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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거지왕초 김춘삼
무지개샘 추천 0 조회 1,298 16.01.30 14: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거지왕초 김춘삼

일제시대, 여덟살의 어린나이로 대구역전 거지움막의 대장이 된 배짱좋은 사내, 김춘삼.
그후, 2002년 당시 71세로 공해추방 국민운동 중앙본부 총재로 활동중인 그는 '무소유'의

철학을 실천하며 12평 전세 연립주택에 살고 있단다.
영화같은 삶을 살아온 김춘삼. 그의 실제 삶은 어떨까?
드라마 <왕초>속 주인공과 비교하면서, 거지왕의 진짜 삶을 들여다보자!

경주 김씨의 양반자손으로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난 춘삼.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던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죽고, 어머니는 대전으로 개가한다.

어린시절
누나와 함께 어머니를 찾아 대전으로 가던 도중 춘삼은 일인 사냥꾼들에게 잡혀 낚시밥

노릇을 하게 되고, 누이는 죽게 된다.
하지만 목숨을 버려 가며 도와 준 털보아저씨 덕에 춘삼은 탈출에 성공하고, 대구역전 다리밑

움막에서 열다섯 살의 두목 '발가락'의 부하 '멸치'가 된다. 그러나 발가락의 난폭함으로 6살의

'꼬마'가 맞아 죽자, 여덟 살의 춘삼은 '기차놀이'(철로위에서 오래 버티는 게임)를 통해

'발가락'을 몰아내고 두목이 된다.
평생을 자신에게 충성하며 좋은 친구가 되어 준 육손. 춘삼은 그를 믿고 의지하며 대전의 목척

다리 움막까지 습격하여 두목이 된다.
하지만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만나 새 아버지와 형, 여동생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지만, 평범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목척다리로 돌아온다.

청년, 춘삼
시야를 넓히려는 그는 서울 염천교로 부하들과 진출하고, 열한 살에 염천교의 두목이었던

'김빠'를 부하로 삼는다.
이후 춘삼은 남대문 일대를 점령하며, 김두한을 만나 동생으로 삼고 함께 일인의 악행에 맞서

정의를 행하게 된다.
이때, 그의 첫사랑인 순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가족이 모두 일인에게 죽고 거지소굴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춘삼을 지극히 간호하며 지켜주다가 이후 창녀가 되어 춘삼과 이별한다.

점차 서울에서 영역을 넓히던 춘삼은 해방 후 고아들이 넘쳐나자 고아원을 설립하고, 남대문과

대전에 '합심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여 거지와 고아들을 교육시키며 선도한다.
하지만 곧이은 한국전쟁에 춘삼은 참전하게 되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다시 스스로 거지로 돌아 와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에 꿈이었던

'합심원'의 조직을 이루게 된다. 미국의 구호 단체로부터 원조를 받던 춘삼은 1956년 '고아원

협회' 회장으로 추대된다.

이후 세력다툼으로 시라소니, 동대문 상인협회의 이정재, 이화룡과의 격투도 벌이게 된다.

1957년, 김두한의 도움으로 '거지왕'에 등극하고, 1959년에는 미국, 필리핀의 거지왕과 일본의

거지왕 '가네시루 쯔봉'의 방문으로 최초의 '국제거지연합회'의 회장이 된다.

이즈음 그는, 문둥병에 걸린 애자와 사랑을 하게 된다. 그녀 오빠의 간청으로 결혼식을 올린

춘삼은 애자의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게 되고 3일간의 신혼 생활을 하지만, 그녀의 병

때문에 떠나게 된다. 춘삼과의 이별후 애자는 자살하게 되고, 춘삼은 평생동안 그녀를 잊지 못한다.

4.19혁명이 일어나던 해, 10월. 춘삼은 왕심리에 '합심원분소'를 설치하고 고아 구제사업에 꾸준히

힘을 쏟는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개척단을 조직해 거지들의 삶을 위해 노력한다.
'한국 합심 자활개척단'을 설립해 초대 단장이 되지만, 5.16쿠데타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1962년 2월 3일, 다시 '고려 자활개척단'을 설립하고 65년에는 최석림씨를 회장으로

하는 '대한 자활개척단'을 설립한다.
또한 넝마주의들의 삶에도 눈을 돌려, 개미회를 창설하고 1인1개 저금통장을 갖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40이 훨씬 넘은 해,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메이퀸에 뽑힐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남윤자씨

(58)와 결혼했다.
2002년에는 망원동 12평 전세 연립주택에서 부인과 아들 김기환씨(33)와 함께 살았다.

25년 전 위와 장에 큰 수술을 받은 휴유증으로 약을 거르지 않는 그는 수입도 딱히 없어 옛부하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평소 '무소유의 철학'으로 평생을 소외당하는 거지들, 고아들, 부랑자들을 위해 살아온 김춘삼.

70세를 훨신넘긴 고령에도 환경운동을 몸소 실천하는 거지왕의 '빈곤'은 그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쌓은, 가장 큰 재산이 아닐까…

 

 

‘거지왕’김춘삼, 거지없는 세상으로 빈민 구제사업 앞장.

폐질환 투병끝 2006 8월 26일 오전 5시 40분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28년 평남 덕천에서 태어난 김씨는 8세 때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가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짐승을

유혹하는 ‘미끼 노릇’을 강요 당하면서 거지 세계에 들어섰다. 20대 때 전국의 거지를 통솔하는

‘거지왕’이 된 김씨는 한때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 등과 함께 ‘주먹 1세대’ 반열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이후 “도둑질이나 해서는 거지에게 내일이 없다”는 생각에 거지 구제 사업에 앞장섰다.

 

1950년대에는 전국 10여 곳에 전쟁고아를 수용하는 ‘합심원’을 세웠고, ‘대한자활개척단’ 등을

운영해 거지들에게 자활 터전을 마련했다. 또 20여 차례에 걸쳐 거지합동결혼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공해추방국민운동중앙본부를 설립해 초대 총재를 맡으면서 이후 환경 운동에 관심을

보여왔다. 그의 일대기는 1999년 탤런트 차인표가 주연을 맡은 TV드라마 ‘왕초’로 재현되기도 했다.

 

 

2001년부터 건강이 나빠진 김씨는 지난 2006년 8월 갑작스런 호흡 곤란으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김씨는  17일 부터 상태가 악화돼 서울보훈병원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남윤자(64)씨와 아들 흥식(필리핀 칼로스MA대학 교수), 도수(장애우권익문제

연구소 연구원)씨 등 2남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청담동 청담성당 장례식장, 발인은 30일 6시.

김씨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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