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 관람
※ 청와대 약사/ 靑瓦臺 略史
청와대(청기와로 지붕을 얹은 건물이란 뜻)는 대통령의 근무 및 생활 공간을 일컫는 공식 명칭으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청와대 (청기와로 지붕을 얹은 건물이란 뜻)는 대통령의 근무 및 생활 공간을 일컫는 공식 명칭으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라는 이름은 윤보선 전 대통령 때에 처음으로 사용됐고, 오늘날에는 실제 건물뿐 아니라 대통령의 국정수행부서 전반을 가리킵니다.
청와대는 조선 시대(1392~1910) 왕의 정궁으로 사용된 경복궁과 인접해 있습니다. 그 당시 현재의 청와대 자리는 경무대로 불렸습니다. 문과시험과 무술대회, 군사 사열 같은 각종 국가기능이 펼쳐졌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청와대 뒤로는 옛 왕도였던 서울을 동서남북으로 에워싸 보호하고 있는 4대 주산의 하나인 북악산(342m)이 우뚝 서 있습니다.
북악산을 기점으로 이들 4대 산의 능선을 따라 옛 성곽들이 축조되었고 조선조 시대의 성벽 일부는 아직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 북악산 산기슭은 왕궁과 가까울 뿐 아니라 빼어난 경관 때문에 근처에 왕족들과 양반사대부들이 많이 자리 잡고 살았습니다. 이 일대의 절경을 묘사한 시, 그림, 문학작품을 허다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청와대는 주변 자연환경을 세심하게 보전해, 서울에서 최고의 ‘녹색’지역 중 하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높이 솟은 소나무, 떡갈나무, 감나무 -일부는 수령이 250년 이상- 사슴, 희귀종 새, 다람쥐, 그 밖의 동물들이 자유롭게 땅 위를 돌아다니는 청와대는 환경의 보고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북악산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대통령 관저에서 내려다뵈는 서울 도심의 모습은 장관입니다.
※ 본관/ 本館
본관은 대통령의 근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1989년 22명의 전문가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많은 의견을 수렴한 뒤 1991년 9월 4일 신축되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1.president.go.kr%2Fimages%2Fcheongwadae%2Fintroduction%2Flandscape01.jpg) | 1991년 완공된 본관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각종 기능에 알맞은 방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본관 외부 설계는 전통 목조 왕궁 건설에 사용된 건축기법에 토대를 둔 것입니다. 추녀마루가 있고 박공판이 달린 지붕은 한국 전통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 높고 매력적인 것의 하나로 평가됩니다. 지붕은 선들이 용마루 부분에서 삼각형으로 수렴하는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관 지붕은 처마 끝에서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며 올라가 용마루에서 한데 모여 추녀마루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
본관과 두 개의 부속건물은 총 15만여 개의 전통적인 한국 청기와로 덮여 있습니다. 청기와 지붕은 독특한 색깔과 뛰어난 내구성으로 유명하며, 좋은 도자기를 제조하는 것과 비슷한 공정을 거쳐 구워내는 청기와는 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니고 있으며 색깔도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관 내부를 보면 현대식 쾌적함과 시설들이 효율성, 현대성, 전통성 사이에서 기막힌 균형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은 본관 2층에 있습니다. 본관에는 기능별로 몇 개의 방과 회의실이 마련돼 있는데, 그 중 집현실에서는 대통령이 고위 참모진과 회의를 하거나 때로는 외국 국가원수들과 정상회담을 열기도 합니다.
이 밖에 인왕실, 리셉션 만찬장, 그리고 소규모 모임을 위한 식당이 있습니다. 충무실은 정상회담이나 외국 귀빈들을 위한 공식 만찬이 있었던 후 열리는 언론브리핑에 사용됩니다. 본관 앞 대정원 본관 앞 확 트인 넓은 잔디밭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각종 야외 행사장으로 사용됩니다. 대정원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행사는 국빈을 위한 공식 환영식입니다. 대통령과 외국 국가원수는 육군, 공군, 해군과 해병대 의장대를 사열합니다.
※ 영빈관/ 迎賓館
영빈관은 대규모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건물로서 1978년 1월에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준공이 되었습니다. 영빈관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입니다. 특히 전면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2층까지 뻗어 있는 높이가 13m에 둘레가 3m인 기둥입니다. 내부는 무궁화, 월계수, 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1.president.go.kr%2Fimages%2Fcheongwadae%2Fintroduction%2Flandscape02.jpg) | 영빈관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입니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됩니다. 또한, 100명 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습니다. 2층에도 1층과 똑같은 홀이 있는데 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
※ 대통령관저/ 大統領 官邸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공간과 사적인 업무공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느껴 1990년 10월 25일에 완공되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1.president.go.kr%2Fimages%2Fcheongwadae%2Fintroduction%2Flandscape03.jpg) | 현재 관저를 완공하기 전, 구 본관 2층이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습니다. 이에 따라 대통령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은 공적 계기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공간이 제한적이라 외빈들을 맞기에 적절치 않았습니다. 이 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1989년 새 대통령 관저를 건축하기 시작했고 1990년 10월 완공됐습니다. 관저는 팔작지붕의 전통한옥으로 목재는 강원도 강릉시에서 벌채한 홍송을 사용했습니다. |
대통령 관저는 생활공간인 본채, 접견공간인 별채, 전통양식의 뜰과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관저의 대문은 한국의 전통 한옥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삼문입니다.
※ 수궁터/ 守宮 터
지금 청와대가 위치한 지역은 옛날부터 풍수 지리학상 길지(吉地)로 알려져 이곳에는 890년 전인 고려 시대에 남경의 이궁(離宮)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이곳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1.president.go.kr%2Fimages%2Fcheongwadae%2Fintroduction%2Flandscape04.jpg) | 고종 5년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 융무당, 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또한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기 위해 왕이 손수 가꾸던 8배미의 논이 있던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모두 허물고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했고, 총독관사를 새로 지어 7, 8, 9대 총독이 사용했습니다. |
일본인들이 여기에 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 지리학상 용 맥을 끊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93년 청와대는 역사적인 고증과 풍수들의 자문을 얻어 구 본관과 총독부 청사로 썼던 건물을 헐어 경복궁의 지기와 민족정기를 되살렸습니다.)
그 후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은 미 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구 청와대 건물은 1993년 11월 철거되었습니다.
1989년에 집무실과 관사를 분리하면서 구 청와대 본관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과 박물관으로 보존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하게 된 것입니다. 철거 뒤 그 자리를 옛 모습대로 복구시킨 후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지금은 수궁 터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개요 : 구본관을 철거하여 수궁(守宮)터로 복원
표석 : 삼각산(三角山)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景福宮) 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이 산자락은 일찍이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고려 시대 (숙종 9년, 1104년) 왕실의 이궁(離宮)이 자리 잡았던 곳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景福宮) 후원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과 경무대, 융문당, 경농재, 벽화실, 오운각 등 총 232 간의 건물과 임금이 친히 논을 일궈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던 8배미의 논이 있었음.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알려졌던 이곳에 일제(日帝)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우리의 면면한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 내의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외세침탈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1948년 3월까지 미군정사령관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으나 1990년 10월에는 관저를, 다음 해 9월에는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옮김에 따라 빈집으로 남게 됨.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11월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리기 위해 구 총독부 관사 건물을 철거하도록 했고, 옛 지형 대로 복원해 원래 이곳에 있던 건물의 명칭을 따라 수궁(守宮) 터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 상춘재/ 常春齋
상춘재(常春齋)는 1983년 4월 준공된 전통적인 한식 가옥으로 외빈접견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1.president.go.kr%2Fimages%2Fcheongwadae%2Fintroduction%2Flandscape05.jpg) | 이 자리에는 원래 약 66m² 정도의 일본식 건물이 있었으며 1983년까지만 해도 청와대 경내에는 전통 한옥식 건물이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와도 우리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200년이 넘는 금강소나무를 사용하여 전통 한식가옥인 상춘재를 짓게 되었습니다. 현재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
현 상춘재 자리에는 일본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관사 별관인 매화실(梅花室)이 있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 상춘실(常春室)로 그 명칭을 개칭하여 사용했으며 1977년 12월에 철거하고 1978년 3월 천연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약 72.6㎡)로 개축하여 상춘재(常春齋)라 명명하였다. 그 후 전통 한식건물로 만들기 위해 1982년 11월 20일 착공하여 온돌방 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총면적 417.96㎡의 건물을 1983년 4월 5일 완공하였다. 주 기둥에 사용된 목재는 200년 이상 된 소나무(春陽木)이다.
구조 : 목재와 기와 방 2칸, 주방 1칸, 마루, 화장실 1칸, 대기실 1칸, 지하실
※ 녹지원/ 綠地園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1.president.go.kr%2Fimages%2Fcheongwadae%2Fintroduction%2Flandscape06.jpg) | 녹지원(綠地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입니다. 이 곳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고 일제 총독관저가 들어서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이 조성되었는데 1968년에 약 3305.8㎡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1995년 5월 28일에는 인근 주민 약 3,000여 명을 초청하여 KBS 열린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습니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현재 169년에 이르며 높이는 약 12m 입니다. 대통령이 여유있게 녹지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옛 경복궁의 후원으로 채소밭, 가축사육장, 온실 등의 부지였으며,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습니다. 국내외 귀빈 및 외교사절단을 위한 야외 행사장,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춘추관/ 春秋館
춘추관(春秋館)은 1990년에 완공되었으며, 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맞배지붕에 토기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을 살렸습니다. 현재 대통령의 기자 회견 장소와 출입기자들의 기사소송 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의미와 유래
중국 사서오경의 하나인 춘추에서 따온 말로 엄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역사의 기록을 담는 곳
- 고려시대 : 시정(그 당시의 정사)의 기록을 맡아오던 관청. 고려 개국초에는 사관이라 하다가 1308년 (충렬왕 34년) 이를 문한서에 병합하여 예문 춘추관으로 고침. 1325년(충숙왕 12년)에 예문관과 갈라져 춘추관으로 독립. 춘추관은 1356년(공민왕 5년) 사관으로 개칭하였다가 62년 다시 춘추관으로 되고 89년에는 예문관을 합하여 예문 춘추관으로 되었습니다.
- 조선시대 : 시정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청. 조선개국 당시에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예문 춘추관이라 하다가 1401년(태종 1년) 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되었고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폐지되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1.president.go.kr%2Fimages%2Fcheongwadae%2Fintroduction%2Flandscape07.jpg) | 국내외 언론사 기자 300여 명이 출입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로서 1층은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자실과 자료실 겸 작은 브리핑룸으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대통령 기자회견 및 각종 브리핑 등을 하는 브리핑룸이 있습니다.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 시대 역사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 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의 자유언론 정신을 잘 상징한다는 뜻에서 채택되었습니다. |
청와대 출입기자실, 기자회견장 및 브리핑룸, 춘추관장실 등이 있습니다.
※ 무궁화동산/ 無窮花 동산
무궁화동산은 1993년에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후 청와대를 국민과 더불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고자 안가(안전가옥)를 헐어내고 공원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청와대 개방 이후 많은 관광객이 쉬어 가고 있으며 인근 주민에게는 편안한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원 내에는 많은 꽃과 나무가 있으며 특히 무궁화동산의 이름에 걸맞게 무궁화 꽃이 많이 있습니다.
무궁화동산 맞은 편에는 분수대가 있으며 분수대 중앙에는 봉황 상이 있으며 사면에도 조각상들이 놓여 있습니다. 청와대를 찾는 관광객들이 배경 삼아 기념 촬영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 비서실
비서실은 위민1관, 2관, 3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민(爲民) : ‘오직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부’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비서실 위민 1관은 2004년에 완공되었으며, 2관(구 신관) 및 3관(구 동별관)은 각각 1969년, 1972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위민 1관에는 대통령 간이집무실 등의 주요시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에너지 절약을 위해 외단열 시스템을 적용하여 건립되었습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친환경적인 태양광 발전시설을 위민3관 건물 외벽에 설치하여 일부 전력을 자체 공급하고 있습니다.
◈ 칠궁 정식 명칭 : 서울 육상궁(毓祥宮) - 사적 149호
청와대 관람을 마치고 위 사진의 좌측으로 나와서 담장을 끼고 조금 올라 가면 아래 좌측 사진의 칠궁 외삼문이 보이며, 우측으로 돌아서 중간 사진의 솟을대문으로 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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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궁 외삼문 | ▲ 칠궁 입구 | ▲ 안에서 바라 본 칠궁 입구 |
칠궁을 들어서면 아래 좌측 사진의 송죽재가 보이며 칠궁을 둘러보고 맨 뒤에 돌아 나오다 보면 맨 위의 사진 처럼 송죽재 뒤편은 삼락당으로 ㄱㄴ자 형으로 붙어 있습니다.
송죽재 좌측으로 나가면 위 중앙 사진처럼 칠궁의 내삼문이 보이며, 내삼문을 지나면 다시 삼문이 보입니다. 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덕안궁 건물이 있으며, 뒤편으로 3개의 건물이 나란히 있습니다.
맨 좌측에 있는 건물이 저경궁이고 ,중앙 건물이 대빈궁이며, 우측 건물은 선희궁과 경우궁의 신위가 합사된 건물입니다. 건물은 넷 채지만 다섯 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인왕산 코스의 마지막으로 보셨던 선희궁지에 있던 신위가 이 곳으로 합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덕안궁(德安宮)은 고종의 후궁으로 영왕을 낳은 순헌 귀비 엄씨의 신주를 모신 궁이다. 광무 원년(1897)에 엄비가 아들을 낳으면서 경운궁 안에 거처할 궁을 세워 그 궁을 경선궁이라 불렀고, 엄귀비가 세상을 떠나자 덕안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3년에는 육상궁 안으로 옮겨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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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안궁 전경 | ▲ 저경궁/대빈궁/선희궁/경우궁 전경 |
저경궁(儲慶宮)은 선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원종을 낳은 인빈 김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의 칭호를 받았다.
인빈이 세상을 떠난 후 원종이 살던 송현궁에 신위를 모시고 저경궁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저경궁은 고종 7년(1870)에 계동에 있는 경우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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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경궁 전경 | ▲ 대빈궁(장희빈) 전경 | ▲ 선희궁/경우궁 전경 |
대빈궁(大嬪宮)은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을 낳은 희빈 장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숙종 27년(1701)에 희빈이 사망한 후 신위를 정동에 있는 집에 모셨다가 경종 2년(1722)에 희빈에게 옥산대부인의 칭호를 내리면서 사당을 현재의 교동인 경행방에 세웠다.
대빈궁은 고종 7년(1870)에 다시 돌아갔고, 1908년에 다른 궁들과 함께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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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천정 | ▲ 냉천장 앞의 연못 | ▲ 紫淵(자연)이라 쓰인 각자 |
경우궁(景祐宮)은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수빈은 순조 20년(1820)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 해 신주를 창경궁 안에 모시고 현사궁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현재의 종로구 계동의 양덕방에 따로 묘를 세우고 이름을 경우궁으로 지어 신주를 모셨다. 이후 이 궁은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현재의 옥인동인 인왕동으로 옮겨 졌다가 1908년에 다른 궁들과 함께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섯 분의 신위를 모신 건물을 둘러보고 우측으로 가면 영조가 어머니의 제삿날에 나와서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가다듬어 제사를 준비하던 냉천정이라는 건물이 있으며, 뒤편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습니다. 또한 냉천정 앞에는 석축을 두른 자연(紫淵)이라는 정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으며, 정면 석축 한 가운데는 紫淵이라 새겨진 글씨가 있습니다.
냉천정을 지나서 우측 영역으로 들어가면 건물은 한 채가 있으나 연호궁과 육상궁이 합사되어 있습니다. 앞의 현판은 연호궁으로 걸려 있으나 안쪽에는 영조의 친필로 쓰인 육상묘(毓祥廟)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칠궁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청와대 방향으로 사진을 찍으면 뭐라고 합니다. 칠궁 관람 내내 주변 어딘가에서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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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문 | ▲ 연호궁 | ▲ 육상묘 현판(영조의 친필) |
연호궁(延祜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진종을 낳은 정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궁이다. 진종은 정빈에게서 태어나 세자로 정해졌지만 10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즉위 후, 진종에게 왕의 칭호를 주고 정빈을 위해 정조 2년(1778)에 경복궁 서북쪽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연호궁이라 이름 지었다. 연호궁은 고종 7년(1870)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육상궁(毓祥宮)은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칠궁은 육상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을 일컫는데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셔 제사지내는 곳이다.
육상궁은 나즈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고 왼쪽에는 네 개의 사당이 각기 독립해 서로 접하여 서있다. 이 사당 앞쪽에는 제사지내는 곳과 우물이 있으며 그 앞에 정문이 있다. 제사 지내는 건물 주위의 뜰은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 사직단 대문(보물 177호)
사직단이란 나라와 국민 생활의 편안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 지내는 곳으로 사(社)는 땅의 신을,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또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752F3E50C60EEE1F) | 이 문은 사직단의 정문으로 태조 3년(1394) 사직단을 지을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숙종 46년(1720) 큰 바람에 기운 것을 다시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 있는 자리는 1962년 서울시 도시 계획에 따라 14m 뒤쪽으로 옮긴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새부리 모양의 부재를 이용해 기둥 위에서 보를 받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기법과 튼튼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어, 사직단 정문의 법식과 넉넉한 느낌을 주는 건축 문화재이다. |
◈ 사직단(사적 121호)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013D73355071685104) |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
※ '사직단' 복원 위한 첫 걸음 내 딛는다 뉴시스 2012-02-22
【대전=뉴시스】박희송 기자 = 문화재청(청장 김 찬)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된 '사직단'(社稷壇:사적 제121호)의 원형복원을 위해 우선적으로 정비할 수 있는 시설물에 대해 자체적인 정비에 들어갔다고 22일 밝혔다.
그 동안 서울특별시 종로구가 관리하던 사직단을 올해부터 문화재청이 이관 받아 현황 실태조사를 시행하고 원형복원을 위해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올 2월 말부터 자체 직영사업단을 투입, 주원(周垣:유원 주변을 다시 둘러싸고 있는 담)권역 양식에 맞지 않는 수목과 가로등 제거, 동파된 전(塼)돌 교체, 안향청 번와 보수, 덧달아낸 후면 창고 철거 등의 정비사업을 우선 시행하게 된다.
아울러 신성시 돼 있는 유원(壝垣:사단 등 제단을 둘러싸고 있는 담)과 주원 권역 안의 변형된 시설물에 대해 '사직서전도(사직단국왕친향도병풍)'와 '조선고적도보' 등을 참고해 복원 설계 용역을 시행할 예정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되고 변형된 유문, 주문, 판위(版位:방형의 대) 등에 대한 원형 고증작업을 통해 설계 용역이 완료되면 조선 왕조 존립 기반인 종묘(宗廟)와 더불어 사직을 바르게 세우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앞으로 사직단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재실(齋室)과 사직서 구역 등을 포함, 단계적인 복원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 단군성전※ 성전 외벽 칠 벗겨지고 깨진 기와 널려… 홀대 받는 國祖 2014-04-07
사직공원 단군성전 실태
한민족의 ‘시조’ 단군과 관련한 유물, 문화가 방치되고 있다. 전국 곳곳에 관련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있지만 이에 대한 유지·보수는커녕 실태 파악조차 돼 있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국가·지방문화재, 유형·무형문화재를 통틀어 10개가 채 되지 않는다. 국내에 20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단군성전, 사당이나 사찰 등에 보관된 단군 관련 그림이나 서적 등 유물들은 민간의 손길이 미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방치 상태에 놓인 셈이다.
‘민족 정신’, ‘4대 국경일’ 등의 위상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어 일본의 독도 영유권 도발이 계속되지만 단군·고조선에 대한 고증과 의미 재정립 등의 노력 없이 관련 유물·유적과 역사·문화는 존폐 위기에 처했다.
◆ 25년째 제대로 된 개·보수 없는 단군성전
6일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에 있는 단군성전(백악전·白岳殿)은 봄날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어린 자녀에게 단군과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학부모들이나 등산객이 대부분이었지만 안내문을 읽고 있는 외국인도 더러 눈에 띄었다. 이곳에는 1978년부터 단군의 표준 영정이 봉안돼 있다.
단군성전을 위탁관리하고 있는 ㈔현정회에 따르면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연간 1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청소년체험학습장으로 지정된 뒤에는 청소년 방문객만도 연간 1만명이 넘을 정도다. 국경일이나 중대사를 앞두고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들러 제를 올리고, 주한 외국대사나 국빈방문객들도 간간이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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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봉(60) 현정회 사무총장은 “1993년 인왕산이 개방된 이후 방문객이 등산객과 함께 부쩍 늘었다”며 “특히 연초, 국경일, 개천절에는 방문객이 급증한다”고 설명했다. ◀ 7일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에 있는 단군성전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기둥의 칠이 벗겨지거나 금이 가 방문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위상과 달리 단군성전의 실상은 초라하다. 건물 외벽의 칠은 벗겨진 곳 투성이고, 담장 기와는 깨지거나 금이 간 것이 대부분이다. 1990년 개축한 뒤 25년째 제대로 보수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군성전의 소유주는 종로구청이다. 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종로구로서는 예산을 지원할 근거가 없어서다. 구청의 관련 부서도 문화과가 아닌 공원녹지과다.
종로구 관계자는 “단순히 건물을 관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단군을 잘 모셔야 한다는 취지에 적극 공감한다”면서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는 통상 50년의 기간, 관련 유물 보유 건수 등 기준이 있는데 이를 충족하지 못해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단군성전과 붙어있는 사직공원은 2012년 복원이 결정되면서 관리주체가 문화재청으로 넘어갔고 부지 용도도 공원에서 사적지로 바뀌었다.
◆ 제천행사는 일회성 행사비 지원에 그쳐
사직공원 단군성전은 매년 국가적인 차원에서 개천절·어천절(단군의 승천을 기리는 날로 3월 15일) 대제를 올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현정회가 역사 고증 작업을 거쳐 어천절 대제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1962년이다. 종로구는 2002년, 서울시는 2004년, 문화체육관광부는 2009년부터 각각 개천절과 어천절 대제를 위한 행사비를 지원하고 있다.
개천절·어천절 대제를 민족적 차원의 행사로 인식하며 예산을 편성하고 개천절을 4대 국경일로 지정했지만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인식은 일회성 행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문화재인 중요무형문화재에 종묘대제, 사직대제는 물론 무속 분야의 다양한 굿이 등록돼 있는 것에 반해 개천절·어천절 대제는 모두 이에 포함돼 있지 않다.
정부와 지자체가 행사를 위해 비용을 지원하는 것도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사단법인을 지원하는 차원이거나 지자체의 행사를 위해 매년 수천만원의 예산을 편성하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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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는 기초지자체가 검토한 뒤 광역지자체와 문화재청을 거쳐 지정된다. 그러나 취재 결과 이제껏 단군과 관련한 어떠한 형태의 천제에 대해서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시도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정경희 국학학술원장은 “공자를 전면에 내세우던 중국이 동북공정을 펼치면서 집중했던 부분은 황제의 의미를 강조하며 상고사 연대를 끌어올리는 작업이었다”며 “중국에 뺏기지 않도록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학문적으로 접근해 복원·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
◆ 민족의 뿌리 지키기, 명맥 끊길 위기에
문제는 단군성전 등 유물·유적과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정부 차원의 노력이 전무한 마당에 관련 민간단체들의 활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왕성히 활동했던 주역들이 나이가 들고 사회적 관심까지 줄어 운영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종교 차원에서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 또한 최근에 이르러 상황이 녹록지 않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 주체가 돼 결성된 현정회 또한 50년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마찬가지 상황에 놓였다. 과거에는 건물을 짓고 자료를 발굴하는 등 조직적인 활동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한두 명이 단체 실무와 사직공원 단군성전 관리를 모두 맡고 있다. 단군성전 관리부터 역사 자료 보존·관리 등의 업무를 이어갈 다음 세대가 딱히 없는 셈이다.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해외 학계에서도 여러 근거를 통해 사상과 역사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이를 신화나 허구로 치부하고 우상숭배라며 배척하는 타 종교의 반대 등으로 어려움이 많다”며 “민족의 뿌리를 찾고 재조명하기 위한 학문과 국가 차원의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 황학정(서울 유형문화재 25호)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진 궁술연습을 하던 사정(활터에 있는 정자)이다. 고종 광무 2년(1898) 지어졌으며,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원래 이 자리는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이다. 오사정이란 도성 안 서쪽에 세워진 다섯 개의 활터에 세워진 정자로, 옥동의 등룡정·삼청동의 운룡정·사직동의 대송정·누상동의 풍소정·필운동의 등과정이 그것이다. 지금은 오사정이 모두 없어졌으나, 이곳에서는 가끔 궁술행사를 열어 옛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 인왕산 수성동 계곡(서울 기념물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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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년 전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수성동 계곡’… 원형에 가깝게 복원 ㆍ‘수성동’처럼 소나무 심고 돌 쌓아 11일부터 개방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대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水聲洞)’의 배경인 인왕산 수성동 계곡이 그림 속 원형에 가깝게 복원, 공개된다.
서울시는 종로구 옥인동에 위치한 수성동 계곡 복원공사를 완료, 11일부터 시민들에게 개방한다고 10일 밝혔다. 서울시는 2008년부터 진행된 옥인시범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수성동 계곡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 현존하는 그림 속 돌다리(기린교)와 계곡 일대를 서울시기념물로 지정하고 복원공사를 해왔다. |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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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0억원이 투입된 복원공사는 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에 남아 있는 바위를 두드러지게 하고, 계곡 양쪽에 전통방식의 돌쌓기를 하는 등 그림 속처럼 암석 지형 회복에 중점을 뒀다. 또 옛 경관 복원을 위해 구부러진 소나무 등 나무 1만8477그루를 심었다. 시민들이 겸재의 시선으로 계곡을 즐길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초입에 관람 공간 등 편의시설도 마련했다. ◀ 서울시는 겸재 정선의 ‘수성동’ 배경인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복원했다. 그림 속 돌다리는 사진에서처럼 현존하고 있다. |
최광빈 서울시 공원녹지국장은 “그림 속 원형을 최대한 회복시켜 역사와 생태가 어우러진 역사문화 공간으로 조성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며 “개발시대에 사라진 수성동 계곡이 많은 미용과 시간을 들여 복원된 만큼 서울성곽길 등과 함께 서울의 역사경관 명소로 사랑받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겸재의 ‘장동팔경첩’은 당시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던 장동(현 효자·청운동 일대)의 명승지 8곳을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중 ‘수성동’ 그림 속의 기린교 인근에는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의 집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폭 1m, 길이 6m의 통돌로 만들어진 기린교는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 보존된 다리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다.수성동은 겸재 작품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의 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 등 많은 문헌에 명승지로 소개돼 있다.
◈ 영빈이씨의 사당, 선희궁(宣禧宮) 터(서울 유형문화재 32호)
![](https://t1.daumcdn.net/cfile/blog/224EAE38517D2D620C) |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장조)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사당으로 종로구 신교동에 해당하는 한성 북부 순화방에 있었다. 영조는 영빈이씨가 죽자 '의열이'란 시호를 내려 '의열묘'라 하였는데 정조때 '선희궁'으로 바뀌었다. |
순조 1년(1908) 육상궁으로 옮겨져 경우궁 묘사 안에 합사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1912년에는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던 ‘경성고아원’을 선희궁으로 옮기고 ‘제생원’이라 하였다. 현재 선희궁지에는 ‘국립서울농학교’와 ‘국립서울맹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정조가 자주 오르던 세심대가 있다.
◈ 박노수 가옥(서울 문화재자료 1호)
![](https://t1.daumcdn.net/cfile/blog/224BA64A526CFC8A0E) | 조선 후기 문신 윤덕영(1873∼1940)이 그의 딸을 위해 세운 집이다. 윤덕영은 친일파의 한 사람으로 이완용과 함께 한일합방 조인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의정부찬정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938년대에 지은 이 집은 2층 벽돌집이다. 1층은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되어 있다. |
한옥과 양옥의 건축기법 외에 중국식 수법이 섞여 있고 안쪽에 벽난로를 3개나 설치하는 등 호사스럽게 꾸며 놓았다.
※ 종로 옥인동 박노수 가옥이 미술관 되던 날 2013.09.13
![](https://t1.daumcdn.net/cfile/blog/240DA145537897CD2B) | ![](https://t1.daumcdn.net/cfile/blog/225CAD45537897CD1F) |
▲ '달과 소년', 화선지에 수묵담채, 1987년 | ▲ 류하, 화선지에 수묵담채, 1980년 |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절제된 운필과 파격적 색감으로 한국화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거장. 고(故) 남정 박노수 화백(1927~2013년)의 가옥이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박 화백이 생전 40년 동안 직접 거주하면서 작업하던 공간에서 그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됐다.
11일 가을 단비가 내리는 날 '박노수 미술관' 개관전을 찾았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위치한 박노수 가옥은 최근 복원된 수성동 계곡과 통인시장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인근의 서촌과 경복궁 주변으론 미술관과 갤러리가 즐비하다.
최초의 종로구립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그의 집 문을 들어서면 빨간색 2층 벽돌집이 오른편에 서 있다. 아담한 정원엔 엄나무, 향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등 각종 나무들과 다양한 산수 모양의 수석들, 석등이 정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박 화백의 '사색의 순간'이란 작품에 담겨진 백모란의 실제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60AEE45537897CD17) | 집 입구 계단을 올라 집안으로 들어가면 홍송으로 만들어진 마룻바닥과 노란 장판이 박 화백이 지냈던 공간 그대로의 모습이다. 1층에는 주로 자연을 배경으로 소년이 홀로 등장하는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박 화백의 대표작 '달과 소년'도 그 중 하나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초승달, 한들한들거리는 버드나무 아래 앉은 소년은 뭔가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다. 소년 옆에는 말 한마리가 역시 생각에 잠겨 있고, 세상은 온통 회색과 쪽빛으로 물들어 있다. 또 다른 작품 '류화(柳下)'에서는 강렬한 파란색을 입힌 버드나무 잎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고 나뭇잎들 사이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이 서 있다. 역시 나뭇잎 사이로 달이 보인다. "동양의 산수화는 자연의 재현이 아니고, 무한히 생동하는 작가의 세계를 희구하는 것이며 작가는 그림 속 산수에서 노닐고자 한다"고 했던 생전의 작가의 말처럼 그림 속 소년은 사색을 즐겼던 작가 자신의 투영이었다. |
▲ 숭산은천, 화선지에 수묵담채, 1970년대 초반 |
그의 인물 드로잉 작품을 보며 나무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아담한 다락방과 화실 겸 서재로 썼던 방, 침실이 있다. 박 화백의 독특한 산수화가 펼쳐져 있는 전시공간이다. 베란다와 서양식 벽난로도 보인다. 그의 막내딸이자 이 미술관의 학예사인 박이선씨는 "햇빛이 쏟아지는 이곳의 창문을 열어 정원을 내려다보며 화탁에 서서 그림을 그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평생에 걸친 산수화 작업은 산을 사랑해 가까이 두고자 했던 작가의 마음과 닿아 있다"고 소개했다. '유록(遊鹿)', '숭산은천(崇山隱天)' 등 이곳에서 보게 되는 그의 산수화는 산을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꾸며 강렬하게 표현한 반면 주변은 담백하게 색을 입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림에서 알 수 있듯 박 화백은 전통적인 소재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운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 작가로 '전통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해 낸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4737345537897CE2E) | 지난 2월 별세한 박 화백은 2011년 1월 종로구에 자신이 평생 천착해온 화업 전부와 그의 가옥, 정원 그리고 소장해온 다양한 고미술품과 골동품 등 1000여점을 종로구에 기증했다. 특히 그의 가옥은 1937년 건축가 박길룡이 지은 집으로, 서울시문화재자료 1호이기도 하다. 조선말기 관료이자 친일파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마련했다고도 전해지는 이 집은 벽돌 몸체와 지붕기와, 서양식 창 등으로 한국식과 서양식이 절충된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
▲ 박노수 화백 집 앞뜰 모습 |
종로구는 이번 구립미술관 개관을 위해 구청 내에 박 화백의 기증품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항온ㆍ항습ㆍ보안 기능을 갖춘 수장고를 마련해뒀다. 앞으로 구는 박노수미술관과 함께 주변 '윤동주 문학관', 겸재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 그림의 배경이 된 '수성동 계곡', 한옥마을, 골목, 공방과 갤러리 등을 연계한 프로그램들을 계획 중이다.
◈ 통인시장
▒ 재래시장의 반란, ‘통인시장’ 도시락 서비스로 활기 2014.05.11
[매경닷컴 MK패션 임소연 기자] 최근 몇 년 새 대형마트, 백화점 내 고급 식료품점, 곳곳에 위치한 편의점 등이 발달함에 따라 재래시장을 찾으려는 이들이 줄어 든 지 오래다. 그러나 경복궁역에 위치한 통인시장만큼은 60대는 물론 10대까지 폭넓은 소비층을 사로잡아 시장이 끝나는 오후 4시까지 북적이는 모습이다.
통인시장은 최근 소비자들의 간소화된 식습관과 다양성에 집중하는 쇼핑 트렌드에 맞춰 고객 맞춤형 ‘도시락’ 서비스를 도입한 것이다. 이에 방문자는 시장 중앙에서 개당 500원인 엽전을 10개 정도 구입, 시장 내 위치한 기름떡볶이, 부침개 등 갖가지 종류의 음식점, 반찬가게를 돌아다니며 원하는 음식을 조금씩 구매해 도시락으로 먹을 수 있다.
덕분에 많은 양의 반찬을 사기엔 꺼려지던 소비자들도 시장 내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을 도시락처럼 즐길 수 있게 됐고, 상인들은 적자없이 예년의 활기찬 시장 풍경을 되찾았다. 그 밖에도 최근 100여 개의 전통시장이 시장 내에 정보통신기술 카페를 설치하거나 모바일 쿠폰, 전단지 발행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소비자와 상인이 상호 만족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한 모습이다.
◈ 이상 집터
종로 통인동 '이상의 집터' 주택 철거 논란 박우진기자 2012.02.06
"헐고 李箱 기념관 짓자" "80년된 한옥 보존해야"
문화유산국민신탁서 추진
주민들 "난개발 우려" 반대
시인 이상이 젊은 시절을 보낸 집터에 있는 서울 종로구 통인동 한옥. 4월 철거 후 현대식 건물로 이상기념관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hoto.hankooki.com%2Fnewsphoto%2F2012%2F02%2F06%2Fpjy0424201202060328220.jpg)
| "이상을 핑계로 80년 된 한옥을 허물다니요."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의10번지, 일제강점기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이 젊은 시절을 보낸 집터에 있어 '이상의 집'으로 알려진 한옥이 요즘 철거 논란으로 시끄럽다. 2009년 이 집을 매입한 후 '이상 기념ㆍ문화공간' 건립을 추진해 온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오는 4월 이 집을 철거하고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한다는 계획을 최근 확정했기 때문이다. |
이상이 3세부터 23세까지 살았던 큰아버지의 집터에 있는 이 집은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적도 있다. 이상이 이사 간 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2008년 등록문화재에서 말소되긴 했지만, 동네 주민과 시민단체 등은 "이 한옥 철거는 개발 부작용이 더 큰 불필요한 철거"라며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통인동, 효자동, 옥인동 등 경복궁 서쪽 지역의 역사를 보존하고 난개발을 막기 위한 주민 모임인 서촌주거공간연구회는 지난 4일 저녁 현장에서 철거 반대 대책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이 집은 이상의 생가 여부와 상관 없이 그 자체로 보존 가치가 있는 한옥"이라며 "이 한옥을 허물면 주변 한옥 개발도 급속히 빨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집 주변에는 10여 채의 한옥이 몰려 있지만 한옥보존지구가 아니기 때문에 집주인들이 철거해도 법적 제한이 없다.
서촌주거공간연구회는 "한옥을 보존하면서 이상 기념ㆍ문화공간으로 운영하는 방안도 있는데 왜 굳이 철거하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해 6월과 10월 서울환경운동연합, 평화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들과 함께 한옥 보존을 요청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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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아름지기재단 측은 "대들보 대신 철재 빔이 박혀 있는 등 한옥이 많이 훼손된 상태라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문화유산국민신탁 관계자는 "매입 당시부터 이상의 집터라는 의미를 살려 '이상 기념ㆍ문화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었다"며 "집 자체보다는 집터의 의미가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촌주거공간연구회는 "한옥 보존 의지가 있다면 전문가에게 자문하는 등 관련 절차를 밟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연구회 소속 문화재 실측설계기술자인 황진하 볕터 대표는 "한옥 훼손 여부를 따질 때는 기본 구조틀이 남아있는지를 보는데 이상의 집터에 있는 한옥은 오래된 것치고는 크게 훼손된 편이 아니다"라며 "수리만으로도 보존ㆍ활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
논란이 커지자 서울시 한옥문화과는 서촌주거공간연구회에 자료를 요청하는 등 현황 파악에 나섰다. 연구회는 "정기적 시위와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접촉을 통해 이 한옥 철거를 막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 이상범 가옥 및 화실(등록문화재 171호)
ㅇ가옥 : 1930년대 누하동을 비롯하여 경복궁 서쪽 지역에 형성되었던 문화예술인의 도시형 한옥 건물로 이상범 화백이 43년간 거주한 곳이며 희소적인 면에서도 그 가치가 인정된다.
ㅇ화실 : 이 건물은 이상범 화백이 화실로 사용하던 곳으로 이상범 화백이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곳으로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있어 가옥과 함께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38C640508D077933) | ![](https://t1.daumcdn.net/cfile/blog/183FB540508D077D25) |
◈ 배화여고 생활관(등록문화재 93호)
고 육영수 여사의 모교로 유명한 배화여고내에 있는 건물로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 숙소 건축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배화학당은 기독교 선교와 여성 계몽을 위하여 1898년에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다. 배화여고 생활관은 학교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온 1916년에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어졌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D924C516A981F16) | 이 건물은 1971년부터는 배화여고의 생활관 및 동창회관, 1997년부터는 동창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서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제일 아래층이 반지하로 되어 있어 현관으로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사용하였다. 내부에는 중앙에 홀과 계단실이 있고 그 양 옆으로 방이 있다. 건물의 전체적인 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벽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하였지만, 지붕은 한옥의 기와지붕을 사용하여 서양식과 한국식건축이 섞인 독특한 모습을 보여 준다. |
선교사 주택을 통해 근대 서양의 주택기술과 문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특히 이 집은 서양의 주택 문화와 우리의 전통 주택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흥미로운 예다.
◈ 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서울 문화재자료 9호)
배화여고 뒷정원에는 높다란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면에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를 세로로 새기고, 가운데에는 몇줄의 싯구를 적어 놓았으며, 오른쪽으로는 아홉 사람의 이름을 나열해 놓았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016D264C516A982034) | 필운은 이곳에 살았었던 이항복 선생의 호이다. 선생은 조선 선조 때에 대제학을 지내었으며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 청백리에 뽑히기도 하였다. 가운데의 글은 선생의 후손인 이유원이 이 터에 들른 후 그 느낌을 글로 지어 새긴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명단은 선생의 집을 지을 때 관련되었던 사람들로 추측되고 있다. |
이유원의 글은 고종 10년(1889)에 새긴 것으로, ‘필운대’라는 글씨 또한 이항복의 글씨라기보다는 이유원의 글씨로 추측된다. 오른쪽의 명단은 이보다 앞선 순조 13년(1813) 또는 고종 10년(1873)에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시대는 내려가지만 명필이었던 이유원의 서체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항복 선생의 옛 자취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서울신문 2007.02.20
인왕산의 네 구역 가운데 지난주에 소개한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인왕산의 왼쪽 기슭이라면, 필운대와 육각현은 오른쪽 기슭이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다. 필운대 정자에서는 대원군 당시 핵심측근이었던 중인들이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 권율과 이항복의 집이 필운대
인왕산의 다른 이름은 필운산(弼雲山)이다.1537년 3월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用卿)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려고 한양에 들어오자, 중종이 그를 경복궁 경회루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중종은 그 자리에서 북쪽에 솟은 백악산과 서쪽에 솟은 인왕산을 가리키면서 새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손님에게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는 것은 최고의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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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주산의 이름을 새로 짓게 된 공용경은 도성을 북쪽에서 떠받치고 있는 백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이름 지었으며, 경복궁 오른쪽에 있는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필운산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우필운룡(右弼雲龍)'이라고 설명했다. |
운룡(雲龍)은 임금의 상징이니 인왕산이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왕산이나 북악(백악)이라는 이름이 조선 초부터 널리 알려져 있어 공용경이 지은 이름들은 별로 쓰이지 않았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살았던 집터에 '필운대'라는 이름으로 전할 뿐이다. 순조 때의 실학자 유본예(柳本藝)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필운대를 이렇게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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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운대는) 성안 인왕산 밑에 있다. 필운대 밑에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집이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처갓집이므로, 그는 그곳에 살면서 스스로 별호를 필운(弼雲)이라고 하였다.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는 육각현(六角峴)이 있으니, 이곳도 역시 인왕산 기슭이다. 필운대와 함께 유명하다. 종로구 필운동 9번지에는 이항복의 글씨라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도 필운대 바위 앞에 서면 경복궁과 백악산을 비롯한 서울의 모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는 1873년(고종 10년)에 이항복 9대손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찾아와 조상을 생각하며 지었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이 해는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물러나고 이유원이 영의정에 임명된 해인데, 날짜가 없다. |
조상님 예전 사시던 곳에 후손이 찾아오니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 흰구름만 깊었구나.
백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유풍(遺風)은 가시지 않아
부로(父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가객 박효관 영의정과 교류
그 옆 바위에는 가객 박효관(朴孝寬·1800∼1881무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계유감동(癸酉監董)'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옆에 박효관을 비롯한 일행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이유원 일행과 함께 이곳에 와서 풍류를 즐기며 한시를 바위에 새기는 일을 돌봐주었던 듯하다.
위항의 가객이었던 박효관은 필운대에 운애산방(雲崖山房)을 마련해 노래 부르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유원도 시조에 관심이 깊어 당시 대표적인 시조 45수를 칠언절구의 한시로 번역했다.
20종 이상의 시조집을 조사하여 45수를 뽑아내고 한시로 번역해 감상할 정도로 조예가 깊었으므로 위항의 가객들과도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악부(樂府)에도 관심이 많아, 칠언절구 100수의 연작시로 '해동악부(海東樂府)'도 지었다.(박효관의 운애산방을 중심으로 필운대에 모였던 가객들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정선과 위항시인 칠송정서 풍류
인왕산에 오래 살았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인왕산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1676년 1월3일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지금 종로구 청운동 경기상고 부근에 있던 동네이다. 그런 인연으로 젊은 시절에는 난곡(蘭谷)이라는 호를 썼다.
청운동 일대에는 장동 김씨들이 살았는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아들 6형제가 다방면에 이름나 6창(昌)이라고 불렸다. 정선은 그 가운데 셋째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에게 글을 배웠다. 김창흡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제자백가와 시문(詩文)·서화(書畵)에 달통한 학자였다.
정선이 7세였던 1682년에 북악산 남쪽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선이 육각현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 전하는데, 후배 조영석이 "농은당에서 육강현을 바라보았다."고 썼다. 육강현은 육각현을 소리나는 대로 쓴 듯하고, 농은당은 김창흡의 형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집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할 수 없다.
왼쪽에 크게 그려진 집이 바로 농은당이고, 언덕 너머 솔숲 사이의 큰 바위가 필운대, 그 너머 고개가 바로 육각현이다. 송석원시사 동인 박윤묵이 장혼의 집에 들렸다가 주인이 없어 육각현에 올라가 지은 칠언율시가 전한다. 육각현 위에 세운 칠송정(七松亭)이라는 정자가 바로 위항시인들의 모임터였다.
●중인, 대원군을 움직이다
칠송처사 정훈서의 소유였던 칠송정에는 송석원시사의 선배인 정내교(鄭來僑·1681∼1759) 때부터 위항시인들이 모여 시를 지었다. 한동안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가 1840년대에 위항시인 지석관이 수리하여 다시 옛모습을 찾았다. 박기열·조경식·김희령 등이 칠송정과 일섭원에 모였는데, 이 무렵에는 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 불렸다.
육각현 칠송정이 장안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뒤부터이다.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비롯한 당시의 권력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으며, 수많은 중인 서리들이 그의 사조직으로 흡수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천하장안'으로 불렸던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네 사람이었다. 개화파 지식인 박제경(朴齊絅)은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 그 실태를 이렇게 기록했다.
형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오도영을, 호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김완조와 김석준을, 병조에는 박봉래를, 이조에는 이계환을, 예조에는 장신영을, 의정부 팔도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윤광석을 뽑아서 맡겼다. 이들은 모두 대대로 아전 일을 보았던 집안의 후손들이어서 전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당하면 곧바로 판단하여 처리하였다. 대원군이 하나같이 그들의 말을 따랐다.
박제경은 대원군의 아전 정치를 비판적으로 기록했지만, 이 책에 평을 덧붙인 위항시인 차산(此山) 배전(裵琠)은 그들의 능력을 인정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위항시인으로 이름난 여러 명의 행정능력을 이렇게 칭찬했다.
운현궁에서 신임하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민간의 기이한 재주꾼들이다. 윤광석·오도영·장신영 등은 글재주를 사랑할 만하고, 기억력도 놀랍게 총명하였다. 무리 가운데 뛰어나게 민첩하여, 사리를 훤하게 통달하였다.
이들 가운데 오도영과 장신영이 육각현 칠송정시사에 드나들며 시를 지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대사업을 벌이던 대원군은 위항시인들의 시사를 격려하기 위해 칠송정을 수리해 주었다. 대원군은 박효관·안민영 등 가객들과도 친해 함께 어울리며 풍류를 즐겼는데, 박효관이 위항시인들보다 더 총애를 받자 칠송정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오횡묵(吳宖默·1834∼?)이 백운동에 집을 짓고 모임터를 옮겼다. 지금의 청운초등학교 뒷골목이 바로 백운동 골짜기였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서울신문 2007.02.27
●'장안의 명승´에 사람들 모이다
조선시대의 체제와 제도를 명문화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의하면 "문무관 2품 이상인 관원의 양첩 자손은 정3품까지의 관직에 허용한다."고 하였으며 "7품 이하의 관원과 관직이 없는 자의 양첩 자손은 정5품까지의 관직에 한정한다."고 규정했다. 양첩 자손은 그나마 한정된 벼슬에라도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천첩 자손은 벼슬할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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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서얼 지식인들이 늘어나자, 정조는 서얼금고법에 해당되지 않도록 검서관(檢書官)이라는 잡직(雜織) 관원을 뽑았다. 규장각을 설치한 뒤에,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정무직이 아니어서 기득권층의 반대도 없었고,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서얼 학자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효과도 있었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은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네사람이었다. 당대에 가장 명망있는 서얼 출신의 이 네학자를 4검서라고 불렀다.
유득공은 조선의 문물과 민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 2권1책을 지었으며, 대를 이어 검서로 활동했던 그의 아들 유본예가 부자편이라고 할 수 있는 2권2책의 '한경지략(漢京識略)'을 지었다. 바로 서울의 문화와 역사, 지리를 설명한 책이다.
이들 부자는 필운대 꽃구경을 서울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
유득공은 '경도잡지' 유상(遊賞)조에서 "필운대의 살구꽃, 북둔(北屯)의 복사꽃, 동대문 밖의 버들,(무악산)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과 탕춘대의 수석(水石)을 찾아 시인 묵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기록하였다. 대부분이 인왕산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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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본예는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조에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유득공이 어느 봄날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 구경을 하다 시를 지었다. |
살구꽃이 피어 한껏 바빠졌으니
육각봉 어구에서 또 한차례 술잔을 잡네.
날이 맑아 아지랑이 산등성이에 아른대고
새벽바람 불자 버들꽃이 궁궐 담에 자욱하구나.
새해 들어 시 짓는 일을 필운대에서 시작하니
이곳의 번화함이 장안에서 으뜸이라.
아스라한 봄날 도성 사람바다 속에서
희끗한 흰머리로 반악을 흉내내네.
유득공은 역시 검서였던 친구 박제가와 늦은 봄이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을 했는데,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일품이었다. 육각현에서 술 한잔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시인은 그렇게 새해를 시작하고, 또 한해를 보내며 늙어간다.
●정조도 필운풍류에 취하다
한세대 앞선 시인 신광수는 도화동에서 복사꽃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을 구경했다. "필운대 꽃구경이 장안의 으뜸이라.(雲臺花事壓城中)" 하고는,"삼십년 전 봄 구경하던 곳을/다시 찾은 오늘은 백발 노인일세.(三十年前春望處,再來今是白頭翁)"라고 끝을 맺었다.
반악은 진(晉)나라 때의 미남 시인인데, 그도 나이가 들자 흰머리가 생겼다. 자신은 서얼 출신이라 벼슬 한번 못하고 늙었지만, 반악 같이 잘 생기고 재주가 뛰어난 시인도 나이 들자 흰머리가 생기지 않았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고전들은 모두 검색이 가능하다. 한글로 번역한 책에서 '필운대' 제목을 찾으면 연암 박지원이 지은 시 2편과 이덕무가 지은 시 1편만 나온다. 제목은 아니지만 필운대를 노래한 시는 다산 정약용과 정조대왕의 작품이 더 있다. 모두 유득공 부자가 필운대 꽃구경을 장안의 명승으로 소개한 정조-순조 시대 인물들이다.
이 당시에 필운대 꽃구경이 서울 장안에서 가장 이름난 유흥지였음이 확인된다. 정조가 필운대 꽃구경 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백단령 차려 입은 사람은 모두 시 짓는 친구들이고
푸른 깃발 비스듬히 걸린 집은 바로 술집일세.
혼자 주렴 내리고 글 읽는 이는 누구 아들인가
동궁에서 내일 아침에 또 조서를 내려야겠네.
'필운화류(弼雲花柳)'라는 제목의 시 앞부분은 다른 시들과 같이 필운대의 번화한 꽃구경 인파를 노래했다. 뒷부분에선 그 가운데 시인과 독서인을 찾아내고, 장안 사람들이 모두 꽃구경하는 속에서 글 읽는 젊은이에게 벼슬을 주어야겠다는 왕자의 생각을 밝혔다. 물론 이 시를 글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왕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지 않아 원문 검색만 가능한 문집 가운데는 위항시인들이 지은 시도 많다. 게다가 문집을 간행하지 못한 위항인들의 시까지 합쳐 60년마다 편집한 '소대풍요(昭代風謠)'나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에는 엄청난 양의 필운대 시가 실려 있다.
젊은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해마다 수천명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하며 시를 짓기에 분량은 많아졌지만, 해마다 같은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운대풍월'이란 말 속에는 천박한 풍월, 판박이 시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영의정 채제공의 화원 구경기
이 시대에 필운대풍월뿐만 아니라, 꽃구경을 하고 산문으로 기록하는 유행도 있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도성 안팎의 화원에 노닐며 지은 글이 여러편 있다. 필운대 부근의 조씨 화원을 감상하고 '조원기(曹園記)'를 지었다. 주인 조씨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심경호 교수는 "조하망(曹夏望)의 후손이었던 듯하다."고 추측하였다.
계묘년(1783) 3월10일, 목유선과 필운대에서 꽃구경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밥을 다 먹고 나서 가마를 타고 갔더니 목유선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필운대 앞 바위에 자리를 깔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얼마 있다가 목유선이 이정운과 심규를 이끌고, 종자에게 술병을 들게 하여 사직단 뒤쪽으로 솔숲을 뚫고 왔다.
처음에는 필운대 꽃구경을 하기로 약속하고 모였다. 그러나 인파가 몰려 산속이 마치 큰 길거리 같이 번잡해지자, 채제공은 곧 싫증이 났다. 동쪽을 내려다보자 서너곳 활터에 소나무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동산 안의 꽃나무 가지끝이 은은히 담장 밖으로 나와 있어서 호기심이 일어났다.
목유선에게 "저기는 반드시 무언가 있을 거야. 가보지 않겠나?"고 물었다.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널빤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점잖은 손님들이 꽃구경을 하겠다고 들어서자 주인이 집 뒷동산으로 인도하였다.
화원에는 돌층계가 여덟개쯤 깔려 있었는데, 붉은 꽃·자주 꽃·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유항주·윤상동 같은 관원들도 꽃구경하러 왔다가 채제공이 조씨네 화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따라와서 술잔을 돌리고 꽃을 평품하며 시를 지어 즐기느라고 달이 동쪽에 뜬 것도 몰랐다.
이듬해 윤3월13일에도 채제공은 친지들과 함께 가마를 타고 육각현 아래 조씨네 화원에 찾아가 꽃구경을 했다. 석은당에 앉아 거문고를 무릎 위에 눕히고 채발을 뽑아 서너 줄을 튕겨 보았다. 곡조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윽한 소리가 나서 정신이 상쾌해졌다.
얼마 뒤에 조카 채홍리가 퉁소 부는 악사를 데리고 와서 한두곡을 부르게 하자, 술맛이 절로 났다. 채제공은 소나무에 기대어 앉아, 퉁소 소리에 맞춰 노래하였다. "아양 떠는 자는 사랑받고, 정직한 자는 미움을 사는구나. 수레와 말이 달리는 것은 꽃 때문이지. 소나무야 소나무야. 누가 너를 돌아보랴?"
모두들 맘껏 흥겹게 놀다가 흩어졌다. 채제공은 북저동 명승에 노닐고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를 지었다. "도성의 인사들이 달관(達官·높은 벼슬아치)에서 위항인에 이르기까지 노닐며 꽃구경을 했다.(줄임)국가의 백년 승평(昇平)의 기상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위항인들의 경제력이 사대부 같이 되자, 유흥문화도 함께 즐겼다는 뜻이다.(화원 이야기는 심경호 교수가 쓴 논문 '화원에서 얻은 단상-조선후기의 화원기'를 많이 참조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Why] 오래된 집, 오래된 골목길… 西村 걸으니 그리움만 쌓이네 2012.01.07
서울 경복궁 서쪽마을 西村이 뜬다는데… 무엇이 있기에
西村엔 역사가 숨쉰다
북촌, 조선 사대부·부호 살았다면 서촌은 중인·아전까지 더불어 살아
정선의 그림, 김정희의 글씨를 낳고 이상·윤동주가 예술혼 불태웠다
풍화된 동네, 시간의 순례
50년간 솥뚜껑 떡볶이 할머니, 영화의 소재가 된 형제이발관,
경복고생이 담넘어 먹던 짜장면집… 발길 닿는 곳 어디나 명물
서촌은 아름답지 않다
한옥·양옥·전깃줄 뒤엉켜 있고 양팔 너비의 골목은 비좁고 옹색
여기에 工房·카페·갤러리가 모인다, 이야기보따리 가득한 곳을 찾아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로버트 파우저(51) 교수는 서촌에 '미친' 사람이다. 미국인인 그가 사랑하는 서촌이란 효자동·누하동·통인동·옥인동·필운동·체부동·신교동 등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구역. 서촌에서 1년 살다가 집 앞에 높은 건물이 세워지면서 인왕산을 볼 수 없게 되자 북촌으로 이사한 그는, 서촌의 난개발이 염려돼 강의 없는 날이면 서촌으로 달려와 대책을 궁리하는 오지랖 넓은 인물이다.
서촌(西村)에 미친 사람은 파우저 교수만이 아니다. 누상동에서 태어난 서촌 토박이 설재우(32)씨는 서촌 지키기를 아예 업으로 삼았다. 사비를 털어 '서촌라이프'라는 소식지를 펴내고, '효자동닷컴'이라는 블로그에 지역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퍼올린다.
문 닫은 오락실 자리에 '서촌연구소'를 연 그는, 생업은 교사인 아내에게 맡긴 채 당분간 더 서촌지킴이로 살아갈 계획이다. "요즘은 서촌의 옛 풍경이 담긴 사진들을 수집하고 있어요. 찍어낸 듯 획일적이고 인위적인 전통마을이 되어버린 북촌(北村)처럼 서촌이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서촌은 결코 아름다운 마을이 아니다. 1920년대 이후 지어진 생활형 개량한옥이 대부분이고, 그 외곽을 일제가 남긴 적산가옥과 콘크리트 양옥들이 들쭉날쭉 둘러싼 형국이다. 지붕들 사이엔 전깃줄이 뒤엉켜 있고, 골목은 양팔을 벌리면 닿을 만큼 비좁고 옹색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서촌으로 몰려온다. 예술가들의 공방이 들어오고, 작은 식당과 카페, 갤러리들이 잇달아 문을 열고 있다. 강남의 인테리어업체와 광고회사들, 시민단체 사옥들도 옮겨왔다. 서촌열풍, 이유가 뭘까.
◇ 역사와 예술이 살아숨쉬는…
"오래된 집, 오래된 나무, 오래된 골목길이 좋아요.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지난해 가을 통인동에 문을 연 유러피안 식당 '가스트로 통'의 셰프 롤랜드 히니의 말. 스위스 사람인 그는 북촌에서 살다가 전세금이 치솟고 동네가 번잡해져 서촌으로 이사 왔다. 히니의 한국인 아내 김영심씨는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누구의 집터, 생가였다는 걸 표시한 지표들이 곳곳에 있어 재미있다"면서 "서촌은 이야기보따리"라고 전했다.
실제로 서촌엔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한 북촌이 사대부 집권 세력과 부호들의 거주지였다면, 서촌은 고관대작부터 중인, 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 층이 함께 살아온 곳이다.
| 세종대왕 이도가 태어나고 영조가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아호(雅號)가 '필운'이었던 조선 중기의 재상 이항복과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가 서촌에서 살았다. '사라진 서울'을 쓴 강명관 교수에 따르면, 서촌은 서인, 그중에서도 소론이 살았고, 특히 누하동에는 대전별감파들이 많이 살았다. 신교동은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살던 선희궁 자리로, 안동김씨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은 예술적 풍취다. 정선의 명작 '인왕제색도'가 서촌에서 그려졌고, 근대에 들어서는 소설가 이상, 한국화가 이상범과 박노수, 시인 윤동주, 천재화가 이중섭 등 문인과 화가들이 이곳에 적을 두고 예술혼을 불태웠다. 소설가 박완서가 다녔던 매동초등학교가 서촌에 있고, 배화여고는 육영수 여사의 모교다. 이 밖에 통의동 백송터는 1690년경부터 자라온 천연기념물 백송이 있던 자리다. 1990년 태풍으로 고사된 뒤 지금은 나무 밑동만 남아 있는 이곳은 서촌 여행의 출발점으로 애용된다. 누상동에 있는 백호정(白虎亭)도 숨은 명소다. 오사정(五射亭), 즉 5대 국궁터 중 한 곳으로 인왕산 기슭에 있었던 무인의 궁술연습장. 지금은 백호정이란 글씨를 새긴 바위가 하나 남아 있을 뿐인데, 조선 명필 중 한 사람으로 꼽히던 엄한붕의 글씨라고 한다. |
설재우씨는 옥인동 언덕배기에 자리한 '서울교회'에도 꼭 가보라고 권했다. "이승만 박사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교회인데, 그 교회 종은 1년에 딱 두 번 울립니다. 서울교회에서 내려다보는 서촌 정경이 일품이지요."
◇ 오래된 가게, 착한 사람들
흥미로운 건 서촌의 진짜 명물은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그들의 가게라는 점이다. 금천시장 한 귀퉁이에서 50여년 동안 무쇠 솥뚜껑에 떡볶이를 만들어 파는 김정연 할머니.
"길거리에서 평생 떡 파는 사람이 연세는 무슨…" 하면서 손사래를 치는 이 할머니의 나이는 90세가 훨씬 넘었다. 할머니의 떡볶이는 고추장 양념이 아니라 간장 양념이다. "개성 살 때 불고기 해먹고 남은 양념으로 떡을 볶아 먹었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할머니가 시장통에 나와 떡을 볶는 사연이 있다.
김 할머니는 6·25전쟁통에 남편은 물론 11살, 9살, 7살짜리 세 아이와 생이별했다. 죽기 전 자식들을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할머니는 떡볶이를 판 돈으로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돕는다. "날 위해 쓸 일이 있어야지.
그렇게라도 보람을 느껴서 좋아요. 일 안 하고 집에 오도카니 앉아 있으면 뭐해. 자식들 생각에 미쳐나갈 것 같은데." 그래서 어버이날이면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게 된 청년들이 보내온 카네이션이 좌판에 가득 쌓인다고 했다.
청운동 '중국'도 서촌의 명소다. 경복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다 말고 담 넘어와 한 젓가락에 쓸어넣었다는 짜장면으로 유명한 식당. 지금은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져 오전 11시부터 줄을 서야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배달은 절대 사절이며, 하루분 재료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문을 닫는다. 식당 주인 문경철씨는 하루 영업이 끝나면 동네 순찰을 돌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로도 이름이 높다.
청와대 옆동네라는 이유로 서촌에서는 오래된 이발소와 미용실도 명소가 된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소재가 된 '형제이발관'은 20년 넘게 청와대 직원들의 머리를 깎아온 집. 동네 아저씨들 사랑방으로, 머리도 안 깎으면서 커피 한잔씩 들고 수다 떠는 사람이 이발소에 그득하다.
유정미용실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인인 변중석 여사를 비롯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 장관 등 정재계 여성들의 단골집이다. 불에 달궈 머리카락을 마는 구식 고데기를 아직도 사용해 일부러 구경오는 사람들도 있다.
몇달 전 문을 닫았지만 60년 역사의 '대오서점'도 서촌 도보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명소. 주인 권오남(81) 할머니와 서점 이야기를 다큐로 찍기 위해 오는 대학생들이 있을 만큼 '스타'다. 경복궁 영추문 맞은편 길가에 있는 통의동 보안여관도 재미있다.
1930년대에 문 열어 2004년 영업을 종료할 때까지 여관으로서 기능 해온 곳. 재건축이 결정되자 여관의 역사성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2010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 변하지 않아서, 그리워서 온다
건축가 임형남은 서촌을 '풍화된 동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시간의 순례가 가능한 곳'이라고 묘사한다. 최첨단 건축물이 즐비한 도심 한가운데 60~70년대 영화를 찍기 위해 마련된 세트장처럼 서촌은 낯설고 특별하다. 설재우씨는 "마을에 서린 역사,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이야기를 알아야 서촌의 진정한 멋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파우저 교수는 "나는 서촌의 골목길 그 자체, 누덕누덕 기워지고 이어붙여진 남루한 집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촌을 찾는 도보여행자들의 절반 이상이 40~50대 중년들이다. 김영심씨는 "자기 어릴 때 살던 모습이랑 똑같아서, 고향에 온 듯 푸근해서 온다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설재우씨는 "서촌엔 치유의 힘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정비되지 않은 채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날것 그대로의 모습에 사람들이 위안을 받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서촌이 떠안고 있는 숙제도 적지 않다. 서울시의 '서촌 일대 한옥 663가구 보존 계획'이 일종의 관광코스 개발로 변질돼 서촌 고유의 문화와 지역성을 훼손할 우려 때문이다.
"외지인들을 위해 인공적으로 단장된 한옥마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밥값이 8000~9000원 하는 북촌의 식당들은 결코 원주민을 위한 공간이 아니지요.
서촌의 보존과 개발은 철저히 주민의 일상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하고, 한옥의 내부는 주민들이 살기 편하게 현대식으로 수리하되,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붉은 벽돌담 같은 것을 전통한옥의 요소가 아니라는 이유로 철거하는 무자비한 방식이어서도 안됩니다."
[수도권]600년 골목길엔 문화의 향기… 이상 윤동주 이중섭이 걷던 곳 기사입력 2012-12-18
※ 경복궁 서쪽 ‘세종마을’
서울 도심 한복판에 아직 이런 마을이 있을까. 소박하고 정겨운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최근 서울 경복궁 서쪽과 인왕산 동쪽 사이에 자리한 ‘세종마을(일명 서촌)’이 주목받고 있다. 이 지역은 고관대작이 살던 으리으리한 양반집이 남아있는 북촌과 달리 중인과 일반 서민의 삶의 터전이었다. 지금도 한옥 663채가 남아 있고, 뒷골목은 종로 600년 골목길의 매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 근·현대 문화의 향기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상 윤동주 이중섭 박노수 이상범 등 유명 예술가들이 살았고, 지금도 이들의 집터나 가옥, 화실이 있다.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1938년 지은 집인 ‘박노수 가옥’은 한국화의 거장 박노수 화백이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해오던 집으로, 내년부터 원형 그대로 종로구립미술관으로 운영된다. 걸어서 5분 거리에는 청전 이상범 화백이 살았던 집과 작품 활동을 하던 화실이 남아있다.
광복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작가, 예술인들이 자리를 잡기 전 장기 투숙했던 80여 년 역사의 통의동 보안여관은 현재 예술인들의 공간으로 쓰인다. 이상이 살던 통인동 집터에 세워진 가옥을 문화공간으로 꾸민 ‘이상의 집’이 올해 들어 시민들에게 개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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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모두 돌아보고 싶다면 종로구의 도보관광코스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광화문역 9번 출구로 나와 광화문까지 가서 경복궁을 오른쪽으로 끼고 올라가면 된다. 전 천연기념물 4호였던 통의동 백송 터를 출발해 한옥마을, 해공 신익희 가옥, 박노수 가옥 등을 거쳐 통의동 세종대왕 생가터까지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면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다.
최근 이 지역이 주목받으면서 이름이 논란이 되고 있다. 3, 4년 전부터 경복궁의 서쪽 지역이라는 이유로 ‘서촌’으로 불리고 있지만 정작 지역주민들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며 거부하고 있다. 실제 ‘서촌’은 서울 서소문 또는 정동 일대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잡지 ‘개벽’ 제48호(1924년 6월)에서는 “서촌은 서소문 안팎”이라고 밝히고 있다. 독립신문 1899년 11월 27일자 1면 논설에서는 “서촌에는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다섯 나라의 공사관이 있다”고 했는데 당시 공사관이 모여 있던 지역은 정동 일대였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서촌 대신 세종대왕 탄신지의 의미를 살려 ‘세종마을’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한다.
종로구 관계자는 “경복궁 서쪽지역을 서촌이라고 부르면 나중에는 북촌이 ‘동촌’으로 바뀔 수도 있어 ‘서촌’은 곤란하다”며 “세종마을은 역사적 근거가 있기 때문에 주민들이 합의하면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우당기념관
'노블리스 오블리주' 역사 담겨 있는 우당 이회영 기념관 오마이뉴스 김종성 2014.08.15
명동땅 팔아 일본과 싸운 가족, 대단합니다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 그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다.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시 종로구 신교동에 세워진 '우당 기념관'에는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어 기념관의 반은 실내등을 꺼둘 정도다. 지난 12일 자전거를 타고 종로구 서촌 동네를 돌아보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 하지만 그를 빼놓고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뒤 이 기념관이 무척 고마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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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과 발자취, 당시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자료 | ▲ 우당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 31분의 사진이 걸려있다. |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이 작은 기념관에 들어서면, 검은 누비옷에 모자를 쓰고 형형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흑백사진 속의 우당 선생이 기다렸다는 듯 방문객을 맞는다.
기념관 내부는 그리 넓지 않으나 이회영 선생의 독립운동에 관련된 자료는 물론 격동기 구한말의 독립운동 관련 사진들과 문서, 당시의 신문 등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많다. 생생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난과 역경 속으로 뛰어든 훌륭한 선조들에 대해 부끄러움과 함께 숙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당 선생의 집안은 10여 명의 정승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는 조선 후기 최고의 명문가다. 영예는 물론 당대 최고의 재산가로도 알려졌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6년부터 김구·안창호·신채호 등과 같이 비밀 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의 나이 44세 때인 1910년,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경술국치가 벌어진다. 그해 12월 우당은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을 했던 이시영 선생 등 형제 여섯 명과 친족 50명을 이끌고 조상이 이룬 명동 일대의 전 재산을 정리한 뒤 혹한의 북풍이 몰아치는 만주로 망명길을 떠나게 된다.
저택과 수많은 고서는 우당이 평소 아들처럼 아끼던 육당 최남선에게 헐값으로 넘겼고, 전답과 토지는 물론, 조상 제사를 위한 묘답까지도 처분했다. 이렇게 마련한 돈이 현재 시세로 수백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압록강을 건너 두 달 만에 도착한 곳은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마을. 동참하는 종들은 함께하고 나머지는 모두 해방시켰다.
그야말로 최초의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집단적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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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구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한 연합군 환영대회, 우당의 형제 중 이시영만 살아 조국으로 돌아왔다. | ▲ 우당 기념관에선 청소년에게 우리 독립운동 역사를 알려주는 교육도 하고 있다. |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널 때 우당은 뱃사공에게 뜻밖의 후한 뱃삯을 치른다. 뱃사공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자 우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이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건너게 해주시오."
그는 1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밭갈 耕, 배울 學, 모일 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학사를 통해서 이곳으로 망명해온 전 주민들을 하나로 묶고, 외부 중국과의 각종 교섭을 중계하는 공수창고 역할도 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경학사를 통해서 독립운동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이 경학사가 모체가 되어서 이곳에 온 목적인 독립군기지건설의 기초를 이루는 단체라고 볼 수 있다."(역사학자 이덕일의 책 <이회영과 젊은 그들> 중)
선생은 1910년 중국 만주의 허허벌판 서간도 지역에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여겼던 신흥무관학교와 후일 북경으로 가서는 '의열단' 등을 세우는 등 수많은 열사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들과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 그 외 독립운동 영역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데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수업료는 무료였다. 학교는 우당 가문의 재산으로 운영됐다. 기념관 한쪽에 4절까지 적혀 있는 신흥무관학교의 교가가 눈길을 붙잡았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 영절에 /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 젖 먹여 기른 이 뉘뇨 / 우리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 신흥무관학교 교가 가운데 (1절)"
우당 가문에 큰 빚 진 우리 민족
대다수의 권문세가와 양반들은 일제에 빌붙어 기득권을 지키고 일신의 안위를 누리는데 이들은 왜 편안한 기득권을 버렸을까. 그리고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살인적인 추위의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벌였을까.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리 민족은 우당 가문에 큰 빚을 졌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것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 우당의 가문은 형제와 자식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6형제 중 5형제와 많은 조카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타국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온 분이 바로 이시형 선생인데, 그는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이 됐다. 그의 집은 그대로 독립 운동가들의 전진기지이자, 휴식처이자, 사랑방이자, 회의 장소였다. 독립운동가 또는 그런 뜻을 지니고 1920년대 북경을 찾은 조선인들은 예외 없이 우당의 집을 찾았다. 그 가운데에는 소설 < 상록수>의 저자 심훈도 있었다. 그의 기록에 나타난 우당의 모습은 사뭇 눈물겹다. ◀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 후, 한 벌의 낡은 옷으로 조국에 돌아온 우당 이회영. |
"두 달 만에야 식비가 와서 나는 우당 댁을 떠나 동단패루에 있는 공우로 갔다. 허구헌날 돼지기름에 들볶아 주는 음식에 비위가 뒤집혀서 조반을 그대로 내보낸 어느 날 아침이었다. 뜻밖에 양털을 받친 마괘를 입고 모발이 반백이 된 노신사 한 분이 양차를 타고 와서 나를 심방했다.
나는 어찌나 반가운지 한달음에 뛰어 나가서 벽돌 바닥에 두 손을 집고 공손히 조선절을 했다. 그리고 노인이 손수 들고 오시는 것을 받아 들었다. 그 노인은 우당 선생이셨고 내 손에 옮겨 들린 조그마한 항아리에는 시큰한 통김치냄새가 끼쳤다." 중국 음식에 질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는 젊은이를 위해 통김치를 손수 들고 왔던 노인, 우당은 그런 사람이었다.
우당의 사상적 종착지 '아나키즘'
하지만 그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로 한국 정부는 그의 존재를 현대사속에서 배제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우당 이회영의 존재와 업적을 잘 모르게 됐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됐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우당은 상해에서 북경으로 옮겨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4년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해 활동했다. 북경시대에 우당은 의열단을 지원하고, 자신도 아나키스트가 돼 투쟁을 지원한다.
아나키즘을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였는데, '해방' '독립'이라는 지극히 민족적 과제를 안고 출발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아나키즘은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의 사상이 된 아나키즘은 '권력의 집중보다는 분권 그리고 연합'을 주장하며 '권력이나 조직, 강권에 의한 지배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우당은 소신에 따라 독립운동단체에서의 어떤 권력이나 감투를 거부했다. 아나키스트였던 그가 독립된 나라의 상을 그렸던 글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진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서 중앙정치의 기구를 구성하며, 경제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춰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 운영의 합리화를 꾀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실시해야 할 것이다."
아나키즘을 무기로 한 독립운동에 수많은 동지들이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이을규·이정규·백정기·정화암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다. 신채호·김창숙·이회영은 북경 그룹의 삼인걸이었다고 한다. 의열단과 비슷한 활동을 했던 '다물단'에는 유자명과 함께 우당의 아들 이규학이, 더 뒤에 만들어지는 '흑색 공포단'에는 역시 우당의 아들 이규창이 함께한다.
우당의 딸 이규숙은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여 만주로 건너간 우당 일가의 최연소 망명자로, 북경어가 능통해 독립운동단의 무기운반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사촌오빠 이규준과 일본 밀정을 암살한 혐의로 중국 공안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는데, 독립운동가 장해 평과 결혼한 뒤 함께 일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ojsfile.ohmynews.com%2FSTD_IMG_FILE%2F2014%2F0815%2FIE001743704_STD.JPG)
| 해방 후에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우당 일가는 2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지나온 세월이 그들 가문에게 얼마나 지난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1940년 사망한 첫째 형인 이건영의 둘째아들(규면)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 병사했고, 둘째 규훈도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귀국해 공군으로 복무하다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 우당 선생의 유품과 사진들, 김구 선생과 찍은 사진들도 보인다. |
가산을 정리할 때 가장 많은 재산을 내놓은 둘째 형 이석영은 1934년 중국 빈민가를 떠돌다 굶어 죽고 만다. 셋째인 이철영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1925년 세상을 떠났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해방을 맞은 다섯째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독재에 환멸을 느껴 사임한다. 막내인 이호영도 1933년 독립운동을 하다 온가족이 북경에서 행방불명되고 만다.
우당 이회영 일가는 그야말로 온 집안이 일제에 맞서 싸웠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시대를 통틀어도 유래를 찾기가 힘들다"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말은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이분들에 대한 존경과 찬사는 어떤 말이나 글로도 부족할 듯하다.
우당 선생의 나이 66세인 1932년, 그는 중국 다롄 항구에서 일경에 검거돼 모진 고문을 받은 뒤 끝내 순국했다. 1932년 초 우당 선생은 중국 국민당을 찾아가 교섭해 자금과 무기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해 11월, 그는 만주 독립운동 지하조직을 굳건히 하고 만주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옮겨가려고 하던 차에 검거됐다. 우당 선생과 동향인 동포에 의해 일제에 밀고돼 검거됐다고 한다.
그의 사후,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었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이후 1962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최근에야 부인의 회고록과 일부 학자들의 평전, TV 방송을 통해 선생의 삶이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극우세력 혹은 수구세력이 어쩌다 보수로 불리우게 된 시대, 선생의 삶은 진정한 보수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우당 기념관에서 쉬이 발을 떼지 못하는 이유다.
"본디 보수는 그 사회의 존경받는 사람들이 '독차지' 하는 가치다. 보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며, 솔선수범하여 타의 모범이 되고, 그럼으로써 존경과 존중의 대상이 된다. 국가 혹은 민족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지켜야 할 것을 위해선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그 강골(强骨)함이 보수의 미덕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수의 품격이다."(표창원의 책 <보수의 품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