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왕초 김춘삼 일제시대, 여덟살의 어린나이로 대구역전 거지움막의 대장이 된 배짱좋은 사내, 김춘삼. 철학을 실천하며 12평 전세 연립주택에 살고 있단다. 도중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죽고, 어머니는 대전으로 개가한다. 노릇을 하게 되고, 누이는 죽게 된다. 움막에서 열다섯 살의 두목 '발가락'의 부하 '멸치'가 된다. 그러나 발가락의 난폭함으로 6살의 '꼬마'가 맞아 죽자, 여덟 살의 춘삼은 '기차놀이'(철로위에서 오래 버티는 게임)를 통해 '발가락'을 몰아내고 두목이 된다. 다리 움막까지 습격하여 두목이 된다.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목척다리로 돌아온다. '김빠'를 부하로 삼는다. 정의를 행하게 된다. 들어오게 되었는데, 춘삼을 지극히 간호하며 지켜주다가 이후 창녀가 되어 춘삼과 이별한다. 대전에 '합심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여 거지와 고아들을 교육시키며 선도한다. '합심원'의 조직을 이루게 된다. 미국의 구호 단체로부터 원조를 받던 춘삼은 1956년 '고아원 협회' 회장으로 추대된다. 1957년, 김두한의 도움으로 '거지왕'에 등극하고, 1959년에는 미국, 필리핀의 거지왕과 일본의 거지왕 '가네시루 쯔봉'의 방문으로 최초의 '국제거지연합회'의 회장이 된다. 춘삼은 애자의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게 되고 3일간의 신혼 생활을 하지만, 그녀의 병 때문에 떠나게 된다. 춘삼과의 이별후 애자는 자살하게 되고, 춘삼은 평생동안 그녀를 잊지 못한다. 힘을 쏟는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개척단을 조직해 거지들의 삶을 위해 노력한다. 된다. 하지만 1962년 2월 3일, 다시 '고려 자활개척단'을 설립하고 65년에는 최석림씨를 회장으로 하는 '대한 자활개척단'을 설립한다. 벌이기도 했다. (58)와 결혼했다. 25년 전 위와 장에 큰 수술을 받은 휴유증으로 약을 거르지 않는 그는 수입도 딱히 없어 옛부하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70세를 훨신넘긴 고령에도 환경운동을 몸소 실천하는 거지왕의 '빈곤'은 그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쌓은, 가장 큰 재산이 아닐까…
‘거지왕’김춘삼, 거지없는 세상으로 빈민 구제사업 앞장. 폐질환 투병끝 2006년 8월 26일 오전 5시 40분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28년 평남 덕천에서 태어난 김씨는 8세 때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가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짐승을 유혹하는 ‘미끼 노릇’을 강요 당하면서 거지 세계에 들어섰다. 20대 때 전국의 거지를 통솔하는 ‘거지왕’이 된 김씨는 한때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 등과 함께 ‘주먹 1세대’ 반열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이후 “도둑질이나 해서는 거지에게 내일이 없다”는 생각에 거지 구제 사업에 앞장섰다.
1950년대에는 전국 10여 곳에 전쟁고아를 수용하는 ‘합심원’을 세웠고, ‘대한자활개척단’ 등을 운영해 거지들에게 자활 터전을 마련했다. 또 20여 차례에 걸쳐 거지합동결혼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공해추방국민운동중앙본부를 설립해 초대 총재를 맡으면서 이후 환경 운동에 관심을 보여왔다. 그의 일대기는 1999년 탤런트 차인표가 주연을 맡은 TV드라마 ‘왕초’로 재현되기도 했다.
2001년부터 건강이 나빠진 김씨는 지난 2006년 8월 갑작스런 호흡 곤란으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김씨는 17일 부터 상태가 악화돼 서울보훈병원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남윤자(64)씨와 아들 흥식(필리핀 칼로스MA대학 교수), 도수(장애우권익문제 연구소 연구원)씨 등 2남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청담동 청담성당 장례식장, 발인은 30일 6시. 김씨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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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함 명리학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토함 임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