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신석열
1머리말
Ⅱ. 독로국의 위치 비정에 대한 연구사 검토
Ⅲ. 한국 고대의 거제도와 동래의 역사적 전개와 그 의미
Ⅳ. 맺음말
| 국문초록 | 본고는 위서동이전에 보이는 삼한시대의 독로국이 동래 즉 부산에 위치하는 가 아니면 거제도에 위치하는가를 살펴보았다. 거제도와 부산은 모두 왜와 경계를 접하며 가장 가깝기 때문에 독로국의 위치비정에 대해 논란이 지속되어왔다. 독로 국 거제설은 정약용의 지리고증에서 상군의 음차인 두루기가 독로국과 비슷함을 근거로 하고 이를 지지해왔다. 즉 한국고대어에서 독로는 받침이 발음이 되지 않 으므로 도로 흑은 두로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라 왕경 6부의 명칭 가운데 ○탁부라는 발음의 사례로 보아 신라어에서 이두의 자음 받침을 구사하였 ** 본 논고는 2018년 7월 11일에 부산박물관 개관 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에서 발표 한 삼한시대 독로국-거제인가 동래인가- 는 시민강좌로 행한 것으로서 이를 논문식 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강사 / sunsy58@hanmail.net. 134 항도부산 39 던 점과 한국고대어와 조선시대어가 같다고 보는 해석의 시각은 잘못이다. 당시의 거제도는 사등 또는 사도도라고 불렀다. 거제도의 경우도 문무왕 때에 설치된 상 군과 경덕왕 때에 개명된 거제군, 그리고 부산의 경우 본래의 명칭인 거칠산국과 경덕왕 때에 개명된 동래군은 음운학적으로 연결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의 군현 명칭 개정은 경덕왕 때를 전후하여 이두식 표기에서 한자식 표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군현 명칭인 거제도의 상군과 개명된 거제군 그리고 거칠산국과 개명 된 동래군은 음운학적으로 연결지울 수 없다. 고고학적 자료로 보면 거제도는 읍 락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며 문헌 기록으로 보면 6세기 중엽 이후부터 역사적으 로 존재하였다. 반면에, 고대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의 두 측면으로 보면 부산 지역은 삼한시대부터 나라가 존재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금관가야와 주축을 이 루어 가야권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거칠산군 으로 편제되었고 해양제사처인 형변이 있었던 점에서 남해항로나 대왜교류의 중 요한 해양거점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따라서 독로국은 부산에 있었다고 결론짓 는다.
주제어 : 독로국, 차자표기, 거제, 역사적 실체, 동래.
Ⅰ. 머리말
본고에서 살펴볼 독로국(瀆盧國)이라는 나라 이름은 三國志 魏書 東夷傳1) 韓傳 중의 弁辰條에 변진 24국의 하나로 열거되어 있다. 그 기 록에 의하면 독로국은 삼한시대 변한에 소속된 나라로서 그 중에서 독 로국은 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고 전한다. 위서동이전에 보이는 삼 한시대의 독로국이 동래 즉 부산에 위치하는가 아니면 거제도에 위치하 는가를 두고 위치비정에 논란이 지속되어왔다. 1) 이하 위서동이전이라 약칭.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35 독로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위서동이전에 보이는 삼한시대의 독로 국이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한다’고 기록되어 있음에서 왜와 가장 가 까운 곳이 어디인가에 문제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대체적 으로 볼 때, 19세기 초에 다산 정약용의 주장이 제기된 이래로 거제도에 있었다는 견해2)와 20세기에 이르러 연구된 것으로 부산 동래에 있었다 는 설3)로 나누어진다. 이들 두 견해는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본 고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독로국의 위치 비정에 대해 근거가 되는 사료를 제시한 다음에 거제설과 동래설로 나누어 연구사를 검토해 볼 것이다. 기왕의 연구에 서는 음운학적인 분석을 통해 연구를 추구하였으나, 최근까지 축적된 고고자료를 근거로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 두 설에 대해 문제점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둘째, 한국고대사에서 독로국으로 비정되는 거제도와 동래 두 지역 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를 검토하여 보겠다. 먼저 문헌기록에서 거제와 동래와 관련된 기록들을 검토하여 어느 지역이 삼 한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겠다. 다음 고고자료를 검토하여 거제와 동래 가운데 어느 지역이 삼 한의 국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지 이들 지역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추구해 볼 경우 삼한시 대의 독로국이 과연 어느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가를 보다 명확하게 밝 혀질 것으로 기대해 본다.
2) 이하 거제설이라 약칭. 3) 이하 동래설이라 약칭. 136 항도부산 39 Ⅱ. 독로국의 위치 비정에 대한 연구사 검토 1. 독로국 거제설 변한의 독로국이 거제도에 있었다는 최초의 견해는 다산 정약용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다음의 기록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① [丁若]鏞이 생각건대 독로국이란 지금(조선)의 거제부이다. 본 래 상군(裳郡)이고 방언으로 상군을 ‘두루기(斗婁技)’라고 말 하는데, ‘독로(瀆盧)’와 소리가 가깝다.4) ㈎-② 독로는 거제다[이미 앞서 보았다]. … 독로는 남쪽으로 왜와 더 불어 접하고 있었음은 아마도 다른 고을은 아닐 것이다[세주 : 거제에 가라산이 있는데, 여람[동국여지승람]에서 대마도를 바 라봄에 가장 가깝다고 했다 한다].5) 위의 기록에 의하면 정약용은 신라 문무왕 때에 처음으로 설치한 裳 郡의 ‘裳’에 대한 음을 ‘두루’로 추정하고, 이것과 음형이 비슷한 방언 ‘斗婁技’의 ‘斗婁’를 근거로 삼아 ‘瀆盧’의 音借를 ‘두로∕두루’로 추정 하여 읽어 독로국의 위치를 거제도에 비정하였다. 이후 근대의 내외 역 사학자들도 부연 설명하여 지지하였으며,6) 한동안 거의 모든 연구자는 독로국이 거제도에 있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였다.
언어학적 연구에서 도수희는 독로국을 거제도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 4) (我邦)彊域考 권2, 三韓總考, “鏞案 瀆盧國者今之巨濟府也 本裳郡 方言裳郡曰 斗 婁技 與瀆盧聲近”. 5) 동권2 弁辰別考, “瀆盧者 巨濟也[已見前] …瀆盧南與倭接 恐非他邑也[巨濟有加羅山 輿覽云 望對馬島最近]”. 6) 申采浩, 前後三韓考 , 丹齋 申采浩 全集(中), 형설출판사, 1987, 94쪽. 鮎貝房之進, 雜攷 7(上), 朝鮮印刷株式會社, 1937, 54쪽.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 113쪽. 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1956, 66쪽.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37 로 제기하였다. 독로국과 동래의 연관성을 부정하였으며, 비교의 대상 은 독로국과 동래가 아닌 독로국과 거칠산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독 로국과 거칠산국은 전혀 상관이 없는 지명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7) 양주동의 설8)을 인용하여 ‘두리’, ‘도리’는 ‘상(裳)’, ‘회(回)’일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양주동이 예로 든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이는 ‘상’ 의 용례도 인용하여 자신의 설을 보강하였다. 즉 ‘裳山은 무주에 있는 데, 사면이 벽처럼 서서 층층히 끊어져 사람의 치마처럼 되었으므로, 상 산이라 한다.’9)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상의 의미는 ‘두루, 도로’ 라는 의미고, ‘瀆盧’도 ‘두루, 도로’라고 읽어야 하기 때문에 독로의 훈 이 곧 ‘상’이라 하였다. 경덕왕이 고유지명을 한문식으로 개명하던 8세 기 중엽에 ‘瀆’은 ‘독’으로는 읽히지 않았으며, ‘도’나 ‘두’로 발음되었 다고 보고 있는데,10) 심봉근은 이를 지지하여 독로국은 ‘독로국이 아니 라 ‘두로국’으로 읽어야 한다고 보고 문무왕 때 거제도의 군명인 ‘상군’ 을 염두에 두면 ‘독로국’은 동래보다는 거제였다고 단정하였다. 덧붙여 1892년(光緖 18)에 쓴 거제현의 기성관 객사 상량문의 ‘瀆盧故都’와 기 성관상량문의 ‘上古之豆盧建國’이라는 글귀를 근거로 후대까지 독로국 을 ‘두로국’으로 발음한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11) 이영식은 위서동이전에 전하는 변진 12국의 나열순서에서 독로국 이 함안 안야국의 다음에 나오는 점을 들어 독로국을 거제도에 비정한 후에 각 소국의 조선시대 인구비례를 들고 90여 개소의 청동기 문화유 적과 17개소의 삼국시대 유적을 들어 독로국 입지의 타당성을 언급하 7) 都守熙, 三韓語硏究, 제이앤씨, 2008, 123~140쪽. 8)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일조각, 1965, 732쪽. 9) 世宗實錄 권151, 地理志, 全羅道條. 10) 金亨柱, 國語史硏究, 동아대학교출판부, 1987. 11) 沈奉謹, 巨濟 古縣城址 연구 , 石堂論叢 17, 1991, 30~35쪽. 이승철, 三韓時代 瀆盧國의 王都地는 巨濟였다 , 慶南鄕土史硏究論叢, 慶南鄕土史硏究協議會, 1992, 163~165쪽. 138 항도부산 39 였으며, 상군의 영현인 鵝洲縣의 ‘鵝’도 두루미로서 두루로 읽힌다고 주 장하였다. 또한 지세표영에서 일본 쓰시마로 가는 것이 필수 여정이라 주장하였다.12) 이들의 음운학적 견해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덕왕이 고유지명을 한문식으로 개명하던 8세기 중엽에 신라 이두의 자음 받침이 없었으므로 ‘瀆’은 ‘독’으로는 읽히지 않았으며, ‘도’나 ‘두’로 발음되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삼국시대 신라 금석문 에 의하면 신라 6부의 명칭에서 ‘喙’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즉 ‘喙部․ 沙喙部․岑喙部’로 표기되며 신라 이두의 자음 받침을 붙여 ‘탁부․사 탁부․잠탁부’로 읽었다. 박제상의 또 다른 이름인 ‘毛末’도 모말이라 읽은 점과 신라 관등 ‘奈麻’도 나말로 읽어 ‘ㄹ’받침을 사용하였던 것이 다.13) 다시 말하면 삼국시대부터 이미 받침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둘째, 상군의 영현인 鵝洲縣의 ‘鵝’도 두루미로서 ‘두루’로 읽힌다고 주장하였다. 상군이 아니라 그 영현인 아주현의 글자에서 근거로 잡는 시각도 독로국 거제설로 주장한 셈이다. 그러나 ‘鵝’는 거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예외적으로 두루미를 뜻하는 것으로 오독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2) 이영식, 고대 한일교섭의 가교, 거제도-가야의 瀆盧國과 신라의 裳郡- , 동아시아 고대학, 2010 ; 가야제국사연구, 생각과 종이, 2016, 731~755쪽, 13) 삼국사기의 박제상전에는 ‘朴堤上 或云毛末’이라 하고(동권45), 이를 日本書紀 에는 ‘毛麻利叱智’(동권9, 神功紀 섭정 5년 봄 3월조)라 하여 전자의 신라어에서는 ‘말’을 후자의 고대 일본어에서는 받침을 분리하여 ‘마리’라고 표기하였다. 이는 전 자에서 ‘末’이라 하여 받침이 있는 신라 이두를 후자에서 ‘麻利’라고 일본식 이두로 표기한 것으로 ‘ㄹ’받침을 ‘利’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奈麻의 경우 진흥왕척경창 녕비에 ‘奈末’이라 표기되어 있고 日本書紀에는 ‘奈麻禮’라 표기되어 있는 점에서 (동권19, 欽明紀 5년 3월조) 신라에서의 ‘末’이 고대 일본어에서는‘麻禮’로 받침을 분리시켜 표기하였다. 즉 모두 ‘말’의 발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고대 일본 어에서는 받침이 구사될 수 없었던 반면에, 신라어에서는 받침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 이다.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39 셋째, 문무왕 때에 거제도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裳郡’이라 하고 경 덕왕 때에 ‘巨濟郡’이라 개명하였으나, 이 두 지명은 음운학적으로 연결 되지 않는다. 이는 거칠산군을 동래군이라 한 점과도 상통한다. 다시 말 하면 음운학적인 연관성을 근거로 지명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지양해 야 한다. 넷째, 1892년(光緖 18)에 쓴 거제현의 기성관 객사 상량문의 ‘瀆盧故 都’와 기성관상량문의 ‘上古之豆盧建國’이라는 글귀를 근거로 후대까 지 瀆盧國을 ‘두로국’으로 발음한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는 1811년 편찬된 정약용의 (我邦)彊域考에 제시한 정약용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며, 상고시대에 전해져온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리 고 위의 ‘瀆盧故都’와 ‘上古之豆盧建國’의 기록에서 ‘瀆盧’를 ‘豆盧’라 고 한 것은 조선시대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고대의 도로국이 받침이 없 이 읽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오류이다. 다섯째, 독로국이 왜와 경계를 접하였다는 위서동이전의 기록과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 거제현조의 ‘대마도를 바라봄에 가장 가깝 다’고 하여 정약용이 독로국을 거제도에 비정하였으나, 다음 절에서 제 시하듯이 동국여지승람 동래현조에 인용된 신숙주의 靖遠樓記 에 도 ‘땅이 바닷가에 있고 대마도와 가장 가깝다.’고 한 사실에서 이러한 기록으로써 독로국 위치 비정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여섯째, 日本書紀의 기록에 의하면 515년 백제사신이 왜국에 갔다 가 귀국하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에 머문 곳이 ‘沙都嶋’라 하였다.14) 거 제도의 옛 지명에 沙等城이 있는데, 古音으로는 ‘沙都’․‘沙等’은 모두 같은 지명의 다른 차자표기이므로 당시의 거제도는 사등 또는 사도도라 고 불렀다고 할 수 있다.15) 14)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9년 2월 是月條, “是月 到于沙都嶋 傳聞伴跛人 懷恨銜毒 恃强縱虐 故物部連 率舟師五百 直詣帶沙江 文貴將軍 自新羅去”. 140 항도부산 39 2. 독로국 동래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독로국은 거제도에 위치한 나라가 아니라 독 로국을 당시 동래부에 영속되어 있던 다대포로 추정한 주장도 제기되었 지만,16) 이는 일본서기에 부산과 관련된 지명으로 나오는 多多羅17) 를 다대포로 보는 막연한 추정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 학술적으로 독로국을 동래에 비정한 연구자는 이병도였다. 이 병도는 독로국이 부산의 동래읍성 일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었다. 먼저 新增東國輿地勝覽 동래현조에 인용된 신숙주의 靖遠樓記 에 ‘땅이 바닷가에 있고 대마도와 가장 가깝다.’18)라는 기록 과 위서동이전 변진조의 ‘其瀆盧國與倭接界’을 참고하여 대마도와의 최근거리로 말하면 거제도보다도 동래쪽이 더 가깝다.”고 주장하였다. 동래의 옛 국명으로 ‘장산국’ 혹은 ‘내산국’이 전하나 ‘장산’과 ‘내산’의 이름은 모두 ‘독로국’에 대한 후세의 별칭이며, 본래 신라의 거칠산군이 경덕왕 때 동래로 개명된 것은 옛 이름 독로를 雅名으로 복구한 것으로 보았다.19) 정중환은 상고시대의 한일관계를 염두에 두고, 동래의 지세와 지 형․유적․유물과 문헌사료를 통해 볼 때, 지금의 동래가 ‘독로국’의 위 치로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하였다. 즉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동 래설을 검토하였다. 瀆盧國의 ‘盧’는 로․내․나로서 다 같이 땅을 의미 하는 양(壤)이므로, 독로의 뜻은 ‘독의 나라’가 되며 동래라는 지명은 독 15) 宣石悅, 삼국사기 신라본기 가야관계기사의 검토 - 초기기록의 기년 추정을 중 심으로 - , 釜山史學 24, 1993, 19쪽. 16) 吉田東伍, 日韓古史斷(復刻版 1977), 富山房, 1893, 142~144쪽. 17)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23년(529) 4월 是月조, “伊叱夫禮智干岐 次于多多羅原 不 敬歸待三月”. 1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東萊縣 樓亭條, “地濱于海 與對馬島最近”. 19) 李丙燾, 三韓問題의 新考察 -辰國及三韓考- , 震檀學報 7, 1937, 141쪽
.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41 로를 음역한 독내를 동내 또는 동래라고 한 데서 나왔으며 이에 대한 미 칭으로 東萊를 쓰게 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동래지방은 입지적으로 해 변에 면할 뿐만 아니라 수영강을 끼고 있어 한․왜 통교의 요충지인 점, 음운 상으로 볼 때 음역이든 훈역이든 거칠산에서 동래란 말은 나올 수 없으나 독로국에서는 찾을 수 있는 점, 동래에서는 선사시대, 청동기시 대, 고분시대 내지 신라시대에 걸쳐 유적과 유물이 대규모로 존속한 점, 위서동이전 변진조의 철 생산과 교역 기사20)를 참조하여 동래에서 제철시설이 발견되고 복천동 고분에서 덩이쇠[鐵鋌]이 다수 출토되었 음에서 동래가 상고 남방 해상교역의 중심지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점 등을 들어 ‘독로국’의 위치를 동래에 비정하였다.21) 삼한의 위치비정을 전반적으로 다룬 천관우도 이에 동의하였다.22) 김정학은 瀆盧는 tok-nae로서 한국어의 음운상 tong-nae로 발음되고 후대에 중국 산동성의 지명인 ‘東萊’를 차용하여 쓰게 되었으므로, 부산 을 포함한 동래군은 3세기경에는 ‘독로국’이었던 것이다.”고 하여 동래 설을 더욱 뒷받침하였다.23) 현재까지 일부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대부 분 동래설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24) 백승충은 독로국의 위치비정의 조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였 다. ①바다와 접해 있으면서 왜와 가까운 곳, ②독로국과 어원적인 상 20) 위서동이전 한전 변진조,“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 供給二郡”. 21) 丁仲煥, 瀆盧國考 , 白山學報 8, 1970 ; 加羅史硏究, 혜안, 2000, 314~316쪽. 22) 千寬宇, 辰․弁韓諸國의 位置 試論 , 白山學報 20, 1991 ; 加耶史硏究, 일조각, 1991, 65쪽. 23) 金廷鶴, 任那と日本, 小學館, 1977, 36쪽. 24) 鄭澄元,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 부산의 역사, 1978. 金泰植, 加耶聯盟史, 일조 각, 1993. 朱甫暾, 4~5세기 釜山地域의 政治的 向方 , 가야사 복원을 위한 복천동 고분군의 재조명, 1997. 선석열, 가야시대 부산의 대외교류 , 港都釜山 18, 2002. 이명식, 辰․弁韓에서 新羅․加耶로 , 진․변한사연구, 2002. 정용숙, 삼국․통 일신라시대 부산지역의 행정조직과 통치구조 , 港都釜山 19, 2003. 142 항도부산 39 통성, ③삼한시대의 국이 존재할 만한 유적․유물의 존재, ④김해 구야 국과의 정치적․문화적인 동질성, ⑤철 생산과 유통에 적합한 곳, ⑥해 로상의 요충지로서 왜뿐만 아니라 동해안의 진한․예와도 잘 통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등 여섯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고 전제하 였다. 거제도설은 ①과 ②만 충족되지만, 동래설만이 모든 조건을 충족 시킨다고 하였다. 그리고 음상사로서 고증한 ‘독로국=거제도설’의 타 당성은 인정되나 두루-도로의 출현 시기가 불분명하였음을 언급하여 거제도설의 취약성을 지적하였다. 음차로서만 독로국과 동래를 관련 짓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입지조건, 음차․훈차에 의한 차 자표기법, 그리고 삼한시대의 유적분포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 볼 때 온천천과 수영만을 끼고 있고 옛 동래부의 치소가 있었던 지금의 부산 동래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25) 유우 창은 위의 설과 선석열의 설을 지지하여 독로국을 두로국이라고 읽는 거제설을 비판하고 있다.26) 부산지역에서는 그 연혁을 살펴볼 경우 삼국시대 이전의 거칠산국에 서 삼국시대 신라의 거칠산군으로 편입되었으며, 거칠산국은 장산국이 나 내산국으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거칠산국 또는 거칠산군은 ‘거친 뫼’에서 따온 것이며, 지금 양정동 뒷산인 황령산의 옛 이름이 거친 뫼 인 데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동래라는 땅이름의 유래는 변진 24국의 하 나인 독로국의 ‘瀆虜’가 동네→동래로 변하면서 ‘東萊’라는 중국식 지 명으로 다듬어졌다는 설도 있고, 중국 동해[현재의 황해]의 ‘蓬萊山’에 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27) 이들의 음운학적인 견해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면 다음과 25) 백승충, 삼한시대 부산지역의 정치집단과 그 성격 -弁辰瀆盧國을 중심으로- , 港都 釜山 18, 2002, 15~24쪽. 26) 유우창, 고대 부산 지역 정치체의 성격 , 한국고대사연구 95, 2019, 183~184쪽. 27)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부산지명총람 Ⅰ, 1995, 73~74쪽.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43 같다. 첫째, 위서동이전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변한과 진한의 국명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일치되는 국명은 거의 없다. 이는 삼국사기와 그 이전의 원전을 편찬할 때에 위서동이전을 전혀 참고하지 않았으므로, 위서동이전과 삼국사기의 국명을 맞추어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다. ‘상군’과 ‘거제군’의 음운학적 연결을 지을 수 없듯이 ‘거칠산국’과 ‘동 래’ 또한 연결시킬 수 없다. 둘째, 삼국사기에 보이는 국명의 경우 ‘國’의 규모로 볼 수 없는 예 가 있다. 위서동이전에 보이는 국은 현재의 1~2개의 시․군의 크기이 다. 내해왕 때에 일어났다는 전쟁의 당사국인 포상팔국 가운데 거론된 골포국과 칠포국의 경우이다. 골포국은 신라 때에 골포현이었는데 경덕 왕이 757년에 합포현으로 고쳐 의안군(지금의 창원시)의 영현이었으며 현재의 창원시 합포구에 비정된다. 칠포국은 신라 때에 칠토현으로 경 덕왕이 칠제현으로 고쳐 의안군의 영현이었으며 현재의 함안군 칠원면 칠서면에 비정된다.28) 이들 두 국은 모두 의안군의 영현에 불과한 점에 서 보아 고대의 ‘國’의 규모로 볼 수 없다. 거칠산국의 경우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본래 거칠산군인데 경덕왕 이 동래군으로 고쳤으며29) 위서동이전에 의하면 변진독로국으로 되 어 있어 고대 부산의 국명이 서로 다르다. 이는 고고학적 연구에 의해 해명할 수 있다. 그렇게 되었던 이유는 원래 독로국의 중심지는 복천동 고분군 축조집단이었고,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엽까지 연산동고분군 축조집단으로 옮겨갔다30)고 밝혀졌다. 다시 말하면 거칠산국이란 부산 지역의 원래 국명이 아니라 국의 중심지와 관련되는 명칭에 불과하므로 28) 삼국사기 권34, 지리지1, 양주 의안군조. 29) 삼국사기 권34, 지리지1, 양주 동래군조. 30) 金斗喆, 高塚古墳時代의 蓮山洞古墳群 , 考古廣場 19, 2016, 69~71․78~82쪽. 144 항도부산 39 고대 부산의 국명으로 볼 수 없다. 셋째, 독로국의 차자표기는 음독과 훈독이 병용하였다는 점을 감안 해야 한다. 중국의 한자어에서는 ‘瀆’은 강물을 뜻하는 것이고 ‘盧’는 땅 을 뜻하는 것이므로, 바다에 둘러싸인 거제도를 가리키는 차자표기로 볼 수 없다. 그리고 瀆盧는 tok-nae가 아니라 tok-no로 발음되고 한국어 의 음운상 tong-nae로도 발음되는 것이 아니며, ‘독로’와 ‘동래’는 각각 이두식 표기와 한자식 雅名이므로 이 또한 음운학적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
東萊는 후대에 중국 산동성의 지명 ‘東萊’를 차용하여 쓴 것이다. Ⅲ. 한국 고대의 거제도와 동래의 역사적 전개와 그 의미 1. 문헌으로 본 거제도와 동래 고대의 거제도와 관련되는 자료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일본서 기에 전하고 있다. 이들 자료를 통해 독로국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필 요한 자료로서 다음과 같이 살펴보겠다. 1) 沙道城 삼국사기에는 사도성에 대한 기록이 신라본기나 석우로 열전에 나 타나 있다. ㈏-① 아달라이사금 9년(162) 사도성을 순행하여 수졸들을 위로하 였다. ② 조분이사금 4년(233) 7월에 이찬 우로가 왜인과 더불어 사도에 서 싸웠는데,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 배를 불태워서 적이 물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45 속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③ 유례이사금 9년(292) 6월 왜병이 사도성을 함락하자 일길찬 대 곡에게 구원병을 주어 보내었다. ④ 유례이사금 10년 봄 2월 사도성을 개축하여 沙伐州의 豪民 80 여 家를 옮겼다.31) ⑤ 繼體紀 9년 2월 9년(515) 봄 2월 甲戌 초하루 丁丑일에 백제의 使臣 文貴장군 등이 물러가기를 청했다. 이에 명을 내려 物部連 [세주 : 이름은 빠졌다]을 딸려 보내어 돌아가게 했다[세주 : 百 濟本記에는 物部至至連이라 하였다]. 이 달 沙都嶋에 이르렀는 데, 伴跛人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 데 없음을 전해 들었다. 物部連은 水兵 5백 명을 이끌고 곧 바로 帶沙江으로 나아갔으며 文貴장군은 신라로부터 갔다.32) 먼저 사도성은 대부분 동해안의 영덕 사도리에 위치를 비정하는 견 해가 있지만,33) 이는 왜의 침입기사 가운데 주로 동변이라고 한 점에서 동해안으로 비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제도의 옛 지명에 沙等城이 있는데, 古音으로는 沙道․沙都․沙等은 모두 같은 지명의 다른 표기이 므로 사도 및 사도성은 지금의 거제도에 해당한다.34) 이들 기사를 검토해 보면 의문이 드러난다. 시간적인 순서로 보면 ㈏- ① 沙道城 순행 → ㈏-② 아직 성이 축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沙道 전 31) 이상 三国史記 권2, 신라본기2. 32)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9년 2월 是月條, “九年春二月甲戌朔丁丑 百濟使者文貴將 軍等請罷 仍勅 副物部連[細注 : 闕名] 遣罷歸之[細注 : 百濟本記云 物部至至連] 是 月 到于沙都嶋 傳聞伴跛人 懷恨銜毒 恃强縱虐 故物部連 率舟師五百 直詣帶沙江 文 貴將軍 自新羅去”. 33) 李丙燾, 譯註 三国史記 上, 을유문화사, 1983, 36쪽. 이곳에 비정한 이유는 조선시 대에 영덕 포항 일대의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배가 난파당하여 일본의 연안에 도착했다가 다시 조선으로 귀환한 기록들이 많았음을 참고하였던 것 이다. 34) 선석열, 앞의 논문, 1993, 19쪽. 146 항도부산 39 투 → ㈏-③ 사도성 함락 → ㈏-④ 沙道城 개축 등으로 정리해 볼 때 이 들 기록은 시간적인 순서가 틀렸던 것이므로 문제가 된다. 또한 ㈏-④ 과 같이 1년 후에 사도성을 개축하여 사벌주의 호민을 사도성으로 사민 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문제는 사벌주의 설치시기가 법흥왕 12(525)년 이므로,35) 서기 2세기 중엽부터 3세기 말엽 사이에 신라가 거제도에서 왜병과 싸울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신라가 거제도를 영유한 시기는 가야 제국이 멸망한 562년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도성의 위 치비정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즉 ㈏-⑤의 日本書紀 기록에 의 하면 515년 백제사신이 왜국에 갔다가 귀국하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에 머문 곳이 ‘沙都嶋’라 하였다. ㈏군의 기사를 종합해 볼 때 거제도와 관 련되는 기록은 6세기에 이르러 처음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포상팔국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포상팔국의 난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내해이사금 14년(209) 가을 7월 浦上 8국이 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于老와 이벌찬 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의 장 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 6천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36) ② 勿稽子는 내해이사금 때의 사람이다. … 당시 浦上의 8개국이 함께 阿羅國을 치기로 하자,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 다. 이사금이 왕손 捺音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니 드디어 8개국의 군대를 무찔렀다. 35)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및 동권34, 지리지1 尚州條. 36)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来請救 王 命大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徃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47 … 3년이 지나 骨浦, 柒浦, 古史浦의 3국 사람들이 竭火城을 공 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고, 3국의 군사를 대 패시켰다.37) ③ 제10대 奈解王 즉위 17년 임진에 保羅國, 古自國[세주 : 지금의 固城이다], 史勿國[세주 : 지금의 泗州다] 등 8국이 힘을 합쳐 변 경을 쳐들어왔다. 왕은 태자 날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과 싸우도록 하니 8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20년 을미에 骨浦國[세주 : 지금의 合浦다] 등 3국의 왕이 각 각 병사를 거느리고 竭火를 공격해 왔다.[세주 : 아마 屈弗인듯 한데, 지금의 蔚州다] 왕은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그것을 막자, 3국은 모두 패하였다. 물계자가 머리를 밴 것이 수십 급이었으 나, 사람들은 물계자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가 그의 부 인에게 일러 말하길, “내가 듣기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 로움을 보고 목숨을 다하며, 어려움에 임해서는 나를 잊고, 절 개와 의리에 기대어 생사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충성이다. 무릇 保羅[세주 : 아마 發羅로, 지금의 羅州다]․竭火의 전쟁은 참으 로 이 나라의 환란으로 임금이 위태로웠으나, 나는 일찍이 나를 잊고 목숨을 다하는 용기가 없었으니, 이는 충정이 깊지 못함이 라. (하략)38) 우선 위의 기록에 대해 포상팔국의 난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사실은 37) 삼국사기 권48, 열전8 물계자전,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 … 時八浦上國同謀伐 阿羅國 阿羅使來請救 尼師今使王孫㮈音 率近郡及六部軍徃救 遂敗八國兵 … 後三 年 骨浦㭍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 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38) 삼국유사 권5, 제8 피은 물계자전, “第十奈解王即位十七年壬辰 保羅國古自國[細 注 : 今固城]史勿國[細注 : 今泗州]等八國併力來侵过境. 王命太子㮈音将軍一伐等率 兵拒之 八國皆降 … 十年乙未骨浦國[細注 : 今合浦也]䓁三國王各率兵来攻竭火[細 注 : 疑屈弗也 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 稽所獲数十級 而人不言稽之功 稽謂其 妻曰 吾聞仕君之道見危致命 臨難忘身 仗於節義不顧死生之謂忠也 夫保羅[細注 : 疑 發羅, 今羅州]竭火之役”. 148 항도부산 39 이들 나라가 신라를 배신하여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가야 제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므로 포상팔국전쟁39)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를 요 약하면 포상팔국이 함안 아라국40) 혹은 김해 가락국41)을 공격하자 신 라가 구원하였다는 내용이다. 포상팔국 가운데 이름이 거론된 것은 보 라국․고자국․사물국․골포국․칠포국 등 5국이다. ㈐-③의 기록에 의하면 보라국은 전남 나주시, 고자국은 지금의 경남 고성군, 사물국은 경남 사천시, 골포국은 지금 창원시 합포구, 칠포국은 함안군 칠원 등으 로 비정된다. 이들 나라의 위치가 마산만을 경계로 서쪽에 위치한 점과 함안의 아 라국을 둘러싸고 있는 점을 고려해보면, 포상팔국이 김해 가락국을 공 격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보라국은 전남 나주시로 비정되어 있어 3세기 초에 기록된 포상팔국전쟁의 기년을 염두에 두면
,42) 이 위치 비 39) 南在祐, 浦上八國 戰爭과 그 性格 , 伽倻文化 10, 1997. 40) 선석열, 浦上八國의 阿羅國 침입에 대한 고찰 , 가라문화 14, 1997. 南在祐, 앞의 논문, 1997. 백승옥, 포상팔국전쟁과 지역연맹체 , 가야의 포구와 해상활동 주류 성, 2011. 41) 백승충, 1~3세기 가야세력의 성격과 그 추이 -수로집단의 등장과 浦上八國의 亂을 중심으로- , 부대사학 13, 1989. 이현혜, 4세기 加耶社會의 交易體系의 변천 , 韓國古代史硏究1, 1988. 천관우, 加耶史硏究, 일조각, 1991. 金泰植, 加耶聯盟 史, 일조각, 1993. 박대재, 변한의 왕과 狗邪國 , 한국사학보 24, 2006. 이용현, 浦上八國의 亂에 대하여 , 가야제국과 동아시아, 통천문화사, 2007. 이영식, 김 해 대성동고분군 출토 외래계 유물의 역사적 배경 , 금관가야의 국제교류와 외래계 유물, 주류성, 2014. 백진재, 加耶諸國의 對倭交涉과 浦上八國戰爭 , 지역과 역사 37, 2015. 연민수, 변진시대 가락국의 성장과 외교 -포상팔국의 침공과 관련하여- , 한일관계사연구 51, 2015. 정상희, 포상팔국 전쟁의 개전(開戰)시기와 전쟁양상 에 대한 재검토 , 역사와 현실 110, 2018. 42) 포상팔국전쟁의 발생 시점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⑴ 삼국사기의 편년을 그대로 믿고 따라서 3세기 초로 보는 설(千寬宇, 앞의 책, 1991. 백승충, 1~3세기 가야 세력의 성격과 그 추이 , 부대사학 13, 1989). ⑵ 포 상팔국의 난을 기록한 사서의 기년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기년을 수정하 여 4세기 전반으로 보는 설(김태식, 함안 안라국의 성장과 변천 , 한국사연구 86, 1994) ⑶ 김해 가야 세력의 멸망 이후 대가야 멸망 이전의 6세기 중엽으로 보는 설(金 廷鶴, 任那と日本, 小學館, 1977. 선석열, 앞의 논문, 1993). ⑷ 대가야 멸망 이후 7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49 정에 대해서는 대부분 의문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포상팔국의 위치 비 정을 통해 볼 때에도 그 주변의 거제도와 관련된 언급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3) 위서동이전 한전 변진조의 ‘변진’12국 위치 변진조에 의하면 변진 즉 변한의 국명이 진한의 국명과 뒤섞여 열거 되어 있는데, 해당 기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弁辰도 12國으로 되어 있다.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 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樂奴國․軍彌國․弁辰彌烏 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이 있 어서,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 … 그 중에서 瀆盧國 은 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43) 변진 즉 변한 12국이 진한의 12국과 섞여 열거되어 있음은 앞서 보 았던 바다. 이들 12국의 위치 비정에 대한 지도를 참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2국을 비정한 지도에 보이는 바와 같이 ‘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 國․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으로 나열되어 있는 것 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44) 그렇게 기록했다고 하여도 그 위치를 확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세기 초엽으로 보는 설(三品彰英, 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 上, 吉川弘文館, 1962) 등의 견해가 있다. 43) 위서동이전 한전 변진조. 44) 千寬宇, 앞의 책, 1991, 65~67쪽. 150 항도부산 39 <그림 1> 변한 12국의 위치도45) 45) 국사편찬위원회 편, 신편 한국사 7 (신라․가야), 탐구당, 1996, 329쪽.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51 이들 국의 위치를 비정해 보면, 변진구야국은 경남 김해시, 변진주조 마국은 함양군, 변진안야국은 함안군, 사로국은 경북 경주시, 우유국은 울산광역시로 비정되며, 또한 난미리미동국은 경북 의성군이고 변진고 자미동국은 경남 고성군으로 비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국명이 음운상의 유사성과 관련이 있는 예가 많으므로 지리적 근접성에 의거한 국명의 나열로 보고 위치를 비정할 수는 없다. 특히 변한과 진한의 위치 비정에서 공통되는 점은 섬에 비정된 예가 없는 점을 참조해 보아도 독로국 다음으로 진한의 사로국과 우유국이 열거되어 있는 점에서도 낙동강 이동의 진한에 가장 가까운 변진 독로 국은 부산광역시로 비정해 볼 수 있다. 4) 신라의 동래군과 거제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신라시기의 동래군과 거제군에 대한 연혁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居道는 탈해이사금 때에 벼슬하여 干이 되었다. 그때 于尸山國 과 居柒山國이 [신라] 국경의 인근에 끼어 있어서 나라의 큰 걱 정거리가 되었다.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몰래 병탄할 생 각을 품었다. 매년 한 번씩 많은 말들을 張吐의 들판에 모아놓 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니 馬戱라 여겼다. 당시 사 람들은 그를 말아저씨라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이 이를 익숙히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거도는] 군대를 일으켜 불의에 쳐서 두 나 라를 멸망시켰다.46) ② 異斯夫는 성이 김씨이며, 奈勿王의 4세손이다. 智度路王[지증 왕] 때에 지방관이 되어 居道의 권모를 답습하여 加耶를 속여서 46) 삼국사기 권44, 열전4 居道傳. 152 항도부산 39 멸망시켰다.47) ③ 東萊郡은 본래 居柒山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 려]도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이 둘이다. 東平縣은 본래 大 甑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機張 縣은 본래 甲火良谷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 대로 따른다.48) ④ 巨濟郡은 문무왕이 처음 裳郡을 둔 곳으로, 바다 가운데의 섬이 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따른다. 거느 리는 현이 셋이다. 鵝洲縣은 본래 巨老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溟珍縣은 본래 買珍伊縣인데 경 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南垂縣은 본래 松邊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복고되었다.49) ㈒-①은 부산의 거칠산국이 울산의 우시산국과 함께 탈해왕 때에 거 도의 마희에 의해 멸망하였다고 하였으나,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기병이 동원된 것은 4세기 이후에나 가능한 전투방식이다.50) 거칠산국의 정복 시기에 대해서는 4세기 후반설,51) 5세기 초엽설,52) 5세기 후반설,53) 6 47) 동권44, 異斯夫傳. 48) 三國史記 권34, 地理志1, “東萊郡 夲居柒山郡 景徳王攺名 今因之 領縣二 東平縣 夲大甑縣 景徳王攺名 今因之 機張縣 夲甲火良谷縣 景徳王攺名 今因之”. 49) 三國史記 권34, 地理志1, “巨濟郡 文武王初置裳郡 海中㠀也 景徳王攺名 今因之 領縣三 鵝洲縣 夲巨老縣 景徳王攺名 今因之 溟珍縣 夲買珍伊縣 景徳王攺名 今因之 南垂縣 夲松邊縣 景徳王攺名 今復故”. 50) 신경철, 古式鐙子考 , 부대사학 9, 1985, 5~11쪽. 51) 최병현, 新羅古墳 編年의 諸問題-慶州 月城路․福泉洞․大成洞古墳의 상대편년을 중심으로- , 한국고고학보 30, 1993. 52) 이희준, 낙동강 이동지방 4․5세기 고분자료의 定型性과 그 해석 , 4․5세기 한일 고고학, 한일고고학공동연구회 심포지움, 1996. 백승옥, 가야사 연구성과를 통하 여 본 부산의 고대사 , 항도부산 18, 2002. 53) 정징원․홍보식, 釜山地域의 古墳文化-墓制와 高杯를 중심으로- , 부대사학 18, 1989. 백승충, 삼한시대 부산지역의 정치집단과 그 성격 , 항도부산 18, 2002. 허 재혁, 거칠산국의 성장과 발전 , 가야문화 18, 2005.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53 세기 전반설54) 등이 있다. 그 근거는 신라 최초 왕릉인 경주 황남대총 북분의 연대관에서 나온 것으로 신라계 금동관이 복천동 21․22호분에 출토된 신라계금동관의 연대도 같은 시기로 추정한 것이다.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은 신라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문헌 으로 보면 신라에 통합된 왕권이 성립되는 것은 눌지왕대(417~458)에 이르러서이다.55) 따라서 거칠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시기도 5세기 후반 이후에 해당될 것이다. ㈒-②의 이사부 열전에서는 지증왕(500~514) 때에 가야를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에는 법흥왕 19년(532)으로 기록되어 있 다.56) ㈒-①과 ㈒-②의 기록을 실제적인 내용으로 본다면 이사부가 서 기 1세기 거도의 권모를 답습하였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이사부의 기마전술을 거도설화에 소급 적용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종합해 보 면 신라는 이사부가 주관하여 지증왕 때부터 금관가야를 공격하자 금관 가야가 법흥왕 때에 투항한 것이며, 이 무렵에 동래지역도 신라에 완전 히 병합되었던 것이다. 6세기 전반 당시 동래지역의 중심 세력은 복천 동에서 연산동으로 옮겨가57) 연산동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이다
.58) ㈒- 54) 金斗喆, 앞의 논문, 2016. 55) 선석열, 신라국가성립과정연구, 혜안, 2001, 164~170쪽. 56)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 “金官國主金仇亥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 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57) 金斗喆, 앞의 논문, 2016, 69~71, 78~82쪽. 58) 동래 고읍성 터가 부산지방병무청 부지에 포함되면서 2002년 동의대학교 박물관이 시굴 조사를 실시하여, 토성 연장 96m와 우물 4개소가 조사되었다. 또한 포스코더 샾아파트 건축과 관련하여 경남문화재연구원이 2003년에 시굴 조사, 2005년에 발 굴 조사를 실시하여 판축 토성 벽 135m가 조사되었다(동의대학교 박물관, 釜山望 美洞 東萊古邑城, 2006. 경남문화재연구원, 東萊 古邑城址, 2007). 관련 유구나 유물로 볼 때 동래고읍성의 상한은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까지 시기를 올릴 수 있 으며, 1021년(현종 12) 때에 東萊郡城을 수축하였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읍성이 고읍성이 폐허가 된 원인은 고려 말기에 잦은 왜구의 침입과 관 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나동욱, 동래 고읍성 터 (부산역사문화대전 http://busan. grandculture.net, 검색일: 2020. 1. 7.) 154 항도부산 39 ③은 6세기 전반 신라에 병합된 동래지역을 군현으로 편제한 내용이다. 동래지역이 신라의 군현으로 편제되었을 때 郡名을 居柒山郡이라 하였 으며, 거도전의 전승에서는 거칠산군의 이름을 따서 부산지역의 國名을 居柒山國이라고 전하였던 것이다.59) 삼국사기는 삼국지를 참조하 지 못하여 위서동이전 한전의 삼한 78국의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였 으므로 두 사서의 국명은 상당수가 일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중의 한 예로서 동래지역도 독로국이라 전하지 않고 거칠산국이라고 전해지 게 되었던 것이다.60) ㈒-④의 거제군은 7세기 후반 문무왕 때에 이르러서야 설치되었다. 잘 알다시피 문무왕 때라 하면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이 전개되었던 시기였다. 이때 거제도에 상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임은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문무왕 3년 에 해당하는 663년에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왜국이 27,000명 의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금강 하구의 백촌강에 이르렀을 때61) 그 경 로는 앞의 ㈏-⑤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드러나듯이 ‘沙都嶋’ 즉 거제 도를 거쳐야만 하였다. 앞의 ㈏군의 사도성 관련 기록은 서기 2세기 중 엽부터 3세기 말엽 사이에 있었던 사실이 아니다. 사벌주의 설치시기가 법흥왕 12(525)년인 점62) 신라가 거제도를 영유한 시기가 가야 제국이 멸망한 562년 이후인 점 등을 고려해볼 때 6세기 후반 이후에 일어난 것 59) 선석열, 6세기 전후 신라의 지방통치와 연산동고분군 , 항도부산 34, 2017, 190~ 191쪽. 60) 유우창은 경덕왕 때에 이르러 약회되고 있던 대일관계에 대비하여 동래구의 거칠산 군을 폐지하고 망미동의 동래군을 설치하였다고 보았으나(유우창, 앞의 논문, 199~200쪽), 이는 거칠산의 위치가 망미동 쪽에 가까우므로 동의하기 어렵다.
61)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2년 “三月 遣前將軍上毛野君稚子間人連大蓋 中將軍巨勢 神前臣譯語三輪君根麻呂 後將軍阿倍引田臣比邏夫大宅臣鎌柄 率二萬七千人 打新 羅 … 秋八月壬午朔甲午 … 正當越海而至 願諸將軍等 應預圖之 我欲自往待饗白 村”. 62)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및 동권34, 지리지1 尚州條.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55 으로 보아야 한다. 문무왕은 663년의 사건이 있은 직후 왜의 침입에 대 응하기 위해 직접적인 통치를 하고자 거제도에 상군과 그 영현을 설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의 ㈏-④의 사벌주 호민 80여 家를 사도성에 이 주시킨 조치도 상군의 설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63) 신라가 주-군-현 을 획정할 때 그 기준은 丁의 다과에 있었는데, 거제도의 경우 그 수가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전략상의 보완을 위해 사벌주의 부유한 호 민을 이주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5) 사독과 사해 신라의 국가적 제사제도에는 변경지대에 대한 제사가 정비되어 있 는데, 그 중에서 바다와 강에 대한 제사로서 中祀에는 사독과 사해가 있다. ㈓-① 4瀆은 동쪽의 吐只河는[혹은 참포라고도 한다.] 퇴화군이다. 남 쪽의 黃山河는 삽량주, 서쪽의 熊川河는 웅천주, 북쪽의 漢山河 는 한산주다.64) ② 4海는 동쪽의 阿等邊[혹은 근오형변이라고 한다.]은 퇴화군이 다. 남쪽의 兄邊은 거칠산군이다. 서쪽의 未陵邊은 시산군이다. 북쪽의 非禮山은 실직군이다.65) 4독은 신라 국가제사의 중사 가운데 하나로서 신라의 사방에 있었던 4개의 주요 하천, 즉 동독인 토지하, 남독인 황산하, 서독인 웅천하, 북 63) 앞서 본 사도성 기록은 가야 제국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의 사실로 보이므로 아마 문 무왕 때의 사실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과제로 삼아 논고를 쓰고자 한다. 64) 三國史記 권32, 雜志1 祭祀志, “四瀆 東吐只河[一云槧浦] 退火郡 南黄山河 歃良 州 西熊川河 熊川州 北漠山河 漠山州”. 65) 三國史記 권32, 雜志1 祭祀志, “四海 東阿等邊 一云斤烏兄邊 退火郡 南兄邊 居柒 山郡 西未陵邊 屎山郡 北非禮山 悉直郡”. 156 항도부산 39 독인 한산하를 가리킨다. 신라는 9주의 창설이 끝난 신문왕 5년(685) 이 후부터 성덕왕 34년 이전에 이들 제사를 중사로 편제된 것66)으로 신문 왕 6년에 당에서 보내온 吉凶要禮의 吉禮, 즉 당의 국가제사제도에 편제된 내용을 참조였던 것이다.67) 신라 四瀆의 위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토지하는 동독으로서 현재의 경북 포항시 흥해읍 일대를 흐르 는 곡강천을 가리킨다. 915년에 참포의 물이 東海의 물과 부딪쳐서 파 도가 높이 일었다는 기록이 전한다.68) 여기서 참포는 곡강천에 위치한 포구로서 동해의 바닷물이 강으로 역류한 지변으로 기록된 것이다. 둘 째, 황산하는 남독으로서 현재의 경남 양산시 일대를 흐르는 낙동강 하 류로 흘러드는 양산천을 가리킨다.
셋째, 웅천하는 서독으로서 현재의 충남 공주시 일대를 흐르는 금강을 가리킨다. 넷째, 한산하는 북독으로 서 현재의 서울특별시 일대를 흐르는 한강을 가리킨다. 따라서 한국 고 대사회에서부터 이들 4瀆에서 보이는 ‘瀆’의 의미는 바다가 아니라 강 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신라에서 바다를 가리키는 것은 ‘四海’라고 하였던 것이다. 신 라 四海의 위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등변은 동해로서 현재의 경북 포항시 흥해읍 일대의 해안가 를 가리킨다. 둘째, 형변은 남해로서 현재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일대의 해안가를 가리킨다. 셋째, 미릉변은 서해로서 현재의 전북 군산시 일대 의 해안가를 가리킨다. 넷째, 비례산은 북해로서 현재의 강원도 삼척시 일대의 해안가를 가리킨다. 따라서 독로국의 ‘瀆’은 바다로 둘러싸인 땅, 즉 섬을 가리키는 것이 66) 노중국, 統一期 新羅의 百濟故地支配 , 한국고대사연구 1, 1988, 137쪽. 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309쪽. 67) 나희라,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2003, 44~45쪽. 68) 三國史記 권12, 신라본기 12 신덕왕 4년 6월조.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57 아니라는 것이며, 바다로 둘러싸인 거제도는 신라의 변경 제사처인 ‘4 해’에도 나타나지 않는 점도 참고된다. 다시 말하면 신라국가의 해양교 류정책에서도 거제도의 중요성은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동래의 중요성 이 부각되고 있음도 아울러 참조된다. 2. 고고자료로 본 거제도와 동래 1) 3세기 전후 변한사회의 대왜교류 이 시기 관련 유적으로는 사천시 늑도유적, 고성군 동외동패총, 김해 시의 김해패총․내동지석묘․지내동옹관묘, 부산광역시의 조도패총․ 온천동유적․내성유적, 경주시 조양동유적 등이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위치한 내성유적에는 독로국과 왜의 교류가 나타나고 있는데, 삼한시대 전기인 기원전 2세기경에 왜인들이 내성유적에 거주한 것으 로 밝혀지고 있다.69) 최근에 이와 관련된 발굴성과가 기장군에서도 나 왔는데, 기장군 철마면에 위치한 고촌리의 생산유적에서 목태흑적칠고 배 6점과 파수부장병형옹 등의 왜계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일본 북부 구주의 元岡遺跡과 大阪府의 池ノ上遺跡․鬼虎川遺跡의 유물과 같은 계통으로 야요이시대 후기와 고분시대 전기, 즉 3세기 전후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0) 내성유적과 고촌리 생산유적에서의 왜계유적이 나 유물의 존재는 부산지역이 변한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빨리 왜와 교 섭한 곳 중의 하나임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 기록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① 國에는 철이 나는데, 韓과 濊 및 倭가 모두 좇아서 가져간다.
모 든 매매에는 모두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 69) 부산직할시립박물관, 東萊福泉洞萊城遺蹟, 1990, 59~63쪽. 70) (財)東亞細亞文化財硏究院, 釜山 古村里 生産遺蹟, 2010, 445~447쪽. 158 항도부산 39 다. 또한 낙랑군과 대방군에도 공급한다.71) ②帶方郡에서 倭로 갈 때 해안을 둘러서 바닷길로 간다. 韓의 國들 을 지나 잠시 남쪽으로 갔다가 잠시 동쪽으로 가면 [倭의] 북쪽 對岸인 狗邪韓國에 이르는데, 모두 7千餘 里이다. 처음으로 한 바다를 건너 千餘里를 가면 對馬國에 이른다. …千餘戶가 있으 나, 좋은 농토가 없어 해산물을 먹고 스스로 살아가며 배를 타 고 남북으로 다니면서 식량을 구입하였다. 또 남쪽으로 瀚海라 고 하는 한 바다를 千餘里로 건너면 一支國에 이른다. … 3千餘 家가 있으며 오히려 농토가 있어 농사짓더라도 식량이 부족하 여 또한 남북으로 다니면서 식량을 구입하였다. 또 바다를 건너 千餘里를 가면 末盧國이 이른다. … 동남쪽으로 육로로 5百里 를 가면 伊都國에 이르는데, … 千餘戶가 있다. … 대대로 王이 있으나, 모두 女王國에 속해 있으며, 帶方郡의 使者가 왕래하면 서 항상 머무는 곳이다.72) 위의 기록은 삼한시대의 대왜교류에 관한 것이다. ㈔-①은 철을 매개 로 한 교류이며, ㈔-②는 대방군 ― 구야국 ― 對馬國 ― 一支國 ― 末路 國 ― 伊都國의 교통로를 기술하고 있는데, 변한의 구야국 및 독로국을 거쳐 일본열도 북부구주까지의 교통로로서 삼한시대 이후에도 가장 주 요한 교통로였다. 이러한 루트를 통해 변한과 일본열도의 교류가 전개 되었음을 위의 고고학 자료에서도 방증해 주고 있다. 71) 위서동이전 한전 변진조,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 以供給二郡”. 72) 위서동이전 왜인전,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 有千餘戶 無良田 食海物自活 乘船南北市糴 又南渡一海千餘里 名曰瀚海, 至一大國 … 有三千許家, 差有田地 耕田猶不足食 亦 南北市糴 又渡一海 千餘里至末盧國 … 東南陸行五百里 到伊都國 … 有千餘戶 世 有王 皆統屬女王國 郡使往來常所駐”.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59 2) 가야시대의 대왜교류 삼한시대뿐 아니라 가야시대에도 독로국은 대왜교류가 활발하였다. 가야시기에 왜계유물이 출토된 유적은 부산광역시의 동래패총․복천 동고분군․조도패총․화명동고분군, 김해시의 예안리고분군․양동리 고분군․부원동패총․봉황대유적․대성동고분군, 창원시의 성산패총 ․삼동동고분군․용원유적, 경주시의 월성로 가-29․30호묘 등이 있 고, 광주광역시의 소명동 17호 주거지, 군산시 어방리 남전패총 등이 있 다. 왜계유물 출토유적의 입지조건은 해안지대의 무덤을 비롯하여 조개 더미와 주거지이며, 해당 유적은 대부분 부산․김해․창원 등 동남해안 일대에 90% 이상 분포하였다. 종류로는 토기․석기․철기․거울․동 촉․동과․조개제품 등이며, 토기는 복천동고분군(57․42호묘)에 집 중되고 청동제․석제품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에 집중 부장되어 있다. 부 산의 경우 복천동고분군 외에 화명동고분군에도 왜계토기가 출토되었 다.73) 이들 유적은 대부분 김해와 부산에 집중되어 있었던 점에서 한반 도 낙동강하류역 일대가 대왜교류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74) 본 절에서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볼 때 대왜교류 상에서 거제도와 관 련되는 삼한 및 가야시대의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6세기 전반 왜계통의 장목고분만 존재할 뿐이다.
거제도에는 기원전 5~4세기로 편 년되는 34개의 고인돌을 비롯하여 주거지 등 90개소의 청동기문화유적 73) 홍보식, 한반도 남부지역 왜계 요소 , 韓國古代史硏究 44, 2006, 24쪽. 74) 참고로 신라시대에도 부산은 해양교류 상에 중요한 곳이었다. 신라의 왕도에서 출발 하여 해양을 통해 일본과 중국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은 부산의 형변 이었다. 형변은 신라의 4해 중의 하나로서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항해의 안전을 기 원하였다. 먼저 신라와 당의 해양교류루트는 북로와 남로 가 있는데, 그 중에서 남로 는 왕도-울산항-부산 형변-남해안-서남해안-서해남부-중국의 항로였다. 이 루트는 일본의 견당사도 신라의 협조를 받아 중국으로 가기도 하였다. 다음 신라의 대왜교 통로는 경주-울산-기장-형변-쓰시마-이키-하카타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가 이용되 었다(선석열, 신라시기 부산지역의 해양교류와 형변 , 항도부산 32, 2016, 134~ 138쪽). 160 항도부산 39 이 널리 분포하고 있으나, 삼한시대의 유적으로는 남산패총․동산유물 산포지 가야시대의 유적으로는 장터고개고분군이 알려져 있는 정도이 다.75) 이후 유적이 증가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본 바의 부산지역의 고 고자료에 비하면 1개 읍락의 규모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문무왕 때 거제도에 상군이 설치되었는데, 7세기 중엽에 축성 된 폐왕성76)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군과 폐왕성은 거의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이다. 663년 왜국은 백제부흥운동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을 단행하여 신라의 성을 공격하였고,77) 668년에는 당이 많은 군선을 건조 하여 신라를 치려 하였다.78) 이로 인해 문무왕은 거제도에 상군을 설치 하고 폐왕성 등을 축조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신라에서 거제도를 중시하게 된 것은 660년대에 이르러서 였을 뿐이다. 이후 경덕왕 때에 거제군으로 개명한 것은 남해연안항로 가 대외교류 상에서 중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Ⅳ. 맺음말 본고는 위서동이전에 보이는 삼한시대 독로국의 위치비정에 대해 동래 즉 부산인가 아니면 거제도인가에 대해 문헌과 고고자료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제의 기록은 위서동이전에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한다’라고 75) 이에 대한 것은 거제시․동아문화연구원이 펴낸 자료
(거제시문화유적분포지도, 세종문화사, 2005)를 참조하였다. 76) 심봉근, 앞의 책, 1995, 32~33쪽. 77)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2년조, “六月 前將軍上毛野君稚子等 取新羅沙鼻岐奴江二 城”. 78)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11년 7월 26일조 답설인귀서 , “國家修理舩艘, 外託征伐倭國, 其實欲打新羅”.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61 하는 기록을 중심으로 독로국이 거제도에 있었는가 아니면 부산에 있었 는가를 두고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 첫째, 거제설은 정약용의 지리고증에서 상군의 해석인 ‘두루기’가 독 로국과 음상사함을 근거로 제시한 이후 언어학자나 역사고고학자들이 지지하여 한국고대어에서 ‘독’의 받침이 발음이 안되므로 도로 흑은 두 로로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 왕경의 6부 명칭 가운데 ‘喙 部․沙喙部․岑喙部’는 각기 ‘탁부․사탁부․잠탁부’로 발음이 되는 사례로 보아 고대어에 받침을 구사하였다. 음운학에서 한국고대어와 조 선시대어가 같다고 보는 시각은 잘못이다. 6세기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성․사도도라고 전하였으므로 거제도를 ‘사도’라고 불렀다. 둘째, 동래설은 삼국사기에 거칠산국으로 전해진 기록이 있어 문 제가 되었다. 동래의 국명은 거칠산국으로 전해졌으나, 사실은 신라에 병합되어 군현으로 편제될 당시에 연산동고분군과 가까운 거칠산의 이 름을 따서 거칠산군이라 하고 그 이전의 국명을 거칠산국이라 명명하였 다. 다시 말하면 거칠산국은 원래의 국명이 아니라 국의 중심지와 관련 되는 명칭에 불과하므로 고대 부산의 국명으로 볼 수 없다. 위서동이 전의 독로국과 삼국사기의 동래군을 음운학적으로 추구하여 동네→ 동래로 변하였다고 보았으나, 삼국사기는 삼국지를 전혀 참고하지 않고 편찬되었기 때문에 독로국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경덕왕 때 에 개명된 동래군은 산동반도의 ‘東萊’라는 중국식 지명에서 유래되었 으므로 이를 음운학으로 연구할 수 없다.
위서동이전에서 왜와 가장 가까운 독로국은 거제도와 부산이 공통 되는 지리적 인식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지역의 역사적인 실 체를 규명해야 한다. 먼저 문헌 기록에서 살펴보면 고대의 거제도와 관련되는 자료 가운 데 위서동이전 변진조의 변한 12국의 위치를 비정한 지도로 보면 섬 162 항도부산 39 에 위치가 비정되는 나라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3세기 전반 으로 기록된 포상팔국에는 거제도에 위치하는 나라가 보이지 않고 沙道 城․沙都嶋는 6세기 중엽에 해당되는 것이며, 상군은 663년 백제부흥 군을 지원하려는 왜국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문무왕 때에 설치한 것 이다. 그 당시 거제도에는 인적 물적 자원이 적어 사벌주의 호민을 이주 시켜 군현을 설치하였다. 8세기 중엽 경덕왕 때에 개명된 ‘巨濟郡’의 어 의를 보면 통일신라시기에 남해안교류 상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고고자료로 볼 때 거제도에는 청동기문화유적이 널리 분포하고 있는 반면에, 삼한 및 가야시대의 유적은 부산지역에 비하면 1개 읍락 의 규모도 되지 않는다. 고대의 부산과 관련되는 고고학적 자료는 삼한 시대부터 온천동유적․내성유적, 가야시대의 동래패총․복천동고분 군․조도패총․화명동고분군에 이르기까지 존재하였다. 특히 왜인이 거주한 내성유적, 왜계유물이 출토된 고촌리유적․복천동고분군․화 명동고분군 등으로 보아 대왜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헌 기록에서도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형변은 신라 海神제사인 4 해 중의 하나로서 해양교류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부산지역은 삼한시대에 독로국이 존재한 때부터 통일신 라시대까지 신라의 대외교류 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거제지역은 삼한시대에는 소국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6세기 후 반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야 역사적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볼 때 삼한시대의 독로 국은 거제도로 비정할 만한 근거는 매우 희박하며, 부산지역에 존재하 였던 것이다. 독로국의 위치 비정과 그 역사적 의미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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