은혜의 눈물을 흘리는 것 못지않게 쾌감(ecstasy)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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