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탑은 무영탑이라고도 한다.
정식 명칭은 불국사 삼층석탑이다.
무영탑이라는 이름은 이 탑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아사달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때문에 많이 알려졌다.
아사녀는 남편인 아사달이 탑을 무사히 잘 만들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아사달이 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칠 거라고 약속했던 기한이 지났는데도
탑의 그림자가 떠오르지 않자 실망한 아사녀가 탑그림자가 비칠 것이라고
약속했던 연못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실제 탑이 완성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무영탑(無影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사달은 황룡사 구층탑을 완성한 아비지의 후손이며,
이 이야기로 미루어 백제의 건축 수준이 아주 뛰어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가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네모 반듯한 모양의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상륜부를
올렸다. 기단은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된다.
하층기단은 넓게 만든 반면에 높이를 낮게 했고, 상층기단은 높게 만든 반면에
폭을 좁게 해서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석가탑의 기단 석가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탑이다. 이 탑을 세운 아사달은
이 점에 착안해 석가탑의 자리를 보통의 탑과는 다르게 만들었다.
탑의 기단이 땅과 만나는 곳에 놓는 석재를 지대석이라고 하는데,
이 지대석의 아래에 큰 바윗돌을 옮겨다 놓아 탑이 바위를 타고 앉은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석가모니가 눈덮인 히말라야산에서 6년 동안 수행하면서 앉았던
자리가 주로 바위였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지대석의 밑면은 울퉁불퉁한
바위에 맞추어 '그랭이'를 했다. 석축에서 나타나는 '그랭이법'은 바위 위의
지대석을 수평으로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석가탑의 둘레에는 팔방금강좌라고 하는 별도의 탑구가 있다. 정사각형의
탑구 네 모서리와 네 변의 중심에 원형의 연화좌대를 놓고 그 사이를 장대석으로
연결한 것이다. 각각의 연화대에는 여덟 분의 보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석가탑의 탑신의 높이는 2층보다 1층이 훨씬 높다. 2층부터는 1층 높이의 반
이하로 줄어든다. 3층은 2층보다도 약간 낮게 만들었다. 폭과 지붕돌은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줄어들었다. 덮개에 해당하는 상·하 갑석의 윗면은 경사를
약간 주어 빗물이 잘 빠지도록 했다. 경사가 사방에 나 있으므로 모서리에 45도
각도로 융기된 선이 생겨나는데, 이 선을 무리 없이 다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석가탑을 보면 둔하게 보이기 쉬운 부분을 아주 뛰어난 솜씨로 날렵하게
처리했다.
석가탑의 상륜
상륜의 앙화 상륜은 3층 지붕돌 위에 올린 네모 반듯한 모양의 노반에서 시작된다.
노반 위에 복발 그리고 이어서 앙화, 보륜, 보개, 수연받침, 수연, 용차, 보주의
순으로 상륜이 구성된다. 이 석재들은 크기가 작은 데다 높게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중심부에 구멍을 내고 3층 지붕돌에 꽂아 세운 '철찰주(철로 만든 기둥)'
에 죽 내려 끼우는 방식으로 설치한다. 상륜부 전체에 세밀한 조각들이 많지만
특히 앙화의 네 모서리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 네 변에는 음식을
바치는 공양비천상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석가탑은 원래 앙화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떠서 그 위의 상륜을
다시 만들어 놓았다.
http://www.thinkbig.co.kr/studyrm/culture/bulguk/Cul05_v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