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2. 太公이 曰 日月이 雖明이나 不照覆盆之下하고 刀刃이 雖快나 不斬無罪
(태공 왈 일월 수명 불조복분지하 도인 수쾌 불참무죄
之人하고 非災橫禍는 不入愼家之門이니라
지인 비재횡화 불입신가지문)
태공이 말하길 “해와 달이 비록 밝으나 엎어 놓은 동이의 밑은 비추지 못하고, 칼날이 비록 잘 드나 죄 없는 사람은 베지 못하고, 받을 잘못이 없는 재앙이나 뜻하지 않은 환난은 조심하는 사람의 집 문에는 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 刀刃(도인) : 칼날.
⋇ 快(쾌할 쾌. 기뻐하다) : 칼날이 날카롭게 잘 드는 것을 의미함.
⋇ 非災(비재) : 그릇된 재앙. 받지 않을 재앙.
⋇ 橫禍(횡화) : 뜻하지 아니한 재화. 뜻 밖에 당하는 재화.
⋇ 愼家(신가) : 조심하는 사람의 집.
(해설)
사람은 욕심 때문에 성공하기도 하며, 망하기도 한다. 건전하고 발전적이며 건설적인 욕심과 그 반대의 욕심은 그를 성취해 가는 과정부터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건전한 욕심의 달성을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과 땀방울 그리고 거듭되는 실패와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일어서는 끈질긴 신념과 열망이 그 모든 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반면에 그 반대의 경우는 노력도 있겠지만 음모와 지름길 택하기 등 사용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는데 정당한 노력보다는 편법과 가로채기 등의 악질적인 방법으로 성취하려 한다. 결과가 좋으면 그 과정 중에 발생한 모든 것은 용서가 된다는 가당찮은 논리를 앞세운다. 언뜻 보기에는 반대의 편이 더 성공하는 확률이 높아 보여도 그 생명은 짧은 반면에 정당한 경우는 달성에 걸리는 많은 시간을 보답하듯 그 생명이 길다.
진리란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경험과 지혜가 아무리 더해진다고 해도 본질은 더 빛을 발하게 된다. 빛이라는 것은 물체를 투과할 수 없어 그림자가 생긴다. 아무리 강렬하고 밝다 하더라도 똑 같다. 단, 반사되거나 굴절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예는 있지만. “쥐구멍에 볕들 날.”이란 속담처럼 확률적으로 매우 드물지만 한정된 공간까지 비추는 것은 가능하다.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 벌어지면 異變(이변)이라 부르며 당혹스러워 하며, 황당해 한다. 무엇인가 벌어질 것을 미리 알려주는 징조로 받아들이는데 대개의 경우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에 사람들은 불안감에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지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등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한다. 災難(재난 : Disaster)이란 어원도 그리스어의 “dus-"는 ”bad"와 “aster”는 “star”의 합성어로 나쁜 별이란 의미로 별의 파괴나 해체를 재난으로 보는 점성술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재해나 재난은 사전 예방에 중점을 둔다. 자연재해건 인위재난이건 사전에 취약요소들을 파악하고 그 요소를 보완하거나 제거하거나 새롭게 보강을 하여 재해 등이 발생하였을 때 그 피해가 없도록 하거나 최소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기준설정을 하는 각종 데이터가 과거의 사례를 바탕으로 하기에 예상치를 벗어나면(예를 들면 과거에 내렸던 최고 강우량이 시간당 80㎜이었다면 그 보다 높은 수치 100㎜로 하였는데 기상이변이 속출하여 300㎜가 내렸다면) 사전 예방은 전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함에도 예방에 투자보다 피해 복구에 더 많은 비용이 지출되는 것이 현실이다. 늘 반복되는 악순환을 보여주고 있다. 인재냐? 자연재해냐? 是非(시비) 또한 마찬가지다.
정의는 구현되는 시간이 느리다. 서로가 옳다, 그르다 하는 다툼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절차 등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잘못도 없는데 여론에 몰려 희생양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나중에는 명명백백하게 밝혀진다.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나랴.” “瓜田不納履(과전불납리)요 李下不整冠(이하부정관)”처럼 의심을 사게 되는 행동이나 장소에 있었다는 점으로도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이 있다. 늘 염두에 두고 신중하여야 하겠다.
자원입니다.
覆(덮을 복. 부)는 식사할 때 열어 놓은 뚜껑은 식사 후 다시(復) 원상태로 엎어서 덮는다(襾 : 덮을 아)
斬(벨 참)은 옛적 참혹한 거열형(車)처럼 도끼(斤)로 허리나 목을 베는 심한 형벌.
橫(가로 횡)은 나무(木)가 쓰러져 땅(黃)에 가로질러 길을 막다. 문 가운데(黃)를 가로질러 통행을 막는 나무(木).
三人成虎(삼인성호)
-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 -
전국시대 魏(위)나라의 惠王(혜왕) 때 龐葱(방총)이라는 자가 위나라 태자와 함께 趙(조)나라의 邯鄲(한단)으로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때에 방총은 혜왕에게 “만일 어떤 사람 하나가 저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했다면 主上(주상)께서는 그것을 믿으시겠습니까?(今一人言市有虎 王信之乎? : 금일인언시유호 왕신지호?”하고 여쭈었다. 왕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두 사람이 같이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二人言市有虎 王信之乎? : 이인언시유호 왕신지호?)”하고 그가 다시 묻자, 왕은 “역시 의심할 것이다.(寡人疑之矣 : 과인의지의)”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 와서 똑같이 말한다면 믿으시겠지요.(三人言市有虎 王信之乎 : 삼인언시유호 왕신지호)”하고 다시 묻자, 왕은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寡人信之矣? : 과인신지의)”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방총은 “저자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다만 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게 되면 저자에 실제로 호랑이가 나타난 것으로 사람들이 믿는 것뿐이옵니다. 소신(小臣)이 이제 떠나 한단에 가게 되면, 소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가 세 사람 정도가 아닐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夫市之無虎明矣 然而三人言而成虎 今邯鄲去大梁也 遠於市 而議臣者 過於三人矣 願王察之矣 : 부시지무호명의 연이삼인언이성호 금한단거대량야 원어시 이의신자 과어삼인의 원왕찰지의)”하고 말했다. 이 말에 혜왕은 “염려 말게, 이제부터는 내 자신의 눈밖에는 믿지 않을 것이니.(寡人自爲知 : 과인자위지)”하고 방총을 위로했다. 그러나, 방총이 떠나자마자 讒訴(참소)하는 자가 나와 혜왕은 방총을 의심했고, 후일 볼모가 풀려 태자는 돌아오고 방총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함.(於是辭行而讒言先至 後太子罷質 果不得見 : 어시사행이참언선지 후태자파질 과불득견)(출전 戰國策 魏志) ※ 龐(클 방), 葱(파 총).
國軍捕虜(국군포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보면 일본 사람들이 포로를 잡으면 몸값을 요구하고 몸값을 치루지 못하면 친척과 친지를 불러놓고 인육잔치를 베푼다는 견문을 적고 있다. 선조가 수렵민이거나 유목민이던 나라의 사람들은 포로를 잡아오면 거세를 하고 부려먹는다. 가축이 사나워지는 것을 막는 수법이 거세이기에 가축순화의 수법을 포로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이것이 포로의 코를 베고 귀를 잘라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육체 훼손으로 발전한 것이다. 일본에 있는 귀 무덤이 바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잘라간 조선인 포로의 귀와 코인 것이다. 그렇게 표시해 놓고 노예로 매매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동서양 간에 포로취급의 상식이었다. 차선적인 취급이 인질로 잡아두고 인신을 팔아서 돈을 챙기는 일이다. 병자호란 때 오랑캐들이 조선포로를 엮어 심양 남문 밖의 노예시장에 풀어놓고 조선의 가족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송환시킨 것이 그것이다. 조선 사람의 효도가 지극하다는 것을 악용하여 납치 도중 죽은 부모의 신주도 살아있는 한 사람의 값을 받고 넘겨주는 횡포를 부렸던 것이다.
돈이 없어 송환 못한 조선인 포로들은 중국 사람에게 노예로 팔려 나갔다가 몸값을 다 갚고 풀려나 같이 어울려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것이다. 지금도 요동 땅에 가면 이들이 이룩한 高麗堡(고려보)라는 지명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2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전쟁의 북한 억류 국군포로 송환문제가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동안 알려진 바는 이 억류포로들이 탄광 등 유형지에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하니 오늘날 인권시대에 노예취급의 옛날 관념에 희생당한 셈이다.
포로취급을 둔 우리 역사는 대체로 인도적이었다. 16세기의 신라 화랑 관창이 포로가 되었을 때 백제의 계백장군은 그 용기를 칭찬하고 장래를 아껴서 생환시켜 주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선비 강항(姜沆)은 왜장들에게 조선인의 포로취급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학의 가르침이 보편화하여 降倭(항왜 : 일본군 포로)를 극진한 자비심으로 대한다. 음식과 의복을 여느 장병과 똑같이 하고 경우에 따라 항왜에게 정3품 벼슬까지 내렸다.” 加藤淸正(가등청정)의 선봉장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귀화하여 3품 벼슬을 받은 金忠善(김충선)을 이야기한 것 같다.
북한에 생존한 한국전쟁 포로라면 모두가 60∼70세의 노인일 것이다. 체력이 소진된 상태이기에 인도적 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人道(인도)는 가야 오고 주어야 받는 법이기 때문이다.(이규태 코너 1996년) ※ 沆(넓을 항), 藤(등나무 등).
12-33. 太公이 曰 良田萬頃이 不如薄藝隨身이니라
(태공 왈 양전만경 불여박예수신)
태공이 말하길 “좋은 밭 일만 경이 변변치 못한 재주를 몸에 지닌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 薄藝(박예) : 변변치 못한 재주.
⋇ 隨身(따를 수, 지닐 수. 신) : 몸에 지님.
(해설)
“탈무드”에서 말하는 “물고기를 먹는 방법만 가르쳐 줄 것이 아니라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지 평생 동안 굶주리지 않는다.”가 떠올려 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는 경험을 바탕으로 더 심화되며 산 교훈으로 자리매김을 합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됩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의. 식. 주입니다. 그 중에서도 먹는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몫을 담당합니다. 옷은 입지 않아도 되고(특히, 열대지역), 집 또한 없어도 한 몸 누워 자는데 지장은 없지만 먹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 가는 것이 인생이다 라며 극단적이고 자학적인 하소연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기도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한 다양한 방식이 수많은 희노애락을 만들어 내고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의 보이지 않는 정글의 법칙이 생겨납니다. 선진국의 직업수를 보면 대략 5만종을 상회한다고 하는데, 경제가 발전하면서 1차, 2차 3차, 4차 산업으로 분류되듯이 상위로 올라갈수록 기존의 직업이 세분화, 전문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전혀 새로운 분야가 선을 보이며 각광을 받게 됩니다.
이공계통에 직업군에서(특히 IT분야) 분화되는 속도와 수는 다른 직종보다 빠르고 많다. 새로운 직업의 증가에 대한 비유를 공산품에 들어가는 부품으로 비교하기도 한다. 냉장고는 대략 5,000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지고, 자동차는 50,000개, 비행기는 백만여 개의 부품이 소요된다고 하며, 그 숫자의 증가처럼 선진국으로 갈수록 직업수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발표된 통계를 보면 대략 19,000여개의 직업이 있다 했다. 타 분야와 마찬가지로 거의 선진국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흐르는 기술자에 대한 천시풍조는 우수한 인재들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다. 블루 컬러보다는 화이트 컬러를 선호하는 취향이 사법고시 열풍과 각종 자격증 취득 및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이 몰려들어 관련학원이 만원이 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학력인플레가 심화되어 가는 추세는 직업에 대한 경계선을 파괴하는가 하면 힘든 노동을 필요로 하는 직업의 기피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중. 소기업체는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되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집중되어 농촌의 고령화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옛날 같으면 평생 동안 활용이 가능한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의 발달로 유효기간이 단축되어 계속적으로 새롭게 발전된 기술을 습득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 또한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도 피나는 노력과 자기개발에 힘쓰지 않으면 곧 사장되고 마는 진정한 프로만이 생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로부터 “열 가지 재주를 지닌 자가 배를 고른다.”했듯이 제대로 하는 것이 없게 되면, 한 가지 재주를 갈고 닦아 전문가가 된 사람보다 못하다. 라는 경고의 말이다. 자신이 지닌 기술은 잃어버리지도, 남이 빼앗아 가지도 못하지만 재물이나 물건 등은 도둑을 맞거나 남에게 넘어갈 수 있기에 우리의 선조, 부모들은 끼니를 잇지 못하는 가난 속에서도 자식공부에 목숨을 걸고 시킨 깊은 뜻이 담겨 있다.
脣亡齒寒(순망치한)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이해관계가 밀접하여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보전하기 어려움을 비유해 이르는 말. -
晉(진)나라 獻公(헌공)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세력을 넓히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虞(우)와 㶁(괵)을 수중에 넣으려 하였다. 괵을 치자면 우의 땅을 지나야 하므로 우왕에게 괵을 치러 갈 터이니 길을 내달라고 사자를 보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우나라의 현신 궁지기(宮之奇)는 왕에게 “안 됩니다. 괵으로 말하면 우의 가죽입니다. 만일 괵이 망하면 우도 반드시 따라서 망하게 됩니다. 속담에 輔車相依(보거상의), 脣亡齒寒(순망치한)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와 괵과의 관계가 바로 그렇습니다(諺所謂 輔車相依 脣亡齒寒者 其虞㶁之謂也 : 언소위 보거상의 순망치한자 기우괵지위야). 그러므로 길을 내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우왕은 여러 차례 간곡히 말하는 궁지기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와 진나라는 다 같이 周(주)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이니 어떠랴? 나는 神(신)을 받드니 반드시 신이 지켜줄 것이다.(宮之奇對曰 臣聞之 鬼神非人實親惟德是矣. 故 周書曰, 皇天無親惟德是輔 又曰, 黍稷非馨明德惟馨, 又曰, 民不易物惟德繫物 如是 則非德民不和神不享矣. 神所馮依 將在德矣 若晉取虞而明德以薦馨 神其吐之乎. : 궁지기대왈 신문지 귀신비인실친유덕시의. 고 주서왈, 황천무친유덕시보 우왈, 서직비형명덕유형, 우왈, 민불역물유덕계물 여시 즉비덕민불화신불향의. 신소풍의 장재덕의 약진취우이명덕이천형 신기토지호.)”하고 말한 후 진나라 군사의 통과를 마침내 허락하였다. 궁지기는 사태를 예감하고 일족을 거느리고 우나라를 떠나면서 “진은 괵을 치고 개선하는 길에 반드시 우를 범할 것입니다.”하고 아뢰었다. 궁지기의 말대로 진군은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를 쳐서 멸하고 우왕을 사로잡았다고 한다.(출전 春秋左氏傳 : 춘추좌씨전) (출처 네이버 블로그 돼지발톱)
※ 㶁(물이 갈라져 흐를 괵), 馨(향기 형), 繫(맬 계), 吐(들어낼 토).
촛불행진
동서고금 시인치고 촛불과 창을 시어로 쓰지 않은 시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촛불과 창은 어둠에서 빛을, 절망에서 희망을 주는 상징적 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2차 대전 중 나치수용소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던 유태인의 한 사람인 정신분석학자 프랑클은 수용소 안에서 목격한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60대의 할머니가 어디선가에서 새끼 손가락만한 초 한 토막을 주워왔다. 수용소에서 가연성인 촛불을 켤 수 없게끔 돼 있었다. 한 대도 이 할머니는 담요를 둘러쓰고 그 자기만의 암흑공간에 촛불을 켜놓고 그것을 응시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닳아가는 초를 아끼고자 이틀거리 사흘거리로 촛불을 보면서 자꾸만 줄어드는 여생의 삶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너무 오래 담요를 둘러쓰고 있길래 벗겨 보았더니 촛불은 모두 닳아 없어지고 할머니는 눈을 뜬 채로 죽어 있었다 한다. 촛불과 삶의 함수관계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맥락 될 수 있을까 싶다. 이처럼 촛불은 생명이요 희망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완충시켜 주는 幽明(유명)의 빛이기에 장례 때나 신불을 모실 때 촛불을 켠다. 촛불은 이승과 저승의 연결함이기도 하다. 또 기독교에서 촛불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촛불의 臘(납)은 성처녀로부터 태어난 청정한 몸이요 심지는 신인의 혼이며, 불빛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다. 쌍 촛대의 촛불은 그리스도의 신인 양면을, 세 갈래 촛불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지금도 가톨릭의 의식에서 신성시되고 있다. 기독교의 명절에 크리스마스… 하듯이 캔들마스라는 게 있다. 2월2일은 바로 성촉절이다. 이날은 바로 예수탄생 40일이 되는 날로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신에게 바치고자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여 사제들은 촛불을 들고 모여든 신도들을 축복하고 축복받은 신도들은 촛불을 들고 열지어 시중을 행진하면서 그 축복을 모든 사람에게 나눈다. 이 촛불행진은 유럽의 원주민인 켈트족의 명절행사가 기독교 명절행사로 수렴됐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불과 풍년의 신이 1년에 한 번 이날 밤 하강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승천한다. 그래서 각 농가에서는 신이 누울 침대 하나씩 비워놓고 촛불을 들고 이 불의 신을 맞으러 동구 밖으로 행진한다. 슈베르트는 이 촛불행진 때 부르는 민요를 주제로 하여 아름다운 가곡까지 작곡하고 있다.
이 촛불행진을 소재로 한 로버트 헨리크의 단편소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모든 사람에게 전도시키는 이 촛불행진이 어떤 때 정치적 이년의 공감력을 형성시키는 매체 - 곧 시위수단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촛불행진이 무저항의 시위수단이었음은 스페인 시민전쟁 때 유럽 각국에서 이에 동조하는 촛불행진을 했던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명동성당에서 미사 끝에 있었다던 촛불행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이규태 코너 1987년)
12-34. 性理書에 云하되 接物之要는 己所不欲을 勿施於人하고 行有不得이어든
(성리서 운 접물지요 기소불욕 물시어인 행유부득
反求諸己니라
반구제기)
성리서에 이르길 “사물(事物)을 접하는 요체(要諦)는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고, 행하여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돌이켜 자기에게서 그 원인을 구하는 것이다.”하였다.
⋇ 接物之要(접물지요) : 사물에 접하는 요점. “타인을 대하는 요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
⋇ 己所(몸 기, 자기 기. 소) : 자기가 ~하는 바.
⋇ 反求諸己(반구제기) : 돌이켜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구함. 자기 반성함을 의미함. “諸”는 어조사로 쓰임.
(해설)
대저 일이란 자체가 쉬운 일이건 어려운 일이건 간에 누군가에 의해 지시를 받고 하려고 하면 즐겁고 유쾌한 마음으로 시작하기는 어렵다. 흔히 말하길 “멍석을 깔아 놓으면 하던 놀이도 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남에 의해 강요당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하기 싫고, 꺼려하는 일이라면 오죽 하겠는가? 자신의 감정만 중시하고 당연히 남도 그러할 것이다 지레 짐작하고 무언가를 하라 한다거나 함께 하자고 할 경우 당연히 거부하거나 하는 반발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혀 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던 호의나 베풀음은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게 하여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차라리 하지 않음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내가 싫어하고 꺼려하는 것은 남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확률이 많기 때문인데, 지위라든가 등을 앞세워 그런 우를 범하기 쉽다. 당연하다 싶은 일들도 어떤 여건이냐, 처한 환경이 어떠한가? 그 일을 하여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등에 따라 많은 편차를 보이게 된다. 모든 일은 자신이 좋아하여 즐거운 마음과 즐기는 가운데 하게 되면 최상의 결과를 가져 온다. 그래서 무언가 목표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보다는 매사에 있어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그 경계를 허물고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하고 급박한 때도 있는데, 어떻게 그러한 반발이나 거부감을 극복하는가가 관건이 됩니다. 상황이 시급하여 설명도 하지 못하고 빠른 결단을 요하는 경우(대형 재난이 발생하였을 시), 즉 모두가 눈으로 위급한 상황을 확인하여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할 때에는 우왕좌왕하고 당황하여 아우성치기에 더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기 쉬워 매우 어렵다. 이러한 때 누군가 재빠른 판단으로 안전하고 빠른 피난로와 대피공간을 확인하고 이끈다면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도 차차 안정과 질서를 찾아 서로서로를 위로하며 부축하는 등 함께 대처해 가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서로 앞을 다투어 하려 할 것이다. 그에 대한 대가도 없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기에 결과에 대한 책임도 없으나 가장 소중한 생명에 대한 담보가 우선하기에 평소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던 일임에도 초인적 힘을 발휘하며 최선을 다하기에 결과에 대한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다만 좀 더 효율적이고 인간적이며 이성적인 행동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게 될 수도 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아무런 소득이 없는 헛고생만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불확실하였거나, 실행과정에 문제가 있었거나, 노력은 하였으되 헛힘을 쓴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데, 돌이켜 보면 그 문제점이 선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대개 실패하거나 잘못되게 되면 자신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많으나 실제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빨리 자각할수록 앞으로의 일에 대한 실패확률을 줄일 수 있고, 그만큼 성공할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너무 자만하지 않았는지, 너무 결과에만 눈이 멀지 않았는지, 말로만 노력하지 않았는지, 세운 목표는 달성 가능한지, 실행하는 과정 중에 생길 돌발변수에 대해 충분한 고려와 대응책은 마련되었는지 등등에 대하여 철저한 자기반성을 필요로 한다. 좋은 결과를 얻는데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도 실력이요, 그만한 준비에 대한 보답이기 때문이다. 자만하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이어서도 안 되며 오직 최선과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을 때만이 원하는 좋은 결과를 얻게 되리라.
誹謗之木(비방지목)
- 헐뜯는 나무라는 뜻으로, 백성이 임금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소원을 고하는 나무기둥. -
중국의 전설상의 어진 임금 堯(요)는 陶唐氏(도당씨) 帝嚳(제곡)의 아들로 그의 어짊은 하늘과 같고, 지혜는 신과 같았다. 요는 오로지 백성만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음에도 혹시 독선이 생길까봐 대전문 어귀에 큰 북을 걸어 놓았다(堯置敢諫之鼓 : 요치감간지고). 또 궁전 앞 다리목에는 네 개의 나무로 엮은 기둥을 세워 놓았다. 북은 “敢諫(감간)의 북”이라 이름 지었는데, 요의 정치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북을 울린 후에 자기의 생각을 말하게 하였다. 또 기둥은 “誹謗之木(비방지목)”이라 하여 정치에 불만이 있는 자는 기둥에 그 사실을 써 놓고 바라는 바를 말하게 하였다(舜立誹謗之木 : 순입비방지목). 요는 이렇게 하여 민심의 動向(동향)을 파악하여 더 좋은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고 함.(출전 淮南子 主術篇 : 회남자 주술편) ※ 嚳(고할 곡).
영부인
명성황후의 사별로 고독해진 고종황제에게 영친왕의 탄생은 큰 경사였다. 생모 엄씨는 貴人(귀인)으로 승격하고 영친왕은 순종의 세자로 책봉되자 엄귀인의 존호도 승격돼야 했다. 궁인으로서 임금의 사랑을 받는 정도에 따라 호칭이 “媛(원)→容(용)→儀(의)→貴人(귀인)→嬪(빈)→妃(비)→后(후)”로 달라진다. 엄귀인의 새로운 존호를 논의하는 각의에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李容翊(이용익)대감이 “楊貴妃(양귀비)란 존호도 있으니 嚴貴妃(엄귀비)라고 함이 어떠하오.”하고 제의했다. 당시 청나라에서 귀비 칭호는 귀인에서 嬪(빈)과 妃(비)를 뛰어넘는 3단계나 높은 호칭이다. 이용익으로서는 대단한 아부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한데 양귀비의 나쁜 이미지와 영합되어 대소 벼슬아치들과 팔도 선비들이 발칵 해 대궐 앞에 엎드려 황실을 모독한 자의 처형을 청원했다. 당시 미국인 법무고문인 求禮(구례)의 충고도 있고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사죄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다섯 차례 감형으로 방면되기는 했지만-.
호칭으로 인한 아부의 역사는 그 밖에도 심심치 않게 있어 왔다. 한말 안동 김씨 세도의 대부인 김좌근에게 羅閤(나합)이라고 불리는 나주 출신의 기생첩이 있었다. 합은 요즈음 閣下(각하)의 준말로서 원래는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등 3정승을 부르는 존칭이다. 나합은 나주 기생각하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 대단한 아부 호칭이 아닐 수 없다. 한말에 “惠堂(혜당)댁 나귀님(驢君 : 여군)은 藥食(약식)을 잘 잡수시고/ 戶判(호판)댁 말님(馬公 : 마공)은 약과도 마다하신다.”는 동요가 유행했다. 혜당 댁과 호판 댁은 안동 김씨 세도의 핵심 가문이다. 그들의 문전에는 팔도 360 고을 수령들이 갖다 바치는 뇌물 짐바리가 차례를 기다리길 여러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새치기를 하기 위해 세도집의 나귀나 말에까지 서민들은 구경도 못하는 약과, 약식을 바치고 호칭에도 공과 군을 붙여 아부를 했던 것이다.
여당의 대선 후보자가 정해지기 바쁘게 대통령 부인의 존칭인 영부인 호칭을 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영부인은 중국에서 주변 봉건국가의 원수들 부인을 존대해 부르던 호칭으로 후세에 와서는 높은 벼슬아치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보통 명사가 돼버렸다.
본뜻대로면 아부 호칭이 못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부인의 존칭이 돼 버렸기에 문제가 된다. 아부와 권력집중은 정비례의 관계에 있다. 권력분산이 민주주의의 요체라면 영부인 아부 풍토는 우리 민주주의의 정착 수준의 지표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이규태 코너 1997년) ※ 嬪(아내 빈), 閤(쪽문 합).
12-35. 酒色財氣四堵墻에 多少賢愚在內廂이라 若有世人跳得出이면 便是神仙不
(주색재기사도장 다소현우재내상 약유세인도득출 편시신선불
死方이니라
사방)
술과 색과 재물과 기운의 네 가지로 쌓은 담 안에 많은 어진 이와 어리석은 사람이 행랑에 들어 있다. 만약 세상사람 중의 그 누가 이곳을 뛰쳐나올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신선의 죽지 아니하는 방법이니라.
⋇ 堵墻(담 도. 담 장) : 담장. 담 안.
⋇ 內廂(내. 행랑 상) : 안채에 딸려 있는 행상. 몸체 동서에 있는 곁채.
⋇ 跳得出(도득출) : 뛰쳐나올 수 있음.
(해설)
인간의 욕망과 번뇌를 다스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게 없애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해탈이요, 신선이 되는 길이다. 그러나 티끌 같은 미련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인한 줄기는 계속 번져 나가기에 또 다른 미련이 줄을 지어 나타나게 된다. 그 끈질긴 생명력은 잠시 한눈을 팔거나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며 주변을 잠식하게 된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몸에 박힌 작은 가시 하나가 잠을 설치게 하는 통증을 줄 때 모든 신경은 그것에 집중하여 다른 것은 무신경하게 된다. 잠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 순간의 집중력은 대단히 높다. 이처럼 무언가 얻기 위한 노력과 그에 대한 집중력은 높지만 막상 그 결과가 크지 않으면 실망과 허탈감에 빠지게 되며 자신을 자책하고 아쉬움에 잠시 방황을 한다. 흔히 말하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관심을 두는 격이라 할까?
욕망이란 그물에 포로가 되어 휘둘리면 자신의 의지를 갖고 무언가를 이루기는 매우 힘들다.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욕망에 눈이 멀어 코앞에 무엇이 있는지 조차도 보이지 않고, 누군가 충언을 하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얻고자 하는 목표에만 집중하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술과 색 그리고 재물과 명예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각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결국은 3가지 요건에 포함된다. 그러나 가시적인 것들로 유한한 삶을 무한대로 연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뛰어 넘지는 못한다. 不死(불사)의 꿈은 아직도 유효하며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옛날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의학으로 평균수명이 높아졌지만 좀 더 오래 살고픈 욕망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과학적인 탐구에 의한 최대 수명이 확정되어 발표되지만 그를 뛰어넘고자 하는 연구 또한 끝나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IT와 우주산업으로 끊임없는 경제의 발전은 다양한 직업군을 만들어 내었고, 부의 축적방법도 고전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새롭게 등장하는 첨단산업에 걸 맞는 수단에 의한 신흥축적 방법에 의한 재벌의 탄생이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주식이다. 기존의 기술력에 새로운 아이디어로 개발되는 수많은 제품들이 홍수를 이루며 소비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아이디어가 자산이 되고 부를 창조하는 시대가 도래 하였다. 공장 없는 기업도 등장하고 블루오션이 힘을 발휘하며 기존의 산업에서 분리되어 전문화되어 자리 잡는 산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욕망의 테두리를 탈피하여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자유로움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노력이 점점 어렵고 힘들어 지는 욕망의 전차에서 하차하는 날이 언제가 될런지.
緣木求魚(연목구어)
-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한다는 뜻으로, 되지 않을 일을 무리하게 하려고 함을 이르는 말. -
전국시대에 맹자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제후들을 찾아다니던 중에 梁(양)나라를 거쳐 齊(제)나라에 이르러 宣王(선왕)을 만났다. 선왕이 맹자에게 춘추시대의 覇者(패자)였던 齊桓公(제환공), 晉文公(진문공)의 패업에 관하여 묻자 맹자는 “왕은 싸움을 일으켜 신하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이웃 나라와 원수가 되는 것이 좋습니까?”하고 반문했다. 이에 선왕이 “그게 아니고 이루고 싶은 큰 꿈이 있어 그렇소.”하고 대답하자, 맹자는 “그럼, 그 큰 꿈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되물었다. 왕도정치를 말하는 맹자 앞에서 선왕이 부끄러워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자, 맹자가 다시 “땅을 넓혀 秦(진), 초나라와 같은 대국으로 하여금 문안을 드리게 하고 천하를 다스려 오랑캐까지도 복종시키려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무력으로 그것을 이루려는 것은 마치 緣木求魚(연목구어)와 같습니다.”하고 말했다. 선왕이 “그렇게 무리한 일이오?”하고 다시 물으니, 맹자는 “예,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더 무리한 일입니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은 물고기를 구하지 못할 뿐, 재난은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이 하시고자 하는 방법은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재앙은 초래할지언정 결코 좋은 결과는 얻지 못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曰 王之所大欲 可得聞與 王笑而不言 曰 爲肥甘 不足於口與 輕煖不足於體與 抑爲 采色不足視於目與 曰 吾不爲是也 曰 然則 王之所大欲 可知已 欲酸土地 朝秦楚 彠中國而撫四夷也 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 王曰 若是其甚與 曰 殆有甚 焉 緣木求魚 雖不得魚 無後災. : 왈 왕지소대욕 가득문여 왕소이불언 왈 위비감 부족어구여 경난부족어체여앙위 채색부족시어목여 왈 오불위시야 왈 연즉 왕지소대욕 가지이 욕산토지 조진초 확중국이무사이야 이약소위 구약소욕 유연목이구어야 왕왈 약시기심여 왈 태유심 언 연목구어 수불득어 무후재)(출전 孟子) ※ 彠(자 확), 撫(어루만질 무)
시루떡
시루떡을 빚는 옛 어머니들의 禁忌(금기)와 정성은 대단했다. 떡 빚기 사흘 전부터 不淨(부정)탄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나들이를 금했고 성생활도 기피해야 했다. 떡 빚는 전야에는 沐浴齋戒(목욕재계)하고 떡을 빚을 때는 창호지로 입을 봉하고서 작업을 해야 했다. 침이 튀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뿐 아니라 입을 통해 유출되는 여자의 기운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女色(여색)을 公害(공해)로 여길 만큼 神性(신성)불가침의 시루떡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루떡의 기원이 神明(신명)에게 바치는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禍福(화복)은 신명이 지배한다는 생각은 근대화 이전의 사람들에게 통념이 돼 있었다. 그 신명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신명이 좋아하는 음식을 바치고 그 음식을 신명과 더불어 共食(공식)함으로써 화를 면하고 복을 받는 줄 알았다.
肉食遊牧民族(육식유목민족)의 신성한 음식이 羊(양)이었다면 米食農耕民族(미식농경민족)의 그것은 주로 떡이었다. 시루떡은 신명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체로서 한국 땅에 정착한 것이다. 한자로 밀가루 떡을 “餠(병)”이라 하고 쌀가루 떡을 “餻(고)”라 했다. 곧 시루떡은 “고”이며 이 한자를 뜯어보면 천지신명에 희생했던 “羔(고)” 곧 “羊(양)”자가 들어 있음만 보아도 제사음식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시루떡에 붉은 팥 고물을 층층이 까는 이유도 邪惡(사악)한 雜鬼(잡귀)를 辟邪(벽사)하기 위한 신성작업의 일환이다. 동짓날 붉은 팥죽을 끓여 집안 도처에 뿌린 이유가 그러하듯이 귀신은 붉은 것을 두려워하고 팥은 붉기에 형성된 신앙민속이다. 이렇게 팥으로 악귀를 물리치고, 시루떡에 촛불이나 기름불을 켜 善神(선신)만을 불러 들였던 것이다.
생일 시루떡에는 아들일 경우 밤을 넣어 빚는 밤 시루떡을, 딸일 경우 곶감이나 말린 감 껍질을 넣어 빚는 감 시루떡을 빚기도 했다. 밤처럼 단단하게, 감처럼 달콤하게 자라길 바라는 상징적 염원이 담긴 멋진 정신적 떡이었던 것이다. 이미 元(원)나라 때 문헌인 “居家必用(거가필용)”과 명나라 때 문헌인 “본초강목”에 高麗栗餻(고려율고), 高麗柿餻(고려시고)가 명물로 나오고 있다.
웨딩 케이크며 생일 케이크 같은 서양케이크도 본은 신의 축복을 비는 신과의 共食(공식)의식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우리 시루떡과 뿌리는 같다. 다만 한국의 시루떡이 신명에게 감사하는데 비중을 더 둔다면 서양의 케이크는 사람을 축복하는데 비중을 더 두고 있다는 데서 신성감이 덜하다 할 수 있다. 서양 것이면 뭣이건 보다 좋다는 신사대주의의 여파로 케이크가 시루떡을 몰아내고 결혼-생일-승진-개업잔치에 판치고 있으니 미구에 각종 고사며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에 까지 케이크가 파고들 기세다.
국제화 진행으로 전혀 전통이 없는 문화수용이라면 케이크도 백번 좋지만 케이크 못지 않은 양질의 전통이 있다면 전통을 되살려 누리는 것이 국제화 사회를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다. 각종 공개적인 잔치에서 근간 케이크를 밀어내고 시루떡이 제자리를 찾는 복고 경향이 늘고 있다던데 크게 장려되어야 하겠다.(이규태 코너 1991년)
13. 入敎篇(입교편)
13-1. 子曰 立身有義而孝爲本이요 喪祀有禮而哀爲本이요 戰陣有列而勇爲本
(자왈 입신유의이효위본 상사유례이애위본 전진유열이용위본
이요 治政有理而農爲本이요 居國有道而嗣爲本이요 生財有時而力爲本이니라
치정유리이농위본 거국유도이사위본 생재유시이력위본)
공자가 말씀하시길 “입신(立身)함에 의가 있으니 효도가 근본이 되고, 상사(喪祀)에 예가 있으니 슬퍼함이 근본이 되고, 싸움터에 서열이 있으니 용맹이 근본이 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가 있으니 농사가 근본이 되고, 나라를 유지하는데 도리가 있으니 후사(後嗣)가 근본이 되고, 재물을 생산함에 시기가 있으니 노력이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 立身(입신) : 세상에 나아가 출세를 하는 것.
⋇ 孝爲本(효위본) : 효도가 근본이 됨.
⋇ 喪祀(상사) : 장사 지내는 일과 제사를 지내는 일.
⋇ 戰陣(전진) : 전쟁을 위해 친 진(軍營). 싸움터. 전장(戰場).
⋇ 居國(거국) : 나라에 사는 것. 여기서는 “나라를 지킴” 혹은 “나라를 유지함”으로 해석함.
(해설)
사람으로 태어나 자신을 닦는 修身(수신)의 제일 첫걸음이 바로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여준 부모님에게 효성을 다하는 것부터이다. 무엇보다 앞서서 강조하여 “百行之本(백행지본)”이라 하였다. 바른 정신과 바른 행동을 유지하고 실천하기 위한 덕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의 화평이 있어야 비로소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치니 나라가 바로 서고, 나라가 바로 섬으로 주변국까지 그 바른 덕이 펼쳐지니 온 천하가 화평하고 활기 넘치는 기운으로 가득하게 된다. 효는 부모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 길의 모든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생활에는 하나하나마다 지켜야 할 예절이 있다.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혼란과 무질서를 막고, 절도 있고 차분하며 존중과 경애의 마음을 담아 실행하여야 한다. 슬플 때에는 슬픔을, 기쁠 때에는 기쁨을,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을, 분노할 때는 분노를, 괴로울 때는 괴로움을 함께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그 반대일 경우를 상상해 보라.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떠한 상황인가에 맞추어 그에 합당한 예를 차림이 기본 아니겠는가?
아무리 평화와 사랑을 외쳐도 사람의 욕망은 이를 왜곡하거나 코웃음 치며 망가트리려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힘이 없는 평화는 사상누각 같아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에 늘 좌불안석하게 마련입니다. 원하지 않지만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국들이 쉽사리 침범하지 못할 힘을 비축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군을 만들어야 하는데 烏合之卒(오합지졸)을 벗어나 臨戰無退(임전무퇴)의 용맹과 기상 그리고 엄정한 군기가 잡히도록 훈련되고 무장되어야 합니다. 장수는 智勇(지용)을 겸비하고 군사는 용맹하여야 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국력은 경제력에서 나오는데, 그 근본은 역시 농사에서 시작됩니다. 물길을 잡고 병충해를 예방하며 김을 매고 거름을 충분히 주어야 풍년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기본적인 힘은 왕권국가에 있어서는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의 능력에 따라 좌지우지 되었기에 그 후예의 자질과 교육은 커다란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해 군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키우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長子(장자) 우선의 선위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인척들의 모반과 외척들의 득세 그리고 환관들의 권력남용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王國(왕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사이클이 비슷함을 알게 되는데, 초기는 왕권강화를 위한 건국공신들의 숙청과 제도의 개선, 중기에는 제도의 정착과 새로운 학문 등이 꽃피우는 절정기를 맞이하다 후기로 가면 앞서 본 부작용이 두드러지며 기강의 혼란과 민심의 이반이 동반되어 멸망하는 순서를 밟아 갑니다.
모든 생산품들은 그 쓰임새와 효용도가 계절적 흐름을 타는 것과 그렇지 아니한 것으로 구분되는데 똑 같이 노력과 땀의 결실이면서도 그 가치는 천차만별이 된다. 계절적이건 아니건 간에 시장에 수요가 많으면 소진속도가 빠를 것이고 반대이면 느릴 것이다. 이를 잘 간파하여야 성공적인 생산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원칙은 변함이 없다. 다만, 그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을 제외하고는.
烏合之衆(오합지중)
- 까마귀 떼처럼 규율도 통제도 없는 많은 사람의 모임. 또는 그 같은 군대나 군세. 동류로 烏合之卒(오합지졸) -
前漢(전한) 말에 국호를 新(신)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王莽(왕망)은 정치에 실패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劉秀(유수)는 왕망의 군사를 물리치고 劉玄(유현)을 황제로 세워 한나라를 회복했는데, 반란자 가운데 王郞(왕랑)이란 자가 있어 성제의 아들 劉子輿(유자여)를 자처하며 군사를 모아 천자라 일컬었다. 이에 유수가 토벌에 나섰는데, 그의 덕망을 사모한 장수 耿弇(경감)이 유수에게로 가는 도중 부하 두 장수가 왕랑에게로 가려했다. 그러자 경감은 칼을 뽑아 들고 “왕랑이란 자는 원래 도둑인데, 스스로 유자여라 하면서 황제를 사칭하고 난을 일으켰다. 내가 장안에 가서 엄선한 정예군으로 공격하면(子輿弊賊 卒爲降虜耳 我至長安 與國家陳漁陽 上谷兵馬之用 還出太原 代郡 反覆數十日 : 자여폐적 졸위강로이 아지장안 여국가진어양 상곡병마지용 환출태원 대군 반복수십일) 왕랑의 군사 같은 오합지중을 짓밟기란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아서(發突騎以轔烏合之衆 如摧枯折腐耳 : 발돌기이린오합지중 여최고절부이) 왕랑을 반드시 사로잡을 것이다. 너희가 도리를 모르고 적과 한패가 된다면 얼마 가지 않아 일족이 몰살을 당하리라(親公等不識去就 族滅不久地 : 친공등불식거취 족멸불구지).”하고 말하였다고 함.(출전 後漢書 耿弇傳 : 후한서 경감전) ※ 莽(우거질 망), 弇(사람이름 감, 덮을 감), 轔(바퀴소리 린), 摧(꺾을 최).
설렁탕
설렁탕의 어원에 대한 설은 구구하다. 몽고말을 풀이한 “蒙語類解(몽어유해)”라는 18세기 문헌에 보면 고기 삶은 물을 수류라 했고 “方言類釋(방언유석)”에 고기국물을 한문으로는 空湯(공탕)이라 하고 청나라 말로는 실러, 몽고말로는 수루라 한다고 했다.
쇠고기 국말이밥을 곰탕이라 함은 空湯(공탕)에서 비롯됐고 설렁탕은 바로 몽고말인 수루-실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곧 실러탕→설렁탕이 됐다는 것인데 어원은 그럴싸하지만 어음에는 무리가 간다.
둘째는 중국의 乳湯(유탕 : 젖탕)이란 뜻인 奶湯(내탕)이라는 고기국이 있는데, 그 빛깔이 젖빛깔처럼 뽀얗다 하여 白湯(백탕) 또는 濃湯(농탕)이라고도 부른다 한다. 젖빛깔이나 눈빛깔처럼 희고 진하다 하여 雪濃湯(설농탕)이란 말이 형성됐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셋째는 산스크리트말인 슐라가 설렁으로 轉化(전화)했다는 설이다. 옥스퍼드 산스크리트어 사전에 보면 슐라에는 神(신)이라는 뜻과 마시는 술(酒 : 주)이라는 뜻, 그리고 고기를 구울 때 쓰는 쇠꼬챙이라는 뜻이 있다. 슐라가바하면 신에게 바치고자 쇠꼬챙이에 꽂아놓은 희생용 소를 뜻하며 따라서 슐라는 희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희생음식으로서 끓인 고깃국의 어원으로 슐라가 합당치 않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넷째는 임금이 제주가 되어 해마다 서울 동대문 밖 先農壇(선농단)에서 지내는 先農祭(선농제)때 희생하는 제사음식이란 설로 곧 先農湯(선농탕)이 설렁탕이 됐다는 설이다.
조선조의 의례절차를 적은 “春官志(춘관지)”에 보면 경칩이 지난 첫 亥日(해일)에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임금이 직접 논을 가는 親耕(친경)을 하고 임금을 비롯, 문무백관 농부 노비 거지에 이르기까지 희생음식으로 한 솥밥을 먹는다 했다. 성종 때 선농제를 즈음하여 임금에게 바친 獻詩(헌시)를 보면 이 한 솥 희생음식이 탕으로 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하여 널리 펴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치도다.”
희생음식은 그 전체가 神性(신성)이 스미어 있는지라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쇠머리며 내장이며 뼈까지도 버리지 않고 솥에 삶는 설렁탕은 절약음식이요, 또 임금에서 거지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한 솥 음식을 먹는다는 점에서 민주음식이다.
이 설렁탕이 타지방에는 없었던 서울음식이요, 또 옛 한양의 설렁탕 파는 집이 명륜동 성균관 인근에 있었다는 사실이 설렁탕의 뿌리가 선농탕 임을 뒷받침해 준다. 왜냐하면 선농제 때 희생동물과 희생음식을 다룬 것은 성균관 곁에 집단 취락 하였던 掌牲署(장생서)의 백정들이요 세상이 개명하면서 업을 잃자 설렁탕 끓여 장사를 시작했음 직 하다.
선농제의 재현뿐 아니라 그 제사음식을 구민이 나누어 먹는 求心(구심)의식은 그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받을 만하다고 보는 것이다.(이규태 코너 1993년)
자료출처-http://cafe.daum.net/sungho52
박광순선생님의 글입니다.
|