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의 섬 가우도(駕牛島)를 가다
(기행 수필 전남 강진 제1편)
루수/김상화
완도 수목원을 감명 깊게 보았다. 바람이 매우 심하게 불어 청산도를 가지 못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워가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완도였는데 유명한 관광지를 원 없이 보고 간다. 아름다운 완도의 정도리(正道里) 구계등(九階燈)과
완도 수목원은 뇌리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 같다. 이젠 강진 가우도로 간다. 이번 행선지도 필자가 매우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다. 오늘 비로소
발을 딛게 되니 하늘에서 준 큰 복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욱이 강진에는 필자와 함께 시인으로 등단한 동기가 한 분 계신다. 이분은 시인이시며
동양화로 유명한 목창선 화백이시다. 시간이 되면 꼭 뵙고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런데 시간이 허락하여 이 시인을 볼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버스는 가우도(駕牛島)를 가기 위해 신기리 해변의 출렁다리 옆 주차장까지 왔다. 이곳 신기리에서 출렁다리만 건너가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가우도(駕牛島)다
가우도(駕牛島)는 향기의 섬이라고 한다. 가우도에 위치한 출렁다리는 해안선을 따라 약 3km가량의 산책로가
펼쳐져있다. 마치 한폭의 그림같은 푸른 바닷길을 볼 수 있다. "가우도(駕牛島)"라 부르는 이유는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에 해당되고, 섬의
생김새가 소(牛)의 멍에에 해당 된다하여 "가우도(駕멍에가 牛소우 島섬도)"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섬의 현황은 강진군 도암면
망호에 속한 강진만 8개의 섬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다. 14가구이며 31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면적은 32만㎡이며 이중 논
2%, 밭 24%, 임야 65%, 기타 9%로 형성되어 있다. 1974년에 전기가 가설되었으며 50~70년생 후박나무가 200여 그루 자생하고
있다. 주요생산은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며 주로 어패류 양식, 조업 등을 통해 꼬막, 바지락, 굴, 황 가오리 등을 생산하고 있다.
회원들은 여행이 즐거운지 향기로운 웃음을 띤 행복한 얼굴이다. 아마도 여행으로 인해 동료들과 신선한 대화가 가져다주는 잔잔한
행복이 밀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너도나도 빨리 가우도를 가보고 싶은 눈치다. 다리를 건너갈 때 바람이 몹시 불어온다. 걷기가 매우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이다. 바람아! 불어라 아무리 네가 힘센 바람으로 괴롭힌다 해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우도(駕牛島)를 갈 것이다. 그래서 육지에서
보지 못한 것을 마음껏 보며 즐길 것이다. 이렇게 필자도 즐거운 생각을 하며 모질게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에 안고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회원들은 사진 찍기에 바쁘다. 사진을 찍고 걷기 시작했다. 해변은 아기자기하게 데크를 깔아놓았다.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운치 있는
해변을 만들어 놓았을까? 관광객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배려해 흡족할 정도로 만든 것 같다. 참 아름답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잘
설치해 놓은 데크를 사뿐사뿐 바람을 가르며 걷는다. 몹시 불어오는 바람은 미워도 바닷물에 내려앉은 햇살은 따사로운 사랑의 빛을 안겨주는 것
같다. 바닷물이 철썩대는 파도 소리 들려오고 그 위에 내려앉은 햇살은 불꽃 되어 공중으로 틔어 오른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이 잘게 부서져 하늘을
오르는 형국이다. 이러한 광경이 데크와 어울려 하나의 신비 체를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은 순간을 간혹 맛보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하나 보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해피 가족에게 베풀어 주는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 싶다. 모든 회원은 마냥 즐거운 듯 사방을 바라보며 즐거운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어떤 회원은 웃음을 참지 못해 눈이 초승달이 되고 만다. 그러다가 빙그레 웃으며 조잘대는 대화 소리는 참으로 향기롭다.
그토록 아름답게 깔아 놓은 데크를 한참 걷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선생의 동상을 보았다. 깜짝 놀라
이것이 사실인가 하고 필자는 다시 확인해 보았다. 틀림없는 영랑(永郞) 선생의 동상이다. 선생께서 의자에 앉아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시는 형상의
동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또 선생의 대표작인 "모란이 피기까지는" 주옥같은 시를 돌에 새겨 놓았다. 이 글은 온 국민이 사랑하는 시로써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이곳에 와서 이렇게 훌륭하신 선생을 볼 수 있을 거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늘이 도우셨나
보다. 시인으로서는 꼭 뵈어야 할 훌륭한 선배이자 참 스승이시다. 김경화 회원을 비롯한 여자 회원 몇 분은 동상 옆에 앉아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댄다. 필자도 선생의 동상 옆에 살포시 앉아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선생님의 대표작인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를
적어본다. 철자법이라든가 어휘가 현대 시와는 많이 다르다. 선생이 쓰신 원본을 그대로 적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들니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 어느날 그 하늘 무덥든 날
떠러져 누은 꽃닢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디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뻐처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니고잇슬테요 찰난한 슬픔의 봄을
이글은 1934년 4월 1일 "문학" 3호에
발표하셨다
시인으로서는 하늘과 같은 선생의 동상을 보고 또 시를 읽으며 잠시 감상을 하다 걷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가우도의 한 장면은 천하일품이다. 이 황홀한 감정을 어찌 표현해야 할까? 허공에 대고 세례나 데를 불러 메아리치게 하고 싶다.
섬에 대한 유래에 대해 적어보자. 약 600여 년 전부터 서쪽 부근에 고씨(高氏) 20여 호가 자리 잡고 살다가 떠나갔다. 현재는
경주김씨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산 정상 북쪽 8부 능선에 평평한 터가 동서로 길게 약 200m 있는데 옛날 말 달리던 터로
"말달리"라고 불리고 있다. 가우도 주민들이 어린 시절 달리기 등을 하며 놀이터로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마을 뒷산 동쪽 중간지점엔 후박나무
군락지에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堂) 집(서낭당)을 마련하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모셔 왔는데 6.25 이후
중단되었으며 지금도 그 터가 숲속에 붕괴된 채로 흔적이 있다. 매년 봄이면 마을 어귀 우물가에 마을을 상징하던 수령 500년 이상 되던 좀팽나무
아래에서 풍어(豊漁)를 비는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으나 나무가 고사된 후 행하여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5월 5일 단오
날에는 수리취를 넣어서 둥글게 만든 단오 떡을 만들어 조상에게 제(祭)를 지내고, 마을 화합을 위해 그네뛰기 등 여러 행사를 추진하였으나
노령화와 이농 등으로 지금은 행하여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거북형 가우도에 석양이면 학(鶴)이 모여들어 해, 산, 구름, 소나무와 함께
거북과 학이 함께 어우러진 십장생(十長生) 마을로 주민들이 장수한다고 알려졌다. 후박나무 잎은 독성이 있어 곤충이 모여들지 않으며 껍질은 위장병
등의 약재로 쓰이는데 인근 마량미항까막섬(천연기념물 제172호) 후박나무와 함께 강진의 대표적인 상록수림으로 원래 가우도에 자생하는 대표
수종이었으나 약재용으로 베어 나간 뒤 지금은 이곳 집단 군락지 외 섬 전체에 어린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가우도의 상록수림은 물고기 떼를 해안으로
유인하는 어부림 역할을 하며 이 때문에 가우도 인근은 어족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우리가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했지만, 감동적인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여 인간을 도와준 아름다운 섬이 있다. 불구의 자식을 둔 어머니가 간절한 마음을 표출한 말을 듣고
자신을 희생한 섬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섬을 인터넷을 통해 소개한다. 그 섬이 바로 까막섬이다. 까막섬의 유래에 대해 적어본다.
까막섬은 숲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가막섬 또는 까막섬이라 불렸는데, 옛날 이곳에 수 천마리의 까마귀 떼가 날아와 섬을 뒤덮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큰 까막섬과 작은 까막섬 2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겉으로 보기에는 후박나무 숲으로 보일 정도이나 돈나무 등 100여 종이
넘은 열대성의 상록수종이 함께 자라고 있어 천연기념물 172호로 지정된 섬이다. 까막섬은 원래 적도 부근 남태평양에 있었는데 강진까지 찾아
왔다고 한다. 남태평양에서 강진까지 온 이유는 육지가 되고 싶은 간절한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기나긴 여정 끝에 마량에 닿을
무렵이었다. 바닷가에서 까막섬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 업은 여인이 발 없는 섬도 걸어 다니는데 내 아들은 두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는구나 라고
땅이 꺼지도록 탄식하였다.
여인에게는 걷지 못하는 아들이 있었다. 섬은 이 말을 듣더니 이동을 멈추고 지금 그 자리에 머물기로
하였다. 신기한 것은 섬이 멈추자 곧 여인의 아들은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까막섬은 육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나왔지만, 여인의 아들에게 걷는 능력을 주고 자신은 눈앞에 육지를 두고 멈추어 버린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타인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정진해온 자신의 꿈을 접는다는 것이 얼마나 갸륵한 일일까, 하지만 그로 인해 까막섬은 육지의 끝자락이 되지 않고 타인의 꿈을 이루어준
위대한 작은 섬으로 남았다.
이처럼 섬의 아름다운 전설도 알게 되고 자연의 신비롭고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뱃속에서는 배고프다고 신호를 보낸다. 점심을 먹기 위해 쌍둥이 출렁다리를 건네야 했다. 다리를 건너갈 때는 건너올 때 보다 바람이 배 이상
강하게 불어댄다. 자칫 사람이 날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영랑 김윤식 선생 생가와 문학관을 가기로 했다. 강진
제1편은 여기서 맺는다. 제2편에서는 영랑 선생의 생가와 문학관을 소상히 쓸 것이다.
2018년 04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